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정전60년,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국제평화심포지엄

몽유도원 2013. 7. 27. 14:42

정전60년,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국제평화심포지엄



원문바로가기 http://www.615tv.net/news/view.html?section=81&category=90&no=2336


특별강연-미셀 초스도프스키, 한국 민중에 대한 미국의 전쟁

 

- 7월 26일 14:10~14:40, 서울여성플라자 국제회의실

- 정전 60년 한반도 평화협정체결을 위한 국제평화심포지엄

 

 

역사적 관점에서 본 정전협정 체결일

한국전쟁 (1950 ~ 1953)

한국민에 대한 미국의 전쟁범죄

북한 : 세계안보에 위협이 되는가

트루먼 독트린

한국과 동아시아에 적용된 트루먼 독트린

지속성: 트루먼 독트린에서 신보수주의자까지

미국의 전쟁범죄와 잔혹행위

한국전쟁의 역사적 의미: 미국의 전 세계 전쟁 프로젝트

미군의 남한 점령, 동아시아의 군사화

한국의 핵 문제. 누가 누구를 위협하나?

한국의 경제적 발전

1997년 아시아의 위기

결론 : 평화를 향해

 

*강연문은 파일로 첨부합니다.

 

2013년 7월26일

통합진보당 


한국 민중에 대한 미국의 전쟁

- 평화를 위한 메시지 -



미셀 초스도프스키



주한미군의 철수와 평화협정을 향하여

한국전쟁의 정전협정 체결일을 기념하여 

201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일인 1953년 7월 27일은 한국의 국민들에게 기억에 남는 날이다. 이날은 통일과 주권을 위한 역사적 투쟁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날이다. 2013년 7월 27일 정전협정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영광이다. 평화와 통일에 관한 토론에 기여하게 될 이번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전쟁반대평화실현국민행동"측의 배려 덕분이다. 


정전협정은 교전 중인 당사자들의 협정으로 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정전협정은 전쟁의 종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1953년 정전협정에서 핵심은 전쟁의 당사자인 미국이 지난 60년 동안 북한에 대해 일관적으로 전쟁의 지속을 위협해 왔다는 것이다. 미국은 수도 없이 정전협정을 위반했다. 정전협정은 전쟁의 발판으로 남아 있다. 서방언론과 국제사회가 간과하고 있지만, 미국은 정전협정 제13조b항을 위반하면서 적극적으로 북한을 겨냥하는 핵무기를 지난 반세기 넘게 배치해왔다. 정전협정은 아직 유효하다. 미국은 아직 북한과 전쟁 중이다. 정전협정은 평화조약이 아니며, 평화협정은 체결되지 않았다. 미국은 정전협정을 사이비 유엔 위임명령 아래  한국에 37,000명의 미군을 주둔시킬 수 있는 명분으로 삼고 있다. 또한 군사적 위협을 끊임없이 지속시키는 환경을 형성하는 명분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잠재적 전쟁상태는 지난 60년간 지속되었다. 중요한 것은 주한미군이 아시아 본토에서 유일하게 영구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라는 사실이다. 이자리의 목적은 1953년 정전협정을 무효로 만들고 원대한 평화협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한미군의 신속한 철수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토대를 놓는 것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본 정전협정 체결일


정전협정 60주년은 직접적으로 한국뿐만 아니라 워싱턴의 '아시아 회귀 전략'의 부분으로서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한 미국의 위협이라는 점에서 특별히 의미가 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불법적인 점령, 미국과 나토의 리비아와 시리아에 대한 전쟁도 포함한다. 또한 이란을 겨냥한 군사적 위협, 이스라엘에 대항한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지속적인 저항,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에서 벌어지는 미국이 지원하는 전쟁과 저항과도 관련이 있다. 


1953년 정전협정은 미국이 주도한 전쟁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다. 1940년대 후반에 형성된 트루만 독트린 하에서 한국전쟁(1950-1953)은 세계적 차원의 군국주의화와 미국 주도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평화협정의 측면에서 ‘평화만들기’는 워싱턴의 ‘전쟁만들기’ 의제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워싱턴은 세계적 차원의 군사적 의제를 형성했다. 은퇴한 4성장군 웨즐리 클라크는 미국 국방부의 고위 관리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는 5년 이내에 7개의 나라들을 함락시킬 것이다. 이는 이라크부터 시작하여, 시리아, 레바논, 리비아, 소말리아, 수단 그리고 이란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은 2차대전 이후 미국에 의해 수행된 첫 번째 주요한 군사작전이었으며, 소위 냉전의 시작과 함께 발발했다. 많은 측면에서 한국전쟁은 2차대전의 연장이었는데, 2차 대전 중에 한국은 일본의 점령지에서 하루 아침에 미국의 점령지로 전락했다. 포츠담 회담(1945년 7월 ~ 8월)에서 미국과 소련은 위도 38도선을 따라 한국을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미군의 상륙 이후 한국의 해방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다. 다 알다시피 일본이 항복한 지 3주 후인 1945년 9월 8일 한국에서 미군 정부가 수립되었다. 게다가 한국에 있는 일본 관리들은 미일간의 인수인계를 보장하기 위해 하지 장군에 의해 운영되는 미군 정부를 도와주었다. 일본의 식민지 관리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한국인 경찰관들도 새로운 식민지 통치자와 한통속이 되었다. 미군 정부는 처음부터 한국인들의 임시정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승인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토지분배, 노동자의 권리보호, 최저임금법의 시행, 남북통일 등을 포함하여 주요한 사회적 개혁을 약속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비동맹노선을 채택했으며, 미국, 소련, 영국,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반면에 외국의 내정간섭에는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Hart-Landsberg, Martin (1998). Korea: Division, Reunification, &U.S. Foreign Policy. Monthly Review Press. pp. 65-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45년 9월 미군정의 군 포고령에 의해 불법화되었다. 더 이상 민주주의나, 해방, 독립이 없었다. 일본은 패배한 제국으로 다루어진 반면, 남한은 미 점령군과 군령에 의해 관리되어야 할 식민지 점령지로 규정되었다. 미국이 직접 자기 손으로 선택한 이승만이 1945년 10월 맥아더의 전용비행기로 서울에 도착했다. 


한국전쟁 (1950 ~ 1953)


한국전쟁 기간 동안 또한 그 이후 미국이 한국 국민들에게 행한 범죄는 현대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한국전쟁 중에 미국이 자행한 인간에 대한 범죄는 수년에 걸쳐 지구상의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미국의 인권침해와 학살의 전형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또한 한국전쟁은 정치적 반대론자를 목표로 한 학살로 나타났다. 이러한 학살은 인도네시아, 베트남, 아르헨티나,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한 수많은 나라에서 CIA에 의해 자행되었다. 언제나 이러한 목표 학살은 CIA에 의해 지도되거나 미국이 지원하는 괴뢰정권 혹은 군사독재정부에 의해 수행되었다. 최근에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별 학살은 미국 의회에 의해 합법화되고, "새로운 전형"이 되었다. 


한국전쟁의 절정기인 1952년 처음 출판된 스톤(I.F. Stone)의 "한국전의 숨겨진 역사(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에 따르면 전면적인 전쟁을 유발하기 위하여 미국은 북한이 위도 38선을 넘어오도록 자극하는 구실, 즉 속임수를 의도적으로 모색했다. 


