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사

광복(2) - 대한민국 23년 5월 20일 출판편집자: 한국광복군총사령부정훈처

몽유도원 2012. 12. 29. 19:32

광복 제1권 제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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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23년, 중화민국 30년 2월 1일 출판
겉표지
창간사
조(趙) 부장 성환(成煥) 제사
태(態) 주임 무(珷) 제사
손(孫) 총사령 위여(藯如) 제사
곡(鵠) 부주임 정정(鼎正) 제사
팽(彭) 비서장 소현(昭賢) 제사
갈(葛) 교육장 무계(武棨) 제사
경매구(景梅九) 선생 제사
한국광복군의 과거와 미래 - 이청천(李靑天)-
한국 독립당과 함께 싸울 분들에게 고하는 글 -- 곽자준(郭紫峻)
중·한 양대 민족이여 손에 손을 잡고 -- 왕덕박(王德薄)
한국 광복군의 성립과 중국 항전 -- 황학수(黃學秀)
한국광복군의 당면 과제 -- 김학규(金學奎)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 특집
대회 주례 김구 선생의 개회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 선생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보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 홍진(洪震) 선생의 훈사
한국 독립당 중앙 집행 위원 조완구(趙琬九) 선생의 축사
한국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李靑天) 장군의 답사
이청천(李靑天) 장군의 약력
존경하는 장(蔣) 위원장께 드리는 글
중화민국 군사들에게 삼가 아뢰는 글
전방의 군사에게 드리는 글
현재의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 -송호(宋虎)-
왜적은 지금 남태평양 공격에 착수할 것인가? -안훈(安勳)-
미묘한 독일과 소련 관계 -이복원(李復源)-
일본과 소련 관계에 대한 전망 -이웅(李雄)-
근위내각의 위기 -김광(金光)-
중국 항전의 새로운 단계 및 우리의 당면 임무 -위명(衛明)-
3년래 일본 전시 경제 개관 -소붕(笑鵬)-
단신
한국 청년 전쟁 공작대가 한국 광복군 제5지부로 편입하다.

창간사 

지극히 잔인하고 지극히 참혹한 전쟁의 신이 이미 인류의 머리 위로 내려왔다. 유럽과 아시아 전 지역이 그의 날개 아래에서 수천만의 영혼들이 지금 전쟁의 포화 속에서 죽어가고 있으며, 더 나아가 전 세계 인류의 생명이 어떤 보장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1931년 심양(瀋陽)의 9․1 사변은 이 크나큰 전쟁의 서막이었다. 1937년 노구교(蘆溝橋)의 7․7 사변은 전쟁을 정식으로 선포했으며, 지금까지 전쟁의 불길이 이미 동아시아를 불살랐으며 또한 유럽까지 번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의 원흉은 도대체 누구인가?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은 우리의 이웃인 일본이다.
원래 일본은 어떤 문화도 없었던 야만 종족으로, 도적질 하는 것을 본성으로 삼아 일찍이 중국과 한국 문화를 수 천 년 간 흡수해왔다. 오늘날까지 이것은 결코 과장의 말이 아니라 역사가 명백하게 증명하는 바이다. 왜적의 기본적인 심성은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신의가 없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들의 역사는 악으로서 덕에 보답하였다. 항상 이웃 나라를 침략하였으나 우리 중,한의 평화 수호 세력으로부터 징벌을 받았다. 예를 들어 명조에 일본의 평신수길(平臣秀吉)은 명을 정벌하러가는 길을 빌린다는 핑계로 군사를 일으켜 한국을 침략하였다. 당시 한국의 수군대장군 이순신(李舜臣), 육군대장군 권율(權慄)이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 이여송(李如松), 이여백(李如柏)과 더불어 각각 큰 군사를 일으켜 대항하였으며, 8년의 전쟁 끝에 왜적을 현해탄 바깥으로 격퇴하면서, 드디어 동아시아의 평화를 되찾았다.
갑오년과 갑신년에 이 일본은 중국과 한국이 준비가 안 된 틈을 타서 군사를 일으켜 중일 전쟁을 일으켰으며, 러시아와 일본은 두 차례 큰 전쟁을 치렀다. 일본은 요행히도 승리를 거두었다. 결과적으로 경술년 8월 29일 한국을 강점하였으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가로막았다. 이로써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끊임없는 발호는 바람을 일으켜 풍파를 만들며, 이웃을 근심케 하는 것으로 동아시아에는 이제 영원토록 평안한 날이 없었다.
우리 중국과 한국 두 나라는 예의지국이다. 신의를 지키며 평화를 사랑한다. 반 만년동안 동아시아의 평화는 오로지 중국과 한국 양국의 평화적인 역량으로 유지되어 왔다. 과거에는 이러하였으나 불행히도 천만대의 장래를 저당 잡히고는 어찌 또 이러할 수 있겠는가! 근래 들어 이 평화 세력은 마침내 전쟁을 일삼는 일본이라는 악의 세력에 의해 유린당하고 결국 지금의 국면이 되었다. 이것은 중국과 한국 두 나라 국민의 불행일 뿐만 아니라, 전 동아시아 및 전 세계 인류의 불행이기도 하다.
지금 중화민족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그리고 인류 공동의 행복을 위해서 전면적인 항전 활동을 4년간 벌이고 있다. 중국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며 일본은 반드시 패망할 것이라는 징표는 이미 우리의 눈앞에 펼쳐져 있다. 중국 한국 민족은 이에 최후 승리의 전야에 있다. 우리가 마땅히 어떻게 해야만 우리의 위대한 사명에 보다 빨리 도달할 수 있을까.
한국은 오천년의 역사와 문명을 가진 역사가 오랜 나라이다. 이민족에게 우리나라를 강탈당한 30년 동안 폭압의 철제 아래에서도 앞 다투어 투쟁을 계속해왔다. 이제 조국을 되찾는 운동을 벌이면서 하루도 쉬지 않으면서 그 투쟁은 계속되었다. 장렬한 희생의 정신은 이미 전 인류의 찬탄과 동정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나라가 망한 전후, 국내에서는 30년간의 "의병운동"이 있었다. 1919년의 전 국민의 대 혁명인 "3.1 운동"과 1929년의 광주 학생운동, 30년 동안의 만주 무장 운동 등 모두 대한민국의 민족의 의식을 격발시키고 발전시킨 한국 대혁명 운동이었다.
한국광복군은 이 30여 년의 피로 쓴 역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아울러 선열들이 열어 놓은 길 앞에 서 있다. 한국 독립당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영도 아래에서 전면적인 항전의 중일전장까지 와서 고색창연한 항일의 깃발을 드높이 들어 올리며 중국의 항일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 의미가 넓고도 깊을 뿐만 아니라 그 역량 또한 위대하다. 이는 중국의 항일 전쟁을 위한 일대의 군대이며, 아울러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키는 선봉대이기도 하다.
본 잡지는 광복군과 한국 혁명 민중의 충실한 매체로서, 중요한 임무는 (1) 친애하는 중국 민중에게 한국 혁명의 내용과 이론을 충실하게 소개한다, (2) 한국 민중에게 중국 영웅의 항전의 소식 및 중국의 승리의 조건을 충실하게 소개한다, (3) 세계에 대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폭행의 음모 및 그 패배의 요소를 폭로한다, (4) 중한 양대 민족의 연합 항일을 주장함으로써 해방을 쟁취한다, (5) 중한 민중의 항일 정서를 환기한다. 본 잡지의 임무와 욕망은 이와 같다. 그러나 우리들의 자성 능력이 아직 부박하여 이 중대한 사명을 담당할 수 있을까 삼가 두려워하며, 뜻있는 분이 수시로 충실한 지도를 주시기를 바라면서, 본 잡지가 이 위대한 시대 속에서 자기의 임무를 다하여 중국과 한국의 승리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한국광복군의 과거와 미래

1. 한국광복군의 국제성

우리는 모두 한국이 태평양 동쪽에 있는 반도국이라는 것과 중국과 소련, 그리고 일본 사이에 끼여 있으면서 지리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3천만의 인구와 25만 평방미터가 넘는 영토에서 5천년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중국, 이집트, 그리스, 인도 등의 나라와 마찬가지로 유구한 역사를 가진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동아시아 형세에 어떤 일이 발생하면 거기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음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 명대, 왜적이 명을 정벌하기 위한 길을 빌려달라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우리 한국을 침략하였을 때, 당시의 한국 정부는 지금의 중국이 장기적인 항전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결사의 각오로서 중국과 일을 도모하였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육군 대장군 권율(權慄)과 해군 대장군 이순신(李舜臣) 등을 파견하여 삼한의 백만 건아들을 거느려 혈전을 전개하게 하였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에 원조를 요청하여 당시 명조는 송응창(宋應昌), 진린(陳璘), 이여송(李如松), 양호(楊鎬) 등을 급파하여 원조하였다. 전쟁은 8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마침내 왜적을 현해탄 밖으로 쫓아내었다. 이는 중한 민족이 연합하여 전개한 공동의 항전이었으며 공동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켜내었던 역사적 사실이다.
근대에 이르러 한국은 내정이 안정되지 않고 국방이 정비되지 않은 까닭으로 약소 민족의 지위로 떨어지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왜적에 의해 멸망지화를 당했다. 또한 갑오년의 중일 전쟁과 갑신년의 러일 전쟁을 거치고 나서 한국은 결국 1910년 8월 29일 왜적에 의해 합병되었다. 이로부터 동아시아의 평화는 완전히 소멸되었다.근년 들어 일본은 또한 중국에서 9․1 사변과 1․28 사변, 그리고 노구교(蘆溝橋) 사변 등을 일으켜 전화가 동아시아에 두루 퍼졌으며, 또한 전 유럽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아마도 전 세계를 전쟁의 회오리 속으로 빠뜨릴 위험이 있을까 심히 두렵다. 설사 한국이 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마도 모두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임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의 불행이 곧 중국의 불행이요 또한 동아시아의 불행이며, 더 나아가 세계의 불행이 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국 광복군의 사명은 조국의 광복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 있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한국의 독립 문제는 3천만 한국 국민의 생사가 달린 문제일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와 세계의 안위의 문제에까지 연관된다. 그렇다면 한국 광복군은 실제적으로 충분한 국제적인 무장의 의미를 띈다 할 수 있다.

이청천(李靑天) 

2. 한국 광복군의 과거 투쟁

한국 광복군이라는 명칭은 처음 들을 때 아주 신선한 명칭이지만, 사실은 1907년 8월 1일 한국 국방군이 왜적에 의해 강제적으로 해산된 후 한국 제야의 애국지사들이 국내에서 게릴라전의 형태로 일제에 저항하였으며 한국인들은 그것을 통상 ′의병운동′ 또는 ′광복군 운동′이라 불렀다.
이어 1910년 8월 29일 한국이 정식으로 일본에 합병된 후, 한국 광복군 운동은 왜적의 지나친 압박으로 인하여 계속적으로 중국, 일본, 미국 등의 해외로 이동하였다. 그중 가장 유명한 광복군 부대는 중국 동삼성의 한국 독립군, 한국 광복군, 한국 혁명군 등이다. 그들은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또 이름이나 방법 등을 가리지 않고 30여 년 간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위하여 왜적에 저항하여 피의 싸움을 벌인 일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일일 것이다.

3.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

앞에서 이미 개괄한 한국 광복군이 30여 년간 국내외에서 형형색색의 형식으로 조직되고 왜적과의 고투를 벌인 결과, 그들의 투쟁은 이토록 용감하고 장렬하며, 또한 9.18 사변 이후로 동북의 항일 투쟁은 더욱 적극적으로 변했다.
7.7 노구교(蘆溝橋) 사변의 폭발로 인하여 중화민족이 전면적인 항전을 전해한 후,중화민족의 위대한 역량이 이미 충분히 발휘되었으며, 중국 항전은 승리를 다짐하고 있으며,왜적의 멸망은 이제 시간 문제가 되었다. 한국 인민은 이때가 왜적을 타파하고 왜적에 당한 피해를 설욕하며 독립과 자유를 쟁취할 좋은 기회임을 인식하여, 더욱 노력하여 광복운동을 벌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한국 무장 세력을 집중시키기 위하여 통일적인 영도를 마련하자는 공통의 인식과 중국 최고의 영수 장(蔣) 위원장의 지지로서, 중국 내에서 한국 군대를 세웠으며, 작년 9월 17일 새로운 수도 중경에서 정식으로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세웠다.
총사령부의 성립이 알려지자 중외의 인사들이 열렬한 환영과 옹호를 보내왔으며, 특별히 우리의 우방인 중국의 집정군 및 사회 각계에서 끊임없는 찬조가 들어오고 있다. 더욱이 미주 및 다른 나라의 한국 교포들 역시 계속적으로 호응하고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어, 이로 보건대 광복군의 정식 출범은 우리 한국 민족의 필요일 뿐만 아니라,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4. 한국 광복군의 전도에 대한 전망

그렇다면 한국 광복군의 전도는 또 어떠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명쾌하게 말하자면 한국 광복군의 전도는 절대적으로 광명이며 반드시 그것의 사명에 도달할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1) 한국 광복군의 출범은 한국 3천만 인민의 필요과 전 세계 압박받는 민족의 요구에 부응하여 탄생한 것으로 그것은 역사적 사명을 띄고 있으며 아울러 전 세계 인민 대중의 보호를 받고 있다.
(2) 중국의 오랜 항전 아래에서 적군은 이미 점점 쇠약해져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중국 역시 점점 강하게 적을 몰아치고 있으므로 최후의 승리는 반드시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3) 국제 형세가 점점 우리에게 이롭고 적들에게 불리하게 되어갈 것이다.
(4) 중한 양대 민족의 항일 전선이 나날이 강고해지고 확대되고 있다.
이상의 조건에 근거하여 광복군의 전도는 매우 밝으며 반드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할 것임을 알 수 있다. 총사령부의 성립 이후 모든 사업에 대하여 총괄적인 계획과 실시가 있게 되었다. 다만 국내와 동북, 화북 등의 적후 공작에 대하여는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때 총사령부가 서안(西安)으로 본부를 옮긴 것은 전방의 부대를 지휘하고 사업에 전념하며, 우방의 각계 인사들의 지도와 협력 아래에서 그 사명을 완수하여, 한국과 중국에 안녕을 기하기 위함이다.

한국 독립당과 함께 싸울 분들에게 고하는 글

한국 독립당의 선구 김구(金九) 선생은 일생동안 모든 힘을 다하고 식음을 전폐하시도록 온 힘을 다해, 중국 인민과 한민족의 대단결을 도모하셨습니다.
비록 몇 번의 좌절을 거쳤지만 다시 매진하여서 마침내 대한민국 22년 5월 9일 한국 독립당을 창립하셨으니, 그 공이 하늘의 해와 달처럼 찬란합니다. 중.한 양국이 공존 공영한 지 수 천년 동안 우리의 이해가 일치하고 있습니다. 청 말엽 양국의 조정이 세계의 대세에 어두워 비록 일제와 러시아의 대대적인 침략에 처해있지만, 우리 두 나라는 "서로 돕는" 의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중일 마관조약(馬關條約)성립 이후, 한국이라는 이름은 있으나 실제로는 망한 처지에 이르렀으며 수 십 년 동안 대한민족은 온갖 고초를 당하였으며, 우리 중국 역시 순망치한의 아픔을 앓고 있습니다. 일제의 탄압이 나날이 거세어지는 가운데, 먼저 총리의 혁명의 창도 이래, 그러니까 삼민주의를 구호로 하고, 세계 대동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의 기치 아래에서 한국 독립은 대한 민족의 신성한 사명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당--중국국민당 동지들의 혁명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들의 대일 항쟁이 이미 3년을 넘어서고 있으며, 승리의 날이 하루 하루 가까워지고 있으니, 우리가 왜적을 국경 밖으로 쫓아내는 때가 바로 한국 독립 운동이 성공하는 때일 것입니다. 다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듯이 자유로운 한민족이 하루 속히 무장하고 일어나 우리의 항일 열사와 더불어 손을 맞잡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전쟁을 하였으면 합니다.
보아하니, 한국 독립당은 정확한 주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견고한 정강(政綱)도 가지고 있으며 또 현명한 영수인 김구 선생까지 계시니 한국 광복이라는 큰 사업을 반드시 능히 감당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자유와 독립과 행복을 되찾은 한국이 삼민주의의 신중국과 더불어 세계에서 공존 공영합시다.

