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1910년 전후 친일세력의 동향과 일제의 육성책 / 일제의 친일파 육성과 반민족 세력

몽유도원 2013. 7. 28. 16:37

제2장 1910년 전후 친일세력의 동향과 일제의 육성책 

제1절 러일전쟁과 승리에 대한 전망 35 

1.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 35 

2. 일본의 승리 전망 38 

3. 러시아의 승리 전망 44 

제2절 ‘이등박문추도회’와 친일세력의 동향 49 

1. 이등박문 사망과 대응 49 

2. ‘이등박문추도회’ 참여 계열 55 

1) 관민추도회 계열 56 

2) 국민대추도회 계열 60 

3. 일진회와 이완용계열의 대립 65 

1) 일진회계열 66 

2) 이완용계열 69 

제3절 1910년대 일제의 ‘친일파’ 육성책 73 

1. 조선귀족의 ‘창출’과 이용 73 

1) 수작자 선정과 현황 73 

2) 수작자에 대한 우대정책 86 

3) 조선귀족 관련 법령 91 

2.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설치와 이용 95 

1) 중추원의 성격과 변화 95 

2) 중추원 역임자와 경제적 대우 101 

3. 조선총독부 중추원 관련 법령 108 

1) 「조선총독부 중추원 관제」 108 

2)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사 규칙」 110 

3) 「조선총독부 중추원 사무 분장 규정」 112 

 일제의 친일파 육성과 반민족 세력



1. 러일전쟁과 승리에 대한 전망


1.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


러시아는 지리적 인접에 따른 벌목의 유리한 조건과 이를 기반으로 한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대한제국의 삼림이권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무르던 1896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상인 브리너J.I.Bryner는 러시아공사의 도움으로 대한제국정부와 최초로 두만강·압록강 연안·울릉도에 대한 삼림채벌권 계약을 체결했다. 1899년 여름 브리너의 벌목특허권이 베조브라조프A.M.Bezobrazov로 넘어가고 1901년에는 러시아의 요청으로 3년간 기한이 연장되면서, 1903년부터는 적극적인 벌목사업이 이루어졌다. 러시아는 압록강 건너 백마산성白馬山城까지 세력을 확대하면서 용암포龍巖浦에 병참기지 구축을 위한 작업과 의주지역의 토지·가옥의 매입을 추진했다. 註1) 일본은 러시아의 적극적인 공세에 불안을 느껴 대한제국정부에 러시아의 불법행위를 저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대한제국정부도 러시아의 용암포 철수를 촉구했지만 오히려 러시아측의 강요로 1903년 7월 20일 대한국서북변계大韓國西北邊界 울릉도삼림감리鬱陵島森林監理 조성협趙性協과 삼림회사 총무대판總務代辦 모지스코Mogisko 사이에 용암포지단조차협약龍巖浦地段租借協約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일본을 비롯한 영국·미국 등 열강의 압력으로 대한제국정부가 인준을 거부하면서, 대한제국과 러시아의 용암포조차 교섭은 미해결인 채로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러시아가 일방적으로 계약체결을 고수하면서 용암포 점령을 강화하고 오히려 확장하자, 일본은 이에 강경히 대응하면서 만한滿韓 국경지대에서 러·일간의 긴장은 고조되었다.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이 격해지면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대한제국정부는 당시까지 추진하던 열강의 승인을 통한 영세중립국 대신 독자적인 국외중립 선언을 서둘렀다. 註2) 그러나 대한제국정부 내에도 국외중립안과 일본과 공수동맹안攻守同盟案 추진세력이 맞서 있었고, 일본의 국외중립 선언 방해공작도 계속되었다. 대한제국정부는 극비리에 전시戰時국외중립 선언을 추진해, 1904년 1월 21일자로 중국 지부芝罘에서 전시국외중립을 선언했다. 일본은 크게 당황하면서도 이를 애써 무시하고, 러시아정부는 방관적인 태도를 취한 반면, 러시아의 강계사무관疆界事務官은 오히려 이를 지지했다. 미국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보호국화, 나가서는 ‘합병’을 지지하면서도 국외중립 선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외 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도 공식적으로 지지를 표명하지는 않았다. 급박해진 대한제국정부는 태도를 바꾸어 ‘경성중립京城中立’을 모색했지만, 2월 8일 일본이 러시아를 공격해 2월 9일 인천해전에서 승리하고, 서울에 입성한 후 2월 10일에 공식으로 선전포고하면서 최악의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에 더해 일본은 대한제국을 압박해 2월 23일 공수동맹을 전제로 한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러시아와 일본의 무력충돌은 이미 1900년을 전후로 필연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전쟁의 결과에 대한 전망은 러시아의 승리를 확신하는 쪽과 일본의 승리를 확신하는 쪽이 공존했다. 註3) 러일전쟁의 필연적인 이유로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한 발판이 필요하고, 일본은 인구과잉 등의 문제를 내세워 대륙진출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러시아나 일본 어느 쪽이 이기더라도 대한제국은 어려운 처지에 놓일 것이므로 국가적 위기상황에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 註4) 이러한 우려는 당시 일본과 러시아가 한국과 만주를 둘러싸고 각각 ‘한국은 일본세력하에, 만주는 러시아의 보호하에’ 두고자 하는 이른바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에 대한 경계로 나타났다. 註5) 

 

2. 일본의 승리 전망


동학교단의 제3대 교주 손병희는 일본에 머무르던 1903년 초부터 러시아와 일본의 개전을 예측했다. 손병희는 동학의 장래를 위해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득이 될 것이고, 토지와 인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는 존재가치가 없기 때문에 타국간의 전쟁을 이용해 종교의 힘으로 국정을 쇄신할 것을 제시했다. 註6) 또한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이 ① 지리적인 이점, ② 정신적 동기, ③ 군략軍略과 병기兵器 등에서 반드시 승리할 것이므로, 이 기회를 이용해 전쟁에 참여하면 전승국의 지위를 얻을 수 있고, 강화회의에서 독립국의 지위를 가질 수 있다고 보았다. 註7) 손병희는 망명객으로 동학에 입도入道한 권동진權東鎭·조희연趙羲淵 등과 대책을 협의하는 한편, 이들의 소개로 일본 군부의 실력자와 정계인물들을 접촉하면서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친러세력을 몰아낸 후 정부를 개혁한다는 계획을 추진했다. 권동진은 회고담에서 당시에는 대한제국 내의 친러파를 제거하고 정부를 개혁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고 하면서, 구체적으로는 동학교인과 독립협회를 규합해 민당民黨을 조직하고, 일본의 원조를 통해 천러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註8)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손병희는 일본과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일본정부와 대한제국정부의 개혁을 확실하게 약속한 후 일본을 위해 러시아를 공격하는 한편 국권을 되찾은 후에 정부를 혁신하는 것이 대한제국의 살 길이라고 하였다. 註9) 이어서 음력 7월 동학교단의 민회民會 조직인 중립회中立會 개회를 지시하면서 반드시 일본이 승리할 것임을 강조했다. 註10) 


다음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은 러일전쟁이 무르익는 시점에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만주뿐만 아니라 한국·중국, 나아가 일본의 존망도 위협하는 것이므로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러시아와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註11)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면 한국과 중국의 영토보전을 위해 개전한 일본을 가까이 하고 러시아를 멀리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폈다. 註12) 그러면서도 일본의 승리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의 개혁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제시했다. 『황성신문』은 일본의 침략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일본과 관계나 ‘동양의 평화’를 위해 러시아를 경계했던 것이다. 『황성신문』의 입장은 러일전쟁이 끝나고 을사늑약을 앞둔 1905년 10월경까지 계속되었다. 즉 러일전쟁은 일본이 한국·중국의 독립과 영토를 지켜주기 위해 일으킨 “일대의기一大義旗를 거擧”한 것으로 판단했다. 『황성신문』은 인종론人種論의 입장에서 동양의 연대를 주장한 것이다. 註13) 


러일전쟁이 진행 중이던 1904년 7월 창간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일본의 침략적 속성을 지적하면서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일본에 대한 경계는 러일전쟁이 종결된 후에 보다 강한 논조로 나타나고 있는데, 당시 한국인의 처지는 노예와 소·말보다 비참한 처지로 전락해 세계에 비할 데 없는 가련한 나라가 되었다고 보았다. 註14)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 후에는 한일 양국의 순치脣齒관계는 일본의 침략을 앞세운 강압수단으로 끝나게 되었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일본에게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러일전쟁에 대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


註15) 또한 일본이 ‘배반’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러한 의도가 있었던 것인데, 한국인들이 오히려 러일전쟁 초에는 일본의 승리를 희망하다가 이제야 그 실상을 알게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註16) 


러일전쟁 초기에는 일본이 승리해야 대한제국의 자주·독립도 보전된다는 주장이 신문을 통해 대중들에게 소개되기도 했다. 


전 비서승 윤병 씨와 그 외에 제씨가 원수부에 헌의하되, 현금 일본이 동양에 평화를 위하야 전국에 동병하고 재정을 탕갈하야 만리 해륙에 전투를 진력하되 한청 양국은 턱없이 승평을 누리나 일본이 아무리 말하지 아니한들 우리 마음에 부끄럽지 않으리오. 마땅히 원수부로서 문음무 조신 중에 재력 있는 자를 택취하고 병졸은 각 대 중 자원자와 서북간도 등지의 용병을 뽑고 군비는 모든 귀역에게와 모든 부자에게 연금하야 보조케 하고 또 이왕 관리 중 탐학하든 자의 장전을 거두고 또 경향 간에 범죄하고 징역하는 자의 허다한 속전으로 채와 쓰게 고 ○배의 기운을 고동시켜 일병으로 더불어 협력하여 아국을 공격하면 대공을 이 일을 거시오… 註17) 


요컨대 일본이 동양평화를 위해 일어난 것이니 만큼 전쟁에서 반드시 이기기 위해서는 인적·물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하고, 그럼으로써 동맹국의 체면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전쟁에서 이겨야 한국의 독립이 유지된다는 주장은 1904년 2월 중순 이준李儁·정순만鄭淳萬·이현석李玄錫·유종익柳鍾益 등이 발표한 다음의 취지서에 잘 나타나 있다. 


아! 우리 대한제국의 독립이여! 갑오년에 일본과 청의 전쟁 후에 독립을 반포하였으나 아직도 떨치지 못하였다. 갑진년에 일본이 다시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함에 이르러 한·청 두 나라의 독립을 존중한다는 것으로써 대의大義를 성명하여 여러 나라에 공포하고, 대군大軍과 거관巨款을 발해 먼 이곳까지 군대를 보내 생명을 아끼지 않고 처절히 싸워 승리를 거둘 때를 당하여 무릇 우리 대한의 인민들은 어찌 상관없는 일로 여길 수 있겠는가? 이에 동지권고문同知勸告文을 발하니 요컨대 일반 국민들은 독립을 아끼는 성심성력으로 일본에 대하여 감사의 감정을 표하고자 함이다. 註18) 


이것은 일본이 대군과 큰돈을 들여 한국·청국의 독립을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는 이때, 의연義捐으로 모은 휼병비를 적십자사로 보내 일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자는 것이다. 일본에 대한 물적 지원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1904년 2월 말에 윤효정尹孝貞 등이 발기한 대동협회大東協會가 일본 영사관에 군수비軍需費 5,000원을 보냈다. 註19) 


일본에 망명한 유길준兪吉濬은 ‘조선의 운명은 일본과 러시아에 있고, 두 나라가 만일 조선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이면 조선은 망할 것이기 때문에 두 나라가 전쟁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보국상책保國上策’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조선의 내정을 먼저 개혁해야 하고, 만약 어쩔 수 없이 전쟁을 벌이더라도 만주방면에서 전쟁을 수행하도록 하며, 이때 조선은 마땅히 일본과 연합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註20) 또한 “동아의 사국事局은 동아의 국인國人에 의해 해결되어야 하며 백인종으로서 한다면 후래後來의 불이익이 이보다 큰 것은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정치개신을 기획했다. 註21) 


친러정권이 장악하고 있는 대한제국정부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은 이전부터 있었다. 박영효朴泳孝는 1895년 두번째 일본 망명 후 1900년을 전후로 두 차례의 ‘쿠데타’를 시도했다. 그중 하나가 1900년경부터 국내의 활빈당을 쿠데타의 주력으로 동원·조직하려 한 사건이다. 박영효는 유길준과 달리 두 차례 모두 고종과 황태자를 폐위시키고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추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註22)대한제국 권력의 정점인 고종을 폐위시키려는 시도는 ‘혁명일심회革命一心會’의 쿠데타 계획과 방법론에서는 동일했다. 


혁명일심회는 1900년 10월경 일본 육군사관학교 11기 졸업생들이 “노국파露國派의 정부를 전복해서 망신잡배妄臣雜輩를 일소하고 참된 한국독립을 꾀한다”는 목적으로 조직했다. 이들은 1901년 말부터 대한제국정부 개혁을 추진하던 유길준 등의 망명객들과 교류하면서 쿠데타를 모의했다. 註23) 그러나 혁명일심회와 유길준 등은 쿠데타 준비과정과 궁극적인 목적이 달랐다. 혁명일심회는 박영효와 같은 방법론을 취하면서 국사범을 중심으로 정부를 조직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한국 정부가 자신들을 ‘친일분자’로 경계하면서 방치한데 대한 불만을 해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혁명일심회원들은 유길준과 접촉하면서 고종을 받들어 정부를 조직하는 것으로 방법론을 수정했다. 註24) 박영효·혁명일심회·유길준 등의 쿠데타 시도는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러시아나 친러정권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 공유하고 있었다. 


일본의 승리하기를 기대하는 한편에는 러시아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이 작용했다. 즉 일본만이 황인종을 대표해 백인종의 침략에서 동양의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고, 註25) 인종론적인 측면에서 한·청·일 삼국동맹론을 내걸었다. 註26) 이것은 손병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러일전쟁에 대해서는 “일본이 깨어지면 동양이 파멸된다고 생각” 했으며, 註27) 삼국동맹론에 대해서는 “동양에 수많은 국가를 세워 두는 것보다 동양 전체를 일단一團으로 가장 덕망이 높은 사람을 주권자로 하여 서양 세력에 맞서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일본 한 나라를 가지고서는 서양 세력에 대항할 수 없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註28) 당시 독립협회의 반외세운동에서 계승된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의식은, 일본의 승리를 지지하던 미국과 영국을 배후로 한 이승만李承晩 등의 기독교계 인사들에서도 강하게 나타났다. 註29) 


3. 러시아의 승리 전망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을 예견하면서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결국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1903년 8월 15일 러시아 황제 니꼴라이 Ⅱ세에게 보낸 비밀서한에는 고종이 얼마만큼 러시아를 굳게 믿고 의지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 만약 전쟁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면 전쟁터가 될 것을 면할 수 없을 터인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귀국의 군대가 의심 없이 이길 것이므로 짐은 미리 축하하는 바이다. … 일조유사一朝有事에 짐은 반드시 귀국과 연결할 것이다. 따라서 특별히 알리건대 일본수비대가 우리 나라 서울에 있은 즉 개전開戰 초부터 우리나라는 반드시 일본인에게 견제를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병비兵備는 많지 않아 역시 능히 막을 수 없다. … 짐은 당연히 사자使者로 하여금 일본군의 수액數額과 거동 및 그 의향 여하를 탐지할 것이고 귀국의 군여軍旅에게 명확히 알릴 것이다. 러시아군을 돕고 또 우리 인민에게 칙지飭旨하여 적敵이 들어올 때 재곡財穀을 미리 옮겨두어 사람들로 하여금 산곡간山谷間에 숨겨 두었다가 편의를 주지 않는 방책을 쓸 것이다. … 지속적인 양국간의 우의를 바란다. 註30) 


고종은 일본을 명백한 ‘적’으로 규정한 반면 러시아는 우호적인 군사 동맹의 대상으로 설정했다. 이것은 고종을 비롯한 측근세력들이 러일전쟁 이전부터 중립화노선을 지향하는 한편으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대對 러시아정책을 계속 추진해 왔음을 보여준다. 註31) 


고종은 러시아가 계속 전쟁에 패하고, 1905년 1월 2일 여순旅順마저 함락당하자 이전보다 더 간절하게 러시아 군대의 파견을 요청했다. 즉 “러시아 대군의 힘을 빌려 이들을 경성에 대거 입경시켜 일본의 악을 소제함으로써 오래도록 독립의 권리를 공고히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러시아 병력이 경성에 들어오는 날 내응하고 접대하는 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하였다”는 것이다. 註32) 이것은 일본의 침략정책이 노골화하는 상황과, 나아가 고종 자신을 압박하는 긴박한 현실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포츠머스강화조약을 앞 둔 1905년 8월 22일 니꼴라이 Ⅱ세에게 보낸 친서에도 여전히 러시아에 대한 굳건한 신뢰를 나타냈다. 이 친서의 주요 내용은,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은 일본에게 문화·문자·제도를 가르쳐 주었고, 전쟁을 벌인 적도 있지만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런데 근래 일본이 서양문물을 먼저 배워 한국을 제압하려고 하니 이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註33) 반면에 러시아와는 역사·관습·언어·문자가 서로 다르지만 1884년 이후 오히려 일본보다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일본이 불법으로 강요해 체결된 한국과의 모든 조약을 중지해 주도록 요청했다. 


