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후기의병의 역사적 의의 / 한말 후기의병

몽유도원 2014. 6. 22. 19:23

제6장 후기의병의 역사적 의의


후기의병의 역사적 의의


후기의병의 역사적 의의


후기의병은 1907년 후반부터 1909년 후반까지 약 2년 동안 일제와 더불어 전선이 없는 전쟁을 벌였다. 특히 1908년을 전후한 시기에 대략 10만의 의병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혈전을 벌이다 약 1만5천명의 목숨을 빼앗겼다. 같은 기간 일본군 전사자는 채 100명을 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를 전쟁이라기보다는 무자비한 학살사건이라 할 수 있다. 후기의병은 오로지 대한제국의 국권을 수호하고 민족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것이다.

후기의병의 직접적 배경은 1907년 중반 잇달아 발생한 정치적 침탈에서 비롯되었다. 고종의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의 체결, 그리고 군대해산으로 말미암아 의병항쟁이 크게 고조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908년에는 강원·전남·전북·황해도에서, 1909년에는 단연 전라남북도에서 의병항쟁을 주도하였다. 註1) 이처럼 후기의병의 주 무대는 중부 이남, 특히 전라도 지역이었다.

해산군인들의 가세로 의병의 투쟁역량이 크게 향상되자, 강원도와

경기도의 의병항쟁을 주도한 지도자들은 연합의진을 결성하여 서울진공작전을 감행하였다. 이 작전은 이인영을 비롯한 허위·이은찬·민긍호 등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들의 목표는 일본과 외교적 담판을 벌여 대한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으려는 것이었다.

강원도와 경기도의 의병항쟁에서는 해산군인들의 역할이 돋보였다. 민긍호·김덕제·연기우·지홍윤·유명규 등의 해산군인들은 강원도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 의병의 활성화와 전력 증강에 크게 기여하였다. 註2) 황해도의 평산의병은 장수산을 근거지로 삼아 경술국치 이후까지 항쟁의 명맥을 이어갔으며, 그 일부는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으로 전환하였다. 함경도에서는 홍범도·차도선 등 직업적인 산포수들이 북청과 삼수·갑산 등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경성鏡城의병은 연해주 의병과 긴밀하게 연계하여 활동했는데, 일제의 공세가 강화되자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으로 전환되어갔다. 평안도에서는 화전농민 출신의 채응언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외롭게 투쟁하였지만 국내에서 최후까지 활동한 ‘마지막 의병장’이었다.

충청도에서는 이강년·한봉수·김상태·노병대 등이 의병부대를 이끌었다. 이들은 대체로 경북과 강원도 의병들과 연계하여 투쟁하거나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경상도에서는 신돌석·정환직·변학기·서병희 등이 눈부신 투쟁을 전개하였다. 전라도의 의병항쟁은 기삼연·고광순이 불굴의 항일의지를 계승하면서 활성화되었다. 김동신·김태원·김율·이석용·전해산·심남일·안규홍·문태서·임창모·조경환·오성술·황준성·김영백·최산흥·양춘영·조규하·박도경·김공삼·

양진여·이기손 등이 의병을 일으켜 전라도 각지를 장악함으로써 후기의병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러한 의병 소식이 제주도까지 파급되어 고승천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처럼 후기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은 유명한 성리학자를 비롯한 한미한 유생, 전 현직 관료, 농민·보부상·해산군인·승려·머슴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였다. 이들이 계급과 신분을 초월하여 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특히 후기의병은 해산군인들과 산포수들의 적극적인 가담으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등 전투경험이 풍부한 정예의 일본군에 맞서 장기항전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1908년에 2천여 회나 일제 군경과 싸웠으며, 전투에 참여한 의병의 숫자는 83,000여 명이나 되었다. 1909년에도 이들은 1,700여 회의 전투를 벌였고, 참여한 의병이 약 4만명이나 되었다. 이처럼 후기의병은 일제가 표현했듯이 ‘대전쟁’이라 부를 정도로 처참하고 엄청난 규모로 확산되었다.

