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연구동향과 서술범위 / 1920년대 일제의 민족분열통치

몽유도원 2013. 7. 20. 20:53

제1장 연구동향과 서술범위

연구동향

서술범위




1. 연구동향 


1910년대 내내 일본 군인과 헌병들의 거대한 병영이 되어버린 조선은 일본제국주의의 팽창에 희생당하고 수탈당하는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그럼에도 일제는 식민지 시정이 ‘미개未開’한 조선을 문명개화로 이끌고 조선인의 민력향상에 공헌하는 등 시혜를 베풀어왔다고 선전하였다. 또한 ‘식민지개발론’이라는 제국주의자들의 지배논리에 부동附同하며 조선지배를 발판으로 일본제국주의는 팽창일로에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이국異國에 종속된 식민지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절대 독립을 외치며 남녀노소·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조선인의 함성은 1919년 3월 1일에 시작되어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멀리 시베리아 만주·중국·북미·하와이 등 해외의 동포사회로까지 번져 전세계에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과 자유을 얻기 위한 결연한 투쟁정신을 보여주었다. 3·1운동은 1910년대를 통해 성공적으로 식민통치가 안착되었다고 믿었던 일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3·1운동의 발발의 계기는 미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로 시작되었으나 이 민족자결주의를 민족독립운동으로 폭발시켜 나간 민족은 조선이 유일하다. 폭력의 시대에 자유·정의·평화와 인도의 3·1운동의 정신으로 승화되었다. 3·1운동은 약소민족의 민족운동과 반제국주의 민중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식민지 조선의 문제는 국제사회에 큰 이슈가 되었다. 3·1운동 이전의 통치방식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던 조선총독부는 ‘문화통치’라고 하는 기발한 용어를 골라 1920년대의 식민지통치의 상징으로 삼으며 이미지 관리에 충실하였다. 조선과 조선인을 연구 대상으로 문화정치기의 조선총독부의 조선정치는 그 취약점과 약점을 찾아내어 일제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고 민족분열을 도모하여 다시는 3·1운동과 같은 전민족적 항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통치하고자 하였다. 


1920년대 재등실齋藤實 총독의 이른바 ‘문화정치’는 역사의 경험과 해석에 따른 명실상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용어가 아니다. 한국근현대 역사에서 ‘문화통치기’는 그 안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달라 1920년대 식민지통치를 대변하는 역사용어가 될 수 없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총독 무관제 폐지, 헌병경찰제의 폐지, 민의창달을 위한 지방제도의 개혁” 등을 ‘문화통치’의 증거로 들고 있지만 실제 조선 통치의 실정을 살펴볼수록 그 문화통치의 허구성은 선명히 들어난다. ‘문화정치’는 노골적인 군사적 지배를 계속하려다가는 내외에서 계속되는 강력한 반항과 비난으로 인해 조선지배 자체가 어렵게 될 것이라는 정세판단에 따른 ‘우회전술’ 註1)이며 이러한 우회전술의 대두는 무단통치에 대한 반성에서가 아니라 통치 방식을 바꾸지 않고서는 조선민중의 저항과 국제사회의 비난을 면치 못한다는 엄연한 현실에 직면하여 선택된 일제의 자구책이었다. 


