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애국계몽세력의 맥락과 형성 / 애국계몽운동 Ⅰ 정치사회운동

몽유도원 2014. 6. 22. 19:55

제2장 애국계몽세력의 맥락과 형성


애국계몽운동의 개념과 맥락

애국계몽세력의 형성


1. 애국계몽운동의 개념과 맥락


1. 애국계몽운동의 개념

한말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은 흔히 ‘애국계몽운동’이라 불려지고 있다. 그 사상은 곧바로 ‘애국계몽사상’에서 연원한다. 운동과 사상의 개념과 용어는 학계에서 의견일치를 아직까지 보지 못하였다. 애국계몽운동·계몽운동·구국계몽운동·문화운동·애국문화운동·자강운동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은 이를 반증한다. 이러한 용어 불일치는 ‘애국계몽’이라는 개념이 역사적 개념으로 정립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요인이다.

‘애국계몽운동’이란 용어는 해방 이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손진태孫晉泰는 1949년에 간행된 『국사대요國史大要』에서 한말의 대내외 상황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애국계몽운동’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렇게 무력으로써 반항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그 힘은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식자간에는 교육의 필요성을 통절하게 느끼게 되었느니, 조국의 완전한 독립은 국민이 전체적으로 각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알게 된 까닭이었다. 지금까지의 운동은 지식층만이 하여온 것이요, 또 소위 독립이란 것이 외국의 힘에 의해서 얻은 것이며, 그 외국이 조선을 독립시킨 것은 조선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저희를 위하여 일시 방편으로 한 것이었으므로, 일본이 중국과 로서아露西亞를 격파하고, 영국과 미국의 동의를 얻어 조선을 자의로 하게 된 마당에 그들이 조선을 병탄하려고 한 것은 제국주의의 당연한 생각이었다. 이에 조선의 지식층들에게 “타력에 의뢰한 것이 망국의 장본이었다, 우리 자력으로 독립을 전취戰取하여야 하겠다”는 자각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사립학교를 창설하고, 학회를 조직하고 종교단체(천도교·야소교·대종교)를 창립하여, 신학문을 교수하고 정치사상을 선전하고, 민족정신을 고취하여 전 민족을 일단의 대 세력으로 하여서 완전한 자주독립을 전취하고자 하였다. … 이러한 애국적 계몽운동이 지금 우리의 교육과 종교의 기초가 된 것은 역사적인 대업이었으며, 그 때부터 겨우 교육이란 것이 민중에게 해방되기 비롯한 것이다. 註1)



곧 그는 한말 개화지식인들이 “남의 힘에 의뢰한 것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장본이었으므로 우리 자신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자각에서, 학교·학회·종교단체를 만들어 신학문을 교육하고, 정치사상을 선전하며, 민족정신을 고취하여 완전한 독립을 추구한 운동을 ‘애국적 계몽운동’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다분히 신교육과 민족종교를 중심으로 한 문화운동에 무게를 둔 것으로 무장투쟁이 지닌 중요성을 소홀하게 서술한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

신용하는 한말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에 대하여 손진태가 사용한 용어와 개념을 보완하여 ‘애국계몽운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이란 일반적인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 개념으로서 1905년 11월 소위 을사5조약에 의하여 국권을 박탈당한 전후 개화자강파가 중심이 되어 완전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전개한 1905~1910년 사이의 민력계발과 민족독립역량 양성운동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註2)

일반적 개념으로서 ‘계몽운동’은 1905년 이전에도 있었고, 1910년 이후에도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계몽운동들은 ‘애국계몽운동’에는 포함시키지 아니한다. 필자가 말하는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애국계몽운동’은 1905~1910년 사이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개화자강파가 전개한 … 운동에 한정하여 사용하는 개념인 것이다. 註3)



그는 1905년 11월 을사조약에 의해 일부 국권이 박탈된 시기에 완전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개화자강파가 주도한 민력계발과 민족독립역량 양성운동을 총칭하는 개념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정의하였다. 그리고 애국계몽운동을 어느 시기에나 있을 수 있는 ‘일반적 개념’으로서가 아니고, 1905~1910년간 한말이라는 특정한 시기에 전개된 운동으로서 ‘역사적 개념’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애국계몽운동 내용으로 문화운동 뿐만 아니라 ① 신교육구국운동, ② 언론계몽운동, ③ 민족산업진흥운동, ④ 국채보상운동, ⑤ 신문화·신문학운동, ⑥ 국학운동, ⑦ 민족종교운동, ⑧ 해외독립군기지 창건운동 등을 제시하였다. 곧 해외독립군기지 건설운동까지를 애국계몽운동 범주에 포함시켰다. 註4) 이는 시기·영역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등 개념 정립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강재언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 이후 신지식층의 개화사상이 애국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이 애국계몽운동은 갑신정변, 독립협회운동을

뒤이은 개화의 제3단계 운동으로 파악하였다. 註5) 그는 애국계몽운동의 당면 목표는 대중계몽과 학교교육을 통하여 민지民智를 열고, 민족산업의 육성을 통하여 민력을 배양함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었고, 그 궁극적인 목표는 적절한 시기를 포착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동시에 조선왕조의 재건이 아니라 근대적 국민국가의 형성에 있었다고 보았다. 곧 국민국가 건설운동까지를 애국계몽운동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註6)

한편 1920년대에 황의돈黃義敦은 한말의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계몽운동’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1926년의 「광무융희시대光武隆熙時代의 계몽운동」이란 글에서 갑오개혁을 통한 관제의 개혁, 근대학교의 설립, 각종 근대시설의 설치 등 정치적 문화적 방면의 변화에 주목하고,



그와 동시에 서재필·윤치호 등의 주창으로 민론의 대표기관인 독립협회가 창설되고 독립신문이 발행되어, 위로는 정부의 행정을 감시하고 아래론 민중을 향하여 보통적으로 신사상을 주입하고 신정신을 환기하려 하였다. 註7)



고 하여 독립협회의 언론을 통한 민중계몽활동을 ‘조선의 계몽운동의 서광’으로 보았다. 이어서 그는 “갑오 이후의 계몽운동은 몇몇 선각자의 정치상운동에 그치고 말았다”고 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이권경쟁에서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자극을 받아 “갑진1904년 이후의 계몽운동은 확실히 민중적 각성의 발로로서 그의 운동이 민간으로 비롯하게 되었다”고 파악하였다. 그는 1904년 한반도를 둘러싼 러일전쟁이 한국민중을

자극하여 민중적 각성으로 계몽운동이 진전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註8) 특히 1907년 고종양위·정미조약·군대해산 등에 자극 받은 민중에 의하여 계몽연설과 교육운동이 크게 일어났음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1910년의 국권피탈로 민중의식은 침체에 빠졌다가 1919년 3·1운동을 통하여 “전 민중의 설움이 일시에 폭발하여 전국 각지의 민중이 다시 활기를 찾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황의돈은 우리나라의 계몽운동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



갑오 이후의 계몽운동은 몇 개인 선각자의 정치적 혁신운동으로서 민중적 운동은 아니었고, 갑진 이후의 계몽운동은 일부 선각자의 수창적首唱的 발단적 운동으로서 민중 전체의 각성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시일의 경과함을 따라 차차로 폭이 넓어지고 열이 높아 가고 밑이 깊어 가는 계몽운동은 이(3·1운동)에 이르러 진면목으로 민중 전체의 각성적 운동으로 화하여지게 되었다. 註9)



곧 그는 우리나라 계몽운동의 단계를 민중의 각성과 연관하여 1894년 갑오 이후 독립협회운동까지의 계몽운동, 1904년 갑진 이후 주권피탈까지의 계몽운동, 1919년 3·1운동 이후의 계몽운동 등 세 단계로 나누어 파악하였다. 그는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조약 이후 1910년 주권피탈까지의 언론기관과 사회단체의 문화운동·정치운동·사회운동 등 계몽운동을 일부 민중의 각성운동으로 파악하고, 3·1운동 이후의 계몽운동을 ‘민중 전체의 각성적 운동’ 또는 ‘계몽운동의 진면목’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조동걸은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국민적 역량을 배양하기 위해 전개된 실력양성운동을 의병전쟁과 함께 ‘구국운동’으로 이해하되, 정치운동이 약화된 ‘계몽운동’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견해는 한말의 망국 사태에 대처한 구국운동이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다는 전제 하에, 의병운동은 ‘구국의병운동’이라 하고, 계몽운동은 ‘구국계몽운동’이라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계몽운동의 사상을 ‘한말계몽주의’ 또는 ‘계몽주의’라고 표현하고 있다. 註10)

일제말기에 최남선崔南善은 한말의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문화운동’으로 보았다. 그는 한말의 실력양성운동이 기본적으로 교화사업·학교설립·학회설립·어문학연구·사학연구·종교활동 등 문화분야의 운동이므로, 이 운동에 ‘문화운동’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註11)

김도형은 한말의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갑신정변·갑오개혁·독립협회운동의 맥을 이은 문명개화론자들이 주체가 되어, 신문·잡지 등의 언론과 학교설립의 교육을 통하여 전개된 ‘문화운동’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애국계몽운동자들의 민중에 대한 불신과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의 불철저로 그 운동이 개량적 문화운동에 그치고 말았다고 하여 그 의의를 과소평가 하고 있다. 註12)

한편 북한학계에서는 한말의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애국문화계몽운동’ 또는 ‘애국문화운동’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컨대 북한에서 간행된 『근대조선역사』는 을사조약을 계기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

‘애국문화운동’을 문화분야에서 민족 부르죠아지의 제반 요구를 반영한 반침략 반봉건운동으로 규정하고, 그 운동이 민족문화를 대중적·근대적 토대 위에서 발전시키는 계기를 열었으나, 일제의 침략과 봉건제도를 혁명적으로 청산하는데 이르지 못했다고 그 운동의 한계성을 지적하고 있다. 註13)

한말의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자강운동’에 역점을 두고 보는 견해도 있다. 박찬승은 한말 보호국체제 하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은 무장투쟁노선의 의병전쟁과 실력양성노선의 자강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자강운동은 교육과 실업을 진흥함으로써 경제적 문화적 실력을 양성하고, 나아가 부국강병을 달성하여 장차 국권회복의 토대를 마련하려는 운동이었다고 정의하였다. 나아가 그는 본래 ‘애국계몽운동’이라는 용어는 주로 계몽운동이라는 운동 방법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기업의 식산흥업이나 정치단체의 정치운동을 ‘계몽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하고, 당시 신교육운동·식산흥업운동·계몽운동의 슬로건은 모두 ‘자강’ 곧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이었다는 점을 들어, ‘애국계몽운동’을 ‘자강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註14)

애국계몽운동은 한말의 망국적 보호국체제 하에서 문화적·경제적·정치적·군사적으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애국계몽운동을 ‘애국적 계몽운동’ 또는 ‘애국적 문화운동’ 등 좁은 의미로만 볼 것이 아니고 목적으로서의 ‘애국운동’과 수단으로서의 ‘계몽운동’으로, 또는 ‘민중계몽의 방법’이 강조된 ‘모든 애국운동’으로 확대 해석해 보면, ‘애국계몽운동’이란 용어가 결코 부적절한 용어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애국계몽운동과 그 사상의 전개시기에 대하여, 첫째로 18세기 후반 실학파의 북학사상을 ‘조선의 계몽사상의 맹아적 형태’로 보는 시각이 있으며, 註15) 둘째로 아관파천 이후 독립협회의 민중계몽활동을 ‘조선의 계몽운동의 서광’ 곧 계몽운동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註16) 셋째로 1904년의 러일전쟁과 1905년의 을사조약을 계기로 일본 침략에 대응하여 전개된 구국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계몽운동’ 기점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註17) 그리고 넷째로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계기로 국권 일부의 상실과 이에 대응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애국계몽운동의 기점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註18)

애국계몽운동을 한말의 민족운동으로 제한시켜 볼 때,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을 계기로 한반도가 사실상 일본의 준식민지로 전락한 상태에서, 국권회복과 국민국가건설을 목표로 하는 실력양성운동이 전개되었으므로,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조약의 시기를 포괄하여 애국계몽운동의 기점으로 보는 것이 적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요컨대 한말 애국계몽운동은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주권피탈 때까지에 전개된 개화지식인들의 국권회복과 국민국가건설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었다는 개념 정의가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애국계몽운동이 국권회복을 위한 정치운동을 등한시했다고 하여, 문화운동 또는 계몽운동으로 범위를 축소시켜 보는 시각이나 민중에 대한 인식의 결여를 지적하여 그 평가를 절하하여 보는 시각은, 대한제국 말기에 폭넓게 전개된 국권회복과 국민국가건설을 위한 실력양성운동 곧 애국계몽운동의 민족운동사적 의미를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올 우려가 있다.


2. 애국계몽운동의 사상적 맥락

이제 한말 애국계몽사상을 형성한 사상적 조류를 학계의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국내사상의 흐름으로서 실학사상이 한말 애국계몽사상을 형성하는 사조의 하나가 되었다는 설은 오늘날 학계의 통설로 되어 있다.

먼저 계보상으로 보아 “조선에서의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계몽사상은 18세기 후반기의 실학파에서의 북학사상을 그 맹아적 형태로 하고, 1870~1880년대의 개화사상은 계몽사상의 제 특징을 그 내실로서 구비하고 있다”고 하여, 실학사상·개화사상·애국계몽사상을 같은 맥락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는 특히 북학사상이 갖는 여러 특징, 구체적으로는 ① 세계지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토대로 한 ‘화이지분華夷之分’의 부정, ② 인간관·학문관·직업관에서의 봉건적 명분론의 부정, ③ 합리적 생산기술의 도입에 의한 생산력의 발전과 그것을 저해하는 구질서의 개조, ④ 개국론적 해외통상책과 서양기술자 초빙안 등에 주목하여, 북학사상이 근대적 사상으로 발전 가능성을 내포하는 ‘계몽사상으로서의 초기적 성격’을 가진다고 본다. 註19) 곧 실학사상을 애국계몽사상의 시원적 사상으로 보는 관점이다.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연관관계에 대해서는, ① 실학자들의 이용후생利用厚生과 실사구시實事求是 개념이 그대로 개화사상가에게 계승 발전되었다는 점, 


애국계몽운동에 영향을 준 개화의 선각자 박규수(왼쪽)과 오경석(오른쪽)


② 실학자들의 민족주의적 의식과 국학연구가 개화사상가들에게 계승 발전되었다는 점, ③ 실학자들의 평등의식과 민권사상이 개화사상가들에게 계승 발전되었다는 점, ④ 실학자들의 개국통상론·무역부국론이 개화파의 기술도입론·수입대체적 공업화론으로 연결 발전되었다는 점, ⑤ 실학자들의 영업자유론이 개화파에 계승되어 도고혁파론都賈革罷論·혜상공국혁파론惠商工局革罷論·육의전 전매제도혁파론으로 나타난 점, ⑥ 실학자들의 소작지균등화론小作地均等化論·조세금납화론·농업기술론 등이 개화파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었다는 점에서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불가분의 관계가 논증되고 있다. 註20)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은 인적인 맥락에서도 긴밀하였음이 밝혀졌다. 먼저 개화의 선각자 오경석吳慶錫·박규수朴珪壽·유대치劉大致의 경우, 오경석의 사상은 실학자 박제가朴齊家와 김정희金正喜의 학문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고, 註21) 박규수는 조부이며 저명한 실학자 박지원朴趾源과 정약용丁若鏞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으며, 註22) 유대치는 오경석의 절친한 친구이며 사상적 동지였다. 註23) 초기 개화인물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김윤식·유길준 등은 박규수로부터 개화교육을 받았고, 급진개화파 인물들은 박규수 사후 유대치의 지도를 받았다. 註24) 어윤중魚允中은 정약용의 제자인 조부 어명능魚命能으로부터 실학사상을 배웠고, 박정양은 실학자 홍연천洪淵泉의 제자였으며, 김홍집金弘集의 부친 김영작金永爵은 실학자로서 서유구·정학연丁學淵과 교우관계였다. 註25) 그리고 신관호申觀浩·김기수金綺秀·강위姜瑋 등은 김정희의 제자였으며, 정약용 제자의 문하에서 신관호·신기영申耆永·신정희申正熙·어윤중·이기李沂·이도재李道宰 등이 실학을 공부하였다. 註26)

한편 실학사상이 개화사상을 통하여 애국계몽사상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지만, 직접적으로 애국계몽사상의 형성에 다대한 영향을 끼치었음도 밝혀졌다. 곧 한말 애국계몽운동가들이 실학사상을 재발견하고 실학을 열심히 연구했으며, 실제로 실학사상은 그들에게 끊임없이 많은 지식과 사상, 관점과 신념, 그리고 자부심을 공급해 주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註27)

실학사상과 애국계몽사상의 직접적인 연관관계에 있어, 애국계몽가들이 국학國學을 중요시했던 실학적 전통을 계승하여 국학운동을 전개한 점도 지적되었다. 장지연張志淵·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이 그러하며, 특히 역사연구에서의 계승관계는 상당히 강조되는 부분이다. 장지연은 자신의 학문적 계보를 실학자인 이익李瀷과 정약용에 두었고, 註28) 정약용의 학문을 “경장유신更張維新의 뜻을 가진 학문”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註29) 『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 출판과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증보 개정 등 정약용의 저작을 출간은 자신의 학문적 연원을 밝히는 데 있었다. 註30) 박은식은 젊은 시절에 정약용의 제자인 신기영과 정관섭을 찾아가 정약용의 학문을 섭렵했다. 註31) 신채호는 실학자들의 사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실학의 비판정신·개혁성·실증성·근대성을 수용하여 근대사학을 정립하는 계기를 이루었다. 註32)

『황성신문』이 실학파의 학문을 집중적으로 거론한 점도 지적되고 있다. 『황성신문』은 신구학절충新舊學折衷의 필요성에서, 구학舊學 가운데 ‘영정시대의 실학’을 거론하고, 김육·유형원·이익·정약용·박지원·유득공 등의 실학자들을 열거했으며, 토지제도개혁론으로부터 농업기술문제, 상업문제, 신분개혁문제 등을 소개하였다. 註33) 이처럼 실학사상은 개화사상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동시에 애국계몽사상의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둘째로 국내사상의 흐름으로서의 개화사상을 계승하여 한말 애국계몽사상이 형성되었다는 설도 오늘날 학계의 통설이나 다름없다.

한말 애국계몽사상은 사상적인 면에서 개화사상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조선의 개항 초기에 ‘개화’란 용어는 ‘개국’과 동일시되었고 부국강병의 논리로 전개되다가, 1890년대 후반에는 물적物的 개화로서의 개물開物=산업의 근대화과 인적人的 개화로서의 화민化民=인간의 의식과 지식의 근대화을 결합한 용어로 정착되었다고 이해된다. 註34) 이러한 개화사상이 독립협회운동자들에 의하여 국권과 민권을 축으로 하는 근대개혁사상으로 체계화된 것으로 보인다.