한편 후기의병은 의진 간의 진밀한 연계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일제의 탄압에 맞서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의진간의 연계와 연합은 전국 단위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대체로는 도 별로 이루어졌다. 당시 의병들 사이에는, “무릇 일을 합하면 강해지고 나누면 약해진다. … 이로부터 일이 있으면 합치고 없으면 나누자”라는 인식이 크게 확산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군량과 탄약을 서로 나누어 사용하거나, 연합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후기의병은 지역 주민과의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장기항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들은 일제에 의해 생존권을 위협받던 주민 보호에 노력함으로써 안민적 성격을 강화하였다. 당시 의병들은, “의병과 주민은 머리와 꼬리처럼 서로 이어져 있으므로 어려울 때는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는 바가 마치 부자 형제의 허물없음과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따

라서 후기의병은 주민들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이다.

특히 평민출신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그러한 점에서 모범을 보였다. 예컨대 안규홍 의병부대는, “보성군에 사는 담사리라 하는 안모가 의병을 많이 모집하여 그 고을 안에 두류하나 백성에게는 침범하는 일이 추호도 없다더라.”고 하는 신문기사만 보아도 그러하다. 이들은 출신지를 의병활동의 주된 근거지로 삼아 주민들을 괴롭히는 가짜 의병과 부호의 토색, 관리의 가렴주구 등의 문제를 해결해주었으며, 주민들은 의병들에게 숙식과 정보를 제공하며 서로 도왔다.

후기의병은 1907년 후반부터 장기항전에 대비하여 국내외에 영구적인 의병기지의 건설을 추진하였다. 중부 이북의 의병들은 이른바 ‘북계책北計策 혹은 北邊之計’을 추진함으로써 국외의 항쟁근거지를 모색하였다. 중부 이북 지역과 경북의 일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은 의병의 기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간도나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특히 유인석과 홍범도 계열의 의병부대가 적극적이었는데, 이들의 노력에 의해 건설된 의병기지는 훗날 독립군기지로 전환되었다.

남부지역의 의병들은 지리산智異山을 의병의 기지로 주목하였다. 이러한 계획은 전라도에서 활동하던 고광순 의병장이 적극 추진하였다. 그는 1907년 9월에 지리산의 피아골을 의병의 근거지로 삼아 장기항전을 준비하였다. 이른바 ‘축예지계蓄銳之計’라 하여 지리산의 깊은 골짜기에다 장기항전의 근거지를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일제는 이들이, “지리산중 인적이 없는 곳에 가옥을 구축하고 장벽을 설치하고 방책防柵을 만들고 주식을 저축하여 영구지책을 강구”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처럼 지리산은 후기의병의 장기항전에 적합한 근거지로 인식되었다.

후기의병전쟁이 크게 격화되자, 친일정부와 일제 통감부는 다양한 의병진압 방법을 동원하였다. 먼저 정부에서는 첫째로 선유사宣諭使와 선유위원宣諭委員을 파견하여 의병의 해산과 귀순을 적극 종용하였다. 1907

년 12월에 「귀순자조례歸順者條例」를 공포하여 일제의 군경기관을 비롯한 행정기관과 선유사와 선유위원 등이 귀순자를 받아들였다. 둘째 체포된 의병들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단순가담자라 하더라도 2~3년의 유배형에 처해졌으며, 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은 폭동죄와 내란죄를 적용하여 사형이나 10년 이상의 유배형을 받았다. 의병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중형을 부과한 것이라 하겠다. 한편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는 일본 헌병대의 후원 하에 정찰대를 운용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또한 일본 군경의 비호아래 전국의 군·면 단위까지 조직된 자위단自衛團의 결성과정과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런 때문에 일진회는 의병의 주된 공격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모두 동원하였다. 그들은 먼저 한국의 군사적 기반을 무력화시켰다. 예컨대 1907년 8월의 군대해산, 9월의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 11월의 포군砲軍 혁파 등이 그것이다. 그후 그들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였는데, 수비대와 헌병대를 비롯한 특설순사대·변장대 등으로 이른바 연합 토벌대를 편성하여 의병진압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밀정이나 정탐을 고용하거나 정찰대를 조직하여 의병에 관한 제반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렇지만 전라도 의병의 항일투쟁은 그칠 줄 몰랐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일제는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南韓暴徒大討伐作戰, 1909.9~10’이라는 전례없는 대규모 군사작전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후기의병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전라도 의병은 처참한 희생을 치르며 종식되었다. 이때 약 500명의 의병이 전사하고, 약 3천명의 의병이 체포되거나 투항하였다. 따라서 이 사건을 ‘1909년 호남의병대학살사건’으로 불러야 마땅하다.

