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농촌진흥운동 이전의 향촌사회 / 1930년대 일제의 민족분열통치 강화

몽유도원 2013. 7. 22. 23:19

제2장 농촌진흥운동 이전의 향촌사회 

제1절 1920년대 향촌사회의 구조와 동향 27 

1. 촌락사회의 재편 28 

2. 경기도 추동농사개량실행조합 32 

제2절 금융조합의 ‘모범부락’ 정책 40 

1. 금융조합의 활동 40 

2. 사상통제의 내용 45 

3. ‘모범부락’ 선정과 통제 강화 49


1. 1920년대 향촌사회의 구조와 동향


일제는 3·1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민심을 수습하는 가운데 새로운 식민체제 구축을 나섰다. 궁극적인 의도는 한국을 일본자본주의와 식민통치에 적합한 형태로 재편성이었다. 이는 ‘지방개량’·‘민풍개선民風改善’·‘민력향상民力向上’ 등을 구실로 기존 사회질서는 물론 개인의 생활방식까지 대대적으로 개조하는 문제로 이어졌다. 이른바 지방개량정책은 구사상·구관습 개혁론 등과 맞물리면서 사회적 공감대를 일정 부분 형성하였다. 註1)

향촌사회 재편정책은 지방행정체제가 어느 정도 정비된 후 구체적으로 추진되는 계기를 맞았다. 1920년대 농촌통제정책은 기본적인 구조와 방향을 확립한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제는 1910년대 촌락공동체의 자생적인 경제적인 기반인 계契를 면面으로 편입시켰다. 물질적인 기반에 대한 무력화는 공동체적 관계를 철저하게 파괴·약화시키는 요인이었다. 이는 면의 행정력 강화하기 위하여 촌락 내부의 공동체적인 질서를 이용하려는 의도로 귀결되었다. 협력적 분위기는 식민지 농업정책의 침투에만 아니라 지주·소작관계와 같은 계급 갈등을 약화·제거하는데도 필요하였다. 註2) 이런 정치적 논리와 의도 아래 1920년대 농촌통제정책이 시작되었다.

일제강점 초기 군·면의 지방행정 계통에서 관제촌락조직을 보급하는 과정은 동리신동리 혹은 자연촌락구동리 단위였다. 일제가 농촌통제의 단위로 자연촌락을 주목하고 정책을 확립하기 시작한 때는 1930년 전후였다. 1920년대에는 구동리의 통폐합으로 성립된 행정리=동리가 행정보조기구로 이용되는 측면이 강했고, 동리 혹은 촌락 단위의 관제조직화가 병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註3) 동리 단위의 관제조직사업으로 대표적인 것이 충남의 진흥회이다. 동리 단위로 하는 진흥회 설치는 1920년대까지 일제의 농촌사회에 대한 지배력이 대체로 동리혹은 부분적으로 구동리 단계에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註4)


1. 촌락사회의 재편

농촌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지배정책은 구동리와 이에 기초한 자생적인 단체를 강제 해산하고 공동재산을 몰수하여 공동체적 관계를 정리·해체한 후 이를 활용하려는 의도였다. 면제 시행은 향촌 말단조직인 동리를 면의 행정보조기구로 철저하게 만들었다. 동리에 기초한 ‘동계’는 재정적 기반과 기능을 상실함으로써 급속히 약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면의 행정적인 기능 강화는 “부락의 구연고舊緣故를 찾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듯이, 촌락이 지닌 ‘고유한’ 기능과 운영방식을 응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註5) 동리 단위로 조직된 동계는 일제강점기에 점차 감소되는 추세였으나 여전히 존속한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註6) 즉 면이 지방행정의 말단기관으로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 촌락과 자생적 조직의 자치성을 완전히 배제하기에 많은 문제점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충북 청주군 주내면 교서리50여 호에는 도참여관 유성준兪星濬이 거주하면서, 1911년 봄 이래 교서리를 모범리模範里로 만들고자 하여 동계를 조직하였다. 이는 도내 마을마다 동계를 새로 설치하거나 기존 동계의 재정적인 기반을 확충하는 주요한 계기 중 하나였다. 동계 규약은 같은 해 9월에 명문화하였다. 목적은 동리 주민이 단합하여 “현세現勢의 진운進運에 따라 구폐舊弊를 제각除却”하고 “상호 공사公私의 사업을 원조”하여 동리의 복리증진이었다. 성인에 달한 주민은 ‘의무적’으로 계원에 가입해야만 했다. 기본재산은 각자 1원씩 갹출하고, 동리에서 소유하던 동산·부동산 등을 편입시켰다. 주요사업은 농사개량·부업장려, 동계 재산의 조성, 동리의 도로·교량 등을 위한 노력 동원, 경조사의 상호 부조, 수해·한재와 같은 재난에 대한 상호 구제 등이었다. 이는 주민들 일상사와 밀접하게 관련된 사항으로 이를 통하여 주민통제에 활용하려는 의도였다. 동리 청소년들이 “군집하여 악희惡戱”하는 ‘악풍惡風’에 휩쓸리지 않도록 이른바 신문잡지종람소 설치·운영도 주요 현안이었다. 정서함양과 민지계발을 통한 ‘현세계의 상황’에 대한 언급은 사실상 계원을 식민지배체제로 편입시키기 위한 일환이었다. 註7)

계원은 ‘관청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일종의 의무와 같이 규정되었다. “동리를 항상 가족과 같은 관념으로서 교제하는 미풍” 즉 가부장적 관계를 기준으로 한 가족주의를 촌락 운영과 더 나아가 식민지권력과 관계로 확장시키려고 했다. 이른바 의사가족주의擬似家族主義에 기초하여 가족과 가장의 관계를 촌락민과 관청에 적용하여 정책을 원활히 시행하려는 의도였다. 만약 규약을 위반할 경우는 출동黜洞이라는 강력한 촌락의 ‘강제력’을 동원하는 가운데 상호간 교류마저 봉쇄하였다. 註8)

가정의 위계적인 관계는 효율적인 농촌통제에 철저하리 만큼 활동되기에 이르렀다. 즉 촌락의 사회적 결합관계는 농촌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일제강점 초기부터 대단히 유효하게 이용되었다. 유교에 대한 재평가와 부흥을 기치로 향촌사회 명망가에 대한 지원도 이러한 의도에서 추진되었다. 註9) 이는 교육적인 기능을 무시하거나 외면한 채 위계적인 사회질서를 재구축하는데 골몰하였다. 더욱이 ‘모범적인’ 사례에 대한 표창이나 칭송은 저들의 궁극적인 의도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었다.