고종은 1907년 헤이그로 특사를 파견하면서 다시 니꼴라이 Ⅱ세에게 친서를 보내, “짐은 날로 더욱 곤경에 처해 가고 있으나 호소할 곳이 없다. 다행히 지금 국제평화회의가 개최되어 이 회의에서 짐은 억울한 나라사정을 밝히고자 한다. 대한제국은 러일전쟁 직전에 전 세계에 중립을 선언하였었다. 그런데 현재 상황은 매우 분개스러운 처지에 놓여 있다”고 하면서, 특사들이 평화회의에 참가할 수 있도록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註34) 그러나 러시아는 자국의 이해관계가 침해당하지 않는 한,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관망하면서 방해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유지했다. 결국 1907년 7월 30일 러시아와 일본은 협약을 통해 상호 영토보전, 제諸조약의 존중, 중국의 독립 및 영토보전과 기회균등 등의 공개협약문, 그리고 만주분계선을 확정하여 북만주와 외몽골은 러시아, 남만주와 조선은 일본의 영유권 아래 있음을 상호 승인하는 비밀협약을 체결했다. 註35) 따라서 헤이그특사에 대한 고종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외무성은 자국 대표이며 헤이그국제회의 의장인 넬리도프에게 대한제국 특사의 회의참석을 거부하도록 전문을 보냈다. 이 과정에서 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은 러시아가 제공한 정보를 통해 사건의 내막을 사전에 상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註36) 


러시아의 한국에 대한 입장은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본과의 관계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1906년 초 러시아 외상이 서울주재 총영사로 임명된 플란손에게 내린 훈령에는, 러시아의 이익이 관철되지 않는 한 “일본 정부가 불만이나 의심을 사지 않는 유연한 관계를 조성”하도록 지시했다. 이 훈령에는, 고종이 러시아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보이고 있지만 

“러시아에 실현 불가능한 기대를 갖고 귀관에게 기대하는 일이 있으면 일본과 사이가 악화되지 않도록 어떤 약속도 자중” 할 것과 “고종 황제가 여러 차례 니꼴라이 Ⅱ세에게 보낸 친서 회답 요청은 정치적 상황이 적당치 않음을 고려해 지시에 따라 구두인사로 대신하라”고 명시했다. 註37) 


러시아의 승리를 확신하는 것은 ‘민족파閔族派의 일부 및 엄귀비파嚴貴妃派’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누구라도 친로파가 되어 러시아 군대가 강원도·함경도 방면에서 크게 일어나 경성으로 쳐들어 와 일본군을 내쫓고 한성부를 회복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도하都下에 취청吹聽해 있다.”는 것이다. 註38) 그러나 러시아의 승리를 장담했던 친러세력들도 정작 일본의 승리가 가까워지자 재빠르게 일본에 편승하여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주력했다. 註39) 일본의 친일세력 부식은 유생에 대한 회유책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즉 이들이 “시국이 점차 절박해지는 것을 살펴 러시아와의 관계를 끊고 일본에 결탁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게 되는 상황을 이용한 것이다. 註40) 


고종은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을 예견하고 1904년 1월 중국 지부에서 전시국외중립을 선언하여 일시적인 성공을 가져오는 듯했다. 그러나 한국을 둘러싼 열강들의 상반된 입장과 함께 내적으로도 외교노선이 어긋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의 집권층은 정세인식에 따라 각각 러시아·일본과 제휴를 주장함으로써 중립정책의 일관성을 약화시켰고, 중립화 추진세력 조차도 정치체제 지향, 제휴대상 국가의 차이, 차관도입 주도권문제 등으로 대립하면서 외교역량의 분산을 초래했다. 註41) 

 

러일전쟁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견해는 단순히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었다. 어느 쪽이 승리하더라도 외세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는 필연적인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방법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장기적으로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것이 제일의 목적이 되어야 했다. 


2. ‘이등박문추도회’와 친일세력의 동향


1. 이등박문 사망과 대응


초대 통감1905.12~1909.6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시정개선을 통해 한국인 스스로 일본의 통치를 받아들이게 하는 점진적인 병합정책을 추진했다. 이등의 ‘자치육성정책’은 일본의 대한정책對韓政策을 관철시키기 위한 일환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등 개인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바램’도 적지 않았다. 때문에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의 이등 저격과 사망은 큰 충격이었다. 순종·고종을 비롯한 황실, 내각을 비롯한 정부관료,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 등의 ‘배일적排日的 언론계’, 자강계몽운동계열, 친일적 성향의 인물 등은 모두 이등 사망 후 전개될 파장에 주목했다. 대체로 이등 퇴임 앞뒤로 급격하게 추진되고 있던 일본의 병합정책이 앞당겨질 것이고, 이에 따른 권력구도의 재편도 필연으로 보았다. 


이등박문 저격과 사망소식은 각 신문을 통해 매일 보도되었지만, 이에 따른 대한정책의 변화와 국제적인 동향을 염두에 두고 사실자체 만을 자세히 다루었다. 주로 사건 전말과 각 단체와 지역의 동향, 황실과 내각을 비롯한 국내 각계의 조문·조례 내용, 통감부와 일본의 동향 등이었다. 註42) 


『대한매일신보』는 10월 26일 밤 양기탁梁起鐸의 집에 신채호申采浩 등 여러 명이 찾아가 국기를 걸어 놓고 축배를 들며 만세를 불렀다는 소문이 돌자, 註43) ‘전혀 근거 없는 사실을 퍼트리는 것은 모함이며 즉시 증거를 제출하라’고 반박했다. 註44) 통감부도 조사결과 사실이 아니라고 했지만, 전혀 근거 없는 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양기탁은 10월 31일 서부 약현 자신의 집에서 이등조난축하회를 개최하려다가 사장 맨함Alfred Weekley Marnham. 萬咸의 경고로 중지한 일이 있었다. 註45) 『대한매일신보』는 사회단체나 개인이 추도회를 준비하거나 추모단체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을 줄곧 비판했다. 註46) 


『황성신문』도 이등사건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놀라면서도 의아해 하다가 사실로 밝혀지자, 이등의 사진과 함께 ‘조위吊慰의 예를 표’했다. 註47) 『황성신문』은 『대한매일신보』와는 달리 전현직 사장 남궁억南宮檍·유근柳瑾 등이 모두 ‘국민대추도회’ 발기인과 위원으로 참여했다. 

대한협회 기관지 『대한민보』는 안중근의 이등 사살과 이재명李在明의 이완용李完用 저격을 국권회복의 일환으로 보도했다. 註48) 


일본정부도 이번 사건이 헤이그특사나 스티븐스저격사건과 계통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보았다. 註49) 경시청은 각 경찰서에 지시해 한성 내 거주자들 중 외국이나 지방에 나가 있는 자 등의 동향을 조사하도록 지시하고, 헌병사령부는 이 사건이 한성 내에서 모의된 것이 아닌지 은밀히 조사하는 등 경계가 매우 삼엄해졌다.  

 

이등박문에게 조의를 표하는 당시 신문 삽화


또한 ‘사회세력’ 註50)과 각 지방의 동향을 계속 주시하면서 한인들의 의향을 면밀하게 탐지했다. 대체로 대한매일신보사·황성신문사를 비롯해 기독교청년회·서북학회 등을 배일적排日的인 단체로 분류해 ‘겉으로는 애도의 마음을 가지면서도 이면에는 모종의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정부 관리들은 이등의 사망을 애석히 여기면서도 자신들의 지위보전에 위협을 느껴 조심스러워하고, 이것은 일반 상류층들에게 공통된 것으로 파악했다. 이에 비해 청년·하류층은 이등의 정책이 한인들을 더욱 핍박한 생활로 만들었기 때문에 기뻐해 하면서도 앞으로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본다고 파악했다. 


일본 거류민들도 매일 집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다. 특히 한성주재 일본계 신문기자단은 10월 26일 경성호텔에서 회의를 개최해, “이등공작이 한인의 손에 죽은 것은 배일사상의 표현이며, 장래의 화근을 단절하기 위해 차제에 대한정책에 대한 최후의 해결을 정할 것을 기대하고, 한국 황제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상하에 사죄할 것을 희망한다”는 결의서를 채택했다. 註51) 


이등사건이 전해진 10월 26일 오후 7시 50분부터 통감 관사에서 시정개선협의회 제88회 임시회가 개최되어 대책을 논의하고, 통감부에서 파견할 관리를 결정했다. 이어 내각에서도 연일 대책마련에 대한 회의를 개최하고, 왕실을 비롯한 각계에서도 조례단을 구성했다. 


순종은 일본 천황에게 전보를 보내 위문하고 시종원경 윤덕영尹德榮을 위문사절로 결정했다. 고종은 승녕부총관 조민희趙民熙를, 내각은 총리대신 이완용을 각각 위문사절로 결정했다. 10월 27일 한국 황실과 정부 대표, 통감부 파견원, 한성부민회장 유길준兪吉濬 등이 대련大連으로 출발했다. 일본 유학 중인 황태자는 시종무관 김응선金應善을 보내 이등의 부인을 조문하게 하고 곧바로 만주로 파견했다. 


위문 사절이 떠난 후 순종은 10월 28일 오후 3시, 의친왕은 같은날 오전 10시, 주임관 이상 일반 관리들은 오후 2시, 각각 통감부에 가서 조문하고 황후도 대리인을 보내 위문했다. 10월 29일에는 황성신문사 사장 유근, 제국신문사 사장 정운복鄭雲復이 각 신문사 대표로 조문하고, 종로청년회도 동경청년회에 전보를 보내 조문식을 거행하도록 했다. 10월 31일에는 대동교大同敎 총사總事 이범규李範圭가 통감부에 가서 위문했다. 대한협회 회장 김가진金鎭은 10월 27일 통감을 방문해 위문하는 한편 유족에게 전보를 보내기로 결의했다. 대한협회는 이번 일이 한국민의 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발표할 것이라는 소식도 있었다. 일진회는 10월 27일 전국 13부府 지부와 각항各港 지부회에 이등사건을 통보했다. 일진회 본부는 대구지부로 ‘이등공조난극절유감伊藤公遭難極絶遺憾’이라는 전보를 보냈다. 註52) 


내각은 탁지부 회계과를 통해 부의금 13만 원을 결의하고, 10월 30일로 예정된 경연 행사 등 모든 공식행사를 취소했다. 내부는 순종의 특지로 13도에 훈령을 내려 3일간 조시朝市를 정지시키고, 학부는 10월 29일부터 3일간 전국 관립·공립·사립학교에 휴학하도록 지시했다. 한성부는 10월 28일자 한성부령으로, 10월 29일부터 3일간 음률音律을 금지해 조의를 표하도록 했다. 


한편 일본정부는 이등의 공식 사망을 10월 26일 오전 10시로 하고, 11월 4일 국장을 치른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순종은 “우리 나라의 흉수兇手에게 사망한 고로 온 나라가 진해震駭함을 이기지 못해 이에 추도”한다는 전문을 보내고, 이등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어 순종은 황태자를 대리로 국장에 참석하도록 하고, 註53) 궁내부대신 민병석閔丙奭을 칙사로 임명했다. 註54) 고종은 승녕부 부총관 박제빈朴齊斌을 칙사로, 내각은 농상공부대신 조중응趙重應을, 황귀비는 엄주익嚴柱益을 조문사로 결정했다. 이들은 10월 31일 동경東京으로 출발했다. 


이들과 함께 10월 31일에는 원로를 대표한 중추원 의장 김윤식金允植, 김윤식의 수행원이자 공자교회孔子敎會 및 종교단 대표로 중추원 부찬의 정병조鄭丙朝, 국시유세단國是遊說團 대표 고희준高羲駿, 민간 대표 유길준, 실업가 대표 조진태趙鎭泰 등도 출발했다. 이어서 11월 1일에는 『제국신문』 사장 정운복, 한인기자단 대표로 국민신보사 기자이자 일진회원인 김환金丸 등이 출발했다. 이들보다 앞선 10월 29일에는 일진회를 대표해 부회장 홍긍섭洪肯燮과 평의원 장동환張東煥이 추도 제문을 지어 파견되었다. 


이등사건이 한국과 일본에 끼칠 영향력은 매우 큰 것이었기에 조문이나 추도에 소홀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이등사건에 대한 황실과 정부의 반응은 그 이상이었다. 순종은 11월 4일 내린 조칙 서문에서, “이등공은 일본의 원훈元勳될 뿐 아니라 동양평화의 지보자持保者이며 또 실로 우리나라 개발의 일대 은인”이고, ‘일본의 보호에 의지하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으며, “일본제국의 주석柱石될 뿐더러 진실로 짐의 국가의 사표로 궐훈闕勳과 궐덕闕德이 전고에 없으며 … 이렇듯 광패狂悖한 무리가 세계형세에 어두워 일본의 돈의를 멸여蔑如코자 하니 … 신민으로 짐의 의사를 위배하여 흉학 자사滋事케 하는 자”가 없어야 민중이 안정되고 국기國基가 공고해진다고 하였다. 조칙 발표와 함께 통감 관저에서 열린 ‘통감부추도회’에 조사弔辭를 전달했다. 고종은 오전 10시 직접 통감관저를 방문해, “이등공작의 국장일에 통감이 통도痛悼의 정이 가장 절실할 것으로 생각하여 방문했다.”는 뜻을 전달했다. 註55) 


이러한 황실과 정부의 대응에 대해 기독교계 일부에서는, “지난번 황족 완평군完平君의 서거에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특별히 이등공에게 이러한 조처를 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난”했다. 註56) 외국 주요 인물에 대한 조문이나 조례가 없지는 않았다. 예컨대 1909년 12월 17일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가 사망했을 때나 1910년 5월 6일 영국황제 에드워드 17세가 사망했을 때, 고종과 순종은 각각 영사관으로 칙사를 보내는 한편, 각 대신을 비롯한 일반관리들도 조문했다. 심지어 5월 20일 에드워드 7세의 장례당일에는 각 부부원청과 사법청 재판소 관리 등의 반일半日 휴가로 당일 예정된 재판도 연기될 정도였다. 


이등사건에 대한 사회세력들의 대응도 대체로 이와 다르지 않았다. 일부 배일단체나 인물을 제외하면, 상층관리를 비롯해 계몽단체와 인물들은 오히려 이등을 기리는 크고 작은 추도회를 개최하거나 참여했다. 


2. ‘이등박문추도회’ 참여 계열


1909년 11월 4일 동경 일비곡日比谷 공원에서 일본 추밀원 의장이자 한국 황태자의 태사太師인 이등박문의 국장이 치러졌다. 이등 국장을 앞뒤로 국내에서도 한국정부를 비롯한 각 방면의 주요 단체들이 합동으로, 혹은 개별로 다양한 ‘이등박문추도회’ 註57)를 개최했다. 이등 관련 조문·추도·추모 행사는 각 지방에서도 크고 작은 추도회·애도회哀悼會 등의 형태로 전국 규모로 치러졌다. 註58) 〈표 1〉은 1910년 초까지 확인된 각종 이등 관련 행사를 조사한 것인데, 경북 신령군에서 개최된 추도회를 빼면 모두 한성에서 개최되었다. 

