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연구동향과 쟁점 / 1930년대 일제의 민족분열통치 강화

몽유도원 2013. 7. 22. 23:06

제1장 연구동향과 쟁점 

제1절 농촌통제정책과 관변조직 3 

1. 촌락조직 재편 배경 3 

2. 지방제도 개편과 모범부락 6 

제2절 농촌진흥운동과 국민총력운동 10 

1. 농촌진흥운동과 향촌통제 10 

2. 국민총력운동과 전시체제 13 

제3절 치안유지법과 전향공작 17 

1. 법에 의한 탄압 17 

2. 사상전향공작과 전향단체 20 



1. 농촌통제정책과 관변조직


1. 촌락조직 재편 배경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한 이래 지방행정제도 정비와 더불어 촌락에 대한 지배를 통해 강고한 식민지배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촌락은 농민의 생활현장이자 자신들의 사회적 결속력을 가진 사회조직체였다. 오늘날 민주적인 절차와는 다소 상이하지만, 운영원리는 어느 정도 자율성을 견지하는 등 구성원의 요구사항과 여론을 일부분이나마 수용하고 있었다. 조선후기 빈발한 농민항쟁은 이와 같은 상황을 반영하는 가운데 진전을 거듭하는 요인이었다.

일제의 식민지지배와 수탈은 향촌사회를 변모시키는 등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농민들은 물질적인 수탈 강화와 자기정체성을 훼손하려는 여러 형태의 관제조직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생존권을 담보擔保하려는 최소한의 저항이자 미약하나마 식민지배체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註1) 물론 행정력을 동원한 폭압적인 지배력에 순응하는 등 지배체제 내로 견인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중일전쟁 이후 비밀결사체를 제외하고 합법적·조직적인 저항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파시즘에 의한 군국주의체제는 기본적인 집회·결사의 자유마저도 전혀 허용하지 않았다. 맹목적인 복종과 순종만이 강요되는 가운데 이를 찬양하는 분위기였다. 註2)

촌락조직을 매개로 한 일제의 촌락과 농민에 대한 통제 연구는 일제강점기 농촌지배의 구조·성격·실태 등을 규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관건임에 틀림없다. 이는 조선민중과 식민지권력의 관계를 해명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분야 중 하나이다. 일제의 농촌재편에 대한 이해는 식민지통치의 논리와 성격, 나아가 식민지배정책사 전반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데 필수적인 요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식민당국자들은 일찍이 조선의 전통적인 관습·제도·민속 등 일상사 전반에 관한 실태조사·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목적은 한국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 요인을 찾아 이를 식민통치에 활용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註3) 일제강점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의 주요한 시책으로서 추진되었다. 유물조사나 유적지 발굴, 박물관 건립과 운영, 공진회共進會개최, 『조선사朝鮮史』 편찬, 『구관습제도』 조사·발간 등도 이러한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註4)

일제강점기 농촌·농민에 대한 연구는 주로 식민지농업정책·지주제·농민운동 등에 집중되었다. 註5) 토지조사사업·산미증식계획 등 경제적인 수탈체제와 이에 저항한 소작쟁의·수리조합반대투쟁·혁명적 농민조합운동 등에 관한 실체는 상당 부분 규명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1930년대 전개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의 주요한 영역 중 하나로서 역사적인 성격을 지닌다. 註6) 이는 생존권 옹호나 경제적인 이익을 쟁취하려는 농민운동 차원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사회체제를 구상하는 등 국가건설론을 계획·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다만 ‘지배와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은 당시 상황을 파악하는데 일정한 한계로서 지적할 수 있다. 

