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연구 동향 / 연구 성과 / 애국계몽운동 Ⅰ 정치사회운동

몽유도원 2014. 6. 22. 19:30

제1장 연구 성과


연구 동향


민족운동의 흐름


1. 연구 동향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이후 대한제국은 일제의 반半식민지 상태로 전락되는 상황이었다. 한국인의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은 크게 실력양성에 입각한 애국계몽운동과 직접적인 무력에 의한 항일의병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정치·사회활동은 각자가 처한 계급적인 입장을 반영하는 가운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는 민족사적 과제를 해결하려는 현실인식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연구는 해방 이후 정국불안과 함께 부진을 면치 못하였다. 극심한 이데올로기 대립은 객관적·합리적인 연구를 방해하는 커다란 장애물이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에 대한 인식변화는 이 분야 연구를 활성화시키는 계기였다.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에 근거한 역사인식은 이를 가능케 하는 요인이었다. 그 결과는 용어 문제의 적합성과 사상적 기반, 운동론과 성과, 의병운동과 관계 등에 대한 다양한 문제 제기로 이어졌다.

애국계몽운동은 대한제국 후반기에 전개된 실력양성에 의한 국권회복운동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는 계몽운동·구국계몽운동·애국문화운동·자강운동·개화자강운동 등 다양한 개념으로 명명되고 있다.

목적으로서 애국과 수단으로서 계몽을 강조하는 전반적인 애국운동의 개념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이라는 용어 사용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애국계몽운동 기점은 이전에 주로 을사조약 체결을 전후한 시기에 두었다. 러일전쟁과 을사조약을 계기로 국민의 자각을 통하여 국권회복과 근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실력양성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를 애국계몽운동 기점으로 보는 관점은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한 점에서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註1)

애국계몽운동의 사상적 기반의 하나인 사회진화론 역할에 대한 입장은 연구자 사이에 다양한 이견을 보인다. 애국계몽사상은 갑신정변·갑오개혁·독립협회운동 등 개화자강계열의 사상을 내재적으로 발전하는 가운데 형성되었다. 곧 개항과 더불어 유입된 외래사조는 19세기 후반부터 국내 지식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개화자강론자는 물론 개신유학자로 일컬어지는 일부 유생층도 이를 시무책이나 부국강병책 일환으로 수용하였다. 서구사회에서 풍미하던 계몽사상과 사회진화론 영향을 받았다는 견해는 학계 통설로서 정립된 상태이다.

반면 사회진화론이 가지는 ‘경쟁과 진보’의 양면성에 주목한 다른 견해도 있다. 註2) 진보에 중점을 둘 경우에는 근대주의에 빠져 제국주의 침략을 용인하게 될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이는 당시 상황과 관련하여 상당 부분 타당한 측면을 지닌다. 일부 계몽론자들은 이러한 논리에 매몰되는 등 한계성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사회진화론과 사회계약론·민권론 등 서양계몽사상은 한말 애국계몽가들의 자강론과 국권회복론의 사상적 기초를 이룬다. 註3)

또한 사회진화론은 제국주의 열강이 약소국가들을 식민지로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논리이다. 한말 사회진화론은 ‘강자의 약자 지배를 인정하는 논리’로서 작용했다는 지적은 바로 이러한 견해의 연장선이다. 註4) 하지만 당시 대다수 애국계몽론자들은 사회진화론을 ‘약자의 강자화强者化를 위한 논리’로서 활용한 점에 주목할 필요성을 느낀다.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에 매진한 사실은 외래사조를 ‘자기체질화’로 수용한 사실을 반증한다. 註5) 이는 단순한 외래사조 수용 차원을 벗어나 시대상황에 걸맞는 시무책으로서 정립된 사실을 의미한다.

애국계몽운동 논리와 성과 등에 대한 평가는 긍정론과 부정론으로 크게 대별된다. 애국계몽운동이 국가멸망의 위기에서 총을 들지 않은 소극적인 운동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부정론이다. 박찬승은 애국계몽인사들의 실력양성론은 ‘선실력양성先實力養成 후독립後獨立’을 기조로 하여 실력양성 이전까지는 일제의 한국지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논리였다. 결과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지배를 용인할 수밖에 없는 논리인 ‘선실력양성 후독립론’은 국권회복운동론으로서 성립될 수 없다고 보았다. 註6) 이 운동론은 제국주의 침략이 강화될수록 근본적인 한계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관점이었다. 주진오는 애국계몽운동이 민중의 계몽을 통해 애국심을 배양하기 위하여 교육·언론활동에 주력한 사실 등에 주목하였다. 이는 현실의 급박함을 몰인식한 패배주의적 나아가 투항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註7) 부정적인 평가는 갑신정변·갑오개혁·광무개혁 등 근대부르조아개혁이 실패한 역사적인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을 선도한 독립협회 기관지 『독립신문』 창간호