 

〈표1〉조문 · 추도 · 추모 관련 행사와 단체
단체명 시기 내용과 참여 단체 비고
한국정부대표조례단1909.10.30(31)~1909.11.9한국정부 파견 조례단조문관련
각단체대표조례단1909.10.32~1909.11. 말사회단체대표 파견 조례단
경성한인기자대표조례단1909.11.1~1909.11.16한인신문대표 파견 조례단
관민추도회1909.11.2~1909.11.4내각주도로 한성부민이 참여하여 개최







국민대추도회1909.11.8~1909.11.중한성부민회 주최, 각 사회단체의 참여로 준비(중지)
신령군추도회1909.11.4군대 보통학교에서 군수주도로 개최 → 사죄단
일진회추도회1909.11.4독립관에서 400여 명 참여, 대규모 개최
상업회의소추도회1909.11.4추도회 계획(개최 미확인)
대동교회추도회1909.11.4참여 대신 경조 전문 발송
신군경의회추도회1909.11.4동대문 밖 영도사에서 개최
대한광부회1909.11.4종로 수전동 사무소에서 개최
구세군1909.11.5구세군대장 허가두의 집에서 추도기도회 개최
한자신문사추도회1909.11.14원흥사에서 친일신문 주도로 개최
한자통일회추도회19009.12.12영도사에서 친 이완용계열의 주도로 개최
13도대표지방위원추도회1909.12.12영도사에서 지방위원들이 각 도 대표명의로 개최
신궁봉경회추도회1910.1.14한국은행신축장에서 개최
봉신회추도회1910.1.13남부 공동의 회관에서 개최(이등의 위패와 3년상 결정)
통감부추도회1909.11.4대화정 일본군사령부에서 통감부 주최在京
일본인추도회
일본겨류민단추도회1909.11.7본원사에서 거류민단 주최
연합추도회1909.12.14경성호텔에서 이등사망 50일 기념 추도회(알본적십사 ·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지부)
사죄단1909.10.29~1910.3.말(존속)전국민을 대표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사죄하기 위해 조직추모행사관련
송덕비건의소1909.11.초~1910.3이등을 기리는 송덕비 건립을 목적으로 조직
동아찬영회1909.11.5~1910.3.중이등을 기리는 동상 · 표창을 만들기 위해 조직

자료 : 『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통감부문서』 7·『원한국일진회역사』. 

비고 : 이등박문을 기리는 행사는 1910년 8월 일제강점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매일신보』나 『경성일보』에 10·20주년 기념 추도행사가 치러졌다는 관련기사가 확인된다.


이중 제일 큰 규모로 치러진 관민추도회와 국민대추도회의 행사 참여 단체와 인물, 행사 절차 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1) 관민추도회 계열


‘관민추도회官民追悼會’는 대한제국정부와 내각이 주도하고 한성부민회漢城府民會가 보조해 개최한 대규모의 추도회였다. 註59) 정부는 11월 2일 추도회 개최를 결정해 장례비를 지출하는 등 행사와 관련된 일체를 준비하고, 한성부민회는 회장 유길준을 대신해 부회장 윤효정尹孝定이 한성 내 각방各坊 임원과 의원을 비롯한 일반인을 반강제로 동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註60) 발기인과 추도회 각 부문위원은 다음과 같다. 註61) 


◇ 발기인 : 이완용총리대신·민병석궁내부대신·김윤식중추원 의장·박제순朴齊純·내부대신·고영희高永喜·탁지부대신·조중응농상공부대신·이용직李容稙·학부대신·이병무李秉武·친위부장관·조민희승녕부총관·윤덕영시종원경·유길준한성부민회장 

◇ 위원장 : 한창수韓昌洙 

◇ 제문祭文 담임위원 : 조동희趙同熙·성기운成岐運·유성준兪星濬·여규형呂圭亨·정영두鄭永斗·홍충현洪忠鉉 

◇ 제수祭需 (담임)위원 : 장헌식張憲植·이항구李恒九·김명수金明秀·고원식高源植 

◇ 발첩發帖 (담임)위원 : 홍운표洪運杓·이원용李源鎔·어용선魚瑢善 

◇ 포진鋪陳 (담임)위원 : 유맹劉猛·원응상元應常·윤치오尹致旿·이겸제李謙濟·최상돈崔相敦 

◇ 사찰司察 (담임)위원 : 구연수具然壽·정진홍鄭鎭弘·어윤적魚允迪·김기원金基元·조성구趙聲九·한상룡韓相龍·조병택趙秉澤·백완혁白完爀·백인기白寅基·예종석芮宗錫 

◇ 회계(담임)위원 : 조원성趙源誠 

◇ 독제문讀祭文 (담임)위원 : 한창수·이회구李會九·오세창吳世昌 

◇ 수부受付 (담임)위원 : 조제환趙齊桓·유승겸兪承兼·신우선申佑善·권보상權輔相·석진형石鎭衡·상호尙灝·이승현李升鉉·김진옥金鎭玉·서병협徐丙協·윤정석尹晶錫 


이들은 정부 관리이거나 정부가 출연한 기관의 관리이면서, 한성부민회·대한협회·일진회 등 다양한 단체에 속해 있었다. 먼저 단체에서 참여한 인물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註62) 


① 한성부민회 : 유길준·백완혁·백인기·유승겸·윤효정[대]·조병택·한상룡 

② 대한협회 : 석진형·여규형·오세창[천]·홍충현·홍운표 

③ 일진회 : 상호 註63)·예종석[한] 註64)·정영두[한] 


발기인과 각 위원 총 53명한창수 중복 중 15명이 단체를 대표해 참여했다. 


다음으로 정부 출연 기관 관리로, 백완혁·윤정석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위원이자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 감사, 한상룡은 동양척식주식회사 이사, 여규형은 관립한성고등학교 교수, 이승현은 공립안성보통학교 학무위원, 석진형은 법학교 교수, 상호는 농상공부 기사였다. 


동경에서 이등 국장이 치러지던 11월 4일 오후 2시부터 장충단에서 2시간여 동안 정부대표 총리대신 이완용, 궁내부대표 시종원경 윤덕영 등을 비롯한 전현직 대신·관료, 정부 내 각 관리, 친위부 장교와 보병·기병, 황족과 여관女官, 한성부민 대표 회장 대판 윤효정, 각 단체 대표, 한성부민, 각 학교 직원·학생, 그리고 각 지방에서 올라 온 자 등 1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일찍이 보지 못한 성대한” 추도식이 개최되었다. 


추도회 절차는 “사례편람四禮便覽을 준용”해 총리대신 이완용의 제문에 이어 각 대표들의 제문낭독과 분향, 황족·관리·사민士民과 각 학교 직원·학생 등의 참례로 이어졌다. 추도회 당일 한성의 분위기도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내각 비서관 고원식은 11월 3일 총리대신 이완용의 명에 따라 각 부서 관리가 추도회에 모두 참여할 수 있게 휴무하고, 각 관아 앞에는 반기半旗를 걸게 했다. 학부대신 이용직은 관립학교장·한성부윤·각 관찰도에 훈령을 내려 모든 학교는 휴학하고, 음악가곡도 일체 정지시켰다. 특히 추도회에 동원된 한성부 내 각 학교 교원과 학생들은 엄숙하고 치밀한 절차에 따라 행사에 참여하도록 강제되었다. 註65) 각 경찰서는 경시청의 지시에 따라 한성부 내 각 민가에 기주旗柱에 마포麻布를 묶은 반기를 문 위에 걸어 조례를 표하도록 했다. 통감부가 “배일의 책원소策源所로 칭해지고 있던 기독교청년회관에서도 조기를 내걸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고 한다. 


관민추도회에 참여한 단체와 인물은 정부 관리이거나 사회 각계를 대표한다는 상징성을 갖는다. 결국 대한제국 황실과 정부가 관민추도회를 통해 의도했던 것은 이 행사를 통해 한성부민 만이 아니라 모든 한국민들이 이등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2) 국민대추도회 계열


‘국민대추도회國民大追悼會’는 한성부민회 주최로 각 단체·인물들이 연합해 추진되었다. 註66) 한성부민회는 11월 8일 제9회 의사회議事會를 열어 ‘대한국민(대)추도회’ 개최를 결정했다. 註67) 구체적으로는 11월 26일 오후 1시 한성부민회관에서 전국민추도회를 개최하고, 특히 전국 13도와 각 항구 대표자에게 취지를 보내 참여케 하며, 준비위원으로 100명을 선출하는 것이었다. 발기인과 준비위원은 다음과 같다(가나다 순으로 정리). 註68) 


◇ 발기인 : 강엽姜曄·강중원姜重遠·강화석姜華錫·고치준高致俊·권동진·김병하金炳夏·김용제金溶濟·김일선金一善·박승직朴承稷·백완혁·사일환史一煥·심홍택沈宖澤·양세현梁世賢·여병현呂炳鉉·예종석·오세창·유근·유길준·유병필劉秉弼·윤효정·이규식李圭植·이두병李斗秉·이만무李晩茂·이민경李敏卿·이순하李舜夏·이인기李仁基·이재형李在衡·이종일李鍾一·이춘세李春世·이학재李學宰·임긍순任肯淳·장효근張孝根·정달영鄭達永·정영택鄭永澤·정운복·조윤용趙允鏞·한만용韓晩容·한석진韓錫振·현은玄檃·홍선표洪璇杓·홍충현洪忠鉉 


◇ 위원장 : 윤효정 

◇ 위 원 : 강엽·강윤희姜玧熙·강중원·강화석·고윤묵高允默·고희준高羲俊·구연호具然浩·권동진·김린金麟·김상범金相範·김승규金昇圭·김시현金時鉉·김용제金溶濟·김용진金鏞鎭·김용집金用集·김윤오金允五·김일선·김중환金重煥·남궁억·남궁훈南宮薰·민영린閔泳璘·민형식閔炯植·민형식閔衡植·박승봉朴勝鳳·박승빈朴勝彬·박승직·박정병朴晶秉·배동혁裵東爀·백완혁·백인기·송진옥宋振玉·신광희申光熙·신태휴申泰休·심의성沈宜性·안상호安商浩·애사영崖思永·엄달환嚴達煥·여병현呂秉鉉·예종석·오세창·유근·유문환劉文煥·유병필·유신혁劉臣爀·유진태兪鎭泰·유학주兪鶴柱·윤교영尹喬榮·윤정석尹晶錫·윤정식尹定植·윤치호尹致昊·이건영李健榮·이겸래李謙來·이경봉李庚鳳·이관화李觀化·이근배李根培·이근홍李根洪·이길선李吉善·이면우李冕宇·이범구李範九·이범철李範喆·이봉래李鳳來·이순하·이승현李升鉉·이억李億·이우영李宇榮·이응종李膺鍾·이인직李人稙·이학재·이해조李海朝·이희직李熙直·임긍순·장기렴張基濂·장도張燾·장효근·전태헌全台憲·정달영·정봉시鄭鳳時·정영두·정영택·정운복·정응설鄭應卨·조동원趙東元·조병택趙秉澤·조윤용·조종태趙鍾泰·최강崔岡·최석조崔錫肇·최영년崔永年·최진崔鎭·태명식太明軾·한기준韓基準·한상룡·한석진·현은·홍긍섭·홍재기洪在祺·홍종완·홍충현·홍태윤洪泰潤·홍필주洪弼周  


이등박문추도회 실행위원 관련기사


이 추도회는 정부가 주도한 관민추도회와는 다르게 대한제국기 자치단체인 한성부민회가 주도하고, 대한협회 및 일진회와 협의하거나 기타 사회 여러 단체의 인물들이 모두 망라되어 추진한 행사였다. 발기인·위원·위원장 등 참여인원은 총 118명이고, 이중 한성부민회·대한협회·일진회를 대표해 참여하는 인물은 70명이다. 


① 한성부민회 

백완혁·백인기·사일환·유길준·윤정석·윤효정[대]·이규식·이근홍·이인직·정응설·조병택·조윤용·한상룡 

② 대한협회 

강엽·강윤희·강화석·구연호·권동진[천]·김린·김상범·김윤오·김일선·김중환·남궁억[한]·남궁훈·박승봉·심의성·여병현呂炳鉉·오세창[천]·유근[한]·유진태·윤교영·이근배[한]·이만무·이민경[한]·이봉래·이순하·이억·이우영[한]·이종일[천]·이춘세·이학재[한]·이해조·이희직·장기렴[천]·장효근[천]·정달영·정봉시·정영택[한]·정운복[한], 註69) 최강[한]·최진·태명식·한기준·현은·홍충현·홍태윤·홍필주 

③ 일진회 

고희준·김시현·김용진[대], 註70) 신광희·예종석[한]·유학주[한]·윤정식·이범철[대]·정영두[한·대]·최영년·한석진·홍긍섭 


특히 대한협회는 전체 참여인원 118명 중 가장 많은 45명이 참여했다. 


대한협회는 앞서 이등이 사망하자, 10월 말에 단독으로 추도회 개최를 논의하고, 한성부민회나 일진회와도 협의해 연합추도회 개최를 논의한 바 있다. 또한 국민대추도회 이후에도 일진회와 함께 이등사건을 포함해 정부의 정책을 논의하기 위한 정견협정위원회 개최도 협의했다. 註71) 후술하듯이 대한협회는 이완용계열의 국민연설회 참여를 둘러싸고 불화를 겪게 된다. 

〈표2〉국민대추도회 참여 인물의 주요 행적
이름(소속단체) 참여단체  이름(소속단체) 참여단체
강엽(대/호)국시유세단←(국)→국민연설회 이범철(일/대)국시유세단 ←(국)
강윤희(대)(국)→국민연설회 이봉래(대)(국)→국민연설회 · 한국평화협회
강중원(국)→정우회 이순하(대)(국)→국민연설회 · 부민대회
고희준(일△)국시유세단←(국)→국민연설회 · 정우회 이승현(대동)관민추도회←(국)
김승규(국)→정우회 이응종(기)(국)→국민연설회
김시현(일)(국)→국민연설회 이인직(국)→국민연설회 · 국시유세단(일본파견원)
김용진(일/대)(국)→일본광광단 이춘세(대/기)(국)→국민연설회
김중환(대)(국)→국민연설회 이학재(대△/일)송덕비건의소←(국)→국민연설회 · 국민동지찬성회 · 국민협성회
민영린(국)→국민연설회 · 사회당 · 진보당 이해조(대/기)(국)→국민연설회
민형식국시유세단←(국) 장기렴(대)(국)→부민대회 · 국민연설회 · 정우회
박승봉(대)(국)→한국평화협회 정달영(대/호)국시유세단←(국)→정우회
백완혁(한)관민추도회←(국) 정봉시(대/관/대동)(국)→국민연설회 · 부민대회 · 한국평호협회
백인기(한/호)관민추도회←(국) 정영두(한/일/대)관민추도회←(국)
신광희(일△)국시유세단←(국)→국민연설회 정운복(한/대/서)(국)→국민당
신태휴(대동)(국)→국민연설회→정우회 정응설(한/호)국시유세단←(국)→정우회
예정석(한/일△)국시유세단 · 관민추도회←(국)→국민연설회 · 한성보신사 조병택(한)관민추도회←(국)
오세창(천/대)관민추도회←(국) 한상룡(한)관민추도회←(국)
유길준(한)(국)→한자추도회 · 상무조합본부 · 일본관광단 · 제국실업회 한석진(한/일△)(국)→한성보신사
유학주(한/일)(국)→정합방찬성회 · 국민협성진보회 현은(대)(국)→부민대회
윤교영(대동/대)(국)→국민연설회 홍선표(국)→부민대회
윤정석(한)관민추도회←(국) 홍충현관민추도회←(국)
윤효정(대/한)관민추도회←(국) 홍필주(대/기)(국)→국민연설회
이규식(한)(국)→부민대회   

비고 : ① 호→호남학회, 대→대한협회, 한→한성부민회, 일→일진회, 대동→대동학회, 기→기호학회, 천→천도교, 서→서북학회, 관→관동학회 등 

② △는 국민대추도회 이후 탈퇴자 

③ 국민대추도회(국)를 기준으로, ←는 이전, →는 이후, ←(국)→는 앞뒤 행적 


국민대추도회 발기인·위원·위원장 118명 중 학회나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국민대추도회 개최를 앞뒤로 행적이 확인되는 인물은 45명으로 확인된다. 


〈표 2〉에서 행적이 확인되는 45명 중 몇몇을 제외하면 이등 사건 전부터 활동이 이어질 뿐만 아니라, 국민대추도회가 발기되고 준비되는 과정에서 교류와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 중 대한협회가 21명, 한성부민회가 15명, 일진회가 10명이다중복 포함. 그런데 일진회가 12월 4일 ‘합방성명서’를 발표하자, 대한협회는 주요 인물들이 대거 국민연설회에 참여하거나 별도의 ‘대회’를 추진하고, 또 몇몇은 친일단체에 적극 참여했다. 한성부민회는 4명의 활동만이 확인된다. 일진회는 합병 동조세력을 규합해 정국 주도권을 놓고 이완용계열과 대립했다. 