1920년대 문화통치는 민족내부에 분열과 민족문화 말살이라는 깊은 상흔을 남겨주었다. 그래서 ‘문화통치기’는 “일제의 조선지배 기간동안 조선 민족에게 가장 심대한 악영향과 해독을 남긴 것” 註2)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혹은 분야별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현재 이 방면의 선구적 연구성과는 강동진의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이다. 강동진은 『재등실문서』 등 방대한 1차 자료를 분석하여 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통치의 실상을 구명하였다. 그는 1920년대 식민정책은 무력 중심주의적 통치방식의 본질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도 1910년대와 1930년대 이후의 통치와 구별되는 기본 특징은 반일역량의 분열을 주목적으로 하는 분열통치였다고 규명했다. 강동진은 ① 한국 내외의 정치선전의 강화, ② 친일세력의 육성·보호·이용, ③ 참정권 문제의 이용과 지방제도의 개편, ④ 계층분단 정책과 분할통치로 구분하여 살펴보았다. 특히 문화운동가들로 하여금 자치운동을 주장케 하여 대일 타협으로 끌어들이는 정책이 어떻게 전개되었던가를 소상하게 밝혀주었으며 민족운동가들의 매수공작, 정보위원회의 설치와 그 행정의 일원화, 친일지식인의 육성 등은 그 당시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그 정체와 내막을 몰랐을 정도로 은밀한 공작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문화정책이 문화통치의 본질임을 밝혀주었다. 3·1운동 후 격화된 해방투쟁에 따른 지배체제 위기의 수습책이었고 경제적 수탈강화로의 준비작업이었으며 제국주의 열강의 대립 속에서 일본의 조선지배에 대한 열강의 비난에 대처하기 위한 선전적 대응책이었던 ‘문화정치’는 무단적 본질을 유지하면서 보다 기능적이고 세련되게 민족해방투쟁의 격화 정도에 대응하는 ‘이중구조적 지배’였다는 것이다. 철저한 기만성과 교묘한 통치 수법을 본래적 속성으로 하면서 일본천황체제을 위협하는 이들에 대해 매수·위협을 혼합한 회유의 강화로 점철된 지배정책이었으며 통치비용이 불가피하게 증대함에 따른 수탈 또한 강화되면서 통치와 실제, 기만과 진실 사이에 모순이 격화되어갔다고 분석하였다. 


북한의 『조선전사』에서는 1920년대 이른바 ‘문화통치’시대는 부르주아민족주의자들에 의한 민족개량주의 대두의 시대로 보았다. “일제 강점자들이 문화통치의 허울을 쓰고 들고나온 이러한 넋두리들은 모두가 다 조선인민을 기만하여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한층 더 강화하려는 교활한 술책에 지나지 않으나 혁명과 반혁명 사이에서 심한 동요를 일으키고 있던 자산계급 출신의 민족운동지도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들은 일제의 교활한 문화통치에 대하여 환상을 가지게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자치’니 ‘실력의 양성’이니 ‘민족성의 개량’이니 하는 말들은 그 모두가 민족적 독립에 대한 조선인민의 불타는 애국적 지향을 말살하고 급속히 앙양되고 있던 반일독립운동을 가로막아 민족개량주의로 전환시켜보려는 정치적 모략 책동이었다고 구명했다. 그리고 자산 계급 출신의 민족운동 지도자들에게 커다란 정치적 동요를 일으키고 그들은 민족개량주의자로 전락하게 한 주요 요인의 하나였다고 지적하였다. 註3) 북한에서 연구는 ‘문화통치’와 민족분열정책의 실상과 그 영향력을 실제적으로 분석·검토하기 보다는 이로 인해 출현한 ‘민족개량주의’에 대한 비판 차원에서 거론되었다. 


한편 1920년대 ‘문화정치’는 민족주의 우파세력과 연관되어 연구되었다. 민족주의 우파세력은 ‘근대화지상주의’에 빠져 독립의 과제를 사실상 방기한 민족개량주의 내지 반민족주의 세력으로서 민족의 이익 보다는 계급이익을 우선시하고 실력양성을 통해 독립운동을 지향했으며, 그 ‘실력양성운동’은 결국 반민족주의 세력으로 전락해 간다는 도식을 만들어내었다. 註4) 그러나 한국의 근현대 민족주의운동은 중층적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그 내부 또한 복잡해 단순히 계열화하고 도식화함은 역사를 왜곡할 위험이 다분하다. 따라서 1919년 3·1운동을 경험한 이후 연해주·만주 등지에서 독립군 단체들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전쟁을 준비하면서 외교활동과 문화운동 등 다양한 방면의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을 전개한 사실들을 고려하고 이들의 계급적 기반과 운동방법론 등이 다각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또한 1920년대 문화운동이나 실력양성운동의 목표가 일제로의 동화주의의 완성에 두었는가, 아니면 민족문화의 건설에 두었는가를 기준하여 차별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2. 서술범위


