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조선총독의 권한과 일제강점 초기 조선총독, 조선총독의 식민통치와 통치기구-제4권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

몽유도원 2013. 1. 18. 13:48

제1장 조선총독의 식민통치와 통치기구


조선총독의 권한과 일제강점 초기 조선총독

일제의 식민통치론 -‘일선동조론’·‘문명개화론’-

식민 통치기구와 행정 제도의 변화

중추원관제


1. 조선총독의 권한과 일제강점 초기 조선총독


1. 조선총독의 권한

1910년대의 조선총독은 일본 천황에 의해 칙임되어 그 위임의 범위 내에서 조선의 방비를 위한 군사권을 행사하면서 내각 총리대신을 경유하여 조선에서 행정권·입법권·사법권을 행사하는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었다.

1910년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본은 같은 해 10월 1일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식민지통치체제를 확립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통감의 지위를 나름대로 바라고 있었던 일본 군부는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통감으로 임명되면서 문관직文官職인 통감에게 한국주둔일본군의 지휘권을 양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쓴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註1) 이에 대한 일본 군부의 집요한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 조선의 식민지화와 조선통치기구에서의 군부의 위상의 확보라고 볼 수 있다.

같은 해 9월 30일자로 공포된 ‘조선총독부관제’ 註2)에는 ‘조선총독은 친임관親任官, 천황이 직접 임명하는 관리으로서 육해군 대장으로 하고, 천황에 직접 예속하고 위임의 범위 내에서 조선에서 일본 육·해군을 통솔하고, 제반의 정무를 통괄하고, 내각총리대신을 거쳐 상주를 행하고 재가를 받는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즉 조선총독은 일본 내에서도 없는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며 식민지에 법률을 대신하는 ‘제령制令’을 발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등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강력한 대권을 한손에 장악하는 식민지 최고의 권력자이기도 하였다. 즉 조선총독은 천황의 친임관으로서 천황에게 직접 예속되는 독립된 기관조선총독부의 책임자로서 일본 수상 및 각 대신들과 동격의 지위에 해당되었다. 조선총독에게는 특별히 정해진 임기가 없었고, 일본 정부인 내각의 간섭을 받지 않는 특이한 기관으로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1945년 일본의 패망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는 변함이 없었다.

그외에도 1910년의 조선총독부관제에 의하면 조선총독은 1년 이하의 징역 혹은 금고·구류나 2천원 이하의 벌금 또는 과료를 부과할 수 있는 벌칙부과권이 인정되어 총독의 명령이 곧 법률을 대신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총독에게는 소관 관청의 명령 또는 처분을 취소하거나 정지시킬 수 있는 권리, 조선총독부 관리 중에 주임관에 대한 인사제청권, 판임관 이하에 대한 인사권을 전행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조선총독은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 천황을 대리하는 존재로서 천황 이외에는 간섭을 받지 않는 실질적인 식민지조선의 절대적인 왕과 같은 존재였다고 하는 평가도 내릴 수 있다.

또 조선총독은 현역 육·해군 대장 중에서 임명한다고 규정되어 있는데 이는 문관직행정관인 총독에 무관을 임명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조선총독은 일본 군부, 그중에서도 당시 산현유붕山縣有朋이 중심이었던 일본 육군이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조선에서의 식민지통치기구의 정비에 착수하게 되었다. 전부 9대 8명의 조선총독 중에 7명이 육군 대장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조선 통치에 일본 육군이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가를 말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역대 조선총독의 명단과 주요 경력 등을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표1〉역대 조선총독 일람

역대성명취임년월일비고
1(겸)사내정의1910년 10월 1일자작, 백작, 육군대장, 육군대신
사내정의1911년 8월 30일백작, 육군대장, 원수, 수상
2장곡천호도1916년 10월16일백작, 원수, 육군대장
3재등실(齋藤實)1919년 8월 12일남작, 자작, 해군대장, 수상
(임) 우원일성(宇垣一成)1927년 4월 15일(육군대장)
4산리반조(山梨半造)1927년 12월10일육군대장
5재등실1929년 8월 17일자작, 해군대장, 수상
6우원일성(宇垣一成)1931년 6월 17일육군대장
7남차랑(南次郞)1936년 8월 5일육군대장
8소기국소(小磯國昭)1942년 5월 29일육군대장, 수상
9아부신행(阿部信行)1944년 7월 24일육군대장, 수상

비고 : (겸)은 겸임, (임) 임시를 의미함.