“스톤의 책은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또한 미국 정부가 유엔을 조종하고 미군과 한국의 독재정부가 평화회담을 거부함으로써 전쟁을 질질 끌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Jay Hauben, Review of I.F. Stone's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OmnyNews, 2007, http://www.globalresearch.ca/the-hidden-history-of-the-korean-war/5342685) 


스톤의 설명에 따르면 맥아더 장군은 “평화를 회피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수행했다. ”미국의 전쟁공격은 “자기 방어”와 선제공격의 구실로 시작되었다. 스톤의 맥아더 장군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은 현재에도 반복되는데, 미국 대통령 오바마와 척 헤이글 국방장관 역시 “평화를 회피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수행하고 있다.” 적이 먼저 총성을 내게 하도록 유인하는 이러한 패턴은 미국의 군사 원칙으로 잘 정립되어 있다. “전쟁유발사건(War Pretext Incident)”을 만드는 것과 관련이 있다. 전쟁유발사건은 “자기방어”라는 명분으로 개입할 수 있는 구실을 침략자에게 제공한다. 이것은 1941년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격으로 나타났다. 진주만 공격은 미국 관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자극과 속임수에 의해 유발되었다. 진주만 공격은 미국의 2차 대전 개입의 명분이었다.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은 미국이 북베트남과 전쟁을 하기 위한 명분이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 의회는 존슨 대통령에게 공산주의자 북베트남과 전쟁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통킹만 결의를 채택했다.


스톤의 분석은 “한국전쟁은 북한에 의해서 시작된 정당한 이유없는 공격이었다. 한반도 전체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소련의 명령에 의해 1950년 6월 25일 시작되었다.  이 공격은 완전히 한국민과 미국 그리고 유엔을 놀라게 했다고 말하는 일반적인 주장”을 반박한다. 


그러나 그것이 놀라운 것이었나? 4개의 지점에서 70대의 탱크와 7만명의 병력이 동시에 감행한 공격이 어떻게 기습공격이 될 수 있겠는가? 


스톤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한국과 미국, 그리고 유엔의 문헌들을 수집했다. CIA 책임자, 해군 소장 힐렌로이터(Roscoe H. Hillenloetter)가 "미 정보기관은 이번 주 혹은 다음 주에 침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발언한 기록이 발견되었다.(p. 2) 스톤에 따르면, <뉴욕타임즈>의 군사평론가이자 미 국방부의 믿을만한 소식통인 볼드윈(Hanson Baldwin)이 "(미군의 문헌들은) 북의 인민군들이 6월 초순부터 위도 38선을 따라 집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p. 4)"고 보도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이틀 만에 미군이 한국에 진격하도록 결정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결정할 수 있었겠는가? 스톤은 미국정부와 미군 안에 한국에서 전쟁, 나아가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불안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보는 세력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 by I.F. Stone, book review by Jay Hauben)  


프랑스의 주간지 <Nouvel Observateur> 편집자 클로드 부르데(Claude Bourdet)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톤의 주장이 사실일 경우, 이는 전쟁사 전체에서 가장 엄청난 사기이며... 이는 악의가 없는 사기의 문제가 아니라 평화가 가능함에도 평화를 봉쇄하기 위해 속임수를 이용하는 가공스런 책략의 문제이다.” (quoted in Stephen Lendman, America's War on North Korea, Global Research, http://www.globalresearch.ca/americas-war-on-north-korea/5329374, April 1, 2013) 


미국의 유명한 작가인 레오 후버만과 폴 스위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이 38선을 무력으로 침공하여 보복할 계획으로 북을 의도적으로 자극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북은 이 덫에 걸려들었다.”(Ibid)  


1950년 6월 25일 유엔의 안보리결의 82호가 채택되자, 일본의 미군정부 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이 소위 유엔군(UNCOM)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브루스 커밍스에 의하면 한국전쟁은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에 대한 공중전과 매우 흡사했다. 그리고 종종 한국전쟁은 맥아더와 르메이(Curtis Lemay) 장군을 포함한 일본 전쟁 당시의 군 지도자에 의해 지휘되었다. 


한국민에 대한 미국의 전쟁범죄


한국전쟁 기간에 미군에 의해 광범위한 범죄가 자행되었다.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았지만, 민간인 대량 학살전략이 지배적이었다. 민간인 대량 학살전략은 2차 대전 중에 만들어졌고, 2차대전의 막바지에 미군과 영국군의 독일 도시에 대한 광범위한 기습과 폭격에 의해 실행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군사적 목표는 오히려 이러한 공격으로부터 보호되었다. 


군사적 목표에 대한 타격을 핑계로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은 비공식적인 원칙이었으며, 한국전쟁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미군 작전의 특징이 되었다. 브루스 커밍스에 의하면 1950년 8월 12일 미 공군은 625톤의 폭탄을 북한에 투하했으며, 2주 후에는 매일 폭격을 늘려서 약 800톤까지 늘렸다. 미군은 2차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 전 기간 동안 투하했던 양보다 더 많은 네이팜 등의 폭탄을 북한에 투하했다. 38선 이북의 북의 영토는 무차별적인 융단폭격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결과 78개의 도시와 수천개의 마을이 파괴되었다. 


"한국전쟁에서 지울 수 없는 점은 미국의 대공습 작전으로 북한을 폐허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화재를 일으키는 네이팜과 같은 화염폭탄을 지속적으로 대량 사용했고, 핵무기와 화학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위협까지 감행했다. 그리고 전쟁의 막바지에는 북한의 큰 댐을 파괴했다는 점이다...결과적으로 북한에 있는 거의 모든 빌딩들이 파괴되었다."(Bruce Cumings, Korea: Forgotten Nuclear Threats, 2005) 


윌리엄 딘 소장은 “자신이 본 북의 대부분의 도시와 마을은 돌무더기로 변했거나 눈 덮인 황무지로 변했다고 보고했다.”(Ibid ) 북에 대한 공습을 지휘한 르메이 장군은 뻔뻔스럽게 인정했다. "3년에 걸쳐 인구의 20%를 죽였으며,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의 모든 마을을 불에 태웠다." 브라이언 윌슨에 의하면 한국전쟁의 37개월 동안 38선 이북에서 1/3의 인구, 약 8 ~ 900만명을 잃었는데, 다른 나라와의 전쟁으로 인해 한 나라가 당한 죽음의 비율로 치면 그 유례가 없는 것이다. (See Brian Willson, Korea and the Axis of Evil, Global Research, October 2006)  


한국의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문서에 따르면 미군은 남한에서도 광범위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한국의 자료에 의하면 남한에서 한국전쟁 동안 약 백만명이 학살당했다. 


"한국전쟁 초기에 미국 관리들은 남한의 협력자들이 대량 학살하는 것을 참관하거나, 사진을 찍거나 비밀리에 보고했다. 10만명 이상의 좌익인사, 혹은 좌익 동조자들이 기소나 재판이 없이 비공개로 학살당한 것으로 믿어진다." 

(Associated Press Report, 

http://www.globalresearch.ca/us-coverup-extrajudicial-killings-in-south-korea/9518) 


2차대전 중에 영국은 0.94%, 프랑스는 1.35%, 중국은 1.89%, 미국은 0.32%의 인구를 잃었는데, 북한은 25% 이상의 인구를 잃었다.(한국전쟁 전 북한의 인구는 8-9백만명이었다. 미국 자료에 의하면 북한의 경우 1.55백만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215,000명이 전투로 죽었으며, 행방불명은 12만명, 전투 중 부상자의 인구는 30만명이 된다.- 위키디피아. 남한군의 자료에 의하면 민간인은 2.5백만명이 사망, 행방불명, 부상했으며, 그 중 990,900명이 남한 사람이다. 다른 자료는 한국전쟁에서 모든 사망자가 3.5백만명에 이른다고 보고 있다.) 