일제는 초기 기존 촌락조직을 관제조직으로 흡수·재편을 서둘렀다. 이는 식민지배에 대한 반발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함북 동계1911·평북 동약1918·충남 진흥회1916·강원도 흥풍회1920·황해도 흥풍회1921·전남 민풍진흥회1922·전북 부락개량조합1926 등과 같은 관제조직도 동계와 같은 재래의 조직을 기반으로 조직되었다. 註10) 전북 옥구군 미용면 용장리는 1900년경 20호 중에서 4호가 주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촌락이 날로 피폐해지자 마을에서 13명이 결속하여 계를 조직하여 저축과 자산의 증식 및 민심의 분발에 노력하였다. 1909년에는 동민 전부가 참여하여, 대동친선大同親善·생활개선과 납세 공제共濟·혼상婚葬 용구의 공동구입과 사용을 목적으로 대동계大同契로 확대·발전시켜 1926년 부락개량조합으로 변경되었다. 註11) 전북 금산금 남이면 성곡리星谷里 임동권任東權 등 유지도 상호부조·미풍양속을 위한 대동계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발회식에 즈음하여 독행자 3명을 표창하는 등 분위기 조성에 앞장섰다. 註12)

경남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은 1897년에 설립되어 향약 재산의 수익금으로 계원의 관혼상제비와 조세공과금의 전부를 지출하여 지방교화에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1914년 면리의 통폐합 때 기본재산이 면으로 편입된 후 폐지되었다. 민풍개선民風改善을 구실로 조직된 각종 관변단체인 교풍회矯風會·양풍회良風會 등은 식민지배체제로 편입되고 있었다. 註13) 마산경찰서장 발의와 마산군수 지시로 조직된 마산교풍회는 “관내 각면의 도난과 화재를 경비하며 또는 풍기를 교정하고 공익을 증진할 목적”으로 1911년 조직되었다. 회원은 20세 50세 이하로서 관내에 거주하는 남자였다. 3~9인을 1조로 하여 모두 334조에 회원은 21,670명에 달하는 거대한 관변조직체였다. 이와 아울러 식산흥업이라는 미명하에 근검과 근면성 강조는 새로운 시대변화에 부응하는 지름길이자 최고 덕목으로 중시되었다.

충북 양내남향약계陽內南鄕約契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조직되어 일정하게 기능하였다. 1910년 군수가 계의 기본재산을 읍내 보통학교비로 편입시킨 뒤에 폐지되고 말았다. 註14) 일제는 지방사회를 식민지 질서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이같이 재래 혹은 아래로부터의 조직을 흡수하고 이용하여 조합·회會 등과 같은 관제조직을 설치하였다.

1910년대 지방행정체제의 확립 과정에서 구동리와 계 등 촌락조직의 자치성은 부분적으로 변질·약화되었다. ‘자연부락구동리’의 ‘부락관념’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다. 자치적 공동체로서 운영도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 그 중핵인 동계나 동약은 일제에 의해 적극적으로 재편 이용되어, 1910년대 초기부터 이미 진흥회·교풍회 등과 같은 이른바 지방개량단체가 동리 혹은 구동리 단위로 설치되어 나름대로 농촌·농민통제의 일익을 맡고 있었다. 註15) 면의 행정력을 강화하여 농촌사회에 대한 통제력 확대는 공동체적 관계를 일면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 이를 조장 내지 흡수·재편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2. 경기도 추동농사개량실행조합

1932년 11월부터 전국적으로 전개된 농촌진흥운동은 1927년부터 준비되었다. 註16) 경기도의 소학교 졸업생 지도는 처음 10개 학교에서 얻은 성과에 따라 전국적으로 확대·시행되는 계기를 맞았다. 이는 농촌진흥운동의 추진세력으로서 이른바 중견청년을 양성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농촌진흥운동이 전국적인 촌락을 대상으로 전개됨에 따라, 관의 지도에 협력할 만한 중심인물이 필요했고, 이런 중심인물의 양성은 각종 농업학교와 훈련소·강습회 등을 통해 추진되었다. 註17)

경기도 신용리 추동농사개량실행조합秋洞農事改良實行組合은 경기도 의정부공립농잠실수학교 제1회 졸업생인 이종렬李鐘烈, 24세을 중심으로 조직·발전하였다. 조합사업은 관제조직을 통한 식민지정책을 관철시키는데, 촌락의 중심인물이 선도하면서 경제단체로서 농사 이외 정신방면의 통제사업을 전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농사개량실행조합을 통한 관제농촌단체의 기본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

양주군 자둔면 신용리는 3개의 ‘구동리’와 3개의 ‘구동리 일부’ 등 6개 촌락으로 편성되었다. 추동리는 신용리 아래 포용된 온전한 1개 ‘구동리’였다. 중심인물 이종렬은 자소작농 집안 출신으로 1927년 양주공립보통학교 6년을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의정부공립농업보습학교1928년 4월 의정부공립농잠실수학교로 개정에 입학하여, 1929년 3월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조합이 설치되기 이전 추동은 농가 30호의 작은 촌락으로 토지 대부분이 외지인 소유로 경제적인 궁핍을 면하기 어려웠다. 군면에서 ‘선도’를 했지만 농민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종렬은 농업보습학교생으로 ‘한촌寒村에서 모범부락으로’ “동풍洞風의 진작振作… 모범부락 … 신용리의 토지는 농민의 손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학교의 실습작업지에서 다른 사람보다 한층 노력하는 한편, 집에서는 자가 경작지와 함께 실습논 0.511정보와 실습밭 0.82정보를 경영하였다. 이에 예상 밖의 실적을 올리자 부형이 그의 실행에 동참하면서 점차 마을 사람들을 자극하게 되었다. 註18) 그는 청년들에게는 근로를 권유하고 농사개량을 설명했으며, 노장년층에게는 촌락의 분위기를 개선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 양주군의 축산동업조합의 종란種卵 100개를 학교를 통해 분배받아 촌락에 배포하고, 양

 

잠개선 등 농사개선을 이끌었다. 이에 촌락에서 그와 경쟁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 그의 지도를 필요로 하는 자, 그를 모방하려는 자 등이 점차 증가하였다. 학교에서는 농민과 관의 중간자로서 이종렬을 지원하기 위해 동양척식회사로부터 밭 5단보와 의정부의 거주자로부터 논 5단보를 빌려 그의 자립 자영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1929년 4월 이종렬은 촌락의 유지와 함께 22세 이상 57세 이하 14명으로 추동농사개량실행조합을 조직하고 다음과 같은 규약을 제정하였다. 註19) 그는 농민들에게 규약의 실행을 의무화하고, 종소리에 가래를 끌고 신속히 집합하는 규율적인 훈련으로 추동리를 이끌어 갔다.


농사개량실행조합규약

제4조 : 본 조합은 조합원이 일치협력하여 농사의 개량·농가경제의 개선·농사에 관한 연구조사 및 농촌의 개선을 도모하며 상호 부업을 증진하여 공존공영의 실질을 거둠을 목적으로 함.

제5조 :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음 사업을 함. 생산 방면·경제 방면·교육·민풍·공무수행·공동경영.

제8조 : 조합장·부조합장·간사·평의원은 조합원의 추천으로, 고문은 지방의 명예 덕망가를 추대하며, 사업계는 조합장이 임명함.

제12조 : 총회는 춘추 2회, 매월 예회를 개최.

제13조 : 총회에서는 조합의 사업 선정·필행사항의 협정·사무집행에 관한 방법·조합의 경비부과 및 징수방법·예산결산·조합재산처분·기타 주요한 사항.

제15조 : 조합의 경비는 조합원의 부담 및 보조금 기부금 등으로 이에 충당함.

