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1장 근대 동아시아의 세계체제 편입과 근대화과정,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제2권 개항 이후 일제의 침략

몽유도원 2013. 1. 9. 13:40

제1장 근대 동아시아의 세계체제 편입과 근대화과정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

동아시아의 근대화과정


1.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

근대 동아시아사회는 서구의 침략과 동아시아 내부의 상호관계 속에 재편되면서 근대로 이행해 갔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제국주의, 중국은 반식민지, 한국은 식민지가 되었다. 그 원인에 대한 연구는 오랜 논쟁이고, 이 문제를 삼국의 내재적 발전단계의 차이에서 찾는 것은 특히 일본학계의 오래된 전통이다. 식민사학의 정체성론도 여기에 기원한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의 역사학이 발전하면서 내재적 비교에서는 거의 차이를 찾을 수 없게 되었고. 현재는 세계사적 환경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아시아 각국은 근대로 편입 과정에서 상호 대립과 갈등을 겪었다. 특히 한국은 서구보다는 중국과 일본의 외압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한국근대 사회의 이해를 위해서는 세계사적 규정성만큼이나 동아시아 내부의 국가간 관계에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각국의 근대화 과정은 상호 영향을 주었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근대화 과정은 한국의 근대화에 모델로써 수용되었을 뿐 아니라 이들의 근대화 과정은 한국에 가해온 외압의 성격과도 직접 관련이 있다. 동아시아 근대 이행과정의 세계사적 규정성과 국제관계, 그리고 근대화 과정에 대한 비교를 통해 근대 한국사회의 변동을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한국역사학의 과제로 남아있다.

여기서는 먼저 동아시아의 세계체제 편입과 근대화과정을 검토하여 개항후 일본의 침략으로 인한 한국사회의 변동을 이해하는 전제로 삼고자 한다.

지리상의 발견으로 동방항로가 개척된 이후 아시아로의 진출을 활발히 해온 서구제국은 산업혁명 이후 더욱 적극적으로 해외진출을 추진했다. 산업혁명과 그에 따른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은 축적된 잉여자본의 방출을 해외에서 구하게 되었고 원료공급지와 상품의 시장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시장이었던 중국을 아편전쟁으로 굴복시킨 후 1842년 남경조약南京條約으로 5개 항구를 개항했다. 일본은 1858년 미일통상조약에 의해 개항되고, 조선은 서구의 통상의 요구와 무력적 침략에 쇄국으로 대처하다가 1876년 일본에 의해 개항이 되었다. 그 결과 동아시아 삼국은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격렬한 사회적 변동을 겪으면서 근대로 이행되어 갔다. 물론 이 과정은 단순히 수동적 역사의 전개는 아니었고, 삼국 모두 전통사회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고 외압을 극복하려는 내부적 자주적 근대화 노력과 변혁의 과정을 거쳤다.

동아시아 사회의 근대로의 재편을 강요한 외압의 구조는 삼국에 가해온 외압의 시기적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842년의 남경조약에서, 1858년의 미일수호통상조약, 1876년의 조일수호통상조약에 이르는 시기의 세계사적 환경은 각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 여부와 관련이 있다.