국민대추도회는 한성부민회장 유길준의 일본체류가 길어지면서 실행되지 않았다. 추도회를 주도한 인물들이 개최하려는 의지가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오히려 이들은 일본이 이등사건을 계기로 무력을 앞세운 대한정책을 전개할 것으로 판단하고, 각자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추도회를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3. 일진회와 이완용계열의 대립


이등에 대한 조문·추도·추모 관련행사는 〈표 1〉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 관민추도회나 국민대추도회를 제외하면 모두 단일단체에서 주최한 행사라는 것, 둘째 행사주체가 ‘친일성향’의 단체라는 것, 셋째 이등의 덕을 기린다는 명분으로 한 송덕비건의소·동아찬영회 등이 조직되어 추모행사를 기획한 것 등이다. 본격적으로 ‘친일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조직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註72) 


각종 행사가 치러지면서 합병에 공을 세우기 위한 주도권 경쟁이 본격화되었다. 일진회는 1909년 12월 4일 회장 이용구李容九가 100만 회원 명의로 ‘합방성명서’를 발표해 주도권 장악에 나섰고, 이에 대해 이완용계열은 일진회를 비난하며 세력을 규합하면서 일본정부와 정치·외교적인 타협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일진회와 이완용계열로 분류할 수 있는 세력이 어떻게 결집해 갔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일진회 계열로는 ‘한자신문사추도회漢字新聞社追悼會’·‘신령군추도회新寧郡追悼會’·‘사죄단死罪團’, 이완용 계열은 ‘국민연설회國民演說會’·‘한자통일회추도회漢字統一會追悼會’로 분류할 수 있다. 


1) 일진회계열


(1) 한자신문사추도회

국민신보사國民新報社 사장이자 일진회측 정견협정위원政見協定委員인 최영년崔永年은 한성에서 발행되는 한인 신문사와 함께 연합추도회 개최를 추진했다. 註73) 그러나 연합추도회는 황성신문사 사장 유근, 제국신문사 사장 대판代辦 한기준, 대한민보사 사장 오세창 등의 거절로 실행되지 않았다. 반대 이유는 이미 여러 형태의 추도회가 개최되었거나 준비 중이므로 굳이 별도의 추도회 개최가 필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11월 14일 동대문 밖 원흥사元興社에서 국민신보사·대한신문사·한성신보사 등 3개 신문사만 참석한 가운데 한자신문사추도회가 열렸다. 註74) 그런데 이 추도회가 준비되는 과정에서 대한매일신보사는 처음부터 제외되었다. 앞서 보았듯이 대한매일신보사는 이등이 사망하자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다는 소문이 있었고, 추도회나 추모단체 결성 등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혹시나 일본인들이 싫어할 것을 우려해 제외시킨 것이다. 


(2) 신령군추도회

11월 4일 장충단에서 관민추도회가 열리던 날, 경상북도 신령군 보통학교에서 군수 이종국李鍾國 주최로 농회장農會長 박상기朴祥琦와 농회 회원, 지방위원 황응두黃應斗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회가 열렸다. 註75) 이종국은 추도연설에서 “한국 멸망이 비조즉석非朝卽夕이라. 전前 민영환閔泳煥·최익현崔益鉉 등 비루한鄙陋漢이 사死 시에 국민 제한諸漢이 애통여부모哀慟如父母더니 금차今此 세계영웅 한국 은인 이등공이 조난에 일한一漢도 비창悲悵 자가 무다”고 애통해 하면서, 황응두를 중심으로 일본을 방문해 사죄하고 용서를 비는 이른바 ‘도일사죄단’을 발기할 것을 주문했다. 


(3) 사죄단

1909년 10월 29일에 일진회 경북지부 총무 윤대섭尹大燮, 평의원 김영두金榮斗, 회원 강영주姜永周 등이 사죄단을 조직했다. 註76) 이들이 10월 29일자로 전국 각지에 보낸 「고급서告急書」에는 ‘오늘날 한국의 독립과 개명진보는 모두 일본의 덕택이며, 이등은 한국 중흥의 원훈이자 동양평화와 황색인종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 위대한 인물’이라고 치켜세웠다. 또한 이등 사건이 결코 전 국민의 뜻이 아님을 사죄하기 위해 대표를 조직해 일본에 파견하자고 주장했다. 註77) 그런데 이와 유사한 내용의 11월 3일자 「고급서」가 발기인 황응두·박상기 명의로 황해도 황주黃州지방위원 앞으로 보내졌다. 註78) 두 사죄단이 어떤 관계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윤대섭 등은 자신들이 발기한 사죄단이 호응을 받지 못하자 황응두 등과 연계해 조직 강화를 꾀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일진회 경북지부 간부 윤대섭·김영두·강영주 등이 『대구신문大邱新聞』 주필 삼포장삼랑三浦庄三郞의 지도로 사죄단을 발기하고 통고문을 각지로 보냈고, 註79) 삼포와 친분이 있던 이종국도 추도회를 계기로 사죄단 조직에 앞장 선 것이다. 따라서 삼포를 매개로 경북의 일진회 세력과 이종국·황응두 등 친일적인 인물들이 사죄단을 준비하면서 하나의 사죄단으로 통합한 것이다. 


사죄단은 몇 차례의 결합과 분리를 겪으면서 대외적인 통문을 발송했으나 별다른 효과가 없자, 12월 15일에 다시 회의를 열어 12명의 13도사죄대표위원十三道謝罪代表委員과 사무소에서 일을 처리할 11명의 사무원을 선임했다. 註80) 일본에 가서 사죄하는 방법은 먼저 이등의 묘 앞에서 제문을 낭독하고, 궁내성에 사죄상주문을 올리고 온다는 것이었다. 


12월 19일 일본으로 출발할 사죄위원은 경상북도 황응두·곽태인郭太仁·최해규崔海圭, 전라남도 장준상張俊相, 전라북도 정인창鄭寅昌, 평안북도 송학승宋鶴昇·김태환金台煥 등 7명으로 결정되었다. 註81) 그나마 사죄위원들은 부산까지 갔다가 여비부족으로 5명은 돌아가고 정인창·송학승 2명 만 사죄단 대표로 일본에 다녀왔다. 註82) 


이상 두 종류의 추도회와 ‘사죄단’은 모두 일진회와 직접·간접으로 관계가 있다. 국민대추도회에 참여하고 있던 일진회는 대한협회와 연합을 추진해 이완용 내각을 압박하는 한편 이등사건을 계기로 사회세력을 결집해 통감부를 압박하면서 일본정부에도 자신들의 의도와 계획을 지속적으로 알렸다. 


2) 이완용계열


(1) 국민연설회


이완용은 한국 정부의 총리대신 자격으로 이등박문을 조문하고, 관민추도회를 주도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결집했다. 내각 조문대표로 일본에 간 조중응趙重應을 통해 일본의 대한정책을 탐문하는 註83) 한편 일진회 조문대표 홍긍섭이 귀국 후 모종의 성명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註84) 11월 27일 탁지부대신 고영희高永喜를 대판大阪의 조폐국 화폐시찰을 명목으로 일본에 파견해 수상 계태랑桂太郞에게 5개조의 합방안을 제출했다. 註85) 5개 조항의 합방안은 다음과 같다. 


一. 한국 황제는 종전대로 둘 것. 

一. 원로는 일본 화족과 같은 열에 있게 할 것. 

一. 상당한 이력이 있는 자는 질록秩祿을 줄 것. 

一. 한국민은 일본에 입적하여 일본의 신민臣民이 될 것. 

一. 한국에서 행하는 정무政務의 수반은(즉 대신) 한국인으로 할 것. 註86) 


그러나 계태랑은 현상유지를 강조하면서, 설혹 ‘합방’을 받아들인다 해도 요구한대로 할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다. 註87) 이완용은 이후 이 조항을 조건으로 일본정부와 병합 흥정을 벌였고, 결국 1910년 8월 총리대신으로 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한편 12월 3일에는 임시국민대연설회 발기회발기인 32명 취지서와 함께 연설회 개최를 공고했다. 국민연설회는 이완용계열이 국시유세단·대한상무조합본부·신궁봉경회 등 친일단체를 규합해 일진회의 ‘합방청원’을 저지하고 자신들의 명의로 ‘병합’을 추진하기 위해 조직한 친일어용단체였다. 註88) 『대한매일신보』는 이완용이 일진회 반대세력을 규합해 ‘병합’을 추진하기 위해 원로정치인들과 유력자들을 모아 국민연설회를 발기한 것이라고 했고, 註89) 『황성신문』은 12월 4일 일진회의 ‘합방성명서’가 발표되자 이인직의 주선으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의 집에서 원로들이 모여 대책을 논의해 만들어진 것이 국민연설회라고 지적했다. 註90) 이인직은 이후에도 이완용의 밀명으로 일본에 가서 ① 동경의 신문 교란, ② 재일한국유학생 사주, ③ 대한동지회에 대한 운동, ④ 일진회에 대한 한국인의 반대 선전 운동 등에 주력했다. 註91) 


12월 5일 원각사에서 4,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국민연설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앞으로는 일진회원은 국민으로 인정치 말고 어느 때라도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연설회를 개최’할 것을 결의했다. 註92) 이후 국민연설회는 한성을 시작으로 전국에 유세위원을 보내 일진회를 공격하고, 내부와 경시청에 글을 보내 일진회의 성명서를 압수하도록 촉구했다. 또한 내각과 통감부에도 글을 보내는 한편 한일 양국 황제에게 보낼 상소문도 작성했다. 이로써 전국 각지에서 일진회를 규탄하면서 국민연설회를 지지하는 글과 성금이 모였다. 1910년에 들어서도 일본 내각·중의원·귀족원 등에 글을 보내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던 국민연설회’는 1~2월의 침체기를 거쳐 3월 이후부터는 거의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 


국민연설회 활동이 침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본정부와 통감부의 소극적인 대응, 무엇보다 병합정책에 대한 일본정부의 방침결정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게다가 1909년 12월 22일 종현鐘峴의 천주교회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다녀오던 이완용이 이재명李在明의 저격을 받았다. 통감부는 각종 정치단체의 격문·집회를 금지해 활동이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국민연설회는 이완용계열이 일진회 반대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조직한 것이지만 참여인물·단체의 목적은 조금씩 달랐다. 대한협회 상층부는 12월 12일 한성 내 각 단체 대표들을 규합해 비합방非合邦 여론을 모으기 위해 별도의 국민대회 개최를 계획하고, 註93) 대한협회 내의 또 다른 계열은 12월 11일 일진회 해산과 국민신보사 폐쇄를 건의하는 부민府民대회 개최를 계획했으나 통감부의 저지로 취소되었다. 즉 당시 대한협회는 국민연설회가 생각보다 의외의 호응을 받게 되자 국민대회와 부민대회를 통해 자신들이 주도하는 정치기반을 만들려고 했다. 결국 국민연설회는 반反일진회라는 공동의 목적조차도 일치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급조한 유령단체였다. 


(2) 한자통일회추도회


이완용계열의 반일진회 세력규합과 견제가 계속되는 가운데 이등박문 사망 50일을 註94) 이틀 앞둔 12월 12일에 동대문 밖 영도사永道寺에서 ‘한자통일회추도회’가 개최되었다. 註95) 한자통일회 註96) 지회장 이재곤李載崐의 개회취지 설명과 한성부민회장 유길준의 「이등공伊藤公의 역사」, 지석영池錫永의 추도문 낭독, 이완용의 위사慰辭 진술 등의 순서로 치러졌다. 추도회의 규모나 참여인원, 연설문·추도문 등의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추도회가 끝난 후 각 대신들이 별실에 모여 내각 공격에 대한 예방책을 강구하기 위해 비밀회의를 개최’ 했다는 것, 註97) 더욱이 추도회 시기도 일진회의 ‘합방성명서’가 발표된 이후인 것으로 볼 때 이완용 주도로 개최된 반일진회 성격의 행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1910년대 일제의 ‘친일파’ 육성책


1. 조선귀족의 ‘창출’과 이용


1) 수작자 선정과 현황


1910년 8월 22일 강제 체결된 ‘한일합병조약’ 제5조는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勳功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게 영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급을 부여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합병이 정식 공포된 8월 29일 황실령 제14호로 공포된 「조선귀족령朝鮮貴族令」 총 22개 조항의 전문은 “이가李家의 의친懿親 및 그 방가邦家에 큰 공이 있는 자는 마땅히 이를 우열優列에 승서陞敍하여 조선귀족으로 삼는다”고 전제하고, 제2조에서 그 대상을 ① 이왕가의 혈족으로 황족의 예우를 누리지 않는 자, ② 문벌 있는 자, ③ (합병에)공로가 있는 자로 규정했다. 1910년 이전 각종 매국 조약에 동조한 이른바 을사오적·정미칠적·경술구적 등은 모두 「조선귀족령」이 규정한 제2조의 3개 조항에 따라 작위를 받았다. 「조선귀족령」으로 작위를 받은 최초 수작자 76명은 ②로서 ③에 해당하는 자가 대부분으로, ①은 ②와 ③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형식적인 조항이었다. 

조선귀족의 선정 결과를 보면 ‘합병에 공로가 있는 자’가 무엇보다 비중있게 고려되었다. 이것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 1907년 7월 ‘정미조약’, 1910년 8월 ‘합병조약’에 동조한 5적·7적·9적이 모두 작위를 받은 사실에서 입증된다. 이를 정리하면 〈표 3〉과 같다. 


〈표3〉국권침탈 조약 동조자와 수여된 작위
번호 이름 을사조약 정미조약 합병조약 비고
1이완용학부대신참정대신총리대신백작(후작 승작)
2박제순외부대신 내부대신자작
3권중현농상공부대신  자작
4이지용내부대신  백작
5이근택군부대신  자작
6조중응 법무대신농상공부대신자작
7고영희 탁지부대신탁지부대신자작
8이병무 군부대신시종무관장(친위부장관)자작
9임선준 내부대시 자작
10이재곤 학부대신 자작
11송병준 농상공부대신 자작(백작 승작)
12민병석  궁내부대신자작
13윤덕영  시종원경자작
14김윤식  중추원의장자작
15이재면  어전회의 참석'공족'
5명7명9명15명


다음으로 대한제국 황실과 종친 및 인척으로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註98) 황실과 종친 관련자는 다음과 같다. 


① 고종과 그 직계 자손인 순종·의친왕이강·영친왕이은으로 이들은 ‘왕전하’와 ‘공족’의 예우를 받았다. 

② 흥선대원군 4형제인 완림군이창응·흥완군이정응·흥인군이최응·흥선군이하응의 직계 후손이다. 이들 중 공족은 흥선군의 장남 이재면, 조선귀족은 흥선군의 사위 조경호남작 거부·조정구남작 거부·이윤용남작 등 3명, 완림군의 손자 이기용자작, 흥완군 아들 이재완후작, 흥인군의 손자 이지용백작 등이다. 

③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이복동생들인 은언군·은신군·은전군 3형제로 은언군의 후손은 이완용李完鎔·자작과 이해승후작, 은전군의 후손으로 이재각후작이 있다. 은신군은 남연군-흥선군 3형제로 ②에 해당한다. 

④ 기타 왕족 후예로 이해창후작·이재곤자작·이재극남작·이근호남작·이근택자작·이근상남작 3형제, 이용태남작·이용원남작·이종건남작·이병무자작·이건하남작 등이다. 


황실과 혼인으로 맺어진 인척은 다음과 같다. 註99) 


○ 전주이씨 : 이재완·이재각·이해창·이해승·이지용·이완용李完鎔·이기용·이근택·이재곤·이병무·이근상·이건하·이용태·이종건·이봉의·이근호·이재극·이용원 

○ 여흥민씨 : 민영린·민병석·민영규·민영소·민영휘·민상호·민영기·민종묵·민형식 

○ 해평윤씨 : 윤택영·윤덕영·윤웅렬 

○ 안동김씨 : 김성근·김가진·김종한·김학진·김병익 

○ 풍양조씨 : 조동윤 

○ 반남박씨 : 박영효·박제순·박제빈·박기양 

○ 연안김씨 : 김사준·김사철 

○ 우봉이씨 : 이윤용 


작위의 종류는 일본의 「화족령華族令」에 준하는 공작公爵·후작侯爵·백작伯爵·자작子爵·남작男爵 등 5개지만, ‘공작’은 수여하지 않았다. 대신 구한국 황실을 예우한다는 명목으로 고종·순종 및 황태자 이은李垠 외에, 순종의 ‘의친’인 의친왕 이강李堈은 이강공 전하, 흥친왕 이재면李載冕은 이희공李熹公 전하로 해 ‘공족’으로 예우했다. 「화족령」에 따른 공작은 없지만, 그 변형으로 공족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 전하, 순종은 창덕궁 이왕 전하, 황태자는 왕세자 전하로 ‘공족’이 아닌 ‘왕족’으로 예우했다. 