제18조 : 조합원으로 본 규약을 준수하지 않고 혹은 조합의 체면을 훼손하는 행위가 있을 때는 총회의 결의로 제명함.

제20조 : 본 조합원은 본 규약을 준수하여 그 실행을 서약하기 위해 서명 날인한다. 註20)


농사개량공로자 표창


조합은 제5조에서 보듯이 농사개량을 비롯한 경제방면과 함께 생활의 상당 부분을 통제하는데 기능을 발휘하였다. 농민들은 농사개량 등 각 방면에 필요한 사업 비용을 부담하면서제15조, 자신의 행동 여부에 따라 제명이란 강도 높은 제재를 감수해야 하는 단체에 참여하였다제20조. 이렇게 일제는 행정력을 조선민중에게 행사하는데, 행정기관을 내세울 뿐만 아니라 관제조직의 측면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들은 추동농사개량실행조합과 같은 관제조직의 구속력을 받으면서 이에 참여하는 내적 계기가 있었다.

일제는 1926년 이후 산미증식계획을 수정하여 농사개량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는 토지개량사업의 성과를 뒷받침하며 산미계획을 가속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무렵부터 설치된 산미개량조합産米改良組合의 목적은 농사개량과 현미제조 등으로 미곡의 생산성과 상품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경기도의 산미개량조합은 대체로 동리를 단위로 자산가가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註21) 이러한 산미개량조합과 같은 기능을 일반 농민에까지 실행시킬 목적으로, 추동리와 같은 농사실행조합 형태의 조직이 등장했던 것이다. 따라서 산미개량조합과 농사실행조합은 산미증식계획을 비롯한 식민지농정을 농촌사회에 관철시키기 위한 말단 실행단체였다. 그러나 농사개량실행조합은 규약 제5조에서 보듯이, 농사개량을 비롯하여 농가경제의 개선을 주된 목적으로 표방하면서 물질방면 이외에 정신방면에 대한 시설도 함께 병행하였는데, 일제시대 다른 농촌단체들도 대체로 이와 같았다.

추동농사개량실행조합의 사업 내용과 그 실적을 〈표 1〉를 통해 살펴보자. 추동리 농가 호수 중 농사실행조합원은 1929년부터 1931년 사이에 50→55→76%로 계속 증가하였다. 조합원은 자소작농과 소작농이 전부였고, 경영형태별 조합원의 비율은 자소작농 80%, 소작농 70%로 자소작농의 가입율이 약간 높지만, 소작농은 해마다 10명→12명→13명으로 증가하여, 전체 조합원의 45→52→59%를 차지하였다. 또 조합원이 1930년 16명에서 1931년 22명으로 1년 동안 37% 이상 증가했는데, 이는 1931년 곡물 가격의 하락에 따른 타격을 조합가입으로 분산 대처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조합의 부채증가는 거액 부채자의 존재와 곡가 하락에 따른 것이다. 3년간의 사업으로 충분히 알 수 없지만, 1호당 경지면적을 비롯하여 가축의 사육이 증가하면서 부채 규모와 상환액도 함께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조합을 통해 농민생활이 화폐경제에 한층 더 편입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농민들은 상품화폐경제가 확대되는 가운데 농사개량과 관련하여 관의 지도를 받을 필요성도 있었고,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화폐의 지출이 절실한 상황에서, 이런 요구와 부담을 조합에 가입하여 공동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증대되는 부채를 안고 다소 농가경영이 안정되지만, 경제방면의 사업과 함께 여러 공동사업에 충당되는 공동자금의 요구도 늘어갔다.

조합의 사업은 매년 확충되었는데, 이중 공동사업이 두드러졌다. 매월 적립되는 공동저축은 공동사업의 자금으로 쓰이고 있었다. 공동사업이란 개량농구 등을 공동으로 구입하여 사용하는 것 이외에, 공동경작지를 구입하는 것도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공동경작지의 목적은 공동경작에 참여하는 농민들 사이에 공동성과 협력성을 공고히 하고, 어떤 농작물을 경작하여 확대 보급하기 이전에 시범적인 경작을 하는데 있었다. 또 공동경작으로 얻은 생산물의 수익은 대개 다시 공동자금으로 전환되었다. 이렇게 해서 조성된 공동자금은 집회소·사무실·작업장·창고 겸용의 공동작업장의 설치 비용으로 충당되기도 했다. 이 공동작업장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사회교화비’ 명목으로 관에서 조성금이 지급되고 있었다. 註22) 집회장 겸 공동작업장의 설치는 작업의 능률 향상 이외 사회교화 즉 ‘정신순화’와 무관하지 않았다. 관청에서 농민통제의 시설을 확충하였는데, 이는 농민들이 생산한 결실의 일부를 유용하였다. 사회교화를 위한 시설은 1931년 이후 더욱 확대되는 상황이었다.

추동의 농사개량실행조합은 처음에는 일부 조합원을 대상으로 사업을 전개하면서 비조합원인 인근 농민들을 자극하여 가입을 유도하였다. 조합의 사업이 생활 전반에 걸쳐 있어, 조합을 중심으로 촌락의 농민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나아가 추동의 조합사업은 인접한 다른 동리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註23) 농사실행조합과 같은 관제조직이 있는 촌락들은 단체의 조직 경험과 ‘개량의 소지素地’가 인정되었다. 이러한 촌락은 1932년 농촌진흥운동의 ‘지도부락’으로 먼저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표 1〉 추동농사개량실행조합의 사업 현황 註24)
 종래192919301931
농가호수 30호(28명)31(29)31(29)
조합 현황조합원 141622
저금 536원722814.3
부채 3,280원3,1263,185
부채상환 432원656 
  논 2,540평2,7423,074
  밭 1,058평1,0871,475
조합 사업공동사업 상호 당번제로 새끼 공동출하새끼 공동출하새끼 공동출하
매월 공동저축, 일부는 공동사업자금으로 충당공동저축자금으로 공동경작 논을 구입공동저축
개량농구 공동사용, 공동저축의 일부개량농구 공동사용개량농구 공동사용
규약저축규약저축규약저축
 공동경작논의 수익으로, 공동사업비 충당공동경작 논 경작
 공동작업장 건설, 새끼가격 하락으로 생산이 줄어, 사용불충분집회장·사무실·창고용 공동작업장 건축예정/교화사업비보조
 납세여행, 조합원을 4반으로 나누어 성적우량납세여행
  계란·고추 공동출하/화분종자 공동구
생산계량 못자리 개량한 이종렬의 실적을 보고, 조합원 전부 이를 시행조합원만이 아니라 동민전부 개량동민은 물론 이민里民·지방에서도 못자리를 개량
이종렬이 정조석正條植으로 동민 자극조합원은 전부, 정조식을 이행. 동민도 이를 모방함군면 등의 지도로 정조식을 전부 이행이앙은 전부 정조석으로 함
정신개선민풍이 날로 황폐, 지도도 받아들이지 않음월 1·15일 예회. 학교직원은 매번 참석, 협의 반성·강화講話왼쪽과 같음왼쪽과 같음
  총회, 3·12월총회, 3·12월
  강습회 1·9월강습회 1·월
  강화회講話會, 학교직원 소연음嘯娟頀 금조직원 참석강화회講話會
양풍미속 조장 근로습관, 조기회早起會왼쪽과 같음왼쪽과 같음
간식,농번기에 따름간식폐지, 3식합의전부, 3식주의 철저간식폐지
  종으로, 시간엄수시간관념
  관혼상제기구, 공유공동이용, 비용절약
  인보단결·상호부조왼쪽과 같음
  색의착용합의왼쪽과 같음
   정신수양 강화講話
봉사작업 도로수리농번기와 밤에 작업도로수리확장
부인작업극히 드물다논밭의 제초작업 등남자와 멀리 나가 노동왼쪽과 같음. 1931, 부인회성립