반면 일제의 농업정책과 지주제의 토대로서 일제강점기 후반 농업정책의 근간인 촌락정책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임을 부인할 수 없다. 더욱이 식민지농업정책에 따른 촌락사회에 대한 변화 과정이나 양상 등에 관한 연구도 매우 부진하다. 최근 향촌사회 ‘지식인’들이 남긴 일기 등은 일상사 변화와 더불어 이들의 식민지배에 대한 인식과 대응방식 등을 부분적이나마 파악하는데 주요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註7) 이는 식민지배의 ‘최전선最前線’인 향촌사회의 생생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 지방제도 개편과 모범부락

지금까지 지방행정제도에 대한 연구는 일제에 의해 구축된 지방제도의 침략성과 허구성을 드러내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註8) 이는 지방통치력의 전체적인 윤곽 파악에 상당한 유용성을 갖는다. 반면 말단 행정제도나 체제 운영에 대한 지방민의 반응이나 저항 등에 관한 실상은 거의 엿볼 수 없다. 제도와 운영상 괴리는 항상적으로 상존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편 일제는 1910년대 면동리面洞里 통폐합과 면제面制 실시로 지방 말단행정기구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촌락의 자치적인 기반을 철저하게 해체하여 나갔다. 면제를 중심으로 지방행정기구에 대한 연구는 상당한 성과를 거둔 분야 중 하나이다. 註9)

염인호는 1917년 면제의 실시로 지방지배체제는 일단 정비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식민지권력의 면에 대한 지배강화는 구래의 동리 중심의 자치전통이 근대적 지방자치로 이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단절한 결과를 초래한 점을 강조하였다. 이상찬과 윤정애는 갑오개혁 이래 성장하고 있던 지방자치론·민회 등을 분석하여 자치의 발전가능성을 검토하였다. 註10) 이러한 가능성은 통감부시기와 일제강점기에 걸쳐 진행되어 온 일제의 면의 강화정책으로 부정되었음을 밝혔다.

대화화명大和和明은 이러한 논의들을 전제로 하면서 말단 지방행정을 종합적으로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촌락공동체로서 구舊 동리洞里는 일제강점기 이후 면제 시행 과정에서 행정 단위에서 배제되어 법적으로 사라졌다. 다만 사회생활 단위로서 의미는 전혀 상실되지 않았고, 그 자체는 하나의 생활 현장으로 존속해오고 있었다고 보았다. 이종범은 조선말기 이래 면리기구가 구현한 자치영역의 실체에 주목하고 일제 초기 면리제가 관치행정의 말단체계로 변질되는 과정을 해명했다. 윤해동은 통감부 설치기 일제가 지방제도 개정의 방향과 지배정책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군·면의 지위 변동을 검토하였다. 이는 일제의 전시기에 걸친 지방지배의 성격을 규정하는 요인이라고 규정했다. 註11)

연구 결과는 일제가 지방제도를 구축하면서 촌락의 자치성을 부정하는 가운데 촌락은 관치행정의 말단으로 기능하고 말았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즉 ‘상대적인’ 자치성과 자율성 부정은 촌락조직을 ‘관변조직체’로서 변질시키는 등 공고한 농촌통제정책을 수행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부분적으로 등장하는 관제조직도 이러한 자치적인 질서와 전통의 파괴를 가중시켰다. 註12) 일제는 조선민중의 거족적인 3·1운동을 탄압한 뒤, 1920년대 농촌사회에 대한 지배정책을 한층 확대해 나갔다. 1920년대 일제는 이른바 지방개량사업地方改良事業을 통해 각종 관제조직을 지원·후원하는데 혈안이었다. 이에 대한 연구는 일제의 농촌사회에 대한 지배력의 심화과정을 단계적으로 검토하지 못하였다. 연구자들은 1920년대 일제의 행정력이 여전히 철저하지 못했던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관제조직이 행정리에서 점차 촌락으로, 시기별·단계별로 구축되는 과정을 간과하는 가운데 ‘동리=촌락’이라는 인식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금융조합은 촌락사회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 단체 중 하나였다. 기존 연구는 이러한 사실을 간과한 채 ‘고리대적’인 금융기능만을 부각시켰다. 註13) 관제조직인 금융조합은 경제단체로서 자금운용과 함께 식민지 지배이데올로기의 선전·주입하는 중심기관으로서 농촌지배의 첨병이었다. 금융조합은 1920년대 후반 일제의 모범부락정책模範部落政策이 확대될 때, 농촌사회를 통제하는 중심적인 역할은 바로 금융조합이었다. 1930년대 이후에도 금융활동을 통해 촌락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면서 지방지배체제의 기반 구축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농촌지배조직으로서 금융조합 기능에 대한 연구는 촌락사회 통제의 실상을 상당 부분 밝히는 성과로 이어졌다. 註14) 