문화통치의 본질을 밝히기 위한 일차 검토 대상은 문화분야에서 조선총독부 정책의 내용과 그 시정의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문화’라는 용어가 내포하고 있는 범주가 너무도 방대하여 이 책에서 모든 분야를 아우르며 연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직접적인 문화방면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분야에까지 범주를 넓힌다면 개인적 역량으로 연구하는 것은 장시간을 요한다. 이 책에서는 크게 두가지 틀에서 1920년대 일제의 문화통치를 살펴보았다. 하나는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 관제개편의 내용과 시행에 따른 통치상의 변화,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일제의 정치선전과 교화책으로 나타난 사회상을 통해 1920년대 식민지정책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 책의 본론 부분에서는 3·1운동을 전후한 국내외 정세와 당시 일본과 조선내에서 논의되었던 조선통치안朝鮮統治案을 통해 일제가 자국의 제국주의 팽창이라는 현안 속에서 식민지 조선을 어떻게 통치하고자 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대표적 열강이었던 영국과 미국의 조선관은 어떠했으며 그들의 시세관이 조선총독부 통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지를 파악하였다. 


다음은 1910년대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총독의 퇴임과 함께 무단통치시대는 막을 내리고 새로이 부임한 재등실 총독의 관제개혁에 따른 시정을 ‘문화정치’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들이 선전하였던 ‘문화적’ 시정과 실제 식민지 상황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일본의 선전책에 부응한 열강의 반응을 통해 그 당시 제국주의 중심의 국제 질서의 본질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내선융화’와 ‘문화통치’로 인한 성과를 과대 포장하여 대내외적으로 홍보하고자 여러 방면의 선전책을 동원하였는데, 이들 선전책을 통해 조선총독부가 어떻게 여론을 조성해 나갔는지를 보고자 한다. 그리고 민족분열책의 일환으로 각 사회방면에서 전개한 교화운동 가운데 조선민중의 전통과 사상 형성에 가장 긴밀히 연계되어있는 유교방면의 통치정책과 유교계의 사회교화운동을 대표적으로 살펴보았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라면 교육부분이라고 꼽을 수 있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은 민족운동계가 요구하는 조선본위교육과는 결코 융화할 수 없는 동화교육의 강화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식민지교육의 제일 목표가 된 언어동화정책과 일본어보급 실태, 그리고 조선통치의 ‘선정善政’으로 꼽고 있는 ‘조선어장려책朝鮮語奬勵策’의 시행목적을 통해 조선총독부 교육정책의 본질을 살펴보았다. 


끝으로 일제가 문화통치를 피력하면서 가상의 통치방침으로 공표하며 조선인에게 완전 자치를 줄 듯이 기만하자 식민지치하에서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이권을 동시에 잡고자 했던 조선인들은 ‘자치운동’과 ‘참정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들 운동의 연원과 전개 과정을 통해 민족운동계의 분화와 이를 이용한 민족분열책을 살펴보았다. 


이 책에서는 1920년대 한국과 한민족, 그리고 지리적으로 아시아 대륙 동쪽에 위치한 반도를 가리키는 용어는 공히 ‘조선’으로 통일하였다. 

1897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국명을 바꾸면서는 조선을 대신하여 ‘대한’·‘한국’이라는 용어가 상용되었는데,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에는 ‘조선’은 국가와 민족명에서 지역을 가르키는 용어로 한정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나 국외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영어명으로는 공히 ‘KOREA’를 사용했지만 한글 표기에서는 ‘대한’·‘한국’·‘조선’ 등을 혼용하였다. 그리고 해방이후 남북한에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일반적으로 ‘한국은 남한을, ‘조선’은 북한을 가르키는 용어가 되었다. 이 책에서는 서술부분과 사료 인용에서 통일성을 기하고자 우리 국가·민족·지역을 가르키는 용어는 모두 ‘조선’·‘조선인’으로 통일하였다. 단지 재미동포사회와 그곳의 우리 민족에 대해서는 재미한인·한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