조선귀족 선정은 한일합병 직후 시작되었고, 조선 측은 농상공부대신으로 합병조약 체결에 앞장선 조중응趙重應이 참여했다. 원래 인선人選에는 총리대신을 지낸 이완용李完用이 담당해야 했으나, 이완용이 이재명李在明의 피습으로 치료 중이었기 때문에 조중응이 맡게 된 것이다. 註100) 수작 후보자가 정해지면 일본 총리대신에게 보고되었고, 일본 궁내성宮內省은 수작 후보자를 대상으로 신분과 기타사항을 조사했다. 註101) 최종 수작자는 일본 천황의 재가를 거친 후 정부 관리를 조선에 파견해 작위 수령서 전달식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註102) 


1910년 10월 7일 조선총독부에서 열린 작위수여식에서 확정된 조선귀족은 76명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수작을 크게 환영했다. 註103) 이날 수작식 광경을 『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 전 친위부장관 이병무 씨는 구한국 육군 부장의 무장을 입고 총독부에 먼저 오르니 찬란한 금색을 사방에 떨쳐 의기가 양양하게 제1등으로 현관에 도착하고 연속해 정1품 보국 민영소와 전 탁지부대신 고영희, 이재완·윤택영, 전 내부대신 박제순, 이재극, 전 법부대신 이하영 등이 전후로 서로 총독관저에 들어왔다. … 전 총리대신 이완용, 전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전 내각서기관장 한창수 등이 마차를 함께 타고 도착하고, 전 탁지부대신 임선준, 전 학부대신 이재곤, 전 시종원경 윤덕영, 전 궁내부대신 민병석 등이 이어 수십 개의 마차를 앞뒤로 위세를 떨치는 중에 전래의 보교步轎를 급히 몰아 오는 자도 있어 복장의 금색은 황황한 모양인데, 이들 중에는 대례복을 착용한 자가 그 대부분을 점하고 견모絹帽와 후록厚祿 고투故套로 쇄락灑落하게 장식한 자도 있고 혹은 의관속대衣冠束帶로 꾸며 각종 다양한 모습을 이루었으나 각자 날리는 희열은 일장 가관이었더라. 註104) 


수작식에는 76명 중 50여 명이 참석했고, 20여 명이 참석하지 않았다. 수작식 전에 작위수여 통보를 받은 자들 중 지방에 거주하거나 병이 있어 대리인이 참석하거나, 아니면 원로 및 수작을 거부한 경우도 있었다. 註105) 


1911년 2월 22일에는 조선총독 관저에서 63명이 참석한 가운데 ‘작기본서봉수식爵記本書逢授式’이 열렸다. 註106) 76명의 수작자 중 13명이 불참한 것인데, 작위 거부·반납자가 8명이었고 불참자가 5명이었다. 불참자 중 조동윤은 동경에서 왕세자 이은의 동궁 무관장으로 재임하고 있어 불참했으나 동경에서 증서를 받았고, 송병준도 동경에 머무르면서 증서를 받았다. 나머지 3명은 명확하지 않지만, 신병으로 불참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 10월 7일 수작식을 통해 작위가 수여된 최초 수작자 76명은 다음과 같다. 


◇ 후작 : 박영효朴泳孝·윤택영尹澤榮·이재각李載覺·이재완李載完·이해승李海昇·이해창李海昌 

◇ 백작 : 민영린閔泳璘·이완용李完用·이지용李址鎔 

◇ 자작 : 고영희高永喜·권중현權重顯·김성근金聲根·김윤식金允植·민병석閔丙奭·민영규閔泳奎·민영소閔泳韶·민영휘閔泳徽·박제순朴齊純·송병준宋秉畯·윤덕영尹德榮·이근명李根命·이근택李根澤·이기용李埼鎔·이병무李秉武·이완용李完鎔·이용직李容稙·이재곤李載崑·이하영李夏榮·임선준任善準·조민희趙民熙·조중응趙重應 

◇ 남작 : 김가진金嘉鎭·김병익金炳翊·김사준金思濬. 김사철金思轍·김석진金奭鎭·김영철金永哲·김종한金宗漢·김춘희金春熙·김학진金鶴鎭·남정철南廷哲·민상호閔商鎬·민영기閔泳綺·민영달閔泳達·민종묵閔種默·민형식閔炯植·박기양朴箕陽·박용대朴容大·박제빈朴齊斌·성기운成岐運·유길준兪吉濬·윤용구尹用求·윤웅렬尹雄烈·이건하李乾夏·이근상李根湘·이근호李根澔·이봉의李鳳儀·이용원李容元·이용태李容泰·이윤용李允用·이재극李載克·이정로李正魯·이종건李種健·이주영李胄榮·장석주張錫周·정낙용鄭洛鎔·정한조鄭漢朝·조경호趙慶鎬·조동윤趙東潤·조동희趙同熙·조정구趙鼎九·조희연趙羲淵·최석민崔錫敏·한규설韓圭卨·한창수韓昌洙·홍순형洪淳馨 


공작은 없고, 후작이 6명, 백작이 3명, 자작이 22명, 남작이 45명이다. 일제강점기 전체 수작 및 습작 현황은 별개로 분석되어야겠지만, 최초 수작 이후 유일하게 작위를 받은 것은 이완용의 2남 이항구李恒九였다. 이항구는 일본 황태자의 가례 참석과 아버지 이완용의 공로로 1924년 2월 남작을 받았다. 또한 위의 최초 수작자 중 송병준은 1920년 12월 자작에서 백작으로, 이완용은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작陞爵되었다. 습작자 중에는 1916년 3월 자작 고영희를 습작한 고희경高羲敬이 1920년 4월 백작으로 유일하게 승작되었다. 


이완용은 후작으로 승작해 손자 이병길李丙吉이 작위를 이어받았고, 둘째 아들 이항구는 남작을 받아 명예와 권세가 다른 귀족과는 차별되었다. 백작으로 승작한 고희경의 작위는 장남 고흥겸高興謙에 이어 손자 고중덕高重德이 계승했다. 


최초 수작자 중 곧바로 작위를 거부하거나 반납한 인물은 모두 8명이다. 註107) 정리하면 〈표 4〉와 같다. 


〈표4〉최초 수작자 중 작위 거부와 반납자
이름 생몰년 작위 은사공채 비고
김석진1843~1910남작25,000거절 · 음독자결 후 상속신고불이행→특권상실(1912.12.6 조선귀족령 제20조)
조정구1862~1926남작25,000거절 · 자결시도→반납(1913.5.3 조선귀족령 제17조)
민영달1859~1924남작25,000거부→반납(1912.12.6 조선귀족령 제20조)
유길준1856~1914남작25,000거부→반납(1912.12.6 조선귀족령 제20조)
윤용구1853~1939남작25,000거부→반납(1912.12.6 조선귀족령 제20조)
조경호1839~1914남작25,000거부→반납(1912.12.6 조선귀족령 제20조)
한규설1854~1930남작25,000거부→반납(1912.12.6 조선귀족령 제20조)
홍순형1958~1931남작25,000거부→반납(1912.12.6 조선귀족령 제20조)


일제의 귀족령에 따라 가진 수작식 기사와 수작자 명단


이들은 일제와 조선총독부의 작위 수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일본 천황이 주는 작위 사령서도 거절하거나, 강제로 발부된 사령서도 반납함으로써 다른 조선귀족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일제는 작위 거부자나 반납자들을 설득하거나 회유했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제는 조선귀족을 특별 관리하면서 늘 현황을 기록해 놓았는데, 이 중 1925년 10월 작성된 「조선귀족약력朝鮮貴族略歷」에는 작위 거부·반납자를 포함한 수작·습작자 개개인에 대한 내력과 행적, 일본에 대한 공로, 성품 등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註108) 「조선귀족약력」에는 작위 거부·반납자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김석진은 수작 사실이 알려지자 작위를 거부하고 자결함으로써 상속신고불이행에 따른 특권상실이라는 「조선귀족령」 제20조가 적용되었다. 「조선귀족령」 제20조는 ‘작위를 가진 자가 그 품위를 지키지 못할 때는 궁내대신을 거쳐 작위 반납을 청원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조선귀족령」 제17조에 포함된 조항 중 하나였다. 본인이 작위 받기를 거부하고 자결한 것인데도, 억지로 법조항을 적용한 것으로 보아 일제가 김석진 등의 저항과 반발에 얼마나 당황해 했는지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조정구는 작위를 거부하고 합병을 참을 수 없어 자살을 시도했다가 치료를 받던 중 다시 자살을 시도하고, 퇴원 후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적용된 「조선귀족령」은 제17조였다. 


제17조 유작자가 좌개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때는 작을 반상返上케 하거나 혹 예우를 정지하거나 우又는 금지함. 

① 귀족의 체면을 오욕汚辱하는 실행失行이 유有한 자. 

② 귀족의 품위를 보保치 못한 자. 

③ 충순忠順을 결하는 행위가 유한 자. 

④ 궁내대신의 명령이나 혹 가범家範에 위반하여 정상이 중한 자. 


여러 가지 항목이 적용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3항 ‘충순을 결하는 행위’가 핵심이었다. 〈표 4〉에서 ‘비고’는 『일본내각관보』에 발표한 공식 일자와 「조선귀족령」 적용 조항인데, 왜 굳이 다른 7명과 구별했는지 알 수 없다. 조정구에게 적용된 「조선귀족령」 제17조 3항은, 「조선귀족령」 제14조에 별도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조정구가 작위를 거부하고, 반납이 받아들여지게 된 정황은 다음과 같다. 


1910년 10월 7일 수작의 선지宣旨를 전달하자 거부하고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에 관해 총독부에서 발한 공문서는 모두 수령하지 않고 다 돌려보냄에 따라 몇 차례 간절히 이를 깨우쳐 이끌고 또 그 친척 옛 친구 등으로 하여금 여러 차례 설득했음에도 응하지 않았다. 필경 수작의 은혜로움을 받들지 않았다. 충순을 결한 바가 된 자에 대해 조선귀족에 관한 심사위원의 심사를 거쳐 1913년 5월 3일 작위 반납을 명받은 자이다. 註109) 


이외 민영달·유길준·윤용구·조경호·한규설·홍순형 등 6명이 작위 수여를 거부한 정황은 다음과 같다. 


수작의 선지宣旨를 전달하자 병을 칭하거나 혹은 아무런 공로가 없다는 이유로 또는 병합에 의해 한국의 옛 신하였던 자는 물러나 본분을 지키는 것이 본디 그 도리인데 도리어 작을 받아 집안을 일으키는 것은 실로 참을 수 없는 바가 된다고 하여 수령을 거부함으로써 이후 몇 차례 간절히 깨우쳐 이끌었다. 註110) 


이들은 김석진과 함께 「조선귀족령」 제20조를 적용해 1912년 12월 6일자로 반납이 받아들여졌다. 註111) 작위 거부·반납자 8명은 모두 은사공채나, 1912년 8월 수여된 한국병합기념장 등 훈장도 모두 받지 않았다. 


다음으로 1920년 이전에 독립운동 관계로 작위를 잃거나, 습작신고 불이행으로 작위가 중지된 인물은 4명이다. 註112) 정리하면 〈표 5〉와 같다. 


이들은 최초 수작자 중 거부·반납자와 달리 작위와 은사공채를 받고, 1910년대 일제의 시정정책에 나름대로 동조했지만 이후 ‘독립운동’과 관련해 작위를 잃었다.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제강점 전 시기를 통해 이들 외에 ‘독립운동’에 참여한 일로 작위를 잃은 경우는 더 이상 없었다. 물론 아편흡입이나 도박 등으로 예우가 정지되거나 작위를 잃는 경우는 있었다. 

〈표 5〉의 4명에게 적용된 「조선귀족령」은 제16조였다. 


제16조 유작자가 국적을 상실한 때나 혹 금고禁錮나 또는 금옥禁獄 이상의 형의 선고를 받고 그 재판이 확정되었을 때는 그 작위을 잃음. 

제6조나 혹 제7조의 예우를 누리는 자가 전항의 경우에 해당하는 때는 귀족의 족칭을 제하거나 혹 예우를 금지함. 


〈표5〉최초 수작자 중 작위 실작자와 습작불이행자
이름 생몰년 작위 은사공채 비고
김사준1855~1917남작25,000'조선보안법위반사건' 으로 징역 1년→실작(1915.11.9, 조선귀족령 제16조[박탈, 1915.12.14])
김윤식1835~1922자작50,000이용직과 함께 '독립청원서' 제출. 징년 1년 6월, 집행유예 3년→실작(1919.7.17. 조선귀족령 제16조[박탈,1919.7.31])
이용직1852~1932남작100,000김윤식과 함께 '독립청원서' 제출. 징역1년 6월 →실작(1919.7.17. 조선귀족령 제16조[박탈,1919.7.31])
김가진1846~1922남작25,000상속신고 불이행에 따른 습작불능(조선귀족령 제13조 제1호[사망 후 습작신고 불이행])


김사준은 의친왕 이강의 장인으로 남작 작위와 은사공채 2만 5,000원을 받았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같은해 12월 종5위에 서위敍位되었다. 조선귀족으로 모든 혜택과 권리를 누린 것이다. 김사준은 1915년 7월 1차 세계대전을 이용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성낙형成樂馨을 만나, 성낙형이 19개 조항으로 작성한 「중한의방조약안中韓誼邦條約案」을 받아 의친왕 이강을 거쳐 고종에게 전달하도록 부탁을 받았다. 김사준은 의친왕에게 조약안을 전달하려다가 발각·체포되어 같은해 10월 30일 징역 1년을 선고 받아 작위를 잃었다. 註113) 


김윤식과 이용직은 1919년 3·1운동 때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일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1919년 7월 17일 작위를 잃었다. 이들은 자작 작위와 함께 은사공채 5만원과 10만원을 받았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고, 같은해 12월 정4위에 서위되었다. 이들 역시 조선귀족으로 누리던 모든 권리와 혜택을 버린 것이다. 註114) 

김윤식은 1910년 8월 22일 중추원 의장대한제국기으로 어전회의에 참석해 조약 체결에 동조하고, 자작 작위와 함께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경학원 대제학 등에 임명되었다. 이용직은 합병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인물로 지목되어 8월 22일 어전회의에서 배제되었으나, 자작 작위와 함께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註115) 

김가진은 남작 작위와 은사공채 2만 5,000원을 받고,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은데 이어 같은해 12월 정5위에 서위되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하고, 이후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총재를 지냈다. 註116) 김가진의 경우는 작위를 박탈할 마땅한 조항이 없기 때문에 「조선귀족령」 제13조에서 적용한 제11조의 ‘6개월 이내 상속 신고’를 적용해 ‘습작신고 불이행에 따른 습작 불능’으로 처리되었다. 

이상의 8명의 습작 거부 및 습작불이행과 달리 이종건李鍾健, 1843∼1930은 최초 수작자로 남작 작위를 받고, 은사공채 2만 5,000원을 받았다. 양자 이풍한李豊漢은 이종건의 사자嗣子로 1914년 6월 25일 치러진 서위 사령서 전달식에서 종5위를 받았다. 이종건은 1919년 3·1운동 전후 총독부에 작위와 은사금 반납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작위는 사망 후 이풍한이 1931년 6월 이어 받았다. 