곽자준(郭紫峻) 

중.한 양대 민족이여 손에 손을 잡고

지리, 역사, 문화, 경제 등 어느 방면으로 보나 중국과 한국 양 민족은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수 십 년 동안 적의 압박을 받으면서 동병상련의 처지에 이르러,양 민족은 더욱 서로 아파하고 슬퍼하면서 공동의 정서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위대한 정감의 교류로 인하여 우리 나라는 줄곧 한국 혁명 동지들이 우리 자신의 동포와 다를 바 없다고 여기게 되었으며, 망국의 한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직접적으로 그 조국 광복 운동을 하는 한국 동지에게 충성을 다하며, 간접적으로는 중국의 어려움을 위하여 정의의 무쇠 주먹을 휘둘러, 우리 공동의 적에게 한 번에 그치지 않는 공격을 하여, 양 민족의 공동 역량으로 위기에서 벗어난 역사적 사실이 실제로 여러 번 있었다.
한국이 잔혹한 적에게 합병된 지 30여 년 동안, 우리는 한국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던 광복군이 중화민족이 일어나 항전하는 전장에 나타나서, 국군과 함께 적을 무찌르는 것을 목도하였다. 우리는 내심으로 헤아릴 수 없는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동아시아의 평화의 회복은 중화민족 영웅의 항전으로부터 그 서광이 비치고 있으며,백두산 앞 압록강 변 3천만 인민의 나라 회복 운동의 노도가 적군의 귀로를 완벽하게 차단하여 100만 무장 세력으로 하여금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하게 할 것이라 믿습니다.
오로지 삼민주의를 철저히 지킴으로서 승리하여 중국이 완전히 광복하는 날, 동아시아의 각 민족에게 비로소 평화와 공존과 번역의 보장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손을 잡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 적군의 수중에서 우리의 공동의 생존 권리를 되찾아봐야 하며, 중국 항전의 승리에 따르는 한국 혁명의 성공을 쟁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공동의 노력을 통해서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인류 광명의 위대한 앞날을 개척해야 합니다. 이것이 시대와 역사가 중한 양 민족에게 부여한 공동의 사명일 것입니다!

왕덕박(王德薄) 

한국 광복군의 성립과 중국 항전

전쟁이란 본래 서로 힘을 겨루는 것으로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취하여 자기의 역량을 증강시키는 동시에 적군의 힘을 쇠약하게 하는 것이다. 서로 엎치락 뒷치락 하는 가운데, 우세를 점하고 적군을 쇠약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적군 내부에서 적을 교란시키고 분화시키면서 쇠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만일 이런 면에서 충분히 성공적이라면 적군과 싸워 승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다. 혹은 최소의 희생으로써 최대의 효과를 획득할 수 있다. 중국 항전은 스스로는 이 이치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비교적 적은 희생으로써 왜적을 무찌르기를 원한다면, 한민족과 연합하고 그 나라 안의 혁명을 추동시키고 적군의 후방을 교란시킴으로써 왜적의 역량을 쇠약하게 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방법이다.
현재 중국의 항전은 이미 3년을 넘어섰다. 중국은 장대하게 일어났으며 이에 왜적은 이미 곤란한 상태에 빠졌으며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니, 소위 최후의 결전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으며 항전은 중요한 관문에 다다른 것이다.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가 마침 중국의 임시 수도인 중경(重慶)에서 성립을 선포하였으니, 중국 항전과 한국 혁명에 대하여 의의가 매우 크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처럼 한다면, 중․한 양대 민족이 더욱 진일보한 긴밀한 연합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중․한 민족의 협력과 투쟁 및 그 찬란한 성과가 역사에서 이미 여러 번 있었다. 예를 들어 신라시대 왜적이 한국을 침략했을 때, 중국의 당조나 유인◎(劉仁◎-원문 판독 불가-)에게 병사를 주어 한국에 원조하게 하였으니, 결국 왜적을 격퇴하였다. 또 선종 25년 임진년에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명을 치려는 의도로 한국에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였다. 당시 한국의 조정이 이를 거절하여 드디어는 한일 전쟁이 일어났다. 중국의 명조는 또 이여송(李如松), 형개(邢玠) 등을 파견해 군사를 이끌고 한국에 원조하게 하여서, 마침내는 중한 연합군의 항전으로 8년간의 전쟁 끝에 나라 밖으로 쫓아내었다. 이번 중.한 연합은 세 번째 항일 연합이다. 지난 두 차례 연합하여 왜적을 정벌할 때에 한국은 확실히 크나큰 위력을 발휘하여서 더할 수 없는 광영을 얻었다. 이번 연합 항전에서 한민족은 도대체 얼마나 큰 역량을 발휘할 것인가가 이번 중․한 양국의 모든 사람이 관심을 가지는 바이다.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재 한민족의 혁명의 정서과 혁명의 역량 및 문화적 전통을 먼저 고찰함으로써 정확한 답을 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4천년이 넘는 찬란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왜적의 역사와 비교해 볼 때 1천 여년이나 앞선 것이다. 또한 과거 한국 민족이 계속해서 일본 문화를 계도했음은 이미 공인된 사실이다. 따라서 한국의 민족 의식은 결코 왜적에 의해 소멸될 것이 아니며, 한국 고유의 문화는 두 번 다시는 남에 의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왜적에 의해 강제로 합병된 지 30여 년째, 비록 참혹한 압박을 받았지만, 정의로운 혁명 투쟁은 언제나 폭력에 굴하지 않았다. 무수한 혁명 선열들은 머리를 내어 던지고 뜨거운 피를 흘리며, 일곱 번 쓰러지면 여덟 번 일어난다는 정신으로,좌절을 받을수록 더욱 분투하여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되찾기 위하여 장렬한 희생을 하였다. 안중근(安重根)이 하얼빈(哈爾濱)에서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암살하고, 김익상(金益湘)이 상해에서 전중의일(田中義一)을 암살하고, 강우규와 송학선 등이 차례로 재승실(齋勝實)을 암살하고, 안명근(安明根)이 사내정의(寺內正義)를 암살하고, 이봉창(李奉昌)이 동경에서 일본 황제를 암살하고, 윤봉길이 상해에서 폭탄으로 백천(白川) 등을 암살했던 장렬한 거사가 모두 한국 민족의 불요불굴의 위대한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1919년 "3.1" 대혁명은 한국 민족이 비록 왜적의 철제 아래에 있지만 여전히 일치 단결하여서 독립을 선포하고, 맨주먹과 맨 손으로 네 개 사단의 적군에 저항하여, 앞 사람이 쓰러지면 뒷 사람이 그 뒤를 이어서 투쟁하였다. 5월까지의 투쟁으로 5만 이상이 사상하였다. 이후로, 한국 민족의 혁명 투쟁은 소멸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나날이 격렬해져서, 더욱이 중국 항전 발생 이래 한국 민중의 혁명 정서는 더욱 가열차게 되어 혁명은 이미 일촉즉발의 기운을 가지게 되었다.
혁명 무장에 이르러서는, 한국이 패망한 직후 대부분의 군사 영수와 애국지사들이 중국 동북 변경의 □□□ 부근으로 옮겨와 근거지를 만들고 끊임없이 군사 간부를 양성하고 부대를 편성하며 동북지역을 왕래하였다. 압록강 지역에서 두루 군사 훈련을 하기를 30여 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며, 왜적과의 박투 교전이 하루도 끊일 날이 없었다. 9.1 사변 이후로 동북의 중국 항일 구국군과 연합하여 어느 때 어디서나 작전을 수행하여 그들의 용맹과 분발이 전보다 배는 강해졌다.
이때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을 선포함으로써 해외의 한국 교포들이 소식을 듣고 열렬한 반응을 보내오고 있으며, 특별히 수십만의 미주 교민들이 일치하여 호응하고 경제 방면으로 원조를 많이 보내오고 있다. 관내에 대하여는 민족주의의 통일당,즉, 한국독립당의 영도와지지 아래에서 모든 인력과 물력을 동원하여 광복군에게 헌납하고, 전체 당원을 동원하고 민중에게 호소함으로써 광북군에 참가하게 하며, 또 한편으로 한국 전체 국민의 혁명 정신을 적극적으로 추동하여 이 군사 행동에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특별히 한국 광복군이 한국임시정부의 국군에 직접 속해 있으며 당파와 계급의 차이를 가리지 않으며, 모든 한국 사람들이 참가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며, 따라서 현재 광복군의 모든 중요한 작업이 모든 국내외의 한국 무장 부대를 종합하여 새롭게 정비함으로써, 통일된 지휘 아래에서 항전에 참가할 것임을 지적하려 한다. 그 다음, 적후로 깊이 들어가 점점 전체 인민의 무장을 동원함으로써 중․한 양대 민족으로 하여금 적절히 연합하고, 발걸음을 맞추어 최후의 승리를 얻게 하려 한다.
이때 중국의 대일 항전은 중화 민족의 존망과 관계될 뿐 아니라, 한국 및 기타 피압박 민족의 흥망과도 관계되며, 우리는 우리 민족의 해방과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이에 광복군을 조직하며 중화민족을 항전에 참가하게 하며 일본 제국주의를 무찌르는 데에, 한국광복군의 혁명적 역량이 항일 전쟁 중 최후의 승리를 얻는 데 불가결한 위대한 역량임이 확실함을 잘 알고 있다. 동시에 중국 항전의 승패는 또한 즉 우리 한국이 일본의 피비린내 나는 통치를 뒤집어 업고 독립과 자유를 쟁취함의 성패는 한국의 광복이 성공을 거둘 수 있느냐에 있다. 이번 항전 관계의 중요성은 실로 크며, 항전 승리의 획득에 있어 한국의 광복군은 홀시할 수 없는 조력군임을, 지금 중․한 양국 인민이 반드시 이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합작을 확실히 하고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광영된 최후의 승리는 바로 앞에 있을 것이다.

황학수(黃學秀) 

한국광복군의 당면 과제

"한국 광복군 참모 김학규는 11월 12일 중경 국제 방송국에서 국내외 동포들에게 연설을 함"
여기는 중국 전시의 수도 중경의 국제 방송국입니다. 지금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는 "한국 광복군의 당면 과제"라는 제목으로 간단한 보고를 하려 합니다.
9월 22일, 본부가 9월 17일 성립한 경과와 정세를 모두에게 보고했었다. 모든 동지 동포들이 본부 성립 후의 모든 형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사료되어, 지금 총괄적인 보고를 하려 합니다. 본부 성립 이래, 한국 인민의 광대한 옹호와 우방 정부 인민의 지지 받은 까닭에, 모든 일들이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가 경축할 만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본부의 당면 과제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세심하게 고찰하여 보고를 해야 할 것으로 우리는 현재의 아군과 적군의 상황과 내외 형세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1. 전국이 단결하여 의지를 모으고 힘을 모아,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족 해방 지상이라는 원칙 아래에서 전국 인민이 계층과 당파를 가리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모든 인력과 물력을 광복군에 집중시켜 적을 공격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잔혹한 적을 무찌르기를 원하고 이상적인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기를 원한다면, 이는 결코 부분적인 인력과 물력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반드시 전 민족의 모든 정신과 물질적 역량을 하나로 모아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비로소 결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 누차에 걸친 운동의 실패의 원인을 분석해본다면, 일호의 거짓도 없이, 모두 사상적인 혼란과 당파의 분열이라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국가 민족의 앞날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지금 국가와 민족의 존속이라는 문제는 20세기 40년대 앞에서 우리가 마땅히 역사적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반성하고 지난날의 잘못을 바로잡고 결심을 내림으로써 정확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곧 국가적인 죄인일 것이며 민족의 반역자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모든 한국 인민은 마땅히 냉정한 사고로서 과거를 비판하고 잘못을 청산하며, 국가 독립과 민족 해방 지상이라는 원칙 아래에서 개인적인 편견을 버리고 민족 단결을 힘써 추구하며, 국가 기율에 복종하고 통일을 추구하며, 모든 정력을 통일된 임시 정부 아래로 집중시킴으로써 적군과 투쟁하여, 민족 해방을 얻고 조국의 광복을 되찾는 것, 이는 본부가 모든 동지와 동포들에게 바라마지 않는 일입니다. 동지들, 그리고 동포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오랫동안 바라왔던 좋은 기회가 이미 우리 앞에 와 있습니다. 중국 인민의 3년여의 견고한 항전으로 왜적은 깊디 깊은 전쟁의 함정 즉 진퇴양난․고립무원의 상황에 빠졌습니다. 중국의 항전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며, 왜적의 침략은 반드시 패할 것임이 이미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너무도 분명한 사실은 이는 바로 우리가 민족 해방과 국가 독립을 쟁취할 절호의 기회라는 것입니다. 용맹스런 동지와 동포 여러분 우리는 마땅히 시대를 확실히 인식하고 기회를 잡아서 소위 "돈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힘이 있는 사람을 힘을 보태는" 방식으로 국가에 헌신하여서, 국가 민족의 해방이라는 거대한 사업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2. 광복군의 조직을 강화해야 합니다. 이는 현재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두 번째 과제입니다. 우리 광복군은 30년 동안의 용맹스러운 투쟁 업적 뿐 아니라, 국내 의병 운동과 만주의 무장 투쟁 및 최근 중국 전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항전 투쟁까지 포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우리 광복군의 비길 데 없는 위대한 성과입니다. 다만 한 가지, 우리의 항전에 참여한 부대는 아직까지 통일된 지휘 계통 아래에서 유기적인 투쟁을 벌이지 않아 비교적 산만하고 분산적인 활동을 벌였습니다.이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대체로 각지에 퍼져서 용맹스럽게 적군을 사살하던 무장 부대들이 모두 광복군의 주변으로 모였으며, 광복군 총사령부의 통일적인 기치 아래에서 유기적이고 계획적인 행동을 전개하여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야 할 것입니다.
3. 선전 사업을 강화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당면한 세 번째 중요 과제 입니다. 간부와 민중을 훈련하는 것은 본래 혁명 자체를 위해서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군․정․민․운의 각종 훈련에 대하여 충분한 훈련을 가지지 못했으며 이것은 매우 심각한 잘못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엄격하게 개정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먼저 대량의 군정민의 각종 간부들을 끊임없이 훈련시키는 것으로 시작해 다음에는 민중 및 각종 군중 단체로 보급하여서, 우리의 모든 대오를 강철 같은 힘을 가진 혁명의 보루로 만들어야겠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청년 동지들이 본부의 이러한 호소를 받아들여 용맹스럽게 참가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여기는 바로 애국 청년이 몸을 담고 싸워야 할 기지이며 우리가 힘써 투쟁해야 할 것입니다.다음으로, 환경의 제한으로 인해 선전 사업은 아직 충분히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과거 무수한 찬란한 사업들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것 역시 마땅히 바로잡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 힘으로 곤란을 극복하여서 힘껏 우리의 모든 형제를 전 세계 대중들 앞에 알림으로써 국제적인 동정과 원조를 획득해야 할 것입니다.
4. 유격대를 강화하고, 주력전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당면한 네 번째 과제입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적에 대하여 진행한 전투들은 모두 유격전술을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과거 ′3․1운동′의 민중 대 폭동을 제외하고는, 예를 들어 국내의 의병 운동이나 만주 및 기타 해외 각지의 무장 투쟁은 모두 유격 투쟁이었으며, 현재, 중국 동북4성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투 역시 유격투쟁에 속합니다. 다만 이러한 유격전쟁의 주요한 효과는 적군을 소모시키고, 적군을 피로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지는 못합니다. 최후의 승부를 결정짓기 위해서는 적군을 소멸시켜야 하는데, 그렇다면 반드시 대규모의 주력전투 방식을 취해야 합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는 마땅히 유격전쟁을 강화시키는 한편, 인력과 물력을 적극적으로 비축하여 주력투쟁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일단 준비가 완료되면 점점 우리의 전략 전술을 바꾸고 아울러 적당한 때에 국내 민중 대규모의 폭동과 연계하여 단 한번 거사로 적군을 궤멸시켜야, "우리 강과 산을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전략과 전술은 마땅히 작은 유격전으로부터 점점 대규모의 주력전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며, 부분적인 작은 투쟁으로부터 점점 광범위한 대 폭동으로 변환되어야 할 것입니다.
동지 동포 여러분, 본 군이 마땅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마땅히 많고 이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시간 관계로 인하여 모두를 다 제기할 수는 없는 관계로 오늘의 보고는 여기에서 끝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 각자가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그리고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인류의 정의를 지키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광복군을 지지하며, 광복군이 위대한 정의의 군대가 되어 그 신성한 사명을 완성하게끔 지지를 보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 건강, 분투하시길 바랍니다. 마치겠습니다.