독립협회 지도층은 국민의 집합체인 국가의 진정한 자주독립은 경제적인 자립능력과 정치적인 민주역량을 가진 국민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민력民力에 의한 자주독립론’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민력양성을 위해서는 민권보장이 필요하고, 민권보장을 위해서는 국민참정에 의한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곧 자유민권이 보장되는 국민국가 건설이 진정한 자주독립의 확립 방책이라는 논리였다. 그래서 그들은 만민공동회 같은 민중집회를 통하여 자유와 민권이 보장되는 자주국권국가를 만들려고 하였다. 註35) 따라서 애국계몽사상의 국권회복론과 국민국가건설론은 개화자강운동의 사상적 계승성을 지니면서, 국권침탈의 상황에 대응하여 운동과제의 초점을 전환한 데서 나타난 논리였다고 파악되고 있다. 註36)

또한 한말의 애국계몽사상은 1905년 국권을 침탈당한 후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여 개화사상에서 전환된 것이며, 새로운 사태에 대응한 ‘개화사상의 변형’이라고도 표현된다. 특히 개화사상 중에서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한말 애국계몽사상과 운동은 국권 피탈이라는 새로운 사태 변화의 도전에 대한 종래의 개화파와 독립협회·만민공동회파의 응전의 양식이었다고 논리로서 귀결된다. 註37)

결국 애국계몽운동은 1904년의 러일전쟁과 1905년의 을사조약에 의하여 일제로부터 강요된 보호국체제 하에서, 갑신정변·갑오개혁·독립협회운동으로 이어지는 개화자강계열의 운동을 계승하여 전개한 민족운동이었다. 대한제국 초기에 개화자강계열의 민족운동을 주도했던 독립협회가 외세의 침탈로부터 국권 상실을 막고 자주독립의 주권국가를 수립하려는 자주국권운동 지배층의 압제로부터 민권 유린을 막고 근대적 국민국가를 건설하려는 자유민권운동, 그리고 국정 전 분야에 걸친 일대 개혁을 통하여 근대적 자강체제를 수립하려는 자강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독립협회운동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운동은 바로 애국계몽운동이었다. 註38)

한말 애국계몽운동은 인적인 면에서도 개화자강계열의 지식층이 중심을 이루었다. 특히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회원들은 대부분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자강회의 회장단과 평의원 역임자 43명 중 21명이 독립협회 출신이었다. 최고 지도층인 회장단과 평의장 역임자 6명 중 윤치호·윤효정尹孝定·현은玄檃·임병항林炳恒·장지연·지석영池錫永 등 5명은 독립협회 출신이었다. 註39)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전덕기全德基·이동휘·이동녕李東寧·이갑李甲·윤치호·박은식·신채호·노백린盧伯麟·이상재 등 독립협회 회원 30여 명은 신민회 창립과 활동을 주도했고, 신민회 창립위원 7명 중 6명이 독립협회 출신이었다. 註40) 이종일李鍾一·정운복鄭雲復·임병항·남궁억·유근柳瑾·장지연·박은식·신채호·나수연羅壽淵·양기탁·안창호·이갑·오세창 등 독립협회 출신들은 『제국신문』·『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만세보』·『대한민보』 등 한말의 5대 애국계몽언론의 창간·경영·편집을 주도하였다. 註41)

셋째로 서구시민사상의 흐름으로서 사회진화론과 서구계몽사상이 한말 애국계몽사상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설도 학계의 통설로 되어 있다.

1880년대에 개화지식인들이 받아들이기 시작한 사회진화론이 1900년대에 이르러 주로 본격적으로 한국 사회에 수용되었다. 제국주의가 팽배하고 국가가 멸망의 위기에 처한 한말에 “약육강식弱肉强食하고 적자생존適者生存한다”는 사회진화론이 보편화되어 애국계몽운동의 추진력이 되었다고 이해된다. 또한 사회진화론은 구국을 위한 강한 정치의식을 불러일으켰고, 위기극복을 위해 국민의 정신과 자세를 새롭게 하려는 신민사상新民思想을 주창케 했으며, 민족 간의 경쟁을 중심으로 한국사를 보려는 민족사관을 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註42)

한말에 유행한 적자생존·우승열패 등 사회진화론은 제국주의의 원리를 설명해 주고, 이에 대항하는 자강론의 형성을 뒷받침하여 애국계몽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사회계약론·민권론·국민주권론·국민국가론 등 서양계몽사상은 국민을 주체로 하는 국권회복운동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일찍이 유길준·윤치호 등 개화지식인들이 미국으로부터 사회진화론과 서양계몽사상을 수용했다. 한말에는 중국 개화인사들의 저작들 특히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과 강유위康有爲의 저작들이 사회진화론과 서양계몽사상 전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 註43)

애국계몽인사들은 당시 국제사회의 현실을 기본적으로 사회진화론적 시각에서 파악하여 약육강식·우승열패의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보호국 상태로 전락한 근본적인 책임은 국가의 자강을 도모하지 못한 한국 자체에 있다는 자가반성의 입장이었다. 실력부족으로 상실된 국권 회복은 실력양성으로만 가능하다고 믿고,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론 곧 사회진화론에 기초한 자강독립론을 강조하였다. 註44)

한말의 사회진화론이 가지는 ‘경쟁과 진보’의 양면성에 주목하여, 진보에 중점을 두는 경우에는 근대주의에 빠져 제국주의를 용인하고 문명국 일본의 지도 하에 문명개화를 달성하자는 논리로 발전하게 되었고, 민족간의 경쟁을 강조하는 경우에는 제국주의 침략을 배격하고 ‘민족주의’로 발전하는 논리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는 우리나라에 수용된 사회진화론은 독립협회운동에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패배주의적 민족주의와 국권론적 근대주의를 형성했다고 하여 그 부정적인 영향을 거론하기도 한다. 註45)

사회진화론은 원래 ‘경쟁을 통한 진보의 원리’로 사회의 변화 발전을 설명하며, 서양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과 관련하여 부르죠아계급과 제국주의 국가의 등장을 합리화하는 논리, 곧 ‘강자의 약자 지배의 논리’임은 부정할 수 없다. 당시 유행된 사회진화론이 민족패배주의를 조장한 면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한말에 국권회복을 위하여 실력양성에 헌신했던 대다수의 애국계몽인사들은 제국주의의 속성을 당시 한국사회의 어느 계층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註46) 사회진화론을 기초로 하여 자강독립론을 확립하고 자강구국운동을 전개했으므로 한말 애국계몽인사들의 사회진화론은 ‘약자의 강자화를 위한 논리’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한말에 루소·홉스·로크·몽테스키외 등에 의한 사회계약론·자유민권론·국민주권론·헌정론·삼권분립론·국민국가론 등 서구계몽사상은 한국민이 일제의 보호국체제 하에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새로운 국민과 민중을 발견하여 국민 또는 민중을 주체로 국권회복과 동시에 국민국가건설을 목표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도록 하는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註47)


3. 애국계몽운동의 민족운동사적 맥락

한말의 애국계몽운동은 문호개방 이후 개화 지식층의 대두와 민중의 성장을 배경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개화기의 민족운동사 속에서 근대적 지식층이 대두하고 성장하여 민중을 계도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맥락을 살펴보고자 한다.

19세기 중엽의 조선사회는 전통체제가 동요하고 붕괴되는 과정에서 국내외로부터 심한 도전을 받았다. 밖으로부터의 도전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을 계기로 한 서구열강의 도전, 곧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쳐 근대체제를 갖춘 이질문화권의 도전이었다. 안으로부터의 도전은 홍경래의 난 이래로 거듭된 민란에 의한 도전, 곧 봉건적 수탈과 신분체제의 폐기 등 체제변혁적 요구가 내포된 민중세계의 도전이었다. 막강한 서구적 근대세력의 도전은 전근대적 방법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서구의 도전은 배격해야 할 ‘침략’과 수용해야 할 ‘근대’의 양면성을 띠고 있어 더욱 대응하기가 어려운 대상이었다. 개화기 조선사회는 이와 같은 서구열강의 도전과 동시에 민중세계의 도전을 해결해야 하는 위급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註48)

서구적 근대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국가의 자주권을 지키고, 지배층의 봉건적 압제와 수탈로부터 민중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조선사회의

노력은 세 부류의 지식층에 의하여 위정척사운동·동학농민운동·개화자강운동으로 나타났다.

개화기에 조선의 보수적 유교지식층은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였다.위정척사衛正斥邪란 정학·정도를 지키고 사학·이단을 물리친다는 의미이다. 주자학을 유일사상으로 신봉했던 보수적 유교지식층에게 위정이란 정학인 주자학 수호를 의미하고, 척사란 이단인 불교·도교·양명학 등 주자학 이외의 모든 종교·사상을 배격하는 문제였다. 조선후기 천주교 전래 이후 보수적 지식층이 전개한 위정척사운동에서 배격하고자 하는 대상은 이질적 서양문화였고, 수호하고자 하는 것은 전통적 동양문화 곧 주자학적 중화문화였다. 개화기에 보수적 지식층은 대외적으로 밀려오는 서양의 종교와 상품 그리고 침략과 개화의 물결을 막기 위하여 서양과 일체의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는 양이쇄국책을 주장했으며, 대내적으로 누적된 민중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하여 주자학적인 전통체제의 강화로 국가기강을 바로잡아 민심을 결속해야 한다는 체제강화책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위정척사론은 이항로·기정진 등의 유교정신에 사상적 원류를 두고 특히 이항로의 문인 김평묵·최익현·유인석 등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었다. 註49)

개화기의 보수적 지식층은 1860년대에는 서양의 통상요구에 대응하여 양물금단론洋物禁斷論·양화배척론洋貨排斥論에 의한 통상반대론을 전개하였다. 병인·신미양요기에는 서양의 무력침략에 대항하여 척화주전론斥和主戰論을 제기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뒷받침하였다. 1870년대 개항 전후에는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개항불가론을 들어 개항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1880년대에는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영남만인소로 대표되는 신사척사운동 등 개혁반대운동을 주도하고 나섰다. 註50) 개화기

의 보수적 지식층은 1895년 조선주재 일본공사의 주도하에 일본군과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친일내각이 단발령을 강행하자, 이에 대응하여 을미의병을 일으켰다. 궁극적인 목표는 일본세력을 구축하고 친일개혁정권을 타도하려는 반침략과 반개혁, 그리고 국모살해에 대한 국가적 원수를 갚으려는 국수보복國讐報復이었다. 註51)

보수적 유교지식인들은 1905년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을 통하여 대한제국이 일제의 보호국으로 되어 가는 상황에서 을사의병을 일으켰다. 목표는 을사조약 반대와 친일내각 타도 등을 통한 반침략·반개혁과 국권회복이었다. 1907년의 정미의병은 정미조약과 군대해산을 계기로 투쟁 규모와 성격이 전쟁형태로 전환되고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910년 합방 전후의 의병은 일본군의 잔인한 진압작전으로 국내에서 활동이 위축되어 간도와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전환되었다. 註52)

제1기 을미의병 시기에는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양반유생을 지도부로 하고, 일반농민과 동학농민군의 잔여세력을 주된 구성원으로 하였다. 제2기 을사의병 시기에도 역시 양반유생을 지도부로 하고 농민을 주된 구성원으로 했으나, 일부 평민 의병장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제3기 정미의병 시기 이후로는 양반유생 의병장의 수보다 농민·사병·포수 등 평민 의병장의 수가 더 많아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註53) 이처럼 항일의병은 민중을 주된 구성원으로 하고 제3기 이후에는 민중이 지도부의 다수를 이루고 있어 강력한 민중운동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항일의병운동은 보수적 지식층의 지도 하에 근대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서 성패를 불문하고 즉각 결전에 의해 즉시 독립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장기적 안목에서 민중을 계몽하여 민족의 근대적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하려는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과는 대칭적 관계에 있게 되었다.

개화기에 조선사회의 비판적인 지방 지식층은 동학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동학은 1860년에 몰락양반의 서자 출신 최제우崔濟愚가 창도하여 사회의 중류·하류층의 지방 지식인에 의해 전파된 종교사상이다. 최제우는 서구열강의 힘의 원천을 서학 곧 천주교로 파악하고, 동학 곧 ‘동국의 학學’을 창도하여 민족적 모순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註54) 뿐만 아니라 동학지도층은 봉건적 속박으로부터 민중을 구원하고 민중을 중심으로 사회변혁을 추구하여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동학은 민족적·민중적 종교사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동학사상은 문호개방 이래로 외국자본주의의 침략과 국내 봉건지배층의 착취에 반발하는 민중세력과 결합하여 동학농민운동의 이념으로 승화되었다. 註55)

1892년 동학교단이 주도한 삼례집회는 “사교邪敎로 백성을 미혹시켰다”는 죄명으로 처형된 동학교주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교조신원운동 곧 동학공인운동이었다. 2만 여 명이 참가한 1894년의 보은집회는 “척양척왜 보국안민斥洋斥倭 輔國安民”을 내세운 정치적 운동이었다. 이후 전봉준全琫準·김개남金開南·손화중孫化仲 등 동학농민 지도층의 주도하에 동학농민운동이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894년 1월의 고부민란은 단순한 민란 범위를 넘어 중앙의 권세귀족 축출을 염두에 둔 혁명전쟁의 전초전으로 볼 수 있다. 註56)

1894년 4월 동학농민군은 반봉건·반침략의 기치를 내걸고 지방 관군뿐만 아니라 서울의 정예부대까지 격파하고 전라도 일대를 점령하여 동학농민운동의 절정을 이루었다. 1894년 6월 이후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53개 고을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그들의 정치적 이상인 폐정개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1894년 10월 청일전쟁에서 승세를 잡은 일본군에 맞서 10여만 명의 동학농민군이 공주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여 동학농민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1898년 제2대 동학교주 최시형崔時亨이 처형된 뒤, 제3대 교주가 되어 일본에 망명한 손병희孫秉熙는 개화인사들과 접촉하고 권동진·오세창 등을 동학간부로 영입하였다. 1902년 손병희는 동학을 국교로 정립하여 국민적 일체감을 갖게 해야 한다는 도전道戰과 천연자원과 산업기술을 개발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어야 한다는 재전財戰, 그리고 외교관 양성과 외교술 습득을 통하여 외교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언전言戰 등 근대적 성격의 삼전론三戰論을 주장하였다. 註57) 그는 1904년 모든 동학교도들에게 ‘흑의단발黑衣斷髮’ 하고 개화를 추진하라고 하는 이른바 갑진개혁甲辰改革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註58) 동학의 노선은 이를 기점으로 공식적인 개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당시 국내의 동학지도자 이용구李容九는 일진회의 회장이 되어 일제가 강요하는 ‘보호조약’을 지지하였다. 이에 손병희는 1905년 12월 동학의 정통성을 계승하여 천도교를 선포하고, 1906년 귀국하여 정교분리를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1907년 권동진·오세창 등 천도교 간부 다수는 대한협회에 가입는 등 애국계몽운동에 동참하였다. 이것은 동학 곧 천도교세력과 개화세력의 제휴를 의미한다. 천도교 교단 차원에서도 동

덕여학교·보성전문학교·보성중학교·보성소학교·보성사 등을 인수 경영함으로써 애국계몽운동 중심 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註59)

한편 개화기에 조선의 서구지향적 개화지식층은 개화자강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에서 ‘개화’란 1880년 이후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문명화 또는 근대화를 추구하는 개념이다. 역관인 오경석은 1853년 이래로 중국을 왕래하는 중에 청에서 구입한 신서新書를 연구하여 북학파 박제가의 실학을 바탕으로 개화사상을 형성하였다. 의관인 유홍기劉鴻基는 친구인 오경석이 전해준 신서를 연구하여 개화사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고위 관료인 박규수도 북학파 박지원의 실학을 계승하고 청에서 입수한 신서를 연구하여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860년대에 개화의 선각자로 불리는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 개화사상을 가진 지식층이 대두하게 되었다. 박규수·유홍기 등의 지도를 받은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 개화사상의 제2세들이 1870년대 개항을 전후하여 하나의 정치적 그룹을 이루어 개화파를 형성하였다. 註60)

1880년대에 이르러 김옥균·박영효 중심의 급진개화파는 청에 대한 종속관계를 부정하고 국가평등과 자주독립을 확립하려는 국가독립사상, 문벌과 양반제도를 폐지하고 인민의 평등권리를 확립하려는 인민평등사상, 그리고 과학기술과 근대적 문물제도를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사회개혁사상을 품었다. 그들은 이를 실현하고자 1884년에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은 민중을 위한 개혁을 추구했으나 민중과 유리되어 외세와 제휴하여 추진되었다. 당시 민중은 개화 또는 개혁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위한 개혁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였다. 註61)

1890년대 중반에 개화세력은 국정 전반에 걸친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갑신정변에 가담하지 않았던 김홍집·어윤중·유길준 등 온건개화파 인사들은 청일전쟁 중에 청과 수구세력이 제거되자 대대적인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제2차 개혁 때는 외국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서광범 등 급진개화파 인사들도 귀국하여 이에 동참하였다. 갑오개혁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봉건적 전통질서를 타파하는 대대적인 근대개혁으로 우리나라 근대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갑오개혁은 비록 일본의 간섭이 있었다 해도 조선의 관료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된 민족의 내재적 근대화의 노력이었다. 갑오개혁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선양하는 개혁, 통치제도를 내각중심의 입헌군주제로 전환, 근대적인 상공업의 육성을 추진하였다. 특히 갑오개혁은 사회제도의 개혁부문에서 반상과 천민·노비 신분제도의 철폐, 죄인연좌법의 폐지, 조혼의 금지와 과부재혼의 허용 등을 법제화 한 민중을 위한 개혁이었다. 그런데 민중 참여는 배제되는 등 사실상 민중으로부터 배척되지 않을 수 없었다. 註62) 갑오개혁정권이 붕괴된 뒤 개혁추진자들이 민중에 의하여 타살된 사실은 이를 입증해 준다.

서구지향적 개화지식인들은 1896년에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민중에 의한 국권·민권·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협회 지도부는 근대체제를 갖춘 열강의 국권 침탈을 저지하고 지배층의 봉건적 압제와 수탈로부터 민권을 보장하기 위한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 등 국정 전 분야에 걸쳐 열강과 동일한 근대체제를 갖추려는 근대개혁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과거의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이 실패한 주요 원인이 민중의 지지기반의 결여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국민의 힘에 의한 자주와 개혁만이 진정한 자주와 개혁이라 믿었다. 註63) 따라서 그들은 우선적으로 신문·잡지 간행과 강연회·토론회 개최를 통하여 민중을 근대지식과 국권·민권사상으로 계몽하여 독립협회를 민중단체로 변모시켰다.