한편 백작 민영린은 아편흡입죄로 징역 3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아 1919년 7월 「조선귀족령」 제16조에 따라 작위를 잃었다. 註117) 조희연은 남작 작위와 함께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나 재산을 모두 탕진해 빚으로 쪼들리다가 1915년 5월 사망 직전에 작위를 반납해 「조선귀족령」 제20조가 적용되었다. 註118) 중추원 고문직은 사망 직후 반납되었다. 조희연의 작위 반납은 겉으로는 ‘원願에 의한 반납’이었지만, 모범을 보여야 할 조선귀족이 ‘품위를 잃고’ 작위를 박탈당하는 것을 무마하기 위한 조선총독부의 종용에 따른 것이었다. 이밖에 파산선고를 받은 윤택영·조동희·조민희 등도 실작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작위가 습작된 것으로 보아 예우가 정지된 상태에서 작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작 이지용은 도박에 빠져 예우 정지와 회복을 몇 차례 반복하면서 근근이 작위를 유지하다가, 손자 이해충李海忠이 습작했다. 이외에 남작 김병익은 1921년에 사망하고, 남작 민형식閔炯植은 1934년에 사망했으나 습작계를 제출하지 않아, 김가진에게 적용된 「조선귀족령」 제13조 1항으로 작위가 계승되지 않았다. 

특히 자작 이기용과 후작 이해승 두 명은 해방될 때까지 최초 수작자로 작위를 유지하다가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기용은 1949년 1월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2월에 특별검찰부로 송치되어 3월 공판을 시작해 5월에 징역 2년 6월 및 부동산 1/2경기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646, 전답 5,129평 몰수를 선고받았으나 형집행 중지로 풀려났다. 이해승은 1949년 2월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7월에 불구속상태에서 특별검찰부에 송치되었으나 처리결과는 확인되지 않는다. 

2) 수작자에 대한 우대정책

「조선귀족령」 제5조는 작위에 따라 일본의 화족령과 동일한 예우를 누린다고 했다. 이것은 일본 화족과 조선 귀족이 차별 없는 대등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식민지 모국과 피지배국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별’이 존재했다. 공작이 없는 것, 일본 귀족과 달리 귀족원에 대한 참정권이 없는 것1930년대 초부터 귀족원 의원으로 참여하기 시작함, 일본 천황 ‘배알’ 때 궁중석차의 차별과 대우가 일본 화족보다 아래 단계인 것1920년부터 차별이 없어짐, 조선귀족은 일본 궁내성이 아닌 조선총독의 감독을 받은 것, 국내외 여행 등 행동에 적지 않은 제약이 따른 것 등이다. 다만 은사공채의 경우 일본 화족보다 오히려 많이 지급된 경우도 있었다. 

일제가 조선 귀족을 ‘창출’한 것은 자신들의 표현에 따르면 ‘일본과 병합되기 원한’ 대한제국 황실과 공로자를 우대하는 정책이자, 이들을 우대함으로써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 일반 민에 대한 ‘지도’를 요구함으로써 일종의 간접 통치를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기관지 『매일신보』 사설을 통해 조선에서 시행하는 귀족제도는 영국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적용한 것과 유사하다고 하면서 조선귀족 창출의 시혜성과 근대성을 강조했다. 註119) 이어서 “조선민족 중에서 최고의 지위와 최대한 명예를 향유할지니 위로 성은의 우악優渥하심을 감읍하며 아래로 인민의 모범됨을 자기自期하여 그 덕행과 지식이 사회의 첨망瞻望하는 바가 되면, 조선민족의 대표가 되어 명치성세明治聖世에 태평을 동락同樂”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10월 30일자 사설 「조선귀족(속)」에서 ‘조선귀족의 책임과 국민지도’를 당부하면서 “새로 우열優列에 승서陞敍된 조선귀족이 대일본제국 전부에 대하여 그 우우優遇를 보답하는 것은 반도 상에 서식하는 다수 인민을 위하여 항상 솔선 지도하는 책임을 부담함으로써 명심할 바”라고 강조했다. 즉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과 일반 민에 대한 솔선수범과 지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귀족에 이르러는 그 지위와 성망聲望과 자력이 모두 사민四民의 위에 탁월한 자가 있으니 이제 지려각근砥礪恪勤하여 그 힘을 다하면 그 정치상 사회상에 관한 것은 자연히 귀족으로 집중하여 우리 본토의 공가公家·무가武家·화족에 비하면 멀리 유력한 지보地步를 점함에 이를지라. 반도신민으로 논할지라도 그 자력과 성망과 지위가 있는 자에 의해 솔선지도를 받으면 그 행幸이 막대하다 할지니 그 학문·기술의 진보와 위생·교육 및 자선 등 여러 사업의 정비를 꾀하는 자가 이 귀족을 빼고 누구에게 구하리오. 註120) 

일제가 창출한 76명의 조선귀족은 작위에 따라 최고 50만 4,000원에서 최저 2만 5,000원에 해당하는 은사금을 받았다. 은사금은 현금 일시불이 아닌 공채증서의 형식이었다. 일제는 1910년 8월 29일자 칙령 제327호·제329호를 반포하고, 임시은사금 3,000만 원에 한해 연 5푼分의 국채증권을 발행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양도 또는 저당할 수 없음”을 정하고, 이어서 대장성령大藏省令 제42호 「은사공채규정」1910.9.5으로 원금은 5년 거치 50년 이내 상환, 연 5푼 이자는 매년 3월과 9월에 일본은행이나 대리점 또는 총독이 특별히 지정한 우편국에서 지급하도록 했다. 註121) 이에 따라 총독부는 1911년 1월 13일 수작자들을 총독부로 불러 은사공채증서를 배부했다. 註122) 조선귀족 76명과 ‘공족’ 두 명에게 지급된 은사공채를 정리하면 〈표 6〉과 같다. 

〈표6〉은사공채 지급 현황
작위 은사공채 이름
공족(2) 83만 원이강 · 이희
후작(4) 50만 4000원윤택영
33만 6000원이재완
28만 원박영효
16만 8000원이재극 · 이해승 · 이해창
백작(3) 15만 원이완용
12만 원민영린
10만 원이지용
자작(22) 10만 원고영희 · 민병석 · 박제순 · 송병준 · 이용직 · 조중응
5만 원권중현 · 김성근 · 김윤식 · 민영규 · 임영소 · 민영휘 · 윤덕영 ·
이근영 · 이근택 · 이병무 · 이재곤 · 이하영 · 임선준 · 조민희
3만 원이기용 · 이완용
남작(45) 5만 원유길준 · 조희연
2만 5000원김가진 · 김병익 · 김사준 · 김사철 · 김석진 · 김영철 · 김종한 ·
김춘희 · 김학진 · 남정철 · 민상호 · 민영기 · 민영달 · 민종묵 ·
민형식 · 박기양 · 박용대 · 박제빈 · 성기운 · 윤용구 · 윤웅렬 ·
이건하 · 이근상 · 이근호 · 이봉의 · 이용원 · 이용태 · 이윤용 ·
이재극 · 이정로 · 이종건 · 이주영 · 장석주 · 정낙용 · 정한조 ·
조경호 · 조동윤 · 조동희 · 조정구 · 최석민 · 한규설 · 한창수 ·
홍순형
은사공채 총액 : 618만 9000원
자료 : 「朝鮮人ニ對スル授爵ニ關スル意見(1926.11.22)」(『재등실문서』100-6-843) ; 「조선귀족약력(1929.12)」(『재등실문서』100-4-851)

일제강점 이후 조선귀족에게 준 은사금에 대한 사설

그러나 실제로 은사공채는 조선귀족의 경제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즉 ① 당시 사채금리가 연 100~120%였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액면 가격의 20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 ② 1945년 일제가 패망함으로써 ‘50년 이내 상환’이라는 조건으로 원금은 받지도 못했다는 점, ③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매국증권’이라 경멸당했기에 경제적 가치가 대단히 낮았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허가 없이 공채를 담보로 돈을 빌려 쓰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일반의 생활수준을 감안하면 이자가 적지 않았던 것 등으로 보아 경제적인 면에서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註123) 

1907년 일본인상업회의소에서 조사한 서울지역 백미상등급 1말의 평균값은 1.65원이었다고 한다. 일제강점 초에는 쌀값 변동이 크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은사금 2만 5,000원으로 약 1,515가마의 쌀을 살 수 있었다. 그러면 현재의 쌀값20kg에 5만 5000원=80kg에 22만 원으로 환산으로 1,515가마를 산다면 3억 3,330만 원이 소요되므로, 당시 2만 5,000원은 현재 약 3억 3,000만 원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註124) 당시 2만 5,000원이 현재 약 3억 3,000만 원이라고 하면, 당시 1원은 현재 금액으로 약 1만 3,000원으로 환산할 수 있다. 따라서 이를 다른 금액의 은사공채 금액에 적용해서 계산하면 전체의 대략적인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표7〉최초 수작자(공족 포함)의 은사공채 · 이자(총액) 규모
은사공채 명수 총액 이자(5%) 이자총액
25,00043 1,075,0001,25053,750
30,0002 60,0001,5003,000
50,00016 800,0002,50040,000
100,0007 700,0005,00035,000
120,0001 120,0006,0006,000
150,0001 150,0007,5007,500
168,0003 504,0008,40025,200
280,0001 280,00014,00014,000
336,0001 336,00016,80016,800
504,0001 504,00025,20025,200
(공족)830,00021,660,00041,50083,00
합 계78 6,189,000129,650309,450
비고 : 추가 수작자 남작 이항구는 제외하였다.
 
〈표 7〉은 1911년 1월 은사공채 교부 시점을 기준으로 공족 2명을 포함 

해 78명이 받은 은사공채 총액·이자·이자총액을 계산한 것이다. 은사공채 총액은 약 620만원이고, 1911년 한 해 동안 수령한 이자는 약 13만 원에 이자총액은 약 31만원이다. 이를 현재 시세 1만 3,000원으로 책정해 계산하면 은사공채 총액은 약 806억원이고, 이자는 약 17억에 이자총액은 약 40억원이다. 

결국 ‘조선귀족’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지배정책을 선전·이용하기 위한 수단이자 방법으로 창출해 낸 것이었고, 조선귀족으로서는 이민족의 지배하에서라도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기득권을 확장하기 위한 수단이자 방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일제에 의해 공식적으로 만들어진 친일파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註125) 

3) 조선귀족 관련 법령
(1) 「조선귀족령」(황실령 제14호, 1910.8.29)
제1조 본령에 의하여 작을 수授한 바가 되거나 혹 작을 습襲한 자를 조선귀족으로 함. 
유작자의 부婦는 조선귀족의 족칭을 향享함. 
제2조 작은 이왕李王의 현재의 혈족으로 황족의 예우를 향치 아니하는 자와 급及 문지門地나 혹 공로가 유한 조선인에 수함. 
제3조 작은 공후백자남의 5등으로 함. 
제4조 작을 수함은 칙지로서 하고 궁내대신이 봉행함. 
제5조 유작자는 기其 작에 의하여 화족령에 의하는 유작자와 동일한 예우를 향함. 
제6조 유작자의 부는 기 부夫의 작에 상당한 예우와 급 명칭을 향함. 
유작자의 과부가 기 가家에 재하는 때는 특히 귀족의 족칭을 보유케 하여 종전의 예우와 급 명칭을 향케 함. 
제7조 유작자의 가족으로 좌에 게하는 자는 귀족과 동일한 예우와 급 귀족의 족칭을 향함. 
① 증조부·조부·부. 
② 작을 습함을 득할 상속인과 급 기 적장남자, 적출의 남자가 무하는 때는 기 서장남자. 
③ 전 2호에 게한 자의 배우자. 
제8조 유작자나 혹 전 2조의 예우를 향할 자와 신체나 우又는 정신에 중환이 유하거나 혹 귀족의 체면에 관하는 사고가 유하는 때는 기 중환이나 혹 사고가 지止하기까지 기 예우를 향함을 득치 못함. 
전항의 중환이나 혹 사고의 유무는 궁내 고등관 중에서 칙명한 심사위원으로 하여금 심사케 한 후에 궁내대신의 상주에 의하여 칙재함. 
제9조 유작자는 가범家範을 정함을 득함. 
가범은 궁내대신의 인허를 수受함이 가함. 폐지변경하는 때도 역동亦同함. 
유작자 20년 미만하는 때나 혹 전조의 경우에 해당하는 자인 때는 가범을 정하거나 혹 폐지변경함을 득치 못함. 
제10조 작은 가의 상속인이오 남자로 하여금 습케 함. 
제11조 작을 습함을 득할 상속인은 상속개시하는 때에서 6개월 내에 궁내대신에 상속의 계출을 위爲함이 가함이라. 
전항의 계출이 유한 때는 궁내대신은 칙허를 경하여 습작의 사령서를 교부함. 
제12조 습작은 상속개시하는 시時에서 기 효력을 생함. 
제13조 좌의 경우에는 상속인은 습작의 특권을 실失함. 
① 제11조 제1항의 기간 내에 상속의 계출을 하지 아니하는 때. 
② 제16조 제2항이나 혹 제18조의 규정에 의하여 귀족의 족칭을 제除한 바가 된 때. 
제14조 상속인이 충순忠順을 결하는 행위가 유한 때는 습작을 칙허함이 무함. 
제8조 제2항의 규정은 전항의 경우에 준용함. 
제15조 유작자와 급 제6조나 혹 제7조의 예우를 향할 자의 신분에 관하여 감독상에 필요한 사항은 궁내대신이 관장함. 
제16조 유작자가 국적을 상실한 때나 혹 금고나 우는 금옥 이상의 형의 선고를 수하고 기 재판이 확정한 때는 기 작을 실함. 
제6조나 혹 제7조의 예우를 향할 자가 전항의 경우에 해당하는 때는 귀족의 족칭을 제하거나 혹 예우를 금지함. 
제17조 유작자가 좌개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때는 작을 반상返上케 하거나 혹 예우를 정지하거나 우는 금지함. 
① 귀족의 체면을 오욕汚辱하는 실행失行이 유한 자. 
② 귀족의 품위를 보保치 못한 자. 
③ 충순을 결하는 행위가 유한 자. 
④ 궁내대신의 명령이나 혹 가범에 위반하여 정상이 중한 자. 
제18조 제6조나 혹 제7조의 예우를 향할 자가 전조의 경우에 해당하는 때는 귀족의 족칭을 제하거나 혹 예우를 정지하거나 우는 금지함. 
제19조 유작자가 예우의 정지나 혹 금지 중에 재하는 때는 제6조 제1항과 급 제7조의 예우를 향할 자도 공히 기 예우를 향함을 득치 못함. 
제20조 유작자가 기 품위를 보치 못하는 때는 궁내대신을 경하여 작의 반상을 청원함을 득함. 
제21조 제16조 제2항과 제17조와 급 제18조의 처분은 칙재를 경하여 궁내대신이 행함. 예우의 정지를 해제解除하는 때도 역동하니라 
제8조 제2항의 규정은 전항의 처분과 급 해제에 적용함. 
예우의 금지를 해제함은 특지에 유함. 
제22조 심사위원에 관하는 규정은 궁내대신이 칙재를 경하여 정함. 

(2) 「조선에 재주 在住 하는 귀족에 관한 건」(황실령 제15호, 1910.8.29)
제1조 조선귀족령 제8조와 제14조와 급 제21조의 경우에는 조선에 재주하는 귀족에 한하여 당분간은 조선총독이 심사위원으로 하여금 심사케 한 후에 궁내대신에 이첩함이 가함. 
전항의 심사위원은 조선총독부 고등관 중에서 조선총독이 명함. 
심사위원에 관하는 규정은 조선총독이 궁내대신에 협의하여 정함. 
제2조 조선귀족령 제9조 제2항과 제11조 제1항과 급 제21조의 규정에 의하여 계출이나 인허의 신청이나 혹 청원을 위爲함에는 조선에 재주하는 귀족에 한해 당분간은 조선총독을 경유함이 가함. 
제3조 조선귀족령 제15조의 규정에 의하여 조선에 재주하는 귀족의 감독상에 필요한 사항은 당분간은 조선총독이 관장함. 단 주요한 사항에 대하여는 궁내대신에 협의함이 가함. 
제4조 조선에 재주하는 귀족이 조선총독의 명령에 위반하여 정상이 중한 때는 조선귀족령 제17조를 적용함. 
부칙 
본령은 공포하는 일부터 시행함. 

(3) 「조선귀족에 관한 심사위원회규정」(조선총독부령 제17호, 1912.3.1)
제1조 심사위원회는 위원장 급 위원 5명으로서 조직함. 
제2조 위원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서 차에 충함. 
제3조 심사위원회는 위원장이 초집함. 
제4조 심사위원회의 의사는 출석자의 과반수로서 결함. 가부가 동수되는 때는 위원장의 결하는 바에 의함. 
제5조 위원장이 사고가 있는 때는 조선총독의 지정한 위원이 기 직무를 대리함. 
제6조 심사위원회의 의사는 차를 비밀로 함. 
부칙 
본령은 발포하는 일로부터 시행함. 