북한 : 세계안보에 위협이 되는가


지난 60년간 워싱턴은 북한의 정치적 고립을 가속화시켰다. 워싱턴은 북한의 산업기반과 농업을 포함하여 국가 전체의 경제가 불안정해지도록 했다. 워싱턴은 한반도 통일의 과정을 무자비하게 방해했다. 남한에서 미국은 정치체제 전체의 목을 지속적으로 조르고 있다. 미국은 이승만을 시작으로 미국의 이해관계를 추종하는 비민주적이며, 압제적인 정부를 승인해왔다. 남한에서 미군의 주둔은 경제와 금융 정책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미국인들은 몇 가지 중요한 의문이 생긴다. 미국의 공격으로 인구의 1/4을 잃은 나라가 어떻게 미국 본토에 위협이 될 수 있는가? 국경 바로 근처에서 37,000명의 미군과 마주하고 있는 나라가 어떻게 미국에 위협이 될 수 있는가? 한국전쟁 당시의 전쟁범죄를 고려할 때 북한의 인민들이 자신들에 대한 미국의 위협을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겠는가? 북한에는 한국전쟁 당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은 가족들이 하나도 없다. 한국전쟁은 제2차대전 직후 미국이 주도한 첫 번째 주요한 전쟁이었다. 미국과 그 동맹인 나토는 전후시대에 전 세계의 주요한 지역에서 수도 없는 전쟁과 무력개입을 해왔지만, 미국은 세계평화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여겨지고 있다. 


전쟁 프로파간다  


거짓말이 진실이 된다.

현실이 뒤집혀진다.

역사는 다시 씌어지며 북한은 위협적인 존재이다.

미국은 침략국이 아니라 공격의 “희생자”이다.


이러한 아이디어들은 전쟁 프로파간다의 부분으로서 언론에 적용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프로파간다는 남한 언론기관에 반영되었고, 남북의 분쟁과 분열을 형성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북한은 남한의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표현되었다. 

  

공포와 위협의 분위기가 압도적으로 되면서 남한 국민이 미국의 “평화를 만드는 역할(peace-making role)”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일반 대중의 눈에는 37,000명의 미군 주둔은 남한의 안보를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미군의 주둔은 북한의 공격에 대한 “남한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프로파간다 캠페인은 미국의 개입주의의 합법성을 유지할 목적으로 한국사회 내에서 분열을 만든다. 이러한 과정의 목적은 분열이다. “북한의 위협” 주장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사람들의 내면의식에서 한반도가 한 민족, 국가,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약화시킨다. 


트루먼 독트린 


트루먼 독트린을 역사적으로 보면, 2차세계대전 이후에 외교정책 자문관인 조지 케넌(George F. Kennan)이 1948년에 발표된 국무부 보고서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트루먼 독트린으로 인하여 미국의 팽창주의적 냉전의 골격이 형성되었다. 1948년 국무부 보고서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미국 외교정책의 지속성이다. 냉전 기간 동안의 “억제정책”에서 “선제적인 전쟁”까지 포함한다. 미국은 군사적 수단을 통하여 경제적 전략적인 우세를 확보하여야 한다는 것을 매우 외교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는 전세계 부의 약 50%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인구는 단지 6.3%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우리와 아시아 사람 사이에서 특히 크다. 이러한 상황에서 질투와 원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다가올 미래에 해야 할 우리의 실제적 과업은 관계의 패턴을 만드는 것이다 . 그래서 우리 국가의 안보에 대한 결정적인 장애가 없이 이런 불균형 위치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모든 감상주의와 몽상을 없애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당면 국가 목표가 있는 모든 곳에 우리는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이타주의와 세계 박애라는 사치를 오늘 제공할 수 있다고 우리 자신을 기만하지 말아야 한다. (...)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극동아시아와 관련하여 우리의 생각을 보여주었던 수많은 발상을 지금 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우리는 고매한 국제 이타주의의 호혜성과 비슷해지거나 호혜성으로 인정받으려는 염원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형제적 보호자의 위치에서 벗어나야 하고, 도덕적 이념적 충고를 제공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인권, 생활수준의 향상, 민주화 등과 같은 애매하고 비현실적인 목표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가 직접적인 권력 개념(straight power concepts)을 다루어야 할 때가 그리 멀지 않았다. 우리가 이상적인 슬로건에 의해서 방해를 덜 받을수록 더 좋다. (조지 케넌, 1948 국무부 보고)


독립적이고 영향력있는 국제기구인 UN을 계획적으로 분열시키려는 것은 1946년 UN이 시작된 이래 미국 외교정책에서 오랫동안 구상해온 의제였다. UN의 계획된 종말은 1948년에 정의된 트루먼 독트린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UN의 초창기부터, 미국은 한편으로 미국에 유리하게 UN을 통제하려고 했다. 또 한편으로는 UN시스템을 약화시키고 궁극적으로 파괴하려 했다. 조지 케넌은 “가끔 UN은 유용한 목적을 위해서 역할을 한다. 그러나 UN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대체로 문제를 만든다. 우리의 외교적 노력을 상당히 분산시키고 있다. 주요한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UN의 다수를 이용하려는 노력 속에는 종종 우리에게 언젠가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 우리측에서 볼 때 아주 신중한 연구와 예견이 필요한 상황이다.”고 말했다. 


공식적으로는 “국제사회”에 헌신한다 하더라도 미국은 대체로 UN에 립서비스만 한다. 최근에는 하나의 기구로 UN를 폄하하려고 노력해 왔다. 제1차 걸프 전쟁 이후에 UN은 대체로 거수기 역할을 해왔다. 미국의 전쟁 범죄에 대해 침묵했다. 


그리고 UN의 헌장을 위반한 영국과 미국의 침략자들을 대신하여 소위 평화유지군 활동을 실행했다. 


한국과 동아시아에 적용된 트루먼 독트린  


트루먼 독트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군사전략의 결실이다. 미국 군사전략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핵폭탄 투하로 시작되었다. 핵폭탄으로 일본은 항복했다. 

동아시아에서 트루먼 독트린은 전후 일본 점령과 남한을 포함한 일본의 식민지 인수가 포함되어 있었다.(한국은 1910년 한일 병탄늑약에 의해서 일본에 부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제국의 멸망 이후, 일본이 추구했던 “대동아시아 공동번영”의 지역에서 미국의 세력권이 구축되었다. 이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세력권에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가 포함되었다. 필리핀은 제2차세계대전 동안 일본이 점령했었고, 이후 미국이 점거했다. 태국은 제2차세계대전 동안 일본의 보호국이었고 인도네시아는 일본에 의해서 점령되었다가 1965년 수하르토 군사독재가 집권한 이후 미국의 속국이 되었다. 또한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프랑스의 전 식민지국이었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포함한 인도차이나반도까지 확대되었다. 이들은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일본군에 의해서 점령되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는 대체로 일본, 프랑스, 네덜란드 치하의 국가들에게 영향을 확고히 하면서 구축되었다.   


지속성: 트루먼 독트린에서 신보수주의자까지


부시 행정부의 신보수주의적 의제는 (초당파적인) “전후” 대외정책의 프레임워크의 절정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전후” 대외정책의 프레임워크는 현대전의 계획과 잔혹행위의 기초를 제공한다. 잔혹행위에는 민간인에 대한 금지된 무기의 포괄적인 사용, 강제수용소, 고문시설 등을 포함된다. 