독립협회에서 국권 및 민권사상을 계몽하기 위해 개최한 만민공동회


독립협회 지도부는 1898년 3월부터 민중집회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열강의 인사권·재정권·군사권의 간섭을 배격하려는 국권수호운동, 열강의 토지조차와 토지매도의 요구를 저지하려는 국토수호운동, 그리고 열강의 광산채굴권을 비롯한 각종 이권요구에 대항하려는 국익수호운동 등 자주국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자주국권운동이 성공적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지배층에 의한 국민의 신체와 재산권 침해에 대항하여 인권·민권보장운동을 전개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898년 가을에 독립협회는 전국적인 지회와 4,0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민중 대표기관으로 성장하여 민의民意를 국정에 반영하려는 국민참정운동도 전개하였다. 독립협회는 수구내각을 탄핵하여 퇴진시키고 개혁내각을 성립시켰으며, 언론자유투쟁을 성공시킨 뒤 의회식 중추원관제中樞院官制를 마련케 하였다. 그들은 민중의 힘을 배경으로 하여 개혁내각의 수립과 의회식 중추원의 개설을 통하여 민주적 개혁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註64)

독립협회의 자유민권운동은 위정척사운동과 동학농민운동에서는 물론 이전 개화자강운동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본질적인 민주주의운동이었다. 독립협회 이전 개화운동은 근대개혁과 자유민권의 민중을 위한 이념을 제시하고 이를 구현하고자 했으나, 사회변혁에 민중의 힘을 동원하려는 의지가 결여된 민중과 유리된 운동이었다. 위정척사론에 기초한 항일의병운동은 반침략·반개혁의 민중운동으로 외세의 극복에는 기여하였으나, 반봉건·근대개혁의 이념이 결여되어 근대민중운동으로 볼 수는 없다. 한편 동학농민운동은 반침략·반봉건의 민중운동으로 외세의 극복과 봉건세력의 타도에는 기여하였으나, 근대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하는 등 역시 근대민중운동으로 보기는 어렵다. 독립협회운동이야말로 근대이념을 가진 지식인들에 의하여 민중을 배경으로 하여 국권·민권운동을 전개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민중운동이었다.

이상과 같이 우리나라 개화기의 민중은 위정척사사상·동학농민사상·개화자강사상 등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지식인들의 지도 하에 서로 다른 민족운동·변혁운동을 전개하였다. 위정척사계열의 민중은 보수적 유교지식층의 지도 아래 당시 유교사회에서 전통질서를 수호하려는 의병운동에 참가했기 때문에 가장 보편적이고 광범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반개화운동 곧 근대화에 역행하는 운동을 담당하였다. 동학농민계열의 민중은 현실 비판적인 지방지식층의 지도 아래 반정부적 투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불순분자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반침략·반봉건운동을 담당하는 등 한말에는 개화·개혁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한편 개화자강계열의 민중은 개화지식층의 지도 아래 도시민들을 중심으로 자주국권운동·자유민권운동·근대개혁운동에 참여하여 역사의 발전 방향에 부합되는 민족운동을 담당하였다. 실력양성에 의한 국권회복과 국민국가건설을 목표로 한 애국계몽운동은 독립협회의 연장선상에서 개화자강계열이 중심을 이루고 동학·천도교계열의 참여 하에 전개되었다.

[註 1] 손진태, 『국사대요』, 을유문화사, 1949, 138~139쪽. ☞

[註 2] 신용하, 「한말 애국계몽사상과 운동」, 『한국사학』 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272쪽. ☞

[註 3] 신용하, 「한말 애국계몽사상과 운동」, 『한국사학』 1, 272~273쪽. ☞

[註 4] 신용하, 「한말 애국계몽사상과 운동」, 『한국사학』 1, 272~274쪽. ☞

[註 5] 姜在彦, 『朝鮮の開化思想』, 岩波書店, 1980, 247~248쪽. ☞

[註 6] 강재언, 『한국의 근대사상』, 한길사, 1985, 235쪽. ☞

[註 7] 황의돈, 「광무융희시대의 계몽운동」, 『신민』 14, 1926 ; 태학사, 『한국근세사논저집(구한말편)』 1, 1982, 322쪽. ☞

[註 8] 황의돈, 「광무융희시대의 계몽운동」, 『신민』 14, 323쪽. ☞

[註 9] 황의돈, 「광무융희시대의 계몽운동」, 『신민』 14, 325쪽. ☞

[註 10] 조동걸, 「한말계몽주의의 구조와 독립운동상의 위치」, 『한국민족주의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지식산업사, 1989, 97·108쪽 ; 조동걸, 「독립운동사연구의 회고와 과제」, 『정신문화연구』 25, 정신문화연구원, 1985, 20·22쪽. ☞

[註 11] 최남선, 『고사통』, 삼중당, 1943, 245~246쪽. ☞

[註 12] 김도형, 『대한제국말기의 국권회복운동과 그 사상』, 연세대박사학위논문, 1988, 10·112~113쪽 ; 김도형, 『대한제국기의 정치사상연구』, 지식산업사, 1994, 25~26쪽. ☞

[註 13] 이종현, 『근대조선역사』, 사회과학원역사연구소, 일송정 복간, 1988, 248~249, 256~257쪽. ☞

[註 14] 박찬승, 『한국근대 정치사상사연구』, 역사비평사, 1992, 17~18쪽. ☞

[註 15] 姜在彦, 『近代朝鮮の變革思想』, 일본평론사, 1973, 208쪽. ☞

[註 16] 황의돈, 「광무융희시대의 계몽운동」, 322쪽 ; 김종덕, 「한말계몽운동의 계보와 성격」, 『한국의 사회와 문화』 10, 정신문화연구원, 1989, 173쪽. ☞

[註 17] 조동걸, 「한말계몽주의의 구조와 독립운동상의 위치」, 『한국민족주의의 성립과 독립운동사 연구』, 111쪽. ☞

[註 18] 신용하, 「한말 애국계몽사상과 운동」, 『한국사학』 1, 272쪽. ☞

[註 19] 강재언, 『근대조선의 변혁사상』, 208~209쪽. ☞

[註 20] 김영호, 「개화사상의 형성과 그 성격」, 『한국사』 16, 국사편찬위원회, 1975, 258~274쪽. ☞

[註 21] 신용하, 「오경석의 개화사상과 활동」, 『한국근대사회사상사연구』, 62쪽. ☞

[註 22] 김영호, 「개화사상의 형성과 그 성격」, 『한국사』 16, 247쪽. ☞

[註 23] 이광린, 「숨은 개화사상가 유대치」, 『개화당연구』, 일조각, 1973, 72쪽. ☞

[註 24] 신용하, 「개화당과 독립협회」, 『한민족독립운동사』 1, 국사편찬위원회, 1987, 121쪽 ; 이광린, 「숨은 개화사상가 유대치」, 『개화당연구』, 78쪽. ☞

[註 25] 김영호, 「개화사상의 형성과 그 성격」, 『한국사』 16, 255·258·273쪽. ☞

[註 26] 김영호, 「개화사상의 형성과 그 성격」, 『한국사』 16, 251~253쪽. ☞

[註 27] 신용하, 「한말 애국계몽사상과 운동」, 『한국사학』 1, 277쪽. ☞

[註 28] 장지연, 「事略」, 『위암문고』 권12, 국사편찬위원회, 1971, 496쪽. ☞

[註 29] 장지연, 「제아언각비후」, 『위암문고』 권5, 192쪽. ☞

[註 30] 강재언, 『근대조선의 변혁사상』, 211쪽 ; 천관우, 「장지연과 그 사상」, 『백산학보』 3, 백산학회, 1967, 499쪽. ☞

[註 31] 신용하, 『박은식의 사회사상연구』, 서울대출판부, 1982, 4쪽. ☞

[註 32] 이만열,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연구』, 문학과지성사, 1990, 100쪽. ☞

[註 33] 김도형, 「애국계몽운동의 연구동향과 과제」, 『한민족독립운동사』 12, 국사편찬위원회, 1993, 73쪽. ☞

[註 34] 강재언, 『조선의 개화사상』, 177쪽. ☞

[註 35] 유영렬, 「독립협회의 민족운동적 성격」,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94쪽. ☞

[註 36] 강재언, 『조선의 개화사상』, 247쪽. ☞

[註 37] 신용하, 「한말 애국계몽사상과 운동」, 『한국사학』 1, 277쪽. ☞

[註 38] 유영렬,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180쪽. ☞

[註 39] 유영렬,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114~115쪽. ☞

[註 40] 유영렬,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197~198쪽. ☞

[註 41] 이해창, 「언론기관의 활동」, 『한국사』 20, 국사편찬위원회, 1974, 40~55쪽. ☞

[註 42] 이광린, 「구한말 진화론의 수용과 그 영향」, 『한국개화사상연구』, 일조각, 1981, 286~ 287쪽. ☞

[註 43] 신용하, 「한말 애국계몽사상과 운동」, 『한국사학』 1, 277~278쪽. ☞

[註 44] 유영렬,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316쪽. ☞

[註 45] 김도형,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연구동향과 과제」, 『한민족독립운동사』 12, 80~81쪽. ☞

[註 46] 유영렬, 「한말 애국계몽언론의 일본인식」, 『한일관계의 미래지향적 인식』, 국학자료원, 2000, 44~45, 47~48쪽. ☞

[註 47] 신용하, 「한말 애국계몽사상과 운동」, 『한국사학』 1, 276~278쪽. ☞

[註 48] 신용하, 「한국근대의 사회발전」, 『한국근대사와 사회변동』, 문학과지성사, 1980, 11~13쪽. ☞

[註 49] 유영렬, 「척사운동과 개화운동」, 『한국사연구입문』, 한국사연구회, 1987, 411~413쪽. ☞

[註 50] 유영렬, 「척사운동과 개화운동」, 『한국사연구입문』, 413~414쪽. ☞

[註 51] 『대한매일신보』 1906년 5월 30일 논설 「義兵」. ☞

[註 52] 강재언, 「국권회복운동과 사상적 계보」, 『한국의 근대사상』, 한길사, 1985, 211~222쪽. ☞

[註 53] 강재언, 「평민의진의 대일항전」, 『한민족독립운동사』 1, 국사편찬위원회, 1987, 405~ 406쪽 ; 강재언, 「반일의병운동의 역사적 전개」, 『한국근대사연구』, 한울, 1984, 364~366쪽. ☞

[註 54] 강재언, 「동학의 사상적 성격」, 『근대한국 사상사연구』, 한울, 1983, 116~117쪽. ☞

[註 55] 신용하, 「한국근대의 사회발전」, 『한국근대사와 사회변동』, 14쪽. ☞

[註 56] 강재언, 「동학사상과 농민전쟁」, 『한국의 근대사상』, 140쪽. ☞

[註 57] 강재언, 「동학의 사상적 성격」, 『한국의 근대사상』, 128~129쪽. ☞

[註 58] 윤석산, 「천도교 정신사의 맥락에서 본 갑진개혁」, 『동학연구』 18, 한국동학학회, 2005, 162쪽. ☞

[註 59] 강재언, 「동학사상과 농민전쟁」, 『한국의 근대사상』, 155~157쪽. ☞

[註 60] 신용하, 「개화와 수구의 갈등 개요」, 『한국사』 38, 국사편찬위원회, 1999, 2~5쪽. ☞

[註 61] 『윤치호일기』 1884년 12월 14일조, 1885년 2월 14일조. ☞

[註 62] 유영익,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개요」, 『한국사』 40, 국사편찬위원회, 2000, 8~11쪽. ☞

[註 63] 『독립신문』 1897년 8월 7일 논설, 1898년 3월 24일 논설 「대한 졍이라」. ☞

[註 64] 유영렬, 「독립협회운동」, 『한국근대사의 탐구』, 경인문화사, 2006, 88~102쪽. ☞


2. 애국계몽세력의 형성


1. 초기 애국계몽단체 출현

애국계몽운동은 1904년의 러일전쟁과 1905년의 을사조약에 의하여 일제로부터 강요된 보호국체제 하에서, 갑신정변·갑오개혁·독립협회운동으로 이어지는 개화자강계열의 운동을 계승하여 전개한 구국민족운동이었다.

대한제국 초기에 개화자강계열의 민족운동을 주도했던 독립협회는 자주국권운동과 자유민권운동, 그리고 자강개혁운동을 전개하다가 수구세력과 외국세력의 야합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되었다. 註65)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에 수구정권의 압제체제가 더욱 강화되고 열강 특히 일본의 이권침탈이 더욱 격화되어 갔다.

일본정부는 이미 러일전쟁 이전인 1903년 12월에 의결한 대한방침對韓方針에서 한국을 ‘실력으로’ 일본의 지배하에 둘 것을 결정하고, 러일전쟁 도발 후인 1904년 5월에 의결한 대한방침에서는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또는 ‘병합’할 것을 결정하였다. 註66)

이와 같은 대한방침에 의거하여 일본은 러일전쟁 도발에 앞서 편성한 4개 대대의 ‘한국임시파견대’를 1904년 2월 개전 즉시 인천에 상륙시켜 서울을 점령하였다. 註67) 이어 일본은 3월에 ‘한국임시파견대’를 6개 대대가 넘는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으로 확대·개편하고, 9월까지 한국주차군을 2개 사단으로 증원·배치하여 사실상 한국을 군사적으로 장악하였다. 註68)

일본은 1904년 8월에 내정개선의 구실 아래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일인 고문이 한국의 행정을 간섭·감독케 하였다. 註69) 그리고 일본은 러일전쟁 기간에 열강으로부터 한국보호권을 승인을 받고, 1905년 11월 17일에는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처럼 일본의 침략이 격심했던 대한제국 중기에 황성기독교청년회·보안회輔安會·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공진회共進會·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대한구락부 등 개화자강계열의 수많은 애국단체들이 설립되어, 일제의 침략정책과 이에 동조하던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하여 구국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중 보안회·국민교육회·공진회·헌정연구회 사례를 통하여 러일전쟁 이후 을사조약 이전까지 초기 애국계몽세력의 출현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보안회

보안회는 1904년 7월 13일 일본의 황무지 침탈을 저지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조직된 항일단체였다. 


일제의 황무지침탈 반대운동을 주도한 보안회 활동 기사

 

보안회는 보국안민을 뜻하며 보민회保民會로도 불렸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간섭권과 군용지 사용권을 빼앗고 경제적 침탈을 강화하였다. 註70)

6월에 일본정부는 대장성 관방장을 지낸 장삼등길랑長森藤吉郞를 한국에 파견하여 주한일본공사와 공동으로 황무지개간권을 한국정부에 요청토록 하였다. 임권조林權助 일본공사는 6월 6일자 공문으로 한국 전국토의 10%에 달하는 황무지개간권을 장삼등길랑에게 특허해 줄 것을 한국정부에 요청하였다. 이에 유생과 전직 관리들은 상소와 통문을 통하여 일본의 침략정책을 비판하고 전국적인 봉기를 호소하였다. 일본측은 계속 황무지개간권을 요구하며 무력행사도 불사한다고 위협하였다. 이때 전직관료인 김종한金宗漢 등이 농광회사農鑛會社를 설립하여 정부로부터 황무지 개간에 대한 특허를 받았으나 일본측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 한국정부를 위협하였다. 註71)

그런 중에 7월 13일 서울 종로 백목전白木廛에서 보안회가 설립되었다. 보안회에는 송수만宋秀萬·원세성元世性·심상진沈相震·송경인宋敬仁·양한묵梁漢默·최석창崔錫彰·정인호鄭寅琥·신학균申學均을 비롯하여 유생·전직관리·상인·기독교인 등 100여 명이 참여하였다. 임원진에는 회장 이도재, 대판代辦 회장 송수만, 대판 부회장 심상진, 사무 송경인, 서기 양한묵 등을 선임하였다. 1898년 12월에 독립협회가 해체된 이후 국민의 정치활동이 금지된 상황에서 설립된 보안회는 회의 목적을 일본의 황무지개간권 요구반대에 국한시켜 한시적으로 활동하고 해산할 것임을 밝혔다. 註72)

보안회가 황무지침탈 반대운동을 전개하자 많은 서울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7월 16일의 보안회 집회에서 일본경찰이 송수만과 송인섭 등을 체포하자, 한국정부는 보안회 요청에 따라 송수만 등의 신병인도를 요구했다. 일본측은 이를 거부하고 일본군대를 동원하여 보안회를 진압하겠다고 위협하였다. 7월 20일부터 보안회는 한어학교에서 황무지개간권 요구철회를 위한 대규모 집회를 열고, 각국 공사관에 일본의 황무지침탈 시도를 폭로하며 규탄하는 서한을 발송하기도 하였다. 7월 22일의 보안회 집회에는 5,000여 명의 회원과 시민들이 참석하여 일본의 황무지침탈 성토대회를 열었다. 이때 집회장에 일본군이 난입하여 원세성 등 4인을 체포하고 집회장을 폐쇄하자, 보안회 회원과 시민들은 종로에서 가두투쟁을 벌였다. 이에 한국정부는 황무지개간권을 일본에 허가할 수 없다는 내용을 일본공사관에 전달했다. 일본측도 보안회의 민족운동이 전국적 배일운동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하여 8월 4일 황무지개간권 요구를 철회하였다. 註73)

이로써 보안회는 그 목적이 달성되어 해산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일본측이 원세성 등을 석방하지 않음므로, 8월 29일 이치노李致魯 등이 이건석李建奭을 회장으로 선출하여 보안회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의 강요에 의하여 명칭은 협동회協同會로 개명하게 되었다. 보안회 출현을 계기로 협동회·정우회政友會·공진회·헌정연구회 등의 단체가 결성되었다. 한편 일제는 친일세력을 동원하여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게 했다가 일진회로 개명하였다. 註74)


2) 국민교육회

국민교육회는 1904년 8월 24일 서울에서 설립되어 1907년까지 활동한 교육단체였다. 국민교육회는 서울 연동蓮洞의 게일J.S. Gale 목사 집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국민교육회의 목적은 ① 학교를 널리 설립하고, ② 문명적인 학문에 응용할 서적을 편찬·번역·간행하며, ③ 본국 사기史記와 지지地誌, 고금의 명인 전적을 모집·광포하여 국민의 애국심을 고양 등이었다. 곧 국민교육회의 설립목적은 국민교육에 의한 실력양성으로 귀결되었다. 註75)

국민교육회의 임원진은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간사 12인, 회계감검會計監檢 1인, 회계 2인, 서기 2인, 편집위원 10인 등 모두 29명으로 구성되었다. 임원진 인명은 알 수 없으나 회장직은 1904년 8월 창립 때부터 1906년 3월까지는 이원긍李原兢이 맡았고, 그해 4월부터는 이준李儁이 맡은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국민교육회 회원으로는 이원긍·이준·홍재기洪在箕·김흥경金興京·유진형兪鎭衡·유승겸兪承兼·김정식金貞植·서상팔徐相八·김상천金相天·고찬익高燦益·양재건梁在謇·오상규吳相奎·유성준兪星濬·전덕기·김명제金明濟·박정동朴晶東·민병두閔丙斗·이동휘·이갑·안창호·현채玄采·유근·유정수柳定秀 등 30여 명이다. 국민교육회의 회원수는 알 수 없으나 1907년에는 230여 명에 달한 것으로 추산된다. 국민교육회 구성원들은 1896~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했던 인사들과 1902년 개혁당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다수의 기독교인이 국민교육회에 참여했다. 이원긍·이준·홍재기·김흥경·유진형·유승겸·김정식·양재건·김상천·고찬익·유성준·서상팔·조창용 등은 대부분 연동교회 신자였다. 註76)

