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제3장 초기(1910~1919)의 독립운동, 노농운동의 대두와 민중조직/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몽유도원 2013. 1. 6. 13:05

6. 노농운동의 대두와 민중조직


1910년대 민족운동의 담당주체는 중산층적 시민이었다고 볼 수 있지만, 한편 토지조사사업의 진행과 더불어 토지로부터 추방된 대량의 소작농민이 발생하고 있었고, 또 식민산업 속에서 생장한 노동계급도 있었으므로 그들에 의한 노농운동도 없을 수 없었다. 노농운동의 원형은 사회경제운동에서 출발하는데 그 사회경제적 요구와 권익이 정치권력에 의해서 봉쇄된 것을 의식하는 단계에 이르면 노농운동은 정치투쟁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일제하의 정치권력은 일제의 식민권력이기 때문에 노농운동의 정치투쟁 단계는 곧 식민권력에 대한 독립운동적 성격을 갖게 된다.

그런데 구한말 이래 농민 등을 중심한 의병전쟁이 일제하에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식민상태하의 농민적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계급적 광장을 얻지 못하여 농민 속으로 잠적하거나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15년 채응언의 의진 해체로서 의병전쟁은 끝나고 민중조직으로 농민·노동운동 등이 새롭게 전개되어간 것이다.


1. 농민운동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종래의 개간권·도지권賭地權·경작권耕作權·입회권入會權 등이 묵살되고 억울하게 토지소유권이 박탈된 경우가 많았다. 註97) 결국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 지주 소작이라는 양극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고 79%의 한국농민은 식민적 지주에 수탈당하는 소작농으로 전락해 갔다. 註98) 이때 농민의 저항은 토지조사사업의 문제에 집중되고 있어 그중에도 소유권 분쟁으로 1910년대를 거의 소모할 정도였다. 註99) 그 밖에도 토지측량이나 혹은 입회권 박탈로 연료 채취의 길이 막힌 데 항거한 농민의 집회와 시위도 적지 않았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례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13년 4월 삼척군 원덕면 임원리에서 국유림 경계 측량 때 임야 경계도 문제였지만, 그동안 쌓인 원한이 일시에 터져 원덕면민 수천 명이 폭동시위를 일으켜 면장 김동호金東鎬와 측량기사 화장花藏을 구박하였다. 끝내 측량기사는 숨졌지만, 이때 70여 명이 잡혀 가서 고초를 겪어야 했다. 註100)

이러한 농민의 투쟁은 아직 식민통치 자체에 대한 투쟁으로까지 성장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한 투쟁이 축적되면서 민족적 항일의식이 고조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하여 유의해야 한다. 즉 농민이 소작농으로 몰락해 가는 계급모순이 민족모순에서 연유한다는 의식이 축적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의식은 토지조사사업뿐 아니라 각종 식민법령이나 각종 세금 등에 의한 생존권 위협에 따라 가중되고 있었다. 아무튼 그러한 농민의 항일의식을 전제해야 3·1운동의 대중화가 설명될 수 있다.


2. 노동운동


조선후기 또는 구한말부터 광산이나 항구를 중심으로 노동계급이 형성되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계절 노동자였으나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강화되면서 독자적 계급으로 형성되어 갔다. 그리하여 한말에 광산과 항구 등에서 노동쟁의가 발생하였고, 1910년대에는 상당수의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註101)

노동조합 가운데는 친목계와 같은 것이 있어 계몽적 한계가 있었고, 또 산업장마다 노조가 결성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무단통치하에서 극히 제한된 산업구조라는 점을 고려하면 민중조직의 성장이란 측면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노동조직을 배경으로 〈표 2〉와 같이 노동쟁의가 전개되어 1918년에는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노동쟁의는 농민의 경우보다는 조직적이었지만, 역시 단순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발달에도 순서가 있는 것이니 그러한 기초적 쟁의가 노동조직을 성장시켜 준다는 점에 주목하고 그것이 3·1운동과 더불어 반식민적 노동운동을 전개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던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즉 위와 같은 농민·노동조직이 3·1운동의 광장에서 중산층의 시민조직과 접목되면서 3·1운동을 전민족운동으로 발전시켜 간 것이다.

〈표 1〉 노동조합의 발생현황
창립연월일조합명소재회장회원수회비비고
1906. 6. 10조선노동조합평남 진남포최봉진80수입의 1/10 
1908. 4. 1신창리노동조합평남 평양이태초70수입의 1/10 
1908. 4. 8광양면노동조합평남 용강김원준5010원 50전 
1909. 2. 1공동노동조합전북 군산서치산370  
1909. 4. 2노동조합함남 이원박종은941원 내지 2원 
1909. 10. 20삼화노동조합평남 진남포최학서180수입의 1/10 
1910. 2. 7선업조합 평남평남 진남포노봉서40050전선부船夫
1912. 3. 20신노동조합전북 군산정기재30  
1912. 3. 1차호중사조합함남 이원노수진315신유창고의 대부 
1913. 3. 1고랑포노동조합경기 장단이상환61 하물적각荷物積却
1915. 1. 10노동조합충청남도이회춘   
1915. 6.10고저庫底노동조합강원 풍천김연대55중사仲士 3원 
1917. 1.10신흥군마계馬契함남 신흥서호일1311원 
1917. 2. 16공흥조共興組전북 군산박상규70중사 
1917. 8. 27평양노동조합평남 평양김성수200입회1원 
회비 70전
 