이들 역대 총독 중에서 1910년대의 조선총독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다.


2. 일제강점 초기 조선총독


1) 무단통치의 초대 총독 사내정의

군인·정치가·원수·육군대장·조선총독·내각총리대신 등은 사내정의1852~1919 이력에 붙는 수식어이다. 註3) 이력 그대로 사내정의는 군인으로서 또 정치가로서 최고의 지위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그는 장주번長州藩의 하급무사 우전宇田 집안의 3남으로 지금의 산구山口시에서 태어났고 나중에 외가인 사내 집안의 양자가 되었다. 1865년에 장주번의 제대諸隊에 들어갔으며, 명치유신 직후 내전인 무진戊辰전쟁에 종군하였고 1869년에 육군소위로 임관하였다. 1877년 서남전쟁에서는 총상을 입고 오른팔을 못 쓰게 되었고 이후 프랑스에 군사 유학을 경험한 다음 육군 내에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이는 그의 출신 지역이 명치유신을 주도했던 장주번벌長州藩閥 그룹이었고, 그가 육군의 장주번 직계의 주류에 위치하였기 때문이었다.

1887년 육사교장을 지내고 1894년 청일전쟁에서는 병참부문을 담당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교육총감과 참모본부 차장을 거쳐 1900년 의화단사건에서는 구미의 연합국회의에 출석하여 작전계획을 입안하였고 1902년 제1차 계태랑桂太郞내각에서 육군대신이 되어 교육총감도 겸임하면서 러일전쟁을 지휘하였다. 1906년 육군대장이 되고 전쟁에서의 공훈을 인정받아 자작子爵을 받고 화족華族, 귀족이 되었다. 장기간 육상陸相의 지위에 있으면서 융마薩摩·장주 번벌정권의 한 축인 장주벌 육군세력의 후계자로서 지위를 확고히 하기에 이른다.


사내정의(초대)


1910년 5월에는 육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한국통감의 지위도 겸임하여 한국병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910년 8월 한국병합 이후에는 초대 총독이 되어 식민지조선통치의 책임자로 변신하였고 이른바 ‘무단통치’, ‘헌병통치’를 실시하였다. 1911년 한국병합의 공로로 백작으로 승작되었으며 1916년에는 원수元帥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1916년 10월에는 천황으로부터 조각組閣의 대명을 받아 정당세력을 무시하고 관료중심의 ‘거국일치’내각을 수립하였다. 당시는 구미를 중심으로 바야흐로 제1차 세계대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시기였고, 일본에서도 대정大正 데모크라시시기의 분위기는 정당내각의 출현과 보통선거제에 대한 갈망이 분출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조선에서 철권통치를 경험한 번벌정권의 후계자인 사내정의는 정당의 연립내각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철저하게 정당을 배제시킨 내각을 조각하였고 수야연태랑水野鍊太郞·아옥수웅兒玉秀雄 등 조선총독부 시절의 수하들을 내각 대신으로 기용하였다. 수상 취임 이후 그는 중국의 단기서段祺瑞 군벌정권을 지지하여 2억4천여 만 엔 차관西原借款을 공여하여 중국에 대한 발언권을 강화하고, 구미 열강의 공백을 틈타 남경의 혁명세력에 대한 억압과 중국에서 일본의 왕성한 이권 확대를 꾀하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발생하자 이듬해인 1918년에는 러시아혁명 간섭전쟁시베리아 출병에 적극적으로 나서 가장 많은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로 인해 발생한 일본 국내의 전국적 봉기사건인 ‘쌀소동’에 대해서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군대를 동원한 강제 진압도 불사하였다.

