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농촌진흥운동의 확산과 관제화 / 1930년대 일제의 민족분열통치 강화

몽유도원 2013. 7. 25. 10:20

제4장 농촌진흥운동의 확산과 관제화 

제1절 관제화 강화 99 

1. 농촌진흥회와 농업보국 99 

2. 농촌진흥회의 개편과 실태 105 

제2절 농민반응과 사회변화 113 

1. 농촌사회의 동향 113 

2. 일상사의 변화 118 

제3절 농촌통제와 농민운동 121 

1. 농촌진흥회의 소작문제 개입 121 

2. 적색농민조합운동의 확산 126

3. 금융조합의 농촌통제 132 

1) 금융조합의 농민포섭 132 

2) 금융조합의 농민통제 135 

3) 금융조합의 침투와 촌락의 변화 146 

제4절 국민정신총동원운동과 농촌통제정책 149 

1. 시행 배경 149 

2. 조선중앙정보위원회의 활동 156 

3. 부락연맹과 애국반의 활동 160 

4. 근로보국운동의 확산 166 



1. 관제화 강화


1. 농촌진흥회와 농업보국

일제는 1937년 9월 “농산어촌 대중의 동향 여하는 바로 전시체제 아래 거국일치擧國一致·내선일체內鮮一體”에 영향을 미친다고 전제하였다. 이는 ‘시국의 인식과 생산보국生業報國’을 강조함으로써 농촌진흥운동이 생업보국의 단계로 발전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註1) 이송순, 「전시체제기 조선농촌재편성계획 구상과 실행(1940~1945)」, 『사총』 59, 역사학연구회, 2004. 정무총감의 통첩에서는 첫째, 군도·읍면의 농촌진흥위원회는 매월 1회 정기적으로 열어 전쟁 관계 실천사항 등을 협의·결정하여 생업보국에 관한 지도를 철저히 하도록 하고, 읍면농촌진흥위원회에는 구장 등도 참석하도록 했다. 둘째, 지도부락이 아닌 일반 촌락에도 농촌진흥회를 보편적으로 설립하도록 했다. 셋째, 농촌진흥운동을 강화하여 생산확충과 시국관련 농산물을 증산할 것을 강조했다. 넷째, 공동경작과 생활개선·절약 등으로 국방헌금의 재원을 마련하고 헌금의 분위기를 조성하며, 농촌진흥운동의 기관지 『자력갱생휘보』 농촌진흥운동의 기관지 『자력갱생휘보』에도 시국관련 기사를 싣도록 하였다. 註2) 조선총독부, 『조선농촌진흥관계예규』, 41~43쪽. 


농촌진흥운동의 기관지 『자력갱생휘보』



식민당국자는 9월 통첩에서 기존 농촌진흥운동과 시국 관련 증산·시설을 결합하여 이를 각 단계 농촌진흥위원회를 거쳐 실행시킬 것을 지시했다. 읍면농촌진흥위원회에는 종래 읍면장·경찰서·학교·금융조합 등 관내 관공서와 관변단체의 장이 참석했다면, 이번 통첩으로 ‘각 구장 혹은 그 대리자’도 참석시킨 점이 특징이다. 이는 농촌진흥운동에 시국관련 사업이 추가되면서 말단 촌락의 역할이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황해도 연백군의 읍면농촌진흥위원회는 위의 통첩을 반영하여 “읍면 내 관공서장官公署長·동리 구장·갱생지도부락의 위원장 혹은 흥풍회興風會 간부·기타 지방 유력자”로 조직·운영되었다. 註3) 연백군, 『농촌진흥시설개요』, 1쪽. 구장과 농촌진흥회의 간부들이 위원으로 활동하는 것이 제도화되어 읍면과 농촌진흥회는 한층 밀착된 관계에서 정책의 말단 침투를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일제는 1937년 9월 23일 ‘농산어민보국일’에 전국 58,000여 촌락에 353만여 명을 동원하여 ‘시국인식과 생업보국의 실천’을 강조하고, 당일의 ‘보국작업’으로 얻은 현금 15만 1천여 원, 곡류 250여 석을 전부 국방헌금으로 납부시켰다. 註4) 조선농정연구회, 『전시농산어촌지도요체』, 1938, 4쪽. 1938년 5월 1일 ‘농산어민근로일’에도 전국 70,443개 촌락, 284만여 명을 동원하는 등 농촌진흥운동의 기반을 이용하여 전시동원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註5) 「‘農山漁民勤勞日’實施の槪況」, 『자력갱생휘보』, 1938, 37~38쪽. 


농촌진흥운동과 생업보국을 결합시킨 논리와 방책은 무엇인가. 이제까지 농촌진흥운동은 개개 농가의 생활안정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농가의 수익과 무관한 물자 생산이 할당되고 공정 가격 등의 규제를 받는 시국 관련 증산정책을 통합하여 전개하면, 이른바 갱생 3대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註6) 팔심생남, 「時局と農村振興運動」, 『조선』, 1939, 5쪽 ; 川越敬三, 「朝鮮の自力更生に關する覺書(2)-(3)」, 『조선연구』 36-37, 일본조선연구소, 1965. 이에 일제는 “군수품·국민생활필수품 등의 원료 증산이 필요한 경우에는 이를 적당히 갱생계획에 넣어”, ‘생업보국’을 달성할 수 있다고 했다. 방법은 ‘행정운용의 묘체’를 살리면 된다고 했다. 즉 지도부락에서는 “갱생계획수립상 사용하였던 기본자료가 있고, 또 갱생계획으로 영농실체가 극히 명료하기 때문에, 국책에 신속하게 순응할 수 있는 극히 편리한 관계”에 있다고 했다. 註7) 「時局關係全鮮農山漁村振興關係官會同ニ於ケル大野政務摠監訓示要旨(1937.9.23)」, 『通報』 6, 1937, 13쪽. 지도부락의 갱생농가를 중심으로 실시한 현황조사도 파악한 실태를 활용하면, 농촌진흥운동을 인적·물적 자원동원의 기반으로 확대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농촌진흥운동은 점차 ‘봉공제일주의奉公第一主義’의 기치 아래 註8) 湯村辰二郞, 「農山漁民報國の要諦」, 『戰時農山漁村指導要諦』, 27쪽. 전시체제와 일체화되어 갔다. 


1938년은 제1차 지도부락의 5개년 계획이 만료되는 해였다. 계획이 만료된 촌락 중에 성적이 좋은 경우는 갱생공려부락更生共勵部落을 설치하도록 하고, 이 갱생공려부락에는 ‘부락시部落是’ 註9) ‘是’라는 것은 누구든지 주저 없이 옳다고 수긍하는 것이기 때문에( 「올흔 것(是)」, 『家庭之友』, 1월호, 1939, 1쪽), ‘부락시’란 구성원은 반드시 따라야 하는 실천 사항으로서 구성원의 실행을 압박하는 주요한 기제 중 하나였다. 를 정해 중심인물의 지도 아래 농민들이 협력하여 자주적으로 농촌진흥운동을 계속 실행하도록 했다. 이러한 점은 1934년 이후 설치된 지도부락도 마찬가지였다. 1933~1934년 갱생지도부락으로 선정된 5,110개 촌락 중에서 갱생계획의 실행 연한이 만료된 촌락 4,847개 중 92.1%인 4,463개 촌락이 갱생공려부락으로 전환했다. 나머지 381개 촌락은 여전히 관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갱생공려부락은 그 동안의 조직과 훈련을 통해 전시체제 아래 강화되는 부담을 ‘자주’·‘자발’·‘공려’의 자치력으로 해결하도록 강요받았다. 1939년 4월 현재 지도부락은 1938년까지 설치된 지도부락 21,962개·갱생공려부락 4,465개, 1939년에 설치된 지도부락 6,550개를 합쳐 32,977개로, 전체 73,507개 촌락 중 약 45%를 차지하였다. 註10) 조선총독부, 『朝鮮に於ける農村振興運動の實績』, 35·44쪽. 이로써 1940년경 농촌진흥운동 아래 농촌사회는 농촌진흥회를 통해 적어도 82%가 통제를 받는 가운데, 56%41,225/73,507의 촌락이 식민지권력의 직접 통제망에 놓이게 되었다. 


일제는 농촌진흥운동을 ‘촌락민의 자조공려’로 ‘민간 자체의 자주적 운동’으로 효과를 거두기 위해, 1938년 10월 총독부 농촌진흥위원회 위원 중 5명을 민간의 학식 및 경험자로 선임하였다. 註11) 조선농회장·조선금융조합연합회회장·조선어업조합중앙회장·조선산림회부회장·중추원참의(農林局長, 「農村振興委員に民間委員の選任に就き」, 『朝鮮』 12월호, 1938, 12쪽). 이는 전시수탈정책이 확대되는 가운데 농촌진흥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관변단체의 장이지만 민간인을 내세워 농촌진흥운동이 관 주도의 운동이 아니라 민간운동임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쟁수행을 위한 각종 부담을 농민들에게 가중시킬수록 일제는 농촌진흥운동을 민간운동으로 포장하려고 했다. 말단에서는 농촌진흥회 중심의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문맹퇴치의 중요성도 더욱 증대되었다. 문맹자에게 직접 접촉하여 지도하는 것도 어려워지는 데다가, 이들은 지시한 것만 따라하고 지시하지 않을 때는 종전 그대로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註12) 鄭寅寬, 「山回水抱한 興德部落訪問記」, 『농업조선』 4월호, 1938, 26~27쪽. 


일제는 중일전쟁의 전면화와 민족운동의 활성화에 긴장하면서 전시체제를 가동시키기 위해 강제적 지시나 압박으로 정책을 강행하는 한편 그 한계를 줄이고자 가급적 ‘협력’을 유도하려고 했다. 종래 문제점이 많이 지적되어 왔던 현황조사와 계획서를 간단히 작성하도록 하여 관의 업무량을 줄이는 가운데 면서기 등의 노력을 호별·촌락별 지도의 강화로 돌리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지도부락은 지도부락대로, 특히 갱생공려부락은 ‘전면적으로 복잡다단’한 지도를 받게 되어, 관의 간섭과 규제가 심화되는 만큼 농민들의 고통도 가중되었다. 註13) 「農振運動 끝난 갱생부락」, 『농업조선』 2월호, 1938, 107쪽. 결국 갱생공려부락의 실시는 촌락의 ‘자치’를 내걸고 의무와 책임의식을 주입하여 전시농정을 관철하려는 술책이었다. 일제는 전쟁수행을 위해 강도 높은 부담을 강요할수록 자주·자치·공려를 더욱 강조하였다. 


한편 농촌진흥운동은 심전개발운동의 지원을 받아 물심양면에 걸쳐 통제력을 확대하고 있었고, 농민들은 경제방면에서는 다소 반응을 보이지만 정신방면은 권력이 의도한 대로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註14) 팔심생남, 「物心一如として顯はるる農村振興運動」, 20쪽. 이에 심전개발운동을 확충 강화하는 형식으로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하 精動運動을 전개하였다. 정동운동은 농촌진흥운동과 함께 전시동원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이른바 일본정신과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대대적으로 조선민중에게 주입하면서 전쟁수행의 협력을 유도하고 있었다. 


이미 농촌진흥운동 “자체가 전쟁을 위한 국력증진운동” 註15) 팔심생남, 「朝鮮における農村振興運動を語る」, 24쪽. 이 된 시점에서 두 운동은 서로 중복되는 양상을 보였다. 조직면에서 정동운동의 최하부 기저조직인 애국반은 농촌진흥회의 기반을 이용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또 농촌진흥운동이 월례회를 변형한 생업보국일을 정례화하여 황국신민의식 등을 주입하고 있었고, 정동운동 역시 조선민중의 내선일체화와 황국신민화를 획책하면서 민중의 경제생활도 규율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 운동은 중복에 따른 마찰이 일어났다. 즉 “농촌의 정동운동의 형식이 농촌진흥운동의 그것과 자못 유사하고 그 대상인 농촌의 대중은 어느 쪽에도 같이 관계하여 이들 두 개 큰 운동은 서로 대립 경합” 註16) 팔심생남, 「農村指導の實際」, 『農村振興指導者第1回生業報國講習會速記錄』, 조선총독부, 1940, 426~427쪽. 하였던 것이다. 이에 1939년 5월 6일 정무총감은, 정동운동은 조선민중의 황민화를 위한 정신통제로서 전시협력토대를 마련하고, 농촌진흥운동은 정동운동의 지도원리와 목표에 기초하여 생산을 확충하여, 양자의 일치로 농민들의 생활에 생업보국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註17) 「國民精神總動員運動ニ關スル件(1939.5.6)」, 『자력갱생휘보』 68, 1939, 1~2쪽. 이러한 양 운동의 통합 조정 방침은 말단조직의 동향에도 반영되어, 농촌진흥회식산계와 부락연맹으로 일원화되는 추세였다. 註18) 정동운동과 농촌진흥운동의 말단조직이 통합되기 이전에 촌락에는 여러 단체가 중첩되어, “부락의 중심인물은 많은 단체의 간부를 겸임하고, 가장 심한 예는 어느 부락에서 1명의 중심인물이 40여 단체의 간부을 겸하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河祥鏞, 「部落指導體系確立に就て若干の考察」, 『金融組合』 135, 1939, 19쪽). 이들 단체의 정리는 정신방면은 정동운동, 물질방면은 농촌진흥운동의 말단조직으로 각각 통합 조정해 가는 쪽으로 진행되었다(『동아일보』 1939년 1월 26일 「수다한 각종 단체를 정신연맹하에 통합, 계통과 사업의 交錯을 조정」와 「물적 운동은 농촌진흥단체에, 관계 局課서 절충협의」). 더 나아가 조직의 계통성과 철저함에서 다소 앞선 정동운동을 중심으로 단체들이 통합되어 가는 추세였다. 경기도는 1940년 8월 정동운동의 조직과 행정기구의 구역을 동일하게 하고, 단체장도 한 사람이 겸임하여 말단조직을 강화하는 방침을 마련했다(『매일신보』 1940년 10월 14일 「실력잇는 인물등용, 町總代·町聯盟理事長·防護組合長을 겸임』).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양 운동은 대립 갈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농촌진흥운동은 정동운동의 기반이 되었고, 정동운동을 통해 농촌진흥운동의 토대도 확장되었다. 양 운동의 대립이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1940년 10월 국민총력운동으로 통합·흡수될 때까지 상호보완적으로 조선에서 전시동원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2. 농촌진흥회의 개편과 실태

일제는 1938년을 전후하여 농촌진흥회를 자치공려단체로 정비 강화하고자, ‘갱생지도부락공려시설개조요강更生指導部落共勵施設改造要綱’ 註19) 水田直昌 감수, 『資料選集 朝鮮における農村振興運動』, 264~269쪽. 을 발표하였다. 1인人1역役주의主義·부문위원·5호작통5인조은 농촌진흥운동 초기에도 지역에 따라 부분적으로 실시되고 있었지만, 이때 한층 확대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일제는 농촌진흥회의 구성원 전원에게 역할을 분담하여 실천책임자로서 자치성을 높이면서, 전 촌락민의 일상적인 삶의 세밀한 부분까지 파악·통제하려고 했다. 이를 촉진하기 위해서 지도부락이 아닌 경우에도 농촌진흥회의 공려망으로 자치를 훈련시켜, 지도부락 선정 이후 본격적인 관의 침투를 준비시켜 나간다는 방침이었다. 1939년 5월 11일 농림국장은 이런 방침을 다시 확인 강조했다. 註20) 「部落ヲ單位トスル共勵團體ノ指導ニ關スル件」, 『자력갱생휘보』, 19395, 2~4쪽. 


이를 실행하기 위해 먼저 기존 촌락단체를 통폐합하여 농촌진흥회가 이를 흡수하고, 농촌진흥회의 각 부장이 일을 나누어 맡아 실행하도록 하였다. 황해도의 경우는 부제部制를 이미 1935년경부터 실시하여 이 무렵 더욱 확충하였다. 농촌진흥회장에 해당하는 위원장 아래 교화·기장記帳·색의장려·부채정리·저축·납세·보안·위생·도로·도작稻作·면작·연초경작·임업·축산·비료·양잠·승입繩▲{目+入}·특수 부업수산의 총 20개 부문위원을 두도록 했다. 註21) 황해도, 『部門委員必携』, 1937. 


전남의 경우는 1939년 6월 27일자로 8,460개의 농촌진흥실행조합의 명칭을 농촌진흥회로 변경하였고 규약 준칙도 고쳤다. 이전 규약 3조에, “본회는 양풍미속을 조장하고 … 농촌민풍의 진흥을 도모 …”한다고 한 것을, 註22) 전라북도, 『黎明を仰ぐ全北農村』, 1934, 2쪽. “황국신민된 본분 … 생업보국의 실질을 거둠” 註23) 「全羅南道に於ける農村振興實行組合の名稱の變更と振興會規約の制定」, 『자력갱생휘보』, 1939, 36쪽. 이라 하여, 전시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또 충북은 농촌진흥회의 연락통제기관으로, 각 읍면별로 농촌진흥회연합회를 조직하여 1939년 7월까지 완료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각 농촌진흥회연합회의 부담금은 농촌진흥회의 기본재산의 수입과 회원의 공동경작 수익금으로 충당하도록 하였다. 註24) 「忠淸北道に於ける部落振興會聯合會の設立」, 『자력갱생휘보』, 1939, 37~39쪽. 


경기도 농촌진흥회 편, 『농촌진흥회 약속』(1935)


한편 ‘시국인식의 기관’으로서 매우 유용한 농촌진흥회의 월례회月例會는 이즈음 관의 개별지도의 부족을 보완하고 교화와 생업보국을 추진시키기 위해 더욱 중시되었다. 그러나 촌락 내 각종 단체가 난립하는 가운데 월례회는 소기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강원도는 농촌진흥위원회 위원들의 월례회 참석을 지시하고, 군읍면에는 월례회 지도명부·촌락에는 회의일지를 비치하도록 했다. 또 관공서 주최 회합의 난립을 막고, 농촌진흥회의 월례회를 중심으로 일원화하여 농촌진흥회의 기능을 강화하도록 했다. 註25) 「江原道に於ける農山漁村夜學會及月例會指導方針」, 『자력갱생휘보』, 1939, 39쪽. 이 무렵 황해도 연백군의 월례회를 보면, 註26) 연백군, 『농촌진흥시설개요』, 67~68쪽. 개회위원장 주재→출결석자 점호記帳 위원→위원장 인사→가계부에 의한 반성기장위원과 교화위원 주재→농사상담각 부분위원→촌락의 공동적 사항 협의위원장→공동저금·저축 등의 접수저축위원→계획 실시 및 지난 번 지도사항 검토임석 직원→기타 간담위원장→황국신민의 서사 제창→폐회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월례회가 정책 실행의 자치적이고 규율적인 훈련의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에서는 전시체제기 농촌진흥운동이 말단 농촌진흥회에서는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또 이 과정에서 농민들이 자체적으로 진행시키고 있던 촌락재편이 어떻게 농촌진흥운동에 편입되는지 그 양상의 일단을 살펴보고자 한다. 註27) 이런 사례는 평남 新寺洞·전북 貞忠·충북 新里에서 볼 수 있다. 