1920년대 일제의 농촌재편 과정은 ‘모범부락’을 통해 규명한 사례도 진척되는 계기를 맞았다. 註15) 그런데 논지는 모범부락이 일제의 농촌지배체제에서 차지하는 위상 등을 제대로 규정하지 못하는 한계성을 드러내었다. 이들은 1930년대 농촌진흥회農村振興會를 모범부락정책이 확대된 것으로 파악했다. 1930년대 당시 ‘모범부락’은 대체로 일제의 시책과 요청에 잘 부응·실행되는 촌락을 의미한다. 

모범부락정책은 1920년대 후반 적극적으로 전개된 농촌지배정책 중 하나였다. 당시 농촌사회의 가장 유력한 단체인 금융조합은 이를 추진하는 중심기관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대한 전무한 서술은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하는데 한계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註16) 더욱이 모범부락을 위시한 농촌지배정책이 기본적으로 기존 촌락의 자치질서를 무력화하는 한편 식민지지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이를 활용하는 등 양면적인 성격에 관한 이해 부족은 이를 반증한다. 註17)

 

2. 농촌진흥운동과 국민총력운동


1. 농촌진흥운동과 향촌통제

농촌진흥운동은 1930년대 식민통치사에서 중요한 영역을 차지한다. 1920년대 후반 시작된 세계적인 경제공황은 곧바로 지구촌으로 파급되었다. 일제는 이를 타개하는 방안으로 관제화된 농촌진흥운동 추진과 만주사변을 야기하였다. 원활한 전쟁물자 동원과 일사불란한 지배체제 구축은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이에 관한 연구는 지배청책과 더불어 상당한 성과를 거둔 분야 중 하나이다.

농촌진흥운동에 관한 주요 성과는 다음과 같다. 註18) 궁전절자宮田節子는 이를 대륙침략의 거점인 식민지 조선 지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파시즘정책으로 규정하는 가운데 기본 구조를 제시했다. 부전정자富田晶子도 자작·자소작농의 체제내화와 농촌조직화사업으로 전시동원체제의 포석을 마련했다고 보았다. 지수걸과 정문종은 체제안정화정책의 일환으로 파악하였다. 한도현은 농민의 자발적 참여 없이 일제의 권력과 폭력에 의해 수행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인식은 농민을 주체적 능력이 없는 수동적 존재로서 서술하기에 이르렀다. 

반면 청야정명靑野正明은 일제가 동리의 자치를 활용한 관제 자치로 농촌을 재편하려고 했다는 논리였다. 이는 농촌진흥운동의 통제 단위가 자연촌락임을 간과한 데서 비롯되었다. 송본무축松本武祝은 소작쟁의의 조정에서 재촌 중소지주의 약체화와 조선총독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한편, 재래 촌락질서를 대신해 가는 다른 조건에 대한 구명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또한 일제가 농가의 빈곤 문제를 나태 등의 개인 문제로 규정하고, 농민들에게 이런 사사화私事化 이데올로기를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과 기반이 존재했다고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농민들의 반응을 추적하지 못했다. 