2.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설치와 이용

1) 중추원의 성격과 변화

조선총독부 중추원中樞院은 1910년 9월 30일자 칙령 제355호 총 11개 조항의 「조선총독부중추원관제」로 제정·공포되면서 설치되었다. 중추원은 일제가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하는 식민통치 하위파트너로서 “조선총독에 예속하여 조선총독의 자순諮詢에 응하는”제1조 ‘기구’였다. 그러나 중추원은 독자적인 발의권의안 제출권이나 의결권을 갖지 못하고 오로지 총독의 자문이 있을 경우에만 이에 응해 의견을 개진하는 데 불과했다. 다만 “고문은 원의院議를 심정審定함”제4조이라고 규정해 결의권, 즉 의사결정권이 부여되었으나, “찬의와 부찬의는 원의에 참여한다. 단 결의에 가加함을 득得치 못함”제5조이라고 규정해 결의권조차 없었다. 

조선총독부가 중추원을 설치한 이유는 1932년 이후 작성된 『중추원관제 개정에 관한 참고적 의견』을 통해 알 수 있다. 

중추원 설치의 이유최초 
병합 당시 중추원을 설치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의 문서 중에서 하등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명확히 알 수는 없으나, 구한국시대 중추원의 직능 및 병합 당시의 사정, 또는 병합 후 중추원 직원에 임명된 자들의 면면 및 중추원 운용의 실제 등에 의해 미루어 짐작하건대, 당시 중추원을 존치시킨 주된 이유는 일한병합의 공로자 우대 및 병합으로 인해 일단 관직을 잃게 된 구한국시대의 현관요직顯官要職에 있던 자들에 대해 지위·명망을 보지保持하게 하고 아울러 의식衣食의 방도를 주며, 관제에 명기된 바와 같이 조선총독의 자문에 응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여 설치되었다고 할 수 있다. 註126) 
 설치된 1910년대에는 조선총독의 통치를 자문하는 최고 어용기구로서 대한제국의 고관 출신자들을 우대하며 이들을 통해 일제의 동화주의정책을 선전하는데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1910년대 조선총독의 자문기구로 설치된 중추원은 대한제국기의 중추원과도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원래 중추원은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정2품 이상의 실직實職이 없는 인사들을 우대하는 기관으로 설치되어 의안 심의와 독자적 의결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치면서 일제의 내정개혁을 수행하는 변질된 자문기구로 전락했다. 註127)그럼에도 일제는 조선총독부가 대한제국의 관제官制나 행정기구를 그대로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식민지 민중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중추원을 존속·강화시켰다. 

초기 중추원의 구성은 의장과 부의장 1인친임대우, 고문 15인칙임대우, 찬의 20인칙임대우, 부찬의 35인주임대우, 서기관장칙임, 서기관 2인주임, 통역관 2인주임, 속屬 전임 3인판임 등으로 구성되었다제2조. 의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당연직으로 겸임하면서 중추원 업무를 총관해 중추원에서 발표하는 일체의 공문에 서명하고제3조, 부의장·고문·찬의·부찬의는 조선총독의 주청奏請으로 내각에서 임명했다제6조. 부의장·고문·찬의·부찬의는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침략과정에서 적극 협력했던 매국형 인물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註128) 

중추원 관제가 시행되면서 임명된 중추원 의원은 의원면직·사망·범죄행위 등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임기연한이 없었고, 자리가 빌 때마다 충원했다. 따라서 초기 임명된 중추원 의원은 1921년 4월 관제가 개정될 때까지 계속 연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추원 의원의 임기는 1921년 4월 제3차 개정에서 3년을 임기로 정해 연임할 수 있도록 정했다. 

중추원 부의장과 고문은 연수당으로 매년 2,500원 이내, 찬의는 1,200원 이내, 부찬의는 800원 이내를 조선총독이 정하는 바에 따라 지급하도록 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관리로서 부의장·고문·찬의·부찬의에 임명된 경우는 수당을 지급하지 않았다제7조

1910년 9월 30일자로 제정·공포된 중추원 관제는 이후 7차에 걸쳐 일부 또는 상당부분이 개정되었다. 이를 정리하면 〈표 8〉과 같다. 

〈표8〉중추원 관제 개정 변화
개정 법령 일자 주요 개정 조항
1차칙력 제27호1912년 3월 27일8조 · 10조
2차칙령 제62호1915년 4월 30일1, 9조~11조, 14조, 16~17조
3차칙령 제168호1921년 4월 26일2조, 4조~8조
4차칙령 제261호1923년 5월 22일2조 · 9조
5차칙령 제412호1924년 12월 25일2조 · 9조
6차칙령 제764호1842년 11월 1일2조 · 10조
7차칙령 제892호1943년 11월 30일9조

이중 2차 개정 때에는 제1조 “조선총독에 예속하여 조선총독의 자순에 응함”이라는 조항에 “조선총독은 중추원으로 하여금 조선에 있어서 구관舊慣 및 제도에 관한 사항을 조사하도록 한다”는 역할이 추가되었다. 즉 조선총독부 취조국 업무였던 ‘구관 및 제도에 관한 조사’를 추가해 식민지배정책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수집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이다. 이외의 개정안은 주로 일본인 관리로 임명된 서기관장·서기관·통역관·통역생·속 전임 등과 관련된 것이고, 조선인과 관련해서는 부의장·고문·찬의·부찬의 등의 통폐합이나 대우 등을 개정한 3차 개정이 주목된다. 3차 개정의 주요 내용은 〈표 9〉와 같다. 

〈표9〉중추원관제 3차 개정과 주요 내용
조항/관제 3차 개정(1921.4.26) 주요 개정 내용
제2조
부의장 :1인 친임대우

고 문 : 5인 친임대우

참 의 : 65인 칙임대우 또는 주임대우


부의장 :1인 친임대우(변동 없음)

고 문 : 15인→5인, 칙임대우→친임대우

찬의(20) · 부찬의(35) : 55인→참의 65인으로, 칙임 또는 주임으로 대우

제4조 고문 및 참의는 원의를 심정한다.고문을 고문 및 참의로 개정
제6조부의장, 고문, 참의의 임기는 3년으로함. 단 필요한 경우에는 임기 중 해임해도 무방함.부의장, 고문, 참의(찬의 · 부찬의)의 임기 제한, 해임권
제7조
부의장 : 연액 4,000원 이내

고 문 : 연액 3,000원 이내

참 의 : 연액 3,000원 이내

부의장 : 2,500→4,000원이내

고 문 : 연액 2,500→3,000원 이내

찬의(1200 이내) · 부찬의(800 이내) : →참의 3,000원 이내

관제개정의 주요골자는 ① 고문의 숫자를 줄이고 대우를 바꾼 것, ② 찬의·부찬의를 참의로 단일화해 65명으로 늘린 것, ③ 부의장·고문·참의 임기를 3년으로 정한 것, ④ 부의장·고문·참의 수당을 증액한 것 등이다 전체 숫자71인는 변동이 없었다. 

이러한 변화는 1910년대 중추원이 조선총독의 자문을 위한 기구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대한제국기 상층부를 친일세력으로 우대하여 일제의 동화주의를 선전하기 위한 도구가 되었음을 총독부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10년대에는 조선총독을 자문하기 위한 정례회의는 한 번도 소집되지 않았다. 다만 총독의 필요에 따라 의례적인 행사에 동원되어 일반 민들이 유언비어나 반일운동에 현혹되지 않게 지도하도록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전까지 7회 소집되었는데, 첫 회의는 1912년 6월 5일에 열려, 같은해 7월 9일, 1913년 1월 6일과 2월 13일, 1914년 9월 10일, 1915년 2월 16일과 5월 18일, 그리고 1916년 6월 30일에 마지막으로 열렸다. 註129) 

조선총독부가 중추원 본연의 역할에 주목해 민의수렴이라는 형식을 빌어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게 된 계기는 1919년 3·1운동 이후였다. 이러한 
제반 사정은 『매일신보』 1921년 3월 19일자 사설에서 확인된다. 

중추원 전경

조선총독부 중추원 관제 개정의 건은 연래 당국의 현안으로 그 개혁에 고심하던 바이며 더욱 재등齋藤 총독의 부임 이후로 제반 관제를 혁신하는 동시에 중추원의 조직도 아무쪼록 시정상 중요한 기관으로 유익한 활동이 유하도록 개선하기에 노심 중이었으며, 소위 개혁안도 십 수종에 달하여 선택에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던 바이더니 … 회고하건대 소위 중추원이라는 명칭은 구한국 정부의 유제로 병합 당시에 그대로 계속하여 당시 관직에 재하던 자 중 공로자를 선발하여 찬의와 부찬의로 수용하고 귀족 중 몇몇 사람을 부의장과 고문으로 임명하여 총독의 자문기관으로 하였던 것이라. 그러나 명칭을 비록 자문기관이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별로히 볼 만한 활동이 없었고 일종의 양로원인 상태에 있었으며 오직 찬의 부찬의 중 몇몇 사람을 촉탁하여 조선 사료의 수집과 조선어 사전의 편찬과 구관 구속의 조사업무에 종사하게 하였을 뿐이더니 지금 이를 개정하여 시정상 실제에 효능있는 기관으로 변하게 됨은 오인의 충심으로 환영하는 바이며 따라서 관제 개정 발표와 동시에 임명될 신新의원 제씨에게 기대함이 다대한 바이라. 註130) 

즉 중추원 관제 개정은 총독부의 시급한 현안으로 논의되어 왔으며, 3대 총독 재등실齋藤實 부임 이후 중추원 관제의 혁신은 조선통치상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관민상하 의사의 소통”을 위해서도 시급한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관제 개정이 이루어진 1921년 4월 29일자 기사에서 관제개정을 상세히 보도하는 한편 이전의 중추원은 총독이 묻고 싶으면 묻고, 묻고 싶지 않으면 묻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러면서도 “… 대부분은 매달 수무하루 날이면 도장을 보내 수당금을 찾아오고 삼대 경절이면 총독관저에 축하는 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 하는 일도 없었”다고 비난했다. 註131) 

2) 중추원 역임자와 경제적 대우

1910년대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원은 당연직인 중추원 의장을 제외한 부의장·고문·찬의·부찬의는 모두 조선인이 임명되었다. 1910년대 중추원 의원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註132) 

먼저 1910년 10월 1일부터 1921년 4월 관제개정 때까지 중추원 부의장과 고문에 임명된 자는 20명이다. 초대 부의장은 김윤식이 임명되어 1919년 7월 실작으로 그만둘 때까지 계속 재임했다. 10월 1일자로 고문에 임명된 자는 이완용·박제순·고영희·조중응·권중현·이용직·이지용· 이하영·이근택·송병준·임선준·이재곤·조희연·이근상 등 14명이고, 여기에 민영기1911.3·민상호1918.12·조민희1919.11·장석주1912.8·한창수1912.8 등 5명이 이후 임명되었다. 민상호와 한창수는 중추원 찬의에서 고문에 올랐다. 

1910년대 중추원 부의장·고문에 임명된 자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모두 조선총독부에서 제정한 「조선귀족령」에 의해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둘째, 통감부시기 이후 일제의 비호를 받으면서 고위관직에 임명된 국가정책의 결정자 내지 참여자로서 왕족 혹은 외척이거나 세습적인 지배문벌에 속한 자들이다. 셋째, 대부분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매국행위를 행한 친일반민족적인 인물이다. 넷째, 갑신정변·을미사변·아관파천으로 인한 김홍집 친일내각의 붕괴 등 일련의 정치적 사건과 관련되어 도일·망명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다. 다섯째, 일본 유학 또는 정부관리로서 일본에 파견되어 문물을 시찰한 경력이 있는 자들이다. 여섯째, 중추원 부의장과 고문의 연령분포를 보면, 초대 부의장 김윤식75세을 제외하고 대부분 임명 당시 40대에서 50대가 주류를 이루었다. 

1910년 10월 1일부터 1921년 4월 관제개정 때까지 중추원 찬의에 임명된 자는 29명이다. 중추원 설치 당시 찬의는 권봉수·김만수·김사묵·김영한·남규희·민상호·박경양·박승봉·송헌빈·염중모·유맹·유정수·이건춘·이재정·이준상·정인흥·조영희·한창수·홍승목·홍종억 등 20명이다. 여기에 강경희·김춘희·민원식·박제빈·박중양·유혁로·윤치오·이겸제·조희문 등 9명이 이후 임명되었다. 전체 29명 중 민상호·한창수는 중추원 고문에 올랐고, 부찬의였던 윤치오가 찬의1911.2에 임명되었다. 특히 부찬의 민원식은 사망 당일 특지特旨로 찬의1921.2에 임명되었다. 

1910년대 중추원 찬의에 임명된 자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대한제국시기 대부분 주임관 이상의 관직에 있으면서 통감부시대에 적극적인 친일관리로 변신을 꾀한 인물이다. 둘째, 찬의 가운데 4명이 작위를 받긴 했으나 중추원 고문과 달리 세습적인 문벌집안 출신이 드물었다. 셋째, 대부분 통감부시기 대한제국기 고등관 이상의 관리 출신자들이었다. 넷째, 임명 당시 나이는 40대에서 50대가 주류였다. 

1910년 10월 1일부터 1921년 4월 관제개정 때까지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된 자는 50명이다. 중추원 설치 당시 부찬의는 고원식·구희서·권태환·김교성·김명규·김명수·김준용·김한규·나수연·민건식·박제환·박희양·서상훈·송지헌·송헌빈·신우선·신태유·어윤적·엄태영·오재풍·이도익·이봉로·이시영 註133)·이원용·정동식·정진홍·조병건·조제환·최상돈·한동리·허진·홍우석·홍운표·윤치오 등 34명이다. 여기에 김낙헌·김필희·김한목·김현수·민원식·박해령·서회보·성하국·오제영·유흥세·이만규·이항직·정병조·조원성·조재영·홍재하 등 16명이 이후 임명되었다. 

1910년대 중추원 부찬의 임명된 자들의 공통점은 첫째, 찬의와 마찬가지로 대한제국기 고등관 관료들인데, 고문이나 찬의에 비해 그 직위가 낮은 편이었다. 둘째, 연령은 50대에 임명된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30대에서 40대에 해당하며 고문과 찬의에 비해 젊었다. 셋째, 부찬의 중에는 근대식 서구교육을 받았거나 일본에서 유학 혹은 문물시찰을 한 경력이 있는 인물들이 많았다. 

한편 1910년 10월 「조선귀족령」에 따라 작위를 받은 76명 중에서 작위 거부·반납자 8명과 독립운동 관련 실작 4명을 제외한 64명추가 수작자 이항구 제외을 분석해 보면, 이중 고영희·권중현·김춘희·민병석·민상호·민영기·박기양·박영효·박제빈·박제순·송병준·윤덕영·이근상·이근택·이완용·이윤용·이재곤·이지용·이하영·임선준·장석주·조민희·조중응·조희연·한창수 등 25명이 중추원 부의장, 고문, 찬의·부찬의 등에 임명되었다. 무려 40%에 이른다. 

중추원 역임자들은 조선귀족과 마찬가지로 각 직책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았다. 부의장과 고문이 연수당 2,500원, 찬의가 1,200원 이내, 부찬의가 800원 이내였다. 이후 1921년 4월 관제개정 후에는 부의장이 4,000원 이내, 고문이 3,000원 이내, 참의는 3,000원 이내에서 ‘지방참의’는 최저 600원을 받았다. 