2. 금융조합의 ‘모범부락’ 정책

1. 금융조합의 활동

일제가 지배체제를 구축할 때 기본 과제는 농촌사회에 대한 엄격한 통제였다. 일제의 지배정책과 농촌사회의 결합은 금융조합을 통해 이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금융조합은 설립 초기부터 농촌사회에 대한 통제와 지배의 외곽단체로서 기능을 발휘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조직망을 통해 농촌 말단에까지 강고하게 식민지정책을 침투시키려고 했고, 금융조합은 ‘하나의 관의 시설’로서 ‘관의 농후한 보호’ 註25) 아래 전국적인 규모로 활동하였다. 금융조합은 총독과 도지사 중심의 ‘국가적 획일적 지도감독 방침’에 따라 자체 조직력을 확대하면서, 항상 조합의 사업을 ‘국책선’에 맞추어 갔다. 註26) 일제는 전국을 대상으로 조선인을 통제해 가는 지방지배의 기반을 확대할 수 있었다.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정치·외교력을 무력화시킨 일제는 본격적인 경제침략을 강화하였다. 경제권 장악을 위한 기초적 현안은 화폐와 세제에 대한 정리였다. 오지까지 깊이 화폐경제를 침투시키기 위해서는 일본 원圓과 연결된 폐제정리·금융기관의 정비가 뒤따라야 했다. 금융조합은 세금징수와 화폐제도 개혁을 원활히 추진하려던 식민지권력의 첨병이었다. “금융조합제도는 실로 내선일체화內鮮一體化의 경제적 준비를 위해 설립되었다”고 평가는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금융조합은 이렇게 처음부터 “완전히 정부의 국책담당기관으로 창시”되었다. 註27)

금융조합은 경제단체였으나, ‘도덕과 경제의 조화’를 강조하면서 하나의 정신단체나 마찬가지였다. 註28) 이론적 바탕에는 농정가農政家이궁존덕二宮尊德, 1787~1856의 ‘보덕정신報德精神’이 기본적으로 관통하고 있었다. 그의 보덕정신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근대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계급대립의 격화 등으로 동요하던 농촌사회의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전개했던 ‘지방개량운동’의 사상적 기반이었다. 또 일제하 한국 농촌사회를 통제하는 이념으로 도입되었다. ‘보덕정신’은 농촌사회에서 유력한 경제단체인 금융조합의 이론적 바탕이자 관 주도의 지방지배정책을 구사할 때 기본사상이었다. 그런 만큼 내용은 금융조합 사업만이 아니라 식민지 농촌지배의 성격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註29)

이궁의 보덕정신이란 우주 일체의 사물이 각각 덕을 갖고 있다는 기본 관점 아래, 이 일체의 덕을 갚아야 한다는 신념에서 출발했다. 이궁은 보덕정신이 일신일가一身一家와 나아가 일촌일국一村一國으로까지 확대하여 사람들의 전체 생활에 관철되는 것을 최고의 이상적 생활양식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정신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근로·적선·분도分度·추양推讓의 4개 윤리를 실천해야 한다고 했다.

근로는 천연의 자원을 개발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여기서 근로는 인간이면 반드시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명의 하나라는 견지에서즉 우주 만물의 은덕에 대한 보답, 근로의 결과를 예상하거나 이해와 타산을 따지지 않고 최대의 근로는 필연적으로 최대의 보수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신념이 전제 조건이었다. 적선은 좋은 종자를 심는 것이다. 좋은 종자를 인간사회에 심으면 1원의 재물은 해마다 증가하여 수십 수백만 원이 될 수 있으며, 좋은 종자를 심을 때는 수확 타산을 고려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분도는 “들어오는 것을 헤아려 나가는 것을 제재하는” 식의 일반적인 가계 경영의 의미가 아니라, 이보다 더욱 발전하여 들어오는 것을 헤아리기보다 “나가는 것을 제재”하는 쪽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즉 수입의 3/4으로 생활하고 나머지 1/4을 예비비로 충당하며, 다시 예비비 중 1/5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이상적인 가계 경영이라고 하였다. 추양은 위의 예비비 중 1/5을 다른 데로 전환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궁은 “추양없는 근면은 약탈이다”고 단언하였다. 이러한 보덕사상은 경제의 도덕화·도덕과 경제의 일체화로 계급대립을 약화시키고, 교화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 註30)

이중의 네 가지 윤리는 경제근로·적선와 도덕분도·추양으로 압축할 수 있다. 경제와 도덕이 결합되었기 때문에 경제 활동은 영리 추구를 넘어 서는 것이어야 했다. 특히 추양은 오늘 소비하려던 것을 내일로 양보하고, 자기가 쓰기보다 자손에게 양보하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註31) 이는 어떤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현재를 유보시키는 것이며, 예컨대 세금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농주 폐지와 같은 ‘생활개선’을 압박하는 것도 그 하나로 해석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보덕정신은 이익이 동반되지 않는 경제적 현실도 무비판적으로 감수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기제였다. 일제는 이와 같은 보덕정신을 농촌사회에 지배체제를 확립하는데 적용했다.

한편 ‘일촌일가’의 관념은 “공공단체를 위해 진력하는 관념”으로 공공심을 조장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민으로 하여금 관에 협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법률적인 권리 의무에다 준친족관계 즉 의사가족주의를 결합시켜, 註32) 가족적 심정을 원용함으로써 정책의 원만한 실행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이해 대립을 방지하여 농촌사회 안정을 꾀하려는데 적용될 수 있었다.

보덕정신을 종합하면, 근검저축으로 소비를 억제하여 식민지 권력기구와 지주의 수탈을 확보하고, 근로를 통해 감사보은의 관념을 외연적으로 확장하여 종국에는 식민지체제와 천황중심주의로 ‘귀일’ 즉 통합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분도·추양 역시 식민지체제 안정화의 논리를 보강해 주었다. 요컨대 이러한 관념들은 조선민중의 정치변혁의식을 경제주의로 전환시켜, 농민들로 하여금 식민지농업·농촌정책을 수용하여 자신의 경제적 현실을 개선하는데에만 몰두하도록 분위기를 조장하는데 일정한 기능을 발휘했다.