평남 용강군 다미면多美面 치의리幟衣里 신사동新寺洞은 註28) 隱龍生, 「指導部落新寺洞」, 『농민생활』 5월호, 1939. 치의리는 구동리 幟衣洞이 신동리로 전환된 경우이며, 신사동은 1917년 4월 초까지는 관에 파악되지 않았으며 이후 형성된 마을로 보인다. 31호의 마을로, 1929년부터 청년들이 용진구락부라는 자체 단체를 조직하여, 금주·금연·도박 금지를 비롯하여 마을의 모든 일을 ‘자위’해 왔다. 그러던 중 농촌진흥운동이 일어나면서 신사동이 진남포경찰서 오화리五花里주재소가 담당하는 지도부락이 되어 갱생회가 설치되자, 용진구락부는 1936년 8월 19일 임시총회의 결의로 해체되고 모든 사무를 갱생회로 인계하였다. 임원과 부서가 변경되고 “자긔네들끼리만이 하던 일과 달라 관청과 긴밀한 연락을 … 긴장미가 농후하게” 되었다. 갱생회는 회장·부회장·회계·서기를 비롯하여 교화부·저축부·산업부·부업부·청년부·부인부·실행부·납세부·알선부의 9개 부를 두고, 각 부에는 부장과 간사를 두었다. 이 중에 회장은 교화부장, 부회장은 회계, 서기는 산업부장을 겸하고 있어, 마을 주민 19명이 갱생회의 직책 22개에 참여하고 있었다. 19명은 대체로 호戶의 대표이므로 전체 호수의 61%가 갱생회에 참여한 셈이다. 이는 많은 구성원들에게 역할을 분담시켜 갱생회를 중심으로 생활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그 사업의 지속성을 담보하기 위함이었다. 


교화부는 국체명징과 풍속개량, ‘국민으로서 실행할 의무’가 있는 일을 맡고, 청년부와 실행부의 후원을 얻어 마을을 수시 순회 감시하고, 회원의 ‘지식연마’에 필요한 과목을 선정하여 단기강습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저축부는 계절마다 곡류를 모아두었다가 농량이 부족한 사람에게 저리로 대부하고 또 저축으로 비료 대금을 준비시키고 있었다. 산업부는 “관공서에서 지도하는 산업부문을 완전 소화”하여, 산미개량증식은 물론 면화증산계획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해 작부면적을 조사하여 면장과 재배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또 알선부와 함께 비료 구입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부업부는 가마니 생산에 주력하고 있었으며, 청년부는 마을의 미화와 혼상제례의 대소사 등을 맡았고, ‘육군기념일’을 근로보국일로 하여 5㎞의 돌길을 닦기도 했다. 실행부는 갱생지도농가의 5개년 계획의 수립·실적 기입·가게부 기재 등의 일을 맡고, 고리부채의 정리 및 자금 상환을 담당하고 있었다. 납세부는 ‘납세보국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 고지서의 배부와 납기 독려 등을 실행하고, 알선부는 비료 등의 공동 구입을, 부인부는 가정의 가계와 생활개선을 맡고 있었다. 신사동은 청년 중심으로 자체적인 촌락개선운동을 하다가 농촌진흥운동으로 흡수·재편된 사례이다. 촌락의 사람들이 대거 참여한 관제조직 갱생회의 각 부서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활동하도록 짜여 있었다. 자연히 갱생회가 생활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일제는 이렇게 조직을 통해 농민들이 자체적으로 정책에 참여하도록 촌락을 재편하였다. 


전북 남원군 주생면周生面 정송리貞松里 정충貞忠 마을은 대성大姓인 양씨梁氏 양해집梁海集이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註29) 大野保, 『朝鮮農村の實態的硏究』, 1941, 2부 1장. 1917년 현재 貞松里는 구동리 盤松里와 구동리 忠村里와 老山里의 각각 일부로 구성되어, 貞忠이란 마을명은 없으나 충촌리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정충에는 농지의 대부분이 외지 사람의 소유로 빈농이 많으며 고리대가 발호하고 있었다. 몇몇 호수만 식량을 자급할 수 있었으며, 나머지는 연 6할의 장리곡長利穀에 의존하고 있었다. 농촌진흥운동이 이 마을에 전개되기 전에, 양해집이 중심이 되어 농민들에게 개인고리대를 일체 이용하지 않을 것과 도박과 음주에 대한 벌금을 약속받았다. 장리곡은 이웃한 반송盤松과 상동리上洞里 등지에서 얻어 썼는데, 양해집이 나서서 이런 곡식이 마을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절미운동과 부업 등을 크게 장려하여 다소 여유를 찾게 되었다. 註30) 姜萬注(1930년생)·梁炳允(1931),·梁炳龍(1936)의 증언. 일제는 이렇게 중심인물이 있고 다소 갱생의 여지가 있는 정충을 지도부락으로 선정했다. 정충에는 1932년 12월 농촌진흥회와 1933년 지도부락이 설치되었다. 1938년 4월에는 농가갱생계획 실행 연한이 만료됨에 따라 공려계획이 실시되었다. 


양해집은 촌락 내외를 “엄히 경계하여 … 방종할 틈을 주지 않음”과 동시에 ‘사람들의 생활내부’를 농밀하게 파악하면서, 농민의 관공서 출입을 대행하고 관의 촌락에 관한 사무도 처리하고 있었다. 1939년 6월에 결성된 부락연맹은 농촌진흥회와 표리일체가 되어 “총후 농촌에 부과된 사명을 완수”하고 있었다. 정충은 일부 공동자금을 기초로 수차와 발동기 등을 구입하고, 그 사용료와 약간의 공동경작지에서 생긴 수입 등으로 공동재산을 조성하고 있었다. 공동재산의 일부는 종래의 장리곡을 대신하여 농민들에게 대부되었으며, 촌락의 공동사업의 비용으로도 충당되었다. 이렇게 농촌진흥회는 농민들에게 다소 저리한 자금을 융통해 주고 있었다. 양해집은 마름의 일도 담당하였다. 마을의 남녀노소 모두의 노력으로 점차 토지도 되찾게 되었다. 이로써 정충은 모범부락이 되었고, 공회당에는 상장이 즐비했다고 한다. 註31) 강만주·양병윤의 증언.


전시체제로 전환되면서 정충에는 황군위문대 대금·신사건설의 기부금·임원 등의 접대비·봄 가을 2회 청결검사비·촌락 총회의 식비·국기대 등과 같은 전시체제 관련 사업와 비용이 증가했다. 정충에서는 관의 각종 부담이 할당되면 공동재산에 의존하여 지출되었기 때문에, 농가별 직접적인 부담이 다른 촌락보다 “훨씬 가벼워서, 이 촌락에 거주하려고 하는 사람도 매우 많(을)” 정도가 되었다. 


농촌진흥운동에서 공동경작 등을 통해 공동재산 혹은 공동기금의 조성이 강조되었는데, 이는 식민지 행정이 말단에까지 확대되는 데에 수반되는 시설과 사업의 비용을 촌락의 공동연대로 충당시키기 위한 재원 마련과정이었다. 농민들은 농촌진흥운동을 통해 편성된 조직을 통해 가중되는 부담을 그때 개인부담과 함께 농촌진흥회의 공동재산 등으로 감당하였다. 농민들은 농촌진흥회에 들어가 피할 수 없는 부담들을 공간적·시간적으로 분산시키면서 취약한 생활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제는 이렇게 식민지 질서로 재편하는데 필요한 자원과 장치를 조선 농민들 스스로 재생산하도록 획책했다. 


정충의 중심인물 양해집은 일찍 아버지를 잃고 자작지 1두락 정도의 살림을 가지고, 형제·자식들과 소작 경영 등으로 집안을 일구었다. 15두락1정보 정도의 규모가 되자 작은 아들의 살림으로 5두락을 분배했지만, 서류상으로는 15두락 정도의 자산을 바탕으로 면협의회에 나갔다고 한다. 註32) 양병용의 증언. 양해집은 농촌진흥회장·정동운동 부락연맹이사장·구장·면협의회원·학교위원 등을 거쳤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를 ‘수호신守護神’과 같이 따랐다. 정충은 양해집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촌락질서의 재편이 진행되다가 관제운동과 조직을 통해 체제내로 편입된 사례이다. 


농촌진흥운동을 거치면서 정충의 촌락질서가 재편되는 가운데 진행된 농가의 변동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정충은 1933년 현재 70호 중에서 46호가 갱생계획농가로 지정되었다. 이후 1939년 조사에서는 46호 농가 중 43호만 확인되었다. 이때 확인된 43호 중 36호는 다소 토지를 구입하거나 소작면적을 확장하였다. 이에 비해 나머지 7호는 일부 가족의 출가·인부감독·분가·호주의 이주·전업 등의 이유로 경작하던 토지를 줄이거나 토지경영에서 이탈한 경우였다. 1933년에 시작된 갱생계획이 1938년 4월에 끝나고 갱생공려부락으로 전환되는데, 그 동안에 46호 중 적어도 7호가 영농에서 이탈 혹은 경영을 감소하는 가운데, 3호 역시 이와 비슷한 탈농화 과정을 거쳐 이미 촌락을 떠나 1939년 조사에서 파악되지 않는다. 따라서 46호 중 36호가 다소의 자작지 혹은 소작지를 확대하는 가운데, 10호가 경제적 몰락 등으로 탈농화 혹은 경영규모를 감소하는 현상이 함께 진행되었다. 그리고 1939년 전체 농가 91호의 경영 규모가 대략 0.87정보인데, 이 정도로는 자가노동력을 충분히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체 농가 중 약 60%에 해당하는 44호에게 겸부업 혹은 출가임노동은 생계보충적 혹은 절대 필수적이었다. 註33) 大野保, 『朝鮮農村の實態的硏究』, 196~199쪽. 따라서 정충에서 보듯이 농촌진흥운동 아래 농가계층의 이동이 상당히 진행되었다. 일부 농가의 경제적 몰락과 탈농을 배경으로 일부 농가가 다소 경지를 확대하여 ‘갱생’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란 일부 농가의 ‘희생’에 기초한 것이었다. 


농촌진흥운동은 촌락질서를 재편하려는 일제의 정책적 의도 아래 시작하여 농민들의 내적 동기를 흡수하고 자극하면서 전개되었다. 일부 농가는 농촌진흥운동에 대응하여 경제적 갱생의 가능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란 다른 농가의 탈농 혹은 경영규모 축소와 같은 ‘희생’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리고 농촌진흥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농가는 일제의 산업화 정책의 노동력으로 북부지방과 만주로 이주당하고 있었다. 註34) 당시 북부지방의 공업화와 만주개척 등에 알선되어 이주한 농가들 중에는 농촌진흥운동을 통해 파악된 농가의 현황자료와 갱생지도부락에서 갱생가능성이 없거나 몰락한 농가들이 상당수였을 것이다. 1938년 9월 조선총독부시국대책조사회 회의에서 위원과 농림국장 사이에서 농촌·농업의 진흥에서 이민문제가 중요하다고 논의하고 있었다(조선총독부, 『朝鮮總督府時局對策調査會會議錄』, 138~139쪽). 따라서 식민지권력이 농촌진흥운동으로 농가의 사적 영역에까지 파고들어갔던 정책적 의도의 하나가 노동력을 조정할 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농민반응과 사회변화


1. 농촌사회의 동향

농가의 경영 파탄은 일제에게 ‘통치의 통고痛苦’로 인식되었고, “면면촌촌이 가보면, 등이 달도록 농사 … 그러케 뼈가 휘도록 일하고도 살 수 업(는)” 현실 앞에, 註35) 「창간주년호를 내이는 농민생활에 주는 말」, 『농민생활』 6월호, 1930, 13쪽. 농민들의 관심은 “명일의 생활은 어떠케 될 것이냐”하는 것이었다. 註36) 韓長庚, 「농민생활의 변천과 자작농창정의 의의」, 『농업조선』 7월호, 1938, 12쪽. 일제는 이런 현실을 타개하면서, 농촌·농가의 생활을 전면적으로 재편할 목적으로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위해 농가를 파악하려고, 호별 현황조사와 계획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가정의 정체를 드러내는 조사”에 대해 농민들은 “이번 경제조사는 경작 두락 수가 많은 것은 적은 데에 균분시키는 것이기에, 거짓을 하지 않으면 소작을 회수당한다”고 하듯이 의구심을 갖고 기피했다. 註37) 文在球, 「農村經濟調査の苦心談」, 『府邑面雜誌』 3-11·12, 1933, 22쪽. 또 평소 ‘인민의 의혹의 표적’이 되고 있는 일선 관리의 조사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여기에 많은 농민들은 문자를 모르고 대체로 단순한 생활을 하던 터에, “복잡다기한 농업경영의 수지계산 목표”를 세우도록 종용하고 간섭하는 것을 피하여, 농촌을 떠나 도시의 간단한 노임생활을 선택하기도 했다. 註38) 內務局 地方課, 『人口ノ都市集中防止關係』, 140쪽. 일제에게 현황조사와 계획서 작성은 종전의 면접적 정책 시행의 한계를 넘어 행정력을 일상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세밀하게 미치게 할 수 있는 기초적 수단이었기 때문에 계속 강행되었고, 대신 조사와 계획서를 좀 더 간단히 작성하기로 했다. 


갱생계획을 수립한 농가는 1940년 3월 현재 891,400호에 이르러, 註39) 조선총독부, 『시정연보(1940년도)』, 1942, 614쪽. 갱생계획 예정 호수 230만호의 약 39%에 해당했다. 갱생계획농가와 지도부락은 농촌진흥운동의 직접적인 대상인 만큼, 이에 대한 지도의 성과 여부는 다른 농민에게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일제의 농촌·농업 정책의 시금석이었다. 註40) 『조선중앙일보』 1935년 11월 22일 「갱생운동의 효과여하」. 나아가 농촌진흥운동은 전체 농가와 농촌을 대상으로 농촌진흥회를 통해 지도부락과 갱생계획농가에 준한 정책을 예비적 훈련 차원에서 실시하고, 전국적으로 농촌진흥회가 설치되는 과정을 볼 때, 어느 촌락과 농가도 농촌진흥운동으로부터 크게 자유롭지는 못했다. 


농촌진흥운동이 경제적 갱생을 목표로 하되 이를 정신적 지도를 바탕으로 전개한다는 방침이었기 때문에, 영농법의 개량에서 생활방식과 풍습을 변화 개선시키는 전면적인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실제로 농촌진흥운동은 생활개선에 크게 치중하여 색의착용色衣着用·단발·관혼상제 비용의 절약 등을 단속하면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는데 급급하여 많은 반발을 초래했다. 면의 직원들은 섭울타리를 돌담으로 개조하라고 강제로 헐어버렸고, 색의착용·단발 등과 같은 매우 사적인 영역을 무리하게 간섭했는데 특히 후자와 관련하여 조선 민중들은 ‘인권유린’이라고 반발했다. 註41) 『조선중앙일보』 1935년 10월 31일 「진흥운동의 파생적 폐해」. 또 경조사의 비용을 농촌진흥회를 통해 규제하는 것과 관련하여, 주인이 큰 일을 치루기 위해 빈객의 수를 미리 계산하여 음식을 준비하고, 손님들은 참석하여 준비 정도에 따라 회비를 거두어 주기 때문에, 경제적 여유가 없는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관습이라고 하면서, 이는 당시 도시의 ‘회비제의 모체’라고 하여 일제의 정책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註42) 朴在敏, 「金化 金城 淮陽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의 농사제도」, 『농업조선』 11월호, 1939, 41쪽. 이렇듯 ‘개선’이란 명분으로 기존 생활양식과 전통을 무시한 생활개선운동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註43) 南抱聲, 「사회시평」, 『비판』 12월호, 1938, 17쪽. 그리고 이에 앞장서고 있는 농촌진흥회가 법률적 근거도 없이 규약 위반을 이유로 ‘임의任意의 사형私刑’을 명령하고 있다고 반발하기도 했다. 註44) 『조선중앙일보』 1935년 10월 31일 「진흥운동의 파생적 폐해」. 


일제는 경제적 갱생의 방법으로 생활비 지출을 줄이기 위해, 모내기 등 공동작업에 따르던 공동취사와 공동식사, 점심 후 간식 등을 폐지하고 도시락을 지참하도록 했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것은 일하는 사람들 사이의 연대의식과 노동의 결속을 더욱 강화시키고, 노동 중간의 휴식은 노동을 유희화하여 전체적으로 볼 때 능률 증진의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註45) 인정식, 『朝鮮農村雜記』, 東都書籍, 1943, 11·13쪽. 그러나 일제는 시간절약과 노동력 강화를 내세워 이런 것들을 없애도록 했다. 이렇듯 능률과 합리성을 내세운 정책의 강행과 그에 따른 반응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예컨대 사료를 끓여 먹인다고 연료의 낭비를 지적하지만, 이것은 난방용 불을 때면서 익혀주는 것이기 때문에 낭비가 아니라는 것이다. 부분적으로 영농법에 개량해야 할 여지가 있지만, 조선의 농업도 오랜 체험과 전통에서 얻은 만큼, “일견 괴이하게 뵈이는 사실”도 “전생활체계와 관련에서 볼 때 반드시 일정한 합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개의 현상에 잠재된 ‘사회적인 원인’과 ‘심원한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항변도 있었다. 註46) 인정식, 「경주지방의 농촌생활-橘樸선생을 동반하야」, 『조광』 4월호, 1941, 58쪽. 


그러나 한쪽에서는 농촌이 관혼상제 등 의례와 습속이 복잡하고 이에 따른 지출 부담이 크다는 등을 이유로 도시로 전출하기도 하였다. 註47) 내무국 지방과, 『人口ノ都市集中防止關係』, 162쪽. 또 일제의 생활개선정책의 문제점을 인정해도 생활의 합리화는 불가피하다고 보고, 기우제 등을 미신 행위로 규정하여 이를 없애는 데는 법적 조치보다 ‘일반 계몽’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보아, 농촌진흥회 등의 활동에 기대를 걸기도 했다. 註48) 南抱聲, 「사회시평」, 『비판』 10월호, 49쪽. 따라서 일제는 더러 조선민중 사이에서 호응을 얻으면서 생활개선운동을 강행했다. 


여하튼 생활개선·농사개량을 통해 어느 정도 일시적인 생활 안정의 효과를 보았지만, 이것만으로는 농촌진흥운동에 대한 참여를 유인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농민들이 “일반으로 무식하고 보수적인 것도 사실”이지만 “자기의 이해문제에 들어서는 의외로 현명”하며,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고 해도 “먼저 자기이해의 거울에 빛이여 보아서, 그것이 자기에게 얼마나 유리할가를 판단하여 본다”는 것이다. 즉 때로는 “힘에 눌리어서 … 그저 시키는 대로 실행을 하고 있을지언정 자기의 뱃속에는 이미 어떠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고 한다. 농촌진흥운동에서 제시한 사항은 “모다 좋기는 좋으나 그것만으로는 꼭 갱생되리라고 믿어지지 안는다”는 것이다. “내가 지은 농사를 내가 혼자 먹는다면 나도 부자 노릇을 하고 살겠다”는 것이다. 註49) 韓長庚, 「農家更生計劃의 又一段擴充의 필요」, 『농업조선』 4월호, 1938, 9~10쪽 ; 한장경, 「南朝鮮踏査記」, 『농업조선』 1월호, 1939, 41쪽. 소작권의 안정과 소작료 문제 등이 완화되거나 자작농이 되기 전에는 농촌진흥운동은 농민의 생활 안정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에 일제 역시 농촌진흥운동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 불안정한 소작권, 경작지 편중현상 등에 대해 고심했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농촌진흥회를 앞세워 소작지의 분배와 통제를 도모하기도 했다. 