국민교육회는 국민교육을 위한 보광학교·한남학교 등과 교원양성의 단기속성과정으로 국민사범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대동역사략大東歷史略』·『초등소학初等小學』·『초등지리교과서』·『신찬소물리학新撰小物理學』·『신찬소박물학新撰小博物學』 등 국한문혼용 교과서도 편찬·간행하는 등 근대교육 보급에 조력을 기울였다. 註77) 또한 국민교육회는 국민계몽을 위하여 사회 각계의 명사들을 초청하여 정기적으로 강연회를 개회했다. 주요 내용은 교육진흥, 신학문·신지식의 습득, 법률지식의 필요, 국민의 의무, 위생문제, 종교문제 등으로 모두 국가의 부강과 독립을 위한 계몽적 내용이었다. 註78)

국민교육회는 표면적으로 정치에 불간섭을 내세웠다. 1905년 7월 일본의 한국보호권을 인정하는 영일동맹 개정조약에 죽음으로 항거한 주영대리공사 이한응李漢應 자결에 대한 애도문 발표를 시작으로 1905년 9월 일제의 한국인교원 차별대우에 대한 반대시위, 1905년 11월 일진회의 일본보호국화 지지선언에 대한 반대, 그해 12월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자결한 애국열사에 대한 추도회 개최, 1907년 고종황제 양위에 반대하는 시위 등 정치문제에도 확실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1907년 6월에 회장인 이준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어 순국한 이후 국민교육회는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단체는 그해 12월 유길준이 주도하던 흥사단에 흡수되어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註79)


3) 공진회

공진회는 1904년 12월 3일에 설립되어 약 2개월 동안 정치활동을 전개하다가 해체된 단체였다. 전일 독립협회를 타도한 보부상의 행위를 반성하고 문명화에 참여한다는 생각을 가진 보부상들이 상민회商民會를 만들려다가 1904년 11월 26일 창립총회에서 회명을 진명회進明會로 바꾸고 12월 3일 다시 명칭을 바꾸어 공진회가 되었다. 공진회로 개명할 당시에 독립협회 출신자 등 개화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곧 1904년 8월 일부 독립협회 출신자들이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결성하자, 일진회에 불만을 가진 독립협회 출신자들과 러일전쟁 발발 이래로 반일적인 활동을 해오던 보부상이 결합하여 공진회를 결성했다. 註80) 공진회는 “모든 국민이 문명화에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며, 임원진과 확인된 회원은 다음과 같다. 註81)



회 장 : 이 준李 儁

부회장 : 김명준金明濬

평의원 : 윤효정尹孝定·윤하영尹夏榮

총무원 : 나유석羅裕錫

회 원 : 정항모鄭恒謨·김정식金貞植·양한묵梁漢默·김영규金英圭·

이승년李承年·홍대식洪大植·김진극金眞極·김형배金馨培·

원 직元 稙



위의 인물 중에서 이준·김명준·윤효정·윤하영·정항모는 독립협회 출신, 나유석·김영규·원직은 보부상 지도자였다. 그리고 이준·김명준·김정식은 기독교인, 양한묵은 동학교도였으며, 김형배는 유생이었다. 대체로 독립협회 출신자들이 공진회의 지도부를 구성한 반면 보부상들은 주된 회원이었다.

공진회 3대 강령은 첫째로 황실의 권위는 제도가 정한 범위 내에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 둘째로 정부명령은 법률규칙 내에서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 셋째로 인민의 권리의무는 규정된 범위 내에서 보장되어야 한다는 등이었다. 註82) 공진회는 전 국민의 문명화 동참과 법치국가 실현을 목표로 설정하였다. 국민 생명과 재산권 보호에 대한 깊은 관심은 불법적으로 재산권의 피해를 받은 국민에 대한 법률구조사업 시도로 이어졌다. 註83)

공진회 활동은 회원에 대한 계몽운동과 정부에 대한 시정개선 요구에 집중되었다. 회원에 대한 계몽운동은 주로 시국에 대한 연설회 형태로 이루어졌다. 정부에 대한 시정개선 요구는 주로 탐관오리의 부정부패 척결과 궁정잡배 축출에 모아졌다. 1904년 12월에는 회원들이 복술

자로서 궁내부 특진관이 된 이유인李裕寅과 내부 참서관 구본순具本淳을 노상에서 붙잡아 죄상을 자복케 하고 평리원에 옮겨 재판을 청구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정부가 이준·윤효정·나유석 등 간부들을 체포하자, 공진회는 항의시위를 벌이며 일진회가 시위에 참가하도록 유도하고 자신들은 시위를 중지하였다. 정부는 시위를 주도한 공진회보다 일진회를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정부의 일진회 해산 시도는 무산되었다. 당시 서울의 치안을 장악하고 있던 조선주차군사령부의 해산명령에 의하여 공진회는 1905년 2월 12일 창립 2개월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 註84)


4) 헌정연구회

헌정연구회는 1905년 5월 24일에 설립되어 11월에 일진회의 반민족적인 행위를 규탄하다가 강제로 해산된 정치단체였다. 註85) 공진회가 해체된 뒤 지방의 보부상을 중심으로 지회 설치를 통하여 공진회를 복설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이준·윤효정 등 독립협회 출신자들은 보부상과 관계를 끊고, 1905년 5월 새로운 정치단체인 헌정연구회를 설립하였다. 헌정연구회가 공진회를 계승한 단체라는 사실은 헌정연구회가 공진회의 3대 강령을 자구만 수정하여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설립 목적은 국민에게 정치의식을 고양하고, 세계 대세인 입헌체제를 갖추기 위한 헌정 연구이었다. 註86) 이준·윤효정·양한묵·심의승沈宜昇을 발기인으로 한 창립총회에서 선정된 임원진은 다음과 같다. 註87)



회 장 : 장기렴張基濂

부회장 : 이 준

평의장 : 윤효정

사무장 : 심의성沈宜性

평의원 : 홍필주洪弼周·홍화기洪化基·이 기李 沂·이윤종李胤鍾·

양한묵梁漢默·윤 병尹 秉·김정식金貞植

사무원 : 채기두蔡基斗·송 홍宋 鴻·서병철徐丙轍·노일수盧日壽·

유진형兪鎭衡·최 강崔 岡·김진극金眞極·서병길徐丙吉·

김녕제金寧濟

의 사議士 : 김우식金宇植



이 밖에 김명제·이원긍·한계창韓啓昌 등도 회원으로 참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헌정연구회 구성원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부류는 독립협회 등 개화자강계열의 인사들이다. 이준·윤효정·이원긍 등은 독립협회 출신자들이었다. 이준·김정식·이원긍·서병철·유진영·서병길 등은 국민교육회, 이준·윤효정·양한묵·김정식·김진극 등은 공진회 참여자들이었다. 두번째 부류는 시대 변화에서 각성한 개신유학자들이었다. 홍필주·이기·이윤종·윤병·노일수·송홍 등 당시 정치현실에 불만을 품은 개신유학자들은 상소를 통하여 정치개혁을 주장한 바 있었다. 그 중 윤병·홍필주·이기·노일수는 일제의 황무지개간권 요구에 반대상소를 주도한 인물들이었다. 확실한 회원수는 파악할 수가 없으나 60명에서 100명 정도일 것으로 추산된다. 註88)

헌정연구회의 지도자들은 입헌정치는 세계적인 추세이고, 영국과 일본이 입헌정치를 시행하여 흥성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국가발전을 위한 방도는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정치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파격적인 정치체제 개편안을 내놓았다. 그들은 입헌정치를 서구열강이 이룬 부강의 근원으로 파악했다. 그런데 그들은 입헌정체에서 기본적으로 군주국에서 군민공동君民共同으로 제정하는 영국식의 국약헌법國約憲法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으나, 현실적으로는 군주 명령으로 제정되는 일본식의 흠정헌법欽定憲法이 시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한국 정치현실에서 국민 역량이나 제도적 장치, 헌정연구회 내의 개신유학자들의 정서 등이 고려되었다고 생각된다. 곧 헌정연구회는 국민의 참정권 등 민권 확대를 생각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군주통치권을 강화하여 국가권력을 일원화하는 것이 일본 침략에 대항하고 국권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註89)

헌정연구회는 1905년 11월 일진회가 일본의 한국보호국화를 지지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자,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일제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평의장 윤효정은 대신들이 을사조약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못한 것을 통렬히 비난하다가 이로 인하여 경무청에 체포되었다. 평의원 윤병도 상소를 올려 을사조약에 조인한 반역배들 주살을 요청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후 일본주차군사령부와 경무고문부에서는 치안방해를 이유로 한국인의 정치활동을 금하였다. 이에 따라 헌정연구회도 결국 해체되었다. 註90)

헌정연구회는 공진회 이래로 일진회 타도를 정치적 목적으로 삼았다. 그것은 항일세력권 형성이라는 면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헌정연구회는 입헌군주제 실시를 주장하여 애국계몽기에 입헌정치 추진의 선구적 역할을 마다 하지 않았다. 나아가 헌정연구회는 그 맥이 대한자강회로 이어져 보다 광범위한 반일세력을 결집하는 역할을 하였다. 註91)

이상과 같이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이전까지 대한제국 중기에,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고 일진회의 친일행위에 대응하여, 독립협회 출신자 등 개화자강계열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회계층이 참여한 초기 애국계몽단체들이 출현하여 활동하였다. 초기 애국계몽단체들은 국가 이권과 자주권을 수호하고, 국민의 권리와 근대적 정치체제를 확립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을사조약 이후에 나타나는 무수한 애국계몽단체들의 기반을 마련한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2. 대표적 애국계몽단체의 조직

을사조약을 통하여 한국이 일제의 보호국체제로 들어간 대한제국 후기에 이르러 보다 많은 개화자강계열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이는 본격적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 곧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밑거름이었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한 단체는 전국 규모의 단체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였다. 이들 단체는 상호보완적인 관점에서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1) 대한자강회

한말 대표적인 애국계몽단체인 대한자강회는 1906년 3월 31일에 장지연·윤효정·심의성·임진수林珍洙·김상범金相範 등 5인에 의하여 발기되었다. 註92) 4월 4일 윤효정 집에서 임시 임원진이 구성되었다. 4월 9일에 발기인들이 경무청에 소환되어 일반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국법 범위 내에서 활동한다는 증명서를 제출한 뒤, 4월 14일에 회칙에 의한 임원진이 구성됨으로써 합법단체로 정식 발족되었다. 대한자강회가 창립된 1906년 4월은 을사조약을 통하여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화된 지 4개월 뒤였다. 일본 통감부의 설치와 이등박문伊藤博文의 통감 취임으로 일제의 통감정치가 시작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보호국체제 하의 한국은 제국주의 일본에 의하여 군사적으로 점령상태에 있었고, 정치적으로 예속상태에 있었으며, 경제적으로 침탈되어 가는 상태였다.

대한자강회는 독립협회운동 맥락을 이은 단체로서, 일진회의 반민족적 행위를 규탄하다가 강제 해산된 헌정연구회를 모체로 하고, 당시 구국민족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기독교청년회·국민교육회·대한구락부 등의 주요 간부들, 구국언론을 펴고 있던 『황성신문』·『제국신문』·『대한매일신보』 등의 주요 간부들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예컨대 기독교청년회의 윤치호·김규식·이상재·김명준·백상규白象圭·최재학崔在學 등, 국민교육회의 이원긍·이준·홍재기 등, 대한구락부의 나수연羅壽淵·여병현·현은 등, 『황성신문』의 장지연·유근·백남훈南宮薰 등, 『제국신문』의 이종일·심의성·현은·정운복 등,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박은식 등이 대한자강회의 창립 또는 활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註93)


한말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 단체의 하나인 대한자강회 취지서

 

대한자강회는 취지서에서 “국가의 독립은 오직 자강의 여하에 달려 있는데, 우리 한국은 자강지술自强之術을 강구하지 않아 외국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자강지술은 곧 교육과 산업을 발달시켜 민지를 계발하고 국력을 배양하는 것이니, 교육과 식산을 발달시켜 독립의 기초를 닦아야 한다” 註94)라고 역설했다. 그 규칙 제2조에서는 “교육의 확장과 산업의 발달을 연구 실시함으로써 자국의 부강을 계도計圖하여 타일 독립의 기초를 만들 것” 註95)을 목적으로 천명하였다. 이처럼 대한자강회는 국권회복=독립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교육과 식산을 통한 실력양성=자강을 당면 목표로 하여 창립되었다. 회원들은 제국주의 열강의 공인 하에 이루어진 일제의 보호국체제 하에서, 그리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군사대국 일본에 대항하여 즉각적으로 무력을 행사는 것은 오히려 실력의 파괴만을 초래한다고 보고, 실력이 약하여 상실된 국권의 회복은 실력의 양성으로만 가능하다는 생각에서, 국권회복을 전제로 한 실력양성론을 폈던 것이다. 註96)

당시 대한자강회 회장 윤치호가 그 일기에 “이 새로운 회는 일진회의 참을 수 없는 횡포를 분쇄하거나 견제할 뭔가에 대한 민중의 기대에의 무의식적인 응답이었으며, 한국인 중에 다소 애국적이고 따라서 반일적이며 절망감을 가진 인사들은 상호 동정과 연대를 위해 공동의 센터common center를 가지려 한다” 註97)고 기록했듯이, 대한자강회는 반일애국단체 또는 반일애국지사들의 상호 연대를 위한 중심단체로 결성되었다.

임원은 회장 1인, 부회장 1인, 총무원 1인, 회의 중요 사항을 결정하는 평의원 20인, 회의 서무를 관리하는 간사원 20인, 그리고 법률과 정치에 정통한 일본인 고문 1인으로 구성되었다. 임기는 6개월로 연임이 가능하였다. 註98)

대한자강회는 통상회월례회와 평의회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통상회는 회원 전체회의로서 매월 1회 소집하여 대한자강회의 전반적인 운영과 활동사항을 결정했고, 연설회도 개최하여 대한자강회 활동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평의회는 통상회의 의제를 선정하고 통상회의 위임사항과 기타 주요 회무를 처리하는 등 통상회의 준비회의적 성격을 띠고 그 운영위원회적 기능을 발휘하였다. 註99) 그리고 평의원은 통상회를 실질적으로 주도하여, 대한자강회는 회장단과 평의원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곧 대한자강회는 회장단과 평의원이 지도부를, 그리고 회장·부회장·총무원·평의장 등이 그 최고지도부를 형성하였다. 대한자강회는 존속기간인 17개월 동안에 6개월 단위로 3기에 걸쳐 임원이 개선되었다. 대한자강회의 각종 임원을 역임한 인물은 78명이었고, 회장단과 평의원을 역임한 인물은 다음과 같다.

〈표 1〉 대한자강회의 회장단과 평의원 명단

회장 
부회장 
총무원 
평의장 
평의원
윤치호 尹致昊①②③
윤효정 尹孝定②③
윤효정①②③현은玄檃
임병항 林炳恒①②장지연 張志淵지석영 池錫永
장지연①②③윤효정 尹孝定심의성沈宜性①②③
김상범金相範①②임병항 林炳恒①②남궁훈南宮薰①②③
임진수林珍洙이원긍李源兢①②박승봉朴勝鳳
이상천李相天양홍묵梁弘默지석영①②③
정운복鄭雲復①②③유근 柳瑾①②③태명식太明軾①②③
김명준金明濬①②③현은①②여병현呂炳鉉①②③
이상재李相在②③이기李沂②③홍필주洪弼周②③
어용선魚瑢善나수연 羅壽淵이종일 李鍾一②③
정교鄭喬김재풍 金在豊원대규元大圭②③
김성희金成喜②③김규식 金奎植②③이준 李儁
설태희薛泰熙김영규金英圭박은식 朴殷植
이민경李敏卿남궁준南宮濬이종태 李鍾泰
한기준韓基準유병필劉秉泌원영의元泳義
오인탁吳仁鐸이우영李宇榮정호면鄭鎬冕

*표 중의 ①,②,③은 대한자강회 조직의 제1기, 제2기, 제3기를 의미하며, 굵은 글씨의 인명은 독립협회의 주도회원을 의미한다.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한자강회 조직의 제1기에서 제3기에 걸쳐 대한자강회의 지도부인 회장단과 평의원을 역임한 인물은 모두 43명이었다. 그중 과거 독립협회의 주도회원이 21명으로 전체의 2분의 1에 육박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기간에 대한자강회의 최고지도부인 회장·부회장·총무원·평의장을 역임한 인물은 6명인데, 이들 중 현은을 제외한 윤치호·윤효정·임병항·장지연·지석영 등 5명은 모두 과거 독립협회의 주도회원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대한자강회가 독립협회의 맥락을 이은 단체임을 보여준다.

대한자강회는 서울의 본회와 더불어 지방에 지회를 설치하였다. 『대한자강회월보』·『황성신문』에 의하면 대한자강회 지회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표 2〉 대한자강회 지회 현황

 지회명신청일자인허일자시찰원비고
1강서지회〈평북〉1906. 5.261906.10. 3김상범 
2고령지회〈경북〉8.119.15윤효정 
3의주지회〈평북〉8.139.15윤치호 
4동래지회〈경남〉8.149.15윤효정 
5남양지회〈경기〉8.189.24김상범 
6평양지회〈평남〉9. 89.15윤치호 
7삼화지회〈평남〉10.2711.17이종일 
8여산지회〈전북〉11. 112. 1태명식 
9단천지회〈함남〉11.291907. 5. 4설태희 
10인천지회〈경기〉12.291.19윤효정 
11영흥지회〈함남〉1907. 1. 23.16설태희 
12원산지회〈함남〉?3.16설태희 
13북청지회〈함남〉??  
14해주지회〈황해〉1.122.16유진영 
15증산지회〈평남〉2. 94.20홍필주 
16강화지회〈경기〉2.183.30남궁훈 
17직산지회〈충남〉2.183.16유근 
18철산지회〈평북〉?4.20홍필주 
19운산지회〈평북〉?5. 4홍필주이상 2월 25일 전 인정
20청도지회〈경북〉2.22?  
21창성지회〈평북〉3.254.20홍필주 
22영변지회〈평북〉3.255. 4홍필주 
23성진지회〈함북〉?4.20설태희 
24김해지회〈경남〉3.256.18장지연 
25부산지회〈경남〉? 장지연5월 26일 전 조직
26인동지회〈경북〉? 장지연5월 26일 전 조직
27선산지회〈경북〉? 장지연5월 26일 전 조직
28개령지회〈경북〉? 장지연5월 26일 전 조직
29제주지회〈제주〉4.29 정호면7월 15일 시찰 출발
30하와이지회(해외)4.29   
31영유지회〈평남〉5.18 한기준7월 17일 시찰 출발
32정주지회〈평북〉6.18 한기준7월 17일 시찰 출발
33재령지회〈황해〉? 한기준7월 17일 시찰 출발

1906년 5월부터 1907년 7월까지 본회에 지회 설립을 신청한 지역은 강서·고령·의주·동래·남양·평양·삼화·여산·단천·인천·영흥·원산·북청·해주·증산·강화·직산·철산·운산·청도·창성·영변·성진·김해·부산·인동·선산·개령·제주·하와이·영유·정주·재령 등 33개소였다. 이들 지역은 본회로부터 지회로 인허 받은 것이 확인되기도 하고, 당시 정황으로 보아 거의 다 지회로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註100) 하와이를 제외한 국내 32개 지회의 분포를 보면 함경도 5개, 평안도 11개, 황해도 2개 등 북한지역에 18개 있었고, 경기 3개, 충청도 1개, 경상도 8개, 전라도 1개, 제주도 1개 등 남한지역에 14개 있었다. 실제 평안도·함경도 등 서북지방의 지회 활동이 활발하였다.