우선 서구제국이 가진 사회적 모순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1848년 프랑스의 2월혁명은 독일의 3월혁명으로 번져갔다. 더구나 1857년에는 금융공황이 일어나 노동운동이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1864년에는 노동자의 국제조직, 제1차 인터내셔널이 결성되었다. 미국의 경우에도 1861년에서 1865년까지의 남북전쟁으로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내부적 모순이 격화되면서 이 시기 서구의 동아시아에서의 외압은 상대적으로 느슨하게 되었다. 또한 서구제국 간에도 상호 대립과 분쟁이 격화되었는데 1853년 크리미아전쟁이 그것이다. 이해 터키와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가 양국간 화친조약이 맺어질 때쯤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영국과 프랑스가 터키를 편들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크리미아반도를 전장으로 한 전쟁이 1856년까지 벌어지게 된다. 동아시아에 영향을 미친 서구제국 중 여기에 참전하지 않은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내부 민중의 항쟁도 지적할 수 있다. 1851년 일어난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은 1864년까지 지속되었다. 1856년 애로우호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제2차 아편전쟁에서는 서구제국이 동아시아 민중과 직접 대면해 탄압을 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내란과 외환 속에 적극적으로 자주적 근대화를 추진하기에는 힘이 부쳤던 반면, 일본은 이와 같은 세계사적 환경 속에서 상대적으로 외압의 강도가 낮아지면서 개항에서 명치유신에 이르기까지 외압과 대립보다는 내부의 갈등을 극복하는 속에서 체제개편을 거치게 된다. 명치유신을 통해 체제를 정비한 일본이 조선에 운양호사건을 일으키면서 1876년 조선은 개항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적 성장이 미숙하던 일본에 의해 개항되었던 사실은 세계자본주의체제 내에도 조선에 가해진 외압이 어느 식민지국가보다 더욱 폭력성을 띠게 된 원인이 되었다. 개항 이후 조선에 직접적으로 외압을 가해 온 외세는 서구열강이라기보다는 일본과 중국이었다. 양국은 이미 서구열강에 의하여 제국주의적 침략을 받으며 근대로의 급속한 이행을 추구하고 있었으므로 국제적·국내적 위기가 가중되고 있었다. 이들은 서구열강에 의해 강요된 자국 내의 사회적 모순을 일정하게 조선사회에 전이함으로써 자국의 자본주의 발전에 밑거름으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제국주의단계로 진입했던 서구열강과는 달리 양국은 자본주의의 발달이 늦어 아직은 자본의 원시적 축적단계에 있었으므로 순연한 경제적 침략보다는 주로 정치적·군사적 외압을 통하여 조선을 지배하려고 했고, 경제적 외압도 이러한 폭력적 성격을 배경으로 했다. 그러므로 조선은 서구제국주의를 배경으로 한 청일의 원시적 축적형의 외압에 직면하여 ‘이중의 외압’을 받고 있었다. 註1) 따라서 조선은 조선후기 이래의 사회적 발전을 저애하고 있던 전근대적 사회체제의 질곡에 개항 이후 폭력적 외압을 받음으로서 세계자본주의체제 내에서도 가장 모순이 첨예한 국가가 되었다.

조선과 일본의 조약은 전근대 사대교린의 국가 간 관계와는 다른, 근대적 국가 간의 조약이었다. 당시 조선은 중국과의 전근대적 조공체제의 유제와 1880년대 이후 서구열강과도 조약을 맺음으로써 새로운 근대적 국제관계의 성립이라는 이중적 국제관계에 처하게 된다. 이를 흔히 양절체제兩截體制라 부른다. 개항 이후 전근대적 ‘화이질서華夷秩序’는 ‘만국공법질서萬國公法秩序’로 전환하게 되지만, 여전히 중국과 관계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전문에 명기된 대로 중국이 종주국으로서의 위치를 가진다. 근대로의 역사적 진행과정에서도 전근대 조공체제의 유제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역사적 조건 때문에 일본학계는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중국 중심의 중화질서를 붕괴시켰다고 본다. 즉,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근대적으로 재편시키고 동아시아의 근대 이행을 가속화시킨 전쟁이라는 것이다.

물론 청일전쟁으로 국제질서는 재편된다. 중국과 일본의 조선을 둘러싼 경쟁에서 일본이 우위를 차지하고 급속히 제국주의의 길로 나아가는 반면, 배상금문제로 중국의 근대화 과정은 지난한 길을 걷게 된다. 조선 역시 식민지화의 길이 가속화되었다. 하지만 일본학계의 결론을 그대로 수용하기는 곤란하다. 이미 17세기 도쿠가와막부 이후 조공체제에서 이탈한 일본이 조공체제의 외부에서 화이질서를 무너뜨렸다는 식으로 근대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일본학계의 견해이다. 일본학계에서는 삼국의 개항 이후를 아시아의 ‘교섭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이 시기에도 중화라는 원리를 바탕으로 행해지는 조공과 책봉관계로 인하여 조공국은 하나의 독립국가로서 주권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논리적 근거로서 19세기 후반의 청국과 조선의 관계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즉, “동아시아세계에서 조선은 ‘영역국가’, ‘주권국가’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황제에 대한 조공국으로서 국國”이라고 표현한다. 註2) 이같은 주장은 일본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 조공체제에서 월남은 19세기 후반 이탈했고, 조선만이 조공체제 내에 남았는데 조선의 경우에도 이미 종래의 조공체제로 중국과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 1883년 중국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 조선의 종주국을 자처하고 나선 것은 종래 내정과 외치가 자주적인 화이질서 속의 국제관계가 아니었다. 특히 1885년 원세개가 감국監國으로 온 이후의 내정간섭은 종래의 조공체제에 가탁한 근대적 식민지배의 기도였다. 실제로 원세개 역시 영국의 이집트 지배와 같은 방식을 조선에도 적용시키려 하고 있었다. 따라서 관념적 화이질서의 재편은 있었을지라도 조선을 화이질서에서 해방시켰다는 의미에서의 국제질서의 재편이라고 볼 수는 없다. 註3) 동아시아에서의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에서 청일전쟁은 조선을 근대적 식민지로 획득하려는 중국과 일본의 충돌이었던데 불과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