농촌진흥회가 소작권 안정과 소작지 분배에 어느 정도 관여했고, 이런 사례가 신문·잡지에 실렸을지언정, 이 문제는 1940년을 전후한 노무동원정책이 본격화되기 이전에는 그다지 큰 진전이 없었다. 전북은 앞에서 보았듯이 1932년 소작농 72%, 소작지 59%로 전국 평균을 크게 웃돌았다. 또 1937년 현재 소작농 70%, 소작지 83%를 차지하여 소작지 편중 및 지주소작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 그리고 이런 소작농과 세농의 존재는 치안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작지 편중 문제가 검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시 열심히 검토되어”, 관에서 한때 2~3개월 이상 이 문제에 ‘몰두’하기도 했으나, “실제는 형식적인 재배분으로 표면은 어쨌든 실제로 재분배는 기대에 어긋났었다”고 한다. 그리고 농촌의 잉여노동력이 점차 감소해감에 따라 자연히 경작지 편중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한다. 註50) 嶋谷篤, 「待つあるの農政」, 77쪽. 예컨대 1930년대 초 경작지 편중현상이 심할 때는 20정보의 소작지를 경작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농업노동력을 고용하기 어려워져서 1940년대 초에는 가장 큰 면적의 경작지라고 해도 4정보를 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농촌진흥운동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 경작지 재분배 문제도 한 방안으로 검토되었으나 실제 재분배가 이루어진 것은 미미했음을 알 수 있다. 


농민들은 이렇게 소작문제라는 근본적인 해결안이 빠진 갱생계획표나 설명에는 “엇더한 감동을 늣기지 못하고 오직 축음기 소리를 듯는 듯한 생각밖에 가지지 못(하여)”, “일반으로 갱생운동에 대한 신념이 박약”한 실정이었다. 또 농촌진흥회가 설치될 때 “당국으로부터 특별한 은전을 몽蒙할 것”을 기대하였으나, “아모 특전이 업(음)”을 알고 부진한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註51) SR生, 「更生途上에 잇는 豆寺里共勵組合」, 『충남진흥월보』 9월호, 1935 ; 吳定鎬, 「更生部落中堅 諸位에게」, 『충남진흥월보』 10월호, 1935. 이렇듯 농촌진흥운동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운동’이 아니라 ‘추종’ 양상을 띠어, “타력으로써 북새를 놓은 동안은 부락의 갱생기가 목전에 닦처 온 것 같이 보이지만 그 운동이 조곰만 쉬여지면 도로 제 도로목이 되는 일이 적지 않(은)” 상황이었다. 註52) 한장경, 「갱생도정에 있는 下金梧部落을 찾어서」, 『농업조선』 2월호, 1938, 62쪽. 


농촌진흥운동에 대한 농민들의 이런 반응 속에, 식민지권력은 “그 목표·체계·조직 등에서 아마도 조선미증유의 대운동인 만큼 여러 방면에서 농촌대중을 자극해왔(으나)” 이에 대한 민중의 수용심리는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다”고 우려하였다. 즉 온갖 수단을 써서 건드려도 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갱생계획표·가계부·월례회도 농민들에게는 생각만큼 자극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실적이 상당한 농가나 농촌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보면, 지지부진하여 일이 순조롭게 되고 있지 않은 편이다”고 한다. 註53) 淸風生, 「朝鮮農村の生活を語る」, 『朝鮮地方行政』, 1937, 112쪽. “실제 지도할 때마다 그(5개년 계획) 취지를 설명하려고 하지만 … 그 효과는 전혀 없는 데 가깝다” 註54) 「農山漁村振興指導方針の改革を要望す」, 『조선행정』 12월호, 1939, 112쪽. 는 것이다. 


2. 일상사의 변화

이러한 부정적인 주장들이 제기되는 가운데, 농촌진흥운동은 직접적 성과 이외에 통치 전반에 끼친 효과가 컸다는 주장도 있었다. 즉 현황조사와 계획서 작성 등으로 숫자관념이 들어가면서 생활에 대한 반성이 ‘순치’되고, 강연과 행사의 내용을 그때 한번만 실행해도 농민 전체를 보면 적지 않은 숫자라는 것이다. 근로 증진·소비 절제·풍속 개량 등에 대해 농민들이 실현 가능성을 의심하더라도 돌아서서 한번씩은 음미해 보고, “시험으로라도 한번 실생활에 체험”하기 때문에, “생산증가보다도 그 효과가 막대한 것”이라고 하였다. 정책들이 부지불식간에 생활 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은 식민지권력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註55) 최종준(경기도 농촌진흥과), 「농촌진흥운동의 과거와 현재」, 『농업조선』 1월호, 1941, 20~21쪽. 


조선총독부 촉탁 증전수작增田收作은 1939년 대한발大旱魃이후 지도부락은 물론 일반촌락까지 순회 조사한 뒤 일반촌락이 지도부락에 비해 대용작물의 성적 등 한해 대책에서 현저히 뒤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본 운동의 전면적인 확충 필요가 절박함을 통감”했다. 註56) 增田收作, 「旱害地ヲ往ク」, 『通報』 61, 1940, 15·12쪽. 이에 따라 지도부락은 1939년 현재 32,777개에서 1940년도에도 증설되어 41,225개로 증가되었다. 


농촌진흥운동은 크게 보면, 기존 봉건적 고율소작료와 영세한 소작빈농의 존재에는 거의 손을 대지 못한 채, 농민들 자력으로 즉 “노동집약적인 근로제일주의”로 갱생시키려는 운동이었다. 註57) 인정식, 『朝鮮農村再編成の硏究』, 인문사, 1942, 82쪽. 농촌의 여름 밤 ‘모정 혹은 정자나무’ 아래에서 야담으로 ‘하루의 피로를 위안’하거나 ‘농사상담’ 등을 하던 모습과 달리, 밤늦은 시간에도 가마니짜기 등 부업에 종사하고 도시의 정기 휴일과 같은 농촌의 명절도 대부분 사라지고, 심지어 추석 다음 날에도 근로봉사에 나가야 했다. 농민들은 정월 보름 이후 혹은 2월이 되어 농사를 준비하던 이전과 달리 시간의 노동화·노동시간의 연장으로 ‘갱생’을 압박당하고 있었다. 註58) 駱山人, 「진주마산창원을 중심한 경상남도 농사제도」, 『농업조선』 8월호, 1939, 39쪽 ; 한장경, 「남조선답사기」, 『농업조선』 1월호, 1939, 43쪽 ; 박재민, 「평안도의 농사제도」, 『농업조선』 6월호, 1940, 61쪽. 


일상적인 삶의 변화를 보면, 집회를 경험하지 않아, “어린 아해들이 따라와서 장내를 소란이 했다. … 크다란 목소리로 서로 말들을 하고, 아는 이가 늦게 오면 저저마다 수인사”를 하는 반면, 경험이 쌓인 쪽에서는 “어떤 부인은 잠든 어린아해를 강단에 올녀 다 눕히고 파리가 돌나부터도 이저바리고 앉어 있다. 부인들 중에 말마다 올습니다. 나도 그렇게 해요 한다”고 註59) 李散羅(평안남도 농진과), 「平南의 奧地 寧遠巡廻記(상)」, 『농민생활』 1월호, 1940, 54~55쪽. 하였다. 농촌진흥운동으로 일상의 삶은 이전의 단순하고 자유스러웠던 양상과 달리 규율적이고 통제적인 상태로 변화되고 있었다. 


전시체제기 농촌진흥운동은 생업보국의 기치 아래 농가 경제와 유리된 국책 관련 생산도 해야 했다. 이는 표면상 호별 경제갱생을 완전히 방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시동원을 전면적으로 강행하는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농촌진흥운동에서는 ‘생업보국’이라 하여 전쟁수행에 필요한 농산물 증산을 강조해도, “개인경제적으로 거부되는 사태”도 있었다. 註60) 久間健一, 『朝鮮農政の課題』, 成美堂書店, 1943, 379쪽. 전시동원의 원활한 운영은 사회운영의 원리를 전체주의로 완전히 대체시켜 생활과 생업이 계획화·통제화되어야 했다. 이에 농촌진흥운동은 1940년 10월 정동운동과 함께 국민총력운동으로 흡수되었다. 


   3. 농촌통제와 농민운동


1. 농촌진흥회의 소작문제 개입

1930년 현재 부정기소작이 80%를 차지하고 토지매매가 빈번하게 이루어지던 상황에서 註61) 조선총독부 농림국, 『朝鮮ニ於ケル小作ニ關スル參考事項摘要』, 1934, 75~76쪽. 소작권 관계는 1930년대 소작쟁의 원인의 거의 70~80%를 차지하고 있었다. 농지령이 시행되는 1934년의 경우 쟁의 건수 7,582개 중 소작권 관계는 5,518개로 72.7%, 1935년의 경우 쟁의 건수 25,834개의 약 80%20,877개가 소작권 관계 쟁의였다. 註62) 정연태, 『일제의 한국농지정책(1905-1945)』, 서울대박사학위논문, 1994, 218쪽. 이러한 사정에서 소작권에 대한 지배력은 농민통제의 핵심사항 중의 하나였다. 


일제는 1932년 11월 농촌진흥운동을 시작하면서 보조정책으로 같은 해 12월 ‘조선소작조정령’과 1934년 4월 ‘조선농지령’을 공포하였다. 두 법령은 소작쟁의의 집단 혹은 직접 행동을 일체 금하고 농민조합 등의 쟁의 개입을 금지시켰다. 한편 농민들의 소작관계 문제는 군면 관리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군소작조정위원회郡小作調整委員會의 중재나 법정 판결로 해결하도록 했다. 


조선농지령


이는 지주소작문제에 식민지권력이 직접 개입하여 소작농민을 직접 파악하고 아울러 쟁의의 집단성을 분산시키고 농민운동을 개별 격파하려는 정책의 소산이었다. 소작계약의 70% 이상이 구두계약인 현실은 분쟁 개입을 어렵게 했기 때문에, 일제는 적극적으로 증서계약을 보급하려고 했다. 충남에서는 이를 말단조직인 공려조합共勵組合을 통해 보급시키고 있었다. 


일제는 농지령의 실시로 농민들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흡수하여 농민운동의 물적 토대를 제거하고 농민들의 체제순응을 유도하려고 했다. 당시 소작기간이 단축되는 추세 아래 농지령으로 3년의 소작기간 설정은 소작권의 안정성 보장에 일정 부분 기여하였다. 註63) 정연태, 『일제의 한국농지정책(1905-1945)』, 207~209쪽. 1934년 당시 전체 소작지의 40%가 토지관리자인 마름의 영향권 아래 있는 상황에서 농지령은 이들의 중간수탈을 규제하여 소작관계를 안정화시키려고 했다. 註64) 농지령에 따라 지주가 마름을 둘 때는 마름의 인적사항과 관리할 소작지 소재지와 면적, 관리사무의 범위와 기간, 보수지급 방법 등을 상세히 관할 부윤·군수에게 신고해야 했다. 또한 부윤·군수는 마름이 담당하고 있는 지역의 관리사항을 보고하도록 명령할 수 있고, 마름의 소작관리가 부적당하다고 판정될 때는 이들을 교체하도록 지주에게 명령할 수 있었다. 관에서 농지령에 기초하여 마름을 교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마름은 관의 통제권 아래 있게 되었다. 당시 마름은 농촌사회의 암적인 존재라고 할 만큼 농민들의 소작권획득과 그 유지를 둘러싸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마름에 대한 관의 통제력 강화는 마름을 통해 관의 농민통제를 심화하는데 유용했다. 식민지권력은 일단 발생한 소작쟁의를 관 주도로 해결하려고 했다. 마름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여 마름의 부정에 따른 소작쟁의의 발생을 방지할 뿐만 아니라 마름의 지위를 이용하여 소작쟁의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였다. 이에 따라 마름의 역할을 농촌진흥회(장) 혹은 구장 등이 대신하여 농촌진흥회의 권한을 강화시켜, 농민들을 농촌진흥회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註65) “현재의 부락 농촌진흥회는 지금 이상으로 실력 즉 권위를 갖게 하여 진흥회의 입안, 지위에 농민이 충심으로 설복 실행하도록 할 방안”으로, “현재의 舍音을 철폐하고 그 당해 부락의 소작지에 대한 舍音 사무를 진흥회에서 감리하고, 면장 감시 아래 이를 운영할 때, 종래와 같은 마름의 폐해는 배제된다”고 했다(李明馥, 「當局に對する農村振興施設に關する意見竝に希望」, 『조선농회보』 1월호, 1934, 94쪽). 


전남에서는 마름에 대한 관리를 위해 부군도府郡島·경찰·읍면이 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부군도에 비치된 소작지관리자대장의 사본을 경찰서와 경찰관주재소·읍면에도 각각 1부씩 비치하도록 하고, 소작지관리자(마름)의 설치 혹은 변경이 있을 경우에는 신고서 제출의 유무, 기타 인물, 성행性行 혹은 관리행위에 대한 주의 등으로 이들에 대한 감시 단속을 철저히 하고 있었다. 관리자 중 행동에 특히 주의를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경고하여 개선을 요구하거나 관리자의 변경을 명령하였다. 註66) 법무과 민사계, 『제4회각도소작관회동관계서류』(법무 No.241), 1938, 1041~1042쪽. 식민지권력은 이상과 같은 방법으로 소작지관리자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는 한편, 소작문제를 용이하게 해결하고 소작인의 집단 행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소작문제를 농촌진흥조합전남의 농촌진흥회 명칭을 통해, ‘자치적 협동적’으로 ‘전면적’으로 해결시키려고 했다. 즉 첫째, 농촌진흥조합의 간부는 필요한 경우 소작인을 대표하여 소작조건의 유지개선에 노력하고 당면한 분쟁에 대해서는 거중조정을 할 것, 둘째, 소작인은 소작료의 납입, 기타 소작인으로서 의무 이행을 충실히 하여 지주의 이익을 충분히 존중할 것, 셋째, 소작지를 알선하는 등 경작지겸병의 폐단을 교정할 것, 넷째, 농촌진흥조합의 대표자에게 소작지 관리사무를 위촉시켜 지주 소작인의 협조를 도모할 것 등이 제시되었다. 註67) 법무국 민사계, 『제3회도소작관회동자문사항답신서』(법무 No. 142), 1935, 714~715쪽. 식민지권력은 농민운동의 주된 원인의 하나이면서 개별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소작권 문제를 촌락에서 농촌진흥조합이 중심이 되어 해결하도록 시도했다. 그리고 지주에게는 소작지의 관리는 구장·실행조합장 등 동리의 지도자에게 맡기도록 종용하고 있었다. 註68) 법무과 민사계, 『제4회각도소작관회동관계서류』, 1043쪽. 경기도 가평군에서는 마름을 폐지하고 토지 일부를 시험적으로 농촌진흥회에 위탁하는 사례도 등장했다(『조선중앙일보』 1934년 3월 13일 「舍音制度廢止」). 


조선소작조정령


한편 충남에서는 농지령이 처음으로 적용되어 3년의 소작기간이 완료되는 시기1937년 말 1938년 초를 앞두고 대책을 강구하였다. 도 당국은 1937년 8월 일제히 각 농가에 대해 소작계약의 내용을 조사하여 그 기한과 관련된 내용을 분명히 하고 동시에 군농회를 통해 그에 관한 주의사항을 인쇄 배부시키는 한편 지주·마름의 회합을 개최하였다. 특히 “소작인측에 대해서는 진흥회·공려조합의 월례회 및 경찰의 동리좌담회 등을 이용하여 지주 소작인 양자의 자각을 촉구하여 

   사전에 대책을 강구한 결과”, 특히 지주들이 소작인을 정리하거나 혹은 소작인이 단체적 행동을 취하는 것 없이 대개 평온하게 경과하였다고 한다. 註69) 법무과 민사계, 『제4회각도소작관회동관계서류』, 1016쪽. 진흥회와 같은 관제촌락조직이 소작문제를 조정하여 소작쟁의의 방지에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원도에서는 각지에서 조직된 농사개량단체들로 하여금 공동사업을 실시하여 상당한 단체적 훈련을 경험하게 한 결과, 대지주와 농장 등에서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경우 혹은 현행 소작관계에 불만이 있는 경우에는 바로 단결하여 이에 대항하려는 분위기가 ‘양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한 지방에서 지주의 소작료인상에 소작인이 “부락마다 단결하여 지주에 대항하여 인상을 반대하여 목하 소작조정 신청 중”이라고 하였다. 註70) 법무과 민사계, 『제4회각도소작관회동관계서류』, 1165쪽. 농촌진흥회는 관의 의도대로 농민들의 요구를 흡수하고, 촌락 내 농민들의 협동·자치성에 기초한 단결력으로 지주의 부당한 요구에 공동으로 대처하고 있었다. 


대부분 열악한 경영을 하던 소작인은 소작권을 잃을 경우, 다시 이를 획득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우려하여 지주에게 정면 대결하는 것을 자제했지만, 일부에서는 “법의 보호를 과신하여 고의로 지주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보일 정도로 농지령은 농민들의 체제내화를 이끌어내는데 부분적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강원도에서 보듯이 진흥회는 식민지권력이 의도했던 ‘자치적’·‘공동적’인 단결성을 바탕으로 농민들의 체제내화를 유도하면서, 행정보조기구으로서의 실체를 드러냈다. 농촌진흥회와 같은 관제조직과 회장 및 구장들이 소작권과 소작지의 관리에 관여하는 현상이 일정하게 나타나고 있었고, 농촌진흥회(장)은 그 권한으로 농민들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작쟁의 발생을 사전에 방지하는 효과도 거두고 있었다. 물론 이런 현상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종래 연구에서 촌락 구성원구장과 촌락유지이 소작쟁의의 조정에 관여하는 비율이 극히 저조하여, 일본과 달리 행정이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고 하는 견해는 註71) 松本武祝, 「植民地期朝鮮の農業政策と村落」, 『朝鮮史硏究會論文集』 29, 1991, 105쪽. 사실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농촌진흥회(장)은 쟁의 자체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구래의 촌락질서의 자치성은 식민지통치 아래 조선농민의 생활을 지탱해주는 한 방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일제의 식민지통치의 유용한 기제였다. 식민지권력과 촌락의 자율성은 대립적 혹은 협력적 형태로 접합하고 있었다. 농촌진흥운동이 부분적으로 농민통제에 기능을 발휘하여 농민운동을 약화시키는데 기능을 발휘하자, 법무국 등의 관계기관에서는 농촌진흥운동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농촌진흥운동은 사상선도공작뿐 아니라 농민들의 경제적 요구의 일정 부분을 수용하여 체제저항세력의 농민포섭에 대한 대응책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註72) 법무국 민사계, 『諸會議關係書類』(법무 No.86-247), 1937, 257·295쪽. 