김학규(金學奎)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 특집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는 대한민국 22년(중화민국 29년) 9월 17일 중경에서 성립식을 거행하였다. 이것은 한국 역사상 대서특필할 만한 일이다.
한국은 왜적에 강점된 이래, 이 30여 년 동안 비록 왜적의 압박과 박해를 받아왔지만, 한국 민족의 의식은 줄곧 일본의 압박에 굴하지 않았으며, 더욱 셀 수 없는 민족 영웅과 혁명 선열들이 앞 다투어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장렬하게 희생함으로써, 한민족의 영광스런 혁명 역사와 결코 사라지지 않을 위대한 혁명 세력을 만들었다. 현재 중국의 용맹스런 항전이 이미 3년을 넘어서고 있으며 최후의 결전이 목전 앞으로 다가왔을 때, 한국 혁명군의 통일 기구인 광복군 총사령부가 중국의 중경에서 성립을 선포한 것은 중․한 양대 민족의 건아들이 어깨를 나란히 전쟁을 수행하고 함께 피 흘리며 최후 승리를 얻기 위한 진일보한 표현이다.
식은 일요일 오전 6시, 가릉(嘉凌) 강변 모처에서 거행하였다. 성립식에 출석한 사람은 한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한국 독립당 집행 위원 다수, 중국 각 기관 장관 및 광복군 군관 20 여 인이었다. 한국 혁명군과 중한 양 민족의 합작, 그리고 광복군의 임무에 대해서 대회 주례인 김구(金九) 선생의 매우 상세한 치사가 있었다. 다음으로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이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보고서를 낭독하였고 아울러 성립 경과를 보고하였다. 이어서 국무위원 홍진(洪震)의 치사가 있었고,각 기관 장관 및 한국 독립당 집행위원 조완구(趙琬九) 등의 축사가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李靑天)의 답사로 성립식을 끝마쳤다.

대회 주례 김구 선생의 개회사

내빈 여러분, 동지 여러분, 오늘은 우리가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식을 거행하는 날입니다. 이처럼 일각이 천금같이 귀중한 때에, 우방과 각계 동지 여러분들 역시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어 참가하여 주시어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 주권의 독립과 민족 생존의 자립을 위해서 왜적과 30여 년의 고투를 벌여왔습니다. 매우 어려운 시절 속에서 우리는 때로는 정규의 광복군을 출동시켜 대규모의 전투를 벌이기도 하고, 때로는 적은 수의 광복군을 파견하여 계속적으로 장기적인 유격전을 벌이기도 하면서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우리 중․한 두 민족은 역사 이래로 매우 긴밀한 관계였으며, 그 생사존망이 하나의 운명으로 묶여 있습니다. 따라서 보통의 현명한 선비들은 우리 한국 혁명에 대하여 시종 열렬한 찬조를 보내오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 한국 혁명군 동지들 역시 중국 혁명에 참여한 적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불합리한 몇 가지 조건에 연루된 까닭으로 구체적인 협력 정신과 성과를 보지 못한 것이 아주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이제 우리의 우방인 중국이 바야흐로 동방의 대 침략 야심가에 맞서고 있으며,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더욱이는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신성한 항전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모든 민족은, 인류의 반동분자를 제외하고는, 중국의 승리에 대하여 열렬히 찬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더욱 이번 중국 한번은 우리 한국의 독립과 매우 깊은 관계를 가지는 까닭에 우리는 기꺼이 전 민족의 무장 역량을 동원하여 중국 전우와 공동으로 분투하고 중․한의 원수에게 보복하고 있으니 이 역량은 우리 한민족의 구국을 위한 기폭제이며, 동시에 중국 항전을 위한 일대의 생력군입니다.
오늘, 우리는 중국 전시 수도인 중경에서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을 거행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아울러 이로부터 중국 경내에서 정식의 광복군이 추동되면서, 우방인 중국의 항일 대군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적을 사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로써 동북지역 일대에서 창을 메고 아침을 기다리던 삼한의 건아들이 화북 일대에 흩어져 백의종군하던 대군과 함께 출동할 수 있으며, 아울러 이 국내의 3천만 혁명 대중들이 소문을 듣고 일어나 왜적의 철제의 사슬을 끊고 성결한 사명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방인 중국의 최고 통수의 인격과 위대한 책략에 대하여 원래부터 지대한 흠모를 가져왔으며, 이제 더욱이 우리 한국 광복군이 중국 경내에서 정식으로 출범하기를 허락하여, 우리 한국인으로 하여금 여기 중국 항전의 시기에 맞추어 연합군의 일부 임무를 다하게 하고, 아울러 우리로 하여금 위대한 목적에 다다르게 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매우 감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욱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지런히 중한 연합군의 사명을 다하여야 할 것이며 이른 아침을 우리 위대한 사업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직책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이 의식은 절대로 평범한 이름만의 의식이 아니라, 중대한 의미를 그 안에 갖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따라서 본 주석이 이 기회를 빌어 그 의미의 신중함을 설명하려 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 선생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보고

1. 한국국군과 역사상 국제 전쟁

한국 민족의 건국은 5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며, 중화, 이집트, 그리스, 인도와 더불어 문화가 가장 오래된 나라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2천 5백만이 넘는 인구가 8만 4천 평방미터의 국토를 지키고 있다. 필요한 군액은 적게는 5십만이요 많게는 100만이다. 옛날 나라가 번성하였을 때는 강력한 군대가 100만이나 있었고 밖으로는 이민족을 다스렸으며 안으로는 나라의 기반을 가지런히 하고, 이웃과 교류하고 나라를 지키는 도가 갖춰져 있었다. 15세기 말엽, 해군대장 이순신, 육군도원수 권율이 서쪽에서 중국군과 연합하고, 명 장군 송응창, 양호, 진린, 이여송 등이 동쪽에서 왜군을 물리쳤다. 8년간의 전쟁 끝에 왜적을 축출하였다. 16세기 초에 이르러 북으로 청과 전쟁하였다. 두 번의 전쟁을 거치고 나서 이후의 민족의 의미는 점점 두터워져 군사를 다스리는 전술을 널리 취함으로써 군국은 훈련시켰다. 예를 들어 유럽의 총포의 기술과 화인 척계광(戚繼光)의 전략 등이 일찍이 300여 년 전에 국방에 응용되었으니 별로 손색이 없었다.

2. 포츠머스 조약과 한국

18세기 후반기부터 서구의 세력이 동양을 밀려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내분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외환 또한 끊이지 않았다. 일본과 러시아 양국이 각각 한국의 경내에 군사를 주둔시키고는 정전을 맺었다. 그런데, 소위 포츠머스 조약이란 것이 세상이 출현하여서, 결국에 한국이 희생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1905년부터 1910년 사이 한국인이 얻은 것이라고는 수 십 개의 망국의 조약뿐이었다. 이로부터 3천만 민족은 일본의 포로가 되었으며 8만 4천 평방미터의 국토는 일본인들로 넘쳐났으며, 무한한 모든 이권은 결국 전리품이 되었으며, 충성스럽고 용맹한 국방군은 장곡천(長谷川)에 의해 강제 해산되어(1907년 8월 1일), 5천년의 역사를 가진 독립 국가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1910년 8월 29일). 이는 매국노와 적국 정부가 연출한 망국의 비극으로, 포츠머스조약의 유해가 심히 크다 하겠다.

3. 국방군 해산과 광복군의 창립

1907년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鐘), 이준(李儁) 등 3인은 명을 받아 네덜란드로 가서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여 1905년 11월 17일 체결한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포하려 하였다.
일본의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당시 한국 총독을 맡고 있었는데, 한국 황제를 협박하여 퇴위시켰다. 그리고는 임동(林董)에게 명하게 7개의 조약을 체결하게 하였다.아울러 주한일본군사령 장곡천(長谷川)으로 하여금 장군들을 소집하게 하여 국방군을 강제 해산시키는 음모를 진행시켰다. 때에 시위대 제1연대 제1대 수장 박승환이 군사를 일으켜 궁으로 쳐들어가 국치를 설욕코자 하였으나, 그 화가 황제에게 미칠까 두려워 궁으로는 가지 못하였다. 8월 1일 국군이 해산되었을 때 박 장군은 분기탱천하여 적장을 욕하였으나 군대를 다시 소집하지는 못하였다. 울분이 들끓어 총을 들어 자살하니, 그의 총소리는 해와 별을 꿰뚫고 귀신조차도 감동시키는 소리였다. 이에 한국군이 용맹스럽게 전쟁을 일으켜 주한 적군을 무찌르니 그 시신이 길거리에 널려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의 의병들이 소문을 듣고 다시 일어났으며 민병들도 서로 협력하면서 가는 곳마다 적군들을 사살하는 승리를 거두었고,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10여 년 동안의 전쟁으로 한국 국토는 총탄으로 뒤덮히게 되었고, 비무장인 남녀노소가 참혹하게 적에게 주살된 것이 50만이 넘었다. 적군들이 한국에 흘린 피 역시 적지 않다. 종합해 보면, 한국 광복군은 1907년 8월 1일 국방군이 해산되었을 때 곧 성립하였다. 바꿔 말하면, 적군들이 우리의 국군을 해산시킨 날이 바로 우리의 광복군이 창설된 날이다. 올해 8월이 꼭 33주년 되는 때이다. 그리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이 우방의 임시수도의 항일의 고함 속에서 거행되고 있다. 이에 광복군의 약력을 우방에게 고하노라.

4. 광복군의 국내에서 국외로의 이동

광복군은 국내에서 항일활동을 벌였던 5,6년 간, 비록 적군을 완전히 축출하지는 못했지만, 국가의 독립을 위하여, 그리고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오랜 기간의 저항과 민족 정신을 발휘함으로써 위대한 민족 영웅과 혁명 선열들을 탄생시켰다. 경술년에 이르러 한국이 망하였으나, 청의 정권은 혁신을 하여 중화민국이 남경에 건립되었다. 이에 한국광복운동의 본영은 국내로부터 국외로 이전하게 되었다. 상해, 길림, 봉천, 블라디보스톡,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등지에 각각 근거를 두면서 비밀리에 외교와 군사 행동을 진행하였다. 흑룡강(東省)에 학교를 세워 사관과 인재를 양성하는 외에도, 청년 학생들을 미구 및 중국 운남(雲南) 등 군사학교에 밀파하였다. 아울러 유격대를 조직하여 도문강과 압록강 등지에서 적군과 더불어 교전하면서 적지 않이 타격을 입혔으며 사살한 적군의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이렇게 투쟁하기를 10년, 그들의 용감한 투쟁이 한 번도 끊이지 않았다.

5. 광복군과 대한민국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1919년 3월 1일로써 독립을 선포하고 민국 정부와 의정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국내외 무장 항일군을 광복군으로 개편하였다. 법규를 세우고, 영수를 임명하고, 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 흑룡강 일대에서 3대 군사 기관을 통하여 흑룡강 200만의 한국 교민들을 통제하였다. 장정을 뽑아 군사비를 지급하면서 적군과 맹렬하게 대치하였다. 적의 장수가 크게 두려워하였으며, 주한 일본군의 군사물자 조달이 부족함으로 인하여, 이에 모든 병력을 동원하였다. 보루를 세우고 군함을 늘리고, 전선망을 세우고, 교통망을 확충하며, 편의대와 밀정들을 늘렸는데, 그 임전태세가 잠자고 밥 먹을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그 전적을 살펴보면, 열 번에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어, 적군은 이에 외교적인 수단을 빌러 한국군을 제어하고자 하였다. 즉 1925년 삼시협약(三矢協約)이 일본 주한독부 경찰청장의 손에 의해 체결되었다.
이 협약은 "중,일 양국의 경찰은 협력을 통하여 한국 교민의 반일 운동을 퇴치한다.중국 당국은 마땅히 온 힘을 다하여 반일운동을 하는 한국인을 검거하여 즉각 그 한국인 영수의 이름을 인도하고, 주한일본당국에 명단을 넘기며, 또한 품행이 단정치 못한 한국인들 역시, 일본 관서 재판부에 체포하여 넘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대개 당시의 흑룡강 일대는 비 중국혁명정부의 세력이 활동했던 곳으로 여기에서 활동하는 한국군에 대하여는 공인하지도 않고 또 묵인하지도 않았다. 드디어 웃고 울었던 많은 장수와 애국지사들이 바로 체포되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의 걱정과 탄식이 늘었다. 한국군에게는 교포들과 협력하고 산악 등 지리에 밝은 잇점이 있다. 따라서 숨어 있을 때 옹근 전략으로 끊임없이 출몰하고 기이하고 돌출한 행동으로써 능히 적은 세력으로써 큰 적군에 맞설 수 있으며 위험한 상태를 평안하게 만들 수 있었다. 1931년 이후로부터, 한국과 중국 양군은 서로 제휴하고 조직을 엄밀하게 하며, 군의 기강을 엄정하게 하여, 싸울수록 더욱 용맹스러워졌으며, 지금까지 조금의 게으름도 없이 장백산과 흑룡강 일대를 두루 다니는 백전불굴의 용사들의 용맹함이 아직도 조금도 식지 않았다. 이는 대한민국의 건국군이요 약소민족의 전위대이며, 중․한 공동의 원수를 무찌르는 선봉대이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하는 근간이 되는 부대이다.

6. 소련과 러시아의 대일 타협 시기와 광복군

국제적으로 연쇄 관계를 가지며, 민족적으로 연대성을 가진 어느 민족과 나라는 결코 고립적일 수 없다. 한국 광복군은 민족 단위의 무장 세력으로서 국제 환경에 좌우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러시아와 일본의 타협의 시기에 한국군은 러시아 접경에 접촉할 수 없었다. 일례로 흑룡강 일대에 있어 삼시협약을 들 수 있다. 이 위험한 지경 속에서 국제적 원조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 민중의 원호나 지지도 잃어버렸다. 따라서 과거 한국군이 실제로 갖은 위협과 협박을 받았을 뿐 아니라, 더욱 무기와 군비에 있어서는 따로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천만 다행인 것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몸을 돌보지 않고 수만의 민중을 동원하여 적군을 대파하는 혁명이 수 십 년 동안 끊인 적이 없었다. 약소 민족 운동사상 이채로운 일이라 하겠다.오직 바랄 것이 있다면 우방국들의 일본과의 싸움일 뿐이다.

7. 광복군과 중국

신해 혁명 후, 중국과 한국의 제휴한 세력이 아주 적절하였다. 북벌에 앞서, 중국 광동 황포군관학교의 장(蔣) 교장은 많은 수의 한국 청년들을 포용하였다. 국내외의 뜻있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항상 뜻을 같이 하였다. 1․28, 4․29로부터, 중국과 한국은 공동의 적에 대한 적개심이 날로 심각해져, 낙양(洛陽) 분교도 한국의 청년을 비밀리에 받아들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것은 북벌성공 후라는 좋은 형세에 실제적으로 대일 선전의 포문을 연 것이었다. 이 폭풍전야에 흑룡강 일대의 한국군의 각계 수령들은 소식을 듣고 호응하여 소매를 걷어 부치고 달려와 한국 임시정부의 영도 하에서 군사기관을 설립하였다. 국내외 당원들에게 밀령을 내려 즉각 동원하였다. 이때에 맞춰 중국 최고 영수 장(蔣) 위원장이 중국과 한국의 동지의식에 근거하여, 또 아울러 손중산(孫中山) 선생의 약소 민족을 도와야 한다는 원칙과 유지를 좇아, 흔쾌히 한국 광복군이 중국 경내에서 편성되고 활동하는 것과 영지의 군정가계가 서로 편리를 도모하도록 승인한 것은 중․한 연합군 성립의 효시일 것이다. 한국 임시 정부가 광복군 조례와 총사령부 조직 대강을 정하여 구 제도와 신 군을 새로이 편성하여 성대히 일어나니, 오늘 거행하는 의식은 한국 광복군의 총사령부의 그것이다. 중한 5천년 역사의 신의와 교의가 일본에 대항하는 속에서 더욱 돈후하여지니, 이는 자연스러운 추세일 것이다.