금융조합 활동의 사상적 배경에는 바로 이러한 보덕사상이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함북금융조합연합회이사장 안전인시岸田寅市는 금융조합의 이념과 그 활동방향에 대해 비교적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금융조합운동이란 “윤리도덕의 정신을 기본으로 경제의 개선 발달을 기도하는 도덕적 사회운동”이며, ‘조합원의 협동의 힘’과 ‘공동의 이익’ ‘공존공영의 이상향 실현’을 향한 조합원각성운동이라고 했다. 또 금융조합은 “다수 조합원의 대가족이며 이해를 함께 하는 대세대大世代”라고 하면서, 이를 통해 조합운동에서 가장 필요한 “자기의 이익의 희생·질서·복종”의 관념을 조장하려고 했다. 註33) 이러한 금융조합의 기본적인 정신인 협동정신공동자조과 상호부조는 희생정신과 결합되어, 금융조합의 활동을 통해 전체를 위한 개체의 희생과 복종심을 주입하였다. 註34)

금융조합은 이러한 정신으로 ‘공존공영의 사회’를 건설한다고 선전하면서, 조합정신의 실행을 모든 조합원의 의무로 강제했다. 조합정신의 실행 방법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조화통일이다. 이는 도덕과 경제의 일체·물심일여·사회연대의 경지이며, 이를 위해서는 자제와 복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조합을 가장家長으로 조합원을 가족원으로 한 상하관계 아래 구성원 사이의 질서를 유지하며 이를 바탕으로, 공존공영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註35) 둘째는 의무이행이다. 조합원은 조합이 정한 시설사항을 이용하고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고, 그 이행이 복종이 되는 것이다. 셋째는 근검저축이다. 근검저축이란 상호부조 즉 자기 희생정신의 근원이 된다.

금융조합은 이렇게 ‘공존공영의 이념’을 실현한다는 미명 아래, 조합원에게 이른바 협동정신·공동자주·상호부조의 기본 정신으로 희생·질서·복종을 세뇌시켰다. 여기서 눈여겨 볼 사항은 ‘공존공영’ 즉 공동일치의 강조이다. 자금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는 조합원의 공동일치의 체제와 정신이 필요했고, 공동일치의 체제가 강하면 강할수록 조합은 발전하기 때문에, 조합원의 공동심 즉 ‘공존공영’을 강조했다. 공동일치적인 금융조합의 발달은 군면 단위 조선민중의 통합 또 이를 바탕으로 한 식민지체제의 확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조선농민은 절박한 경제적 요구에서 조합에 가입하게 되면, 자금대출과 함께 뒤따르는 조합의 통제 아래 이러한 논리의 조합정신에 세뇌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조합원의 금융조합 편입은 소극적일지언정 조합의 경제·정신의 통제를 받고, 식민지체제에 편입되는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정신방면에서 볼 때, 관변단체인 금융조합은 식민지정책에 따라 조직을 확대하여 조선인의 사상통제망을 구축하고, 식민지 지배이념인 ‘내선일체’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와 같이 일제는 금융조합을 경제단체로서만이 아니라, 중요한 정치기구의 하나로서 그 확장에 주력하였다. 금융조합은 전국적인 조직망과 금융활동으로 제일선에서 통치력의 일면을 담당하였다. 총독정치는 기본적으로 식민지 관료제도였지만, “일찌기 관력으로 농민을 지배하는 관료정치방식으론 농촌재건과 농업증산이 이루어질 탓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토착지주를 앞재비로’ 註36) 혹은 금융조합과 같은 방대한 조직을 통해 지배력을 관철시켜 왔던 것이다. 즉 금융조합은 “관청과 같이 정면에서가 아니고 측면에서 정치의 해설자로서 대립의 완충에 당하는 무마자로서 동정과 원조를 표방하고 이면공작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註37)


2. 사상통제의 내용

금융조합은 단체 명칭과 달리 경제기구 및 정신통제기구로서 일제의 농촌통제정책의 일익을 담당했다. 1910년 4월 현재 조합수는 100개로 331개 군의 30.2%를 포섭했으나, 조합원은 전체 호수의 1.3%에 그쳤다.

일제의 조선강점에 반대하는 의병항쟁은 중심무대가 농촌사회였기 때문에, 농촌사회의 통제와 지배의 첨병으로 금융조합이 활약할 기회가 제한되었다. 그러나 1914년 국내에서 의병항쟁이 퇴조하자, 그해 일제는 지방조합령을 발포하고 농촌에 대한 금융조합의 침투체제를 확립해 갔다. 註38) 지방통제에 대한 금융조합의 역할은 3·1운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3·1운동 당시 경찰서와 면사무소 등이 습격을 받을 때도 금융조합만은 습격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서, 군수와 헌병소장 등이 시위에 참여한 군중에게 해산할 것을 명령했지만 전혀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구성금융조합의 직원이 나아가 해산을 종용하자, 군중 사이의 조합원은 조합 직원을 알아보고, 모습을 감추거나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합이 습격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원인은 조합의 임원 중에 지방의 유력자와 지식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註39) 조합은 자금융통 등의 사업을 확대하면서 이른바 조합정신을 주입시켰고, 지방의 유력자를 조합 임원 즉 식민지통치 협력자로 삼아 이들의 활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방통제의 효과를 일정하게 거둘 수 있었다.

충남의 시실추혜時實秋穗 도지사는 1919년 10월 기존 농촌통제조직인 진흥회를 부활하여, 3·1운동 이후 지방사회를 재편하려고 했다. 그는 1920년 5월 금융조합이사협의회 훈시에서 물질방면과 사상·정신방면의 개조를 주장하고 있었다. 물질방면의 빈부의 격차를 타파할 것과 함께 사상방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개인주의에 따른 자본가 대 노동자, 지주 대 소작인 등의 계급적 투쟁으로 … 그 사이에 보덕이라든가 감사라든가 하는 사상은 전혀 없는 듯이 경도되고 있다. … 개조를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면, 물질적으로는 빈부의 현격이 주된 원인이다. 정신적으로는 자아에 지나쳐 공동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 근본이라고 믿는다. 빈곤한 사람을 없게 하는 것과 정신적으로 서로 돕고 ‘감사보은’의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 목하 사회를 구제하고 인생을 제도하는 제일의라고 생각한다. … 금융조합의 사업은 … 물질절·정신적 양 방면을 훈련할 절호기회라고 믿고 있다. … 금융조합은 개인주의의 병폐를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데 만족할 만한 공존공영의 주의를 실제로 교수하는 실지적 교육기관임과 동시에 근검치산勤儉治産의 현실적 효과를 단적으로 보이는 실천장이라고 할 수 있어, 부지불식간에 자치적 정신과 자조적 정신을 발휘시키는 일대 실지훈련의 기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요컨대 목하 사회의 건전한 발달에 필요한 개조는 우리 금융조합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자주적인 단체로써 이를 기도하는 것이 가장 첩경이라고 믿는다. 註40)


그는 같은 해 6월 군재산계주임타합회郡財務係主任打合會에서도 다음과 같이 훈시하였다.