박섭은 식민지농정을 실행하기 위해 농민의 자발성을 조장할 필요에서 촌락통제와 농촌진흥단체의 설립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자발성 조장과 촌락조직화의 관계, 농촌진흥단체가 농민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요인 등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 김익한은 농촌진흥회의 조직화정책으로 촌락에까지 행정이 침투되어 갔다고 지적했지만, 관제조직화가 촌락의 자치요소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보았다. 판원용태는 식민지 관료제의 침투 과정을 문서주의에 기초한 행정 침투라는 관점에서 검토하였다.

끝으로 금융조합을 연구한 편동유자片桐裕子는 관제조직이 촌락 단위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급속히 전개되었다고 보면서, 그 원인을 원래 위로부터의 동원에 약한 성격을 지녔던 조선사회의 특징을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의 견해에서도 촌락의 기능과 농민의 대응 조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註19)

이상의 연구 성과에서 식민지권력이 농촌의 말단 촌락까지 침투한 사실은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행정력의 침투 고리인 농촌진흥회의 확충 과정, 기능과 활동의 구체적인 양상에 대한 분석은 전반적으로 부족하였다. 즉 농촌진흥운동을 통한 일제의 농촌·농민 통제정책에 대해 농민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 충분히 구명하지 못했다. 농촌진흥운동이 전체 촌락과 농가를 파악하고 규제하려고 했기 때문에, 관과 민을 연결시킬 매개 확보는 중요한 문제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농촌진흥회는 종래 폭력과 처벌 등의 강압적 기제를 구사하던 식민지 관료제와 행정의 한계를 보완하면서, 통치기반을 넓히는 수단이었다. 註20) 이러한 농촌진흥회 기능과 역할을 구체적으로 살피는 작업은 재편되는 식민지질서와 그 속에 담긴 정책적 의도를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다.


2. 국민총력운동과 전시체제

중일전쟁 직후 등장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개별 호戶까지 조직화하여 전시동원정책을 말단에까지 관철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한층 강력한 전시동원체제인 국민총력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일제의 농촌통제정책을 포함한 지방지배정책의 귀결점과 그 성격을 밝히기 위해서도 양 운동에 대한 해명은 매우 중요하다.

기존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관한 연구는 초기에는 전시동원정책의 일환으로 이에 대한 개요와 성격을 개괄하는데 그쳤다. 註21) 이와 관련된 본격적인 논문은 군도화언君島和彦으로 식민지권력측의 입장에서 국민정신총동원운동과 국민총력운동의 개요와 성격을 살폈다. 최유리는 전시 지배정책으로 언론정책·관제운동·언어정책·징병제 등을 분석하는 가운데 관제운동의 하나로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전체상을 정리하였다.

국민정신총동원 운동의 이념 내지 정신통제의 본질과 관련해서는 註22) 군도화언은 내선일체의 논리를 검토하여 그것이 내용적으로는 천황주의의 강요였고 대외침략의 논리로 작용했다고 보았다. 이런 시각은 다른 연구에 기본적으로 반영되었다. 궁전절자는 내선일체에 대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입장의 괴리에서 오는 양자 사이의 갈등을 밝히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최유리는 내선일체론이 지배정책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그 내용과 구조를 살피면서 천황제를 언급하였다. 정혜경과 박성진은 지배정책의 논리를 개발하고 확대·보급하는데 역할을 담당한 녹기연맹綠旗聯盟의 내선일체론을 살폈다.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 자료집 등을 통하여 친일단체 활동상을 전체적으로 규명하였다. 친일행위 범주와 유형 등에 관한 분류는 논쟁의 여지는 있으나 이 분야 연구의 ‘지침서’로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연구에서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실시와 조직의 확충 과정을 분석하여 전시체제 아래 조선민중이 일제에 의해 어떻게 말단까지 조직화되었고,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이전의 정신통제정책과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 또 이들 연구는 당시 최고의 통치 목표인 ‘내선일체’를 전시정책과 관련시켜 중시하면서도, 그 내용으로서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어떤 논리로 이 운동을 뒷받침하고 있는지를 살피지 않았다. 또 ‘국민총동원훈련’이란 시각에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전개 형태를 분석하거나 지원병제도의 실시와 이 운동의 관계를 해명하거나 추진대원의 주된 기반으로서의 지원병제도를 검토한 성과도 거의 없는 실정이다. 특히 지원병제도에 대한 기존 연구는 징병제 실시 이전의 과도적 정책으로서 제도 자체를 분석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註23) 따라서 선행 연구에서는 지원병제도가 국민정신총동원운동과 매우 밀접한 관계 속에서 황민화정책에 어떻게 활용되었는지, 또 지원병 출신 내지 지원자들이 이 운동에서 차지하는 역할 등도 충분히 해명하지 못했다.

