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농촌진흥운동의 추진 / 1930년대 일제의 민족분열통치 강화

몽유도원 2013. 7. 23. 22:17

제3장 농촌진흥운동의 추진 

제1절 시행 배경 63 

1. 농가경제 파탄 63 

2. 농민운동의 격화 68 

제2절 초기단계의 농촌진흥운동 71 

1. 농가갱생계획의 수립과 시행 71 

2. 농촌진흥회의 조직과 운영 77 

제3절 확충단계의 농촌진흥운동 83 

1. 확충 배경 83 

2. 농촌진흥회의 기능 강화 86 





1. 시행 배경


1. 농가경제 파탄


1920년대 말 시작된 세계적인 대공황은 193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일본자본주의 구조에 깊이 편입된 식민지의 농가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1926년 현미 1석에 약 33원이던 미가는 1930년 약 24원, 그후 계속 떨어져 1931년에는 약 15원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註1) 산미증식계획에 따른 미곡단작구조의 심화는 미가 폭락을 초래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표 2〉 농어임산물의 생산량과 시장거래액추세2)
 농어림산물의 생산량추세 시장거래액 증가추세 b/a
생산총액(a) 증가율(%) 거래총액(b) 증가율(%)
1910 221,10710050,4421000.228
1921 1,097,364496111,2392200.101
1926 1,300,547588156,8353100.121
1928 1,022,604462187,6503720.184
1930 724,227327173,1673430.239
1931 702,855317158,1393130.225
1932 831,816376179,3833550.216
1933 920,841416203,8324040.221
1934 1,020,147461238,7904730.234
1935 1,147,055518278,4635520.243
1936 1,208,911546314,3546230.260
1937 1,560,487705363,3737200.233
1938 1,574,787712409,3478110.260


〈표 2〉에 나타난 바처럼, 농산물의 상품화는 빠른 속도로 전개되었다. 농어임산물의 생산량은 1910년을 100으로 할 때 1920년대 4~5배 증가하고, 시장거래액은 2~3배로 늘었다. 또한 총생산액 중에서 시장거래액이 차지하는 비중도 1910~20년대에는 10~20%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4년 이후 농어임산물의 생산량과 시장거래액의 증가비율은 시장거래액이 생산액을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시장거래액의 증가가 생산물의 증가를 앞지르고, 총생산액 중에서 시장거래액이 차지하는 비중도 23~24%를 기록하는 등 1930년대는 상품화폐경제가 확대 일로에 있었다. 이에 일반 농가는 단순재생산조차도 유지하기 어려운 처지였다. 

 1932년 전라북도 경찰부가 조사한 세민細民의 생활상태는 당시 농촌경제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 註3) 도내 총 호수 28만 호142만명의 약 75%인 22만 호106만명가 농가였다. 농가 중 소작농은 16만 호, 세민은 11만 5천 호에 달하였다. 3월말 춘궁기 도내 세민 11만 5천여 호51만명는 전체 호수와 인구의 각각 41%와 35%를 차지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일제는 “이들의 구제와 사찰은 지방치안 확보상 가장 긴요한 문제”이며 세민의 생활안정은 “단지 도내 통치상 긴급중대한 일일 뿐만 아니라 현하 조선통치의 근간을 이루는 사안”이라고까지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註4) 세민 문제는 식민지배체제 근간을 뒤흔들 정도로 시급한 현안으로 부각되었다.


토막민의 비참한 생활


당시 전북은 전체 농가 22만 호의 약 1.4%에 불과한 지주 3,000호가 전체 논 17만 정보의 약 59%에 해당하는 10만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반면에 소작농 16만 호는 도내 농가의 72%를 차지하여 당시 전국 평균 52.8%보다 20% 가량 더 많았다. 또 소작지도 일부 경작 조건이 유리한 소작농으로 집중되어, 1명의 소작인이 20정보를 차지하는 등 심각한 경작지 편중현상을 초래하였다. 비록 농산물이 증산되었다고는 해도 지출 증가에 따라 수입은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논농사 중심지에서는 1정보당 생산비를 제외하고 60원을 수입할 수 있었다. 도내 평균은 오히려 16원 60전의 지출 초과를 유발하여 대부분 단순재생산마저 크게 위협받는 형편이었다. 註5) 농사를 지어도 적자가 되는 영농을 유지하는 방편은 고리대에 의존하는 길밖에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불안정한 농가 경영은 일부 생산자 중심으로 소작지 집중을 야기하는 주된 원인이었다. 여기서 파생된 걸식자의 증가는 치안을 위협했다. 도내 농가의 72%를 차지하여 전국 평균보다 20%를 상회하는 열악한 소작농의 존재는 치안 확보 차원을 넘어 근본적인 농업·농민대책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민의 곤궁한 생활은 아사자 혹은 자살자의 발생, 보통학교 수업료의 체납 및 체납에 의한 퇴학, 보통학교 학생 취학률 감소, 걸식 및 부랑자의 증가, 이농현상 등을 초래했다. 註6) 전북지방 상황을 정리하면 〈표 3〉과 같다. 


〈표 3〉 이농의 증감 상황7)
 군외 전출자 군내 이주자행방불명자합계
인구1931.1~410,0507,3196,55223,921명
1932.1~414,2259,7999,03533,059
호수1931.1~42,3301,7701,4855,585호
1932.1~43,4492,3852,0837,917


〈표 3〉에 따르면, 1932년 1월 이래 4월까지 군외郡外로 전출한 자는 3,449호14,225명이고, 군내郡內로 이주한 자는 2,385호9,799명이며, 행방불명된 자가 2,083호9,035명로 합계 7,917호3,059명에 달하였다. 도내 호수의 약 3%에 해당하는 사람이 이농하고 있었다. 이는 1931년에 비해 2,332호9,138명나 증가하는 등 중요한 사회적인 현안으로 부각되었다. 이들의 전출 동기는 생활곤궁이 3,282호 41.5%로 압도적이었다. 노동목적은 2,398호 30.3%, 부채를 갚고 궁핍한 경우는 1,584호 20%, 소작권 박탈은 653호인 8.2%로 나타났다. 