2. 적색농민조합운동의 확산

농민운동은 1930년대 초반 농가의 경영파탄에 근거하여 그동안 축적한 주체적 역량을 바탕으로 농업문제의 근본 해결을 주장하면서 적색농민조합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930년대 적색농조운동이 전개된 지역은 전국 220개 군郡·도島 가운데 80개 지역이었고, 도별 분포 비율운동이 일어났던 군도의 수/도내 군도의 수을 보면 함남 81%·함북 46%·경북 44%·전남 41%·전북 36%·경남 32%·강원 29%·충남 14%·경기 10%·충북 10%·평북 0%·황해 0%·평남 0% 등이었다. 적색농조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은 함남·함북·강원 등 북부지방이었다. 註73) 지수걸, 『일제하 농민조합운동 연구』, 397쪽. 


적색농조운동은 함경도에서 가장 지속적이고 격렬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 원인의 하나로 급속한 농민층 분해를 들 수 있다. 함경도는 전국적으로 지주소작관계가 가장 약한 곳이었으나 식민지 농업정책을 확대하자 기존 농업관계에 변화가 생기고, 농업공황의 여파로 소작농을 포함한 광범위한 빈농층이 형성되었다. 註74) 이준식, 「1930년대 초 함경도지방의 무장투쟁」, 『역사비평』 봄호, 1989, 162~163쪽. 이러한 함북지방의 농민층의 몰락 양상은 농민운동의 주체적인 조건을 이루고 있었다. 


함북 명천에서는 1934년 명천좌익이 결성된 이래 1936년 6월 재건된 3차 적색농조는 종래의 경제투쟁과 더불어 정치투쟁·무력투쟁을 동반하고 있었다. 명천농조의 활동에 대해 일제는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탄압을 집중적으로 가했다. 함경북도는 농민통제의 수단으로 1932년 향약을 조직하여 활용했을 뿐 아니라, 농촌진흥회의 설치와 함께 1936년 12월 이후 명천·길주·성진에 대한 ‘사상정화공작思想淨化工作’을 강행하였다. 사상정화공작은 정화위원회와 자위단을 구성하여 지방유력자를 포섭하고, 또 미체포자의 검거 혹은 ‘불온한 행동’의 재발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註75) 지수걸, 「함북 명천지역의 적색 농민조합운동(1934-37년)」,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 410~412쪽. 


명천농조사건 보도기사



다음에서는 일제가 ‘조선 좌경운동의 근원지’·‘사상적 특수지대’로 규정하고 있던 이 지역에서 전개된 농촌진흥운동의 시설의 상황을 살펴보자. 함북의 농촌진흥운동과 관련한 시설의 수치를 통해 다음을 알 수 있다. 첫째, 함북의 촌락은 구동리 1,476개1928년 조사, ‘자연부락’촌락 1,092개농촌진흥운동 초기 통계인데, 〈표 6〉에 따르면 1,443개이다. 이 1443개는 구동리 와 거의 일치하여 함북의 농촌진흥회의 구역은 구동리를 기준으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북부지방의 식민지 개발이 남부지방보다 서서히 전개되어 말단사회의 변화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443개와 1,476개의 차이 33개는 구동리 아래 하위 촌락을 통합 조정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표 6〉 함북 농촌진흥회와 갱생지도부락·갱생지도농가의 상황77)

  농촌촌락(어촌) 농촌진흥회 갱생지도 대상 부락   갱생지도 대상 농가
회원 갱생지도부락 공려부락 소계 농가 갱생지도농가 공려농가 소계
나진 (4)                  
경성 152(15) 190 10,716 65 12 77   636 529 1,165
명천 220(43) 228 15,213 94 20 114   1,111 1,069 2,180
길주 85(2) 173 9,625 48 13 62   633 519 3,332
성진 133(27) 148 8,715 58 12 70   813 956 1,769
부령 88(20) 78 4,527 46 16 62   508 801 1,309
무산 181 143 5,319 81 18 99   615 661 1,276
회령 110 101 2,688 51 15 66   685 411 1,096
종성 99 134 3,728 47 12 59   644 437 1,081
온성 99 40 3,164 49 12 61   654 419 1,073
경원 82 84 3,831 43 12 55   601 599 1,200
경흥 71(12) 88 3,778 31 11 42   484 592 1,076
합계 소계 1,320(123) 1,407 71,304 619 153 772 72,406 7,384 6,992 14,376
전체 1,443


둘째, 농촌진흥회 1,407개가 1,443개 촌락에 설치되어, 전체 촌락의 97.5% 즉 거의 전 구역이 농촌진흥회의 통제망에 포섭되었다. 함북의 농촌진흥회 설치율은 전국 82%보다 15% 정도 높았다. 또 진흥회에 포섭된 농가는 약 98.5%71,304/72,406로 거의 전부였다. 이는 함북이 적색농조 등을 비롯한 사상운동지대였기 때문에 관제조직이 집중적으로 배치된 결과로 보인다. 


셋째, 농촌만의 갱생지도 대상 촌락갱생지도부락+공려부락은 1,320개 촌락 중에서 772개로, 전체 촌락의 약 59%를 차지하였다. 당시 전국의 갱생지도부락은 1939년 4월 1일 현재 32,977개갱생지도+공려부락로 전체 73,507개의 약 45%에 해당하였다. 함북은 전국 평균보다 대략 10% 정도 많은 갱생지도부락을 설치하였다. 이 점도 둘째 사항과 마찬가지로 함북지역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갱생지도 대상 농가의 비율은 약 20%14,376 /72,406로 전국 갱생지도 대상 농가의 비율 약 23%갱생지도농가 687,733는 전체 농가 302만 3100호에 비해 약 3%가 낮다. 註76) 조선은행조사부, 『조선농업통계도표』, 1941, 13쪽. 전국적으로 갱생지도농가는 230만호를 대상으로 하지만, 함북의 경우 도내 전체 농가의 수치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전국 농가 전체의 수치를 사용했다. 이는 남부지역은 1930년대 이전부터 관제조직의 통제를 받아온 것에 반해 함북은 이보다 뒤늦게 농민통제의 수단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함북의 농민통제 수단은 1930년대 초기 농민층 몰락을 물적 기반으로 한 적색농조의 발전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먼저 촌락 단위 통제망을 구축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생각한다. 함북은 먼저 촌락의 통제망을 구축한 뒤, 개별 농가를 갱생지도계획으로 장악해갔기 때문에 갱생지도 대상농가가 전국의 수치보다 적게 나타나고 있었다. 함북이 전국 수치보다 갱생지도 대상 농가가 적다고 해서 함북의 개별 농가에 대한 장악력이 낮다고 속단할 수 없다. 함북은 산간지대이고 농민들의 이동성이 높기 때문에 개별 농가에 대한 통제보다 집단적인 통제에 주력했다. 함북의 금융조합이 조합원 5인조의 연대보증조보다 ‘부락연대보증조’에 치중하였던 사실은 이와 연결된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함북의 농촌진흥운동 관계 시설은 전국적인 시설에 비해 농밀하게 구축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에서 연도별 농촌진흥회와 갱생부락의 설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표 7〉을 보면 갱생지도부락과 갱생지도농가의 설치는 1936년을 경계로 빠르게 전개되었다. 1936년은 1935년부터 시작된 갱생지도부락확충계획의 실시 2년이라는 의미보다 ‘사상정화공작’이 실시된 해이다. 함북지방은 1936년에 ‘사상정화공작’과 함께 농촌진흥운동을 확대·실시하였다. 즉 함북 농민에 대한 일제의 지배통제가 확대되는 가운데 3차 적색농민조합은 1937년 9월부터 지하로 잠복했다. 함북의 농민들은 농민층 하강분해가 빠른 속도로 전개되는 가운데 관제조직과 갱생계획에 일정하게 편입되었다. 이런 사실은 적색농민조합의 물적 기반의 약화에 영향을 주었다. 


3. 금융조합의 농촌통제

금융조합은 단지 경제활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조합원의 ‘정신교화’를 중시하였다. 조선인에 대한 정신통제는 “국가의 요청에 응하는 까닭”임과 동시에 국책기관으로서 “금융조합운동의 진전에 기여”하였다고 한다. 註81) 富永文一, 「皇道精神を作興して大業を扶翼し奉らん」, 『금융조합』 181, 1941, 5쪽. 금융조합은 각종 사업을 통해 경제와 도덕이 일체된 ‘사회협동체의 이념’ 즉 전체를 위한 조합원 자신의 희생·복종심 등을 주입시켰다. 이러한 이념의 세뇌공작은 조선민중의 체제 저항의식을 봉쇄·압살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발휘했다. 금융조합은 경제공황의 영향으로 정체에 빠진 경영개선책의 일환으로 또 본래의 식민지정책 수행기관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농촌진흥운동에 참여하였다. 농촌진흥운동의 전개 확충과정에서 금융조합은 사업망과 조직망을 확대할 수 있었다. 


금융조합의 농민통제는 대체로 다수 농민을 조합원으로 포섭하는 과정과 포섭한 농민들의 생활 전체를 금융조합의 사업에 긴박하는 과정으로 나눌 수 있다. 다음에서는 금융조합의 농민에 대한 지배력이 관철되는 과정을 알아보고, 이러한 금융조합의 농민통제가 농민운동을 비롯한 사상운동을 일정하게 제약하였다. 나아가 금융조합의 활동이 식민지지배체제를 말단에까지 부식하는데 첨병 역할을 하였음도 살펴보려고 한다. 


1) 금융조합의 농민포섭 註82) 금융조합은 1920년대까지 지주·자작농·자소작농 상층을 중심으로 운영해 오던 경영 방식을 바꾸어 1929년 제1회 중앙대회를 계기로 하층농민에까지 활동 범위를 확대하였다. 조직망과 사업망을 확대는 여러 장치를 갖추면서 적극적으로 하층농민을 조합원으로 흡수했다. 이러한 현상을 두고 당시 자료에서는 組合員下降運動·組合員增容運動이라고 하였다. 금융조합 지배력을 확대하기 위한 정지작업으로 하층민을 조합원으로 흡수하는 과정은 금융조합의 농민에 대한 통제력을 부각시키기 위해 ‘농민포섭(운동)’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공황기 농촌경제의 파탄은 금융조합의 경영에도 영향을 미쳐, 대부자금의 고정과 연체금·손실금의 증가를 초래하였다. 금융조합의 채무를 갚지 못하고 저당물이 압류된 상황은, 촌락 금융조합의 경우 1930년 355,181원에서 1932년 709,516원으로 거의 100% 증가하였고, 조합탈퇴자도 늘었다. 탈퇴자는 채무를 상환할 수 없어 금융조합에서 제명된 자, 금융조합이 채권보존을 위해 설정한 연대보증이 두려워 조합을 탈퇴하는 자, 도항으로 인한 탈퇴자 등인데, 1930년 50,246명에서 1931년 55,803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금융조합의 순익금을 감소시켜, 1929년 1,049원→1930년 605원→1931년 839원으로 나타났다. 註83) 문정창, 『조선농촌단체사』, 213~215쪽. 이와 함께 농산물 가격의 폭락과 토지가격의 하락에 따른 담보의 불확실성은 신규 대출을 극히 유보시켜 종래 지주·자작농 등 중농 이상자 중심의 제한된 형태로 자금을 운용하던 금융조합의 경영은 한계에 봉착했다. 


금융조합은 조합의 기반을 넓히고 또 총독부정책에 순응하기 위해, 소농을 포함한 전체 농가를 조합망으로 포섭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했다. 금융조합은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촌진흥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그 해결책의 하나가 이른바 조합원하강운동 즉 농민포섭운동이었다. 


금융조합은 1929년 10월 제1회 중앙대회에서 조합원 ‘3할포용割包容’을 결의한 후, 1933년부터 1937년까지 5개년간 ‘5할포용운동割包容運動’을 표방하며 농민들을 포섭해 갔다. 註84) 금융조합의 농민포섭운동은 1938~1942년까지 80% 포용, 1943년 이후 ‘全戶포용’을 내걸고 계속 진행되었다. 금융조합의 농민포섭은 농촌진흥운동의 전개와 함께 지도부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1935년부터 시작되는 갱생지도부락의 확충과정은 금융조합의 농민포섭운동을 촉진하는 한 계기가 되었다. 


금융조합은 농촌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기 위해 촌락에 세포조직을 깔아 왔는데, 이런 촌락조직은 1927년을 전후하여 실시된 모범부락을 중심으로 촉진되었다. 1930년대 갱생지도부락의 설치에 대응하여 금융조합의 촌락 통제는 ① 금융조합 자체의 지도부락 혹은 모범부락으로 경영되는 촌락, ② 농촌진흥운동의 갱생지도부락을 맡아 단독 지도하는 촌락, ③ 갱생부락을 각 기관이 종합적으로 지도할 때, 이에 참가 협력하는 종합갱생지도부락 등 3가지 종류가 있었다. 


한편 금융조합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은 갱생지도부락이나 자체적 지도부락 이외, 구역 내 농촌진흥회의 설치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여, 농촌진흥회를 통해 해당 촌락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금융조합은 농촌진흥운동으로 농촌사회에 대한 통제정책이 강화되면 될수록 이와 병행하여 자체의 지배력을 확대했고, 금융조합 자체의 지배력의 확장이 곧 식민지권력의 외연적 확장이었다. 


금융조합은 이처럼 촌락에 대한 장악과 함께 농민을 조합원으로 포섭해갔다. 금융조합은 지도부락에 거주하는 농가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전부 금융조합에 가입시킨다는 방침 아래, 註85) 조선금융조합연합회경기도지부, 『경기도금융조합관계예규』, 419쪽. 여러 가지 농민 포섭수단을 강구하였다. 금융조합은 농촌진흥회와 유기적 관계 아래 농촌진흥회를 단위로 집단적으로 조합원을 가입시키기도 했다. 경기도의 금융조합은 농촌진흥회를 통해 금융조합을 선전하면서, 식산계장殖産契長·총대總代·평의원評議員을 동원하여 농촌진흥회 구역을 적당히 분할하여 구역 내 거주 농가의 7할 수용을 목표로 농민들을 포섭하려고 했다. 註86) 조선금융조합연합회경기도지부, 『경기도금융조합관계예규』, 50~51쪽. 구역 내 ‘7할 수용’은 대체로 최하층 농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농가를 포섭한 상태이다. 이외 금융조합의 조합원포섭운동은 근농공제조합勤農共濟組合員의 흡수 혹은 상호연대보증조相互連帶保證組의 활용 등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하고 있었다. 註87) 금융조합이 조합원을 확대하기 위해 전개한 구체적인 농민포섭과정은 추후 살펴볼 예정이다. 


부채정리사업은 당시 고리부채의 심각성을 반영하여 상호연대보증조 혹은 촌락 단위로 농민들을 포섭하는데 중요한 정책이었다. 부채정리사업의 내용 중에는 금융조합의 저리자금으로 고리대를 대체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단지 고리대의 대부조건을 완화시켜 주는 경우도 있었다. 註88) 조선금융조합연합회경기도지부, 『경기도금융조합관계예규』, 410쪽. 이 점은 농민들로 하여금 금융조합의 조직망에 편입을 자극하는 유인이 될 수 있었다. 부채정리사업은 농가의 영농·생계 전반에 대한 군면郡面과 금융조합의 지배력을 확대하는데 주된 농민통제수단이었다. 정리자금을 반제하기 위해 농가는 농작물과 부업 생산물을 금융조합이 주도하는 공동판매에 부쳐야 했다. 註89) 조선금융조합연합회경기도지부, 『경기도금융조합관계예규』, 409~413·432쪽. 


2) 금융조합의 농민통제

금융조합이 주도하는 부채정리사업은 농민포섭의 수단이면서 농민에 대한 관·금융조합의 통제력을 확대시킬 수 있는 정책이었다. 농촌진흥운동 초기 갱생지도부락이 1개 면에 1~2개 설치될 때에는 부채정리사업은 일부 농가에 해당되었다. 즉 금융조합원 중 농촌에서 모범인물이 될 수 있는 소질을 가진 자로서 부채정리를 필요로 하는 자를 대상으로, 다른 산업기관과 함께 집중적으로 지도하여 ‘농촌진흥의 선구자’로 활약하도록 한다는 방침이었다. 금융조합은 자작농창정자와 함께 부채정리대상자를 금융조합사업의 협력자이자 농촌진흥운동의 선전자·실천자로 역할을 하도록 공작했다. 註90) 충청북도, 『本道金融組合ノ槪況』, 1934, 19쪽. 농촌진흥운동이 확대되면서 부채정리사업의 대상자 역시 하층 농민으로까지 확장되었다. 


한편 당시 농가 호수의 약 50% 이상이 영세한 소작농인 현실에서 소작권의 관리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농민들을 통제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1930년대 전북은 전체 농업자의 70% 이상이 소작농이었고, 이들은 소작권의 빈번한 이동으로 매우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33년 전북에서는 지주에서 소작농으로 전락한 자 57명, 자작농에서 소작농으로 전락한 자 661명, 자소작농에서 소작농으로 전락한 자 7,330명, 소작농으로 소작지를 상실한 자 16,000명에 이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조합은 대지주와 연락하면서 소작권의 유지 획득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주가 소작인에게 농량農糧 혹은 비료자금을 대부할 때에는 미리 금융조합과 연락 협의하거나, 금융조합이 소작농에게 비료자금을 대부할 경우 소작인이 조합원일 경우에는 소속 지주에게 자금대부의 보증을 서도록 협정하고 있었다. 註91) 조선금융조합연합회, 『各道金融組合の指導施設』, 55·65·71쪽. 금융조합은 지주와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소작권을 매개로 농민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강원도에서는 농지령이 시행되기 이전에 금융조합이 소작인조정조합小作人調整組合을 조직하여 최소 소작기간 5년, 소작료 4할을 실행하였다. 註92)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금융조합연감(1934년판)』, 207쪽. 그리고 조합원이 소작하고 있던 토지가 매각될 때, 금융조합은 해당 조합원에게 자금을 대부하고 지주에게 소작지 매수의 우선권을 기존 소작인에게 주도록 알선하기도 했다. 註93) 조선금융조합연합회, 『名道金融組合の指導施設』, 158쪽. 


금융조합이 이렇게 소작권에 관여하는 이유는 소작권이 일반 농민의 생존권과 직결될 정도로 중요했기 때문에 소작권을 통해 농민을 통제하려는 의도와 농촌진흥운동과 관련하여 금융조합이 담당하고 있던 부채정리 자금을 안정적으로 회수하기 위해서도 소작권의 안정이 전제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실제로 금융조합이 대부한 자금이 결손 처분되는 경우는 흉작 등을 제외하고 소작권의 이동관계에 기인하는 것도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註94) 충청북도, 『本道金融組合ノ槪況』, 16~17쪽. 