국민총력운동은 이 운동이 전시동원체제를 구축하는데 국민정신총동원운동과 어떤 차별성을 띠었는지, 또 일련의 농촌통제정책이 이를 통해 어떻게 귀결되었는지 등에 대한 해명이 적었다. 註24) 일제는 이제까지 지방행정과 농촌사회의 접점으로 촌락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고 나아가 전시행정의 단위로 활용했다. 촌락과 개인의 연결 매체로 호戶의 기능을 적극적으로 정책에 활용했다. 식민지권력과 농민이 연결되는 접점은 촌락과 호였으며, 이런 현상은 이 시기에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또한 일제의 농촌통제정책이 농민들의 일상생활을 전면적으로 규제·지배하는 가운데 농민과 촌락의 존재 양태와 반응에는 일률적으로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는 다양성이 존재했다. 따라서 국민총력운동 아래 전개된 농촌통제정책에 대한 이해는 일제말기 농촌지배체제의 구축 과정, 농민·농촌지배의 본질과 성격, 농민들의 대응 양상과 그 결과 등을 해명하는데 핵심 골간이 된다.

이상과 같이 일제하 농촌통제정책의 전개과정을 시기별로 검토하였지만, 시기별 정책의 내용에 관한 개별 연구도 부족한 연구 현실에서 지역 단위의 연구는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일제의 농촌통제정책의 성격과 양상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이고 거시적인 추이를 검토하고 아울러 구체적인 지역 사례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전국적인 자료의 종합적인 정리는 전체적인 방향과 현상을 제공하지만, 구조적이고 독특한 역사상을 계기적으로 드러내기 어려운 한계를 지녔기 때문이다. 또한 일제는 농촌통제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관제조직을 활용했는데, 관제조직을 통해 농민과 관을 중개하는 역할을 지역의 유지有志 혹은 중심인물들이 했다. 이러한 지역 유지들이 식민지질서의 재편과정에 어떤 역할을 했고, 이들의 활동을 추동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그들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등도 검토해야 할 사항이다.


3. 치안유지법과 전향공작


1. 법에 의한 탄압

1925년 5월 치안유지법은 국체변혁과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하고, 그 결사에 가입한 자를 최고 사형, 10년 이하 징역, 무기에 처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는 공산주의운동을 억압하고 코민테른의 적화정책에 대항하기 위한 법규로서 식민지에서 공산주의를 포함한 모든 민족운동을 탄압하는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와 관련된 연구는 식민정책정책 일환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였다. 註25) 법령에 의한 사상통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8년 6월에는 ‘치안유지법 중 개정긴급칙령’으로 일부가 개정되었다. 주요 내용은 “조선의 독립을 달성코자 함은 우리 제국영토의 일부를 잠절潛切하여 그 통치권의 내용을 실질적으로 축소하여 침해시키려는 것이므로, 치안유지법의 소위 국체변혁을 기도하는 것으로 해석함이 타당하다”라고 규정하였다. 독립운동은 통치권의 내용을 영토적으로 축소한다는 의미에서 국체변혁으로 해석하여 치안유지법을 적용했다. 특히 결사조직 지도자에게 최고 사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등 사상통제와 더불어 민족운동 일체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만주침략 이후 전시체제하 일제는 모든 식민지에서 ‘국가주의운동’을 전개하는 등 적극적 사상통제에 나섰다. 이는 위협과 회유의 양면정책으로 사상 전향을 유도하는 동시에 민족운동을 포기하도록 유도하였다. 1932년 ‘사상범인에 대한 유보처분취급규정’은 치안유지법 위반 피의자를 사상범으로 취급하여 장기간 그의 행상行狀을 감시하고 전향을 강요하는 법률이었다. 1936년 8월 8일에는 ‘조선불온문서임시취체령’을 제정하여 비밀리 유통된 출판물에 대해 철저히 단속하였다.