1917. 11. 12객주조합노동부전북 군산이재홍100중사 
1918. 1. 1신흥조합전북 군산김여장300중사 
1918. 3. 15고저노동조합강원 통천김지횡31중사 3원 
1918.조치원 노계勞契*충남 연기 183  
1918. 8. 11신환포중사조합전북 군산이죽권300중사 

자료 : 細井肇, 『鮮滿의 經營(中篇)』, 29~35쪽.  *표는 『동아일보』 1927년·1929년 기사 ; 김윤환, 『한국노동운동사』Ⅰ, 청사, 1982, 40쪽.

1910년대 독립운동의 추세를 보면, 한말 의병전쟁은 1915년 채응언蔡應彦의 의진이 파괴당하면서 잠복해 갔고, 그 무렵에 독립의군부나 민단조합 같은 복벽주의 의병봉기가 계획되기는 했으나 대중적 기반을 얻지 못한 채 봉쇄되고 말았다. 이것으로 척사적 복벽주의운동 조직은 끝을 맺었다. 이럴 때 광무황제를 국외로 탈출시켜 망명정부를 수립할 계획이 신한혁명당을 중심한 국내외 인사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계획은 일제에 발각되어 무산되었으며, 광무황제의 급서로 더이상 실현될 수도 없었다.


〈표 2〉1910년대의 노동쟁의 상황
연도건수참가인원원인결과
일본인조선인중국인임금대우기타성공실패타협
1912
1913
1914
1915
1916
1917
1918
1919
6 
4 
1 
9 
8 
8 
50 
84



23 
8 
20 
475 
401
1,573 
420 
130 
828 
362 
1,128 
4,443 
8,383

67 

1,100 
88 

1,187 
327
1,573
487 
130 
1,951
458 
1,148
6,105
9,011
6 
4 
1 
6 
7 
6 
43 
76



1 
1 
1 
2 
4



2 

1 
5 
4
3 
3 
1 
3 
6 
4 
18 
12
3 
1 

3 
2 
1 
18 
35



3 

3 
14 
37

자료 : 조선총독부 경무국, 『最近にあける朝鮮治安狀況』, 1933, 143쪽.


망명정부 계획은 보황주의 계산에서 추진된 것인데 1910년대는 한말 공화주의 이념의 전통을 이어, 또 신해혁명의 영향이나 해외동포와의 교류, 그리고 러시아혁명의 영향도 받아 민주공화주의 사상이 성장하였다. 그에 따라 대한광복회나 조선국민회 같은 혁명단체도 일어나 활동함으로써 독립운동의 근대국가 이념을 심화시켜 갔다. 이러한 혁명단체의 활동 가운데 3·1운동이 일어났다면 3·1운동은 더 질적 수준이 높은 민족혁명운동으로 전개되었을 터이지만, 1918년에 혁명단체는 모두 파괴당하고 그 후 3·1운동의 종교지도자에 의해서 계획되었으므로 그 종교 본연의 테두리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10년대에 천도교·개신교·불교 등의 교단이 구한말의 오류를 청산하면서 민족교회 형성이 추진되고 있던 상황은 민족사회의 폭이 넓어져 갔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변화였다. 그 변화가 있었으므로 그들이 3·1운동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1910년대에 정비되어 가던 민족교육의 성장과 유관한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에는 사회조직이 거의 파괴되고 겨우 학교와 종교집단뿐이었으므로 서로의 교류가 밀접하였고, 실제로 대부분의 교육자가 종교와 직·간접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10년대 독립운동을 담당주체로 보면 중산층의 시민적 조직에 의해서 추진된 것이 더 많았다. 그런데 무단통치하에서 새로 이념과 조직을 정비하는 처지였으므로 그 조직이 분산적임은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기층사회基層社會로까지 조직이 확대되어 있지도 못하였다. 한말 이래 기층사회의 조직으로서 의병전쟁이 1910년대 전반기까지 계속되고 있었으나, 그 후반에는 와해되고 말았다. 그리고 식민통치라는 새로운 객관적 조건에 대응한 새로운 조직이 요구되고 있었다.

그러나 농민의 경우는 토지조사사업으로 권익이 박탈당하고 있던 때였으므로 토지분쟁만도 힘겨운 형편이어서 농민조직을 성장시켜 갈 겨를이 없었다. 그러므로 농민이 지배적인 기층사회에 독립운동조직이 분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노동계급은 한계는 있어도 운동조직을 발달시키고 있었다. 농민사회에서도 조직의 형성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토지 위에 생존하는 농민이 그 토지로부터 축출당하면서 토지조사사업에 대하여 즉 식민체제에 대하여 강력한 항쟁의식이 일어나서 한계수위限界水位에까지 오르고 있었다. 그것이 3·1운동 대중화의 기반이기도 했지만, 때문에 3·1운동을 통하여 기층사회의 민중조직도 질적 성장을 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