이렇게 생활곤란으로 이농하는 현상은 전국적인 추세였다. 내무국에서는 1935년 8월 전국을 대상으로 인구의 도시집중을 유발하는 원인을 조



사하였다. 경기도의 경우 이농현상은 매년 증가하여 1931~1934년 동안 977호에서 4,403호로 4.5배나 격증했다. 전체 이농 호수 4,403호의 65%인 3,865호가 생활빈곤에 기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註8) 


전북 도내 농가의 52%를 차지하는 세민들이 이농자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다고 보인다. 전국적으로 이러한 영세농과 이농자들은 개인적이거나 일제의 이주정책에 따라 북부지방과 만주·연해주 등지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촌경제는 1932년부터 점차 공황회복기에 들어갔다. 같은 해 작황이 좋았으며 농산물가격과 토지가격 등도 약간 회복세를 보였다. 1931년 중등토지매매 가격이 100평당 27원이던 것이 1933년 30원, 1934년 35원으로 상승했다. 註9) 농촌진흥운동은 이러한 공황의 회복국면을 배경으로 전개되었다. 1933년 3월 현재 영세농들은 종전의 극심한 공황기의 궁핍보다 약간 호전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적색노동운동과 적색농민운동이 식민지체제를 위협하는 상황에 대응하여 일제는 농촌진흥운동을 시행하였다. 1933년 3월 당시는 1932년 11월부터 시작해온 성과를 바탕으로 농촌진흥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영세농들의 동향에 대한 이러한 조사는 이후 농촌진흥운동을 추진하는데 중요한 참고자료로서 활용될 수 있었다. 영세농 대책은 면 주도의 농량대부·농촌진흥운동·민풍작흥과 근로정신의 보급경기, 농촌진흥회를 통한 직접·간접적인 구제전북·벼 종자의 배포·승입繩▲{目+入} 제조기계의 무료배포 등경북, 퇴비·녹비·면작 및 영계지도부락과 영돈지도부락의 설치·교풍회의 재건 등의 정신지도경남, 자력갱생운동의 보급·촌락에 저곡계 조직을 계획 중평남 등이었다. 註10) 이러한 시설을 담은 농촌진흥운동은 지방치안 내지 체제위협적인 세력을 억제하는데 일정하게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2. 농민운동의 격화


1930년대 초반 농가경제의 파탄과 궁핍상황에 직면하여 농촌구제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대단히 고조되는 시기에 직면하였다. 당시 합법·비합법 농민운동의 주체들은 농가경제의 파탄 상황을 어떤 형태로든지 개선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했다. 註11) 1930년대 초기에는 자연발생적인 소작쟁의와 함께 조직적인 농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소작쟁의는 1926년 198건2,745명에서 1930년 726건13,012명으로 크게 증가하는 추세였다. 농민단체도 1926년 현재 119개에서 1931년 1,759개로 급증하였다. 註12) 


1930년대 소작쟁의는 식민지 지주제가 발달한 삼남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1920년대와 달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31년에 전개된 소작쟁의의 특징은 “쟁의방법이 어느 것이나 단체행동을 취하야 쟁의의 약 7할이 통제있는 대중운동으로 단결”되었으며, 경남·경북·전북·황해 등의 대농장의 대부분이 쟁의 상태에 있었다. 註13) 이러한 대규모 소작쟁의가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던 원인은 사회주의운동의 지도적 역할 특히 적색농민조합의 조직적 지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註14) 소작쟁의는 투쟁의 조직성이 크게 강화되는 가운데 투쟁 방법도 합법적인 농민운동단체 또는 비합법단체와 연대하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농민 운동 관계 잡지


농민운동의 발전에 대응하여 일제는 경찰력을 동원하여 강력히 탄압하는 조치를 취했다. 〈표 4〉에서 보듯이 관제농촌단체 즉 농촌진흥회를 전면적으로 설치하여 농민운동의 물적 기반을 흡수해 가기 시작했다. 농촌진흥운동이 전개되면서 농민운동의 단체수는 1931년 1,759개에서 이후 1,351개로 줄었다. 반면 20여 배 이상이나 많은 관제단체29,383개가 전국적으로 조직·운영되기에 이르렀다. 농민운동단체는 1931년 1,759개를 최고로 하여 점차 파괴되거나 관제단체에 흡수·개량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1931년 5월경 함경남도 경찰이 마련한 ‘특별취체대책特別取締對策’은 시기와 내용을 달리하면서 전국적인 규모로 강행되었다. 註15) 농촌진흥운동과 특별대책에 따라 적색농민조합운동은 격파되거나 지하로 잠적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표 4〉 농민운동 단체의 추이16)
 농민단체비고
단체수단체원수
1926119-코민테른 12월테제발표
1928307-전조선농민조합 조직
1930943-신간회 해소
19311,759112,103농촌진흥운동 전개
19321,394110,963관제농민단체 29,383개
1933공산주의106공산주의18,825
민족(공산)주의1,096민족(공산)주의49,544
온건단체149온건단체19,213
1,35187,282


한편 1930년대 적색농민조합은 본부→지부→반으로 이어지는 체계적인 조직망을 점차 확립해가고 있었다. 특히 각 운동조직은 촌락 단위의 비공식적이고 자발적인 조직을 운동조직의 하부조직망으로 흡수하여 농민동원의 기본적인 연대집단이 되는 반班조직을 강화하였다. 註17) 적색농민조합운동의 하부조직이 촌락과 같은 농민들의 생활터전에 토대를 두고 농민들의 불만을 흡수하면서 기반을 확대하여 나갔다. 

일제는 이에 대응하여 직접적인 탄압책을 강행하는 한편 농민들의 경제적 요구를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 농촌진흥운동의 촌락 단위 실행조직인 농촌진흥회를 급속히 설치하였다. 일제는 종래 군·면에 1~2개씩 설치하던 모범부락정책이 아니라 전국의 촌락에 통제망을 구축하여 농민운동세력의 농민을 포섭할 가능성을 차단하려고 노력했다. 註18) 나아가 저들은 전시체제를 대비하는 차원에서 농촌질서를 재편하는데 골몰하기에 이르렀다. 




2. 초기단계의 농촌진흥운동


1. 농가갱생계획의 수립과 시행


만주사변을 둘러싼 국제적 고립의 심화와 경제공황의 충격으로 대내외적 긴장감이 증폭되는 계기를 맞았다. 일제는 식민지체제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일환으로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했다. 우원일성宇垣一成 총독은 1932년 7월 도지사회의에서 이 운동의 취지와 방침을 밝히는 한편 총독부 사무분장규정을 개정하였다. 註19) 9월과 10월에는 총독부와 각 도·군도·읍면에 농촌진흥위원회를 설치했다. 