일제는 비전향자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된 자들이 형기만료로 출옥하여 일반 사회와 식민지 통치질서에 위협을 가할 만한 영향을 미칠까 우려하고 있었다. 1936년 5월 29일 공포된 ‘조선사상범보호관찰법’은 “다시 죄를 범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 사상과 행동을 관찰하여 그를 보호함에 있다”고 하여, 기소유예·집행유예를 언도받고 혹은 가출옥을 받은 자, 만기 출옥한 자를 대상으로 적용하였다. 적용대상자 중 의연히 ‘불온사상’을 품고 있다고 판단되면, 비전향자·준전향자에 대해 전향하도록 추진하는 한편 완전전향자는 전향의 확실한 보증을 받고자 했다. 비록 전향했어도 재범의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는 전향자 모두는 계속 감시대상이었다. 즉 완전히 전향했다고 판단될 때까지 감시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41년 2월 제정된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은 형벌제도만으로 처벌이 어려운 점을 보조하기 위한 처분이었다. 주요 내용은 치안유지법으로 투옥된 정치범이 “석방 후 다시 동법의 죄를 범한 우려가 현저할 때” 예방구금소에 이들을 수용하여 개전시킨다는 요지였다. 사상전향을 하지 않아 재범의 우려가 현저하다고 판단될 때는, 일정 조건 아래 사회로부터 격리시킴과 동시에 엄격한 규율 아래 이들을 교화·단련시킨다는 것이다.

1941년 5월 ‘치안유지법 개정법률’은 종래 규정 전반에 걸쳐 개정을 가한 것으로, 국체변혁을 목적으로 한 어떠한 행위나 결사에 대해서도 처벌할 수 있다는 규정을 새로이 마련하고 벌칙도 한층 강화하였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국체를 변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범죄와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범죄에 관한 형벌규정을 종전과 달리 분리하여 구분하였다. 국체를 변혁하려는 사람은 형의 종류를 징역형에 한정하고 금고형을 전면 삭제했다. 반면 징역형을 훨씬 강화하는 등 변혁운동의 기반을 무력화시켰다. 둘째는 국체변혁을 목적으로 한 결사 지원을 목적으로 한 결사외곽단체에 관한 처벌 규정, 국체변혁을 목적으로 한 결사의 조직을 준비할 것을 목적으로 한 결사준비결사에 관한 처벌 규정, 국체변혁에 관한 결사의 정도에 이르지 않는 집단운동에 대해서도 새로운 처벌규정을 두었다. 셋째는 국체변혁 목적 수행에 이바지하는 결사운동 이외 개개인의 행위에 대한 처벌 규정을 확충 강화하였다. 마지막으로 국체를 부정하는 사항 또는 신궁 혹은 일본 황실의 존엄을 모독하는 사항을 유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운동·집단운동에 대한 처벌규정을 신설을 신설하였다. 註26)

이 법률은 국방보안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국체변혁을 목적으로 한 행위에 대하여 수사와 함께 심판을 신속히 하여 ‘불온사상’ 내지 ‘불온사항’의 전파 및 누설의 방지를 기함으로써 사회불안을 조기에 신속히 척결 제거할 것을 도모한다는 취지 아래 담당검사에게 매우 광범위한 강제수사권을 부여하고 수사의 일원화를 기하도록 했다.