금융조합이 농민들의 소작권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경로는 지주와 연락하여 소작권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마름을 통제하는 경우이다. 금융조합은 마름에 대한 변경을 요구할 수 있는 부군도府郡島 소작위원회小作委員會의 위원이었고, 또 자체적으로 마름좌담회를 개최하여 마름을 통해 농민통제와 조합사업의 확장을 획책했다. 즉 첫째, 금융조합은 마름에게 소작인의 선도와 조합사업에 관한 협조 세목을 제시하고, 마름은 금융조합과 조합원 사이에서 중간 연락을 맡도록 하였다. 마름은 자신이 관리하는 소작인으로 금융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자에게 조합 가입을 알선하고, 소작인의 영농상황을 금융조합에 통보해야 하고, 소작권을 이동하려고 할 때는 조합에게 사전에 알리고 협의해야 했다. 둘째, 금융조합은 조합원인 소작인이 소작지를 매수하려고 할 때, 마름에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이들 조합원에게 우선권을 주도록 했다. 당시 농민들 중에는 금융조합을 관설 대금기관 정도로 인식하여 금융조합에 가입을 꺼리기도 했으나, 금융조합의 상대적인 저금리는 부채에 시달리고 있던 농민들의 금융조합 편입을 유인하는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였다. 註95) 당시 충북의 농촌 부채는 연간 중요 농산물 생산액 2,594만원과 비슷한 2,400만원이었다. 부채 2,400만원 중 고리부채는 600만원 이상이었고, 그 이자는 1년에 300만원이었다. 생산물 판매수입 913만원의 약 30% 이상이 고리채의 이자로 지출되고 있는 셈이다. 이 고리대금의 금리는 연 3할 6푼~6할, 평균 4할 8푼인 현실 앞에(충청북도, 『本道金融組合ノ槪況』, 3쪽), 연 1할 5푼 내외의 금융조합의 자금은 농민들의 조합가입을 유인하는 한 조건이었다. 이러한 금융조합의 자금대부와 소작권에 대한 조정력 등은 농민을 조합의 통제망에 편입시키는데 핵심 사항이었다. 또한 먼저 금융조합에 편입된 농민은 다른 비조합원의 포섭과 나아가 식민지 정책을 선전하는데 첨병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註96) 금융조합은 등장 이래 관변단체로서 행정기관의 정책을 대행하였고, 조합원을 통해 얻은 결과를 다른 지역으로 확대해 가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조선총독부, 『民政事績一班』, 1912, 94~99쪽). 


한편 금융조합의 물적·정신적 통제력은 단지 조합원뿐만 아니라 조합원의 가족에까지 미쳤기 때문에, 조합원 포섭 과정은 조합원의 가족 즉 부인과 청년들을 통제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가족 전체의 포섭이 금융조합사업의 관철 즉 식민지 지배력의 침투를 용이하게 만들기 때문에, 금융조합은 ‘부락간담회’와 같은 모임을 통해 조합원과 그 가족을 소집해 놓고 사상과 생산활동을 통제하였다. 경상남도에서는 금융조합 안에 가정상담부家庭相談部를 설치하고, “경제 관계를 기조로 일체 가정상담”을 하였다. 조합의 이사와 부이사는 특정한 조합원을 상대로 상담의 효과를 높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를 집중적으로 관리하여 성과를 거둔 뒤, 조합원의 상담소 이용을 확산시키려고 하였다. 註97) 경상남도, 『농산어촌진흥지도요강』, 1936, 192~193쪽. 이러한 가정상담부는 다른 지역의 조합에서도 운영되고 있었으며, 이같이 조합원의 생활 전반이 조합의 규제 아래 놓여 있었다. 


조합원 이외 각 가정의 구성원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 금융조합은 산하에 부인회와 청년회 등을 설치하였다. 註98) 조선금융조합연합회, 『金融組合婦人會の情勢』, 1936, 1~3쪽 ; 조선금융조합연합회, 『금융조합연감(1942년판)』. 금융조합 산하 부인회는 부인의 저금회에서 출발하여 1920년대 중반 이후 생산사업(공동경작 등 야외노동)·생활개선운동(야학회·미신타파·색복장려 등)을 전개하면서 조합사업을 위한 별동대로서 활약하였다. 1935년 이후 설치되는 금융조합 산하의 촌락조직인 식산계殖産契는 조합원 이외에 조합원이 되기에 영세한 일반 농민도 계원으로 가입시켰다. 금융조합은 식산계의 확충과정을 통해 거의 전체 농가를 포섭할 수 있었다. 註99) 1943년 총 농업호수 중에서 조합원의 비율은 96%에 이르러, 거의 대부분의 농가가 금융조합에 가입하고 있었다. 또 이러한 조합원의 82%가 식산계원이었다(문영주, 「일제말 전시체제기(1937-1945) 촌락금융조합의 활동」, 고려대석사학위논문, 1995, 12쪽). 이러한 식산계는 공동판매와 공동구입 사업을 중심으로 촌락경제의 중심 단체로 발전하면서 농촌진흥회와 상호보완의 관계에서 농민과 촌락을 통제하였다. 식산계는 다른 농촌 단체와 마찬가지로 표면적으로는 경제단체였지만 경제활동 이외에도 농민들의 의식意識을 간섭하였다. 이러한 식산계의 준비단체로 평가되는 경기도의 양우식산계養牛殖産契, 준식산계에는 “계원의 자녀인 청년이 식산계 이외 다른 단체를 조직하는 것은, 사상단체로 전향하는 등의 우려가 있어 고려할 필요가 있으므로, 청년단체를 조직하는 것을 보류”하라는 방침이 하달되었다. 註100) 조선금융조합연합회경기도지부, 『경기도금융조합관계예규』, 210쪽. 금융조합은 공립보통학교 졸업생을 학교와 연락하여 금융조합원으로 포섭하거나 식산계의 실무 담당자인 사사司事에 젊은 청년을 참여시키고 있었다. 註101) 조선금융조합연합회경기도지부, 『경기도금융조합관계예규』, 149·194~197쪽. 금융조합은 청년들을 조합망으로 장악하여 이들이 사상활동과 같은 정치적 체제변혁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경제주의로 전환시키는 기능도 발휘하고 있었다. 


금융조합의 농민통제는 적색농민조합운동과 다음과 같은 상관관계를 보이고 있다. 1930년대 적색농조운동의 도별 분포 비율은 함남 81%·함북 46%·경북 44%·전남 41%·전북 36%·경남 32%·강원 29%·충남 14%·경기 10%·충북 10% 등이었다. 이 중 경남과 충북을 비교해 보면, 적색농조운동이 경남에서 충북의 3배 이상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경남과 충북의 도내 금융조합의 활동과 적색농민조합운동의 관련성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었다. 


1920년대 후반 경남에 근무하다가 1930년대 전반기를 충청북도 지부에서 사업담당 참의參議를 지내고 다시 경남으로 전근한 자의 경과 보고에 의하면, 충북의 업무조사에 대해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지도과에서는 “언제나 훌륭하다고 말하고 있다”고 한다. 충북은 “연합회가 산에 올라가 호령하면 대번에 영향을 미칠 듯한 작은 곳이다. 본래 그 지방의 사람은 성질이 순박하며 조합원은 어딘지 모르게 통제되어 있었다 … 조합장의 선거·감사의 선임 등도 의장의 지명에 일임한다는 것이다. 무조건이다. 6년이 경과한 지금에도 더욱 그렇다. 반면에 경남은 매우 소란스럽다. 총회 등도 매우 분규가 일어난다”고 하였다. 경남은 충북과 같이 조합장·감사에 대한 의장의 지명이란 전혀 용납하지 않는다고 한다. 경남은 “업무집행 상황을 감사하고 감시하는 감사監事의 선임을 의장에게 일임이란 어찌된 일인가” 또 “우리의 대표자로서 조합장을 선거하는데 의장에게 일임이란 왠말인가”라고 하여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료문제에서도 충북에서는 “배합비료가 아니면 안된다”고 도에서 방침을 정하면, 단위 조합에는 거의 9할 정도 실행하는데 반해, 경남은 1할도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註102) 「地方事情を語る會」, 『금융조합』 99, 1936, 125쪽. 


41%의 전남과 14%의 충남도 위와 비슷한 통제력을 보이고 있었다. 충남은 “전남에 비해 총회에 나가 보아도 매우 온화”한데 반해, 전남의 어떤 조합의 좌담회에서 조합의 감사가 “조합의 이사에게 희망사항으로 이사의 주택은 적색 기와로 현대적인 가옥을 만들고 있는데, 조합원의 고혈을 짜서 만드는 것은 이상하다. 조합원의 대부분은 초가집에서 살고 있는데, 그 부락의 한가운데에 저러한 집을 만들어 조합원의 고혈을 착취하는 듯한 행위를 삼가해 주기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남은 “옛부터 사상적으로 시끄러운 곳으로 유명하다. 총회에 가도 시끄럽다”고 하여 조합원의 통제가 용이하지 않았는데, 이 점은 적색농조운동의 분포 41%와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다. 이에 반해 충남은 조합원을 통제하기 어려운 점이 거의 없다고 한다. 註103) 「地方事情を語る會」, 『금융조합』 99, 127쪽. 

   36%의 전북은 적색농조운동이 충남과 충북보다 2~3배나 많이 일어나는 곳인데, 이러한 사정에서 금융조합에서는 조합원 자녀를 농민훈련소에서 교육시키고 있었다. 농민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한 이후 금융조합의 농민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북은 조합원의 자제를 훈련하여 이를 조합의 중심인물로 흡수하려고 했다. 이에 전북에서는 조합원의 공제회共濟會를 전부 해산시키고 그 자산 약 7만원으로 도청 직영 농민훈련소를 만들었다. 농민훈련소에서는 각 조합에서 2명씩, 50명을 선발하여 이들 생도를 대상으로 논농사 등을 비롯하여 10개월간 훈련을 하였는데, 훈련생은 매일 아침 5시에 기상하여, “자신은 일본의 한 사람의 백성이 될 것”임을 다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훈련을 받은 뒤 전북 각 촌락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면서, 금융조합의 사업과 조직망의 근간이 될 수 있도록 계획되었다. 註104) 「地方事情を語る會」, 『금융조합』 99, 133쪽. 


충북과 같이 10%인 경기도는 준식산계가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1938년에 경기도는 준식산계임의 구판사업단체의 수가 전국 6,930개의 60%, 회원수·구매액·판매액은 모두 전국의 약 50%를 차지하였다. 이런 수치는 경기도가 다른 도보다 상품경제화가 크게 진전되었음과 이러한 상품경제화 과정에서 금융조합의 역할이 컸음을 보여준다. 경기도의 준식산계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계원들의 청소년 자녀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러한 준식산계가 경기도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어 전국적으로 계의 60%, 계원의 약 50%를 차지하였다. 또한 경기도의 단위 금융조합 이사의 행동들이 모두 도지부의 지시를 받아, “극히 세세한 곳까지 긴박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으로 꼽히고 있었는데, 각 조합 이사들은 이런 지시를 빠짐없이 실행했다. 註105) 「地方事情を語る會」, 『금융조합』 99, 135쪽. 관변단체인 금융조합의 성격을 볼 때, 경기도 지부의 단위 조합에 대한 철저한 통제와 그것이 그대로 이사의 활동을 규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경기도 금융조합이 식민지권력의 의도에 따라 농민들을 대상으로 정책을 관철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경기도 금융조합의 농밀한 농민통제는 구역 내 적색농민조합 10% 발생이라는 수치에 영향을 주었다. 끝으로 표면적으로 적색농민조합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나는 황해도는 “지금까지 금융조합과의 협력이 극히 교묘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註106) 「地方事情を語る會」, 『금융조합』 99, 134쪽. 


적색농민조합운동이 가장 격렬했고 지속적이었던 함남81%과 함북46% 금융조합의 공작은 다른 지역보다 특징이 있었다. 1934년 6월 현재까지 조사된 함경남도 금융조합의 구역 내 동향은 “현재 조합 운동상 가장 결점이라고 인정되는 조합원의 정신적 결합 상태가 조합 취지에 부응하지 않은 바 매우 요원”하다고 한다. 이에 다음과 같이 하부 조직이 정비되었다. 


조합은 조합원을 파악하는데 중재자 역할을 하는 총대總代의 구역을 ‘조’로 하고, 각 ‘조’ 아래 촌락 단위의 ‘계’를 설치하였다. 조합원은 반드시 촌락의 계원으로 ‘조’의 조장과 ‘계’의 계장의 지도를 받아야 했다. 즉 ① 조합원 사이의 융화친목, ② 미풍양속의 진작으로 지방개선, ③ 조합사업의 익찬 등을 이행해야 했다. 그리고 하층조합원에 대한 대부의 위험성을 방지하기 위해 1933년부터 3개년계획으로 신용점수 50점 이하자를 대상으로 5~6명 단위의 신용계信用契를 조직하였다. 함남지방 조합원은 대체로 동리 단위의 총대가 맡고 있는 ‘조’→촌락 단위의 ‘계’→상호연대보증조인 신용계로 이어지는 계통조직을 통해 주도면밀하고 상호규제적인 감시를 받고 있었다. 註107) 조선금융조합연합회, 『各道金融組合の指導施設』, 183~184쪽. 관할 내 산기조합三岐組合의 수서리 고양동부인회는 경도보덕회京都報德會 즉 근로저축·분도추양分度推讓의 ‘보덕정신’을 부인들의 실행요목으로 정하고 있었다. 註108) 조선금융조합연합회, 『各道金融組合の指導施設』, 182쪽. 삼기조합은 식민지 조선사회의 모순을 단지 조선민중의 내적 문제로 은폐하면서 식민지체제에 순응하도록 기능하던 보덕정신으로 부인들을 세뇌시키고, 이런 부인을 통해 가족 구성원 전체를 통제하려고 했다. 1930년부터 함북 각 조합은 일제히 조합원과 비조합원 모두 그 가족도 포함한 ‘부락간친회’를 개최하여, “항상 대중에게 취지를 전달하는데 익숙한 교육가·종교가” 註109) 本田秀夫, 「時局に關する認識の普及と組合」, 『組合旗の下で』, 1939, 230~231쪽. 와 같은 이사의 연설을 듣게 했다. 또 조합원의 공제회를 두고 조합원의 경조사에 조합 차원에서 부조를 함으로써 조합 중심으로 친화를 이끌어내고, 이렇게 조성된 친화력을 바탕으로 조합의 사업을 침투시키고 있었다. 


함경북도는 함남처럼 5~6인의 상호연대보증조와 함께 이를 바탕으로 촌락 단위로 연대책임을 묻는 조를 조직하였다. 촌락 단위의 조組에 기초하여 1932년부터 준식산계의 성격을 띠는 식우계殖牛契를 설치하였다. 함북도청은 1930년에 모범부락경영요강을 마련하고 각 조합에 1개 이상 모범부락을 설치하도록 했으며, 모범부락을 통해 부업 지도와 함께 모범부락 내 구성원들에게 ‘의무이행’을 강조하고 있었다. 註110) 조선금융조합연합회, 『各道金融組合の指導施設』, 196쪽. 


이러한 금융조합의 물질적·정신적 통제공작을 받은 함경도에는 1939년경 다음과 같은 변화가 나타났다. 함경남도 단천금융조합은 단천농민동맹이 1930년 7월 일제의 삼림조합정책에 대한 반대투쟁을 계기로 적색농민조합운동으로 발전했던 지역을 조합의 구역으로 정했다. 단천의 농민운동은 촌락의 공동체적인 유대관계에 기초한 자발적인 조직망을 운동조직의 하부조직망으로 흡수하여 1931년 5월 적색농민조합운동을 전체 군으로 확산시키려고 했었다. 그러나 단천농민운동은 일제의 대규모 검거로 이후 사실상 표면적인 활동이 중지되었고, 1933년의 재건운동에 이어 1936년 단천전우동맹端川戰友同盟이라는 비밀결사운동을 끝으로 지하화하였다. 註111) 이준식, 「일제하 단천지방의 농민운동에 대한 연구」, 110쪽. 


단천전우동맹 피체 기사


단천금융조합은 적색농민조합의 재건운동이 탄압을 받아 사실상 활동이 중지된 1935년 이후 농민포섭운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하였다. 단천전우동맹이 발각된 1936년을 경계로 금융조합은 농민을 빠른 속도로 포섭하고 있었다. 식산계가 모든 촌락에 설치되자, 각 촌락의 단체들은 식산계로 통합되어 식산계 중심의 사업과 단체훈련으로 농민들에 대한 지도통제의 완벽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註112) 조선금융조합연합회, 『표창금융조합사적』, 144~153쪽. 이렇게 일련의 통제망이 구축되는 가운데 1936년 이후 단천의 적색농조운동은 더 이상 재건될 여지가 없이 지하화했던 것이다. 1939년까지 조합에 포섭된 농민은 전체 호수의 40%이며, 이 정도 포섭율로도 사상운동의 기반을 잠식하기에 충분했다. 


함경북도 화대금융조합은 명천군 하가면 화대동花臺洞에 설치되어, 상가上加·하가下加·하고下古의 3개 면을 구역으로 정하였다. 명천 적색농민조합운동은 화대금융조합의 3개 구역에다가 아가면阿加面이 추가되어 4개 면에 걸쳐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전개되었다. 화대금융조합은 1933~1934년경 명천 적색농민조합운동이 전개될 무렵 2개의 지소를 설치하여 관할 구역을 좁혀 통제력을 증대할 수 있도록 조정했다. 농촌진흥운동이 전개되면서 관할 내 학교·청년단·부인회와 연계하여, ‘협동정신’을 가정에 침투시켰다. ‘협동정신’은 ‘의무이행’의 다른 표현으로 조합원의 공동일치의 체제로 조합을 발전시키고, 이때 조성된 협동과 공동성은 지방행정 나아가 식민지체제의 안정화를 만드는 유력한 기제였다. 따라서 금융조합은 ‘의무이행’·‘협동정신’을 조합원을 비롯한 구역 내 농민들에게 주입하면서, 적색농민조합운동의 발전 가능성을 제거하고 있었다. 註113) 김석근, 『1930년대 한국 농촌사회와 공산주의 운동; 적색농민조합 운동』, 한국학대학원박사학위논문, 1992. 화대금융조합은 매년 동리 혹은 촌락 단위의 조합원간담회組合員墾談會를 15회 이상 개최하였다. 임원진인 조장·총대 이외 각 촌락의 단체를 통해 잡지 배포·선전 표목의 건설·포스터 및 삐라의 살포 등으로 조합원 이외에 비조합원에게도 이러한 조합의 ‘정신’을 선전하고 있었다. 각 촌락의 농촌진흥회 등 회합에는 조합의 이사가 반드시 참석하여 ‘교육가·종교가’와 같은 연설을 하였다. 


금융조합의 조합원 통제장치 중 481개 상호연대보증조相互連帶保證組는 조원 2,788명을 포섭하여 총 조합원의 76%가 조 안에서 상호 감시하도록 짜여졌다. 또한 조합 구역을 63개 조로 나누어 상호연대보증조를 촌락으로 확대한 ‘부락조’를 설치하여 모든 조합원을 편제하고 각 조장이 지도하도록 했다. 조합원은 이렇게 총대→부락조→상호연대보증조를 통해 조합의 통제망에 긴박되어 있었다. 화대금융조합은 임원감사3·평의원 10·총대 57명·조장 63명 아래 상호연대보증조 481개, 부락조 63개, 식산계 31개라는 하부조직과 농촌진흥회 등 농촌진흥운동 관계 조직을 이용하여 농민들에 대한 통제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 결과 화대금융조합의 조합원은 1936년에 비해 1937년에 20% 급증할 즈음, 명천의 적색농민조합운동은 지하로 잠적하였다. 이런 경과를 두고 마치 “이전의 불온사상지대는 희망지대”로 변했다고 평가할 정도로, 관의 지배력이 금융조합의 통제망 등을 매개로 강화되고 있었다. 註114) 조선금융조합연합회, 『표창금융조합사적』, 154~165쪽. 