조선총독부농촌진흥위원회는 농촌진흥운동의 최고 지도기관으로,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고 10개 국의 국장을 위시하여 문서과장·지방과장 등 관계 과장, 기타 조선총독부 촉탁 등을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도 이하 위원회의 장은 도지사·군수·도사島司·읍면장과 같이 지방행정기관의 장이 맡았다. 위원은 해당 행정기관의 직원과 관변단체의 장·학교장·지방유식자 등이 참여하였다. 이로써 농촌진흥운동은 조선총독부→조선총독부농촌진흥위원회→도 농촌진흥위원회→군·도 농촌진흥위원회→읍·면 농촌진흥위원회로 이어지는 계통적이고 전국적인 조직체계를 마련했다. 註20) 

지도기관이 지방행정 계통을 따라 설치된 점은 농촌진흥운동을 전국적인 수준의 조직 운동으로 전개시키는데 주된 조건이었다. 면의 농촌진흥위원회는 촌락 단위 농촌진흥회를 직접 지도하여, 면→농촌진흥회로 이어지는 농촌진흥운동의 말단 실천망을 구성했다. 면 아래 행정보조기구인 동리의 구장이 대체로 농촌진흥회의 회장을 맡는 등 촌락은 물론 각 농가에까지 관의 지배력을 확장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일제는 1932년 11월 10일을 기해 물심양면의 운동으로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종래 일제의 정책이 ‘사상적·종교적·문화적으로 분산적·비조직적’이었다면, 농촌진흥운동은 전체 농촌과 농민을 대상으로 관의 강력한 지도와 조직력을 총동원하여 다분히 ‘국민운동’의 색채를 띠면서 나타났다. 註21) 1932~1933년 초까지 일제는 농민의 자각·자력으로 경제 갱생의 가능성을 선전하면서 이에 대한 사회적 참여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주력했다. 조선총독부 각 국의 국장들은 농촌진흥운동의 전개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전국을 나누어 순회했다. 결과는 12월 24일 조선총독부에 보고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1933년 3월 7일자 정무총감의 통첩이하 3월통첩을 각 도지사에게 하달했다. 농촌진흥운동이 촌락 혹은 단체를 대상으로 전개되었다. 註22) 

일제가 농촌진흥운동을 통해 이전과 달리 농촌과 농민을 관의 통제 아래 두고자 했던 만큼 일반적·공동적·촌락적 사업보다 농가의 갱생을 강조했다고 해서 공동적 사업 내지 활동의 필요와 훈련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연극회 광경


식민지권력은 먼저 공황기의 혹심하게 피폐한 경제 상태를 다소 회복시켜 농민들에게 어느 정도 갱생의 가능성을 심어 줌으로써 내적 동기를 유발시켜야 했다. 이에 따라 개개 농가의 갱생계획을 수립하였고, 갱생계획에는 경제방면과 함께 정신방면을 포함시켰다. 즉 일제는 개별 농가에게 경제 완화의 가능성을 느끼게 함과 동시에 일본정신을 체득한 ‘건전한 국민’으로서 갱생을 목표로 삼았다. ‘3월통첩’에서 지적하는 공동사업은 어느 정도 개개 농가에 대한 통제력이 관철된 뒤에 본격적으로 가동되어야 할 정책이었다. 개개의 농가에 대한 통제력이 관철되지 않은 단계에서 공동적 단체사업의 치중은 사업을 위한 사업에 그치고 말았다. 식민지정책의 최말단 대상인 개개 농가는 여전히 통제 밖에 있기 때문이었다. 


‘3월통첩’에 따라 농촌진흥운동은 1933년을 제1차로 1개 면에서 1개 지도부락을 선정하고, 지도부락에서 ‘갱생’을 필요로 하는 지도농가에 대해 현황조사를 실시하도록 했다. 註23) 현황조사서에 기초하여 농가는 식량충실·수지개선·부채정리의 3대 목표를 중심으로 농가갱생5개년계획을 작성·실행하였다. 당시 호戶 단위 지도는 지도의 곤란 등을 이유로 많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강행되었다. 호별 지도는 개개 농가를 직접 파악하여 ‘주도면밀하고 간절 정녕한 지도’ 즉 정책을 농민의 생활 속에 관철시키기 위함이었다. 註24) 


일제는 면직원 등 말단 실무를 맡은 지도원에게 농가의 현황조사를 직접 청취하여 파악하도록 했다. 현황조사는 “1가家경제 상태의 … 가장 깊숙한 곳에 들어가서 사생활 방면에까지 조사”하는 것이고, 이에 기초한 계획서는 농가의 “침식·기거에서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생산소비 모든 방면”을 간섭하면서, 행동 하나까지를 ‘반성’하도록 작성하였다. 즉 계획서는 “일가 생활의 전반에 걸쳐 표면상 일대 기반羈絆을 가하는” 수단이었다. 註25) 이러한 계획서는 ‘종래 산만한 농가 생활’을 “근본에서 다시 세운다”는 방침이었다. 註26) 현황조사와 계획서는 영농과 관련하여 재배작물의 종류와 그 변경·면적의 증감·농법 개량 등 농업정책을 관철시키고, 또 파악된 노동력은 당시 북부지방 개발사업과 만주개척지 등으로 이주시킬 수 있는 자료로 활용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조사와 계획 작성에 대한 효용성 여부는 비판받았지만, 일제는 1938년에 간략한 작성 방침을 정하였을 뿐 계속 강행하였다. 註27) 


식민지지배의 궁극적인 목표는 개인까지 파악·통제하는데 있었다. 이에 따라 농촌진흥운동은 농가갱생계획을 중심으로 개개 농가를 체제내로 포섭하려고 했다. 농가의 구성원들은 호 단위로 촌락과 촌락조직을 매개로 외부 사회와 연결되었다. 촌락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호별 대표세대주·호주들로 이루어졌다. 일제는 개인에 대한 규제를 호대표戶代表를 통해 관철시키려는 입장이었다. 국민총력운동 단계에서는 호 아래 개인까지 조직적으로 파악·관리하기에 이르렀다. 일제가 기본적으로 가부장적 가家를 단위로 개인을 통제하려는 의도는 ‘1국國1가家’의 관념에서 천황제 국가체제의 관철 즉 식민지통치의 완성을 목표로 했다. 註28) 


지도부락의 지도농가는 30~40호를 표준으로 설정되었다. 30~40호란 해당 촌락의 전체 호수 중에서 이른바 갱생 3대 목표의 어느 하나라도 해당되는 농가의 숫자로 전체 농가 중 일부만이 지도대상이었다. 註29) 지도대상 농가도 가능성이 있는 비교적 상층 농가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해당 연도 지도대상 농가로 선정된 호수 중 중간에 이탈하는 경우가 있을 때는 그 수를 계속 보충하면서 일정한 수의 지도대상 농가를 확보한다는 방침이었다. 註30) 


5개년 계획을 수립하지 않은 비지도농가도 일반적인 장려사항을 농촌진흥회를 통해 실시하도록 규정하였다. 註31) 1935년에는 30~40호의 기준을 철폐하는 등 약간 변경되었다. 지도대상이 될 수 있는 농가는 모두 갱생계획을 수립하고, 계획이 필요하지 않은 농가 즉 중류 이상자도 현금수지가 불균형해질 우려가 있다고 하여, 갱생계획에 준하여 지도하도록 했다. 해당 지도부락의 전체 구성원으로 지도의 범위를 확대하면서 경제·정신의 지도 중에서도 특히 정신방면의 지도를 통해 전체 촌락민의 통일된 갱생의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하였다. 註32) 