대한자강회의 회원수는 『대한자강회월보』에 의하면 서울 본회의 회원수가 369명, 17개 지회의 회원수가 971명, 도합 1,340명으로 집계된다. 대한자강회의 지회수를 33개로 볼 때, 여기에 지회 평균 회원수 58명을 곱하고 본회 회원수 369명을 더하면 대한자강회 회원 총수는 2,283명으로 산출된다. 그러므로 대한자강회의 전체 회원수는 적어도 2,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註101)

회원 구성은 개화자강계열의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강서군 유림소의 유림들이 제일 먼저 대한자강회의 지회 설립을 청원했던 사실, 고령지회의 입회 청원인은 거의가 유림과 군청 관리들이었던 사실, 그리고 동래지회의 입회 청원인 중에는 그 지방 최고의 명망있는 유학자들이 포함되었던 사실 註102) 등으로 미루어 보아 개화에 관심을 갖게 된 다수의 개신유학자들이 대한자강회에 입회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대한자강회는 서울의 본회와 33개의 지회, 그리고 개화자강계열의 인사들과 개신유학적 인사들로 구성된 2,000명 이상의 회원을 가진 전국적인 규모의 단체로서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했던 것이다.

대한자강회는 약육강식·적자생존의 국제사회에서 교육을 통한 국민의 개명과 문명의 고도화가 약자를 강자화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서구 근대문명국가의 교육에 준하는 문명교육·실업교육·애국교육을 통하여 새로운 국민을 육성해야 한다 註103)는 교육자강론을 폈다.

또한 대한자강회는 생존경쟁·우승열패의 국제사회에서 식산을 통한 국가부강의 실현이 국권회복의 길이라 생각하고, 국민의 근로의식의 고취와 생산기술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의 경제적 자립과 국가의 부강을 실현해야 한다 註104)는 식산자강론을 폈다. 나아가 대한자강회는 조국정신이 교육과 식산을 통한 실력양성 곧 자강을 독립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고 믿고, 註105) 국사교육·국어교육을 통하여 조국정신을 배양해야 한다 註106)는 정신자강론을 폈다.

이처럼 대한자강회는 교육진흥과 식산흥업 및 조국정신을 3대 강령으로 하는 점진적이고 자주적인 자강독립의 논리를 가지고 국민계몽·교육구국·경제구국·정치구국 등 자강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2) 신민회

신민회는 대한자강회·대한협회와 더불어 한말의 대표적인 전국 규모의 애국계몽단체였으나, 대한자강회·대한협회가 합법단체였던 것과는 달리 비밀결사였다.

신민회의 창립은 재미 애국지사들의 구국단체 결성의 의지에서 발원하였다. 안창호·이강李剛·임준기林俊基 등 재미 애국지사들은 1906년 말 1907년 초 연말 연시에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을사조약을 통하여 일제의 보호국체제 하에 있는 조국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대한신민회의 창립을 발의하고, 이 단체를 본국에도 조직하기 위하여 안창호를 본국에 파견하였다. 註107)

안창호는 재미 동지들과 함께 초안한 「대한신민회 취지서」와 「대한신민회 통용장정」을 휴대하고 귀국하여, 당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양기탁·전덕기·이동휘·이동녕·이갑·유동렬과 함께 7인이 1907년 4월에 신민회를 창립하였다. 양기탁이 총감독, 이동녕이 총서기, 전덕기가 재무원, 그리고 안창호가 집행원조직의 직책을 담당하였다. 註108)

신민회의 창립과 활동을 주도한 중심인물은 사회 각계각층의 애국계몽세력을 망라하였다. 첫째로 양기탁·신채호·박은식·장지연·임치정林蚩正·옥관빈玉觀彬·장도빈張道斌 등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등에 종사했던 언론계 인사들, 둘째로 윤치호·전덕기·이상재·이동녕·이준·조성환曺成煥·최병헌崔炳憲·김정식·김구 등 기독교청년회와 상동교회尙洞敎會·상동청년학원 등에 관계했던 기독교계 인사들, 셋째로 안창호·윤치호·이종호李鐘浩·이승훈·김구·최광옥·이동녕·안태국·전덕기 등 학교 설립자와 교장·교사 등 교육계 인사들, 넷째로 이승훈·안태국·이종호·최용두·양준명梁濬明 등 주로 서북지방에서 상공업에 종사했던 실업계 인사들, 다섯째로 이동휘·이갑·유동렬·노백린·조성환·김희선金羲善 등 무관 출신자들이 신민회의 중심인물이었다. 註109)


비밀결사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신민회를 105인 사건으로 탄압하는 기사

 


간부진의 구성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과장 국우상겸國友尙謙의 이른바 ‘105인사건’을 다룬 메모 자료에는 신민회 창건 직후의 주요 간부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註110)



회 장 : 윤치호

부회장 : 안창호

경기·삼남 총감 : 양기탁

황해·평안도 총감 : 최광옥

함경도 총감 : 이동휘

평의원 : 이상재·김린·전덕기·이종호·김정식·김인식·최병헌·임치정 등

감찰원 : 이 갑·유동렬·노백린



산현오십웅山縣五十雄의 『조선음모사건』에 의하여 신민회의 주요 간부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註111)



회 장 : 윤치호

부회장 : 유동렬

중앙 총감 : 양기탁·임치정

함경북도 총감 : 이동휘

평안남도 총감 : 이승훈

황해도 총감 : 김 구

경기도 총감 : 양기탁



신민회는 과거의 독립협회, 그리고 당시의 대한자강회나 서북학회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과거 독립협회 회원 30여 명이 신민회 창립과 활동에 참여하여 신민회의 창립위원 거의 전부와 지도급 인물 대다수가 독립협회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대한자강회 회원 20여 명과 대한자강회의 영향 하에서 창립된 서우학회 회원 20여 명이 신민회의 창립과 활동에 참여하여, 신민회의 창립위원과 지도급 인물은 거의 다 대한자강회나 서우학회 회원이었다. 註112) 곧 민족운동의 맥락에서 보면, 신민회는 독립협회운동을 계승한 개화자강계열 단체로서 대한자강회와 서북학회 등에 소속된 애국계몽운동의 정예분자들이 집결한 구국민족운동단체였다.

신민회는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그 조직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다음과 같은 조직체계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조직으로는 서울 본부에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회무를 총괄하는 총감독, 회의 재정을 관장하는 재무원, 회의 조직을 관리하는 집행원, 회원의 기강을 관장하는 감찰원이 있었다. 이들이 신민회의 최고 지도부를 이루었으며, 각도에서 선정된 의사원議事員이 모여 본회의 의결기관을 이루었다. 지방조직으로는 각 도에 총책임자로서 도총감道總監을 두고 모의 의결기관으로서 평의원을 두었으며, 각 군에 둔 군감 밑에는 반을 편성하여 회원 60명마다 도반장都班長을 두고 회원 20명마다 부반장을 두었으며 회원 5명마다 반장을 두었다. 註113)

신민회는 비밀결사였던 관계로 조직을 철저히 관리하여 일반회원들은 종적으로만 연결시켜 횡적으로는 동지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게 하였다. 회원의 입회를 엄중히 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엄격한 심사를 거쳐, 애국사상이 투철하고 국권회복에 헌신하려는 의지가 확고한 인물만을 엄선하여 입회시켰다. 註114) 회원수는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안창호의 300여 명설, 김구의 400여 명설, 박은식의 800여 명설이 있는데, 신민회 회원수는 대체로 800여 명으로 보고 있다. 註115)

신민회는 「통용장정」에서 “부패한 사상과 습관을 혁신하여 국민을 유신케 하며, 퇴폐한 교육과 산업을 개량하여 사업을 유신케 하며, 유신한 국민이 통일 연합하여 유신한 자유문명국을 성립케 함”을 목적으로 규정하였다. 註116) 취지서에는 내외의 한인韓人이 통일 연합하여 ‘독립자유’로서 목적을 세우고, “신 정신을 환성喚醒하여 신 단체를 조직한 후 신국新國을 건설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註117) 그리고 신국·자유문명국의 정치체제로서 ‘공화정체’를 구상하였다. 註118) 곧 신민회가 구상한 ‘신민신국新民新國’은 공화정체에 기초한 자유문명국이었다. 이것은 곧 근대 국민국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신민회가 구상한 실력양성의 방법은 국민계몽과 교육진흥, 그리고 식산흥업에 의한 실력양성론으로 註119) 당시 합법단체들의 방법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런데 신민회는 국외에 군사기지건설에 의한 실력양성론을 구상하였다. 곧 장차 일제가 러시아나 청국 또는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기회에 대비하여,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서북 간도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입장이었다. 註120)

요컨대 신민회의 민족운동 기본방략은 국내에서는 교육과 식산활동을 통하여 신민을 육성하고, 국외에서는 독립군기지를 건설하여 독립군을 양성함으로써, 국내외에서 축적된 민족 역량을 집결하여 적절한 기회에 일제와 무력대결을 벌여 국권을 회복하고, 신국 곧 ‘공화정체의 국민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3) 대한협회

일제는 1907년 6월의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7월에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뒤, 곧바로 ‘신문지법’과 ‘보안법’을 반포하여 한국인의 언론·출판과 집회·결사의 활동을 크게 제한시켰다. 이어 정미조약과 군대해산을 강요하여 한국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는 등 한국에 대한 지배권도 크게 강화하였다. 대한자강회는 일제의 고종퇴위 강요에 반대시위를 주도하다가 1907년 8월에 강제로 해체되었으며, 그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대한협회를 설립하였다.

대한협회는 1907년 11월 10일 권동진權東鎭·남궁준·여병현·유근·이우영·오세창吳世昌·윤효정·장지연·정운복·홍필주 등 10인에 의하여 발기되어 내부內部 경무국의 인허를 받았다. 


대한협회 설립 1주년 기념식



11월 17일 관인구락부에서 창립총회가 개최되어 회칙 통과와 임원진이 구성됨으로써 합법단체로 정식 발족되었다. 註121)

대한협회는 ‘교육의 보급’·‘산업의 개발’·‘민권의 보장’·‘행정의 개선’ 등을 강령으로 내걸고, 대한자강회와 유사한 형태의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협회는 34개월의 활동기간에 1년을 임기로 하여 3기에 걸쳐 임원진을 구성했으며, 수시로 부분적인 임원 교체가 있었다. 제1기1907.11~1908.11, 제2기1908.11~1909.12, 제3기1909.12~1910.9까지의 대한협회의 회장·부회장·총무·부총무·각부 부장·회보발행소장 및 평의원(30인) 등 주요 임원 역임자를 『대한협회회보』·『대한민보』에 의거하여 정리해 보면 〈표 3〉과 같다. 註122)

〈표 3〉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대한협회 조직의 제1기에서 제3기까지 대한협회의 회장단과 부장, 평의원 등 주요 임원은 중복된 임원을 제외하고 62명으로 확인된다. 그 중에서 대한자강회 임원 출신은 24명으로 집계되어 대한협회 주요 임원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협회의 발기인 10명 중 8명은 모두 대한자강회의 핵심 간부였다. 이와 같이 인맥을 통하여 대한협회가 대한자강회의 후신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표 3〉 대한협회 주요임원 명단 (62명)

회장
부회장
총무
부총무
교육부장
실업부장
법률부장
지방부장
재무부장
평의원
회보발행소장
회보편집인
남궁억김가진①②③
오세창①②③
윤효정①②③이우영(대판)
심의성①②홍필주
여병현①②③
권동진①②③
이우영①②③
이종일②③
이민경②③
강 엽강윤희①②강화석권동진김광제①②
김명준①②김병수김상범김용진①②김윤오
김 인김중환①②③남궁억남궁준남궁훈
노병선박승엽①②③변종헌①②③서상팔신규식①②③
심의성①③신창휴안국선안병규②③안창호①②
여병현오상규오세장①②유 근①②유병필
유원표이규한이도영①②이민경①②이범세
이범수①③이병호①②이순하이우영이종일
이해조①②③윤구영윤주찬①②장기렴①②장지연
장효근①②정 교정만조정영택①②정운복①②
정현철①②조원구①②③최 강최경순①②③최재학
태명식한기준①②홍필주①②현 은①②③
홍필주①②
이종일①②

표 중 ①은 대한협회 조직의 제1기(1907.11~1908.11)를 ②는 제2기(1908~1909.12)를 ③은 제3기(1909.12~1910.9)를 의미하며, 제3기에 평의원의 명칭은 의사원으로 바뀌었으나 편의상 평의원으로 한다. 굵은 글씨의 인명은 대한자강회의 임원 역임자이다.



오세창과 권동진 등 천도교계 인사들의 대한협회에의 참여는 애국계몽운동이 개화자강계열과 동학천도교계열의 제휴에 의해 추진되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경험이 1919년 기독교계개화자강계열와 천도교계동학계열의 제휴에 의한 3·1운동 추진의 선구가 되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대한협회는 창립 직후에 「지회설립 규정」과 「지회 규칙」을 결정하여 지회 설립을 계획하였다. 註123) 대한협회 지회의 실제 수가 몇 개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註124) 『대한협회회보』·『대한민보』·『대한매일신보』 등에 의하면 87개가 확인된다. 註125) 그의 전신인 대한자강회의 전체 지회가 33개인데 비하면, 대한협회가 지역적으로 2.6배나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대한협회 조직의 3기 중 제1기와 제2기를 각각 6개월 단위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① 제1기 전기1907.11.17~1908. 5.31, ② 제1기 후기1908.6.1~ 1908.11.28, ③ 제2기 전기1908.11.29~1909. 5.31, ④ 제2기 후기1909.6.1~ 1909.12.10, ⑤ 제3기1909.12.11~1910. 9.12로 세분하여, 대한협회 지회의 분포를 시기별·지역별로 정리해 보면 〈표 4〉와 같다.

〈표 4〉에 의하면 대한협회 제1기 전기에 설립된 22개 지회는 북한지역에 15개, 남한지역에 7개가 분포되어 있는데, 이 22개의 지회 중 15개 지회는 대한자강회의 지회가 있던 곳에 설치되어 대한협회 창립 초기의 지회가 대한자강회의 지회에 기반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한협회 제3기까지에 설립된 87개의 지회는 남한지역에 61개, 북한지역에 26개로 남한지역의 지회가 압도적으로 많았음을 보여준다.

대한협회 지회의 임원은 회장 1인, 부회장 1인, 총무 1인, 평의원 15인 이내, 간사원 10인 이하를 기준으로 하고 각 지회의 필요에 의하여 그 인원을 배정하였으며, 또한 각 지회의 필요에 의하여 본회의 예에 따라 부장제·부총무제·찬의원제를 도입하는 등 다양한 구성 형태를 보여주었다. 註126) 


〈표 4〉 대한협회 지회의 분포표

 
/시기
함북함남평북평남황해경기충남경북경남전북전남제주
제1기 전기 
1907.11.17 

1908. 5.31
경성영흥 
단천 
덕원
정주 
운산 
철산 
창성 
선천
평양 
영유 
삼화
재령 
해주 
곡산
 직산대구김해 
동래
전주 
군산
 제주22
제1기 후기 
1908. 6. 1 

1908.11.28
 원산의주 
남도
  포천 
장단
 금천 
안동
진주 
마산 
창원 
남해
부안 
흥덕 
만경 
정읍
광주 
남평 
나주 
무안
 19
제2기 전기 
1908.11.29 

1909. 5.31
길주함흥 
북청 
이원
귀성 
용천
  개성부여경주 
자인 
성주 
무릉 
영천 
안동 
선산
함안김제 
김구 
함열
목포 
지도
구좌 
정의
23
제2기 후기 
1909. 6. 1 

1909.12.10
  태천  가평은진 
홍주
칠곡밀양 
하동 
합천
태인 
고부 
무장 
고창 
순창 
장수 
고산 
남원 
임실
 성내 
제주읍
19
제3기 
1909.12.11 

1910. 9. 12
 홍원     영산부산 
사하
   4
대한협회 
지회 수
281033441212186587
대한자강회 
지회 수
1465231221 128

※제주는 당시 전라남도에 소속된 군이었으나 편의상 오늘날처럼 도의 위치로 분류하였다. 제주군 성내지회와 제주읍지회가 동일한 것인지 확인할 수 없으나 제주에 5개 지회(분지회 포함)가 있었음은 확실하다(『대한민보』 1909년 11월 11일 휘보 참조).


대한협회 지회는 ① 개화인사들과 유림이 대결 상황에 있는 유형, ② 개화인사들과 유림이 협력하는 유형, ③ 개명유학자들이 주도하는 유형, ④ 개방적 분위기에서 개화인사들이 주도하는 유형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대한협회 지회에서 개명유학자들의 활동은 생각보다 열성적이었다. 이런 사실은 한말 애국계몽운동이 다수의 유생들을 개화자강의 대열에 서게 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註127)

『대한협회회보』에 게재된 회원 명단과 회중 기사 및 『대한민보』 등에 의하면, 대한협회 50개 지회 회원수가 4,218명으로 파악된다. 이제까지 확인된 대한협회 87개 지회에 50개 지회의 평균 회원수 85명을 곱하면 대한협회 전체 지회 회원수가 7,395명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본회 회원 506명을 더하면 대한협회 회원수는 7,901명으로 추산된다. 그런데 『대한협회회보』에 게재된 지회 회원 명단 중 일부가 누락되기도 했고, 『대한협회회보』가 종간된 1909년 4월부터 대한협회가 해체된 1910년 9월까지의 회원 증가를 감안하면, 대한협회 회원 총수는 적어도 8,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註128) 곧 대한협회는 전국 87개 지회에 8,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한 대규모 단체였음을 알 수 있다.