8. 광복군의 임무와 구성 인물 

광복군은 건설을 파괴할 임무를 갖는다. (1) 국내 적군들에 대하여 모든 침략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기구를 파괴한다. (2) 국내 한국인에 대하여 모든 봉건 세력과 반혁명 세력과 적군의 각종 악랄한 요소를 좇는 이를 파괴한다. (3) 이 외에 모든 과거의 오염되고 속된 것 역시 파괴할 임무에 속한다. (1) 먼저는 대한민국 건국 방침을 따른다. 즉 정치와 경제, 그리고 교육의 균등 제도를 수립한다(토지 국유와 보통 선거 제도, 의무교육 연한의 연장 등을 실행한다). (2)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간의 평등한 지위를 실행시킨다. (3) 나를 평등하게 대우하는 자와 반드시 손을 잡으며, 세계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촉진시킨다. 이것은 설적 임무에 속한다.
한국 광복군의 임무가 정해지고 구성 인물들을 이에 정한다. 무릇 조국의 독립과 민족 해방을 위해 싸우는 자, 무릇 신공화국과 합리적 사회의 건립을 위해 싸우는 자는 모두 광복군의 기치 아래 나란히 설 수 있다. 용감하게 앞으로 전진하며 의로웁게 고개를 돌리지 않으며 인류의 적을 멸하기를 선서하는 자, 그리고 나라의 기본을 무궁한 것에 두는 자, 정의로운 인간의 도리를 주장하는 우방인사 역시 배울 것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위원 홍진(洪震) 선생의 훈사 

오호라, 옛적 우리 한국은 아시아의 큰 나라로서 동방에 웅거하였으며 사방을 곁눈질로 볼 정도로 5천년의 빛나는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3천만의 우수한 민족이 기거하던 집단이었다. 누가 알았으랴, 후대에 정치가 바로 서지 못하고, 군사력 역시 강해지지 못한 고로, 강한 이웃 나라에 침략당하여, 국토가 나날이 침탈당하고,근래에는 왜적의 침략에 참혹하게 짓밟혀, 국가는 포로가 되고 인민은 노예가 되었으니, 슬프도다.
오로지 다행한 일은 국혼이 아직 살아있고 민심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호걸지사들은 국치를 설욕하고자 맹서하고 앞 다투어 싸우고 있다. 그리고 일반 민중 역시 모두 우리 모두의 원수에게 비분을 느끼고 항일의 뜻을 세워, 3․1의 과업(기미독립운동)에 이르렀다. 3․1의 과업은 전 국민을 총 동원하고 독립을 세계에 선포하는 한편 임시 정부를 조직하여 옛 국경을 다시 찾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본 정부는 이미 전 국민의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피를 흘리지 않고는 강한 적군에게 대항하기에는 부족하며, 무력이 아니고는 해방될 수 없는 이 사업의 어려움을 다시금 절감한다. 내외 가계에서 원조를 받아 폭력 행동을 개시하기를 수 십 년, 그 동안 단 한 번의 휴식도 없이, 때로는 악당의 괴수를 사살하여 모든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였고, 때로는 저들의 요충지로 들어가 적군의 허와 실을 시험했었다. 설령 왜적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돌보다 저것을 놓치기 일쑤이고, 지켜도 소용없는 것을 지키게 되었다. 오로지 본 정부가 우방에 기거하여 행동이 아직 자유롭지 않음으로 인하여 아직까지 대규모의 부대를 지휘하여 적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데까지는 이를 수 없었으니, 우리가 유감으로 여기는 바이다.
노구교(蘆溝橋) 일제 탄압이 있은 후로 중국은 전면적인 항전을 시작했다. 본 정부는 때가 이미 임박했음을 깨닫고, 이에 관내외 한국 청년 전사들에게 중국 군인과 일치단결하여 항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연내 각지에서 적을 참수하기를 바라니 이는 수고라 할 수 없으며, 우리의 인격과의 싸움일 뿐이다.
오늘날 중국 항전이 이미 3년을 지났는데, 갈수록 격렬해지고 승리가 눈앞에 있다.본 정부는 왜적이 기세가 꺾여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며,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고 여긴다. 이때 우리가 어찌 힘을 집중하여 의군을 일으켜 적군의 뒷덜미를 치고 목을 조름으로써 중국 최후의 승리를 앞당기고, 아울러 우리 광복의 뜻을 펼치지 않을 수 있으랴. 이에 대규모의 광복군을 조직할 것을 결의하고, 중국 최고 통수 윤여(允予)의 찬조를 받게 되었다. 지금 그 사령부가 이미 성립되었으니 이로부터 삼한의 병사들은 압록강의 동쪽에서 적을 무찌르고, 중국의 건아들은 발해의 밖에서 위세를 떨치지, 동아시아의 영원한 평화가 다시 세워짐을 바라봄이 어찌 기쁨이 아니겠는가.
지금, 광복군 사령부의 성립식을 거행하는 날, 본직은 삼가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먼저 중국의 통수인 장(蔣) 위원장에서 치하를 드리고, 다시총사령부 모든 대소 장군들에게 치사를 드립니다. 예전 우리 한국이 번성했을 때 군사를 다스림에 사율삼장(死律三章)이 있었다. 먼저는 나라에 불충성한 자는 죽는다, 둘째, 남을 상하게 하고 도적질한 자는 죽는다, 셋째, 전투에 임해 도망친 자는 죽는다. 지금 우리 광복군도 이 기율을 기준으로 하여 나라를 위해 가정을 잊으며, 공을 위해 사를 생각지 않는다는 기율을 정하였다. 이 강건한 결심으로 불요불굴의 정신을 발휘하여 왜적을 소탕하여 옛 땅을 되찾기를 희망한다. 시간은 다시 오지 않으니, 각자가 온 힘을 다하도록 합시다.

한국 독립당 중앙 집행 위원 조완구(趙琬九) 선생의 축사

우리 광복군 총사령부의 시작이 정식으로 성립했음이 이미 보고 중에 있었으니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은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즉 통일된 군대가 모든 전략을 발휘하여, 드디어는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작업을 각개전투로 할 수 없는 까닭은 오로지 형세가 여의치 않은 까닭입니다. 이때 신성하고 용맹스런 중국의 항일 성전(聖戰)이 실은 우리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를 가져다 준 것이 어찌 아니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공동의 적으로 인하여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으니, 이제 우리들은 바로 깃발을 정돈하고 발걸음을 가지런히 하고 포로들을 엄벌하고 우리의 무기를 펼쳐 사용할 때입니다. 우리 정부는 오랫동안 도모하여 광복군 총사령부를 성립시키고, 아울러 경험이 많은 노련한 이를 추천하여 총사령으로 임명하여 성립식을 거행하여 중외에 알리니 아, 성대하도다. 우리 정부는 전 국민의 지지를 받아, 어언 22년간 온갖 고난을 경험하였다. 왜적이 중국을 침략한 이래 무리들과 손을 잡고 근거지를 이동하여 서남부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도 우리의 정기만은 보존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역량이 부족하고 건아들의 수가 한계가 있었지만, 실제적으로 행동하고 거짓말은 허락지 않았다. 그런데 이 미미한 기초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 집체만큼 우수하다. 이는 우리가 과장하여 이르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도 그렇게 여기고 남들도 또 그렇게 믿는 바이다. 구미에 있는 우리 동포들의 역량은 실제로 강하여서 우리 정부의 근간 중의 하나로 자리하고 있다. 또 중국 윤함구에 산재해 있는 교포들은 이미 그 수가 상당하다. 수 백 만의 역사와 문화를 가진 민족이 가슴 가득 울분이 알게 모르게 자라났다는 소식이 두루 퍼지고, 오장이 펄펄 뛰며, 수시로 창을 메고 싸워 주력부대가 되었다. 그리고 국내 3천만 민중들이 바야흐로 슬픔과 부끄러움에 아직 괴로워하면서 그 정당한 인생의 의의를 찾고자 들고 일어났다. 설사 왜적의 음험함이 극악하다고는 하나, 세계를 놀라게 할 때가 바로 눈앞에 다가왔다. 적군을 몰아내고 우리 강과 산을 되찾아 오는 것, 무릇 이 모든 것이 이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마음을 하나로 하여 두루 무력으로 혁명을 하며, 기초를 마련하고 나라의 기틀을 다지기를,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하고 있다. 누가 가히 이를 부인할 수 있을까. 이에 우리 한국인은 오늘 기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 당은 조상의 유지를 받들고 국민의 정의에 부응하여, 인력과 물력과 정력을 우리 정부에 공헌하고 이 소박한 뜻에 다다르려 한 것이 기쁘게도 오늘을 맞았다. 그 흥기를 어떤 말로 형용할 수 있으리오. 장군은 사람이 적고 힘이 미약함으로 인하여 실망하지 말며, 사정이 어려움으로 인해 근심하지 말라. 굳건하여 뽑히지 않을 국가 지상․민족 지상을 정신으로 삼고, 군사 제일․승리 제일을 전략으로 삼으면 어찌 적을 죽이고 공을 세우는 것을 근심하겠는가. 적군이 근거를 잃을 때에 이르면 수시로 변하고 수시로 함정에 빠뜨려 지극한 재난을 맞게 하면, 바로 이때가 석양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때이다. 우리의 빛은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오직 자만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며,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이번의 성대함이 삼가 용맹스럽기를 바라며, 음과 양이 우리를 돕기를 바라노니, 이에 그 공을 낮추어 이에 이 몇 마디 말을 한국 독립당을 대표하여 경축하노라.

한국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李靑天) 장군의 답사

청천은 일찍부터 군대에 몸을 두고 적군을 사살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우리 임시정부가 광복군 총사령에게 명을 내려 의식을 거행하니 삼가 나를 깨우쳐 정부에 훈사와 중외의 각계에 축사를 하게 하여, 몇 마디 하려 합니다. 공적을 이루기를 바라면서, 가슴에 새기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두려워하였습니다. 재능이 부족함을 걱정하여 감당하지 못할까 근심하였습니다. 강건한 뜻은 도망침이 없고 오로지 앞으로 나아감만 있으니, 우둔한 재능이라도 힘써 우방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우리의 공동의 적을 박멸합시다. 우리의 독립과 자유를 이룸으로써 그들이 우리의 밤낮으로 빈틈없는 정신을 침해하지 않게, 아울러 끊임없이 지도하여 실족하지 않게 합니다. 이것이 제가 비록 불민하나, 감히 밤낮으로 삼가 두려움 없이 이 사명을 받들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청천(李靑天) 장군의 약력

이, 자는 백산(白山), 경성인, 현재 53세, 25세 일본 육군 사관학교 보병과를 졸업,일본군에서 복무했다. 대위의 신분으로 청도(靑島)의 역에 참가하였으며, 후에 군대를 나와 요녕성(遼寗省) 유하현(柳河縣)에 이르러, 한인이 설립한 신흥군사학교에 교직원으로 일했다. 34세 고려혁명군 사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었으며, 정의부 중앙 집행위원에 임명되었으며, 군사부장 겸 조선의용군 사령을 겸하였다.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 연안 각지에서 전투하였으며 9․18 후 한국 독립군 군사령으로 임명되었다. 동북의 항일군을 연합하여 공동 작전을 벌였으며, 길림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면서 무덤을 도굴하려는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1933년 낙양 군사학교의 초빙에 응하여 한국인 군관들을 훈련시키고, 아울러 조선혁명당군사부장과 임시정부 군무부장, 한국독립당 중앙 집행위원 겸 훈련부 주임을 맡았다.

존경하는 장(蔣) 위원장께 드리는 글 

삼가 역사가 시작할 때를 살펴보면, 중국과 한국은 한 가족으로 함께 동고동락하며 예나 지금이나 연맹의 관계를 맺었다. 명(明) 때에 환란이 있었으나, 함께 적을 토벌하고 악당의 괴수를 쫓아 그 소굴로 쫓아 보내었다. 300년 동안 감시 서쪽을 넘보지 못하더니, 우둔하고 잔혹한 적이 날이 갈수록 방자하고 사나워져 삼한을 멸하고 중국을 토벌하려 하고 있다. 아, 저 부끄러움을 모르고 간악한 적이 창궐하니 이는 두 민족의 백 대의 적이 되었다. 최근 또 노구교(蘆溝橋)에서 난을 일으켜 그 화가 상해 지방까지 미쳤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방 중화 민국의 최고 영수께서 분노하시어 적을 토벌하시기를 3년에 이르니, 적군 100만을 무찌르셨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강해지니, 진실로 이 한 분을 의지하니 온 천하가 편안해졌다. 한국인 모두는 목을 빼고 그를 기다리니 7일간 울기만 하겠는가! 10년 동안 동북 지방과 운남 지역에서 용사들이 비바람처럼 일어나고 피를 흘려 나라를 위해 충성할 것을 맹세하였다. 드디어 한국 광복군대가 귀국의 국경에서 적을 사살하여 자유를 얻었다. 중국에 있는 각파의 한국 군인들이 이로써 한 깃발 아래 모여 조국을 위해 싸우며 우방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여 세상에는 평안함을,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한가. 다만 바랄 뿐이지 어찌 사양을 하리오. 이때에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식은 삼가 한국 2천 7백만 전체 동포를 대표하여 항전 필승을 경축하며 삼가 혁명에 경례를 올립니다. 대한민국 22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 위원회.

중화민국 군사들에게 삼가 아뢰는 글

섬에 적군이 창궐하니, 그 효시는 노구교(蘆溝橋)에서였다. 북으로는 산동과 하북지방을 어지럽혔으며, 남으로는 절강과 광동성까지 미쳤으며, 그 나아감이 민첩하고 그 싸움이 또한 격렬하였다. 다행히도 귀국에는 장(蔣) 장군이 있어 전국적인 역량과 전방의 장사들을 모으셨다. 그리고 강철같은 굳은 마음씨로써 큰 산 같은 정신을 품으시고 두려움 없는 용맹을 발휘하시어, (군사들과)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전투가 계속될수록 격렬해져갔다. 포와 탄이 비 오듯이 떨어지기를 수 천리를 넘어섰고, 3년 동안 적군의 피가 넘쳐났으며, 죽은 적의 수가 과반을 넘어섰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눈을 들어 이것을 보았으며 손을 흔들어 축하해주면서 모두 중국은 필승이요 일본은 필패하고 말했다. 적군은 속전속결로써 대륙을 정복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찍이 귀국의 강렬한 저항에 의해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우리 양측은 적군이 이미 멸망에 다다른 꼴을 목격했으니, 더욱 마땅히 서로의 용기를 북돋아 합력하여 싸워야 할 것이다. 우리 독립당원들은 육탄이 아니고는 독립을 얻을 수 없으며 몸과 피가 아니고서는 민족을 구할 수 없음을 잘 안다. 이로써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식을 귀국의 중경에서 거행하니, 서로의 병사를 고무하여 출전을 준비하여 세계의 원수에게 복수하는 길이며 인류를 위해 정의를 남기고자 한다. 백전장수들과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가 전장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서 한국의 독립과 해방을 구하기를 바랄 뿐이다. 대한민국 22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 위원회.