농촌진흥운동은 물론 농가갱생5개년계획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실행사항 중의 하나가 퇴비제조였다. 퇴비제조는 많은 퇴비의 살포로 농산물을 증산하고자 하는 의도와 함께 근로정신·감사보은의 마음을 주입·심화시키는 유효한 수단이었다. 註33) 퇴비의 원료는 소와 돼지 등의 사육장에서 나온 퇴적물에다 산과 들의 잡초 등 아무 것이나 사용할 정도로 다양하였다. 어떤 것이든지 버리지 않고 활용하여 퇴비를 만드는 과정에서 ‘천물天物’에 대한 감사보은의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퇴비제조와 같이 주변의 작은 작업에서부터 느낀 감사보은의 마음은 영농과 생활 전반에서 실천하도록 유도했다. 註34) 일제하 감사보은의 궁극적인 대상은 천황이었기 때문에 심성의 강조는 천황숭배의 감정으로 조선인을 체제순응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정지 작업의 성격을 띠었다. 경제갱생을 위해 표면적으로 내건 ‘생산의 증수’·‘잉여노동력의 소화’·‘생산물의 처리’·‘생산비의 체감’·‘생활비의 절약’ 등의 시설 사항 등에는 이상과 같은 ‘정신적 기조’가 깔려 있었다. 


가마니 중심의 부업수입은 영세농일수록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높았다. 평안북도 맹중리 금융조합의 구역에서 동이동東二洞은 전체 136호 중 가마니를 짜는 호수 130호였다. 가마니 1매를 짜는데 필요한 짚의 구입 비용은 약 4전이고, 완성품은 최저 13전에 판매되었다. 하루에 5매를 짤 경우에는 약 40전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촌락민들의 수입에서 가마니 부분은 전체 농가를 대상으로 볼 때, 13.4%를 차지하여 매우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소작 세농의 경우는 66.2%로 농가의 생계유지에 거의 결정적인 요소나 마찬가지였다. 註35) 


농민들이 농촌진흥운동에 부분적으로 편입될 수 있는 내적 동기는 여기에서 부분적이나마 찾을 수 있다. 일제는 이러한 갱생의 가능성에 ‘강한 신념’을 갖게 하고, “이신념를 신앙으로까지 유도”하고자 했다. 註36) 농촌진흥운동이 전개되는 동안 이른바 심전개발운동을 통한 종교적 분위기 조성은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부업을 통한 경제적 갱생의 가능성은 식민지 농업구조의 기본 모순인 지주소작관계를 근본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상황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註37) 1930년대 농가경제의 상품화의 진전 속에 농업경영의 규모를 확대할 수 있었던 가능성은 당시 일부 농가와 촌락에 한정되었다. 


2. 농촌진흥회의 조직과 운영


일제는 일본의 모범부락우량부락을 모방하여 1920년대 초부터 ‘사상선도’나 ‘지방개량’이라 구실로 사회질서를 재편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모범부락을 설치했다. 모범부락은 어느 정도 가능성이 예상되는 촌락을 선정하여 관의 보조금과 집중적인 지도로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다른 촌락을 분발시켜 체제순응적으로 재편해 가려는 정책이었다. 


모범부락은 정책의 시범적·선전적 거점으로 초기 통제정책에서는 어느 정도 유효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전국적으로 촌락을 통제하는데 한계를 드러내었다. 또한 모범부락정책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즉 촌락측에서는 모범부락이라고 하여 관의 간섭이 심할 뿐만 아니라 다른 촌락에 비해 경비와 노동력의 부담이 많아 반발하기도 했다. 평북 운산군 동신면 성지동은 모범동模範洞으로 지정되어 부담이 증가하자, 이를 감당하지 못한 농민들이 다른 동리로 20호나 떠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성지동은 동약洞約으로 관공리 교제비를 폐지하기로 결의·실행하였다. 註38) 


1930년대 일제는 식민지배체제를 전면적으로 재편해야 하는 상황에서 모범부락정책과는 다른 농촌정책을 마련해야 했다. 다수 촌락과 민중을 상대로 일일이 모범부락식으로 보조금을 지급하고 지도할 수 없었다. 註39) 모범부락이라 하더라도 그 시설이 촌락 단위의 사업에 치중하여 개개 농가에 대한 지배력은 미약했다. 1930년대 농촌통제는 종래의 모범부락과 같은 촌락조직을 전면적으로 확대·실시한다는 점에서는 연속성을 지닌다. 다만 개개 농가에 대한 파악이라든가 촌락조직의 정비와 그 권한의 강화 측면에서는 엄밀하게 구별되는 정책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한편 농촌의 기층 단위인 촌락과 각 호를 잘 파악하기 위한 적당한 조직이 필요했다. 촌락 단위의 농촌진흥회는 면 아래 말단에 대한 지배력을 관철하는 보조수단으로 등장하였다. 농촌진흥회를 촌락 단위로 설치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註40) 


〈표 5〉 신동리·구동리와 갱생지도부락의 상황
 면수신동리구동리자연촌락
신동리수1개 동리당 호수1개 동리당 구동리수구동리수1개 동리당 호수자연촌락 수(1939년경 촌락 수 a)1939년 갱생지도 부락 수
경기2482,7301041.95,135557,800(7,479)2,563
충북1061,517992.53,728403,695(3,695)1,342
충남1752,250933.37,525286,122(6,448)2,409
전북1881,7781434.07,166355,379(5,680)2,739
전남2543,0881273.310,1843810,089(7,599)2,929
경북2723,2281202.37,427526,822(7,916)2,807
경남2462,5841331.94,888707,428(7,220)2,782
황해2212,0681281.93,884688,026(8,146)3,369
평남1471,938901.63,028584,572(4,513)1,659
평북1931,4811542.13,038754,594(4,594)1,748
강원1761,9711131.63,087725,104(4,950)2,119
함남1392,940751.13,279674,141(3,947)1,427
함북817101412.11,476681,092(1,320)619
합계2,44628,2831142.363,8455174,864(73,507)28,512

출전 : ① 면·신동리·구동리의 수와 호수는 조선총독부, 『朝鮮の聚落(前編)』, 536·665~666쪽. 

② 자연촌락의 숫자는 조선총독부, 『農村振興運動の全貌』, 161쪽 ; ( )는 조선총독부, 『朝鮮に於ける農村振興運動の實積』, 1940, 36~37쪽. 

③ 갱생지도부락 수는 조선총독부, 『朝鮮に於ける農村振興運動の實積』, 36~37쪽. 

비고 : ① 자연촌락수 74,864개는 농촌진흥운동 초기까지 일제가 파악한 신동리 아래 포함된 농어촌 전체 촌락수이다. 여기에는 구동리를 기초로 하되 그 하위 자연촌락도 포함되었다. 

② 1939년경 자연촌락이 이전보다 증가하여 75,319개이고, 이 중 농촌지역의 촌락수가 73,507개이다(조선총독부, 『朝鮮に於ける農村振興運動の實積』, 35쪽). 1939년 4월 현재 촌락 73,507개에 설치된 지도부락은 28,512개이다.