조선에서 경험을 통해 정치가로 변신한 군부 강경파의 주류다운 강경일변도의 ‘군인정치가’였다고 하겠다. 결과적으로 ‘쌀소동’의 책임을 지고 1918년 9월에 내각 총사직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듬해인 1919년 11월에 68세로 병사하였다.

초대조선 총독으로 재임 중에는 이른바 ‘조선총독암살 미수사건’을 날조하여 신민회新民會를 비롯한 기독교계의 운동가 및 조선의 국권회복, 독립운동사상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군인으로서의 이력을 보면 제1선 지휘관으로서의 경력은 일천하고 주로 군정軍政, 교육부문을 담당하였고 산현유붕-계태랑桂太郞의 맥을 잇는 장주군벌의 거두巨頭로서 전형적인 군인정치가의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의외로 성격도 아주 꼼꼼한 관료형 스타일의 군인이었다고 전해진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일본 육군의 서열 1위였던 원수로 육군대장인 사내수일寺內壽一은 그의 장남이다.


2) ‘한국보호국화’에 앞장선 2대 총독 장곡천호도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1850~1924는 1850년 장주번의 지번支藩인 암국岩國번의 무사인 장곡천 가에서 태어났다. 註4) 어린 나이에 장주번의 정의대精義隊에 들어갔고 1868년의 무진전쟁에서는 소대장으로 참전하였다. 1870년에는 대판大阪 병학료兵學寮, 사관학교의 전신에 들어갔고 1871년에 육군대위로 임관되었다. 2년 뒤에는 연대장이 되면서 중좌中佐, 중령에 해당로 승진하였고 1877년 서남전쟁에도 참전하였다. 1886년에 육군 소장이 되었고 보병 12여단장으로 10년간 재임하였다. 청일전쟁에도 출전하여 그 전공으로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장곡천호도(2대)


1896년에 중장으로 승진하여 제3사단장이 되었다. 근위近衛사단장을 거쳐 러일전쟁에 출전하였고 1904년 6월에는 대장으로 승진하여 9월에는 한국주차군사령관이 되었다.

위의 이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장곡천호도는 철저히 야전으로만 돈 전형적인 야전군인이었다. 정치와는 무관한 듯이 보였지만 일본 군부는 장주의 직계 장군인 장곡천호도를 그냥 버려두지 않고 러일전쟁기에 대장으로 승진시켜 한국에 배치함으로서 한국보호국화 과정에서 외무성을 견제하며 주도권을 장악하였던 것이다.

러일전쟁 후 자작으로 승작하였고, 1912년에서 1915년까지 참모총장을 지냈다. 참모총장 재임시 조선에 상주시킬 ‘2개 사단 증설문제’로 육군대신이 단독 사임한다든지, 육군대신 현역무관제가 폐지되는 것을 막지 못하는 등 군 내부로부터도 무능하다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특히 조선총독으로 재임 중에 그는 전임인 사내정의 무단통치를 그대로 연장하여 시행하였고 또 그의 재임 시에 발생한 3·1운동에 대해서도 무자비한 탄압방침으로 대처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대규모의 학살 사건을 반복해서 일으키는 등 내외의 비판을 받아 결국 총독을 사임하게 된다. 그뒤 재등실이 후임 총독이 되어 ‘문화통치’로 방침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장곡천호도는 육군 장주벌의 주류 지위를 유지하면서 1915년에 원수, 이듬해에는 백작으로 승작하는 등 군인으로서 최고지위를 누리게 된다. 1924년 75세에 병사하였다. 그는 같은 장주번 출신의 사내정의나 계태랑과는 달리 정치에는 관여하려 하지 않았고, 또 정치적 재능도 없는 순수한 군인으로 통하였다. 강직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고 하겠다.