전방의 군사에게 드리는 글 

"바다에 맹서하니 물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과 산천이 알더이다."는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이 왜적을 토벌할 때 맹서한 말이다. "하나 죽는 것은 내가 참을 수 있으나, 다만 원컨대 화친한다(和)는 말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사악한 자의 무리의 말이 어찌 그리 의를 헤치고 삼군을 미혹케 하는지요."는 선조 대왕 때의 주전 척화파의 글이다. "죽음은 비록 좋지 않은 것이지만 천지를 살펴보아도 도망할 데가 없구나. 비록 살고자 하지만, 개, 돼지로서는 살 수가 없다. 죽어야 한다면 차라리 의에 죽지, 감히 살길 바라겠는가. 나의 생을 인에 바친다."는 조종도(趙宗道)가 왜적을 토벌하자는 격문을 올린 것이다. 어찌 3백년이나 지난 후,우리의 용맹스런 용사들로 하여금 전장에서 이 말을 다시금 낭송하게 하는가. 제공들은 근본적으로 백전불굴의 용기를 가지고 있다. 이에 수 만이 죽어도 변하지 않는 충성심으로 동북 3성 지역에서 전쟁을 벌였으며, 빈틈없는 경계망을 쳐서 적군을 쫓아냈으며 용맹스럽게 적을 죽이기를 수 십 년을 해왔다. 충성스런 마음이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을 울게 하였다. 이는 제공들의 숙원이 가슴에 싸이고 밖으로 발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항전을 살펴보니 아직 전국적인 세력을 얻지는 못했으니, 왜적이 대패하여 진퇴유곡에 빠져 붕괴의 직전에 있음이 나날이 뚜렷해지고 있다. 만일 중국이 위․아래가 한마음이 되어 죽음을 무릅쓰고 적과 싸우고, 군과 백성이 한마음이 되어 자신을 버리고 나라를 구하기를 맹세한다면, 그리하여 그들의 전술이 오래도록 계속되고 전투가 가히 경지에 이른다면, 위대한 영웅들의 광대하고 무한한 민족의 역량이 족히 10년, 20년, 심지어 100년을 싸우고도 남음이 있을 만큼 될 것이다. 이에 감시 제공들께 간략하게 몇 가지를 고하노라.
(1) 각파에서 온 혁명 당원들이 각 당을 통일하여 독립운동을 하며, 더욱 조직화에 힘써야 할 것이다.
(2) 중국, 러시아, 미국, 멕시코 등지의 동포 및 국내의 대중들은 자신의 해방을 위하여, 일치 단결하여 우리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인력과 물력을 광복군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3) 국내 조직을 갖고 있는 수 백 만의 사람들은 독립당이 혁명을 영도하고 수시로 동원할 수 있도록 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4) 광복군과 중국 항일군과 즉시 연합 작전을 펼 수 있어야 한다.
(5) 각종 유파의 한국 군대는 이로부터 광복군 기치 아래에 통일되어야 한다.
(6) 적군은 반드시 패하며 중국은 반드시 승리할 조짐이 점점 구체화되고 있다.
(7) 중국과 한국의 부흥은 신 동아시아를 개조하는 기회로 목전에 다가왔다. 여명이 우리 눈앞에 있다. 이로써 패잔병이 속출하고 우리의 강과 산을 되찾는 일이 바로 눈앞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 임시정부가 광복군의 조례에 근거하여 총사령부를 다시 조직하고, 백전 장군 이청천(李靑天) 동지를 총사령으로 임명하고, 아울러 중경에서 성립식을 거행하니, 중서의 내빈들이 놀라움과 기쁨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으며, 모두들 한국의 독립이 총사령부의 행동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바라기는 전선에 있는 군사들이 당파와 주의를 가리지 않고, 진실로 항일과 건군, 그리고 왜적을 무찌르고 한국을 구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 자들이 사방에서 소식을 듣고 일어나 하나의 기치 아래 모여, 우리 광복군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것이다.나아가 우방과 함께 싸우자.

현재의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현재의 프랑스는 독일의 패전국이다. 양국 간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 혹은 종속의 관계이지, 빚을 받고 갚는 관계나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모든 프랑스인의 운명은 히틀러 한 사람의 손에 달려있다. 그러나 페탱이 라발을 파면시켰을 때 히틀러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 그를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했으며, 다시는 어쩔 도리가 없을 때 히틀러는 프랑스인들을 마음대로 하려 하였으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것이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어떤 사람은 아주 괴이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1) 작년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했지만 사실을 설명하자면, 그것은 극소수의 프랑스의 친독 세력의 부끄럼을 모르는 행위였다. 독일의 대다수의 민중은 결코 굴복하지 않았고 또 생존과 자유를 위하여 그들의 투쟁과 생활은 더욱 적극적이게 되었고,제 3제국의 압력이 그들의 부담을 가중시켰지만, 그들의 열망을 소멸시키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그들을 격분시켰을 뿐이다. 오늘날 페탕 정부가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것은 히틀러와의 제휴라기보다는 페탕이 프랑스의 독립과 자유를 지키겠다고 다시 한번 선언한 까닭이다. 히틀러는 프랑스와의 합작과 함께 영국과 전쟁하기를 요구하였다. 프랑스 민중의 반항 아래에서 프랑스에 대한 강력한 억압을 페탕이 감당할 수 없음을 히틀러 역시 명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소수의 친독파들은 무시할 수 있지만, 프랑스의 광대한 민중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다만 이리 저리 시도를 해 보면서 형세를 살피고 있을 뿐이지, 결코 끝까지 가보지는 못했다. 따라서 페탕 정부가 독일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은 프랑스 민중의 추대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히틀러가 감히 프랑스를 압박하지 못하는 것도 역시 프랑스 민중의 지지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독일과 프랑스의 모순적인 현상은 바로 이 프랑스 인민의 반항 위에 건립되어 있다. 적어도 히틀러와 페탕은 일시적으로는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지 못할 것이다.
(2) 그 다음은 현재 유럽의 전시 상황이 과거 프랑스가 영국에 패했을 때처럼, 즉 미국의 영국 원조는 아직 적극적이지 않고, 소련의 동향은 불명확하며, 이태리가 막 전쟁에 참가하여 축심국가들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때처럼 위태롭지 않다는 것이다. 먼저 독일의 영국침략 계획이 좌절을 맛보았으며, 이어서 이태리는 지중해 등지에서 참패하였다. 이와는 상반되게 현재 영국의 지위는 나날이 안정되어 가고 있으며, 군사적 준비는 점점 충실해지고, 미국의 대영 원조 역시 거의 참전 쪽이 확실해지고 있으며, 소련의 태도 역시 명확하며, 여기에다가 미국의 프랑스에 대한 적극적 원조 역시 프랑스 민중들을 흥분시키고 있다. 드골이 말한 것처럼 "북아프리카와 시리아 및 프랑스의 해군은 프랑스를 위해 지중해에서 바로 응전할 수 있기 때문에 프랑스의 승리는 이미 막강한 보장을 얻은 셈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만일 독일이 다시 프랑스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압력을 행사한다면, 프랑스는 어쩔 수 없이 영미 연합군에 가입하여 다시 한번 항전을 벌일 것이며, 미국 역시 이 전투에 참가하게 될 것이다. 설령 프랑스가 본토에서 설 자리가 없다고 할지라도, 지중해상에서 프랑스의 해군이 가담할 것이며, 북아프리카와 지중해 동부에서 프랑스 육군이 가담할 것이다. 독일에게 큰 역량이 있다면 아마 그의 적군 리스트에 하나의 자유 프랑스의 이름을 용감하게 첨가될 것이다.
보아하니, 최근의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는 주로 프랑스 민중의 투쟁과 유럽 북부의 전세 상황의 발전으로 결정될 것이며, 목전 양국간의 이러한 관계가 장차 어떻게 변해할 것인지, 즉 프랑스의 대독 관계가 다시 굴복할 것인지 아닌지가 결코 히틀러와 페탕이 결정하는 것에 있지 않다.

송호(宋虎) 

왜적은 지금 남태평양 공격에 착수할 것인가?

일본 군벌은 중일 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남진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먼저 남태평양을 점령함으로써 영미의 대중국 원조의 길을 차단하고 중국으로 굴복하게 한 다음, 아울러 남태평양의 자원을 갈취하여 고갈된 경제를 구호한다는 의의가 있다. 그런데 군벌 괴뢰 정부가 동아시아 건립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는 근위 내각을 조성한 지 이미 반 년이 지났다. 소위 일본의 생사가 걸린 남진 정책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으며 감시 결연히 행동하지 못하고, 아직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다.
첫째, 외교상의 실패를 들 수 있다. 근위 내각이 집권한 이후 축심국 연맹에 의연히 참가하였는데, 그 목적은 원래 (1) 독일과 이탈리아의 측면 협공을 빌어 소련과 상호 불가침 협정을 체결하여 자신의 남진의 편리를 도모하고, 아울러 소련으로 하여금 대중국 원조 정책을 포기하게 한다. (2) 독일과 이탈리아의 위세를 빌어,영국과 미국을 위협하며, 영미의 극동 정책을 포기하게 하여 남태평양 공격을 편리하게 한다. 그런데 삼국동맹이 성립한 이후 원래의 미몽은 모두 상반된 결과를 낳았다. 소련 방면에서, 주일 소련 대사 시메이타닌(史梅丹寧)이 일본 정부에 정중하게 "소련의 대중국 정책 불변"을 성명했으며, 영미 방면에서는 태평양상의 연방과 전쟁 준비는 나날이 강화되었다. 전면로(滇緬路)(중국 운남의 곤명과 미얀마를 잇는 길, 역자 주)를 개방하고 아울러 중국과 화해한다는 제스쳐로서 극동 정책에 대한 적극성을 노출시켰다. 동경에서 근위 내각과 송강(宋岡) 외교 장관을 공격하는 전단에 "중국 외교에 쓸데없이 3 년여의 공을 들였다. 근위 내각의 송강(宋岡) 외교는 2년 반 동안 헛되이 시간을 보냈다. 중국의 국제적인 지위는 더욱 안정되었다."라고 쓴 전단이 나돌았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러한 외교적인 고립은 남진 정책에 크나 큰 타격을 줄 수밖에 없었다.
둘째, 유럽의 전쟁을 살펴보면, 독일의 영국 런던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으며, 이탈리아와 그리스 전쟁 이래, 이탈리아의 계속되는 전쟁은 모두 패하여 축심 국가의 위세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프랑스, 네덜란드, 체코 등의 최근 독일에 저항하는 운동이 나날이 가열되어 독일과 이탈리아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이와는 반대로 영미의 합작으로 영국의 지위는 더욱 안정되어 가고 있다. 최근의 상황으로 볼 때, 영국은 해협 및 지중해 쪽에 든든한 후원을 두고 있을 뿐 아니라,대군을 선발하여 인도 및 말레이시아에 증강 파견하고 있다. 이는 왜적의 남진 공격에 대한 따끔한 경고이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근위 내각이 돌연 태도를 바꾼 일, 즉 너무 명확하게도 영미를 위협하고 소련에 아첨하던 태도를 바꾸어 소련과 미국에 아첨하는 태도로 돌변한 일은 이상할 것도 없다. 야촌(野村)을 미국에, 건천(建川)을 소련에 특사로 파견한 것은 소련과 미국의 대일 관계를 개선시키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다만 미국과 소련은 이미 그 간사함을 간파하였다. 마치 주일 미국 대사 거루(格魯)가 동경에서 열린 일미 협회 석상에서 "미국 민중은 결코 외표에 현혹되어 움직이지 않으며, 상대가 주의하는 것을 포착했을 때 사실에 의거하여 행동하지", 결코 남에게 속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뿐이 아니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미국은 또한 400기의 비행기를 중국에 보조하고 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일본 제품의 수입에 50%의 관세를 징수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모두 미국이 일본에 대하여 가일층 압박 제재를 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특히 루스벨트(羅斯) 대통령은 ′노방한화(爐旁閒話)′에서 반 침략 국가들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축심국가들에 대항하겠다는 결심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소련이 극동 전쟁에 대하여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참전할 의사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왜적은 만주와 몽고 부근의 군대를 감히 철수시키지 못할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근위 내각은 비단 외교적 실패 뿐 아니라, 나아갈 길이 없기도 하다. 더욱 일본 자체가 약소 국가로 영국과 미국 소련의 엄중 대처에 대하여 부득불 다른 계산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왜적이 남태평양으로 진공하고자 한다면, 자기 힘만으로는 절대로 이룰 수 없기 때문에,축심의 형뻘인 독일과 이탈리아 두 나라의 대영 전세가 호전되길 기다려야만 한다.바야흐로 흐린 물 속에서 물고기를 잡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데, 그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을까!

안훈(安勳) 

미묘한 독일과 소련 관계

독일의 영국 런던 공격이 뜻을 이루지 못할 즈음, 이탈리아의 그리스 공격 역시 큰 난관에 부딪치고 있었다. 히틀러는 대규모의 육군을 소집하여 유럽의 동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것은 분명히 독일 당국이 축심 형제의 나라 이탈리아가 약세에 있어 무용하고, 영국 런던의 방어가 공고하며, 특히 영국의 우수한 해군의 방위력에 비추어 보아 독일의 기계화 부대가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진공할 수 없으리라는 상황 판단에서였다. 따라서 전략을 바꾸어 발칸 반도 동쪽으로 모든 집중력을 모아, 루마니아로 진공하여 불가리아를 지나, 그리스 및 근동지역으로 공격함으로써 동 지중해에서 영국을 측면에서 공격하려 하였다. 그런데 다른 한편, 발칸 반도로까지 독일의 세력이 팽창하는 것은 근동 지역이 독일의 통제 아래 들어간다는 의미이므로, 소련의 흑해의 안전이 갑자기 위협받게 될 것이며, 또 그 서남 변경이 전부 독일 세력의 포위권내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는 소련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보도에 따르면, 작년 12월 중순 경, 소련은 경고성의 첩문을 독일 정부에 보내어, 독일이 만약 불가리아를 거쳐 그리스나 터어키로 진공한다면 소련은 좌시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또 소련의 외교부 인민 위원회 부 외교 위원장 스루레이프(索洛勒夫) 역시 포왕폴리스(保王鮑利斯)에게 만일 불가리아가 독일에게 길을 내 주어 그리스로 진공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소련은 즉시 흑해 연안의 있는 불가리아의 부르가스 및 바르나 양 항구를 점령할 것이라 경고했다. 또 미국 국제신문이 1월 5일 부다페스트로 송전한 소식에 따르면, 소련과 터어키 양국은 불가리아에 압력을 행사하여 중립을 엄수할 것을 강요함과 아울러, 터어키는 이미 40만 대군을 국경의 서북쪽에 엄중 배치하고 있다. 또 이 신문사의 8일 송전에 따르면, 루마니아의 형세가 매우 심각해지고 있으며, 철위단이 이미 안토네스쿠(Antonescu) 에게 대항할 것을 선언했다고 한다. 독일군은 바로 소련 군대가 루마니아에 대해 돌발 행동을 할 시 대항할 것이라는 결단을 내렸으며, 이에 소련의 국경에서 대치하고 있는 독일과 소련 군대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었다. 이로 보건대 독일과 소련의 관계는 이미 미묘하고 상당히 심각한 단계에 들어섰다. 지금까지의 유럽의 전세로 볼 때, 소련은 이미 승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임이 틀림없다. 독일이 감히 소련의 위세를 건드리는 행동을 할지는 사실을 두고 보아야 하겠다.