첫째, 영농을 비롯하여 생활 등을 개선하는데, 촌락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관철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농민이 촌의 분위기에 초연할 수 없는 점에 착안하여, 고치거나 시작하기 어려운 것을 개별보다 집단을 대상으로 지도하면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의 통제와 함께 촌락적 공론·제재의 방법을 이용하여 행정력을 침투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둘째, 농업경영은 본질적으로 협동이 필요하며, 촌락조직의 설치는 농업경영과 농촌의 발전을 위해 유용하다는 것이다. 셋째, 촌락 단위로 하면 면의 규모가 매우 넓어서 공적인 힘이 미치기 어려운 곳에, “주민 자연의 자치가 퍼져 나가므로 치자 피치자의 관계가 원활하게 된다”고 한다. 즉 일제는 농촌진흥회를 매개로 촌락사회의 자치력을 밖으로 확장시켜, 강제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농민들의 자치 형식으로 정책을 용이하게 침투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촌락적 자치를 활용하면 폭력과 처벌 행위의 부담을 줄이면서 농민들을 권력의 의지대로 동원하는데 유효하다고 보았다. 註41) 

 

진흥위원회 요강





일제는 1914년 구동리舊洞里의 통폐합을 단행하면서 구동리 아래 하위 촌락까지 파악하여 이를 분할·재편성했다. 구동리는 63,845개이고, 자연촌락은 농촌진흥운동의 실시 당시 74,864개였다. 註42) 


숫자의 차이는 ‘자연촌락’의 수치에 새로 조성된 촌락도 포함되어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는 일제가 촌락에 대한 파악을 매우 한층 세밀하게 진행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일제는 농촌정책을 용이하게 실행하기 위해 가급적 ‘생활에 입각한’ 조직을 설치해 갔으며, 그 과정에서 점차 ‘구동리’로 구역을 조정해 갔다. 註43)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농촌정책의 입안에 크게 관여했던 팔심생남은 ‘부락’이 정책의 ‘공고한 실행단위’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이 방침을 추진하면 할수록 “그 이상은 실현”된다면서 ‘구부락舊部落’을 단위로 하지 않으면 “목적 수행은 곤란”하다고까지 했다. 註44) 일제는 촌락 통제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농촌진흥운동을 계기로 이를 적극적으로 정책화하였다. 농촌진흥운동은 촌락의 자율적인 공동체 질서를 적극 활용하여 농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형식에 중점을 두고 진행되었다. 이는 관 주도성이 강하고 보조금과 같은 외적 유인을 제공하면서 진행했던 모범부락정책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농촌진흥회는 지도부락을 중심으로 점차 전체 농촌을 대상으로, 대체로 구역내 호수의 대부분을 망라하여 조직되었다. 농촌진흥회는 1920년대 부분적으로 설치되었던 기존 진흥회·갱생회·교풍회 등과 같은 관제조직을 개편하는 방식으로 빠른 속도로 구축할 수 있었다. 註45) 구역내 재래의 자생적인 계契·조합 등을 철폐 혹은 통합해가며 이들 단체의 사업을 농촌진흥회로 대체시켜 나갔다. 


농촌진흥회장은 그 지역의 명망가로서 촌락을 이끌 만한 자나 구장을 비롯하여 자산가 혹은 갱생에 성공하여 중견인물이 된 자가 많았다. 註46) 면의 세포 행정구역인 동리에 있는 구장은 면과 농가 사이에서 행정사무를 공작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농촌진흥회장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정책이 구장과 농촌진흥회를 통해 각 호에게 도달될 수 있도록 중개 역할을 하였다. 즉 구장을 중심으로 동리 단위로 보조를 맞추고 이러한 농촌진흥회를 매개로 면의 행정력이 관철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농촌진흥회에는 대체로 회장·부회장을 중심으로 몇 명의 실무 간사가 있으며, 각각 특기를 발휘하여 생활개선·농사개량·부채정리 등의 업무를 맡았다. 회원인 농민들은 때로는 5인조 단위로 편성되고, 간사들이 조장을 겸하기도 했다. 또 농촌진흥회의 하부 단체로 부인회와 청년회 등이 조직되었다. 농민들은 농촌진흥회의 조직 내 지위와 역할에 따라 자신의 위치가 정해졌고, 이전의 동회洞會를 대신한 월례회는 합의·결정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일제는 농촌진흥운동 단계에서 농촌진흥회를 작동시켜 농가의 일상에까지 파고들어 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농촌진흥회를 두고 일제는 ‘도치道治 말단末端의 지도단위’로, 이를 조장하는 것이 ‘도치道治 선양의 근본’으로 인식하면서 지도부락뿐만 아니라 전체 촌락을 대상으로 이를 설치해 갔다. 1940년경에는 전체 촌락의 약 82%에 농촌진흥회를 구축하여 일제는 거의 농촌사회를 조직하여 통제하고 있었다. 註47) 

  


3. 확충단계의 농촌진흥운동


1. 확충 배경 


농촌진흥운동은 1933~1934년 2년간의 시험단계에서 일정하게 갱생의 분위기를 조장하고, 농촌·농민들에 대한 지배의 기반을 마련한 뒤 1935년부터 확충단계1935.1~1937.7에 들어갔다. 조선총독부는 1935년 1월 갱생지도부락확충계획을 발표하여 1947년까지 전체 촌락을 지도부락으로 선정하여 갱생계획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註48) 또 농촌진흥운동으로 어느 정도 사상계에 대한 지배력이 확대되었다고 판단하고, 이를 전면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별도의 정신운동으로 심전개발운동을 전개하였다. 


1935년부터 시작되는 농촌진흥운동의 확충계획은 지도부락의 전국화·지도농가의 전면화를 지향하였다. 확충하려는 촌락의 숫자에 비해 관의 지도력은 인원과 경비면에서 일정한 한계를 드러내었다. 일제는 민간의 중심인물으로 관의 지도망을 보강하여 지배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이러한 민간협력자의 이용·강화와 함께 농촌진흥운동도 농민의 ‘자치’나 ‘자율’로 추진시키려는 의지를 재차 표명했다. 중심인물은 식민지권력과 농가를 연락하면서 농가의 갱생계획에 따라 ‘가사·가정·영농 등 모든 부문’을 알선·지도하였다. 나아가 식민지권력은 이들 중심인물의 주도로 “부락민의 공려조직을 구체화”하고 촉진하여, 관의 지도를 떠나 촌락을 ‘자율 자치의 공동체’로 건설하려고 했다. 註49) 전체 농민을 대상으로 행정의 침투를 확대하는 방안은 문맹퇴치였다. 1930년대 관변야학 성행은 이와 같은 식민지배정책과 맞물려 있었다. 보통학교 학제를 단축한 간이학교簡易學校운영도 문맹퇴치를 통한 ‘충량한 황국신민’ 육성을 위한 식민교육기관이었다. 註50) 