한국, 베트남 그리고 아프가니스탄부터 CIA 지원의 남미와 동남아시아에서 지원한 군사쿠데타까지 모든 목적은 트루먼 독트린 아래서 처음 정형화되었듯이 미군의 주도권과 전 세계의 경제적 지배를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의미 있는 정책적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연속적으로 들어섰던 민주당과 공화당 정부들은 트루먼부터 오바마에 이르는 60년 동안 이러한 전 세계 군사적 의제들을 수행해왔다. 


미국의 전쟁범죄와 잔혹행위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범죄적인 미국의 대외정책 의제들이다. 범죄는 한 명 혹은 그 이상의 국가 지도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국가 전체 시스템과 관련돼 있다. 이것은 미국 외교정책 수립의 배후에 있는 강력한 기업의 이해, 워싱턴의 싱크탱크, 군사설비에 자금을 대는 채권자 단체뿐만 아니라 다양한 민간인과 군사기구와 관련이 있다. 


1950년 한국전쟁에서 시작해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전쟁으로 이어지는 기간은 1천만명 이상의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범죄로 점철되고 있다. 1천만명에는 가난과 기아 질병으로 죽어간 사람들이 포함되지 않는다. 전쟁범죄는 미국과 그 외교기구의 범죄화의 결과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전쟁범죄와 관련된 것만을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수준에 진행되는 의사결정권자를 포함하는 과정, 범죄 수행 명령, 그리고 확립된 가이드라인과 처리절차를 다룬다. 


부시와 오바마 행정부가 과거 미국이 지원한 역사적 범죄와 잔혹행위와 관련하여 다른 점은 강제수용소, 선별 암살, 고문시설이 이제는 전세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유지하고, 서방의 민주주의를 확산시켜 주는 합법적인 무력개입의 형태로 인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의 역사적 의미: 미국의 전 세계 전쟁 프로젝트


한국전쟁은 향후 미군의 무력개입의 장을 마련했다. 한국전쟁은 반세기에 걸친 미국 주도의 전쟁, 특수작전, 쿠데타, 비밀작전, 미국이 지원하는 반란과 체제전환 등 2차대전 이후 “미군의 로드맵”의 첫 단계였다. 


전 세계 전쟁 프로젝트는 모든 주요한 지역에서 미군의 지역 사령부에 의해 수행되었다. 주권국가를 전복하려는 CIA의 비밀작전은 물론 포함된다. 전 세계 지배 프로젝트는 트루먼 독트린에 의해 처음 수립되었다. 전 세계 지배 프로젝트는 냉전이 끝난 후 신보수주의 시대에 국방부가 미국의 '장기전'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의 시초이다.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세계 전쟁, 전 세계에 대한 점령 절차, 군사화와 기업의 팽창주의이다. 기업의 팽창주의가 동력이다. “경제적 점령”은 정보작전과 군사작전이 공조하는 지원을 통해서 가능하다. 재정과 금융의 불안정화는 주권국가를 겨냥한 경제적 전쟁의 또 하나의 메커니즘이다. 


조지 부시가 대통령선거에 나가기 전인 2000년 워싱턴의 신보주의 싱크탱크인 ‘신 미국 세기 프로젝트(Project for a New American Century, PNAC)’는 미군의 4가지 중요한 임무를 만들었다. 


o 미국 본토를 방어하는 것 

o 동시다발적인 권역별 전쟁에서 싸우고 결정적 승리를 하는 것 

o 중요 지역에서 안보환경을 형성하는 것과 관련하여 “경찰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 

o 군사혁신을 촉진하기 위해 미국의 군사력을 변환하는 것 


부시 대통령의 국방부 차관 폴 월포위츠, 국방장관 도날드 럼스펠드, 부통령 딕  체니는 2000년 대통령 선거 전에 신 미국 세기 프로젝트의 청사진을 요구했다. 신 미국 세기 프로젝트는 미국의 세계지배전략 로드맵의 윤곽을 그렸다. 신 미국 세기 프로젝트는 “중앙아시아와 중동에 걸쳐 전진기지의 배치를 요구하고 있으며, 잠재적인 경쟁자와 미국의 자유시장경제를 대체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질식시켜 전 세계에서 미국의 경제적 지배를 보장하는” 내용이다. 세계를 상대로 하는 전쟁과 달리, 소위 “경찰 역할”은 징벌적인 폭격이나 특공대 파견 등을 포함한 다양한 군사적 개입이 가능함을 암시한다. 이러한 경찰 역할은 이란에 대한 미국의 전쟁계획의 첫 단계에서 숙고되었다. 경찰 역할은 세계를 상대로 하는 전쟁에 대한 “대안”으로 적용될 수 있는 궁여지책(ad hoc)의 군사적 개입이다. 신 미국 세기 프로젝트는 허풍이 아니다. 이것의 목표는 매우 군사적이다. 그 문서에는 평화유지나 민주주의 확산에 대한 미국의 역할이 전혀 논의되지 않고 있다. (Rebuilding America`s Defenses, Strategy, Forces and Resources for a New Century, 

The PNAC website :  http://www.newamericancentury.org



미군의 남한 점령, 동아시아의 군사화


워싱턴은 궁극적으로 북한을 고립시키기 위해 남북한 사이뿐만 아니라, 북중 사이의 정치적 분열을 만드는데 혈안이 돼 있다. 남한의 미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적 봉쇄의 일환으로 사용되고 있다. 워싱턴은 이웃국가 간의 불화를 유발하는 전쟁뿐만 아니라 정치적 분열을 형성하려고 한다.(1980년대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 인도와 파키스탄의 대치 등이 그 예이다.) 


<유엔의 지휘권 위임>


허위의 유엔 위임 아래 남한의 미군은 60년 동안 건재하고 있다. 하지만 유엔은 이러한 지휘권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적이 없다. 이러한 위임은 유엔 안보리의 결정이 없이 미국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1994년 유엔 사무총장, 부트로스 갈리는 북한의 외무장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안보리는 안보리 지휘하의 기구로서 통합사령부를 만들지 않았고, 단지 1950년에 미국 지휘 하에 그러한 사령부를 둘 것을 권유했을 뿐이다."고 밝혔다. 


<한미연합사령부>


남한은 여전히 미군의 군사적 점령 하에 있다. 한국전쟁과 정전협정 이후 한국군은 소위 유엔사령부의 관할 아래에 배치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한국군의 모든 부대가 사실상 미군사령부의 통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78년 한국과 미국의 양국 연합군 사령부(CFC)가 창설되었으며, 이는 미군 대장에 의해 지휘되었다. 이것은 소위 유엔사령부와 관련하여 실질적인 변화였다. 오늘날까지 한국군은 미군 대장의 통제를 받는다. 한미연합사령부는 원래 미국이 전시작전통제권을 남한에 반환하는 2015년에 해체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일정은  한국의 국방을 약화시킨다는 우려가 한국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북한으로부터 호전적인 언사가 증가되고 있을 때에 나타났다. 박근혜 대통령은 브리핑 자리에서 군 장교들에게 북한의 도발에 대해 “즉각적이고, 강력한 반격”을 주문했다. 박 대통령은 북한의 위협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하면서, “만약 우리 국민과 국가에 대한 도발이 일어나면, 군은 어떠한 정치적 고려 없이 즉각적이고 강한 대응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Chosun Ibo, April 13, 2013)