이복원(李復源) 

일본과 소련 관계에 대한 전망

근위 내각의 2차 조각 이후, 외교 정책의 주안점은 친 독일, 반 영미, 그리고 독일의 협공을 통해 일, 소간 상호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는 것, 나아가 소위 ′독일․이탈리아, 소련, 일본′ 집단을 형성하는 데에 있었다. 왜냐하면 근위 내각은 하나의 몽상이 있었는데, 정권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반소(反蘇)로 유명한 주소 대사 동향(東鄕)이 물러났다. 방법을 바꾸어 군부 소장파 장군인 건천미차(健川美次)가 연임하였다. 이렇듯 소일이 불가침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날이 고조되고 있고, 더욱이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 동맹이 결성되고 난 후, 이러한 소문은 더욱 무성해졌다. 일본의 신문이 일소협정의 필요성 대하여 고취하고 있었으며, 일본 당국조차도 그러했다. 주친파의 희망과 상상에 의지하여 날조된 소식이 연일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근위 내각은 이 꿈을 실현할 수 있을까? 곧 소일 상호불가침 협정의 체결이 가능할까? 우리는 이 두 나라의 입국 원칙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상호불가침협정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한다. (1) 두 나라의 이해 관계가 서로 같아야 한다. 설혹 장기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단기적으로 쌍방이 모두 같은 필요를 느껴야 한다. (2) 쌍방이 반드시 서로 신임해야 하며, 어떤 일방이라도 절대 중도에 포기해서는 안 되며, 한번 말한 것은 끝까지 지켜야 한다. 일본은 일찍이 반공의 선봉이었으며 반소 집단의 전초기지였다. 그런데 돌연 태도를 바꾸어 친소를 외치고, 이유를 찾고 있으니 가소로움을 금치 못하겠다. 유럽 전쟁이 확산되고 길어짐에 따라 일본에 남진 정책을 실현할 좋은 기회가 주어졌으며, 이 기회를 잡아 실현시킨다면, 그 성공은 보증되어 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접근하여 그들의 도움을 구하고, 또 한편으로는 소련을 끌어들여 소련의 원조, 적어도 소련이 중립을 지키며 일본을 저지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소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려는 아마 가장 주요한 원인이다.
중국의 장기적인 항전이 일본을 진퇴양난의 곤경에 빠뜨렸다. 이 전쟁을 조속히 종결시키려면, 소위 국운을 살펴야 한다. 먼저 영․미․소의 중국 원조를 중지시켜야 한다. 영미의 중국 원조는 일본의 남진 정책의 실현으로 저지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소련의 중국 원조에 대해서는 대소 타협 이외에는 별다른 구체적인 대안이 없다. 이것이 아마 일본이 시급히 소련과 협정을 맺으려는 두 번째 원인일 것이다.
다만 일본의 남진 정책과 중국의 정복이 모두 소련에게 해를 입히지만, 이와는 반대로 오히려, 이번의 중일전쟁과 유럽의 전쟁이 소련이 잃어버렸던 땅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소련의 국책이 타인을 불침범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지만, 그것은 소련의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역시 남에게 침범당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요즘 유럽 전쟁이 폭발한 후 소련이 이미 유럽의 잃었던 땅을 완전히 회수하였는데, 오로지 동아시아에서만 아직 피침략국의 지위에 있다. 짜르 황제에서 끊어졌던 사할린 섬과 어업권이 지금까지 회수되지 않고 있는데, 신흥 소련은 이것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목전의 중국의 항전이 이미 일본을 조석으로 궤멸시키고 있으니, 총명한 스탈린(斯達林)은 결코 자승자박의 착오를 저지를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스탈린(斯達林)은 이미 제국주의의 일본은 사회주의 소련과 기본적으로 투쟁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사회주의 소련의 존재는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며, 소련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은 시시각각 소련을 침략하여 소련을 패망시킬 기회를 노리고 있다. 비록 오늘날의 일본이 이렇게 아첨을 하고 나온다고 하여도, 일본의 관동군 참모부의 기관지 "하얼빈 신문"은 "아랄산(阿拉爾山)과 아라타이산(阿拉泰山)의 동쪽의 땅은 모두 아시아이며,모두 일본 문화를 확장시킨 곳이다. 아시아의 동서부 쭝에서 일본의 영향이 모든 것보다 높으며, 또 일본은 반드시 뻬이쟐(貝加爾) 호수 동쪽의 땅은 일본이 가져와야 한다."고 쓰고 있다. 스탈린(斯達林)은 특히 장구산(張鼓峯)의 소련 인민의 피가 아직 다 마르지도 않았는데, 이번에 일본은 제3조의 규정, 즉 "일본은 공동으로 방공을 실행하기 위하여 몽강(蒙疆)과 화북의 특정구역 내에 군사를 주둔시킨다."는 조약을 위배하고 있으며, 소련은 이에 특별한 대비를 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얼마 오래지 않은 작년 12월 1일 소련의 주일 대사 스메이다닝(史梅丹寧)은 일본 정부를 향해 "소련의 중국 정책은 불변"할 것임을 성명한 바 있다. 이것이 바로 소련의 일본에 대한 진일보한 인식의 표현인 것이다.

이웅(李雄) 

근위내각의 위기

작년 7월 근위 문마(文摩) 내각이 두 번째 조각을 단행했을 때 세계의 시선은 모두 그에게로 쏠렸다. 왜냐하면 그가 제 일차 내각을 조성했을 때 중국 침략을 단행했으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깨뜨렸고, 아울러 ′동아시아 신 질서′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중국을 병탄하고 또 구미 각국의 세력을 아시아 밖으로 축출하여 동아시아를 독차지하려는 야심을 보였다. 뜻밖에 중국 침략 전쟁 발동 이래 곳곳에서 장애를 만나고 그 야심을 실현할 수가 없자 이내 도피하여 하야하였다. 일반 국민들의 비난이 거세어지자, 이 유럽 전쟁이 나날이 거세어지는 때가 바로 기회라고 그는 판단하였다. 다시 한번 야심을 품고 권토중래하여 중일전쟁의 피해를 보상받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가 집권하고부터 지금까지 한 5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송강(宋岡)이 곧 사직한다는 소식이 근위 내각에 전해졌다. 이 소식에 대하여 비록 일본 당국이 부인하기는 하지만, 일본 당국의 내부의 복잡한 알력 관계와 일본에 대한 국제 정세의 악화가 근위 내각의 마지막을 앞당기고 있다는 추측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최근 근위 내각의 불안의 원인을 우리는 내정과 외교 두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먼저 외교적으로 보자면, 근위내각이 성립한 이래 외교적으로 두 가지 주요한 일을 하였다. 하나는 삼국 동맹의 결성이요, 다른 하나는 왕역(汪逆) 괴뢰 정부를 승인한 것이다. 이 두 가지 행동은 의심할 바 없이 일본이 반영․반미․반소의 최전선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두 자기 조약의 성립으로 이하의 3가지 결과가 발생하였다. (1) 타협적 경향을 가지고 있던 영국이 일본에 대해 임전의 태세를 갖게 되었다. 유럽 전쟁이 발발한 이래 영국은 확실히 일본에 대하여 양보적인 입장으로 일관하고 시종 감히 인심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예를 들어 영국 조계지인 천진 내의 항일 열사를 인도한다든지, 천진의 중국의 현물을 빼낸다든지, 특히 전면로(滇緬路)를 폐쇄한다든지 하는 일련의 행동은 모두 영국이 일본에 대하여 모욕적인 타협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음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다만 일본이 독일과 이탈리아의 축심에 참가하고, 삼국 동맹을 체결한 후, 영국은 완전히 태도를 바꾸어 즉시 전면로(滇緬路)를 개방하였으며, 최근 중국에 1천 파운드의 신용 대출을 해주었으며, 아울러 자치 영지와 공동으로 중국을 원조하여 중국으로 하여금 영국의 각지에서 생산되는 군수원료를 구매하게 하고 있다. (2) 미국의 영국과 중국에 대한 원조 정책을 촉진시켰다. 과거 영미 합작의 경우 태평양상의 두 나라의 해군의 연합 방위력은 확실히 미약했었으나, 독․이․일 동맹이 성립된 이후,루즈벨트 대통령은 즉시 그의 세계 전략을 선포하여, 한편으로는 유럽까지 손을 뻗쳐 적극적으로 영국을 지지하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극동으로 손을 뻗쳐 중국을 원조하고 있다. 특히 일본과 왕역(汪逆)의 조약이 성립된 이후, 미국은 더욱이 1억 달러라는 거금을 중국에 차관으로 제공하여 중국에 원조함으로써 일본에 경고를 하고 있다. 이로써 그 극동 정책이 드러나고 있다. (3) 일본과 소련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 근위 내각이 삼국 동맹을 체결한 것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위세를 빌어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삼국동맹 성립 이후 우파 및 반소파는 삼국동맹이 반영․반미이며 소련과 우방이 되는 것으로, 이는 일본에서 공산당의 세력을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우려하였다. 따라서 근위 정책에 대하여 격렬하게 공격하였다. 이런 곤란한 상황 속에서 근위 내각이 이에 日․汪 조약을 체결할 때 부득 방공의 정책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日․汪 조약이 발표되고 나자, 소련은 일본에 대해 절대로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되었다. 따라서 중국에 대한 원조 정책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사를 정중하게 일본 측에 전달하였다. 이러한 국제적인 반응 아래에서, 근위 내각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나날이 증가하였고, 아울러 일반 국민 역시 근위 내각의 정책이 일본의 상황을 나날이 악화시킨다고 판단하여, 빠른 시일 내에 내각이 무너지고 다른 출로를 도모하기를 희망하고 있는 실정이다.
두 번째는 일본 내부 각 당파들 간에 발생하는 마찰과 충돌이다. 이 내부에서 발생하는 충돌의 원인은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1) 근위 내각이 성립할 때 인사 방면에 있어 사전 준비가 미비하였다. 임시적으로 삼류의 인사들로 정족수를 채워 조각하였는데, 이것으로 인하여 근위 내각의 성립 이후 모든 방면에서 불만이 표출되었다.
(2)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 내부에 분열이 발생하였다. 근위 내각이 대정익찬회를 창설하였을 때는 본래 독재 권력을 획득함으로써 일본 정치의 파시스트 정권화의 길을 추진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가 대정익찬회의 간부를 결정할 때, 소위 혁신파에로 편중되지 않고, 각 파 세력에게 골고루 분배하였다. 이로 인해 혁신파와 은건파(隱健派) 간의 암중 투쟁이 나날이 격렬해져, 결국 파시스트 기구의 비준이 어렵게 되었으며, 내부 혼란은 나날이 거세어서 수습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3) 은건파의 재벌이 근위의 경제 통제 정책에 대해 반대한 것을 들 수 있다. 근위 내각이 성립한 후, 고도의 국방 경제 건설을 주창하면서 민영 기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로 인해 재벌의 반감을 샀다. 어떤 이는 근위가 공산화되었다고 공격했으며, 또 어떤 이는 그들이 공산당의 외곽이라고 혹은 ′근위 신 막부′라고 공격하였다. 이러한 갖가지가 모두 근위 내각에 대하여는 치명상이었다.
근위 내각이 이러한 내우외환에 처하여 최근 이하의 몇 가지 대응 전략을 취하였다.외교적으로는 영미관계를 개선해보고자 친미파인 야촌(野村)을 주미대사로 파견하였다. 동시에 ◎택(◎-원전 판독불가-澤)을 네덜란드와 인도 전담 인사로 파견하였다. 근위 내각의 이러한 처치는 현재 상황 유지파에 완전히 부합하는 소극적 외교라 말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혁신파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혁신파의 사수 白鳥敏夫(백조민부), 大島浩(대도호), 中野正剛(중야정강) 등은 최근 근위 내각 외교 정책의 소극적 자세를 크게 공격하였다. 중야는 "삼국 동맹 체결 후, 영미를 적으로 삼지 않으며 대동아공영권의 건립은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니라 능히 실현할 수 있는 일이라고 영미를 구스르기만 하면 안 된다. 오로지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서야만 비로소 실현할 수 있다." 소천중장(小泉中將)은 "만일 미군 함대 한 척이 싱가포르에 주둔한다면 일본은 반드시 미국과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과 일본인」에서는 일본은 영미와 싸워야 하며 연대는 결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것은 혁신파가 근위 내각의 미국에 아첨하는 외교와 남진 정책의 연기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내부 문제에 대하여는, 근위 내각은 우파와 군부 파시스트파와 조화하는 것을 기조로 삼았다. 최근 평소(平沼)와 유천(柳川)에게 각각 내상과 외상을 맡겼으며, 아울러 황목(荒木)에게 부대신을 맞기는 동시에 대정익찬회의 개혁과 은건파의 수용에 대해 은밀히 허락하고 있다. 게다가 재벌의 반대를 잠재우기 위해 「익찬경제체제(翼贊經濟體制)」를 「국사형경제체제(國社型經濟體制)」로 대체하였다.이러한 대책은 모두 우파 군인과 재벌에 대한 양보이지만, 우파와 재벌의 불만은 이로 인하여 결코 감소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혁신파의 불만만 가중되었다. 따라서 이번 근위 내각의 개혁 및 그 시정 방침의 변화는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내각의 붕궤를 앞당겼다.

김광(金光) 