자율·자발성 강조는 식민지 행정의 강제적 관철에 따르는 부담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선정된 지도부락에는 보조금 등의 지원이 있었다. 농민들은 지원에 따라 움직이는 사례도 많아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이러한 방식을 감당할 수 없었다. 농촌진흥운동이 확충단계에 이르면 종래의 모범부락 정책은 거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註51) 


농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조장하기 위한 확충단계에서는 이전보다 한층 촌락협동체·촌락자치체를 강조하였다. 촌락의 협동을 유도하는 방안은 1935년 이후 1934년까지 적용하던 지도농가 30~40호의 제한 철폐로 이어졌다. 이로써 식민지권력은 그동안 동일 촌락에서 갱생계획 실시 농가와 실시하지 않는 농가 사이에 “분위기가 융화되지 않아, 공동공려共同共勵를 저해해서 갱생계획수행에 많은 지장을 초래했던 점”을 없앨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註52) 단위 지도부락의 구성원이 하나도 이탈하지 않은 상태에서 촌락의 결속력을 조성한 뒤 이를 행정력의 확대에 활용하려는 계획이었다. 


농촌진흥운동이 확충단계로 들어간 이후 경북은 종래 20호 내외의 지도농가를 전체 호수로 확대하여 구역 내 전체 농가는 갱생계획 대상자가 되고, 이들도 하나의 공려조합共勵組合을 조직하도록 했다. 이전의 농촌진흥조합과 명확히 구별하면서 지도부락에 대한 지도력을 집중시키고자 했다. 註53) 평남은 1935년 이전부터 관의 지도력 부족과 지도부락의 증가에 대비하여, 갱생계획 5개년 중 4년째부터 관의 지도를 떠나 농민이 자주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註54) 


지도부락 확충의 목적이 지배력의 확대인 만큼 호별 파악과 통제가 전제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진행 상황은 관련 지도자들이 실정을 무시하고 성적을 올리는데 급급하여 많은 폐단을 야기하였다. 즉 현황조사자와 계획수립자의 분리, 호별 갱생보다 공동적 시설 중심의 정책, 실적조사 기입상 가공적 숫자의 나열 등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현황조사와 계획수립의 문제점과 함께 농촌 피폐의 현황·원인 등에 대한 추상적이고 단편적인 보고에 기초하여 농촌진흥운동을 추진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註55) 농촌진흥운동을 통한 농촌과 농민에 대한 장악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10년의 단기간에 지배력을 전체 농촌으로 확대하려고 농촌진흥운동을 확충했고, 중심인물의 활용을 중시했다. 개개 농가에 대한 지도방침을 거듭 강조하는 가운데, 약화될 수 있는 개개 농가에 대한 지배력을 단체=촌락의 강화로 메꾸고자 했다. 그러나 1935년 확충단계의 농촌진흥운동의 방침은 이미 농가별 갱생지도에서 촌락 단위의 지도로 전환되고 있었다. 註56) 


2. 농촌진흥회의 기능 강화


농촌진흥운동 아래 관 주도의 조직화가 가능했던 요인은 ‘위로부터의 설치’를 지적할 수 있다. 이와 아울러 농민측의 내적 동기에서도 원인을 찾아볼 수 있었다. 첫째, 앞에서 지적했듯이 조직의 단위는 촌락이었다. 둘째, 농촌진흥회의 사회적 기능이다. 소작 빈농의 입장에서 볼 때, 일시적으로 여러 일손을 필요로 하는 농업 경영의 속성상 또는 상품화폐경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개개 농가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공동체적 관계가 필요했다. 종래 농가경영의 유지에 밀접히 기능을 했던 촌락의 질서는 상품경제화의 진전에 따라 변질되고 있었으나, 많은 부분에서 그 기능을 여전히 발휘하고 있었다. 농촌진흥회가 촌락의 사회적 기능을 거의 흡수하는 형태로 기반을 확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로서는 생존유지를 위해 이러한 조직에 편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註57) 여기서 관의 농촌조직화 정책에 대한 농민들의 내적 계기가 적극적 혹은 ‘비자발적인’ 형태로 존재했다. 셋째, 관의 지원에 대한 기대에서 혹은 지역의 이해 관철 내지 의사 전달의 수단으로 농촌진흥회를 활용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농촌진흥회는 행정보조기구로 지역에 따라 그 명칭과 하부조직의 구조 및 활동 등에 다소 차이가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거의 비슷한 활동에 치중했다. 농촌진흥회장이 구장을 겸하고 있는 경우, 면의 지시 사항을 촌락을 순회하여 주지시키고, 농가를 대신하여 관의 사무연락을 맡아 처리하기도 했다. 경북은 1933년도 면의 예산편성을 고쳐 농촌진흥조성비 항목을 설정하여 면경비面經費의 약 1할을 배당했고, 도비道費에서도 조성비 2만 1천원을 배당해 놓고 각 면의 재정상태에 따라 보조하였다. 이로써 도내 각 면의 농촌진흥조성비는 약 20만원에 이르렀고, 이런 조성비는 “행정의 말단에서 가장 지도를 필요”로 하는 사항과 농촌 현상에 비추어 “적극적으로 장려 조성할 필요”가 있는 부문에 대해 농촌진흥회를 단위로 교부되었다. 註58) 이와 같이 농촌진흥회가 도와 면의 보조금을 받고 있다는 점과 충남의 공려조합 간부를 군수와 면장이 임명한다는 사실은 농촌진흥회가 면의 지시와 통제 아래 있는 행정보조기구임이 분명하다. 


농촌진흥회의 설치 과정은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화전리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화전리는 구동리가 그대로 1개 신동리로 된 경우이다. 구동리 화전리에는 대화전리大花田里·소화전리小花田里라는 2개 하위 촌락이 있었다. 화전리는 구동리의 하위 촌락이 ‘자연부락’이 되었고, 이 ‘자연부락’을 단위로 농촌진흥회가 설립되었다. 구동리 63,000여 개와 자연촌락 74,000여 개 사이의 숫적 차이는 이렇게 구동리 아래 하위 촌락이 관치의 단위로 파악됨으로써 증가한 데 기인한 것이다. 화전리 호수는 73호인데 1932년 11월 15일 발회식에 그 중 68명이 참여하였다. 고양군 농촌진흥위원회 위원인 군수와 연희면장·신도면장·보통학교장 등이 참석했다. 