<주한미군(USFK)>


주한미군사령부는 1957년 설치되었다. 주한미군은 미태평양사령부에 배속돼 있는데, 이는 주한미군이 러시아와 중국을 포함하여 제3국을 공격하기 위하여 배치될 수 있다는 점을 뜻한다. 주한미군에는 공식적으로 28,500명의 미군이 속해 있다. 2013년 4월 현재 미국방부의 확인에 따르면 주한미군에 37,000명의 미군이 배속돼 있다. 주한미군은 1978년 창설된 연합사령부와 구별된다. 연합사령부는 미군의 대장이 사령관, 한국군의 대장이 부사령관으로 있다. (참조 United States Forces Korea | Mission of the ROK/US Combined Forces Command) 현재 주한미군 사령관은 제임스 트루먼 대장이다. (참고 United States Forces Korea | USFK Leadership) 그는 연합사령부와 유엔사령부의 사령관을 겸하고 있다. 이론상 한국군 사령관 산하에 있는 한국의 정규부대(육해공군)는 정규군이 60만명이고 예비군은 2백만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연합사령부의 규정에 따르면, 이들은 실질적으로는 미군 대장이 지휘하는 연합사령부의 산하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37,000명의 주한미군 이외에도 미군사령부는 모든 한국부대를 통제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국군은 자신의 부대를 통제할 수 없고, 외국군대 즉 외국의 이해에 봉사해야 한다. 해마다 한미 양군은 북한을 겨냥해서 전쟁훈련을 한다. 이 전쟁훈련은 북한에 대한 재래식 전쟁과 핵전쟁을 재현하며, 정전협정일에 맞춰 7월 하순에 종종 진행된다. 

또한 한국의 서해안과 제주에 배치된 미군기지는 중국에 대한 봉쇄의 일환이다. 연합사령부 산하 한미 양군의 협정의 관점에서 보면 미군 사령부 휘하에 있는 한국군은 주한미군과 미태평양사령부가 공동작전을 펴는 다른 지역의 작전에 배치될 수 있다. 미국 무기산업에게 한국은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는 노다지 지역이다.  지난 4년 동안 한국은 전 세계에서 무기 수입국 4위를 차지했으며, 한국 무기 구매의 77%가 미국 무기이다. 이러한  무기 수입 비용은 한국의 납세자들이 지불하지만, 실제로 무기는 연합사령부의 통제 아래에 있다. 


최근 상황을 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을 시사했다. "군 통수권자로서 나는 북한에 의한 돌발적이며 기습적인 도발에 있어 군의 판단을 신뢰한다. 북한과 직접적으로 대결해야 하는 상대는 바로 군이기 때문이다. 런던 통신에 따르면 "주저하지 말고 국민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의무를 수행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국방장관 역시 적극적인 북한에 대한 억제를 약속했고, 대한민국이 북한의 핵무기나 미사일 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을 고려할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는 듯했다. (U.S.- S. Korea Military Gameplan | Flashpoints | The Diplomat, April 4, 2013) 


한국의 핵 문제. 누가 누구를 위협하나?


<역사적 배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의 초기 맨하탄 프로젝트 시절의 핵무기 독트린은 “억제”와 “상호확증 파괴(MAD)”라는 냉전의 원칙에 근거하지 않았다. 한국과 관련한 미국의 핵무기 원칙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핵공격 이후에 수립되었다. 그런데 시민이 핵공격의 직접적인 대상이 되었다. 수십만명의 사망자를 낳은 “대량 사상자 프로그램”을 촉발한 것에 대한 책임은 바로 이 전략적 목적 때문이다. 목적은 군사적 점령의 수단으로서 전국 전체를 공포에 빠지게 하는 것이었다. 군사적 공격대상은 주요한 목적이 아니었다. 히로시마는 “군사기지”이고, 시민은 그 타격대상이 아니다라고 공식적으로는 말했지만, 시민 대량 살상에 대해서는 “부수적 피해”라는 개념으로 정당화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우리는 역사상 가장 무서운 폭탄을 발견했다, 이 무기는 일본에 사용할 예정이다.. 우리는 이 폭탄을 군사적 목표물과 군인, 선원들이 공격목표가 되도록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과 아이들은 타격목표는 아니다. 비록 일본인이 야만스럽고, 잔인하고, 무자비하고, 광적이지만, 우리는 세계 공동의 복지를 위한 지도자로서 이 폭탄을 고대의 수도나 현대의 수도에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타격목표는 순전히 군사적인 것이다, 이 폭탄은 지금까지 개발한 것 중 가장 무서운 것이지만 가장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President Harry S. Truman, Diary, July 25, 1945) "세계는 첫 번째 원자핵폭탄이 히로시마의 군 기지에 떨어졌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능한 민간인을 죽이는 것을 회피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President Harry S. Truman in a radio speech to the Nation, August 9, 1945) [참고 : 8월 6일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폭탄이, 두 번째는 나가사키에 트루먼이 라디오로 연설한 날인 8월 9일 떨어졌다.] 미 정부와 군 상층부에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히로시마가 군 기지였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트루먼은 자신과 미국 여론에 거짓말을 했다. 오늘날 일본에 대한 핵무기의 사용은 전쟁을 끝내고, 궁극적으로 “인명을 구하기 위하여” 불가피한 희생이었다고 정당화되고 있다. 


<한국에 적용된 히로시마 독트린: 남한에 비축되고 배치된 미국 핵무기>


한국전쟁 당시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 사용을 고려했다. 당시 소련이 한국전쟁 발발 10개월 전에 첫 번째 핵무기 실험을 했다. 소련의 핵무기 보유는 필연적으로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억제시켰다. 

한국전쟁 직후 북한과 관련하여 미국의 핵무기 정책에 전환이 일어났다. 중국과 소련 등 냉전 시기 핵 보유국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가정 아래, 미국은 북에 대한 핵무기 선제공격을 고려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미국은 핵탄두를 남한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1956년 초에 의정부와 안양이 핵무기 배치 지역으로 검토되었다. 핵무기의 남한 배치라는 결정은 전쟁의 당사자에게 새로운 무기의 한반도로의 반입을 금지하고 있는 정전협정 제13조 d항에 대한 뻔뻔스런 위반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4년 6개월이 지난 1958년 1월부터 5개의 핵무기시스템을 갖춘 핵무기가 실제로 남한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5개의 시스템은 어네스트 존 지대지미사일, 메토도 쿠르즈 미사일, 핵지뢰, 280mm포와 203mm 곡사포이다." (참고 The nuclear information project: US Nuclear Weapons in Korea) 


또한 데이비 크로켓 발사체가 1962년 7월과 1968년 6월 사이에 한국에 배치되었다. 이는 단지 34.5 kg (76lbs)의 무게를 지니며, 핵탄두는 0.25킬로톤의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다. 1958년 3월에 전투기용 핵폭탄이 들어왔다. 이어서 1960년 7월과 1963년 9월 사이에 3개의 지대지 미사일시스템이 반입되었다. (Lacrosse, Davy Crockett, and Sergeant) 대공 겸 지대지 미사일인 나이키 허큘러스(Nike Hercules)가 1961년 1월에 도착했고, 155mm 곡사포가 1964년 10월에 반입되었다. 핵무기 비축의 절정기에는 약 950개의 핵탄두가 남한에 배치되었다. 4개의 종류만이 단지 수년 동안 남한에 배치된 반면, 나머지는 수십년 동안 배치되었다. 8인치 곡사포는 1991년 하반기까지 유지되었는데, 미국이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한 기간 33년 동안 유지되었던 유일한 핵무기이다. 1991년 마지막까지 배치되어 있던 핵무기들은 공중으로 투하되는 폭탄과 (수년 동안 다양한 종류의 폭탄이 배치되었는데, 마지막은  B61이었다.) 155mm 곡사포였다. 남한의 핵무기는 북한뿐만 아니라 중국과 소련도 겨냥했다. 