대한협회는 한국이 단기간에 강대국 일본으로부터 무력으로 독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관점, 註129) 일본은 한국의 병탄을 기도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점, 일본은 한국 문명화의 모델국가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註130) 그러므로 대한협회는 한국이 일본에 유화적인 방법으로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실력양성에 의한 점진적인 국권회복론을 폈다. 註131)

또한 대한협회는 의병 봉기의 동기는 애국정신에 있다고 보았으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군사강국 일본세력을 무력으로 축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힘의 격차를 무시한 무력행사는 민족의 역량을 파괴하는 무모한 행동이라고 판단하였다. 註132) 그러므로 대한협회는 감성적인 무력행사를 지양하고, 실력양성에 의한 이성적인 국권회복론을 전개하였다. 註133)

한편 대한협회는 국가의 통치기구는 국민을 위해 설치된 것이고, 국가의 통치는 ‘국민의 동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註134) 그리고 국민이 국가의 책임자가 되는 국가를 ‘국민적 국가’라 규정하고, 우리나라도 헌법의 발포와 국회의 설립을 통하여 ‘국민국가를 구조構造’해야 한다 註135)고 하는 국민국가건설론에 비중을 두었다.

나아가 대한협회는 ‘국민적 정당’은 정부에 헌법 발포와 국회 소집을 요구하여 국민적 정부를 수립케 하는 추진체라고 보았다. 註136) 그리고 국민적 정당인 대한협회가 중심이 되어 책임내각 곧 국민적 정부를 수립하여 국민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논리를 강조하였다. 註137)


3. 지역학회

을사조약 체결 이후 대한자강회·대한협회 등 사회·정치단체들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때, 한편에서는 교육구국을 목표로 한 재경 지역학회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1906년 10월에는 평안남북도와 황해도를 관할지역으로 하는 서우학회와 함경남북도를 관할구역으로 하는 한북흥학회가 설립되었다. 1907년 7월에는 전라남북도를 관할구역으로 하는 호남학회가 설립되었다. 1908년 1월에는 경기도와 충청남북도를 관할구역으로 하는 기호흥학회 설립으로 이어졌다.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는 통합하여 서북학회로 발전되었다. 1908년 3월에는 경상남북도를 관할 구역으로 하는 교남교육회와 강원도를 관할구역으로 하는 관동학회도 조직되는 등 흥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1) 서우학회

서우학회西友學會는 대한자강회를 비롯하여 기독교청년회·국민교육회 등 사회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던 관서지방의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1906년 10월에 창립되었다. 명칭은 학회이지만 실제 목표는 실력양성에 의한 국권회복이었다. 이는 국권회복 후 자유독립의 국민국가를 수립하고 근대적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註138) 학회의 임원진은 다음과 같다.


회 장 : 정운복

부회장총무원 : 김명준

교무원 : 박은식·노백린·최재학·이유정·옥동규

교제원 : 유동작·김석태

회계원 : 김달하·김윤오

서무원 : 정재화·박경선

서기원 : 이달원·김유탁

사찰원 : 최재학·안병찬

평의원 : 이 갑·유동렬·강화석·신석하·김희선·여병현·김유탁 등 20인

월보주필 : 박은식

월보편집 : 김명준

월보협찬원 : 주시경·김석환 등 19인



서우학회는 이상과 같은 중앙기구를 서울에 두고 지방에는 평양을 비롯하여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내의 25개 지역에 지방사무소를 설치했으며, 회원수는 약 1,000명에 이르렀다. 註139) 주요 활동영역은 학교를 설치하여 신교육을 실시하는 것, 관서지방 각 사립학교의 교무를 도와주는 것, 유학하는 청년들을 도와주는 것,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 등이었다. 서북학회는 평양에 사범학교와 서우학교를 경영하였고, 『서우西友』라는 잡지를 간행했으며, 애국심과 상무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각 지역 사립학교 연합운동대회를 장려하기도 하였다. 註140)


2) 한북흥학회

서우학회에 뒤이어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는 1906년 10월 말 재경 함경남북도 출신 인사들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한북흥학회도 서우학회처럼 대한자강회, 기독교청년회, 국민교육회 소속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한북흥학회는 국권피탈과 민권유린이 봉건적 사회구조의 산물이라고 보아 20세기에 걸맞은 신사상·신지식·신제도의 수용을 주장하고 이를 위하여 대중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註141) 한북흥학회의 임원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기 임원진(1906.11.4~1907.3.29) 註142)

회 장 : 오상규

부회장 : 주 우

평의원 : 정진홍·태명식·김주병·설태희·이 준·강윤희 등 19인

간사원 : 박영준·박진술·신채화·김재기·윤호열·이인재 등 10인

제2기 임원진(1907.3.30~1908.1) 註143)

회 장 : 이 준

부회장 : 이동휘

평의원 : 오상규·이종호·윤익선·태명식·주 우·김주병 등 13인

간사원 : 조성환·한진용·윤호열·임봉래·김하준·박봉헌 등 11인



서우학회에 비하여 한북흥학회의 활동은 거주지역 인사들보다 서울 거주 함경도 출신 인사들에 의하여 중앙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주도회원은 대체로 군수 등 전·현직 관리, 검사·변호사 등 법조인, 교사와 학생·유학생 등의 신지식층과 무관 등이었다. 한북흥학회는 한북의숙을 직접 경영하였고, 통상회·특별총회·운동회·친목회 등의 집회 시에 교육구국의 일환으로 계몽강연을 실시했다. 대표적 연사는 이준·이동휘·설태희·이종호·정진홍·강윤희 등이었다. 또한 한북흥학회는 서우학회와 함께 서북학생친목회를 운영하는 한편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인 성원을 보냈다. 註144)


3) 호남학회

호남학회湖南學會는 1907년 7월 서울 대동문우회관에서 112명의 호남출신 인사들이 모여 설립하였다. 호남학회는 “국권만회의 기초는 오직 교육에 있다”고 보고 전라남·북도지방의 교육발달을 목적으로 삼았다. 호남학회는 창립총회에서 회장 강엽, 부회장 강운섭, 총무 백인기, 서기 이시우, 그리고 6명의 평의원을 선출했으나, 창립총회 1주일 뒤 다음과 같은 임원진을 확정하였다. 註145)



회 장 : 고정주

부회장 : 유희렬

총 무 : 강 엽·박영철

평의원 : 최준식·양회원·구본순·김낙구·양한묵·강운섭 등 18인

교육부장 : 이 기

재정부장 : 백인기

서기원 : 이시우·정달영

회계원 : 최우락·이 채·장두식·조경환·이 봉·이광수 등 13명

간사원 : 이근용·우성해·이경노



호남학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호남지방에 지회를 설치하였다. 호남학회의 회원수는 전북 출신 222명, 전남 출신 148명, 전북 지회 회원 24명 등 400여 명 정도였다. 1910년에는 회원수가 565명으로 다소 증가하였다. 창립 초기의 호남학회 주도자들은 전·현직 관리로서 개화의 필요성을 자각한 사람들, 대한자강회·대한협회 등 애국계몽단체에 참여하던 사람들이며, 일반회원은 서울에 올라와 신교육을 받던 사람들이었다. 호남학회는 학교설립운동과 더불어 호남 출신으로 서울과 외국에 유학하려는 학생의 입학 및 숙소의 편의를 알선하는 활동을 했고, 회보 『호남학보』를 발행하였다. 註146)


4) 기호흥학회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는 서울에 거주하던 경기도와 충청남·북도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1908년 1월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를 인적 기반으로 하여 설립되었다. 기호흥학회는 “대한제국의 독립기초와 2천만민의 자유정신과 기호 3성의 흥학주의興學主義”를 표방하고, ‘학문진흥과 학교건설’로 전국청년의 교육에 힘쓸 것과 ‘떨어진 국권의 회복’과 ‘죽은 민족의 부활’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註147) 기호흥학회의 임원구성은 다음과 같다. 註148)


기호흥학회 규칙



회 장 : ① 이용직 ② 윤응렬 ③ 김윤식(만기교체) ④ 홍필주(임시회장)

부 회 장 : ① 지석영 ② 유성준

총 무 : ① 정영택 ② 민형식 ③ 남궁훈

심항섭(회계)·이춘세(서기)·신현태(간사)

평 의 원 : 윤효정·이면우·오세창·이종일·심의성·홍필주·유병필·

남궁억·이우영·조완구·이상재·여규형·유 근 등 27인

교육부장 : ① 유길준 ② 윤치호 ③ 김가진 ④ 남연철

재정부장 : ① 민영휘 ② 이도재 ③ 현 은 ④ 이순하 ⑤ 이근상

사계과장 : 이우규

※이 외에 찬무부 부장과 사무장, 특별주무원, 주무원, 사무원 등이 있으나 생략함.

① ② ③ ④ 등은 임원의 기수期數를 의미함. 평의원은 대수를 망라한 것임.



기호흥학회는 이상과 같은 중앙조직을 가지고 평의원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경기·충청지역에는 18개소의 지회를 설치하였다. 경기는 광주·수원·양근·장단·교하·강화·풍덕, 충남은 서산·홍성·청양·목천·당진·해미·공주·연산, 충북은 충주·제천·영동 등이었다. 註149) 기호흥학회는 창립총회에 105명이 참석했으나 1909년 7월 현재 회원수가 1,462명에 달했으며, 그 중 본회회원은 264명, 지회회원은 1,152명이었

다. 물론 계몽운동 확산과 더불어 지회원은 상당히 증가되는 등 지역사회에서 중심적인 인물로서 성장하였다.

기호흥학회도 다른 학회처럼 학교설립과 계몽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기호흥학회는 서울에 기호학교를 경영하면서 충남 홍성에 금란의숙金蘭義塾 등 지교支校 설립을 인가하였다. 註150) 이는 지역사회 근대교육을 보급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홍성·강화·수원 등지 지회원은 사립학교설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는 등 지역사회의 중심적인 계몽활동가였다. 회보인 『기호흥학회월보』 간행·보급은 이러한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일환이었다. 註151)


5) 서북학회

서북학회西北學會는 1908년 1월에 기존의 지역학회인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가 통합하여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는 고종이 강제퇴위 당하고, ‘신문지법’과 ‘보안법’, 정미조약과 군대해산 등을 통하여 일제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크게 강화한 상황이었다.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 통합은 두 학회의 회원들이 신민회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과정에서 더욱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고, 결국 두 학회가 서북학회로 통합되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통합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사람은 정운복·안창호·오상규·강윤희·김명준·김달하·이종호·태명식·이갑·박은식·강화석·김윤오·이동휘 등이다. 서북학회는 인적으로 신민회와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었으며, 서북학회의 주요 간부들은 거의 다 대한협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註152) 임시회장 이동휘 지도 하에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 인사 149명이 참가한 가운데 창립된 서북학회의 임원진은 다음과 같다. 註153)



제1기 임원진(1908.1~1908.12)

회 장 : 정운복

부 회 장 : 강윤희

총 무 : 김달하

부 총 무 : 김주병

평의원장 : 오상규

평 의 원 : 이종호·태명식·이 갑·진진홍·김명준·최재학·유동렬·

박은식·옥동규·허 헌·김윤오·김희선·김달하·신석하

등 34명

사 찰 원 : 한광호

회 원 : 박경선

서 기 : 박봉헌

월보주필 : 박은식

월보편집 : 김달하

제2기 임원진(1909.1)

회 장 : 오상규

부 회 장 : 정운복

총 무 : 김명준

평 의 원 : 이 갑·이종호·김달하·박은식·유동렬·강윤희·태명식·

강화석·김주병·김윤호·최재학·정진홍·김희선 등 30인

회 계 : 박경선

서 기 : 이달원·김두섭



서북학회는 위와 같은 중앙조직을 갖추고 평안남도에 3개, 평안북도에 9개, 황해도에 5개, 함경남도에 10개, 함경북도에 4개 등 모두 31개의 지회를 설치하여 활동 영역을 넓혔다. 그리고 서북학회는 평안남도에 11개, 평안북도에 19개, 황해도에 22개, 함경남도에 12개, 함경북도에 4개 등 모두 68개의 지교를 설치하여 교육사업을 전개하였다. 서북학회의 본회에서는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를 직영하였다. 서북학회의 교육구국운동은 학교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실시하도록 권장하는 것, 학회가 직접 학교를 설립하여 국권회복의 인재를 양성하는 것, 서북지역 사립학교의 교육을 지도하는 것, 유학생을 지도하는 것, 전국 각 지역 학교의 교무를 도와주는 것 등이었다. 그리고 학회지로 『서북학회월보』를 간행하였다. 서북학회 회원은 대체로 신지식층, 신흥 도시민, 중하급 관료, 무관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다. 서북학회의 회원수는 2,400명에 달했으며, 주도회원 대부분은 대한협회 주도회원으로 활동하였다. 註154) 서북학회는 당시 가장 영향력이 큰 학회였다.


6) 교남교육회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는 서울에 거주하는 영남 출신 인사들이 경상남북도의 교육진흥을 표방하고 설립한 교육계몽단체였다. 교남교육회가 지역학회로서는 관동학회와 더불어 가장 늦게 설립되었다. 이유는 영남이 조선 유학의 중심지라고 자부하는 지역적 보수성 때문이었다. 1908년 3월 14일 발기인 박정동·상호尙灝 등 145인이 서울 보광학교에서 모여 교남교육회를 결성했으며, 역대의 임원진은 다음과 같다. 註155)



회 장 : 이하영·박정동·이겸래李謙來·김낙헌金洛憲

부 회 장 : 상 호·박두영朴斗榮·장길상張吉相

총 무 : 손지현孫之鉉·이선호李宣鎬·권중훈權重勳·정태균鄭泰均

평의회의장 : 박정동·신철희·상 호

평 의 원 : 박정동·이각종李覺鍾 등 30인

재무 부장 : 장길상張吉相·이상필李相弼

도서 부장 : 박정동·이용문李容汶

교육 부장 : 안택중安宅重·신길희申喆熙·서상거徐相巨

간 사 원 : 이원식李元植·이규한李圭漢·김병필金秉泌

서 기 원 : 유시봉柳時鳳·이종연李鍾淵

회 계 원 : 장택환張宅煥·권중훈權重勳



이상과 같이 교남교육회는 회장·부회장 아래 재무부·교육부·도서부를 두고 기간부서로서 총무·간사·서기·회계를 두었다. 이외에 학무원과 편술원을 각각 10명씩 두었다. 학무원은 교육부의 제반 사무를 담당하며 학교설립운동을 주요 과제로 삼았다. 편술원은 도서부의 제반 사무를 담당하며 각종 인쇄물을 통한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註156) 교남교육회는 서울에 사범학교를 설립하려던 계획은 실현하지 못했으나, 1면 1교一面一校 설립운동의 일환으로 협동학교協東學校·광명학교廣明學校·동양학교東陽學校 등을 설립·운영하였다. 교남교육회는 안동군과 거제군 두 곳에 지회를 설치했는데 실제로 지방 회원들의 활동은 대구와 동래에서 활발했다. 학회 전체 회원수는 620여 명으로 파악된다. 『교남교육회잡지』는 12호까지 간행되었다. 註157) 교남교육회의 발기인이며 회장으로 활동한 박정동이 기호흥학회 평의원이었고, 교남교육회의 회원 박은식이 대한협회의 발기인이었으며, 교남교육회 간사 이규한이 대한협회의 평의원이었던 사실과 여러 정황으로 보아 지역학회 중 늦게 발족한 교남교육회가 앞서 발족한 타 학회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것은 분명하였다.


7) 관동학회

관동학회關東學會는 1908년 3월 강원도 출신 인사들이 국민의 교육계몽과 강원도민의 단결을 목적으로 설립한 학회이다. 1907년 동도흥학회東道興學會로 발족되어 1908년 3월 관동학우회로, 곧 이어 관동학회로 개칭된 것이다. 남궁억 등이 발기한 관동학회의 임원진은 다음과 같다. 註158)



회 장 : 남궁억

부회장 : 정봉시鄭鳳時

총 무 : 고원식高源植

평의원 : 정호면鄭鎬冕·이시영李時榮·박기동朴起東·차상학車相鶴 등 28명

간사원 : 김세기金世起·김교면金敎冕

회 계 : 서상영徐相英

서 기 : 정규완鄭奎完


관동학회 발기의 주역이며 회장인 남궁억이 대한협회 창립 회장이었고, 관동학회 부회장 정봉시와 평의원 정호면 등이 대한협회 임원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관동학회가 애국계몽운동의 중심단체와 연결되어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註159)

관동학회는 첫째로 저명인사들을 초빙하여 민중의 의식을 일깨우고 신교육의 필요성을 계몽하였다. 둘째로 강원도 각 학교의 교무를 지도하고 재정을 지원했으며 학교를 설립하여 직접 운영하기도 하였다. 셋째로 청년들의 학문 활동을 장려하고 특히 강원도 출신 재경 유학생들의 지도에 주력하였다. 관동학회의 회원은 200명 정도였다. 관동학회는 지역을 대표하는 타 학회에 비하여 수적으로나 활동 면에서 열세였다. 註160)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역학회들은 서울에 본부를 두고 출신지역의 흥학과 발전을 도모하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 학회의 목표는 교육진흥에 의한 향토 발전과 민족의 실력양성이었고 나아가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이었다. 실제로 이들 학회는 회지 간행과 강연회 개최 등을 통하여 민중을 근대의식과 민족의식으로 계몽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보급하는 등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 학회는 명칭은 교육단체였으나 실제로는 사회·정치단체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정치와 교육을 결합시킨 구국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학회 구성원은 애국계몽운동의 중심단체인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의 구성원 또는 다른 학회의 구성원과 중복되어 있어, 사실상 한말의 여러 애국계몽단체들은 실력양성과 국권회복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의 거대한 세력을 형성했던 것이다. 남궁억이 군수로 재직 중 설립한 양양 현산학교峴山學校는 관내를 대표하는 근대교육기관이었다. 이는 도내로 파급되어 사립학교설립운동과 야학운동을 추동시키는 밑거름이나 마찬가지였다. 註161) 중장기적인 계획은 속성 사범과 운영으로 귀결되었다.


4. 애국계몽세력의 성격


1) 애국계몽단체의 상호관계

대한제국 후반기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여 무수한 애국계몽단체가 설립되었다. 그 중 전국적이고 대표적 단체인 대한자강회·대한협회·서북학회·신민회의 인적 관계를 통하여 애국계몽세력의 성격을 살펴보기로 한다.