3) 유일한 해군대장, 문화통치의 3대와 5대 총독 재등실

해군 군인이자 정치가인 재등실1858~1936은 1858년 육오陸奧에서 태어났다. 14살에 상경하여 이듬해 ‘해군병학료’해군사관학교의 전신에 들어가 교명이 바뀐 ‘해군병학교’를 졸업하였고 1882년에 해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註5) 1884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1888년까지 주미공사관 주재무관으로 근무하게 되는데 그가 최초의 미국 주재무관이었다. 귀국 후 해군 참모본부에서 주로 근무하였고 최소한의 함대근무도 경험하게 된다. 청년사관 시절부터 그의 천재적인 작전능력과 행정능력을 인정받은 미래 일본 해군의 주역이었다.

1893년에 소좌가 되었고 청일전쟁 시에는 천황의 시종무관으로 근무하였고 1897년 12월에는 한 달 사이에 중좌와 대좌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불과 40세의 대좌 계급으로 보통은 중장보직인 해군차관이 되어 이후 7년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해군의 대확장 계획과 러일전쟁의 해군경영을 한 손에 쥐고 추진하였다. 이른바 근대 일본 해군의 젊은 천재 지략가의 등장이었다.

이후에도 해군의 요직인 군무국장·함정본부장·교육본부장을 거쳐 1900년에 소장, 1904년에 중장이 되었다. 1906년 제1차 서원사西園寺내각에서 해군대신으로 취임하여 이후 1914년까지 5번의 내각에서 해군대신으로 연속 재임하면서 러일전쟁 전후 일본 해군의 대확장계획을 주도하였다. 그 사이에 남작을 수작하였고 1912년에 대장으로 승진하였다. 1914년 해군 출신의 제1차 산본山本내각이 지멘스 사건으로 무너지자 책임을 지고 사표를 내고 현역에서 물러난다.


재등실(3·5대)


1919년 8월에는 원경原京내각의 요청을 받아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여 이른바 ‘문화통치’에 힘쓰게 된다. 3·1운동을 계기로 조선통치에서 육군의 발언권을 억제해 보려는 원경내각의 시도가 해군대장인 재등실 조선총독의 출현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대부분이 육군계통인 조선의 일본군이 해군대장의 지휘를 받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재등실은 조선에서 ‘동화정책’을 추진하려고 노력하였다. 1927년에는 제네바 해군군축회의에 전권위원으로 출석하였고 동 12월에는 총독을 사직하고 추밀고문관이 되었다. 이때부터 중앙정치에 본격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그는 조선총독 재임 시에 현역으로 복귀하였고 1915년에는 자작이 되었다. 1929년부터 약 2년간 재등실내각하에서 다시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였다. 1932년에는 5·15 쿠데타 사건으로 정당내각이 무너지는 등 정국이 경색되자 ‘중간내각’으로 재등실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른바 ‘현상유지파’노선에 따라서 만주사변 이래의 혁신 우익들의 발호를 억제하려고 노력하였다. 1934년 내각 수상 사임 후 내대신이 되어 직접 천황을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혁신 우익들로부터는 ‘현상유지파’의 총본산이라고 지탄을 받았다. 1936년 청년장교들의 쿠데타인 2·26사건이 터지면서 재등실은 동경 자택에서 청년장교들의 습격을 받아 살해당했다. 그의 나이 79세였다.

최후는 비참했지만 근대 일본 해군의 천재로 각광을 받았던 재등실은 군인·정치가로서 항상 양지만을 걸어갔던 인물이었다. 일본 정계내부에서는 육군 견제용 카드로 활용되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또한 조선총독이란 지위가 향후 일본 내각 수상으로 가는 과정이란 인식이 사내정의를 거쳐 재등실에 이르면서 보다 강력하게 부각이 되었고 최고의 군인 정치가가 거쳐야 할 코스라는 인식이 이때부터 일반화되어 갔다고도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