『권업예규록』


발회식은 신도면장의 인사에 이어 도지사 유고의 낭독·취지 설명·회칙 설명·구역 설정·서명·회장 추천·간사 지명·폐회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어 군수와 서장의 훈시가 있었고, 경찰서장은 특히 “금일부터 여러분 자신의 번영을 위해 이러한 훌륭한 진흥회를 조직한 데 대해서 마음으로부터 이를 후원해 마지않는다. 그러나 만약 뜻에 반하여 회의 규약을 무시하고 혹은 중상하고 회의 진흥을 방해하는 일이 있을 때는 당국으로서 엄중히 단속할 방침”이라고 ‘의미심장한’ 훈시를 하였다. 註59) 


농촌진흥회는 일정한 규약으로 화전리의 경우처럼 회원들을 규제하였다. 특히 경기도에는 ‘농촌진흥회약속農村振興會約束’ 註60)이 있었다. 부영문일富永文一은 1923년 조선총독부 사무관으로 있으면서 율곡의 향약과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에 특히 관심을 가지고 향약에 대한 조사 연구의 결과를 발표했다. 註61) 그는 1932년 함경북도의 지사 시절에 이미 ‘관북향약’을 도민의 정신통제 수단으로 구사한 바 있었다. 註62) 1934년 2월 경기도지사로 부임한 그는 정신과 일상 통제의 기제로 관북향약과 거의 같은 ‘농촌진흥회약속’을 만들었다. 註63) 


농촌진흥회약속 머리말에서 보듯이, 농촌진흥회는 ‘지방민풍순화’의 수단으로 등장하여 다음에서 보듯이 생활 전반을 집단의 힘으로 규율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註64) 주요 내용은 덕행상권이라 하여 ‘진성사군盡誠事君’과 ‘수직봉공守職奉公’의 국가에 대한 충성·상하 지위의 구별·장상長上에 대한 공경·‘관공서의 명령장려’에 대한 복종·국법의 준수 등이었다. 풍속개선은 외래불량자 등의 잠입에 대한 관청 신고, 산업장려는 관의 지시를 따를 것을 강조하였다. 공공봉사와 관련해서 회원들은 월례회에 참석하여 마을의 사무를 의논하고 자신의 실천을 반성해야 했다. 읍면에서 ‘국가’의 시설에 이르는 공공사업은 회원이 항상 따라 힘써야 한다고 했다. 이는 회원들에게 관청의 사업에 대한 실행을 지도·통제하는 행정보조기구였음을 의미한다. 과실상규에서는 과실자에 대한 출회黜會와 관에 대한 신고를 포함한 제재를 담고 있었다. 규약에 따르면, 촌락의 질서는 농촌진흥회를 통해 식민지질서로 재편되도록 되어 있었다. 


농촌진흥회는 월례회를 이용하여 회원들의 결의 형식을 거쳐 집단의 무언의 감시와 약속 위반에 대한 제재 기제로써 농민들의 생활을 단속했다. 때로는 경찰력의 원조를 받으면서 규약의 실천 사항을 강제하였다. 규약을 위반할 경우에는 ‘출회’ 즉 출동黜洞까지 명령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농촌진흥회에 농민이 편입하지 않으면 안되는 내적 이유나 권한을 사례를 들어 살펴보자. 


경남 합천군 초계면 대평리교풍회大坪里矯風會는 당시 일반적인 관제조직의 활동을 보여준다. 註65) 대평리의 노호용盧浩容은 면내 학교 설립자와 이사를 역임한 유력자로 대평리교풍회의 고문이자 촌락의 유지였다. 이 단체는 회관에 국기게양대와 함께 ‘국민정신작흥에 관한 조서’를 비치해 두고 매달 1일 실시되는 자력갱생기념일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읽고 ‘국체명징國體明徵’으로 정신 즉 천황숭배를 지도했다. 양력설 시행과 함께 회관에서 단체 하례도 실시하는 한편 제례도 4대 봉사의 관행을 2대 봉사로 제한하였다. 또한 동리를 7개 통統으로 나누어 통수統首의 책임 아래 농사와 생활개선을 실행했다. 이렇게 교풍회를 중심으로 농민들의 생활 통제는 공동작업 등을 통한 집단훈련이 필요했다. 공동경작지의 공동작업과 공동건초저장창고의 건설 등은 집단훈련의 한 수단이었다. 또 신호종을 두고 집회·조기 등을 위해 종을 쳐서 시간을 통제하고 규율적인 생활을 훈련시켰던 것도 그 일환이었다. 


교풍회는 하부조직인 청년회와 부인회의 보조를 받으며 각 계층을 망라하여 종래 촌락 기능의 상당한 부분을 흡수·운영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중 상평곡계常平穀契와 성미省米저금 등은 촌락 내 공제共濟 기능의 일부분을 담당했다. 이는 갱생 3대 목표 중 식량충실의 성과를 지원할 수 있는 사항이었다. 농사개량을 위한 촌락경진회는 촌락의 경쟁심을 부추기며 ‘자발적’인 참여를 자극하려는 의도였다. 월례회에서는 갱생계획 실시 농가를 위시하여 연중행사표와 가계부 등을 검토하여 반성을 이끌어 내고, 다음의 일정을 협의 실행하도록 했다. ‘일정’이란 면의 행정 일부를 ‘공공봉사’ 혹은 ‘생활개선’, ‘농사개량’ 등이라는 명분으로 수용·실시하는 문제였다. 이에 촌락은 농민들 자신에 의해 식민지질서로 재편되어 가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교풍회와 같은 농촌진흥회의 활동을 통해 일제가 의도했던 바를 좀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본의 ‘국기’는 ‘국민의지의 표시’로 게양이 중시되었다. 국기게양은 조선민중에게 ‘천황폐하’와 ‘폐하의 적자赤子’라는 군신간의 봉건적 지배관념을 계속 주입시키는 기본 요소였다. 일본은 가家의 확충으로 이룩된 국가라는 관념대가족국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의 의지를 종합하여 각 가에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註66) 일제가 가족의 단란을 강조하면서 조선의 가정이 그렇지 못하다고 비판했던 점도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또 피폐한 농촌 환경을 바꾸기 위해 당국은 화단의 설비를 장려하였다. 화단에는 ‘국화菊花’를 심어 천황의 권위를 부지불식간에 일상 깊숙이 침투시키려고 했다. 註67) 농사개량과 관련하여 공동경작지의 설치 운영은 자치 훈련과 함께 품종개량과 보급을 위한 시험장이었다. 註68) 


일제는 농촌피폐의 원인을 농민의 게으름으로 돌리고, 농사개량 등에 일손이 많이 필요하자 노동력 강화를 획책하였다. 이를 위해 농사 작업 중 점심 후 휴식시간을 줄이는 한편 점심지참을 요구하여 여성의 일손을 줄이는 대신 이를 영농으로 돌리는 정책을 실시했다. 