<남한의 핵무기 프로그램>


미국의 핵탄두 배치와 병행해서, 한국은 1970년 초반 자신의 핵무기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공식적인 설명에 따르면 미국은 박정희 정권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1975년 4월 핵확산방지조약에 가입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이때는 남한이 핵물질을 생산하기 전이었다. (Daniel A. Pinkston, "South Korea's Nuclear Experiments," CNS Research Story, 9 November 2004, http://cns.miis.edu.) 그러나 사실은 남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은 북한을 위협하고자 미국의 핵무기 배치의 일환으로 미국의 감독 아래 1970년대 초반 시작되었다. 게다가 이 프로그램이 1978년 공식적으로 종료된 후, 미국은 한국군의 핵무기 사용을 훈련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핵 과학기술을 촉진시켰다. 명심할 것은 한미연합사령부 협정에 따라 모든 한국군 부대는 미군 대장에 의해 지휘되는 연합사령부 관할에 있다는 점이다. 그 의미는 한국군에 의해 설치된 군 시설이나 기지는 모두 한미 양군의 공동시설이라는 점이다. 한국에는 모두 27개의 미군 시설이 있다. (참고 List of United States Army installations in South Korea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남한에서 핵무기의 공식적인 철거>


군 자료에 의하면 남한에서 핵무기의 철거는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했다. 오산 공군기지의 핵무기 저장고는 1977년 말에 폐쇄되었다. 핵무기의 감소는 계속되었고, 남한에서 1976년 약 540개의 핵무기가 1985년에는 150개로 줄어들었다. 1991년 미 대통령 부시의 핵무기 제안(Presidential Nuclear Initiative)이 발표되기 전까지 약 100개의 탄두가 남아 있었지만, 모두가 1991년 말까지 철수되었다. (The nuclear information project: withdrawal of US nuclear weapons from South Korea) 공식발표에 의하면 남한에서 핵무기 철거 시기는 1991년 12월이다. 


<미국 본토와 전략 잠수함에서 북한에 대한 핵 공격 계획>


남한에서 핵무기의 철수가 북한에 대한 핵공격 위협을 완화시키지 않았다. 핵탄두의 배치 전략과 관련해서는 미국 군전략의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 북한의 주요 도시는 한국의 군사기지가 아니라 미국 본토와 전략잠수함에 배치된 핵무기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1991년 12월 한국에서 핵무기가 철수된 후, 세이머존슨 공군기지의 제4전투비행단이 북한에 대한 핵무기 공격임무를 맡았다. 그때부터 북한에 대한 비전략적인 핵무기 공격임무는 미국 본토의 전투비행단이 책임지게 되었다. 세이머존슨 공군기지는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다. "우리는 한국 시나리오에 따라 한국에서 전쟁을 모의연습했다... 한국 시나리오는 핵무기 사용하는 것을 고려하는 것에 대한 미국 국가최고지휘부의 결정을 모의연습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공기에 전술핵무기를 탑재하기 위해 항공기, 승무원, 핵무기 탑재장치 등을 확인했다...(Ibid) 15분 이내에 목표물을 공격할 수 있는 해상탄도 미사일인 트리덴트 D5가 주한미군의 “중요임무 체계”이다. 잠수함 탄도미사일과 장거리 폭격기도 이에 해당한다.


공군에 의해 투하되는 비전략 핵무기 이외에도 바다에서 발사되는 탄도미사일을 실은 태평양의 오하이오급 전략잠수함 역시 북한에 대한 공격임무를 맡고 있는 듯하다. 1998년 미국방부 총조사관의 보고서는  미군의 태평양사령부와 주한미군에 의해 인정된 “중요임무체계”로 트리덴트 시스템을 포함하고 있다.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정된 것이다.” 


트리덴트 시스템의 기본임무가 러시아와 중국을 겨냥한 것이지만, 낮은 궤도비행으로 발사되는 a D5 미사일은 12분 내지 13분의 짧은 시간에 북한의 목표물을 타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다른 어떤 미국의 핵무기도 이처럼 빠르게 목표물에 도달할 수 없다. 태평양에 배치된 두 세 척의 오하이오급 전략잠수함은 작전해역에서 언제든지 경계상태에 있으면서, 지정된 순환지역에서 러시아, 중국, 북한의 목표물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장거리 전략폭격기는 북한에 대한 핵공격 임무를 부여받을 수 있다. 아래에 있는 공군지도에 따르면 B-2 스텔스 폭격기는 북한에 대한 임무를 지니고 있다. 히로시마 원자탄의 1/3 내지 6배의 폭발력을 가지고 지하를 관통하는 핵폭탄인 B61-11을 탑재한 B-2 폭격기는 북한이 땅 속 깊이 설치한 시설물을 공격할 잠재적인 핵 공격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B-2는 최근에 개량돼 8시간 이내에 핵공격임무를 완수할 수 있다. 공식적으로는 한국에서 미군의 핵무기는 33년만에 철거되었지만, 실제로는 아직도 한국에 상당수 핵무기가 있다는 증거가 있다. "한국 정부는 핵무기의 철수를 확인해주었지만, 미국은 확실한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그 결과 특히 남북 내에서 핵무기가 한국에 남아 있다는 소문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1998년 태평양사령부에 의해 핵무기의 철수가 확언되었다.(The nuclear information project: withdrawal of US nuclear weapons from South Korea, emphasis added) 하지만 최근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용으로 한국에 핵무기가 남아 있다는 추측이 가능한 보도가 있었다. 실제로 이런 핵공격이 일어나면 한반도 전체는 강력한 핵 방사능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부시정부의 2001년 핵태세 검토보고서 : 선제적 핵전쟁>


부시정부는 2001년 핵태세 검토보고서에서 9/11 이후 새로운 핵무기 선제적 핵전쟁 원칙의 윤곽을 확립했다. 이에 따르면 핵무기는 비핵국가에 대해 방어용으로 사용될 수 있다. 북한에 대한 “핵무기 공격능력의 요구조건”이 네브라스카의 오마하에 있는 미국 전략사령부의 통제 아래 실행되는 전 세계 타격 임무의 일환으로 확립되었다. 이는 소위 CONPLAN 8022이며 이는 중국과 러시아, 북한을 포함한 많은 "불량국가"를 겨냥하고 있다. 2005년 11월 18일 새로운 '우주와 지구 공격 사령부'는 북한과 관련된 핵전쟁 훈련에서 테스트를 통과한 후에 미 전략사령부에서 실제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현재 북한에 대한 핵공격 계획은 3가지 임무를 띠고 있다. 첫째 애매하게 규정되어 있는 전통적인 억제역할로서 실제로 전투가 개시되기 전에 북한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이다. 2001년 핵태세 검토보고서에 의하면 이 역할은 북한이 대량살상무기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억제하거나 단념하도록 하기 위해 다소 확대되어왔다. 미국이 핵무기로 북한과 50년 동안 대치 이후에,  부시정부에 이르러 왜 추가적인 핵공격 능력이 북한으로 하여금 대량살상무기(핵무기프로그램)를 갖는 것을 단념하도록 할 수 있다고 믿었을까? 핵무기 프로그램은 여전히 미스터리다.(Ibid, 강조는 필자)