대한자강회는 활동기간 17개월(1906.4.4~1907.8.21)을 6개월 단위로 3차에 걸쳐 임원진이 구성되었다. 회장·부회장·총무원·평의원·간사원 등 전체임원 78명 중 약 44%에 해당하는 34명은 대한협회에 참여하였다. 註162) 대한자강회 전체임원 78명을 대상으로 ① 각종 임원에 피선된 회수, ② 발언과 연설을 행한 회수, ③ 각종 총대·위원에 피선된 회수, ④ 『월보』에 글을 게재한 회수 등 활동 빈도를 조사하여 대한자강회의 활동을 주도한 인물을 추출하여 대한협회와의 관계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註163)


대한자강회 주도임원 명단(26명)

◎윤효정 ◎장지연 ◎홍필주 ◎심의성 ◎남궁훈 ○김상범 ○임병항

◎여병현 ◎유 근 ◎현 은 ×이 기 ×윤치호 ○설태희 ○이종준

◎정운복 ◎김성희 ◎태명식 ×조재혁 ◎이종일 ◎김명준 ◎남궁준

×김규식 ◎이영규 ◎지석영 ◎박은식 ○정호면

* ◎은 대한협회의 임원, ○은 대한협회 회원, ×는 대한협회 불참자임.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한자강회를 주도한 임원 26명 중 약 85%에 해당하는 22명이 대한협회에 참여하였고, 그 중에서 17명이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대한자강회의 조직 제1기에서 제3기에 걸쳐 최고지도부인 회장단과 평의장을 역임한 인물은 윤치호회장, 윤효정부회장·총무원, 현은총무원, 임병항평의장, 장지연평의장, 지석영평의장 등 6명이다. 註164) 그 중 윤치호를 제외한 5명이 대한협회에서 활동했으며, 윤효정은 총무로, 현은·장지연·지석영은 평의원으로, 임병항은 일반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협회회보』에 나타나는 1907년 11월에서 1909년 3월까지의 대한협회 임원 100명을 대상으로 하여 ① 각종 임원에 피선된 회수, ② 대한협회 모임에서 연설한 회수, ③ 각종 총대·위원에 피선된 회수, ④ 『회보』에 글을 게재한 회수 등 활동 빈도를 조사하여 대한협회의 주도인물 30명과 핵심인물 15명을 추출하여 대한자강회와의 관계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註165)



대한협회 주도임원 명단(30명)

강 엽 권동진 김가진 김광제 김명준 김성희김중환 남궁억 남궁준

신규식 심의성 신채호 안국선 안창호 여병현 오세창 원영의 유 근

이민경 이우영 이종린 이종일 이해조 윤효정 장지연 정운복 조원구

지석영 현 은 홍필주

대한협회 핵심임원 명단(15명)

권동진 김가진 김광제 김명준 심의성 여병현 오세창 이민경 이우영

이종일 윤효정 장지연 정운복 현 은 홍필주

* 굵은 글씨의 인명은 대한자강회 임원출신임.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윤효정, 박은식, 이종일, 장지연)



위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대한협회 주도임원 30명 중에서 53%에 해당하는 16명이 대한자강회의 임원 출신이었고, 대한협회 핵심임원 15명 중에서 73%에 해당하는 11명이 대한자강회의 임원 출신으로 집계된다. 그리고 대한협회가 존속한 약 3년 동안 대한협회의 회장단과 부장, 평의원 등 중요 임원 62명 중 대한자강회 임원출신은 24명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한협회 발기인 10명 중 남궁억·여병현·유근·이우영·윤효정·장지연·정운복·홍필주 8명이 대한자강회 핵심간부여서 註166) 사실상 대한협회의 창립 자체가 대한자강회 임원 출신의 주도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을 통하여 우리는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가 동질적 계승관계의 단체임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대한자강회는 배일단체이고, 대한협회는 친일단체라는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다고 본다.

서북학회와 대한협회도 인맥적으로 깊은 관계에 있었다. 서북학회의 주도회원으로서 대한협회에 참여한 것이 확인된 인물은 다음과 같다. 註167)


〈표 5〉 서북학회 주도회원의 대한협회 참여자 명단 (20명)

성명
서북학회의 직책대한협회의 직책
정운복
오상규
강윤희
김달하
김명준
김윤오
박은식
김원극
강화석
오주혁
옥동규
이인재
최재학
태명식
허 헌
우예균
안병찬
안창호
이동휘
주시경
①회장②부회장평의원
①평의원장②회장평의원
①부회장②평의원평의원
①총무②평의원회원
①평의원②총무평의원
①부총무②평의원평의원
①월보주필②평의원③부회장회보편찬원
②월보주필②총무지회평의원
①평의원②평의원평의원
①평의원간사원
①평의원회원
①평의원②평의원회원
①평의원②평의원평의원
①평의원②평의원③회장평의원
①평의원회원
회원회원
회원회원
회원평의원
회원회원
회원교무회원

표 중의 ①, ②, ③는 조직의 제1기, 제2기, 제3기를 의미함.


서북학회 활동을 주도한 인물은 75명으로 집계된다. 註168) 위의 표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서북학회 주도회원 20명이 대한협회의 회원이었으며, 그 중에서 13명이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서북학회의 조직 제1기·제2기·제3기의 회장정운복·오상규·태명식, 부회장강윤희·정운복·박은식, 총무김달하·김명준, 부총무김윤오, 평의원장오상규 등 최고지도부에 속한 인물 8명 전원이 대한협회 회원이었으며, 그 외 서북학회의 월보주필장지연과 평의원 6명도 대한협회 회원이었다. 註169) 이러한 사실은 서북학회와 대한협회가 서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인맥적으로 깊은 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당시 일본헌병대도 “서북학회의 간부는 다 대한협회의 회원이다” 註170)고 파악할 정도였다. 그리고 대한협회는 정치단체, 서북학회는 교육단체라는 형식상의 구별은 있으나, 실제로 두 단체의 기본 목표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표 6〉 신민회 주도회원의 대한협회 참여자 명단 (36명)

대한협회 본회임원강윤희·김명준·박은식·서상팔·신채호·안창호·오주혁·유 근·이종일·장지연·정영택·정운복·최재학
대한협회 본회회원김달하·김 인·김진극·박중화·신상민·옥동규·이동휘·이상익·이인재·이회영
대한협회 지회임원박상환·송종호·안태국·이덕환·이승준·장기영·최예항
대한협회 지회회원김일준·김재건·안병찬·유학렴·정원범·유예균

신민회와 대한협회도 인맥적으로 깊은 관계에 있었다. 신민회의 주도회원 註171)으로서 대한협회에 참여한 사실이 『대한협회회보』에서 확인된 인물은 〈표 6〉과 같다.

〈표 6〉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신민회의 주도회원으로서 대한협회에 참여한 36명 중에서 23명이 대한협회의 본회에 참여했다. 그 중에서 13명은 임원으로 활동했으며, 대한협회에 참여한 신민회의 주도회원 36명 중에서 13명이 대한협회의 지회에 참여했는데, 그 중에서 7명은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비밀결사인 신민회와 합법단체인 대한협회가 인맥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서북학회와 신민회도 인맥적으로 깊은 관계에 있었다. 서북학회 주도회원 75명 중 21명이 신민회 주도회원으로 활동하였다. 註172) 그리고 앞의 ‘서북학회 주도회원의 대한협회 참여자 명단20명’과 ‘신민회 주도회원의 대한협회 참여자 명단36명’을 대조해 보면, 서북학회 주도회원으로서 대한협회에 참여한 20명 중, 정운복·강윤희·김달하·김명준·박은식·김원극·오주혁·옥동규·이인재·최재학·유예균·안병찬·안창호·이동휘 등 14명이 신민회에도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대한자강회·대한협회·서북학회·신민회는 인맥으로 얽혀 다수의 주도회원이 중복되어 있다. 그러므로 대한자강회·대한협회·서북학회·신민회는 유사한 이념과 긴밀한 인적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동일한 성격의 집단으로 파악된다. 또한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를 중심으로 무수한 지역학회와 단체들이 인맥으로 얽혀 거대한 애국계몽세력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2)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의 친일문제

애국계몽운동의 중심단체인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의 친일성 문제는 애국계몽세력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오늘날뿐만 아니라 한말 당시에도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의 친일성 문제가 거론되었다.

대한자강회의 일인 고문 대원장부大垣丈夫는, ‘한일합방’ 후 회고담을 통하여, 그 자신이 “경성京城에 있어서의 일류 인물들인 윤치호·윤효정·여병현·홍필주·장지연·이원긍·이기·유근 등과 협상 담합하여 대한자강회를 조직했다”고 했으며, 註173)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도 “차회此會 인도자는 2원 한인과 1원 일인이라” 註174)고 기록한 점으로 보아, 대한자강회의 창립에 일인 대원장부가 깊이 개입했음은 분명하다. 사실상 대한자강회는 윤효정·장지연·대원장부가 주역이 되어 창립된 것으로 이해된다.

대한자강회에 일인 고문의 존재는 대한자강회에 대한 평가문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 그 당시에도 사회 일각에서 대한자강회를 부정적으로 보는 요인이 되었다. 註175)

그러면 왜 윤효정·장지연 등은 사회의 의혹을 무릅쓰고 일인 대원장부와 제휴하여 대한자강회를 조직했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겠다.

첫째로 대한자강회 발기인은 당시 일제의 보호국체제 하에서 일인 고문의 존재가 대한자강회의 설립과 그 활동에 도움이 되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대한자강회는 단순한 사회계몽단체가 아니고, 국권회복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정치단체였다. 그리고 대한자강회 발기인들은 대한자강회의 모체가 된 헌정연구회가 강제로 해체 당한 경험을 가졌고, 대한자강회의 창립과정에서도 실제로 경무청의 간섭을 받았다. 註176) 그러므로 그들은 일제의 보호국체제 하에서 대한자강회의 설립과 그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 일인 고문의 존재가 이러한 장애요인을 제거하는 방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로 대한자강회 발기인들은 일인 대원장부가 자신들과 시국관이 동일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당시 대원장부는 대한자강회 회원들과 동일하게 실력양성에 의한 국권회복이라는 한국의 자강독립론을 역설하는 등 한국의 자강독립에 기초한 동양삼국의 정족평화론鼎足平和論을 주장하였다. 註177) 이것은 일종의 아시아연대론 또는 동맹론이라 할 수 있는 논리이다. 당시 일인들의 한국에 대한 방략에 있어 동맹론·보호론·합방론은 궁극의 목표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고 보여진다. 註178) 그러나 당시 일제의 보호국체제 하에서 한국의 국권회복론자들이 합방론자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동맹론자들을 동지로 간주할 수 있는 소지는 충분히 있었으며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대한자강회 회장 윤치호는 그 당시의 일기에서, 대한자강회의 존재 이유가 매우 의혹스런 일로 되어 왔다고 전제하고, 대한자강회를 보는

두 개의 시각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일인들이 다소 반일적 성향을 띠고 불만을 품은 한국인들을 그 수중에 모아 위험한 일을 못하게 하기 위하여 대원장부를 통하여 이 회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새로운 기획의 발기인들의 성명에 의하면, 그 목적은 (1) 교육의 확장과 인민의 경제적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연구 토론하기 위한 것, (2) 자강의 의지와 희망을 계도 발전시키기 위한 것, (3) 현 내각에 있는 무능한 자들을 점차 대치할 수 있는 훌륭한 인물들을 양성시키기 위한 것이다. 註179)



곧 당시에 대한자강회는 일인들이 반일인사들을 한 곳에 모아 반일운동을 무마하기 위해 대원장부를 조종하여 만든 단체라는 세간의 주장과, 대한자강회는 교육과 식산을 통하여 자강을 실현하고 정치적으로 유능한 인물을 양성하기 위한 실력양성 단체라는 대한자강회 발기인들의 주장이 엇갈려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윤치호는



그 새로운 회는 일진회一進會의 참을 수 없는 횡포를 분쇄하거나 견제할 뭔가에 대한 민중의 기대에의 무의식적인 응답이었으며, 한국인 중에 다소 애국적이고 따라서 반일적이며 절망감을 가진 인사들이 상호 동정과 연대를 위하여 공동의 센터를 가지려 한 것이다. 註180)



고 하여, 대한자강회는 일진회를 견제하려는 반일애국단체 또는 반일애국인사들의 상호 연대를 위한 중심단체라고 인식하였다. 일제 문건인

『폭도편책暴徒編冊』에 “자강회는 … 당시 비교적 다수의 인물을 망라해서 배일파의 중견인 느낌이 있다”고 하여, 일본측도 대한자강회를 반일단체로 간주했음을 알 수 있다. 註181)

요컨대 대한자강회의 창립에 대원장부가 깊이 관여했고, 일제가 반일운동을 무마하기 위해 대한자강회를 이용코자 했다고 해서, 대한자강회가 일제의 조종 하에 창립되고 일제의 조종을 받은 단체라고 보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오히려 대한자강회는 일제의 보호국체제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강독립의 의지를 집결하여 창립된 구국운동의 중심단체였고, 독립협회와 그 이후 애국단체들의 맥락을 이은 민족운동단체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한자강회가 독립협회의 맥락을 이은 단체임은 그 인맥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대한협회가 어떠한 성격의 단체였던가에 대해서도 “애국과 항일을 대표하는 결사” 註182) 또는 “일진회와 같은 차원의 단체” 註183) 또는 “겉은 애국, 속은 매국이라는 위장단체” 註184)라는 등 상반되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하나의 단체가 왜 이처럼 상반되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그것은 일제의 보호국체제 하에서 합법단체로서 대한협회가 일제와 일진회에 대하여 유화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연유한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한자강회의 주요 간부 대부분이 대한협회에 참여했고, 서북학회의 회장단과 평의원 등 핵심 멤버 20여 명이 대한협회에 참여했으며, 신민회 주도 회원 36명이 대한협회에 참여하였다. 註185) 곧 애국계몽단체의 중심을 이루는 대한자강회·대한협회·

서북학회·신민회의 주도 멤버는 동일 그룹이었다. 그리고 당시 대한협회 지도자들은 ① 이완용 내각을 타도하여 국민의 참상을 구제하고, ② 전 국민적 단결에 의하여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며, ③ 일본인들의 과격한 한일합방론을 배격하기 위해서는 일진회와의 정치적 공조가 필요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註186)

당시 일본측이 대한협회를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것은 대한협회의 성격을 파악하는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일본측은 대한협회를 다음과 같이 보았다. 註187)



일진회원과 야소교도 및 대한협회원은 견원犬猿 관계로 상호 반목 배척하고 있다(『일본외교문서』 41-1, 855쪽).

대한협회 성립 … 지방 유세중의 역원 및 지방회원 등은 불온한 언론을 시試하여 일반 인민을 선동하여 암암리에 배일사상을 전파하려고 함과 같은 상황으로 일진회에 힐항하려는 것과 같다(『일본외교문서』 41-1, 892쪽, 「한국관계잡찬」).

대한협회는 항상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감이 있는데 만근에 이르러서는 한인에게는 배일사상을 주입하나 표면으로는 친일적 태도를 갖는 것 같다(『일본외교문서』 41-1, 892쪽, 「한국관계잡찬」, 184쪽).

(대한자강회를) 대한협회라 개칭하여 배일파는 거의 대한협회에 모였다(釋尾東邦, 『朝鮮倂合史』, 429쪽).



곧 일본측은 일진회와 대한협회를 견원관계로 파악했고, 대한협회를 한결같이 배일단체로 분류했으며, 1909년 대한협회와 일진회가 일시 정략적으로 제휴하려 했을 때는 대한협회를 속은 배일단체인데 표면적으로는 친일적 태도를 보인다고 파악하였다.

어떤 단체의 성격은 어떤 부류의 사람에 의해 구성되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인적 구성으로 볼 때, 대한협회는 대한자강회·신민회·서북학회와 같은 부류이고 일진회와는 다른 부류로 파악된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일제의 대한정략對韓政略에는 당분간 보호정책을 유지해야 한다는 ‘현상유지론=보호론’과 속히 한국을 병탄해야 한다는 ‘한일합방론’이 있었다. 註188) 당시에 일진회도 대한자강회·대한협회 등 애국계몽단체처럼 ‘애국’과 ‘문명화’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진회는 친일을 통한 문명화를 국가의 존립보다 중요시한 감이 있는 반면, 애국계몽단체는 문명화보다 국가의 독립을 더욱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명백한 차이가 있다. 곧 ‘애국’과 ‘문명화’를 내걸고 합방까지 찬성했는가? 끝까지 합방을 반대했는가? 여기에서 친일매국단체와 애국계몽단체가 구분된다고 생각된다.

당시 일진회가 보호론에서 합방론으로 나아간 친일매국단체였다면,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는 ‘합방론’을 거부하고 불가항력적으로 수용한 보호론 곧 현상유지론에 서서 자강독립을 추구한 애국계몽단체였다고 하겠다. 그리고 대한자강회 특히 대한협회가 일제 보호국체제 하의 합법단체로서 표면적으로 반일을 내세우지 못한 한계성을 드러낸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의 개명적 애국지사들을 거의 망라하여 국권회복을 추구한 민족운동단체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더욱이 일본측에서도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를 ‘배일단체’로 분류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

가 이들 단체를 친일단체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며 애국계몽단체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러일전쟁을 통하여 일본의 침략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일제와 친일단체에 대응하여 애국단체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였으며,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하여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대한자강회와 그 후신인 대한협회가 결성되었다.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를 중심축으로 하여 신민회·서북학회 등 무수한 단체와 학회가 인맥으로 얽히고 각 지방에 무수한 지회가 설립되어 전국적인 애국계몽세력을 형성하였다. 애국계몽세력은 실력양성을 당면 목표로 국권회복과 국민국가의 형성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었다.