한편 일제 보호국체제 하에서 실력양성에 의한 국권회복을 추구한 애국계몽운동은 당시로서 최선의 구국운동이었다는 평가이다. 신용하는 애국계몽운동은 실력을 양성하여 궁극적으로 자기 민족의 배양된 실력에 의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으로, 단기간 내에 민족 역량을 증강시키는 큰 성과를 거두어, 국권을 잃은 최후의 4년이 ‘대각성의 시대’가 되고 ‘민족역량 증강의 시대’가 되게 했다고 평가하였다. 註8) 민족역량 증대는 폭압적인 일제에 맞서 저항운동을 전개하는 밑바탕이었다. 이는 민족의식·국가의식을 고취시킴으로써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유영렬은 애국계몽운동이 국권회복과 동시에 국민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여 민족운동의 올바른 이념을 제시한 점, 실력양성론과 독립전쟁론을 결합하여 민족운동의 올바른 방략을 제시한 점, 근대교육과 독립군기지 건설 등을 통하여 민족독립운동의 장기적 기반을 조성한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註9)

한국근대 민족운동은 단기적이 아니고 장기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성패도 중요한 요인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더욱 중요한 점은 민족이 나아갈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하는 문제였다. 일제의 정치적·경제적·군사적인 통제 하에서 전개된 한말 민족운동은 더욱 그러하다. 운동주체

의 기본적인 사상과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역사와 민족 발전방향에 부합하는가 하는 방향성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렇게 볼 때, 애국계몽론자들은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전제로 한 국권회복론을 제시하였다. 특히 신민회가 채택한 공화정체론은 당시 민족운동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 근대적 민족운동론이었다. 註10) 시세변화에 부응한 민권문제는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라는 ‘이중적인’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밑바탕이었기 때문이다.

[註 1] 유영렬, 「애국계몽사상」, 『한국사』 43, 국사편찬위원회, 1999, 236~239쪽. ☞

[註 2] 김도형, 「애국계몽운동의 연구동향과 과제」, 『한민족독립운동사』 12, 국사편찬위원회, 1993, 80~81쪽. ☞

[註 3] 신용하, 「한말 애국계몽사상과 운동」, 『한국사학』 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277~ 278쪽. ☞

[註 4] 강만길, 『고쳐쓴 한국근대사』, 창작과비평사, 1994, 238쪽. ☞

[註 5] 유영렬, 「애국계몽사상」, 『한국사』 43, 245쪽. ☞

[註 6] 박찬승, 『한국근대정치사상연구』, 역사비평사, 1992, 64·370쪽. ☞

[註 7] 주진오, 「한국근대 집권관료세력의 민족문제 인식과 대응」, 『역사와 현실』 창간호, 한국역사연구회, 1989, 49쪽. ☞

[註 8] 신용하, 『한국근대 사회사상사 연구』, 일지사, 1987, 349쪽 ; 신용하,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을유문화사, 1985, 15쪽. ☞

[註 9] 유영렬, 「대한자강회와 신민회의 민족운동」,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일조각, 1997, 207~209쪽. ☞

[註 10] 유영렬, 「애국계몽파의 민족운동론」,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99~100쪽. ☞


2. 민족운동의 흐름

항일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상관관계도 긍정론과 부정론 입장에서 평가한다. 강재언은 반일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은 대외적으로 민족적 자주라는 공통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방법이 상이하고, 대내적으로는 구질서를 고수하려는 위정척사사상과 근대적 개혁사상으로서의 개화사상 사이의 사상적 단층 때문에 일체화될 수 없었다고 보았다. 註11) 이만형은 신민회의 대변지인 『대한매일신보』가 의병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대변했다는 주장은 맞지 않으며,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은 ‘병행’되었다고 보았다. 註12) 김도형은 애국계몽운동과 항일의병운동은 근본적으로 개혁 이념과 개혁 주체의 설정에 차이가 존재하여 서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으며, 애국계몽 인사들의 철저한 우민관愚民觀과 민중불신관이 의병을 적대적으로 인식케 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애국계몽단체의 일부 지회가 의병 활동과 연관을 맺었음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註13)

여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애국계몽 인사들이 우민관과 민중불신관을 가졌다면, 그것은 민중의 근대지식과 주권행사 능력에 대한 현상적 판단일 뿐이다. 이는 민중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의식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계몽론자들은 민중에게 근대적 지식과 정치참여 능력을 배양하기 위하여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의병운동에 대한 비판도 우민관과 민중불신관에 기인했다기 보다는 민족운동 방법론상 차이에서 파생된 문제이다.