핵전쟁의 위협: 북 vs 미국


서방언론들이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해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반면,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명백한 것은 핵 능력의 비대칭성이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반세기 동안 핵전쟁으로 위협해왔다는 사실은 서방언론에서 거의 다루지 않는다. 위협은 어디에 있는가? 미국과 북한 사이의 핵무기 비대칭성은 강조되어야 한다. 미국은 “전술핵, 전략핵 그리고 아직 배치하지 않은 핵탄두를 포함하여 5,113개를 가지고 있다.” (ArmsControl.org  April 2013) 최근의 전략무기제한회담의 선언에 따르더라도 5,113개 이상의 핵무기를 지니고 있다. 미국과학자연맹에 따르면 “미국은 792개의 실전배치된 ICBM, SLBM, 전략폭격기 등에 1,654개의 전략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으며,.... 게다가 500개의 전술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


(ArmsControl.org에 따르면 1. 2013년 4월 3일 미국무부는 신전략무기감축협정에 따라서 러시아와 데이터 교환을 한 것을 최근에 자료로 발행했다. 여기서 두 국가에서 시행하는 신전략무기감축에 따른 실행 시스템과 배치된 핵탄두를 밝히고 있다. 2. 2010년 5월 3일 미 국방부는 최초로 미국이 비축하고 있는 5,113개의 전체 핵무기 숫자를 공개했다. 국방부가 발표한 숫자에는 실전에 배치했거나 배치를 준비하고 있는 가동 중인 핵무기뿐만 아니라 실전에 배치하지 않은 핵무기도 포함됐다.) 


반면 2013년 4월의 같은 자료에 따르면 북은 4개에서 8개에 이르는 핵탄두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추출했다. 북은 2010년 원심분리기 시설을 공개했으며,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고농축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게다가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면 북한이 핵탄두를 실은 미사일을 미국이나 다른 곳으로 발사할 수 있는 수단을 가졌다는 증거가 없다. 지금까지 몇 개의 원자폭탄을 생산하고 테스트했다. 그러나 핵을 최소화하고 그것을 미사일에 실을 수 있는 재료와 기술이 부족하다.  (참조  North Korea: What's really happening - Salon.com April 5, 2013) 미국의 독보적인 핵무기 전문가인 Siegfried Hecker에 따르면 북한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핵물질을 충분히 보유하지 못하고 또한 핵무기 실험 경험이 부족해서 핵무기를 충분히 지니고 있지 못하다. (See  North Korea: What's really happening - Salon.com April 5, 2013) 


따라서 핵전쟁의 위협은 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그 동맹국으로부터 나온다. 미군 공격의 암묵적인 희생자인 북한은 전쟁을 떠벌리는 시시한 국가, 미 본토를 위협하는 나라,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나라 등으로 묘사되어왔다. 이러한 전형적인 비난은 언론의 공감대를 형성해왔다. 


반면 현재 워싱턴은 320억 달러를 들여 전술핵무기를 개선할 뿐만 아니라 전략핵무기를 개조하고 있는데, 2002년 상원의 결정에 따르면 이러한 무기들은 “주변의 민간인들에게 위험하지 않다.” 이러한 북한에 대한 잠재적인 공격과 지속적인 위협은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한 동아시아에서 미군의 포괄적인 군사의제의 일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미국이나 서방의 국민들은 북한이나 이란이 아니라 미국이 세계평화의 위협이라는 점을 각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의 경제적 발전


남한을 점령한 미군은 대체적으로 미국의 경제적 금융적 이해를 지원하고 대변했다. 한국의 경제는 그 시초인 1945년부터 민주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본의 착취적인 공장 시스템은 한국의 재벌에게 인수되었는데, 이 재벌들은 부분적으로 일본의 제국주의 시스템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재벌은 처음부터 극단적으로 저임금에 기반했으며, 한국의 제조업은 서방의 시장을 위하여 싼 임금에 기반한 수출품을 생산하였다. 여러 측면에서 한국의 초반 제조업은 한국노동자들의 권리희생을 기반으로 한 “산업식민지”의 형태를 띠었다. 


한국 재벌의 부상은 1970년대에 시작한 한국의 주목할 만한 경제성장의 원동력이다. 재벌은 지주회사를 중심으로 많은 회사들이 밀집된 복합기업체이다. 재벌의 모회사는 종종 하나의 가족이나 경제적 족벌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러한 족벌은 한국 군사정부의 장교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한국의 산업과 기술 혁신은 서방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주한미군의 주둔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더 이상 종속적인 경제에 기반한 개발도상국이 아니었다. 경쟁적인 세계 시장에 편입되어 한국 자본주의는 일본과 서방의 다국적 기업들과 경쟁하였다. 


1997년 아시아의 위기


한국은 세계적인 자본주의 강대국으로 발전해 나갔다. 한국은 자신만의 기술 기반과 고도로 발전한 은행시스템을 구축했다. 한국은 세계은행에 의해 '아시아의 타이거'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의 전반적인 정치적 구조는 거시경제정책의 운용을 포함하여 미군의 점령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은 물론, 워싱턴과 월스트리트에 의해 통제되었다. 1997년 아시아의 위기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1997년 하반기, IMF 구제금융 사태는 남한을 실질적으로 하루아침에 깊은 침체로 빠지게 하였다. 사회적 충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주요한 금융세력에 의한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에 대한 금융적 조작을 통해 아시아 위기는 한국의 경제적 성과를 약화시키고 훼손시켰다. 이러한 것들의 목표는 ‘호랑이’를 길들이고, 한국의 재벌을 해체하고, 한국의 경제와 산업 기반 그리고 은행시스템에 대한 미국의 소유와 통제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1997년 후반기 원화가치의 붕괴는 외환시장에서 '무차입공매도'에 의해 촉발되었다. 이러한 행동들은 경제적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국 재벌들은 월스트리트의 이해를 대변하는 IMF의 주문에 직면하여 균열되고, 무너지고, 파산으로 치달았다. 30개의 재벌 중에서 11개가 1997년 7월부터 1999년 6월 사이에 붕괴되었다. IMF 구제금융 이후 한국 경제의 많은 부분 특히 첨단기술분야가 미국과 서방의 자본에 의해 탈취당했다.  이러한 탈취는 한국의 채권자의 협상결과로 만들어진 다양한 사기적 규정이 뒷받침을 해주었다.  