중국 항전의 새로운 단계 및 우리의 당면 임무

중국의 항일, 민족, 자유, 독립 전쟁이 새로운 국제 형세 아래에서 중국은 항전을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을 견지하고 있어 일본은 더욱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쌍방이 상호 대치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이것은 중․일 쌍방의 역량이 상대적으로 차이를 보이는 것에서 나타난다. 중국의 역량은 나날이 강해지는 반면 일본의 힘은 점점 쇠약해지고 있다. 세계가 중국을 원조하는 것이 일본에게 가일층 장애가 되고 있다. 이로써 일본은 점점 중국을 정복할 가능성을 잃어가고 있으며, 중국은 더욱 진일보하게 최후 승리의 단계에 접근하고 있다.
1. 일본의 중국 침략 전쟁은 무한(武漢), 광주(廣洲), 남녕(南寧)을 빼앗을 후, 대규모의 정치적 음모를 진행하면서 정면적인 진행을 잠시 중담하면서 분열․유인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다른 한편, 점령 지역의 공고화를 기도하고 있다. 점령 지역 내의 광대한 인력과 물력, 그리고 재력을 약탈함으로써 장기적인 전쟁 준비를 진행하면서 대규모의 소탕 작전을 거행하였다. 중국을 소탕한다는 일본의 기본 방침은 『치안숙정(治安肅正)』이다. 이른 바 『치안숙정(治安肅正)』은 말끔히 토벌한 후 치안 공작을 더하는 것으로, 두 가지의 분업이 배합된 총칭이다. 바로 일본이 깊은 곳에서는 민심을 장악하지 못했으며, 중국을 멸망시키려는 목적을 절대로 완성할 수 없다는 자각에서, 이로써 반드시 『치안숙정(治安肅正)』으로 이 임무를 완성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방침을 실행함으로써 그들은 점령 지구를 숙청하고, 중국의 멸망에 도달하게 된다. 다음의 3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1) 군사방면으로 말하자면, 말끔한 토벌이다. 토벌의 제일 의미는 거대한 군사적 역량으로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진공하여 우리 군의 작전을 힘써 알아냄으로써 우리의 힘을 소멸하고 모든 항일 용사를 주살하는 데에 있다. (2) 정치방면으로 보자면, "중국으로써 중국을 통제하자"는 정치적 음모를 말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a. 서로를 이간질시키며, 미끼로 유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음모로써 우리들의 단결을 파괴하고 우리의 항전 성곽을 분열시키는 것을 말한다. b. 앞잡이로서의 모리배와 가짜 조직을 심거나 강화시키는 것이다. (3) 경제방면으로 보자면, "전쟁으로써 전쟁을 양성한다"는 경제적 침략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a. 우리의 재정을 파괴하고 법정 화폐 가치를 평가 절하한다. b. 우리의 후방 및 적후의 항일 근거지를 봉쇄하여 물자 공급상 우리에게 제한을 가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살아가지 못하게 한다. c. 우리의 자원과 부를 훼손하고 약탈한다. 다만 일본의 이러한 소탕은 우리의 2년 동안의 격렬한 반소탕 투쟁을 거치면서 하나도 남김없이 분쇄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크게 소모시켜 그들의 병력은 분산될수록 부족하게 되었으며, 전쟁의 수렁에 빠져 다시는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일본 국내의 정치 경제는 전쟁의 압박으로 인하여 극단적인 위기에 처해있다. 전쟁이 지금까지 진행되면서 일본은 중국을 정복할 만한 군사력이 없음을 절감하게 되었으며, 공간․기만․이간 등의 평화적인 공세 역시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에 만부득이 왕역(汪逆)의 조직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으며, 최근에는 또 일․왕 위조약(日汪僞條約)을 체결하였다. 다만, 이것은 실제적으로 무료한 장난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본의 모든 음모를 드러내고 있어, 가일층 중국 인민을 격노시키고, 전 중국 민중의 끝까지 투쟁하자는 결심을 강화시킴으로써 극동에 관련된 열강이 용납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2. 독․이․일 삼국 동맹과 일․왕 위조약(日汪僞條約)의 공포 이후, 전면로(滇緬路)의 개방, 영미의 중국에 대한 대량의 원조, 소련의 중국 원조 정책의 불변이라는 재차 공포가 있었다. 적극적인 중국 원조가 이어지고, 영미의 극동 방어는 나날이 증가하였으며, 미국은 일본으로 들어가는 운송과 철도를 봉쇄하였으며, 영국과 그리스는 이탈리아와 싸워 승리하였으며, 히틀러는 영국으로 진공할 수 없어서 이탈리아군이 궤멸하는 것을 좌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새로운 국제적인 사실이 국제적인 새로운 상황을 조성하였으며, 독․이․일로 이루어진 침략 전선이 이러한 사실들로 인하여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 특히 이탈리아와 일본은 이러한 사실들로 인하여 자신들의 약점이 모조리 노출되었다. 한편 반파시스트 침략 전선, 특히 중국 및 그리스의 항전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일본과 이탈리아는 나날이 고립되는 곤란에 빠져 들어가고 있으며 곳곳에서 타격을 입어, 가히 ′야단이 난′ 상태라 말할 수 있다. 제2차 제국주의 전쟁이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였고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은 모두 전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 이러한 국제 형세 속에서 중국이 끝까지 항전을 불사하는 것은 일본으로 하여금 더욱더 곤란한 지경으로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중국 항전은 기본적으로 상호 대치 국면에 들어섰다 말할 수 있다. 즉 일본의대규모의 전략적인 진공은 정지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3. 다만 중국과 일본 양국의 역량에 아직 근본적인 변화는 없어서,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한 것은 여전히 사실이다. 이른바 기본적으로 상호 대치 국면에 들어섰다는 말은 새로운 국제 형세에 대응하느라 적은 이미 대규모의 전략적인 진공을 펼칠 여력이 없으며, 우리는 대규모의 전략상의 퇴각을 끝냈다는 말이다. 그런데 적군은 소규모의 진공으로 일부분의 지방을 점령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한 일이다. 우리 후방의 곳곳에 적군은 여전히 진공하려 하며 점령될 위험이 여전히 존재한다.
몇 년 동안의 피비린내 나는 단련은 땅이 크고 사람이 많으며 큰 후방이 있어 진실로 적과 상호 대치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동시에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역시 적과 대치할 수 있다. 주요한 조건은 전선이 공고한가, 각 방면이 질적으로 우수한가에 있다. 과거의 경험에 의거하자면 정치적 자질이 우수하고, 단결이 공고하다면,어떤 강한 적군이 봉쇄하고 침략하더라도 능히 오랫동안 대치할 수 있다.
현재 우리의 주요 임무는 다음과 같다.
1. 끝까지 항전하자는 국책을 관철시킨다. 최후 승리를 얻는다는 목적은 결국 변하지 않는다. 전국적인 단결을 공고히 하고 곳곳에서 속도를 내어 앞으로 나가고 반공을 준비한다. 이는 항전이 기본적으로 상호 대치 국면에 접어든 이후 반공(反攻)이라는 구체적인 작업을 준비하는 것이다.
2. 새로운 역량을 심는다. 정치 기구 및 정치 시설들을 강화시키고 국방 건설을 추진하며 군대의 질적 수준을 높이며 문화 정책을 시행하는 것 등은 모두 반공에 필수적인 것이다. 일본을 나라 밖으로 쫓아내어 최후 승리의 힘의 원천을 얻도록 힘쓰자.
3. 적군의 정면적인 진공을 정지시키고, 적의 후방에 유격 근거지를 건립하여, 적후 활동을 하는 유격대를 힘을 다해 돕는다.
4. 반 앞잡이와 반 왕역(汪逆) 운동을 광범위하고 깊게 일으킨다. 그리하여 그 음모와 기만을 철저하게 밝힌다.
5. 국제적 원조를 받아 그 모든 것을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것에 쏟아 붓는다.무릇 우리에게 원조하고 일본을 제재하는 국가와 민족이라면, 그들과 손을 맞잡아야 한다. 일본 제국주의는 중국의 적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중국과 조선, 그리고 대만 및 일본 인민의 공동의 적이기도 하다. 그를 무너뜨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우리가 광범위하게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중국 항전의 과정 중 상호 대치의 국면에서의 임무는, 현재 적의 진공을 격파하며,우리의 반공(反攻)을 강화하여 일본을 중국 밖으로 몰아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 단계는 전쟁의 관건이다. 그것이 일단 나타났을 때, 반드시 모든 힘을 반공(反攻)에 필요한 모든 조건에 집중시켜야만 비로소 이 반공의 단계를 넘어설 수 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새로운 역량이 자라남이 적의 쇠약함과 국제의 원조와 맞물리고 있다. 적을 나라 밖으로 쫓아내어, 중국 민족이 자유와 독립을 얻게 되는 성패가 전략적 방어단계에서의 토지 상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대치 국면에서의 노력 분투에서 결정이 된다. 방어 단계에서 얻어낸 각종 진보는 상호 대치 국면에서 계속적으로 역공의 기초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현재가 바로 중국 항전 승리 단계이며 중화 민족 및 조선, 대만 모든 피압박 민족의 생사가 달린 때이다. 우리는 반드시 일본 제국주의를 이겨서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쟁취해야 하며, 그렇다면 반드시 상술한 현재의 임무를 완수해야 할 것이다.

위명(衛明) 

3년래 일본 전시 경제 개관

1. 서론
2. 전시 생산력 검토
3. 광대한 군비
4. 막중한 조세
5. 소모되는 공채
6. 통화 팽창의 고뇌
7. 기아선상의 일본 국민 생활
8. 결론

소붕(笑鵬) 

1. 서론

무릇 자본주의의 발전의 과정과 일본 제국주의의 형성 및 그 발전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일본 제국주의의 발전에 관해서는 점진적인 발전이라기보다는 순간적인 폭발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가 몇 차례의 침략 전쟁을 거쳐 요행히 얻은 승리로 인해 건설되었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그 발전의 역사 과정은 다른 제국주의에 비하여 더욱 도약적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일본 제국주의가 구미 제국주의의 나라와 같지 않고, 더욱 자본주의 발전의 정상적인 길을 걷지 않았으며 반봉건적인 사회적 기초 위에 군사 침략의 수확으로 인하여 건립된 군국적인 자본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 제국주의는 형식적으로는 비록 그 힘이 막대하나, 다만 내용적으로는 어떤 다른 제국주의 나라보다도 더욱 심각한 모순성과 취약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의 특징은 자본주의라는 기구 위에 반봉건적인 그리고 군국적인 성질을 포함하는 데에 있으며, 아울러 자원이 빈약하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곧 일본 제국주의가 그 자신의 모순 아래에서 어쩔 수 없이 빠르게 붕괴될 것을 말해준다. 마치 전전 러시아 제국주의 짜르 황제 제도와 마찬 가지로 제국주의 전쟁은 그것의 내부 모순을 격화시켜 결국 멸망에 이르게 할 것이다.
만일 과거의 중일, 러일 전쟁이 전쟁의 시간이 매우 짧음, 즉 1년 혹은 1년 반의 간 만에 바로 완결된 것으로 인하여 그것의 경제적 기초상의 근본적인 약점을 폭로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상황이 달라졌다. 1918년 사변으로부터, 특히 ′7․7 사변′으로 중국이 전면적으로 항전한 이래 이 3년여 동안의 장기적인 전쟁으로, 일본의 국민 경제와 전시 생산은 불가피하게 전반적인 몰락의 과정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다. 우리는 그 전시 경제와 전시 생산 및 국민 생활의 상황으로부터 일본 제국주의가 어떻게 해도 빠져나올 수 없는 비참한 운명에 처해 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현대의 전쟁은 국가의 경제적 역량에 달려 있다. 즉 전쟁의 승패는 사회 경제 기구의 안정성과 생산력의 강약으로 결정된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구 러시아는 전쟁으로 인하여 그의 사회적 모순을 가일층 격화시켜, 결국 국내 대혁명을 촉발시켰다. 독일 제국주의 역시 경제적 고갈로 인하여 이에 군사적 굴복을 하게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 경제 상황 및 그 운명이 장차 어떻게 될 지를 연구하기 위해서, 그의 전시 경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2. 일본 전시 생산력 검토

현재 일본의 전시 경제는 있는 힘을 다하여 침략 전쟁의 목적 달성을 위해 집중 동원하는 것을 종지로 삼고 있다. 이것은 그 국가 동원법상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 기구는 논외로 하더라도, 그 실질에 대하여는 물가 인하, 생산력 확충과 물◎-원본 판독 불가- 계획을 3개 기본 정책으로 하여 운용하고 있다.
이 3개 기본 조건 중, 생산력 확충 계획은 실제적으로 침략 전쟁의 기본 골간으로 침략 전쟁이 필요로 하는 군수 공업 생산력을 확충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한다. 다른 두 가지 조건은 단지 군수 공업 생산력 확충 계획의 예속 조건일 뿐이다. 다만 이 3개 기본 조건은 또한 일본 제국주의의 전시 경제에서 필수 불가결한 기본 요소로써, 반드시 상호 균등하게 발전시켜야 하며, 국민 경제와 전시 생산력이 장기적인 전쟁의 가능성에 대비하여 진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본 전시 경제의 이 균형은 이미 오래전에 깨어졌다. 작년 말부터 물가의 폭등과 물자의 부족이 전 일본을 휩쓸었다. 특히 이 물자의 부족은 일본 제국주의 자원 결핍의 필연적인 귀결로써, 침략 전쟁을 진행하는 중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의회에서는 일찍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103억 엔이라는 거액의 경비를 써서 이 물자의 부족을 보충하였다.
그러나 일본 산업의 생산지수는 여전히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일본 공업 생산 지수(일본 상공성 발표, 1932,3,4년의 평균을 100으로 삼는다.)
총지수제조 공업광업
1936년 평균150.2151.9138.0
1937년 평균169.8172.4150.6
1938년 평균172.0173.6160.1
1939년 1월170.5171.7162.1
1939년 2월172.5175.1154.1
1939년 3월189.3191.3175.1
1939년 4월184.8187.5165.2
1939년 5월186.7189.2168.6
1939년 6월176.8182.0164.7
1939년 7월181.8184.8160.2
1939년 8월182.9187.7148.0
1939년 9월171.1173.2155.6
1939년 10월178.0179.6167.0
1939년 11월180.6181.7171.0
위 도표에 의지하면, 일본의 중공업(대부분은 군수공업)은 사변 이후로 전쟁의 확대에 따라 급격하게 발전하였다. 전쟁 발발로부터 20개월 동안 1939년 3월의 최고봉을 이루었으며, 이후로 점진적으로 위축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다른 축심국 독일과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자원의 부족이라는 병 때문이며,침략광이 된 원인 중 하나이다. 다만 전쟁이 계속되고 전쟁비용이 막대함으로 인해,비록 군수 중공업이 적지 않은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고 하지만, 군수 원료 역시 전쟁의 확대 연장으로 인해 고갈되고 있으며, 따라서 이 침략 전쟁의 과정은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가 자기의 무덤을 파는 과정이기도 하다. 전쟁이 끝나면, 스스로도 멸망한다.
이제 일본의 경공업 생산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면사생사양모사면직물견직물인조견사유안양지
1937.6145.065.0133.0135.9111.4497.6210.1168.8
1938.6108.058.4108.494.884.5262.4220.7140.8
1939.1194.594.1103.978.195.2234.7205.9160.9
표에서 나타나듯이, 일본의 경공업 생산은 확실히 전전과 비교하여 증대되었다. 그런데 그 생산의 증대는 순 소비인 군수품 생산의 증대이며, 오히려 국민 생활 물품의 생산은 대대적으로 감소했다. 특히 섬유공업품의 생산의 감소는 극심하다. 일본 제국주의가 국내에서 국민의 면제품 구매를 제한하고 통제 분배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얼마나 참혹하게 국민의 최후의 한 방울 피와 땀까지 착취하여 침략전쟁에 필요한 비행기와 대포를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일본 공업의 생산력을 살펴보건대, 1939년 하반기부터 이미 하락되었다. 「동양경제신보(東洋經濟新報)」는 1934년 2월에 비해 1939년 8월 소비품의 생산 지수가 40% 하락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 제국주의는 침략 전쟁을 지속하기 위하여, 여전히 군수공업의 생산을 강화시키고 있으며 작년 봄 일본의 기획원은 아래와 같은 물자 증산 계획을 발표했다.
무수주정중유(인조)중유(천연)인조석유휘발유주석아연망간강괴특수강보통강
13배강약9배약30%약30%약3배강약2배약70%약9%약10배약60%2배약60%
양모자동차차량공작기계유안공업염가성소다소다안티몬석탄주석
3-4배강5강약50%2.6배2배강약40%6배반40%20%수배30%강1배반
이 계획은 금년 말 바로 완성되었다. 게다가 부대 성명에 따르면 "일본, 만주, 중국의 물자를 함께 계산했으며, 1941년까지 자급자족할 수 있는 물자에는 강철, 석탄, 경금속, 아연, 조달, 소안, 제지원료, 철도차량, 선박과 기차 등이 있다. 그러나 결국 물자의 부족으로 이러한 계획은 또한 부득이 근본부터 개정되어야 한다."고 발표하였다. 이것은 또한 금년 초의 사정이다.
군사 공업에서 가장 중요한 원료는 동, 강, 철, 석유 등의 물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일본에서는 구하기 힘든 것이다.
석유에 대하여 말자하면, 그 소모량은 평시 매년 350만 톤이며, 중국과의 전쟁이 발발한 이래 이미 석유의 수요는 450톤으로 증가되었다. 그런데 본국의 생산량은 겨우 33만 톤에 그치며, 제련, 석회 액체화 등 방법을 통해 얼마간 증가시킨다(10만 여 톤). 따라서 매년 본국의 산유 총액은 전시 소비량의 5-10%만 제공할 뿐이다.일본의 석유상 및 육해군이 비록 많은 양을 매점한다고 해도, 최대한 반년의 수입액과 비슷할 뿐이며 6개월에서 8개월밖에 쓸 수 없다.
다시 동, 강, 철을 말하자면, 역시 모두 매우 부족하다. 대부분 국외에서 들여온다.중국 전쟁의 첫 번째 해에 일본이 외국으로부터 구입한 동은 3만 엔에 달하며, 동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고 있다. 일본의 철 구입은, 대부분 모두 알고 있는 바이다. 1937년 미국으로부터 구입한 무쇠는 190만 톤이며, 이는 제강 용량의 1/3과 같은 양이다. 다만 여전히 계속적으로 구매해야 한다. 1936년 구매한 강제품은 54만 톤이며, 1937년 90만 톤까지 증가하였고, 1938년 6월 전에 이미 65만 톤의 무쇠를 구매하였고 강의 구매량 역시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중요 자원의 결핍과 국외에 대한 의존성은 일본 자본주의의 약점이며, 장기적인 전쟁 속에서 치명상이 되었다. 동시에 또 기타 군수와 관련된 물자를 자급할 수 있는가가 역시 직접적으로 전투력에 영향을 준다. 따라서 우리는 또한 일본 군수원료의 자극 정도를 이해해야 한다. 이에 중일 전쟁 1년 전의 일본의 각종 중요 군수품 원료의 자급률을 보자면,
철사23%선철70%동59%
알루미늄30%목화20%납8%
석29%아연29%석유8%
양모5%
고무와 같은 것은 일본은 절대로 생산할 수 없으며, 안티몬과 마그네슘도 역시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동과 아연 등은 일본의 생산량이 아직 평소 수요량의 반에도 못 미친다. 군수 공업 원료 중 비교적 자급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가스와 황화철과 유황뿐이다.
일본 당국은 원료의 부족에 대처하기 위하여 소극적으로는 무역 통일제와 소비통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는 원료 생산의 확충과 만주, 화북의 원료의 약탈 및 대체용품을 개발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모순과 약점은 메울 수 없으며, 최근 전시의 경제 통제에서 극복할 수 없는 곤란과 장애에 맞부딪쳤다. 예를 들어 가스, 전력, 쌀, 목탄 등 공업 필수품과 인민 생활의 필수품이 매우 부족함으로 인하여 생산 정지에 이르고, 또 물자의 매점 및 독점과 암거래와 투기 등이 횡행하는 까닭에 시장 상황은 더욱 급박해졌다. 또 통화 팽창과 물가 공정제에 허점이 드러나 국민 경제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이러한 것이 모두 일본 전시 경제 파산의 구체적인 상황들이다.