또한 농촌진흥회는 사적인 영역에까지 개입하여 농민에 대한 장악력을 높이고 있었다. 조혼을 금지한 규약을 위반하였다고 하여 결혼식을 무산시키기도 하고, 혼인 비용을 제한하고 초상집 마당에 금주기禁酒旗를 꽂고 문상을 통제하거나 행동이 좋지 못하다 하여 출동을 농촌진흥회에서 결의하는 등 농촌진흥회는 사적인 생활까지 간섭하고 규제하였다. 註69) 이런 사적 생활까지 통제를 받아 “자존심이 상함을 분개”하여, “세상과 적게 교섭하며 사는 것만 못하다”고 도시로 이주하기를 희망하는 사례도 나왔다. 註70) 


식민당국자는 영농과 생활 전반에 걸친 정책을 실시하면서 농촌진흥운동과 농촌진흥회를 통해 농민의 자발적 참여를 종용했다. 당시 일선의 관리들은 여전히 고압적인 자세로 구타 등의 폭행과 위협으로 민중을 굴복시키려는 행태가 여전했다. 한 예로 농사개량과 농업증산을 위해 강조하던 퇴비장려에 대해 품팔이로 말미암아 풀을 베지 못하자, 면서기와 주재소의 조사에 이어 주재소까지 출두시키고 상투가 있는 사람은 상투를 강제로 자르기도 했다. 註71) 이러한 강압적 정책 시행으로 인한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농촌진흥회의 역할이 더욱 필요했다. 


한편 식민지권력은 농민들을 농촌진흥회에 긴박하기 위해 그 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농촌진흥회의 소작권 관리는 농민들의 편입을 유도하는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였다. 또한 경작지 편중현상도 역시 중요한 현안으로 정책적 검토를 진행하였다. 註72) 전북은 1937년 현재 전체 경지 24만 정보 중 소작지는 20만 정보로 83%를 차지하였다. 농가 호수 23만 6천 호 중 소작인은 16만 5천 호로 전체의 70%였다. 그중 5단보 이하 영세농은 8만 8천 호로 37%소작인 중에는 53%를 차지했다. 일제는 이러한 농가들이 “도저히 항구적인 봉공奉公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5~20정보의 소작인 5천 호를 종용하여 5단보 이하자에게 소작지 분양을 계획하였다. 註73) 


많은 사례에서 소작지분배와 마름의 역할 대행 등 농민들의 생활과 직결된 문제가 농촌진흥회와 회장 등에 의해 처리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경작지 분배는 다른 한쪽의 양보 내지 희생이 따라 이를 둘러싼 갈등도 있었다. 경상남도 창원군 진동면 교동리 교동갱생공려부락의 경우, 8년 전에는 자작농이 1호도 없었는데 2호가 되었고, 자소작농은 3~4호에서 24호까지 늘었다. 이는 마을 뒷동산에 비료용 풀이 많자, 이 촌락으로 지주들이 소작지를 넘겨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註74) 또 전남 보성군에서는 관계 기관이 나서서 지도부락 안에서 경지가 과대한 농가의 경지 일부를 경작지가 적은 농가에 분양시키기도 했다. 註75) 


일제는 지도부락에 대해 경작지·노동력·수지 등을 정확하지는 않다고 해도 대강은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촌락의 농가 사이에 이러한 주선이 가능했다. 소작지 이동은 관련된 촌락과 농민들 사이에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다. 동양척식회사의 토지가 매도된 뒤 지도부락의 공동경작지로 넘어가자, 이전 소작인들이 “백성은 일반인데, 지도부락에만 소작권”을 준다고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註76) 부분적이지만 소작료 감하운동이 농촌진흥회의 주도로 진행되어, 이에 경찰이 개입하여 이 문제는 “진흥회의 사업이 아니다”라고 저지하기도 했다. 註77) 당시 일부 농민들은 진흥회를 자신들의 경제적 권익을 주장하고 관철시키는데 활용할 수 있는 통로로 인식하고 있었다. 


농촌진흥회가 농민들을 편입시킬 수 있었던 요인은 생활에 중요한 공제시설共濟施設 흡수에서 비롯되었다. “부락에서 일상생활품의 소비조합·저축·혼상계 등도 진흥회에서 취급”하면서 일제는 농촌진흥회를 농민들의 생활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하려고 했다. 註78) 1920년대 후반까지 존재하던 재래 동계는 사업 내용이 상호부조의 것이 가장 많아 전체 계의 종류·숫자·가입자에서 각각 38.6%·61.3%·47%를 차지하였다. 註79) 당시 농가는 상품화폐경제의 침투과정에서 불안정한 경영을 유지하기 위해 재래의 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조직의 대부분은 재래 금융기구의 한 형태로 비록 고리대에 가까운 금리를 적용하지만, 식민지 금융기구로부터 소외된 농가, “빈약한 농촌에서는 필요”했다. 註80) 계는 농가경영 유지와 확대되는 관의 지배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끈질기게 잔존했다. 註81) 이런 점에서 볼 때 농촌진흥회가 재래 상호부조의 기능을 흡수한다면 농민들의 농촌진흥회 편입을 유도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이 될 수 있었다. 농촌진흥회와 같은 관제조직의 확대는 종래 계의 기능을 약화시키면서 전개되었다. 註82) 

 

한편 농촌진흥회는 때로는 관을 상대로 면협의회와 연대하여 지역 주민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고자 활동하기도 했다. 註83) 약목면협의회와 농촌진흥회의 회원이 면사무소에 가서 도세와 호세의 등급이 불공평하다고 주장하고, 도세는 도당국 또는 총독부와 척무성에 진정하기로 하고 호세는 등급을 재조사하기로 결의하였다. 註84) 경북 고령군 개진면 7개 동리의 농촌진흥회장들이 면협의회원과 함께 신설되는 공립보통학교를 접근성이 쉬운 면소재지 개포에 유치하기 위해 도청에 진정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일제히 사임하기로 결의하였다. 註85) 이 경우 농촌진흥회는 면협의회에서 소외된 일반 농민들에게 일종의 정치적 요구의 장으로 기능하는 양상을 보인다. 당시 이러한 활동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없으나, 농촌진흥회가 이렇게 지역 사업을 해결하는 하나의 공간으로 활용된 만큼 농민들의 참여 역시 좀더 적극적이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사실은 농촌진흥회장이 농촌진흥회를 “조선 총독정치에 종속된 단체”로 인식하고, ‘총독정치’의 권위에 의탁하여 금주·금연을 선전하는 회장의 신분으로 ‘연초소매권’을 획득하려고 한 사실에서 당시 농촌진흥회의 사회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註86) 


일제는 농촌진흥회의 권한을 강화하여 농촌과 농민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농촌진흥회는 소작지 분배와 여러 공제 기능을 맡고, 때로는 농민들의 이해를 적극적으로 관철시키는 통로로 기능하였다. 이외에도 농촌진흥회장은 부채의 조정 감면에 관여하고 부족한 양식을 주선하거나 변통해 주며, 또한 촌의 노동력을 분배·조정하거나 품삯을 정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註87) 이는 농촌진흥회에 편입하고자 하는 농민들의 내적 동기가 어느 정도는 존재함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