1911년판 『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직원록』의 중추원 연액지급 현황을 1910년판 『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직원록』의 중추원 임면 변동사항과 대조하고, 1921년 4월 관제개정 이후 임기와 연수당의 변화를 정리하면 〈표 10〉과 같다. 
〈표10〉중추원 의원 연수당 지급 현황
직위 이름(작위) 연수당 임기연한 총액
부의장김윤식(子)2,0001910-123,200
고문(15)이완용(伯)1,600→(2,000)→(3,500)10-15→부의장(12-21)→부의장(21-26)3,200→18,000→17,500
박제순(子)1,60010-158,000
고영희(子)1,60010-158,000
조중응(子)1,60010-1914,400
권중현(子)1,60010-2016,000
이용직(子)1,60010-1914,400
이지용(伯)1,60010-12, 25-288,000
이하영(子)1,60010-2930,400
이근택(子)1,60010-1914,400
송병준(子)[*免]1,60010-11, 21-258,000
임선준(子)1,60010-1914,400
이재곤(子)1,60010-2016,000
조희연(男)1,60010-158,000
이근상(男)1,60010-2016,000
민영기(男)[*추가]1,60011-2319,200
찬의(22)민상호(男)1,000→(1,600)10-18고문(18-21)8,000→4,800
박승봉1,00010-2121,000
염중모1,00010-2121,000
유정수1,00010-2121,000
한창수(男)1,000→(1,600)10-21→고문(12-19)2,000→11,200
홍승목1,00010-2111,000
김만수[*免]1,000(10-10.12)1,000
남규희1,000→2,00010-21→참의(21-27)11,000→12,000
이재정1,00010-199,000
조영희1,000→2,00010-21→참의(21-27)11,000→12,000
박경양1,00010-166,000
유맹1,000→2,00010-21→참의(21-30)11,000→18,000
김영한1,000→2,00010-21→참의(21-27)11,000→12,000
이건춘1,000→2,00010-21→참의(21-24)11,000→6,000
이준상1,00010-2111,000
김사묵[*免]1,000(10-10.12)1,000
권봉수1,00010-122,000
정인홍1,00010-2111,000
홍종억1,00010-199,000
박제빈(男)[*추가]1,00011-21→참의(21.4-9)10,000
윤치오[*추가]1,00011-154,000
강경희[*추가]1,00011-2110,000
부찬의(42)이시영[*免]()800(10-11.2)800
김명규60010-216,600
민건식60010-216,600
서상훈80010-216,600
송지헌60010-216,600
어윤직80010-216,600
오재풍60010-216,600
유흥세[*추가]60011-216,600
이항직[*추가]60011-216,600
윤치오[*찬의↑](800)(10-11.2)800
최상돈80010-164,800
정진홍800→1,50010-21→참의(21-24)6,600→3,600
이봉로60010-216,600
신태유600→1,20010-21→참의(21-27)6,600→7,200
송헌빈60010-216,600
고원식[*免](600)10-11.2(*기타)600
홍운표60010-216,600
이원용[*免](600)10-11.2600
정동식600→1,20010-21→참의(21-24)6,600→3,600
박제환600→1,20010-21→참의(21-27)6,600→7,200
권태환600→1,20010-21→참의(21-29)6,600→9,600
구희서60010-216,600
이도익600→1,20010-21→참의(21-24)6,600→3,600
신우선[*免](600)(10-11.2)600
김교성600→1,20010-21→참의(21-24)6,600→3,600
조제환[*免](600)(10-11.2)600
나수연600→1,20010-21→참의(21-26)6,600→6,000
김한규[*免](600)→(1,200)10-11→참의(33-36)600→(3,600)
김명수60010-216,600
홍우석60010-131,800
한동리[*免](600)(10-11.2)600
김준용600→1,20010-21→참의(21-23)6,600→2,400
박희양600→1,20010-21→참의(21-24)6,600→3,600
엄태영60010-121,200
성하국[*추가]60011-152,400
조재영[*추가]60011-173,600
홍재하[*추가]60011-216,000
조원성[*추가]60011-173,600
김필희[*추가]600→1,20011-21→참의(21-24)6,000→3,600
오제영[*추가]60011-205,400



1910년대나 1920년대 매년 지급되는 연수당은 은사공채에 비해 그다지 높지 않았다. 중추원 부의장의 연봉 2.000원은 조선귀족의 은사공채 3만 원·5만 원의 연이자 5%인 1,500원·2500원의 평균, 현재시세로 계산하면 평균 약 2,500만 원에 해당한다. 중추원 고문의 연봉 1,600원은 은사공채 3만 원의 연이자 5%인 1,500원, 현재시세로 환산하면 약 2,000만 원이다. 찬의의 연봉 평균 1,000원은 부의장 연봉의 1/2이므로 현재시세로 약 1,300만 원, 부찬의의 연봉 600~800원은 고문 연봉의 1/2로 보면 현재시세로 약 1,000만 원으로 계산된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 일제의 대륙침략전쟁이 본격화되고 1931년 만주사변을 거치면서 화폐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1930년대는 1910~20년대의 1:13,000 비율보다는 1:10,000 비율로 계산하는 것이 적당하다. 따라서 1930년대 중추원 부의장의 연봉 3,500원은 현재시세로 약 3,500만 원, 고문의 연봉 3,000원은 현재시세로 약 3,000만 원이 된다. 그런데 참의에 대한 대우는 1921년 4월 3차 개정 이후 1,200원찬의·800원부찬의 이내에서 3,000원 이내로 상향조정되었음에도, 실제로는 차등이 매우 컸다. 1930년 9월 현재 「중추원의관 약력조」에 따르면 참의 65명에 대한 연수당에서 최고액 3,000원은 1명뿐이고, 2,500원이 5명, 2,000원이 11명, 1,500원이 8명, 1,200원이 20명, 최저액 600원이 20명이었다. 註134) 


한편 1921년 4월 중추원 관제개정으로 인상된 연수당 중 부의장이 받은 최고액 3,500원은 조선총독부 소속관서 직원 중 주임문관인 영림창장과 평양광업소장 3급이나 경성부윤 4급에 해당한다. 고문 연수당 3,000원은 영림창장과 평양광업소장 4급이나 도참여관주임대우 5급에 해당한다. 참의는 최고액 3,000원이 고문의 경우와 같고, 최저액 600원은 1912년도 공립고등여학교장·공립실업전수학교 교유·공립실업전수학교 교유敎諭의 10급봉에 해당한다. 


끝으로 위 〈표 10〉에서 정리한 초기 중추원 위원들의 임기변동과 이에 따른 연수당의 총액을, 「중추원의관 약력조1930.9」와 기타 자료를 활용해 비교하면 〈표 11〉과 같다. 

〈표11〉중추원 연봉 총액 비교표
직원록(1910~1911) 재등실문서(1930.9)
직위(명) 연수당 총액 직위(명) 연수당 총액
부의장(1)2,0003,200부의장(1)6,50060,500
고문(15)29,500233,900고문(5)22,000163,000
참의(20)35,200289,900참의(65)96,0001,058,500
부찬의(35)42,300272,300


앞서 적용한 시기별 화폐기준을 다시 대비해 보면 1910년~20년대의 중추원 부의장·고문·찬의·부찬의에게 지급한 연수당 총액 약 11만 원은 14억 3,000만원이고, 이들이 수령해 간 총액 약 80만원은 104억원에 달한다. 1920년대 이후 1945년까지의 중추원 부의장·고문·참의에게 지급한 연수당 총액 약 12만 5,000원은 13억 7,500만원이고, 이들이 수령해간 총액 약 130만원은 143억원에 달한다. 그러니까 현재까지 대략 파악되는 400여 명에 달하는 중추원 참여자 중 1910년부터 1945년까지 71명에게 지급된 연수당 총액은 약 23만 5,000원에 28억원이고, 이들이 수령해 간 총액은 약 210만원은 247억원 등으로 추정할 수 있다. 


3. 조선총독부 중추원 관련 법령


1) 「조선총독부 중추원 관제」(칙령 제355호, 1910.9.30)

제1조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조선총독에 예隸하여 조선총독의 자순諮詢에 응應하는 바로 함이다. 

제2조 중추원에 다음의 직원을 둔다. 

의장議長 

부의장副議長  1인 친임대우親任待遇 

고문顧問 15인 칙임대우勅任待遇 

찬의贊議 20인 칙임대우 

부찬의副贊議 35인 주임대우奏任待遇 

서기관장書記官長 칙임勅任 

서기관書記官 2인 주임奏任 

통역관通譯官 3인 주임奏任 

속전임屬專任 3인 판임判任 

제3조 중추원 의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政務總監으로써 충充한다. 

의장은 원무院務를 총관總管하여 중추원에서 발發하는 일체의 공문에 서명한다. 

중추원 부의장은 의장을 보좌補佐하고 의장이 사고가 유하는 때는 그 직무를 대리한다. 

제4조 고문은 원의院議를 심정審定한다. 

제5조 찬의와 부찬의는 원의에 참여함. 단 결의決意에 가加함을 득得치 못한다. 

제6조 부의장·고문·찬의·부찬의는 조선총독의 주청奏請에 의하여 내각에서 명한다. 

제7조 부의장과 고문에게는 연액年額 2,500원圓 이내를, 찬의에게는 1,200원圓 이내를 부찬의에게는 800원圓 이내를 조선총독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수당으로 지급한다. 단 관리로 부의장, 고문, 찬의·부찬의를 하는 자에게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다. 

제8조 서기관장·서기관·통역관은 조선총독부 고등관高等官 중에서 겸한다. 

제9조 서기관장은 의장의 감독監督을 승承하여 원무를 장리掌理한다

제10조 서기관은 서기관장의 명을 승承하여 원무를 장掌한다. 

제11조 촉屬은 상관의 지휘를 승承하여 원무에 종사한다. 

부칙 

본령은 명치 43년1910년 10월1일부터 시행한다. 


2)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사 규칙」(훈령 제65호, 1910.12.12)


제1조 중추원 고문과 찬의와 급及 부찬의는 의장이 지정한 기일에 중추원에 집회함이 가可함이라. 

제2조 공무公務나 우又는 병기病氣를 위하야 출석하기 불능不能한 자者는 기其 사유를 구具하야 궐석굴闕席屆를 차출差出함이 가可함이라. 

사고가 유有하야 출석하기 불능不能한 때는 기其 사유를 구具하야 일수日數를 정定하고 의장의 허가를 수受함이 가함이라. 

제3조 회의는 고문 6명 이상이 출석지 아니하면 차此를 개開함을 부득不得함이라. 

제4조 고문과 찬의와 급及 부찬의의 석순席順은 의장이 정함이라. 

제5조 회의에 부付하는 사항은 기其 회의를 개開하는 일日부터 2일전에 각 고문과 찬의와 부찬의와 병竝히 관계關係 각 부국장관部局長官에 배부配付함이 가可함. 단但 급急을 요要하는 경우는 차한此限에 재在치 아니함이라. 

제6조 의사를 개시할 시時에 지至하는 때는 의장이 기其 석席에 저著하여 제반의 보고를 한 후에 회의를 개開함이 선고宣告함이라. 

제7조 의장은 서기관장書記官長으로 하여금 회의에 부付하는 사항을 변명辯明케 하여 그 다음에 각 고문과 찬의와 급及 부찬의로 하여금 의견을 진술케 함이라. 

제8조 고문과 찬의와 급及 부찬의원은 의장의 허가許可가 유有치 아니하면 발언함을 부득不得함이라. 

제9조 전조前條를 의依하여 발언코자 하는 때는 기립起立하여 의장이라 호呼하고 자기의 명을 통通하며 의장의 허가를 대待하여써 발언함이 가可함이라. 

제10조 의장은 필요에 유由하여 특히 위원을 명命하여 기한을 정하고 회의사항을 심사케 함을 득得함이라. 

제11조 조선총독은 조선총독부 각 부국장관部局長官이나 우又는 기其 대리자로 하여금 주관사항에 관關하여 하시何時라도 회의에 출석하여 설명케 함이라. 

제12조 고문은 회의사항에 대하여 의장의 허가를 득하여 조선총독부 각 부국장관이나 우又는 기其 대리자에 설명을 구함을 득함이라. 

제13조 고문과 찬의와 급及 부찬의는 동일 회의사항에 대하여 발언이 2회에 급及지 못함. 

단 질의응답은 차한此限에 재在치 아니함이라. 

제14조 의장은 의사의 종결과 급及 폐회를 선고宣告함이라. 

제15조 의사 사항이 오후 4시에 지至하여도 상尙히 의료議了치 아니하는 때는 의장은 다시 시일을 정하여 재의再議케 함이 유有함이로다. 

제16조 회의 중 의장이 필요타 인認하는 때는 휴식休憩을 명命함을 득함이라. 

제17조 표결을 취取코자 하는 때는 문제를 가可라하는 자를 기립케하여 기립자의 다수를 인정하여 가부를 결함이라. 

표결의 결과는 의장이 언명言明함이 가可함이라 

제18조 의사는 출석 고문의 과반수로써 정함. 가부가 동수한 때는 의장의 결決한 바에 의함이라. 

제19조 의장에서는 무례한 어語를 용用하거나 혹 타인의 신상에 섭涉하여 언론言論함을 부득不得함이라. 

제20조 전조前條에 위배커나 우又는 의장이 질서를 문紊케 하는 자가 유有하는 때는 의장은 차를 제지制止하거나 혹 당일의 회의를 종終하기 까지 발언을 금지하거나 우又는 의장議場 외에 퇴출케함을 득함이라. 

제21조 회의의 전말顚末은 서기관장이 차此를 기초하여 의장의 검열을 경經하여 직直히 총독에 보고함이 가可함이라. 

제22조 회의의 의사필기議事筆記는 서기관장과 급及 출석 고문 2명 이상이 차此에 서명하여 기其 정확함을 표명함이 가可함이라. 


3) 「조선총독부 중추원 사무 분장 규정」(훈령 제3호, 1918.1.19)

제1조 조선총독부 중추원에 조사과 및 편찬과를 둠 

제2조 조사과에서는 구관조사舊慣調査 및 타과의 주관에 속하게 되는 사항을 관장함 

제3조 편찬과에서는 사료의 수집편찬에 관한 사항을 관장함 

〈표12〉조선총독부 중추원관제 개정 비교135)
관제조항 1차개정된 중추원 관계 2차개정된 중추원 관계
(1921.4.26)
비고
제1조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조선총독에 예하여 조선총독의 자순諮詢에 응하는 바로 함이라.
조선총독은 중추원으로 하여금 조선에 재한 구관 및 제도에 관한 사항을 조사케 함을 득함
동일 
제2조중추원에 다음의 직원을 둔다.
의장
부의장 1인 친임대우親任待遇, 고문 15인 칙임대우勅任待遇, 찬의 20인 칙임대우勅任待遇, 부찬의 35인 주임대우奏任待遇, 서기관장 칙임勅任, 서기관 2인 주임奏任
속·통역생 전임專任 8인 판임判任
중추원에 다음의 직원을 둔다.
의장
부의장 1인 친임대우親任待遇, 고문 5인 칙임대우勅任待遇, 참의 65인 칙임대우勅任待遇 또는 주임대우奏任待遇, 서기관장 칙임,勅任 서기관 전임 1인 주임奏任 통역관 전임奏任 1인 주임奏任 , 속·통역생 전임 10임 판임判任
고문의 정원 15인→5인, 칙임대우→친임대우, 찬의 20인·부찬의 35인→참의 65인, 서기관 2인→전임 1인, 통역관 2인→전임 1인
속·통역생 8인→10인
제3조중추원 의장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으로써 충한다.
의장은 원무院務를 총관總管하며 중추원에서 발하는 일체의 공문에 서명한다
부의장은 의장을 보좌하고 의장이 사고가 유하는 때는 그 직무를 대리한다.
동일 
제4조고문顧問은 원의院議를 심정審定한다.고문 및 참의는 원의를 심정한다.고문→고문 및 참의
제5조찬의와 부찬의는 원의에 참여함. 단 결의決議에 가함을 득 치 못함.삭 제삭제
제6조부의장 · 고문 · 참의는 조선총독의 주청奏請에 의하여 내각에서 명한다.부의장 · 고문 · 찬의 · 부찬의는 조선총독의 주청奏請에 의하여 내각에서 명한다.
부의장·고문·참의의 임기는 3년으로 한다. 단 필요한 경우 임기 중 해임해도 무방하다.
부의장·고문·참의의 임기 제한
제7조부의장과 고문에게는 연액 2,500원, 찬의에게는 1,200원, 부찬의에게는 800원 이내를 조선총독이 정한 바에 의하여 수당으로 지급한다. 단, 관리로 부의장과 고문·찬의·부찬의를 하는 자에게는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다. 부의장에게는 연액 4,000원, 고문·참의에게는 3,000원 이내를 조선총독이 정한 바에 의하여 수당으로 지급한다. 단 관리로 부의장과 고문 또는 참의를 하는 자에게는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다.부의장 · 고문 · 참의의 수당을 인상 지급
제8조서기관장과 서기관 · 통역관은 조선총독부 고등관 중에서 이를 겸하게 한다.삭 제삭 제
제9조서기관장은 의장의 감독을 승하여 원무를 승한다.동 일 
제10조서기관은 서기관장의 명을 승하여 원무를 승한다.동 일 
제11조은 상관의 지휘를 승하여 원무에 종사한다.동 일 

〈이 용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