한편 후기의병항쟁은 경술국치 이후까지 주로 황해·평남·강원도의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채응언·강기동·김정환·

이진룡·한정만 등이 주도하였다. 하지만 국내 활동이 더 이상 어렵게 되자, 이들은 국외로 망명하였다. 이진룡과 조맹선은 국외로 망명하였고, 강기동은 연해주로 가려다 원산에서 체포되었으며, 채응언은 투쟁을 계속하다가 1915년 7월에 체포되었다. 이로써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은 거의 종식되었으며, 국외로 이동한 의병들은 독립운동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면 후기의병전쟁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는 무엇인지 짚어보고자 한다. 첫째, 한말 의병은 왜란과 호란 당시 일어난 의병에서 정신적·역사적 연원을 찾았다. 예컨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켰던 고경명 의병장의 12대손인 고광순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며, 후기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의 상당수가 왜란이나 호란에 참여한 의병의 후예로서 의병에 투신한 점을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둘째, 후기의병의 강력한 반일투쟁은 일제의 식민화정책을 지연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일제는 1909년 후반 경 조선을 강점하려 하였으나, 후기의병의 투쟁이 장기화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일제는 대규모의 군대를 투입하여 후기의병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이후에야 조선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다.

셋째, 국내외에 항일운동기지 건설의 기초를 닦는데 공헌하였다. 후기의병은 장기항전의 기반을 지리산과 같은 산악지대뿐만 아니라 연해주와 간도에 구축하였다. 이는 후기의병의 활동목표와 지향성이 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음을 의미한다.

끝으로 후기의병의 성격은 반침략적 민족운동이라 할 수 있다. 민중운동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註3) 단순히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저항하는 의병활동을 민중운동으로 보기에는 설득력이 다소 미흡하

다. 이를 부르주아민족운동으로 규정하기도 하나, 註4) 의병항쟁을 주도한 계층이나 계급적 시각보다는 일본 제국주의에 투쟁한 반제투쟁을 강조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후기의병의 성격을 반침략민족운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국제적인 고립과 전국 단위의 통합단체를 결성하지 못한 채 지역별로 투쟁함으로써 일제의 압도적인 무력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후기의병전쟁은 민족해방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다하였다.

[註 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295~296쪽. ☞

[註 2] 성대경, 「정미의병의 역사적 성격」, 『대동문화연구』 29,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195~199쪽. ☞

[註 3] 홍순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 8~13·333~334쪽. ☞

[註 4] 오길보, 「19세기말 ~20세기초 반일의병투쟁의 성격」, 『력사과학』 6, 1966, 16쪽 ; 강재언, 「반일의병운동의 역사적 전개」,『조선근대사연구』, 1970 ; 강재언, 『한국근대사연구』, 342쪽. ☞


참고문헌

1. 자료

『구한국관보』, 『대한매일신보』(국한문판, 한글판),『황성신문』, 『경향신문』, 

『신한민보』, 『독립신문(상해판)』. 

『竹峰靑峰事蹟』(筆寫本, 1940,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觀察使會議』(국가기록원 소장, 경무 88~9, 1908). 

『暴徒에 관한 編冊』(1907~1910). 

『全羅北道宣諭日記奎章』(奎章閣 소장, 규17263, 1908). 

국사편찬위원회,『각사등록』21, 1986. 

국사편찬위원회,『통감부문서』1~10, 1998~2000.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자료 8~19, 1979~1990. 

김정명 편,『조선독립운동』Ⅰ, 원서방, 1967. 

김정명,『조선주차군역사』, 여강출판사, 1986. 

김정주 편,『조선통치사료』4, 한국사료연구소, 197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3, 1970~197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별집 1』, 1974. 

뒤바보, 「의병전」,『독립신문』, 상해, 1920. 

박은식,『한국독립운동지혈사』, 유신사, 1920. 

송상도,『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71. 

趙熙濟,『念齋野錄』, 1934.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말의병전쟁자료집-폭도격문-』, 선인, 2000. 

황현,『매천야록』, 국사편찬위원회, 1955.

내부 경무국,『暴徒史編輯資料』, 1909. 

朝鮮駐箚軍司令部,『朝鮮暴徒討伐誌』, 1913. 

전라남도 경무과(이일룡 역),『전남폭도사』, 전남일보인서관, 1977. 