식민지 악법은 신체적 자유를 억압하고 생존권 박탈의 공포심을 주었다. 조선에서 형벌의 엄중히 부과는 사상운동이 사회에 주는 영향이 일본보다 심각하였기 때문이다. 엄벌 조처는 조선민중에게 본보기를 보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의 사상범 사건은 치안유지법만이 아니라 형법 기타 법률을 적용받았다.


2. 사상전향공작과 전향단체

일제는 독립의 가능성과 전망에 대한 회의를 조장하는 동시에 이를 포기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전향공작에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좌익운동에 대한 엄중한 취체와 회유작업으로부터 시작하여 공산주의자들의 공개적인 사상전향을 이끌어냄으로써 다른 민족운동계로 전파를 꾀하였다. 일제가 이들에게 성명서·상신서 등을 발표케 하여 공개적 전향을 선언케 한 것은 공포와 불안감에 빠진 다른 반체제 인사들에게 전향 갈등을 조장하기 위함이었다. 註27) 전향과 친일단체의 전향공작 등에 관한 연구도 최근 상당한 성과를 거둔 분야 중 하나이다. 특히 민족주의계열 단체와 종교계 등의 친일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실상은 거의 대부분 밝혀졌다.

전향은 자신의 정신적 신념이나 사상적 경향 또는 처지를 바꾸어 일제의 천황제 권력에 자발적으로 승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의 경우, 반제운동에서 이탈하여 마르크스주의 혁명사상을 단념하고 제국주의 체제를 인정하는 문제로 귀결되었다. 민족운동가의 전향이란 민족의 독립을 포기하고 일제의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일본화의 길로 바꾸어 일제 천황의 신민으로서 충성심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식민당국자는 지방별로 관할 고등계 주임과 주재소경찰관으로 하여금 전향대상자들을 시찰하도록 하면서 끈질기게 접촉케 하여 전향하도록 설득하였다. 한편 전향대상자들에게 직업 소개 및 알선 등 생활대책도 마련해 주는 등 식민체제에 부응하는 인물로 개조시켰다. 註28) 이는 공공사업에 대한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황국신민’의 자질과 품성을 배양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특히 지방 중견청년양성강습소에서 수강하도록 배려하는 등 통치권의 지도를 받도록 함으로써 체제내로 이끌었다. 註29)

식민당국자는 이들이 다시 결사활동을 하여 역전향을 하지 못하도록 사상단체를 철저히 취체하였다. 관변단체를 제외한 어떠한 합법단체 활동도 허용하지 않았다. 반면 친일파들을 동원하여 어용적 사상전향단체 조직을 조장하였다. 전향대상자들은 여기에 가입시키고 황민이 될 것을 강요했다. 전향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민족운동계에서 변절자로 낙인찍히게 하면서 대중에 대한 이른바 ‘사상정화운동’에 이들을 동원하여 선전대상으로 이용하였다. 註30)

1934년 12월 26일 서울에 조직된 ‘소도회昭道會’는 최초 사상전향단체였다. 이는 사상관계자 보호선도기관으로 논산·예산·부여·청양 등지에 사상선도위원회를 설치로 이어졌다. 註31) 이러한 분위기는 전국적으로 파급되는 분위기였다. 이듬해 2월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촉탁 이각종 주도하에 백악회白岳會도 조직되었다. 목적은 “사상전향자의 보호구원사업”에 있었다. 즉 전향자들을 회원으로 ‘사상정화’를 내세워 전향공작운동 전개를 궁극적 목표로 삼았다. 이 단체는 천황하사금은 물론 조선총독부와 도道·부府 등에서 자금보조를 받아 운영하였다. 1936년 9월 20일에는 조직을 더욱 확장한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로 확대 개편되었다.