지방개량 혹은 민풍작흥에 도달할 수 있는 경로는 많다. 간접의 방법이 있다면 직접의 방도도 있다. 정면의 방법이 있다면 측면의 수단도 있다. 이들 각종 수단과 경로를 이용하고 선용할 필요가 있다. … 금융조합은 단지 지방금융의 기관일 뿐만이 아니라 근래 선전하는 지방개량 혹은 민풍작흥과도 적지 않이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의도에서 지도해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註41)

 

이렇게 볼 때 식민지 권력층은 당시 사회적 모순의 원인을 자아의식의 발로라 하여 개인적인 성향의 문제로 축소하면서, 이런 자아의식과 개인주의를 공동·보덕·감사보은의 관념으로 전환시키려고 했다. 이는 집단정신과 공동정신으로 자아의식에 기초한 계급사상을 없애려고 한 것이며, 이러한 논리에 입각한 통제과정은 사회치안과 식민지체제의 안정을 담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지방개량사업’에 금조를 활용하는 것이 첩경이라고 했다. 금융조합의 조직망 확대가 바로 농민들에 대한 물적 정신적인 통제망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까지 금융조합은 금융단영주의金融單營主義를 내걸고 조합의 기초를 공고히 하면서, 비교적 중상층을 대상으로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금융조합은 주된 사업인 금융활동을 통해 조합원의 물질적 생활에 개입하면서, 이와 병행하여 정신적인 지도로 ‘건전한 사회·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註42)는 주장을 계속 제기하고 있었다. 금융조합의 자금 대부가 대부 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으로 하여금 ‘공민公民’으로서 ‘정치적 책임·경제적 책임·사회적 책임’ 註43) 등을 자각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압박하였던 것이다. 즉 사상선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註44)

경남 하청금융조합河淸金融組合의 경우, 조합원의 가입식에서 ‘조합원組合員10칙則’을 배부한 뒤 서명 날인한 서약서를 받고 반드시 결행하도록 지시하고 있었다. 주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조합의 강령에 기초한 여러 시설을 잘 이용하고 혹은 이에 복종하여 협력조장에 진력할 것.

② 조합가입을 자기의 갱생으로 자각하여 모두 조합정신에 기초하여 생활양식을 전부 개선할 것.

③ 차용금의 반제返濟기일을 확실히 지킬 것.

④ 총회·부분타합회部分打合會·간친회墾親會기타 집회에는 반드시 시간을 여행勵行할 것.

⑤ 국민의 의무를 솔선 이행하고 조상숭배 및 경로의 실질을 거두며, 공덕공공의 마음을 함양한다. 또 협동조화의 선풍善風을 양성하고 봉공감사의 관념을 왕성하게 하며 相互諧和한다. 그리고 서로 공제共濟의 실질을 도모하고 시세에 순응하여 예의 수양에 노력함과 동시에 자중자리국운自重自利國運의 진전에 공헌할 것 註45) 등을 강조하였다. 註46)


따라서 금융조합은 경제단체로서 자금운용으로 조합원의 물질적 생활에 깊이 관여할 뿐 아니라 아울러 정신적인 통제로 식민지 지배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3. ‘모범부락’ 선정과 통제 강화

‘모범부락’은 1920년을 전후하여 일본의 모범부락·우량부락을 모방하여 사상선도·지방개량 등을 목적으로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註47) 일제는 당시 농촌에서 중요한 것은 “문화적 시설의 충실과 경제적 생산의 증식보다 오히려 정신적인 자각향상과 도덕적인 수양훈련이 필요”하다고 註48) 인식하였다. 모범부락은 앞에서 살펴본 추동농사개량실행조합과 마찬가지로 산미증식계획 아래 농사개량 등으로 생산력을 증대하고, ‘지방개량사업’ 이라 하여 농촌사회를 체제순응적으로 재편하기 위한 것이다. 모범부락이란 일종의 농촌통제의 전초 기지를 확보하려는 정책이었다.

모범부락의 선정은 기존 촌락 중에서 성적이 우수한 곳을 선택하기도 하였지만 처음부터 일정한 촌락을 모범부락으로 성장시킬 목적으로 설치한 경우도 있었다. 또 그 명칭은 보통 모범부락·우량부락·지도부락이라고 하였지만, 촌락에서 모범부락과 같은 사업을 하기 위해 설치한 단체명으로 대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설치의 주체 기관은 군면·산업단체·금조·경찰 등이었다. 1930년 현재 전국의 모범부락은 257개이며, 사업내용은 산업·교육·자치·저축·민풍개선 등 모든 방면에 걸쳐 있었다. 이들 촌락의 사업내용은 크게 분류하면, ‘근검저축’을 실행하는 촌락 122개, ‘부업장려’ 83개, ‘퇴비제조’ 79개, ‘야학’ 64개, ‘산미증식 및 개량’ 62개, ‘납세기간엄수’ 58개 등이었다. 257개 모범부락 중에는 조합組合·회會·강講·계契 등과 같이 단체를 중심으로 사업을 전개한 경우가 많았는데, 주된 단체는 종류별로 근농공제조합 70개, 진흥회 기타 60개, 농사개량실행조합 48개, 부인회 29개, 야학회 23개, 저축조합 22개, 잠업조합 21개, 청년회 20개 등이었다. 이들 단체는 당시 말단사회의 통제조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총독부는 이런 모범부락 혹은 단체 중에서 ‘지방의 교화’에 공헌하고, 성적이 현저하여 일반 농촌의 모범이 될 만한 것 혹은 장래 실적을 올릴 전망이 있는 것에 대해 1927년부터 보조금을 지급하여 촌락 혹은 단체의 발달을 장려하고 있었다. 註49) 총독부가 1927년부터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이를 조장했던 것은 이듬해 1928년에 있을 소화 천황의 즉위식 기념사업과 관련되었다. 註50) 금융조합은 1927년을 전후하여 천황즉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또 조합원 통제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의 하나로 모범부락의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른바 모범부락을 소개하는 일반 자료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이러한 사실이 금융조합과 관련된 자료에서 부분적으로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금융조합의 모범부락 정책을 통해 당시 모범부락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사례로 전라북도의 각 기관이 설치한 모범부락 중, 금융조합이 주체가 되어 설치한 것의 실시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라북도는 관의 선전장려만으로 농민의 근로정신을 잘 조성할 수 없자, 모범부락을 설치하여 해결하려고 했다. 전북은 모범부락에 대한 관의 집중적인 지도로 일정한 성과를 획득하여 그 촌락을 통해 다른 촌락의 분발을 유도한다는 방침 아래, 부락개량조합·지도부락·위생모범부락 등의 명칭을 사용한 모범부락을 설치하여 지도하고 있었다. 註51)

군면의 사업으로 설치된 부락개량조합은 산업진흥·양풍미속의 유지쇄신·생활개선·근검저축 등을 목적으로 1926년 4월 이래 1개 군에 2~3개씩 합계 29개가 조직되었다. 1929년도에는 22개 조합, 1931년도에는 27개 조합을 증설하여, 1932년 현재 도내 79개가 있었다. 둘째는 경찰의 위생모범부락인데, 1929년 8월 이래 위생상태의 개선을 도모하고 아울러 지방민풍의 진흥 조장을 목적으로 각 경찰서 관내에 모범위생부락을 설치하여 1932년 132개에 이르렀다. 註52) 셋째가 금융조합의 지도부락·모범부락이다.