서방의 기업들은 최저가격에서 금융기관과 산업자산을 사들이는 쇼핑을 했다. 원화의 가치 저하는 서울의 주식시장의 폭락과 결합하여 한국자산의 달러가치를 극적으로 저하시켰다. 월스트리트의 이해를 대변하여 IMF는 곤경에 빠진 12개의 대우 계열사를 파는 것을 포함하여 대우그룹을 해체할 것을 요구했다. 대우자동차는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자연스런 파산이 아니라 가치 있는 생산적 자산을 외국의 투자자들에게 넘기려는 목적으로 금융시장을 조작한 결과였다. 대우는 IMF와의 협정으로 인해 대우자동차를 GM에게 2001년도에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가장 큰 기업인 현대 역시 지주회사를 구조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1999년 4월 현대는 사업단위의 수를 2/3로 감축하고 그룹을 5개의 독립된 소그룹으로 분할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러한 결정은 서방의 채권자들이 부과하고, IMF가 수행한 채무감축계획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거대 재벌들을 더 작은 사업체들로 축소하려고 계획된 재벌 재편성프로그램에 의해 수행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지주회사에 속해 있던 많은 고도기술 사업단위가 서방의 자본에 팔렸다. 은행들도 미국의 투자자들에게 인수되었다. 전국에 지점들을 갖고 있는 제일은행은 사기적인 거래를 통해 캘리포니아에 근거지를 둔 뉴브리지 그룹에 형편없는 가격으로 팔렸다.(참고 Michel Chossudovsky, The Globalization of Poverty and the New World Order, Global Research, Montreal, 2003) 미국의 전직 대통령인 부시, 전 국무장관인 베이커, 전 국방장관인 칼루치가 이사로 있는 칼라일 그룹 역시 의심스런 거래를 통해 2000년 9월 한미은행의 지배권을 사들였다. 한미은행은 제이피모건과 체이스와 함께 칼라일 그룹이 주도하는 컨소시움에게 인수되었다. 한미은행은 1980년대 초반에 한국의 재벌들과 뱅크 오브 아메리카가 공동투자하여 설립되었다. 


3년 후에는 시티은행가 한미은행의 지분 36.7%를 칼라일 그룹으로부터 사들였고, 나중에는 나머지 지분도 매입했다. 이 합병은 시티은행이 서반구 밖에서 거래한 거래 중 가장 큰 것이었다. (참고 Citibank expands in South Korea - The New York Times, November 2, 2004). 수조달러의 채무위기를 촉발시킨 1997년 아시아 위기 이후 새로운 정부시스템이 남한에서 수립되었는데, 이는 재벌을 분리시키고 한국의 전 국가적인 자본주의를 약화시키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IMF 구제금융 약정을 체결한 것은 정부의 금융기관이 외국 채권자의 이해에 부합하도록 한국정부의 구조를 전환한 것이다.


결론 : 평화를 향해


미국은 한국과 여전히 전쟁 중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이와 같은 전쟁상태는 남북 모두를 겨냥하고 있다. 또한 이 전쟁상태는 핵무기 공격을 포함하여 북한에 대한 지속적인 군사적 위협이라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전쟁상태는 1945년 이후 미군이 점령하고 있는 한국마저 위협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는 37,000명의 미군이 있다. 한반도의 지형을 고려하면, 북한에 대한 핵무기 사용은 필연적으로 한국 역시 핵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 갈 것이다. 미군의 전략가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향후 평화협정을 협상하기 전에 강조되어야 할 것은 미국과 한국은 “동맹”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진실한 동맹”은 외국의 점령과 침략에 맞서 남북을 통일시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미국은 전체 한반도를 상대로 전쟁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남북 양자대화를 가질 필요가 있다. 대화는 평화협정에 포함될 내용과 관련해서는 남북이 공동입장을 형성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평화협정은 어떠한 경우라도 침략자인 미국에 의해 결정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미국은 한반도에서 미군을 계속 주둔하기 위해서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외교정책과 군사 기획자들은 한반도에서 미군 주둔을 지속시키는 그들 자신의 통일 시나리오를 이미 만들어 놓았다. 워싱턴의 프레임워크는 외국투자가가 북한의 경제를 탈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워싱턴의 목적은 한반도의 통일을 이용하는 것이다. 신보수주의자들의 신 미국 세기 프로젝트(Project for a New American Century)는 “통일 이후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이 시나리오에 의하면 한반도에서의 미군은 현재의 37,000명보다 증강되어야 하고 또한 북한에도 배치되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통일된 한반도에서 미 주둔군에게 맡겨진 임무는 소위 “북한에서의 평화정착 작전”을 수행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한반도의 통일은 주한미군의 축소와 지위의 전환을 요구할 수 있지만, 이러한 변화는 주한미군의 임무의 종식이 아니라 그들 임무의 변화, 변화하는 기술적인 현실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통일 이후 어떤 현실적인 시나리오에 따르더라도 미군은 북한에서의 평화정착 작전에서 일정한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 통일 이후 한반도에서 주둔할 미군의 정확한 규모와 조직을 추측하는 것은 시기상조이지만, 통일 이후 주한미군이 좀 더 폭넓고 장기적인 전략적 목적에 복무할 것이라는 점을 판단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주한미군의 역량을 축소시키는 것은 현명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주한미군을 축소한다면 내용적으로 더 강화할 필요가 있으며, 특히 북한의 미사일 공격과 대량 포격 능력에 대항할 수 있도록 강화할 것이다. 얼마 안 있어 혹은 통일과 함께 주한미군의 구조는 변화할 것이고, 주한미군의 총 인원은 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의 가장자리인 한반도에서 미군의 주둔은 계속될 것이다.” (PNAC, Rebuilding America`s Defenses, Strategy, Forces and Resources for a New Century, p. 18, 강조는 필자) 


워싱턴이 의도는 너무나 명백하다.  


그러므로 평화협정 회담은 외부세력의 간섭이나 참여가 없이 남과 북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 회담은 북한을 겨냥한 경제 제재의 해제뿐 아니라 미 점령군의 철수를 다뤄야 한다. 미군의 철수와 배제는 평화협정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평화협정에 따라서, 한국군을 미군 지휘에 맡겼던 한미 양국의 연합사령부 협정을 폐기해야 한다. 모든 한국군은 이제 자신의 군 통수권에 귀속되어야 한다. 이는 근본적인 변화이다. 왜냐하면 현재 한미연합사 협정은 미군 사령부가 한국 대통령과 총사령관을 배제하고 대신하여 미군이 주도하는 북한에 대한 전쟁에서 남한 군대를 지휘하도록 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과 남 사이에 좀 더 심화된 경제적, 기술적, 문화적, 교육적 협력을 위한 쌍무적 협의가 수행되어야 한다. 경제적 주권은 핵심적인 주제이다. 1997년 IMF 구제금융 이후 진행되었던 수상한 거래의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한다. 이러한 거래들은 서방의 거대 자본들이 한국의 첨단 기술산업과 은행의 상당부분들을 불법적으로 또한 사기적 방법으로 취득하거나 소유하는 것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력체제(TPP)에 한국이 참가하게 됨으로써 갖는 충격도 검토해야 한다. 


평화협정은 남북 사이의 국경을 개방하는 것과 함께 추진되어야 한다. 

2000년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에 따라 통일을 위한 의제와 일정을 논의하는 남북공동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 미셀 초스도프스키는 캐나다 오타와 대학의 경제학과 명예교수이며, ‘오늘의 작가상(award- winning author)' 수상 작가이며, 지구화연구센터의 설립자이자 소장이다. 또한 웹사이트 globalresearch.ca의 편집자이다. 미셀 교수는 “빈곤과 세계화” (The Globalization of Poverty and The New World Order ,2003), “테러리즘과 미국의 전쟁”(America's "War on Terrorism, 2005) 등의 책을 저술했다. 그의 가장 최근의 책은 “3차 세계대전 시나리오”(Towards a World War III Scenario: The Dangers of Nuclear War, 2011)이다. 또한 그는 브리타니카 백과사전( Encyclopaedia Britannica)의 기고가이다. 그의 저술은 20여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는 조지 부시 대통령을 전쟁범죄와 고문 등의 이유로 기소한 쿠알라룸푸르 전쟁범죄위원회(Kuala Lumpur War Crimes Commission)의 회원이다. 이메일 주소는 crgeditor@yahoo.co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