대동민우회는 이전 전향자의 ‘보호구원’이 아니라 “일본정신을 기본으로 한 국가주의의 새로운 지도이념을 구성하고 이를 개편하여 적극적으로 사상운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목표로 설정하였다. 註32) 10월 말 현재 회원은 175명으로 민간차원에서 전향운동을 전개하는데 앞장섰다. 대동민우회는 내선일체·황민화운동의 기수로 부각되는 등 친일반민족행위 상징적인 단체로 부각되었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전향공작은 민족성을 무시하고 노골화되었다. 조선인에게 단지 민족주의에서의 이탈만이 아닌 “일본인으로서의 의식을 자각적으로 파악하는 것, 단지 반국가적 사상을 방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보 진전하여 일본인이 되는 문제로 이어졌다. 전향은 사상범이나 일부 전향대상자만이 아니라 모든 조선인을 대상으로 전개되어 민족의식을 완전히 해소하고, ‘일본정신의 체득’을 주입하는 대중적인 ‘전면적’ 전향시대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938년 7월에 조직된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은 “전시사상범전향자의 국가총동원운동으로 협력을 다시 강화하고 적극적으로 사상국방전선에 활동케 하여 반국가사상을 파쇄破碎·박멸하고 황도정신의 진기앙양에 노력함과 동시에 실천활동을 통하여 저들의 자주적 사회복귀를 일층 촉진시키기 위하여 전선사상범전향자를 묶어 하나로 하는 강력한 자주적 조직을 형성”하였다. 註33) 전시사상범으로 전향을 표방한 자들은 국가총동원에 동원되었다. 행동강령은 내선일체의 강화철저, 애국적 총후활동의 강화, 사상국방전선으로의 적극적 참가협력, 국책수행으로의 철저한 봉사, 후진 전향자의 유액誘掖 선도 등이었다.

8월에 조직된 ‘조선방공협회’도 공산주의사상과 운동의 박멸과 방위를 도모함과 동시에 일본정신앙양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내걸었다. 이 협회는 사상전람회 개최, 기관지 발행, 팜프릿 발행, 방공영화 제작, 좌담회·강연회 개최 등을 통해 일본무사도 정신을 조선인에게 고취시키고 일본과 조선의 동조동근론과 내선융화의 역사적 필연성을 강조하였다. 註34)

1939년 8월 초순 일제히 사상정화대책을 철저히 강화한다는 방침 아래 각도의 고등외사 경찰과장들이 협의한 후 ‘사상정화대책요강思想淨化對策要綱’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르면 공산주의·민족주의·불령사상을 근본적으로 배제·청산하여 전민중으로 하여금 신동아건설의 위업에 매진하고 있는 제국의 결의와 실력을 재인식시키고 황국신민이라는 자각에 기초하여 일본정신의 진기 앙양을 도모한다는 취지를 내세웠다. 실행상의 주의요강과 대책요강 등도 각도에 제시·시달하는 등 행정조직을 총동원하였다. 방공사상의 철저한 보급, 일제에 충성할 애국교화단체인 온건단체와 특수단체를 조성·지도, 이들 단체의 학생·청소년을 철저한 지도 등은 주요 내용이었다. 개별적 대책으로 주목되는 부분은 ‘전향자’로 이미 판명된 자들도 취직·전직을 알선하며 일본시찰 등을 통해 전향 결의를 강고히 하도록 공작하는 등 경계를 풀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 경찰부와 경찰서에 정화공작지도기관도 두는 등 각도에서 적당히 통제하였다. 註35)

일제는 조선인 전향자에 대한 의심을 전혀 풀지 않았다. 조선인의 전향은 일본의 국제적 정의와 위력에 외복畏服한 결과로 보았다. 註36) 중일전쟁 이후 원활한 전쟁 수행을 위한 국가총동원령은 이러한 가운데 확산을 거듭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