1928년 10월 10일부터 개최될 금융조합이사타합회金融組合理事打合會를 대비하여 준비된 도지사의 훈시안訓示案, 9월 29일에는 “이번 11월에 있을 어대御大는 우리 국가의 가장 중대한 성의盛儀이기 때문에, 국민 모두 봉축奉祝의 적성赤誠을 다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이 어성의御盛儀에 즈음하여 각지에서 기념사업을 기획하고 있는 모양인데, 금융조합에서도 적절한 사업을 신중히 선정하여 견실한 수행을 기함으로 어성의御盛儀를 기념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註53) 이를 통해 당시 각 기관에서 천황즉위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금융조합에서도 이에 대응했음을 알 수 있다. 금융조합의 모범부락 설치는 단지 천황즉위기념사업의 일환일 뿐만 아니라 광범한 조합구역의 한계를 완화하려는 수단이기도 했다. 모범부락의 설치 구역은 동리 혹은 촌락 단위였다. 註54)

전북의 ‘금융조합리사회동타합사항’ 중에서 ‘금융조합모범부락설치의 건’을 보면, 조합 구역에 모범부락을 설치하여 먼저 이를 철저히 지도하여 다른 촌락에 모범이 될 정도로 성장하면 다른 촌락은 점차 모범부락의 ‘감화를 받아’ 분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합사업을 전체 구역으로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촌락에서 금융조합의 모범부락이 군면 혹은 농회와 같은 산업단체의 그것과 중복될 경우, “가능한 한 이를 (금융)조합의 모범부락”이 되게 하여 금융조합의 시설을 우선 설치한다는 것이다. 또는 중복 시설일 경우는 양자 사이에 유기적인 협력관계를 갖게 하였다. 그리고 모범부락에 대한 농사개량 등 기술상의 지도는 군 혹은 산업단체 직원의 지원을 받도록 했다.


각 지역에 조직되는 금융조합과 모범부락들


전북은 이러한 기본 방침에 따라 이미 모범부락의 사업을 전개하고 있던 경기도의 사업요령을 바탕으로 ‘금융조합모범부락설치요령’을 마련하였다. 주요 내용은 모범부락을 설치할 때에는 군과 긴밀히 협의하여 결정하며, 모범부락은 당분간 1개 조합에 1~2개를 선정하고, 모범부락에는 1명의 지도원을 두고 조합 직원과 협력하여 조합원을 지도하도록 했다. 그리고 모범부락이 될 수 있는 조건으로 촌락의 중심인물·조합 지도상 편리한 장소·수해 한해의 우려가 없을 것·특종 부업에 대한 성과 가능성이 있을 것 등을 제시하였다. 또 현 호수의 3할이 금융조합에 편입될 전망이 있는 촌락을 중심으로 설치하기도 했다. 이로 볼 때, 금융조합의 모범부락은 특정 지역을 모범부락으로 만들려는 의도 아래 가능한 한 성과를 최고로 올릴 수 있는 지역을 대상으로 선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모범부락의 사업도 촌락의 장점을 잘 발휘시킬 수 있는 사항을 집중 지도한다는 방침이었다.

이에 따라 수립된 전북 모범부락의 사업은 군면·산업단체와 연락하여 적당한 산업시설을 선택한다는 방침 아래, ① 생산자금을 융통하여 농구와 비료 등을 공동구입하고, 생산물을 공동판매하고 공동경작하는 기풍을 갖게 하며, ② 모범부락에 있는 부재지주의 토지는 촌락민들이 이를 공동 구입하도록 힘써 협조한다는 것이다. ③ 조합원와 비조합원을 구분하지 않고 촌락민 중에 희망자에게는 저금주머니 혹은 저곡주머니를 배부하여 일정한 날짜마다 조합직원이 출장해서 거두도록 하였고, ④ 상업 내지 부업자금은 가능한 한 월부 혹은 시일市日마다 할부 상환하도록 하며, ⑤ 촌락민의 합의에 따라 관혼상제비의 절약과 생활개선을 추진시킨다는 것 등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경기도의 시설과 거의 비슷했다. 그러나 경기도의 요령에서는 “부락원은 협동일치하여 근검저축을 하며, 납세 등은 솔선 완납하도록 노력할 것” 註55)이라는 항목이 있다. 전북도 부업 등으로 수입을 증대하기 위해 자금지원과 저축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저축은 농가경영의 유지를 위한 면도 없지 않겠지만, 조세의 재원으로서 더욱 중시되었다.

1928년경 경기도의 모범부락 54개의 사업 내용을 보면, ‘저축사상의 양성’을 이행하고 있는 모범부락 35개를 위시하여, ‘부업장려’ 25개, ‘양잠 장려’ 24개, ‘퇴비증산’ 20개, ‘축우·돼지’ 19개, ‘농사개량자금 보급’ 19개, ‘생활개선’ 11개, ‘가정개선’ 9개, ‘공동경작’ 3개, ‘온교회溫交會’ 3개 등으로 나타났다. 모범부락은 관의 집중적인 지도와 시설로 이러한 사항을 보급시키기 위한 시범적 선전적 거점이었다. 여러 시설 가운데 저축시설을 갖고 있는 모범부락은 35개로 전체의 약 65%를 차지하고 있었다. 1930년경 전국적인 조사에서 선정된 257개 모범부락 중에서 저축사업을 전개하는 곳도 122개소로약 47% 가장 많았다. 이러한 저축은 조세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중요했고, 모범부락의 설치 목적 중의 하나가 납세관념과 재원 마련 구조를 말단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일제는 조세체납을 막기 위해 납세조합의 설치를 장려하고 있었으며, 모범부락의 설치도 완납을 관철시키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었다.

일제는 모범부락을 매개로 이처럼 다목적 성과를 거두기 위해, 해당 농민들에게 어느 정도 경제적 이익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이것을 통해 내적 동기를 자극하면서 궁극적으로 체제내화를 달성할 수 있도록 모범부락 정책을 전개했다. 즉 “어느 시설이 그들농민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분명하면, 그 흡인력으로 협동이 공고하게 결합되고 그 마력魔力으로 자조自助가 자연히 발동한다”고 한다. 註56) 또 모범부락을 통해 “일반 조합원모범부락으로 설정되지 않은 촌락의 조합원이 그 실황을 목격하고 자각 발분”하여, 조합 전체가 모범부락이 되고 조합원은 지역사회의 모범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평북 금융조합연합회 산하 금융조합이 모두 ‘어대전기념御大典記念’ 사업으로 모범부락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註57)