금융조합의 조직망이 함경도 지방을 포섭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이 지역의 급속한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을 들 수 있다. 함경도의 금융조합은 농민운동에 대한 물리적 탄압을 전후하여 자체 통제망을 촌락에 침투시켜 농민들에게 공작을 가하고 있었다. 적색농민조합운동이 급속히 약화되는 시기를 포착하여 농민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통제력 중 하나는 바로 식산계의 확대였다. 


3) 금융조합의 침투와 촌락의 변화

충청북도 제천군 비봉면 신리新里는 총호수 36호의 소규모 촌락이었다. 연중 식량 걱정이 없는 호수는 겨우 7~8호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춘궁기에 고리부채로 양식을 조달했다. 註115) 權彛植·金鳳梧, 「離れ離れの心を組合の指導で引締められて」, 『明るい村』, 1936, 14~20쪽. 이런 사정을 배경으로 약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계를 만들어 그렇지 못한 농민들에게 연 6할의 고리로 대부하였다. 청년회에서도 농민에게 대금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고리대로 생활을 영유하는 사람들이 많고, 계의 고리대적 성격으로 구성원들 사이에 심적 유대는 없었다고 한다. “단지 한 촌락에 살고 있다”고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1932년 이곳이 종합지도부락으로 지정된다고 하자, 농민들은 관의 지배력이 집중되어 번잡한 일이 생긴다고 하여 지도부락 설치를 반대하였다. 지도부락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내지 못했다고 구장의 무능력을 비판하는 등 심한 분쟁이 일어났다. 여기서 당시 지도부락의 설정에 대한 촌락민 반응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어렵게 살아도 관의 지배력이 생활에 개입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렇기 때문에 구장이 나서서 자기 촌락의 공동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지도부락의 지정을 막으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일단 금융조합의 지도부락으로 선정된 이후 이곳의 농민들의 생활은 달라졌다. 우선 조합원으로 가입할 것을 종용받으면서, 점차 가마니 짜기와 부채정리 등과 관련하여 금융조합의 자금을 융통하게 되어, 7명을 1조로 상호연대보증조를 만들어 금융조합에 가입했다. 註116) 문영주, 「조선총독부의 농촌지배와 식산계의 역할(1935~1945)」, 『역사와 현실』 46, 한국역사연구회, 2002. 이후 금융조합은 이를 해체하고 촌락연대보증조로 확장·발전시켰다. 촌락연대보증조는 몇 명 규모의 차원이 아니라 촌락 전체를 대상으로 조합의 사업에 한 사람의 이탈자도 나오지 않도록 상호연대 감시와 통제력을 강화하는 수단이었다. 


재래의 계가 해체된 상태에서 금융조합이 개입하여 소액 출자로 새로운 계를 만들어 5원 이하의 소액 자금을 연 1할 5푼으로 융통하고 있었다. 금융조합 산하 일종의 금융계가 조직되어 재래의 계를 대신하였다. 금융조합은 새로 등장한 계 이외 다른 곳에서 자금을 융통하는 일이 없도록 지시했다. 농민들은 이전보다 저금리의 자금을 쓸 수 있게 되었으나, 금융조합 이외에서 자금을 융통할 길이 없는 상태에서 이에 대한 종속성은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금융조합의 지도부락이 되는 것을 반대했던 것과 달리 편입 직후 “조합의 명령에는 어떠한 일이라도 복종하지 않으면 안되는 기운이 일게 되었다”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사정에 연유했다. 금융조합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수록 농민들은 물질적·정신적 생활의 전반을 간섭받고, 식민지체제에 편입되는 양상을 띠었다. 금융조합의 지도부락으로 지정되는 것에 대한 반발, 일단 편입된 이후 관에 종속적인 모습은 다른 일반 지도부락과 관제조직 아래 놓인 촌락의 대체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금융조합의 조직망과 사업망의 침투는 단지 지역의 상품화폐경제의 진전만이 아니라 금융조합의 또 다른 기능인 정신통제의 확산을 동반하였다. 금융조합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조선총독부의 식민지정책 담당기관으로 출발했다. 이는 전체 조선인을 조직망을 통해 포섭하여 식민지정책을 말단사회까지 관철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註117) 최재성, 『식민지 조선의 사회 경제와 금융조합』, 경인문화사, 2006, 제3장 참조. 금융조합이 농밀한 하부조직을 가동하고 사업의 영역을 확대시키면서 농민 개개인의 일상에까지 침투하여 조선농민의 농민운동 즉 체제변혁 의지를 경제주의로 또 비정치화로 전환시키는데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일제는 전국을 대상으로 전체 조선인을 통제해 가는 금융조합을 활용하여 지방지배의 기반을 확대해 갔다. 


   4. 국민정신총동원운동과 농촌통제정책


1. 시행 배경

1932년 11월부터 실시된 농촌진흥운동은 식량충실·수지개선·부채정리의 3가지 경제적 갱생 목표의 달성을 중심으로 하되, 정신적 통제를 병행했다. 이때 일제는 정신통제의 지침으로 따로 ‘민심작흥시설실행강목民心作興施設實行綱目’을 발표하였다. 이 ‘실행강목’에 담긴 내용의 저류에는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관통하는데, 이를 함축하고 있는 개념은 국체명징·군민일체·충군애국·보은감사 등이었다. 註118)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 「民心作興施設美行綱目」, 『自力更生を目指して』 참조. 일제는 조선 강점 이래 조선민중을 ‘충량한 신민’ 나아가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천황제 이데올로기 공세를 가해왔으며, 이것은 농촌진흥운동을 계기로 농가의 일상 속으로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일반 농민들의 반응이 경제적 방면에 치중하여 내면 세계의 통제가 크게 진척되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에 일제는 1935년부터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함과 동시에 정신세계에 대한 통제강화책으로 심전개발운동心田開發運動을 추진하였다. 


심전개발운동의 배경에는 국제적 환경의 악화, 일본과 조선의 사회 상황 등이 있었다. 일제는 만주사변을 둘러싼 열강의 압력이 주된 이유가 되어 국제연맹을 탈퇴했지만, 심화되는 국제적 고립을 일본·조선·만주로 연결되는 경제블럭화로 대응하려고 했던 만큼, 식민지 조선의 위상은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사회주의운동은 일제의 무력탄압으로 1932년을 경계로 약화되어 1934년경에는 그 활동 영역이 크게 축소되거나 운동력을 잃고 있었다고 하지만 “적화의 집요한 공작은 날로 교묘화”되어 여전히 일제를 자극하고 있었다. 註119) 治安維持法 위반자의 수리건수는 1932년 4,394건을 고비로 줄고 있었지만, 1935년에도 1,478건이나 되었다(지수걸, 『일제하 농민운동의 연구』, 72쪽). 또 1934년 동안 전국 13개도와 간도 및 봉천 영사관 경찰에서 취급한 사상사건은 479건 5,321명인데, 그 중 함남지방에서 검거된 것만 112건 1,326명으로 최고였다고 한다(東生, 「整備される檢察陣と鮮內思想禍の新傾向」, 『朝鮮警察新聞』,, 6쪽). 또한 일본에서는 천황의 대권에 제한을 가한 천황기관설天皇機關說에 대해 군부의 지도 아래 재향군인회을 비롯한 우익단체들이 전국적으로 국체명징운동國體明徵運動을 전개하고 있었다. 일본사회를 휩쓸고 있던 국체명징운동은 혁명사상은 물론 개인주의·자유주의 등 일본주의 입장에서 볼 때, 이단적인 사상을 차단시키면서 대중적인 사상적 기반을 전체주의로 전환시키고 있었다. 註120) 由井正臣, 「總動員體制の確立と崩壞」, 『日本歷史』 20, 岩波書店, 1981, 16쪽. 


이같은 국외 정세 속에서 조선총독은 일정하게 조선의 사상계에 대한 지배력이 확대되고 있는 시기를 포착하여, 사상운동과 민족의식을 압살하기 위해 새로운 정신통제정책으로 심전개발운동을 전개했다. 목표는 일본의 국체명징운동에 호응하여 조선민중의 사상과 정신을 한 방향으로 정리하여 천황숭배의 심지를 배양하려는 것이었다. 그 수단으로 종교와 신앙심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는 그동안 천황의 권위와 그 통치체제를 본격적으로 선전했지만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심전개발운동에 대한 우원 총독의 담화


당시는 근대문명이 발달하여 점차 과학으로 입증할 수 없는 것을 거부하는 사회분위기였기 때문에, 현인신現人神으로 정치적·도덕적 권위의 정점에 있는 천황에 대한 숭배를 이끌어 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일제는 이치와 논리로써가 아니라 감성에 호소하기 위해 종교와 신앙심을 활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농촌진흥운동과 함께 심전개발운동을 통해 조선총독은 자신의 조선 통치의 방침인 ‘내선융화’ 즉 내선일체보다 낮은 단계의 조선민중의 황민화를 실현하려고 했다. 


일제는 일본의 국체관념 즉 천황숭배를 세뇌시키기 위해, 우선 조선민중이 전통적으로 중시하고 있던 조상숭배와 경신사상敬神思想을 이용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일제는 조선인의 조상숭배의 관념을 고취시키는 한편 종교심·신앙심의 함양을 강조하며 유교·불교·기독교 등의 종교 활동을 지원하고 활성화시켰다. 후자와 관련하여 일제가 요구한 신앙심은 각 종교를 통해 일본정신이 가미된 일본적인 신심信心이었다. 각 개인의 정신상태가 다르듯이 신앙의 종류와 그 양식이 다양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일정한 신앙을 갖게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울 뿐만 아니라 특정한 신앙을 관념적으로 선전해도 그것은 효과가 적고 때로는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았다. 註121) 梁村奇智城, 『國民精神總動員運動と心田開發』, 조선연구사, 1939, 69~71쪽. 여기서 ‘일반적인 분위기’가 갖는 ‘무서운 힘’에 착안하여, 심전개발운동으로 일제가 의도하는 신앙적 분위기敬神를 사회적으로 조장하려고 했다. 註122) 本田秀夫, 「心田開發運動と金融組合人の用意」, 『組合旗の下で』, 조선인쇄주식회사, 1939, 68~69쪽. 특정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조상숭배의 관념과 경신사상을 일체화시켜 일본의 경신숭조敬神崇祖의 관념을 배양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註123) 奧山仙三, 「敬神觀念の內鮮相似性-內地の神と朝鮮の神」, 『조선지방행정』 12월호, 1938, 63쪽. 


일제는 심전개발운동을 전개하면서 종래 무당의 단속과 농촌경제의 피폐로 사라져가고 있던 조선의 동제洞祭를 활용할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조장하는 정책을 취했다. 동제와 같은 민간신앙을 경신사상을 고취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되, 숭배할 신을 일본신으로 대체하여 일본적 신심信心을 조장하려고 했다. 충북 영동군 영동면에서는 촌락에 ‘천지신단天地神壇’을 설치하고 ‘천지대신天地大神’을 받들도록 했다. 신단을 중심으로 촌락민의 신앙심을 유도하여 민심을 통제하면서 촌락의 화합·내선인의 융화협조·농민정신의 작흥 훈련·생산개량증산 등을 달성하려고 했다. 註124) 增田收作, 「忠北, 永同の‘天地神壇’を紹介す」, 『자력갱생휘보』 5월호, 1934, 14쪽. 이렇게 일제는 왜곡된 신앙 대상물을 이용하여 신앙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신사神社 혹은 동사洞社·당堂을 참배하게 되면 “신 앞에서 조아리는 것은 한 형식이지만, 이것이 횟수를 거듭하여 마침내 점점 정신을 감화”해 가고 “그 힘은 위대하여 … 점차 황실을 중심으로 하는 신神, 신앙생활로 전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형식에서 점차 정신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註125) 최형직(江原道蔚珍郡守), 「農家更生部落の中心人物の覺悟に就て」, 『자력갱생휘보』 11월호, 1935, 14쪽. 


일제는 이른바 미신타파를 주장하고 조선민중의 신앙심 부족을 타령하면서 신앙심 배양에 고심했다. 당시 조선민중 사이에는 재래 민간신앙이 생활 깊숙히 자리잡고 있어, 註126) “농촌의 사람들의 이것들(미신: 필자 주)에 대한 관심은 기계와 과학의 문명을 자랑하는 금일의 시대에도 이렇게 쇠퇴하지 않고 있다”(인정식, 「農村生活と迷信」, 『東洋之光』 2월호, 1944, 12쪽)고 하였다. 신앙심이 크게 약했다고 볼 수 없다. 단지 재래 민간신앙이 일제의 국체명징·경신숭조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미신타파’라는 미명 아래 이에 타격을 가했던 것이다. 註127) 延白郡, 『農村振興施設槪要』, 1938, 54쪽. 그리고 조선사회의 조상숭배도 천황중심의 귀일체제를 위한 기초적 요소로 활용되었지만, 그것이 단지 종족과 가족 단위로 조상의 음덕으로 가정의 안녕·자손의 번영 등을 기원하는데 그칠 때는 ‘주술’ 행위로 간주되었다. 즉 종래의 조상제사도 그 의례를 통해 천황숭배의 심전이 개척될 때만 보호할 가치가 있었다. 


이상에서 보듯이 일제는 1930년대 들어 조선의 민족운동에 대처하고, 일본정신천황중심주의을 주입하여 ‘황국신민화’를 실행하기 위해 신앙심에 기초한 ‘국체명징’ 관념을 보급시키려고 했다. 이를 위해 ‘실행강목’을 선정하여 농촌진흥운동의 실천 사항 속에 포함시켰고, 심전개발운동으로 한층 그 확산에 노력하여, 1930년대는 이전 시기와 달리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침투시킬 기반이 확대되고 있었다. 농촌진흥운동과 심전개발운동 아래 진행된 정신통제는 전통적인 풍속의 통제와 함께, “지성·감정·의욕을 일정한 준승에 얼거매는 두뇌의 통제”를 초래하여 註128) 최여성, 「문화와 통제」, 『비판』 5월호, 1938, 3·6쪽. 조선민중의 내면세계를 압박하고 있었다. 심전개발운동은 “개인의 두뇌는 생각한다”에서 “국가가 생각한다”로 전환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적·전체적 견지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행동하도록 유도하였다. 註129) 안용백, 「心田開發指導原理の再吟味(하)」, 『조선』 9월호, 1936, 98쪽. 일본 국내 정치가 국체명징운동으로 급속히 군국주의적 파쇼체제로 전환되어, 전체주의 사조를 조성하고 있었듯이, 심전개발운동도 조선민중의 사상적 기반을 획일화시키고 있었다. 


심전개발이라는 구호의 추상성과 모호성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대중적으로 각인시키는데 제약점이 되기도 했다. 1936년 전반기 조선의 사상운동 관련 보고에 따르면, 심전개발운동을 비롯한 정신통제정책이 용이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국가관념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 23%, 자각하고 있다고 가장하는 사람이 19%, 무관심이 58%로 77%의 대다수가 국가관념과 거리가 있었다. 또 이때의 통치방침인 내선융화의 정도를 보면 진정 융화가 되었다고 인정되는 사람이 20%, 일시적으로 융화되었다고 보이는 사람이 25%, 전혀 융화되지 않은 사람이 6%, 무관심이 49%였다. 註130) 『日本陸海軍文書』 No.672 「昭和11年前半期朝鮮思想運動槪觀」. 국가관념과 내선융화에 ‘무관심’한 50% 전후의 계급은 주로 노동자 농민의 무산계급으로 이들은 일제의 ‘통치’에 대해서도 ‘무관심’했다. 일제는 이들은 자칫하면 ‘주의자에 선동’되기 쉽지만 지도에 따라서는 ‘선량한 국민’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이같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정신통제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와 같이 농촌진흥운동과 심전개발운동을 통해 국가관념의 보급과 내선융화가 크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새로운 조선총독의 부임과 중일전쟁과 맞물려 정신통제정책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게 만들었다. 일제는 도시까지 포함한 전국적인 정신통제정책을 모색하였다. 


중일전쟁 초기 일제의 군사적 위력 앞에 압도당해 일부 유력자와 조선민중의 체제내화의 움직임이 가시화되는 한편, 다른 한쪽에서는 전시체제 아래에서 진행된 사회경제적 생활조건의 압박이 반전 분위기를 확산시키고 있었다. 일제가 1937년 7월~1938년 5월까지 집계한 불온 낙서 29건 중 5건이 반전의식의 표현이었고, 불온 삐라 9건 중 2건이 반전투쟁을 촉구하고 있었다고 한다. 국내 사회주의자들은 대중의 반전의식을 구체적인 반전투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註131) 임경석, 「국내 공산주의운동의 전개과정과 그 전술(1937-45년)」,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사』, 한길사, 1991, 237~239쪽. 

   중일전쟁의 확대 속에서 1938년 7~8월 두만강 하류 일대에서 일본과 소련 사이의 국경분쟁인 장고봉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양국 사이의 전면전 가능성이 예견되는 가운데, 일본의 전투력에 대한 “불안과 의구는 불신감마저 품은 위험한 징후”를 나타냈고, “이 불안은 전파와 같이 조선 전국에 확대”되어 일제는 “확실히 위험한 시기”로 인식했다. 註132) 御手洗辰雄, 『南次郞傳』, 生活の友社, 1957, 474쪽. 


이러한 일제의 위기의식은 다음의 「재판소와 검사국 감독관회의의 자문사항 답신서」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사법 사무를 통해 본 일반시정상의 참고사항 여하’라는 자문요청에 대해, 복심법원 이하 각 재판소와 검사국 감독관의 답신 내용을 통해, 우리는 1930년대 후반 일제의 핵심적 권력기관이 판단하고 있는 조선의 상황과 그에 대한 대응 방안의 일단을 이해할 수 있다. 