F. A. McKenzie(이광린 역),『한국의 독립운동』, 일조각, 1969. 

F. A. McKenzie(신복룡 역),『대한제국의 비극』, 집문당, 1999.

2. 단행본

고영진·홍영기 공저, 『의향의 고장, 담양』, 담양군, 2004. 

구완회,『한말의 제천의병』, 집문당, 1997. 

구완회,『한말 제천의병 연구』, 선인, 2005.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1, 1965.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43, 1999. 

권영배,『격문류를 통해 본 구한말 의병항쟁의 성격』, 경북대박사학위논문, 1995. 

김순덕,『경기지방 의병운동 연구(1904~1911)』, 한양대박사학위논문, 2002. 

김성진,『항일의병장 문태서연구』, 함양문화원, 1999. 

김의환,『의병운동사-한말을 중심으로-』, 박영사, 1974. 

김의환,『항일의병장열전』, 정음사, 1975. 

김호성,『한말 의병운동사 연구』, 고려원, 1987. 

김희곤,『신돌석 ; 백년만의 귀향』, 푸른역사, 2001. 

김희곤 외,『영덕의 독립운동사』, 성심, 2003. 

김희곤 외,『영양의 독립운동사』, 영양문화원, 2006. 

김희곤,『안동사람들의 항일투쟁』, 지식산업사, 200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1, 1970. 

민족문화협회 편찬실,『강진원의병장약전』, 횃불사, 1981.

박민영,『대한제국기 의병연구』, 한울, 1998. 

박성수,『독립운동사연구』, 창작과 비평사, 1980.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편,『경북의병사』, 1990. 

오길보,『조선근대반일의병운동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8. 

오영섭,『고종황제와 한말의병』, 선인, 2007. 

외솔회 편,『나라사랑』27, 1977. 

윤병석,『한말 의병장 열전』, 독립기념관, 1991. 

장세윤,『홍범도의 생애와 독립전쟁』, 독립기념관, 1997. 

전북향토문화연구원,『전북의병사』하, 1992. 

전사편찬위원회,『의병항쟁사』, 1984. 

정제우,『운강 이강년 의병장』, 독립기념관, 1997. 

조동걸,『한국민족주의의 성립과 독립운동사연구』, 지식산업사, 1989. 

조동걸,『한말 의병전쟁』, 독립기념관, 1989.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의병전쟁연구』상, 지식산업사, 1990. 

홍순권,『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 서울대출판부, 1994. 

홍영기 편,『의중태산』, 죽봉김태원의병장기념사업회, 1998. 

홍영기,『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4. 

홍영기 외,『대한제국기 지방사람들』(공저), 어진이, 2006.

3. 논문

강길원, 「한말 호남의병장 정재 이석용의 항일투쟁」,『원광사학』2, 원광대, 1983. 

강길원, 「해산 전수용의 항일투쟁」,『역사학보』101, 역사학회, 1984. 

강길원, 「담산 안규홍의 항일투쟁」,『손보기박사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손보기박사정년기념 논총간행위원회, 1988.

강길원, 「성재 기삼연의 항일투쟁」,『박영석회갑기념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탐구당, 1992. 

강재언, 「반일의병운동의 역사적 전개」,『한국근대사연구』, 한울, 1982. 

강재언, 「朝鮮獨立運動の根據地問題」,『朝鮮民族運動史硏究』1, 1984. 

구완회, 「이강년 관련문헌에 대한 비판적 검토」,『제천의병100돌기념학술논문집』, 세명대 인문과학연구소, 1996. 

구완회, 「정미의병기 호좌의진의 편제와 의진 간 연합의 양상」,『한국근현대사연구』43, 한국근현대사학회, 2007. 

권구훈, 「한말 의병의 참가계층과 그 동향」,『한국독립운동사연구』5,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1. 

권대웅, 「정미의병기 경북북부지역의 의병투쟁」,『지역문화연구』6, 지역문화연구소, 2007. 

권영배, 「산남의진(1906~1908)의 조직과 활동」,『역사교육논집』16, 경북대, 1991. 

김경춘, 「기유년 일제의 남한의병대소토작전」,『소헌남도영박사고희기념 역사학논총』, 민족문화사, 1993. 

김도훈, 「한말 이은찬의 연합의병운동과 창의원수부의 활동」,『북악사론』5, 국민대, 1998. 

김상기, 「의병전쟁에 대한 연구성과와 과제」,『한국사론』25, 국사편찬위원회, 1995. 