금융조합 주도의 모범부락 사업이 전개되는 양상은 다음과 같다. 충남의 금융조합들은 계契를 조직하여 이를 통해 모범부락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다. 註58) 금조는 1~2개 촌락을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지도하는데, 그 구역은 가능한 한 1개 동리행정리를 넘지 않으며 적어도 전체 호수의 50% 이상을 조합원으로 포섭한다는 방침 아래 사업을 전개하였다. 조합원은 중심인물을 통해 지도 통제하되, 이사는 월 1회 이상 출장을 가서 모범부락의 사업 이외에 “개인적인 용무까지 간절하게” 살핀다는 것이다. 사업의 내용은 농사개량, 근검 등 다른 지역과 비슷한데, 이런 사업 중에서 1~2개를 선정하여 천황즉위기념사업으로 모범부락 내 조합원 전부에게 필행시킨다는 것이다. 모범부락계模範部落契의 규약(안)에서 특징적인 것은 계장·부계장·간사를 모두 금융조합에서 지명하고, 고문은 금융조합장과 이사가 맡아 금융조합의 계획대로 각종 시설과 사업으로 촌락을 통제하는 것이다. 역시 제명에 대한 규정도 있어, 해당자는 각종 사업에서 배제시킬 수 있었다. 또한 경북의 모범부락은 촌락조직으로 설치된 공려회共勵會가 운영하고 있었다. 경산금융조합慶山金融組合는 1927년 구역 내 26개 촌락에 공려회를 조직했는데, 회장은 금융조합의 임원 혹은 조장이 맡고 그 아래 위원委員을 두고 군면과 밀접히 연락하며 정해진 규약을 실행하고 있었다. 註59)

모범부락 정책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농민들의 참여 동기를 자극하기 위해 경제적 성과를 거두려고 했고, 평안남도 강동금융조합江東金融組合의 양계부락의 경우처럼 성공적인 사례도 있었다. 註60) 그러나 이 정책의 결과가 농가의 경영에 크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불투명하다. 각지의 모범부락 중에는 촌락민의 의사와 관계없이 관에서 지정한 경우도 있었고, 또 모범부락이기 때문에 다른 촌락에 비해 경비와 노동력의 부담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볼 만한 실적이 없는 곳도 있었다. 註61)

모범부락 정책은 관의 지시와 명령, 법률만으로는 식민지정책을 민중에게 실행시키는데 한계가 있다고 보고, 이를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모범부락 정책은 이른바 지방개량·지방자치라는 명목 아래 종래 촌락에 내재된 자주적이고 자발적인 협력관계를 자극하고 이용하여 지방행정에 조선민중의 협조를 끌어낸다는 구상 아래 추진되었다. 이를 위해 관에서는 모범부락에 시설과 지도를 집중적으로 투입하여 일정한 성과를 얻은 뒤 이를 인근 촌락에 과시하여, 촌락 사이의 경쟁심을 유발시켜 관의 정책을 용이하게 관철시키려고 했다. 이렇게 모범부락이 설치된 결과 부분적으로 성과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다음과 같은 한계와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총독부 촉탁 증전수락增田收作은 다음과 같이 모범부락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모범부락의 설치는 부락본위 통제본위의 지도가 많다. 개인에 대해서는 그 실력을 돌아보는 일이 없고, 단지 보조와 독려를 지도의 본체로 하였다. 관설모범부락이라는 경향을 띤 것이 적지 않았다. 때문에 외견상 잘 정비되고 일견 갱생된 부락 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그 기초가 되어야 하는 개개 농가는 실력이 없고 신념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단지 관의 조치에만 의뢰하는 악습을 순치시키는 데 그쳐, 보조를 그만두고 지도의 손을 완화함과 동시에 종래의 부락으로 전락하는 실례가 결코 적지 않다. 지금까지 전국 많은 모범부락이 창설되고 또 많은 모범부락이 조락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심하면 이들 부락 사이에는 단지 부락의 입구에 ‘모모 모범부락’이라고 화려하게 쓰여진 백색 페인트칠의 표목만이 남아있고 전혀 시설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조차 있다. 어떤 이는 이를 혹평하여 시설의 잔해라고 하고 있다. 註62)

일제는 일부 이미 성과를 거둔 촌락 이외 어떤 가능성을 가졌다고 판단되는 촌락을 모범부락으로 선정하여 여러 시설과 보조금을 ‘당근’으로 제공한 뒤 농촌통제에 필요한 여러 사업을 실시하여 정책과 지배의 거점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관의 지도와 통제가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듯하지만, 관의 조치가 없으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황해도 옹진금융조합의 복전福田 이사 역시 이른바 모범부락 등이 종래 너무 형식적이었다고 지적하며, “가령 모범부락이니 하는 이런 방면의 사업보다는 전연 취의趣意가 상이한 계획에 흥미를 가진 이사가 이전 책임자와 바뀌어 전임해오면, 어제까지의 부락의 모든 시설은 그야말로 일조에 공허한 형식적인 데 떨어져버리지 않나” 註63)하였다고 회고하였다. 또 “종래는 보조갱생 … 보조금을 주어서 갱생시키는 방식이 매우 성행되었는데, 보조금이 끝어지면 도루아미타불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註64)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모범부락정책은 농촌통제정책의 일환으로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모범부락은 면 혹은 금조의 구역 내 1~2개 촌락구동리 혹은 동리을 대상으로 관이 집중적으로 지도하고 거기서 얻은 결과를 선전하여 다른 지역으로 확대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범부락의 설치가 호별 통제보다 촌락 통제를 위한 것이 많았고, 관의 지도와 보조금 지급에 치중하여 문제가 되었다. 註65) “외견상은 잘 정비되고, 일견 갱생된 부락 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개개 농가는 통제되지 않아, 만약 관의 보조와 지도가 없으면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일제는 만주사변 이후 국내외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의 농촌사회를 전면적으로 재편해야 할 상황이었으나, 종래의 모범부락의 방식으로는 전국적으로 전체 농민을 통제할 수 없는 한계에 직면하였다. 전국의 촌락과 농민을 상대로 일일이 모범부락식으로 많은 지도인력을 투입하고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도 감당할 수 없었으며, 또 모범부락이라 하더라도 그 시설이 촌락적 사업 즉 단체의 성과를 내는데 치중하여 개개 농가에 대한 지배력이 약했다는 것이다.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은 종래의 모범부락과 같은 촌락단위정책을 전면적으로 확대 실시한다는 점에서는 연속성을 지니지만, 개개 농가에 대한 파악과 촌락조직의 권한 강화의 측면에서는 엄밀하게 구별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충남의 진흥회·경기도의 추동농사개량실행조합·금융조합의 모범부락 등에서 보듯이 일제의 농촌통제정책은 대체로 1920년대까지 동리 혹은 촌락 단위로 병립하는 양상을 띠었다. 그리고 농사개량을 중심으로 한 농사개량실행조합과 자금운용을 중심으로 한 금융조합도 모두 경제단체로 출발했지만, 실제 활동은 물질방면 이외에 정신방면에 대한 시설도 병행하였다. 일제시대 농촌의 경제단체들은 대체로 이와 같이 두 방면에 걸쳐 활동을 했다. 따라서 일제하 여러 경제단체의 양적인 성장과 수치상의 ‘성과’ 이면에는 사상통제 즉 조선민중에게 식민지 지배논리를 주입하려는 의지가 관통하고 있었다.

일제는 1910년 강점 이래 식민지 조선에 대해 ‘강력한 동화주의적 식민지정책’으로 “내선內鮮을 실로 일체로 하는 문화적·정치적·경제적인 완전한 영역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던 것” 註66)이다. 일제시대 경제단체의 활동은 지방지배체제의 확립을 위한 정지작업의 일환이었던 점도 주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