해주지방법원장은 “현금 조선의 과격사상운동은 표면상 거의 조락한 듯이 보이지만 부령도배不逞徒輩가 코민테른의 새로운 지도방침에 기초하여 교묘한 위장전술로 잠행적으로 집요한 투쟁을 실시하고 있어, 한시도 편안하지 않다. 게다가 그들은 가슴 속에 조선독립사상을 숨겨두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농촌진흥운동의 전개, 중일전쟁 직후의 전쟁 분위기로 “그들 사상운동이 비교적 쇠퇴기에 있음을 놓치지 않고”, 조선민중들에게 ‘국체명징’으로 “조선독립사상의 근원인 민족의식을 배제”시키고 ‘일본정신’을 깨닫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조선민중에게 ‘다른 동아민족을 유도 계발’하는 일종의 지도적 민족으로서 역할을 선전하면서, 그에 걸맞은 일본화를 촉구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조선민족의식을 배양 조장시킬 우려가 있는 것 혹은 그 민족의식을 표현하는 데 제공될 수 있는 것 등”을 단호히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그 방책으로 조선 학생 등에게 조선어 교수를 폐지하고, 색복장려책色服奬勵策을 전국적으로 수립하여 민족의식을 배양 조장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일제는 조선사회를 식민지 질서로 재편하는데 백의白衣배제·색의色衣착용을 기본적인 전제 조건으로 보고, 물리적 강제력을 구사할 뿐아니라 이것을 농촌진흥회의 ‘생활개선’ 사항에 포함시켜 공동의 합의와 실천으로 이를 강행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전국적인 통제 방침 아래 위약금 지급, 도로 노무동원 등의 제재 방법을 강구해서 외형상 색의착용으로 민족의식을 표현하고 상징할 수 있는 대상을 제거하여 ‘심전개발’의 준비공작을 완료한 뒤에 적극적으로 사상교화에 착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註133) 법무국 민사계, 「裁判所及檢事局監督官會議諮問事項答申書」, 『諸會議關係書類』(법무 No. 247), 1937, 222~223쪽. 당시 ‘색의 착용’의 강제가 사회주의자의 민중 선동 혹은 획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고(같은 문서, 216쪽), “농민의 사상범은 거의 모두가 색복 장려에 반대투쟁”을 하고 있을 정도로(같은 문서, 281쪽), 색의 장려는 민족의식 말살정책의 한 수단으로 일제에 의해 집요하게 강행되었다. 공주지방법원과 함흥지방법원의 검사정도 사상운동은 국체관념과 국민정신이 결여한 결과로 보면서, 국체명징과 일본정신의 앙양 보급을 주장했다. 註134) 법무국 민사계, 『諸會議關係書類』, 272~273·280~281쪽. 이렇게 식민지체제 수호의 핵심기관인 법무국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국체명징·일본정신으로 조선민중의 정신과 사상을 전환시킬 것을 강력히 제기하고 있었다. 


2. 조선중앙정보위원회의 활동

일제는 중일전쟁을 총력전으로 보고, 국가가 가진 인적·물적 자원을 국방력의 최고 발휘를 목표로 통제·운용할 수 있는 국가총력전체제를 발동하였다. 1938년 5월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되어 일체의 자원을 분배·관리·동원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국가총력전은 법적 규정만으로 달성될 수 없었다. 인적·물적 자원의 총동원으로 인해 기존 사회경제의 질서가 받을 충격과 동요를 최소한도로 줄이면서 소기의 목적을 완수하려면, 행정적 조치의 강행과 함께 민중의 적극적인 협력이 요청되었다. 

    

조선중앙정보위원회 규정


1937년 8월 중일전쟁 불확대 방침이 철회되고 장기전 양상으로 발전하자, 일본정부는 9월 임시의회를 소집하여 국민의 결의를 촉구하고, 중일전쟁의 중요성과 이에 따른 국제정세의 복잡성 등에 비추어 국민정신총동원을 계획하였다. 10월 12일 ‘전쟁 처리의 원동력’을 확립하고 국가총력전을 민간 차원에서 지원할 목적으로 국민정신총동원중앙연맹이 결성되었다. 중앙연맹은 거국일치·견인지구·진충보국을 내걸고 개인주의를 부정하거나 약화시키고 ‘전체주의·국민주의의 발흥’과 국체본의에 기초한 ‘신민의 천황봉사’를 위해 정동운동을 전개하였다. 註135) 鈴木敬夫, 『법을 통한 조선식민지 지배에 관한 연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89, 213쪽 ; 木坂順一, 「大政翼贊會の成立」, 『日本歷史』 20, 岩波書店, 1981, 271~277쪽. 


총독부는 일본 국내와 마찬가지로 조선 사회를 총력전체제로 재편하려고 했다. 일본·조선·만주로 이어지는 블록경제형성의 방침에 따라 조선의 산업경제도 전시통제경제로 전환했다. 또 정신방면에서 ‘국체관념의 투철 즉 참된 의미의 일본국민화’는 ‘조선통치의 가장 긴요한 사항’으로, 이것 없이는 “다른 방면이 아무리 진보해도 필경은 사상누각에 불과” 하다는 입장에서 정신통제를 가속화시키고자 했다. 註136) 兵斗儁(大邱稅務監督局長), 『朝鮮人の國民編成制度に關する意見書』, 1941, 4쪽. 그러나 일제는 조선의 특수한 사정을 들어, 곧바로 정동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지방행정기구에 따라 계통적으로 확대되어 가던 농촌진흥운동을 비롯하여 일반 교화시설의 조직과 활동 등을 이용할 수 있었던 점, 다음에서 살펴볼 조선중앙정보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관 주도로 ‘국민정신총동원’을 위한 정지작업이 가능했던 것도 그 이유였다. 


총독부는 중일전쟁 관련 시국인식·국론 통일·국책 선전과 황국신민화를 위한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일본의 내각정보위원회에 대응하여 1937년 7월 22일 조선중앙정보위원회이하 정보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정보위원회는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하고 총독부 각 국장·관방 문서과장·경기도 지사·조선군참모장 등 총독부와 군부가 중심이 되어, 정보선전에 관한 중요 사항을 조사·심의하고 연락조정을 도모하는 최고 기관이었다. 정보위원회는 매년 1회 총회와 임시 회의를 개최하여 중요 사항을 협의했고, 주된 사무의 처리는 총독부 내 과장·사무관·육해군 어용계御用係로 구성된 간사회에 위임했다. 간사회는 매주 한 번씩 회의를 개최하여 위원회의 결의와 국내외 정보망으로부터 얻은 정보에 기초하여 시국에 민첩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정보선전에 관한 사항을 심의 처리하였다. 정보위원회와 간사회 사이의 연락은 총독부 관방문서과에서 담당하며, 간사회에서 협의 연구된 사항은 해당 부처를 거쳐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각 도에는 도위원회와 간사회가 있어, 도 단위 시국인식과 정신총동원 관련 사무를 맡았다. 註137)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시정연보(1938년도)』, 1940, 663~664쪽 ; 정근식, 「일본 식민주의의 정보통제와 시각적 선전」, 『사회와 역사』 82, 한국사회사학회, 2009. 


정보위원회와 간사회는 정보를 수집·연락·조정하고, 정보 중 적당한 것을 발표하는 보도 기능, 대중을 상대로 국책을 전달 홍보하여 여론을 유도하고 이해와 협력을 구하는 계발선전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간사회에서 협의·연구하는 정보선전 중에는 국민정신총동원에 관한 사항이 포함되어, 정보선전과 국민정신총동원은 표리일체의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정보위원회는 산하 별도의 실행 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결정된 사항을 계몽선전하기 위해서는 지방행정기구와 농촌진흥운동의 조직, 관의 감독 아래에 있는 각종 단체와 기관 그리고 정동운동의 실시 이후에는 조선연맹의 조직을 활용하였다. 註138) 堂本敏雄, 「朝鮮に於ける情報宣傳」, 『조선』 11월호, 1939, 34쪽. 


정보위원회는 정보선전을 위해 모든 선전 매체를 이용하였다. 신문·라디오·영화·강연회·좌담회·팜프렛·뉴스사진·지지거紙芝居, 종이극·전람회 등을 활용했으며, 조선의 유력자를 동원하여 강연회를 개최했고, 경찰관 주재소를 중심으로 촌락마다 좌담회를 실시했다. 또 애국일1937년 9월 6일과 황국신민의 서사1937년 10월 2일를 제정하여 황국신민된 신념을 세뇌시키고 있었다. 이외 각종 정신운동 관련 주간행사를 전개하면서 조선민중의 정세인식을 통제하면서 황민화를 획책했으며, 소비절약 등 전시통제경제에 대한 협력을 유도하는 등 이후 등장하는 정동운동의 활동 영역을 거의 망라하고 있었다. 농촌진흥운동에 생업보국의 개념을 포함시켜 시국인식을 강조하고 생산 활동이 국책에 따라 통제·운영되는 것을 감수하도록 농민들을 규제했음도 물론이다. 註139) 조선총독부 관방문서과, 「朝鮮時局宣傳事務槪要」, 『시국선전사무보고』, 1937. 


정보위원회는 정보선전을 통해 ‘자기의 공유公有’ 즉 자신은 公의 것, 자아를 국가에 바친다는 관념을 확산시키면서 註140) 「時局と情報宣傳に就て」, 『통보』 7, 1937, 12~13쪽. 개개인의 정신을 국가 목적의 달성이라는 명분 아래 통합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넓히고 있었다. 그러나 ‘선전’은 신문·라디오·활동사진 등 어떤 매체를 써도 “국민의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시키는 효과가 한정”되어, “주로 확성기로 한쪽에서 말하(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즉 “상대가 그것을 듣고 움직이고 선전을 하는 사람의 의지대로 움직여줄지 어쩔지는 별로 알 수 없(는)” 한계를 지녔다고 한다. 註141) 鹽原時三郞, 「精動運動の運用」, 『총동원』 2-6, 1940, 9~12쪽. 이것은 정보위원회 등이 정동운동의 실시 이전까지 시국 인식·여론 조성·정신총동원을 위해 기능했지만, 전시체제를 지원하는데 제약점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정보위원회의 정보선전을 위시하여 국민정신총동원·황민화를 강행하기 위해서도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했다. 


3. 부락연맹과 애국반의 활동

정동운동이 이념과 목표, 구조를 갖춘 조직으로 전시체제를 구축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려면, 항상 훈련하여 “언제라도 국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태세”를 갖추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말단조직이 중요했다. 부락연맹은 애국반과 함께 ‘실천망’으로 규정되어, 지방연맹 중에서 말단에 위치하고 있었다. 부락연맹은 농촌진흥회와 마찬가지로 농민의 생활의 장場인 촌락 단위로 설치되었다. 농촌진흥회가 도별 규약 아래 조직되었다면, 부락연맹은 조선연맹이 제시한 ‘규약 준칙’에 따라 전국적인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조직되었다. 이는 정동운동이 전국을 대상으로 지역별 독자성을 어느 정도 인정했지만 통일성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정동운동 이전에 농촌진흥운동이 전개되어, 동일한 촌락을 대상으로 농촌진흥회와 부락연맹이라는 두 개의 운동 조직이 서로 경합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으므로, 그때 일어나기 쉬운 혼란을 가급적 미연에 방지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부락연맹은 농촌진흥회와 함께 병설되거나 혹은 농촌진흥회에 정동운동의 명칭을 결합하여 註142) 조선총독부, 「國民精神總動員聯盟ニ關スル件(1939.3.16)」, 『朝鮮に於ける國民精神總動員』, 137쪽. 성립된 ‘부락진흥회연맹’이 양자를 대신하기도 하고, 註143) 경성일보사, 『朝鮮農業の道』, 1941, 184쪽. 때로는 농촌진흥회가 그대로 부락연맹의 역할까지 실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註144) 森田芳夫, 『朝鮮に於ける國民總力運動史』, 32쪽. 


충청남도는 읍면연맹의 말단 조직과 관련하여, 촌락에는 리연맹里聯盟없이 갱생공려부락·공려조합농촌진흥회·공려조합 설치예정부락을 단위로 부락연맹을 결성하고, 그 간부를 구장·공려조합과 진흥회의 간부가 겸임하도록 하여 농촌진흥운동과 조직상 마찰을 초래하지 않도록 했다. 註145) 국민정신총동원충청남도연맹, 『국민정신총동원연맹요람』, 118쪽. 다른 도에서도 충청남도와 비슷한 방침에 따라 부락연맹을 농촌진흥회의 기반 위에 설치하였다. 전라북도는 우선 기존 농촌진흥회를 ‘읍면연맹의 세포기관’으로 이용하여 부락연맹의 설치를 보류하고 대신 애국반만 1939년 2월 기원절을 계기로 일제히 결성하여 일단 조직의 틀을 갖춘 뒤, 다시 상하 일관된 조직을 구축하는 차원에서 7월 7일 중일전쟁 3주년 기념일을 기해 촌락마다 부락연맹을 설치하여 실천망을 완료한다는 방침이었다. 또한 전북은 1940년 3월 도연맹의 규약을 개정하여, 목적 및 사업 속에 농촌진흥운동의 강화철저에 관한 사항을 추가함과 동시에, 부군읍면 부락연맹에서도 똑같은 내용으로 규약을 개정하여 양 운동의 표리일체 불가분 관계를 공고히 하려고 했다. 註146) 정동전북연맹, 「精動全北聯盟の活動」, 50쪽. 


일제는 이상과 같이 부락연맹과 농촌진흥회의 일체화 혹은 구장·농촌진흥회장·부락연맹 이사장의 3위일체를 실현하려고 했고, 도 이하 지방에서도 이러한 방침에 따르려고 노력했다. 註147) 정동가평군연맹, 「我が郡の愛國班」, 『총동원』 2-6, 1940, 60쪽 ; 김영희, 「국민정신총동원연맹 조직과 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8,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2.. 정동운동과 농촌진흥운동을 표리일체로 진행시키는 것은 일선관계자들에게 ‘철칙’이었다. 註148) 山木仁, 「指導者に就いて」, 76쪽. 황해도를 보면 부락연맹의 이사장은 흥풍회의 위원장농촌진흥회 회장에 해당, 애국반장은 각 위원흥풍회 산하 부문별 실행위원이 맡았고, 농촌진흥회의 월례회도 부락연맹의 총회와 일치시켜 양자가 표리일체가 되도록 지도하고 있었다. 註149) 경성일보사, 『朝鮮農業の道』, 148쪽. 이렇듯 정동운동이 농촌진흥운동의 기반 위에 성립되어 양자의 공존을 모색하고 있었다. 또 농촌진흥회의 활동이 잘 되고 있는 촌락에서는 연맹도 아울러 잘 되는 양상을 띠었다. 註150) 山木仁, 「指導者に就いて」, 76쪽. 정동운동이 농촌진흥운동을 통해 일정하게 긴장·통제와 동원의 소지가 마련된 상태에서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국반은 종래 5인조가 있던 곳은 이를 바탕으로, 없는 곳은 새로 조직하였다. 애국반은 10호 내외의 인접한 이웃끼리 결성되므로 단결과 기동력을 발휘하여 정동운동 관련 사항들이 일상 생활화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했다. 註151) 정동가평군연맹, 「我が郡の愛國班」, 56쪽. “연맹은 먼저 애국반부터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동운동이 황국신민화를 목표로 하되 전시체제를 광범위하게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국반 역시 사회·경제·문화 등 모든 부문 조직의 세포로서 활약하였다. 따라서 애국반은 부락연맹 혹은 농촌진흥회의 세포 조직으로 정신운동과 경제운동생산확충운동에 걸쳐 그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註152) 御手洗辰雄, 『南總督の朝鮮統治』, 1942, 27쪽. 


전국적으로 애국반의 결성이 완료되어 갈 무렵 총동원위원회 산하 간사회는 애국반의 적극적인 활동을 유도하기 위해 몇 가지 대책을 마련했다. 註153) 조선총독부, 「愛國班ノ活動ヲ積極的自發的ナラシムル方策ニ關スル件(1939.9.6)」, 『朝鮮に於ける國民精神總動員』, 160~161쪽. 첫째, 조선연맹 총재가 간단한 격문을 애국반장 앞으로 발송하여 분기를 촉구하고, 둘째, 부락연맹마다 애국반장의 회합을 수시로 개최하여 상호 연락망을 확보하도록 했다. 셋째, 이웃한 애국반을 서로 시찰하여 자극을 받아 분발하도록 했으며, 넷째, 애국반마다 적당한 권장제도를 두어 반원의 활동을 독려하며 실행사항을 필행하도록 하였다. 다섯째, 애국작업愛國作業·좌담회 등을 통해 일본정신을 주입하여, “인심이 의거해야 할 바”를 알게 하도록 했다. 즉 전시동원과 관련된 불만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일본정신’으로 완화, 적응시킨다는 것이다. 문서과장을 통해 이 통첩을 받은 조선연맹은 적당한 구체적 방책을 마련하여 지방연맹을 통해 실행해야 했다. 


한편 도연맹마다 애국반의 활동을 촉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했다. 경기도는 1938년 7월 14일까지 부군연맹, 15일 도연맹의 결성으로 조직망을 완료했는데, 애국반은 정町부락연맹에 속한 것 34,624개, 각종연맹에 속하는 것 3,528개, 합계 38,152개로 “물도 새지 않는 철벽의 연맹망”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애국반의 활동은 “애국반원의 가정생활에까지 침투하는 것”이기 때문에 운동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 중시되었다. 그래서 경기도는 1939년 10월 27일 ‘애국반활동기준’을 제정하여 애국반원이라면 “최소한도 실천해야 할 당면한 구체적 사항”을 제시했다. 註154) 「我が道の愛國班」, 『通報』 70, 1940. 경기도가 조선의 ‘중추 지구’인 만큼 정동운동의 동향도 이곳의 “편린을 미루어 바로 그 완전을 판단”할 수 있다고 하며 그 기준의 제정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경기도는 반장의 표찰標札을 제작하여 반장들에게 제공했다. 가평군에서는 애국반장의 문찰門札과 반원의 문표門標을 집 앞에 걸게 했는데, 반장은 반원의 이름을 적은 표찰表札를 집안에 붙여 두고 있었다. 註155) 정동가평군연맹, 「我が郡の愛國班」, 60쪽. 이런 문패류를 걸게 함으로써 애국반장과 반원은 모두 정동운동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소속과 역할을 확인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규제해야 했다. 반장의 명부 작성은 문패류 내걸기와 함께 반장이 반원을 통제·감독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 


이렇게 애국반을 강화하기 위한 대책들이 나오는 데는 애국반의 활동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이 반영되기도 했다. 파주군 광탄면은 1940년 4월 1일부터 시행을 목표로 ‘애국반지도회愛國班指導會 취지와 회칙’ 註156) 조선총독부, 「연맹휘보」, 『총동원』 2-4, 1940, 109쪽. 을 만들었다. 일반 반원은 시국인식이 부족하고 지도자들은 그 사무가 복잡하여 철저하게 지도하지 못하여, 이로 인한 반원들의 소극적인 활동을 타개하기 위해 애국반지도회를 설치한 것이다. 애국반지도회는 면장을 회장으로 광탄면의 주요 관공서 임원·유력자와 애국반장을 포함하며, 이들은 일반 반원들의 선도자로서 모범을 보여 정동운동의 목표 달성에 노력해야 했다. 