김상기, 「한말 당진 지역 의병의 항일투쟁」,『한국근현대사연구』41, 한국근현대사학회, 2007. 

김순덕, 「경기지방 의병의 조직과 활동(1907~1911년)」,『역사연구』1, 구로역사연구소, 1992. 

김 양, 「우병렬과 이진룡의 의병운동과 항일독립운동 재조명」,『의암학연구』4, 의암학회, 2007. 

김의환, 「1909년의 항일의병부대의 항전」,『민족문화논총』8, 민족문화사, 1987.

김희곤, 「신돌석 의진의 활동과 성격」,『한국근현대사연구』19, 한국근현대사학회, 2001. 

김희곤, 「경북지역 의병 연구의 성과와 과제」,『의암학연구』4, 의암학회, 2007. 

박걸순, 「의병장 한봉수의 항일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10,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6. 

박성수, 「1907~10년간 의병전쟁에 대하여」,『한국사연구』1, 한국사연구회, 1968. 

배용일, 「최세윤 의병장고」,『사총』31, 고려대, 1987. 

배용일, 「산남의진과 제3대 최세윤 의병대장 연구」,『학산김정학박사송수기념 한국사학논총』, 한국사학논총간행위원회, 1999. 

신용하, 「홍범도 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민족운동사연구』1,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86. 

신용하, 「전국‘십삼도창의대진소’의 연합의병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1,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 

신용하, 「민긍호 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4,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신주백, 「정미의병 당시 일본군의 원주의병에 대한 탄압작전」,『의암학연구』3, 의암학회, 2006. 

오길보, 「19세기말~20세기초 반일의병투쟁의 성격」,『력사과학』6, 1966. 

오영섭, 「남북한 민족운동사 관련자료의 현황과 과제-한말 의병운동 관련자료를 중심으로-」,『한국민족운동사연구』20,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98. 

유한철, 「유인석의 의병 근거지론-1907년 이후를 중심으로-」,『한국독립운동사연구』8,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윤선자, 「임실지역과 한말 항일의병」,『역사학연구』30, 전남대 사학회, 2007. 

이구용, 「한말 의병항쟁에 대한 고찰-의병진압의 단계적 수습대책-」,『국사관논총』23, 국사편찬위원회, 1991. 

이구용, 「운강 이강년의 항일의병운동」,『강원사학』7, 강원대, 1991.

이덕주, 「한말 기독교인들의 선유활동에 관한 연구」,『한국기독교와 역사』10,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9. 

이동우, 「전북의병의 역할과 의의」,『사학연구』55 · 56, 한국사학회, 1998. 

전문진, 「한말 이강년 의병부대의 조직과 활동」,『부대사학』19, 부산대, 1995. 

정제우, 「한말 황해도지역 의병의 항전」,『한국독립운동사연구』7,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3. 

정제우, 「이진룡의병부대의 항일무장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8,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조동걸, 「호남의병의 특징과 역사적 의미」,『호남문화연구』26,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 1998. 

최근무, 「의병대장 김동신에 관한 연구-1906.1.~1908.5간의 의병활동을 중심으로-」,『논문집』18, 전북대, 1982. 

최취수, 「1910년 전후 강화지역 의병운동의 성격」,『한국민족운동사연구』2,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88. 

홍순권, 「1909년 가을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에 대하여」,『고고역사학지』9, 동아대박물관, 1993. 

홍순권, 「의병학살의 참상과‘남한대토벌’」,『역사비평』45, 역사비평사, 1998. 

홍순권, 「한말 경남 서부지역의 의병활동」,『지역사회연구』5, 한국지역사회학회, 1997. 

홍영기, 「안규홍 의병의 조직과 그 활동-구한말 호남의병의 일례-」,『한국학보』겨울호, 일지사, 1987. 

홍영기, 「구한말 김동신 의병에 대한 일고찰」,『한국학보』가을호, 일지사, 1989. 

홍영기, 「구한말 심남일 의병의 조직과 그 활동」,『동아연구』17, 서강대 동아연구소, 1989. 

홍영기, 「한말 호남의병의 특성과 일제의 대응」,『전남사학』10, 전남대, 1996. 

홍영기, 「채응언 의병장의 생애와 활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26,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6.

홍영기, 「강진원 의병장의 생애와 활동」,『남도문화연구』12, 순천대,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