신용하는 양 운동에 대한 대립적·배타적인 견해를 비판하였다. 그는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은 방법과 형태만 달랐지, 국권회복이라는 목표가 완전히 합일되었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양 운동은 상호보완적이라고 보았다. 곧 항일의병의 치열한 무장투쟁으로 일제의 한국병합이 늦어졌고, 이로 말미암아 애국계몽운동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으며, 애국계몽 인사들로부터 근대교육을 받은 중견 간부들이 공급되어 의병전이 장기적인 독립항전으로 발전되었다는 논리이다. 註14) 조동걸은 1907년 8월의 후기의병에서 한말 계몽주의와 의병전쟁이 구국운동 차원에서 통합되어 간 사례에 주목하였다. 註15) 계몽론자나 의병전쟁론자들은 민족운동을 통하여 스스로 한계성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상호보완적인 독립운동론을 모색하는 계기였다는 논리이다.

최취수도 강화지역의 의병운동을 통하여 양 운동이 상호 보완적임을 주장하였다. 註16) 강화지역 계몽운동을 주도한 이동휘李東輝는 중심적인 인

물이었다. 그는 사립학교설립운동에 부응하여 의무교육 시행을 위하여 도내 지역을 56개 학구學區로 구분하였다. 註17) 운영비는 의연금과 주민들 생활정도에 따라 차등 분배하여 충당할 수 있었다. 기존 설립된 사립학교나 개량서당 등은 보창학교普昌學校 지교로서 전환시켰다. 강화지역 근대교육 확산은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상무정신을 강조하기 위한 연합대운동회 개최는 양 운동론자들 현실인식을 반영한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註18)

함경도 경성鏡城지역 의병진도 이러한 성격을 보여준다. 대한협회 경성지회원들은 연해주지방 의병진과 연합항전을 구상하는 등 매우 적극적이었다. 註19) 지회원 장석회張錫會·장성실張成實·정운녀鄭雲汝·이승언李昇彦 등은 직접 의병진을 구성하여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나머지 대다수도 의병을 후원하는 데 앞장섰다. 이들은 보성학교普成學校·함일학교咸一學校 설립을 주도하면서 모금한 의연금 대부분을 군자금으로 지원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양 진영간 상호보완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한 점에서 주요한 의미를 지닌다.

항일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은 전반적으로 또는 현상적으로 주체세력의 사상적 배경과 운동방법 차이 등으로 인하여 상호 비판적·대립적인 관계에 있었다. 부분적으로 또는 결과적으로 보면, 양자 간에 상호 보완적인 측면은 상당한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곧 항일의병노선과 애국계몽노선은 주권피탈 이후 실력양성과 무력투쟁을 결합한 민족운동노선으로 합일될 수 있었다. 註20)

[註 11] 강재언, 「반일의병운동의 역사적 전개」, 『한국근대사연구』, 한울, 1982, 358~363쪽. ☞

[註 12] 이만형, 「구한말 애국계몽운동의 의병관」, 『해사논문집』 18, 해군사관학교, 1983, 23~24쪽. ☞

[註 13] 김도형, 「한말 계몽운동의 지방지회」, 『손보기박사정년기념논총』, 지식산업사, 1988, 820~822쪽 ; 김도형, 「한말계몽운동의 정치론 연구」, 『한국사연구』 54, 한국사연구회, 1986, 95~96쪽. ☞

[註 14] 신용하, 「한말 애국계몽사상과 운동」, 『한국사학』 1, 270쪽 ; 신용하,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14쪽. ☞

[註 15] 조동걸, 『한국민족주의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지식산업사, 1989, 62쪽. ☞

[註 16] 최취수, 「1910년 전후 강화지역 의병운동의 성격」,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88, 84쪽. ☞

[註 17] 김형목, 「대한제국기 강화지역의 사립학교설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4,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5, 10~13쪽. ☞

[註 18] 김형목, 「대한제국기 강화지역의 사립학교설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4, 21~24쪽. ☞

[註 19] 박민영, 『대한제국기 의병연구』, 한울, 1998, 246~253쪽. ☞

[註 20] 유영렬, 「대한자강회와 신민회의 민족운동」, 『대한제국기의 민족운동』, 208~20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