충청북도에서는 ‘국민정신총동원’·‘근로보국’ 등과 같이 일상적으로 외쳐지고 있는 사항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애국반원지도의 금琹’을 제작하였다. 이것은 거기에 담긴 사항을 반원들에게 실행시켜, “부지불식간에 연맹의 정신에 합치되게 하여 관습을 형성하고 국민성을 지니도록” 의도된 것이다. 애국반장 이상 지도자는 이 ‘금琹’을 소지해야 했다. 또한 애국반장에게는 별도로 ‘애국반장반원지도의 심득心得’을 하달하여 반원 지도의 지침을 제시하였다. 첫째, 반장은 매월 1회 월말에 반원을 집합시켜 다음 달 애국일 행사 혹은 반원이 실행해야 할 사항을 합의하여 실행하도록 하고, 둘째, 반원이 집합할 때마다 ‘애국반원의 심득 및 생활기준’에 따라 반원이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할 사항과 실행 사항을 평이하게 설명하고 실천을 독려해야 했다. 셋째, 반장은 부락연맹이사장과 밀접한 연락을 취하여 부락연맹과 애국반의 행사가 상호 모순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 


이렇게 애국반장은 반원을 지도할 요령을 체득한 뒤 ‘애국반원의 심득 및 생활기준’에 따라 다음의 내용을 반원들에게 전달하였다. 즉 정동연맹·애국반장·반원의 인원과 해당자·애국반의 목적·애국반원으로서 실천 사항 등을 숙지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그 실천을 종용하였다. 註157) 조선총독부, 「精動忠北聯盟の活動」, 『總動員』 2-6, 1940, 43~49쪽. 이로써 일제는 반원들의 가정 생활까지 파악하고 있는 반장들을 통해 정동운동의 기본 사항을 관철시킬 수 있는 체제를 확립하였고, 조선민중은 일상과 내면세계가 점차 황국신민적 소양으로 개조될 처지에 있었다. 


한편 조선연맹은 1939년 4월 조직 개편 이후 정동운동이 본격적인 개시에 들어갔다고 보고, 8~9월에 걸쳐 13개 도에서 순회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강연을 겸해 강사들에게 각지의 애국반의 활동상황을 시찰하여 조사 보고하도록 했는데, 애국반은 “관청의 지도에만 의뢰”하여 활력이 없는 등 정동운동이 기대에 못미치고 있다는 내용들이 있었다. 註158) 『동아일보』 1939년 11월 29일 「자주력없는 애국반」. 이에 1940년 2월 28일 조선연맹 이사장은 각 도연맹 이사장 앞으로 총독·정무총감·연맹총재 등이 지방으로 출장갈 때에는 그곳의 애국반이 반드시 사열을 받을 수 있도록 미리 조처하라고 통첩을 냈다. 그 내용은 첫째, 사열을 받을 때는 연맹기聯盟旗 및 반기班旗 아래 이사장이 선두에 서서 지휘할 것, 둘째 특히 거지동작擧指動作을 규율 바르게 시킬 것, 셋째 이사장 또는 반장이 반班의 상황반명·반의 호수 인원수·실시 사항 및 성적 등을 보고할 것, 넷째 질문에 간단 명료하게 답변할 수 있도록 평소 훈련해 둘 것, 다섯째 반원에게 자기 소속 반의 명칭 및 반장의 씨명·반 소속 연맹의 명칭·반의 호수 및 반원 수·반 조직의 의의 등을 언제라도 대답할 수 있도록 지도하라는 것이었다. 註159) 조선총독부, 「연맹휘보」, 『총동원』 2-4, 1940, 104~105쪽. 


일제는 이와 같은 훈련과 사열을 거듭하면서, 조선민중에게 ‘천황으로 귀일’이나 ‘황도皇道 현양’이라는 관념을 부식시켜 가고 있었다. 조선민중은 말단조직 부락연맹과 애국반에 편입되어 ‘반원의 심득과 생활기준’, ‘실천요목’을 생활의 일부로 수용하고 확인·검증을 받으면서 점차 생활이 규율화되었으며 내면 세계를 구속받고 있었다. 일제에 따르면 과장된 표현이지만 이 무렵 “3세의 아동도 이 단어내선일체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註160) 鹽原時三郞, 「國民精神總動員運動について」, 『국민정신총동원강연록』, 1939, 12쪽. 하였다. 정동운동의 조직망이 충분히 기능하지 못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농촌진흥운동의 조직적인 경험과 결합되어 식민지권력은 일상까지 침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 근로보국운동의 확산

일제는 전시체제의 구축과 관련하여 기존 사회질서와 생활 전반에 걸쳐 가치의 기준을 사적인 계급적인 권익 추구에서 멸사봉공·진충보국으로 전환하려고 했다. 국민총훈련이란 조선민중 전부에게 이런 가치를 체화시켜 인적·물적 동원 명령에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고, 근로보국운동은 그 일환 이었다. 


전통적인 조선 사회에서도 농가 경영의 성격상 공동작업이 아래로부터 발달해왔다. 그러나 일제하 식민지권력의 통제 아래 전개되는 공동작업은 단지 영농의 수단만은 아니었다. 일제는 공동작업을 통해 공동정신·집단정신과 공공성을 주입하고 집단훈련과 그에 따른 규율을 훈련시키면서 궁극적으로 체제내화를 유도하려고 했다.  

    

근로보국운동 광경


이 과정에서 조선시대의 강제 노역이던 ‘부역’은 폐지되지 않고 일제하 ‘급속한 도로망 보급’의 수단이었으며, 註161) 조선총독부, 『朝鮮の聚落(전편)』, 1933, 69쪽. 이와 유사한 형태의 공동작업이 촌락의 공동수익지의 개간경작·도로개수·신사공사神社工事 등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농민들은 이런 작업을 ‘부역’으로 받아들이고 고통스러워했다. 이런 공동작업은 농촌진흥운동 아래 좀더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노동을 위한 별도의 조직은 없었다. 공동작업의 목적도 경제적인 생산을 주로 하되 공동일치의 정신훈련을 겸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정동운동 아래 전개된 근로보국운동은 기존의 비조직적인 공동작업과 달리 근로를 위한 조직이 별도로 마련되었으며 정신적 훈련에 중점을 두었다. 따라서 근로보국운동은 종래 부역제도의 강제성을 ‘근로봉사’·‘근로보국’으로 대체하여, 집단성과 공공성을 크게 강조한 형태였다. 


근로보국운동은 1937년부터 부분적으로 전개되었다. 註162) 1937년 9월 23일 농산어민보국일의 행사 당일의 ‘보국작업’과 11월 10일부터 시작되었던 국민정신작흥주간 중 근로존중일·공공봉사일도 근로보국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1938년 2월 11일 紀元節(건국기념일), 4월 29일 天長節(천황 탄생일)을 중심으로 한 국민정신총동원강조주간 등(조선총독부, 「我が道の勤勞奉仕運動」, 『조선』 11월호, 1938, 52쪽) ‘國體’(천황제 국가)와 관련된 기념일을 전후하여 근로봉사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1938년 6월 11일 학무국 사회교육과의 통첩으로 학교 단위의 근로보국대가 결성되었고, 일반인을 상대로 한 근로보국대는 6월 26일 각 도지사 앞 정무총감의 통첩 ‘국민정신총동원근로보국운동 실시요강’에 의거하여 중일전쟁 1주년 기념일 즉 정동운동 조선연맹의 출범과 동시에 조직되었다. ‘실시요강’은 다음과 같다. 註163) 국민정신총동원충청남도연맹, 『국민정신총동원연맹요람』, 105~109쪽. 첫째, 운동의 목표는 국가관념의 함양과 내선일체의 심화, 근로애호·인고단련·희생봉공의 정신 함양, 공동일치적 행동의 훈련, 비상시국인식의 철저 등이다. 둘째, 참가범위는 만 12세부터 40세까지 남녀 모두이며 셋째, 근로보국대는 청년단·갱생공려부락·갱생지도부락 등 어느 정도 통제의 소지가 있는 곳부터 결성하여 점차 통제의 강도를 높여 간다는 것이다. 넷째, 작업의 종류는 황무지 개간·도로 하천의 개수·저수지 혹은 용배수로의 준설 등 공공사업을 주로 하되 농번기의 공동작업에도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작업은 잉여노동력을 이용하여 시작하되 서서히 근로량을 늘려가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장한다는 방침이었다. 다섯째, 청년단·향약·진흥회 등을 단위로 조직된 보국대는 그 단체의 장이 출동을 지휘하며, 읍면 등 행정기관은 관할 구역 전반을 지도하게 되었다. 여섯째, 작업개시를 전후하여 보국대원들은 궁성요배 등 일련의 의례를 거쳐야 하며 일곱째, 보국대원은 작업으로 보수를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받을 때는 헌금 혹은 보국대 비용 등으로 충당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다음에서는 몇 가지 요강 내용을 분석하여 그 의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근로보국대의 작업이 공공 부문을 중심으로 거의 무임금에 가깝게 이루어지면서, 일제는 재정부담의 완화 등 물질적 효과만이 아니라, 각 개인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중시하였다. 근로보국운동은 근로를 매개로 조선민중에게 “국시國是의 관철에 매진”할 수 있는 심성 즉 ‘황국신민된 신념’을 註164) 조선총독부, 「휘보」, 『조선』 7월호, 1938, 157쪽. 각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집단적인 근로의 체험은 개인의 임의행동으로는 도저히 이르기 어려운 전체주의적인 정신과 마음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註165) 학무국, 「勤勞奉仕の運動」 『통보』 27, 1938, 10쪽. 개인이 모여 집단을 이룰 경우 개인의 성질은 사라지고 집단특유의 심리와 성격 즉 ‘집단특유의 종합의사의 힘’으로 ‘전체주의 관념’ 등이 나타난다고 한다. 註166) 학무국, 「勤勞奉仕の運動」, 『통보』 27, 11쪽. 따라서 근로보국운동은 개인 임의가 아니라 반드시 집단의 형태를 취하도록 했다. 


근로보국운동은 정동운동과 함께 일제의 통제권 밖에 있는 민중을 조직적으로 단련시킬 수 있는 장치였다. 근로보국대(단)에는 원칙적으로 해당 연령의 남녀는 누구나 참여하여, 어떠한 형태라도 일(작업)을 가지고 그 일(작업)을 통해 근로를 존중하는 자세를 갖도록 했다. 그러면서 이 운동은 대중으로 하여금 근로는 단순히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국가와 공공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이유를 깨닫게 하였다. 註167) 조선총독부, 「我が道の勤勞奉仕運動」, 『조선』 12월호, 1938, 35쪽. 이 때문에 일제는 기본적으로 공공근로를 중심으로 작업이 이루어지도록 했고, 근로보국대에는 종래 노동을 하지 않거나 싫어하는 사람도 참여시켜 할당 배치된 작업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근로보국대는 ‘개인의 소아小我’가 ‘전체’와 ‘규율적 계획적 작업’에 융합되고, 규율에 대한 복종, 명령에 따른 실행 착수 등이 몸에 배도록 하는 집단 훈련의 장이었다. 註168) 학무국, 「我が道の愛國班」, 『통보』 73, 1940, 11쪽. 따라서 근로보국운동은 ‘인간개조의 일대 시련’이라는 평가도 가능했다. 註169) 栗原美能留, 「國民精神と勤勞報國運動」, 『東洋之光』 1월호, 1939, 29쪽. 

 

또한 근로보국운동은 ‘이기’를 배제하고 “가능한 한 금전의 관념이 생기지 않게” 註170) 조선총독부, 「我が道の勤勞奉仕運動」, 『조선』 12월호, 29쪽. 공공작업을 진행시켰고, 때때로 일반 임노동자의 노동 혹은 노임을 간접적으로 통제하기도 했다. 그리고 만약 수입이 생길 경우는 애국저축이라든가 국방헌금·황군위문비 혹은 농촌진흥회와 부락연맹 등 촌락 단체의 기본금 등으로 전용하도록 했다. 일부는 노임으로 배당되기도 했다. 일제는 정동운동을 통해 국민총훈련을 달성하려고 했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했듯이 촌락 단위로 집회소·국기게양대·근로보국대기·애국반기 등과 같은 보조 수단을 준비시켰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고, 일선 애국반장들은 “무슨 일을 해도 먼저 필요한 것은 돈”인데, “애국반에 경비가 전혀 없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註171) 조선총독부, 「愛國班長の聲」, 『총동원』 2-5, 1940, 62쪽 ; 이종민, 「전시하 애국반의 조직과 일상의 통제-경성부를 중심으로」, 『동방학지』 124, 연세대 국학연구원, 2004. 근로보국대의 수입의 일부는 이런 촌락의 재원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한편 총독부 내무국 사회과는 1938년 봄 각 공사장에서 요구하는 노동자를 40~50만명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이런 막대한 인원을 기존 노동시장에서만 충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각 도는 농촌의 유휴노동자를 모집해야 했다. 註172) 『조선일보』 1938년 2월 10일 「대량 노동력 수요와 농촌지방 募人難」. 이에 따라 저렴한 노동력의 저수지와 같은 농촌의 노동력이 재편되기 시작했는데, 이런 맥락에서 근로보국운동을 보아야 한다. 일일 농업노동자·연고年雇 등은 농촌의 유휴노동력으로 노무 조정의 첫 번째 대상자였고, 이들을 농촌에서 방출하기 위한 한 수단으로 앞에서 언급했던 비상시국민생활개선기준에 ‘행랑 폐지’가 들어 있었다. 농촌진흥운동에서는 경작지 편중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연고와 같은 머슴을 두고 때로는 20여 정보에 이르는 소작지를 경작하는 이들에게 소작지 분양을 권고하고 있었다. 과잉분의 분양이 진행되면 자연히 농업노동자의 고용 기회는 감소될 수밖에 없었는데, 정동운동의 ‘행랑 폐지’는 농촌진흥운동의 경작지 분배를 측면 지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근로보국운동은 과잉 노동력에 근거했던 영농 형태가 불가능해지고 또 갈수록 부족해지는 농촌노동력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남아 있는 사람들의 근로를 강화시키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다음에서는 근로보국운동이 국민총훈련의 일환으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경기도 여주군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경기도는 일반을 대상으로 한 근로보국운동의 지침이 나오기 전 6월 24일 근로보국단의 설치에 착수하여, 7월 7일까지 273개를 설치하였다. 근로보국단은 ○○면근로보국단 규약 준칙에 따라 면 단위로, 동리에 분단分團, 군에 근로보국단연합회, 도에 근로보국단본부를 두고 지방행정의 장이 지휘하였다. 근로보국단은 애국일 등의 공공작업, 촌락의 공동시설과 작업에 동원되었고, 원거리 공사와 작업에는 근로보국단원 중에서 뽑은 근로보국단 출동대가 나갔다. 


여주군은 1938년 5월 면 단위 근로보국단을 결성하여, 도내 근로보국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강령과 규약을 마련하여 연령 20~40세 남자를 단원으로, 동리에는 분단, 분단에는 반을 두기도 하였다. 여주군의 근로보국단 설치 상황을 보면, 10개 면에 근로보국단 10개, 분단 294개, 단원 9,036명이었다. 동리 단위에 설치되는 294개 분단이 294개의 농촌진흥회에 설치되었다. 註173) 편집국, 「灼熱の野に勤勞奉仕の若人を訪ねて(2)-京畿道驪州郡勤勞報國團視察記」, 『조선지방행정』 11월호, 1938, 48쪽. 단장은 면장, 부단장은 공립소학교장 혹은 주재소 수석을 추대하고, 간사와 보도원·분단장·반장이 있었다. 


단원 중에서 뽑힌 출동대는 출발에 앞서 선서식을 “일동경례→제○회 출동대 편성 보고→국기게양→동방요배→황국신민서사→훈사→축기祝旗 및 명감銘鑑증정 수여→선서→고사告辭→축사祝辭→답사答辭, 강령과 단원심득 제창→창가→만세삼창→일동 경례”의 순서로 거행하였다. 출발 역시 “정렬 점호→창가→만세→일동 경례→발차發車”로 이루어졌다. 일제는 식순이 진행되는 가운데 대원들이 국가관념과 사명감에 충만된 채 출발하기를 기대했다. 대원들이 이리저리 높은 임금을 찾아 이동하는 일반 노동자의 ‘인부적 근성’ 등의 ‘악영향’을 받지 않고, 국가 공공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자발적’으로 거의 무임금으로 작업하도록, 출동식과 귀향식은 엄숙히 거행되었다. 


공사 현장은 농도훈련도장農道訓練道場의 연장 혹은 분교장이 되었고, 대원은 전부 도장道場에서 침식동작을 함께 하였다. 매일 아침 “인원 점호→국기게양→동방요배→서사 제창→강령 제창→국민체조”의 순서로 조회를 마친 뒤 근로에 착수하였다. 작업의 종료 역시 국기게양탑 아래에서 일정한 의례를 거친 뒤 이루어졌다. 출동대기出動隊旗는 대원들의 정신의 상징으로 작업 현장에 반드시 가지고 나가게 되어 있었다. 단원은 항상 “황국신민의 서사·취지·총독의 5대 정강·총독의 훈시 요항·제국정부 발표의 사변관계 성명서 기타 수양훈修養訓 등”을 수록한 명감을 1권씩 소지하고 있었고, 작업시에는 ‘근로보국단강령’이란 글귀와 일장기를 넣은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13~15시간씩 무더위 아래에서 작업을 해야 했다. 註174) 편집국, 「灼熱の野に勤勞奉仕の若人を訪ねて(2)」, 『조선지방행정』 11월호, 46~47쪽. 근로의 개시·종료·휴식·작업 방법 등은 모두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야 했고, 도장에는 작업 출석부出席簿와 일지가 비치되어 근타勤惰의 상황 및 매일의 필요 사항들이 기재되었다. 註175) 편집국, 「灼熱の野に勤勞奉仕の若人を訪ねて(1)」, 『조선지방행정』 10월호, 1938, 46쪽. 


명감과 강령 혹은 ‘단원 심득’이 단원의 작업과 일상을 규제하는 가운데, 이들의 신체와 정신은 통제기제에 크게 노출되어 있었다. 대원들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공사장에서 받은 훈련에 기초하여 생업을 통해 봉공한다는 자세로 생활해야 했고, 註176) 경기도개풍군연맹, 「我が郡聯盟の活動」, 『총동원』 2-6, 1940, 55쪽. 근로봉사의 선구로 중견자로 촌락을 통솔할 수 있도록 지도받았다. 註177) 조선총독부, 「我が道の勤勞奉仕運動」, 『조선』 11월호, 1938, 27쪽. 이렇게 근로보국단의 작업은 전시체제의 기반을 닦기 위한 국민총훈련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충청북도는 근로보국운동의 지도 이념과 목적을 다른 지역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지금은 “개인의 생활이 주체가 아니라 국민이 일체가 되어” 시국을 극복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집단적 훈련과 신체적 단련’으로 ‘국가의 성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또 일본정신은 오랫동안 ‘자유주의 개인주의의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이제야 ‘본래의 고향인 전체주의’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근로보국운동은 이런 ‘일본정신이 응집’하여 행동화된 것으로, 힘의 전체·의사의 전체가 ‘국가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근로보국운동은 국가 사회·사상·신체·교육·종교 등의 각 부문을 일제의 의도대로 통제하는데 유용하다고 했다. 註178) 조선총독부, 「我が道の勤勞奉仕運動」, 『조선』 11월호, 22~23쪽. 충북의 근로보국대는 애국일 행사의 근로봉사만이 아니라 농촌진흥운동에도 참여했지만, 주된 활동은 농민들을 경제적으로 갱생시키는 것보다 “이기利己를 동반하지 않는”, ‘공동 즉 대아大我’로 ‘몰입’하도록 작용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근로보국운동은 국민총훈련의 일환으로 정동운동을 추동하고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근로보국운동은 “전 반도 민중을 총단련하여 일단一團 강고한 황국신민으로 만드는데 결여할 수 없는 방도”였다. 근로보국운동은 국민총력운동 단계에서 국민개로운동으로 발전하여 1944년에 실시되는 징용제의 정지작업의 성격을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