[註 65] 유영렬, 『한국근대사의 탐구』, 102~104쪽·155~156쪽. ☞

[註 66] 동덕모, 「한국과 20세기 초의 한국정세」, 『한국사』 19, 국사편찬위원회, 1976, 27~28쪽. ☞

[註 67] 윤병석, 「일제의 한국주권 침탈과정」, 『한국사』 19, 115~116쪽. ☞

[註 68] 백종기, 『한국근대사연구』, 박영사, 1981, 346~348쪽 ; 윤병석, 「일제의 한국주권 침탈과정」, 『한국사』 19, 115~119쪽. ☞

[註 69] 동덕모, 「한국과 20세기 초의 한국정세」, 『한국사』 19, 29쪽 ; 김용덕, 「대한제국의 종말」, 『한국사』 19, 174~175쪽. ☞

[註 70] 신용하, 「구한말 보안회의 창립과 민족운동」, 『한국 사회운동의 기반과 새 경향』 44, 한국사회사연구회, 1994, 30~39쪽 ; 이원순, 「보안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 837쪽. ☞

[註 71] 최기영, 「보안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598~599쪽. ☞

[註 72] 최기영, 「보안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599·601쪽. ☞

[註 73] 이송희, 「애국계몽단체」, 『한국사』 43, 183쪽 ; 최기영, 「보안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600~601쪽. ☞

[註 74] 최기영, 「보안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600~601쪽 ; 이용창, 『동학·천도교단의 민회설립운동과 정치세력화 연구(1896~1906)』, 중앙대박사학위논문, 2004, 152~163쪽. ☞

[註 75] 강진갑, 「국민교육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 628쪽. ☞

[註 76] 최기영, 「국민교육회의 설립과 기독교」, 『한국근대계몽운동연구』, 일조각, 1997, 204~207쪽 ; 이송희, 「애국계몽단체」, 186쪽. ☞

[註 77] 이송희, 「애국계몽단체」, 『한국사』 43, 186~187쪽 ; 강진갑, 「국민교육회」, 628쪽. ☞

[註 78] 신혜경, 「대한제국기 국민교육회 연구」, 『이화사학연구』 20·21, 이화사학연구소, 1993, 181쪽. ☞

[註 79] 최기영, 「국민교육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3,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402~ 403쪽. ☞

[註 80] 최기영, 「공진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3, 299쪽. ☞

[註 81] 최기영, 「공진회와 반일진회 운동」, 『한국근대계몽운동연구』, 123쪽 ; 이현희, 「공진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873쪽. ☞

[註 82] 『황성신문』 1904년 12월 19일 잡보 「공진회청원」. ☞

[註 83] 최기영, 「공진회와 반일진회 운동」, 『한국근대계몽운동연구』, 138~139쪽. ☞

[註 84] 이송희, 「애국계몽단체」, 『한국사』 43, 184~185쪽 ; 최기영, 「공진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3, 299~300쪽. ☞

[註 85] 『황성신문』 1905년 5월 6일 잡보 「헌정연구회」. ☞

[註 86] 『황성신문』 1905년 5월 16일자. ☞

[註 87] 최기영, 「헌정연구회의 설립과 입헌군주론의 전개」, 『한국근대계몽운동연구』, 일조각, 1997, 160쪽. ☞

[註 88] 최기영, 「헌정연구회의 설립과 입헌군주론의 전개」, 161~163쪽. ☞

[註 89] 이송희, 「애국계몽단체」, 『한국사』 43, 190~191쪽 ; 최기영, 「헌정연구회의 설립과 입헌군주론의 전개」, 『한국근대계몽운동연구』, 175~176쪽. ☞

[註 90] 이송희, 「애국계몽단체」, 『한국사』 43, 191~192쪽 ; 『대한매일신보』 1905년 12월 1-3일 잡보 「前秘書丞尹秉氏疏本이 如左하니」. ☞

[註 91] 최기영, 「헌정연구회의 설립과 입헌군주론의 전개」, 『한국근대계몽운동연구』, 196쪽. ☞

[註 92] 대한자강회, 『대한자강회월보』(이하 『월보』라 약함) 1, 10~12쪽·14~15쪽. ☞

[註 93] 대한자강회에서 윤치호는 회장으로, 여병현·이원긍·김규식·이상재·김명준·나수연·현은·장지연·유근·남궁훈·이종일·심의성·정운복·박은식 등은 평의원으로, 백상규·최재학 등은 간사원으로, 홍재기·양기탁 등은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

[註 94] 대한자강회, 「대한자강회취지서」, 『월보』 1, 9~10쪽. ☞

[註 95] 대한자강회, 「대한자강회규칙」, 『월보』 1, 10쪽. ☞

[註 96] 『대한매일신보』 1906년 5월 30일 논설 「의병」 ; 강재언, 『조선의 개화사상』, 암파서점, 1980, 248쪽. 당시 애국계몽운동자들은 일본군에 대한 무력대결은 실력의 파괴를 초래하는 ‘不度時 不量力’의 무모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

[註 97] 『윤치호일기』, 1906년 5월 6일조. ☞

[註 98] 대한자강회, 『월보』 1, 11·16·19쪽 ; 『월보』 2, 54쪽 ; 『월보』 7, 55쪽. ☞

[註 99] 대한자강회, 「대한자강회규칙」, 『월보』 1, 11쪽 ; 「대한자강회평의회규칙」, 『월보』 1, 18쪽. ☞

[註 100] 대한자강회, 『월보』 제1호에서 제13호까지 「본회회보」, 「본회속록」, 「회원동정」과 특히 『월보』 8, 72쪽 ; 『월보』 11, 12쪽 ; 『월보』 13, 79쪽 ; 『황성신문』 1907년 5월 28일 잡보 「視察歸來」. ☞

[註 101] 유영렬, 「대한자강회의 애국계몽사상과 운동」,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110쪽. ☞

[註 102] 대한자강회, 『월보』 1, 55쪽 ; 『월보』 2, 51쪽 ; 『월보』 4, 43~44·46쪽. ☞

[註 103] 김성희, 「교사의 개념」, 『월보』 8, 25쪽 ; 이종준, 「교육론」, 『월보』 7, 1~2쪽. ☞

[註 104] 김성희, 「식산부논설」, 『월보』 6, 38~40쪽 ; 장지연, 「식산여업의 필요」, 『월보』 1, 34쪽 ; 여병현, 「식산부논설」, 『월보』 2, 14~16쪽. ☞

[註 105] 박은식, 「대한정신」, 『월보』 1, 58쪽 ; 윤효정, 「본회의 취지와 특성」, 『월보』 1, 22쪽. ☞

[註 106] 현은, 「국조고사」, 『월보』 8, 34~35쪽 ; 윤효정, 「국가적 정신을 불가불발휘」, 『월보』 8, 7~8쪽. ☞

[註 107]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을유문화사, 1985, 20~21쪽. ☞

[註 108]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25~26쪽. 신민회 창립시기 문제는 1906년 설(이재순, 「한말 신민회에 관한 연구」, 『이대사원』 14, 이대사학회, 1997), 1907년 2월설(國友尙謙, 『不逞事件ニ依テ觀タル朝鮮人』), 1907년 4월설(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 윤경로, 『105인사건과 신민회연구』), 그리고 1907년 9월설(김기석, 『남강 이승훈』, 한국인쇄주식회사, 1950) 등이 있다. ☞

[註 109] 이재순, 「한말 신민회에 관한 연구」, 『이대사원』 14, 9~10쪽. ☞

[註 110] 國友尙謙, 『不逞事件ニ依テ觀タル朝鮮人』 30~31쪽 ; 강재언, 『근대조선의 변혁사상』, 215~216쪽. ☞

[註 111] 山縣五十雄, 『朝鮮陰謀事件』, セウルプレッス社, 1912 ; 신용하, 『한국민족 독립운동사연구』, 41쪽에서 재인용. ☞

[註 112] 신민회의 주도회원 중에는 독립협회 회원 26명, 대한자강회 회원 22명, 서우학회 회원 17명(서북학회 회원 21명)이 들어 있음이 확인된다. ☞

[註 113]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34~35쪽 ; 강재언, 「신민회의 활동과 105인사건」, 『조선의 개화사상』, 405~406쪽. ☞

[註 114] 國友尙謙, 『不逞事件ニ依テ觀タル朝鮮人』 (秘), 57~58쪽(姜在彦, 『조선의 개화사상』, 같은 쪽 소재). ☞

[註 115] 강재언, 「신민회의 활동과 100인사건」, 『조선의 개화사상』, 452쪽. ☞

[註 116] 「대한신민회통용장정」, 1028쪽. ☞

[註 117] 「대한신민회취지서」, 1027쪽. ☞

[註 118] 「대한신민회의 구성」, 1024쪽 ; 國友尙謙, 『不逞事件ニ依テ觀タル朝鮮人』, 188~189쪽(강재언, 『조선의 개화사상』, 258쪽 소재)에는 당시의 기독교도들이 ‘공화국의 건설’에 뜻을 두고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

[註 119] 「대한신민회통용장정」, 1028~1029쪽. ☞

[註 120] 山縣五十雄, 『朝鮮陰謀事件』, セウルプレシス社, 1912, 2·26·83쪽 ; 윤병석, 「1910년대의 한국독립운동」, 『한국근대사론』 II, 지식산업사, 1977, 26~32쪽. ☞

[註 121] 대한협회, 「본회역사 급 결의안」, 『대한협회회보』(이하 『회보』라 약함) 1, 38~39쪽. ☞

[註 122] 대한협회, 『회보』 제1호~제13호 소재의 「회원명부」, 「본회역사」, 「회중기사」, 「회중역사」 ; 『대한민보』 1909년 12월 12일 「韓會總會」. ☞

[註 123] 대한협회, 『회보』 1, 38~40쪽. ☞

[註 124] 대한협회 고문 大垣丈夫는 후일담에서 대한협회 지회수가 104개에 달한다고 하였다(김항구, 『대한협회연구』, 단국대박사학위논문, 1992, 83쪽). ☞

[註 125] 대한협회, 『회보』 제1호에서 제12호 「본회역사」, 「회중기사」, 「회중역사」와 『대한민보』의 기사 및 『대한매일신보』 1908년 10월 31일 잡보와 1910년 6월 8일 잡보 참조. 『주한일본공사관기록』 憲機 제1811호 의성분견소장보 1908년 9월 22일조의 「대한협회지부설립의 건」에 보면, 軍威·義城·義興 3개 군에서도 50명 이상의 동지들을 모아 9월 25일에 대한협회지회 설립을 위한 집회를 가질 예정이라는 보고가 있는 것으로 보아, 대한협회 지회는 87개 이상일 것으로 보인다. ☞

[註 126] 유영렬, 「대한협회지회의 조직과 활동」,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257~258쪽. ☞

[註 127] 유영렬, 「대한협회지회의 조직과 활동」,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252~255쪽. ☞

[註 128] 대한협회, 『회보』 제1호~제12호 「회원명단」, 「본회역사」, 「회중기사」, 「회중역사」와 『대한민보』 1909년 6월 15일자 잡보, 6월 30일자 잡보. ☞

[註 129] 김가진, 「我國有識者의 일본국에 대한 感念」, 『회보』 6, 1쪽. ☞

[註 130] 김광제, 「六脈의 습관을 劈破然後에 可以自保」, 『회보』 6, 75쪽 ; 오세창, 「대조적 관념」, 『회보』 5, 1쪽. ☞

[註 131] 김가진, 「아국유식자의 일본국에 대한 감념」, 『회보』 6, 3~4쪽 ; 대한협회, 「대한협회취지서」, 『회보』 1, 1쪽. ☞

[註 132] 대한협회, 「경구지사동정」, 『회보』 8, 57쪽 ; 윤효정, 「시국의 급무」, 『회보』 2, 62~63쪽. ☞

[註 133] 대한협회, 「경구지사동정」, 57쪽 ; 신채호, 「대한의 희망」, 『회보』, 17~18쪽. ☞

[註 134] 원영의, 「정체개론」, 『회보』 3, 28쪽 ; 김성희, 「論外交上 經驗的 歷史」, 『회보』 8, 4쪽 ; 변덕연, 「국민과 국가의 관계」, 『회보』 7, 30쪽. ☞

[註 135] 김성희, 「정당의 사업은 국민의 책임」, 『회보』 1, 28~31쪽. ☞

[註 136] 김성희, 「정당의 사업은 국민의 책임」, 『회보』 1, 28~31쪽. ☞

[註 137] 『석주유고』 권2 「대한협회 안동지회 취지서」(이현종, 「대한협회에 관한 연구」, 『아세아연구』 8-3,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70, 34쪽 소재). ☞

[註 138] 이송희, 「한말 서우학회의 애국계몽운동과 사상」, 『한국학보』 26, 일지사, 1982, 37~41쪽. ☞

[註 139] 정관, 「서우학회와 함북흥학회」, 『구한말 민족계몽운동연구』, 형설출판사, 1995, 66쪽 ; 이송희, 「한말 서우학회의 애국계몽운동과 사상」, 『한국학보』 26, 42~45쪽. ☞

[註 140] 이균영, 『한말 애국계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1, 87~90쪽. ☞

[註 141] 이균영, 『한말 애국계몽운동』, 90~91쪽. ☞

[註 142] 『대한매일신보』 1906년 11월 6일자. ☞

[註 143] 『황성신문』 1907년 3월 30일 잡보 「한회임원」. ☞

[註 144] 최기영, 「한북흥학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7,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410~ 411쪽. ☞

[註 145] 이균영, 『한말 애국계몽운동』, 96~98쪽. ☞

[註 146] 정숭교, 「호남학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7, 185쪽. ☞

[註 147] 이현종, 「기호흥학회에 대하여」, 『사학연구』 21, 한국사학회, 1969, 301~329쪽 ; 기호흥학회, 「본회취지서」, 『기호흥학회월보』 제1호, 1쪽 ; 이송희, 「기호흥학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3, 522쪽. ☞

[註 148] 이균영, 『한말 애국계몽운동』, 101~102쪽. ☞

[註 149] 김형목, 「기호흥학회 경기도 지회 현황과 성격」, 『중앙사론』 12·13, 중앙사학연구회, 1999, 83쪽. ☞

[註 150] 김형목, 「기호흥학회 충남지방 지회 활동과 성격」, 『중앙사론』 15, 중앙사학연구회, 2001, 45쪽. ☞

[註 151] 이송희, 「기호흥학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3, 522~523쪽. ☞

[註 152] 이송희, 「한말 서북학회의 애국계몽운동」 상, 『한국학보』 31, 일지사, 1983, 84~87쪽 ; 유영렬, 「대한협회의 애국계몽사상」,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218~219쪽. ☞

[註 153] 이균영, 『한말 애국계몽사상』, 108~109쪽. ☞

[註 154] 이송희, 「서북학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5,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5, 89~91쪽 ; 정관,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 『구한말기 민족계몽운동』, 79쪽. ☞

[註 155] 정관, 『구한말기 민족계몽운동』, 114·124~125쪽. ☞

[註 156] 권대웅, 「한말 교남교육회 연구」, 『중산정덕기박사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 동간행위원회, 1996, 891~896쪽 ; 이동언, 「교남교육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3,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374쪽. ☞

[註 157] 정관, 『구한말기 민족계몽운동』, 127·131~134쪽. ☞

[註 158] 최기영, 「관동학회」, 『한국독립운동사사전』 3, 317쪽. ☞

[註 159] 유영렬, 「대한협회의 애국계몽사상」,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1997, 214~215쪽. ☞

[註 160] 이송희, 「관동학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35쪽. ☞

[註 161] 김형목, 『대한제국기 야학운동』, 경인문화사, 2005, 197~199쪽. ☞

[註 162] 유영렬, 「대한자강회의 애국계몽사상과 운동」,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112쪽 〈표 2〉. ☞

[註 163] 유영렬, 「대한자강회의 애국계몽사상과 운동」,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113쪽 〈표 3〉. ☞

[註 164] 유영렬, 「대한자강회의 애국계몽사상과 운동」,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114쪽 〈표 4〉. ☞

[註 165] 유영렬, 「대한자강회의 애국계몽사상과 운동」,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216쪽 〈표 3〉·〈표 4〉. ☞

[註 166] 유영렬, 「대한자강회의 애국계몽사상과 운동」,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213쪽. ☞

[註 167] 이송희, 「한말 서북학회의 애국계몽운동」 상, 『한국학보』 31, 92~97쪽의 서북학회 회원 명단 ; 유영렬, 「대한자강회의 애국계몽사상과 운동」,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표 1〉과 〈표 2〉의 대한협회 임원 명단. ☞

[註 168] 이송희, 「한말 서북학회의 애국계몽운동」 상, 『한국학보』 31, 97쪽. ☞

[註 169] 『황성신문』 1908년 1월 5일 잡보 「서북학회 임원」 ; 서북학회, 「회사기요」, 『서북학회월보』 제9호, 54쪽 ; 『대한매일신보』 1910년 3월 8일자. ☞

[註 170] 『주한일본공사관기록』 헌병 제1823호 1909년 9월 24일조 「一進會·大韓協會聯合懇談會ノ狀況 ; 이현종, 「대한협회에 관한 연구」, 『아세아연구』 8-3,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70, 43쪽에서 재인용. ☞

[註 171]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45~46쪽. ☞

[註 172] 이송희, 「한말 서북학회의 애국계몽운동」 상, 『한국학보』 31, 97쪽 ; 신용하, 「신민회의 창건과 그 국권회복운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46쪽. ☞

[註 173] 大垣丈夫, 「混沌たる政情と其裏面」 ; 藤村德一編, 『居留民之昔物語』 제1편, 朝鮮二昔會, 1926, 111쪽. 대원장부가 열거한 인물 중 呂圭鉉은 呂炳鉉일 것이고, 李圻의 ‘圻’는 ‘沂’의 오자이다. ☞

[註 174] 『대한매일신보』 1906년 6월 11일 논설 「신성사회」. ☞

[註 175] 이현종, 「대한자강회에 대하여」, 『진단학보』 29·30, 진단학회, 1966, 172~173쪽 ; 권희영, 「대한자강회의 사회사상과 민족운동」, 『논문집』 2, 해군제2사관학교, 1980, 151~161쪽 ; 『윤치호일기』 1906년 5월 6일조 ; 이기주, 「기서」, 『월보』 8, 68~69쪽. ☞

[註 176] 대한자강회, 『월보』 1, 12~13쪽을 보면, 대한자강회 창립 당시에 윤효정 등 발기인 4인이 경무청에 소환되어 일반정치에 간여치 않는다는 증명서를 제출토록 요청받았다. ☞

[註 177] 대한자강회, 『월보』 1, 25쪽 ; 『월보』 5, 39~40쪽; 『월보』 5, 44쪽 ; 「대원장부의 연설」, 『월보』 11, 12~13쪽 참조. ☞

[註 178] 정관, 『구한말기 민족계몽운동연구』, 46쪽 ; 池川英勝, 「大垣丈夫について」, 『조선학보』 117, 조선학회, 1986, 78~81쪽. ☞

[註 179] 『윤치호일기』 1906년 5월 6일조. ☞

[註 180] 『윤치호일기』 1906년 5월 6일조. ☞

[註 181] 『폭도편책』 명치 40년 5월 23일 기밀서류철 갑 사법계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경비발(京秘發) 제71호, 명치 40년 8월 21일조. 경성경시청의 보고에 의하면, 윤효정이 “원래 자강회는 일진회에 대한 불평분자가 相集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

[註 182] 강재언, 『근대조선의 변혁사상』, 214쪽. ☞

[註 183] 박용옥, 「민중의 항쟁」, 『한국사』 19, 291쪽. ☞

[註 184] 박성수, 「애국계몽단체의 합방반대운동」, 『숭의논총』 5, 숭의여전, 1981, 49~50쪽. ☞

[註 185] 유영렬, 「대한협회의 애국계몽사상」,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213~221쪽. ☞

[註 186] 윤효정, 「양회 연결의 주지」, 『대한민보』 1909년 10월 26일 별보 ; 『대한민보』 1909년 10월 10일자 회보 「한회지명」 ; 한명근, 『한말 한일합방론 연구』, 국학자료원, 2002, 163~166쪽. ☞

[註 187] 이현종, 「대한협회에 관한 연구」, 『아세아연구』 8-3, 34~35쪽. ☞

[註 188] 『대한민보』 1909년 10월 26일 별보 ; 정관, 『구한말 민족계몽운동연구』, 46쪽 ; 池川英勝, 「大垣丈夫について」, 『조선학보』 117, 78~8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