3. 방대한 군비의 지출 

전문가의 예측에 따르면, 일본의 대 중국 작전은 매월 전쟁 비용으로 4억 100만 엔이나 필요로 한다고 한다. 이는 이미 제1기 항전 단계에서의 모든 비용을 넘어선 것으로, 일본이 소모하고 있는 자금은 전체 자금의 1/16에 달한다(일본의 전체 자금력은 300만 정도이다).
최근의 중일 전쟁과 러일전쟁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아래와 같다.
소모총액매일 소모액
러일전쟁(1905년 총 19개월)23억 엔360만 엔
현 중일전쟁(1937년7월-12월까지)(러일 전쟁의 4배)26억 엔1500만 엔
일본의 이번 중국침략 전쟁 비용의 방대함은 과거 대외전쟁비용과 비교해보면, 천양지차가 날 뿐만 아니라, 처음 전쟁을 시작한 달 소모한 비용이 이미 1904년-1905년 러일전쟁의 전체 소모총액을 넘어섰다(26억 엔).
제국주의는 그 자신의 몰락을 구제하기 위해서 결사적으로 군비(軍費)를 증가시켜 인류 도살 및 식민지 약탈을 준비하고 있다. 이것은 20세기 제국주의 국가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9.18′ 이후, 일본의 군비는 점점 팽창했고, 국가 전체 경비에서 놀라운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연도지출군비군비 점유율
1935-36년2,266,0001,022,00044%
1936-37년2,368,0001,884,00046%
1937-38년5,510,4323,942,10271%
1938-39년8,865,0006,225,61475%
1939-40년9,574,0006,582,15167%
1940-41년10,282,0006,767,00066%
′9.18′이전, 일본의 재정 당국은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국가 전체 지출은 불과 1,476,875,000엔이며, 그 중 군사비는 454,616,000엔으로 총수의 30%에 그쳤다. 그러나 9.18이후, 적극적인 군비 확충과 침략 전쟁으로 인하여, 군비 지출은 점점 증대되었다. 7.7사변이 폭발했을 때 군비는 일약 국가 총 지출의 71%에 달했다.
7.7 사변 이래, 끊임없이 팽창해 온 일본의 재정은 지금까지 여전히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첫 번째 해, 즉 1937년 7월 23일 일본 정부는 보충 예산 2건을 제출하였다. 즉 소위 ′북 중국 사변비(北支事變費)′의 총액은 526,600,000엔(그중 둘째 해 예산은 10,200,000엔이며, 제1기에는 급박히 예산을 96,800,000엔을 증가시켰으며, 제2차에는 19,600,000엔의 예산을 추가하였다.) 동년 9월 의회는 72차 회의를 열어, 비상시기 군비 특별 회계를 설립하여 다음해 1월 말까지 군비로 2,023,100,000엔(중국 사변 임시 군사비를 가리킴)을 지출할 것을 통과시켰다. 1938년 중국의 장기 항전으로 인하여 재정이 또다시 급격하게 팽창하였다. 1938년의 군비는 전체 지출의 75%를 점했다. 중국이 지구전을 지속하고, 전쟁의 범위가 계속적으로 확대되는 상황에서, 일본의 전체 군사비 예산이 내년 3월 말에 이르러서는 아마 2백30억여 원이 될 것이라 추산된다. 즉 7천만 일본인은 평균 각각 전쟁비용으로 2백30원을 부담해야 한다. 이러한 방대한 예산을 지불하는 것은 일본 정부의 유일한 어려움이다.

4. 막중한 조세 

일본 제국주의는 이러한 방대한 전비에 대처하기 위해 공채를 발행하는 외에 오로지 조세를 증가시키는 방법 밖에 없다. 조세를 증가시키는 방법은 정부의 재정 수입을 직접적으로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재정 정책의 추진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도움을 준다. (1) 전시에 증세를 하면, 공채 이자 및 공채 소화(公債消化)의 보조 작용이라는 보장을 받는다. 예를 들어 1억을 증세를 했다면 27억원의 삼분 반식 공채를 발행할 수 있다. 따라서 명년도의 전비 부담은 2억원의 증세로써 공채소화의 보조 작용의 이익을 볼 수 있다. (2) 전시 증세는 전쟁으로 생겨난 소득 분배의 불공정과 파행상태를 조정하는 작용이 있다. (3) 재계의 팽창을 억제하는 작용이 있다. 왜냐하면 증세는 국민들의 구매력을 흡수함으로써 국민의 물질적 수요의 증가를 방지하는 동시에 물가의 폭등을 억제시킬 수 있다.
1937년부터 지금까지 일본에서 신설된 조세에는 임시조세징발법(臨時租稅徵發法), 북지사건특별세(北支事件特別稅), 지나사변특별세(支那事變特別稅)가 있다. 1937년 4월 임내각 시대에, 그때 7․7 사변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 ′임시조세증징법(臨時租稅增徵法)′을 반포하여, 증징조세는 9종, 실세는 4종이 되었다. 대체적으로 과세의 대상은 비교적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그중, 소득세는 63,000,000엔, 주세는 18,000,000엔, 기름세는 15,000,000엔, 사탕소비세는 7,000,000엔 정도였다. 7․7 사변이 발생했을 때 재정의 결함을 벌충하기 위하여 ′화북사건특별세(華北事件特別稅)′를 징수하기 시작하였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소득세의 세율은 약 40,000,000여 엔 올랐다. 임시이득세의 세율은 10,000,000여 원정도 올랐다. 이익분배특별세(즉 홍리특별세)는 38,000,000여 엔이 올랐다. 공채 및 회사 공채이익특별세는 약 200여 엔이 있었다. 특별물품판매세는 1천여 만 엔이 올라, 총합 1억 1천만 엔에 이르렀다. 이렇게 1억 엔의 증세 수입은 그러나 불과 화북사변비의 1/25정도만 충당할 수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명년 제73회 의회는 또 한 번 총액 318,300,000엔에 달하는 ′중국사변특별세′를 통과시켰다(이 중 전년 9월에 만들어진 화북사건특별세 수입 1억 1천 엔이 포함되어 있는 고로 실제 세액은 거의 2억 엔 가까이 된다. 그리고 시행 기간은 전쟁 종결 후 1년으로 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당시 이득세를 다시 한 번 세율을 올려 120,000,000엔을 얻기로 되어 있었으며, 임시이득세를 누진세로 바꾸어 3천 300만 엔을 거둘 수 있었다. 이익분배특별 역시 40,000,000엔을 더 걷을 수 있으며, 공채및회사이자특별세는 30만 엔, 법인자본세 세율 역시 증가시켜 4,000,000엔을 더 거두며, 사탕소비세도 세율을 증가시켜 10,000,000엔이 걷히고, 교역소세도 세율을 증가시켜 10,000,000엔을 거두며, 신창입장세는 10,000,000엔, 물품특별세는 징수 범위를 확충하여 62,020,000엔을 얻게 되었다. 이외에도 광업세를 높이고, 특별사광구세를 신설하며, 주세를 다시 한 번 높여서, 합계가 318,200,000엔이 되었다. 이번 증세의 1/3이 소비세이며, 이는 족히 일반 인민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었다.
1937-40년간, 국가 세금의 세입은 2,368,247,000엔에서 8,895,342,000엔까지 증가되었다. 즉 세율이 37.6% 정도 증가되었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네 다섯 차례 증세되었지만, 아마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증세될 전망이다. 또 앵내장상(櫻內藏相)이 올해 2월 1일 중원(衆院)에서의 연설에서 "수입 방면에서 올해(1939-40) 1,084,000,000엔을 증가시킬 것이다. 주요한 원인은 세수의 증가와 세제 개혁의 결과로 527,000,000엔이 증가되었으며, 세수는 자연스레 374,000,000엔이 증가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막중한 조세로 인하여 7천만 일본인이 일인당 60엔의 조세를 감당해야 한다.그러나 이렇게 거액의 조세는 방대한 군비지출과 비교해 보자면, 6개월 정도의 군비 지출에도 못 미친다. 동시에 자원의 결핍과 물가의 폭등, 그리고 국민 생활의 빈곤으로 인하여 산업의 생산 과정은 확대될 수 없으며, 국민의 구매 능력은 증가되지 못한 상태에서 증세의 앞날은 오직 죽음의 길일 뿐이다. 따라서 비록 지대한 노력으로 조세를 추가 징수한다 하여도, 미치광이같은 침략 전쟁에 대하여는 조금의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주요한 공채의 발행 외에도 국외에서 차관을 들여와 군공업을 확충해야만 한다.

5. 소화되지 않는 공채 

국채는 근대 국가의 재정적 기초이며, 국가의 발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3대 열강 중 하나인 일본 역시 이러한 경향이 당연히 두드러진다. 세입 중 조세와 공채가 점하는 비율을 따지면, 전자는 나날이 감소되는 반면 후자는 계속 증가되고 있다. 왜냐하면 증세는 현실 자본을 징수하는 것으로 대중이 즉각 고통을 느끼는 반면, 공채는 원칙적으로 수면자본과 유한 자본을 징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바이커프스(魯白可夫氏)의 연구에 의하면, 세계 대전 당시 각국의 조세와 공채의 비율은, 평균조세는 7,4%, 국내 공채는 78.7% 외채는 12.9%를 차지하고 있으며, 조세와 공채는 각각 7.4%와 92.6%의 비율로 나타난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전시 재정의 연원은 공채 및 지폐의 발행이 절대적으로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일본 발행의 국채 액수를 조세 부분과 비교해 볼 때 얼마나 거대한지 아래의 표를 보면 알 수 있다.
4년내 일본 정부의 세입(단위 천원)
1936-37년1937-38년1938-39년1939-40년
지조(地租)58,69058,45650,36046,234
액체조(液體租)187,988199,054244,817261,505
설탕류세86,78295,220136,645167,360
방직세42,55838,94035,19248,222
해관 및 전운세177,077187,837178,834177,664
인화세68,82393,248100,05390,773
조세합계646,100(100)672,300(104)725,904(112)688,714(106)
소득세 및 상업세504,085(100)927,571(104)1,180,498(166)1,898,383(207)
독점사업세215,167(100)257,587(139)254,050(118)241,010(207)
기타정부기업188,488(100)200,298(120)212,096(112)228,124(321)
차관609,622(100)3,076,126(106)5,461,522(899)5,651,803(907)
잡항201,785(100)334,546(505)234,009(117)887,298(192)
세입총액368,247(100)5,468,928(196)8,099,139(341)8,895,352(376)
1926년 일본의 내국채는 3,718,000,000엔을 밑돌았으며, 외채는 1,461,000엔에 불과했다. 두 개의 공채는 4,720,000엔까지 증가했으며, 외채는 1,473,000,000으로 증가하여, 총 수량은 6,412,000,000엔이었다. 7․7 사변 이전 내국채의 부담이 이미 9,265,000,000엔으로까지 비등하였고, 외채는 1,316,000,000으로 합계 11,018,000,000,000엔에 달했다. 작고한 장상고교(藏相高橋)가 정리한 ′백억 공채 망국론′에 의거하자면, 이미 망국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다. 그런데 7․7 사변이 발생한 이후 더욱 공채에 의지하게 되었다. 소위 ′중국 사변에 대한 임시 군사비(對支事變臨時軍事費)′ 예산의 제1차 추가 예산 중, 모집한 공채는 2,022,700,000엔이다. 1938년 임시 군비 중 모집한 공채는 6,682,100,000엔을 넘어선다. 그런데 이미 발행된 오리 공채, 사리 공채, 삼반 공채 및 삼리 반 국고 채권은 모두 4,063,014,250엔이다(11월까지 발행된 전채는 3,800,500,000엔이다). 1939년도의 일반 회계 예산 중 발행될 공채는 1,737,000,000엔이며, 특별회계항 아래에서 발행될 공채는 273,000,000엔이며, 임시군비 아래에서 발행될 공채는 3,924,000,000엔으로, 발행될 공채의 합계는 5,925,000,000이며, 게다가 7․7사변부터 작년 11월까지의 발행액은 6,638,100,000,000엔이다. 더욱이 1940-41년간의 예산 중 특별군사비 아래에서 모집한 공채가 3,673,000,000엔으로 양자를 합하면 5,544,500,000엔이다. 이 숫자는 역대 발행된 외채의 누적이 29,172,100,000인 것과 비교해보면, 이미 ′망국의 숫자′를 3배나 넘어서고 있다.
이렇게 거대한 공채의 소화를 바라기는 어렵다. 일본의 내국채의 소화 능력에 대한 추측은 사람마다 다르다. 고교(高橋)는 기껏해야 1백억 엔을 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고, 야전풍◎(野田豐◎)은 45억을 소화하기는 문제도 안 된다고 예측한다. 우리는 일본 정부가 1937년 모집한 공채가 겨우 921,000,000엔에 불과하며, 관방 보도에 따르면, 1938년 1월부터 10까지 정부가 방행한 공채는 312억 3천만 엔에 달하고, 소화액수는 284억 6천 엔으로 전체의 77%에 달한다고 말한다. 1938년 발행할 액수는 65억 엔으로, 매월 평균액수가 5억 5천여만 엔에 달한다. 다만 올해 6월까지 줄곧 실제 발행수는 겨우 반수에 조금 못 미치며, 소화액수는 1/3인에 그친다. 1938년도에 또 2,032,271,000원의 발행할 수 없는 채권이 아직 남아으며, 1939년 예비적으로 발행해야 할 공채는 6십억을 넘어선다. 다만 3년 전부터 올해 2월까지 대장성(大藏省)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1939년내, 의회가 수권발행한 공채 중 3,078,000,000엔이 아직 발행되지 않았는데, 이로써 우리는 전야풍(田野豐)의 예산이 기만적임을 알 수 있다.
본래 일본처럼 반봉건적인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모든 경제 조직 혹은 금융 기구는 구미의 각 나라처럼 엄밀하거나 완정하지 않다. 동시 군벌의 폭정 아래에서 국민 경제역량은 이미 고갈되었으며 작년 12월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 공채 분배의 비례는 은행 및 금융기관이 약 53%를 점하며, 정부기관이 약 28%, 민중이 겨우 17%, 기타 2%를 점하며, 일본의 부채 총액은 이미 300억 엔에 달하고 있으며, 국민 연 소득은 불과 1백80억 엔으로, 부담액수는 이미 그 부담능력의 160%를 초과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공채 정책을 구제재정의 중심에 놓고 있지만, 이 재정 정책은 시종 해소할 수 없는 모순, 즉 생산력 확충과 공채 소화의 모순, 또 평화적 생산력의 희생과 물질 총동원계획의 모순이 늘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은 또한 일본 공채 정책 실행의 장애이기도 하나다. 이 장애의 해소는 오직 일본 제국주의가 침략 전쟁을 끝내고, 일본 군벌이 단두대에 그 목을 내놓은 이후에야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6. 통화 팽창의 고뇌 

일본 제국주의는 이와 같은 방대한 전비의 지출을 관리하기 위해 혹독한 조세를 부과하고 공채를 증발하는 이외에도 헌금운동, 국민저축운동을 벌여,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다만 전세의 발전과 전비의 팽창에 따라 부득불 현금으로 바꿀 수 없는 지폐를 발행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은행의 지폐 발행액은 원래 10억에서 12억 엔 사이에 있었다. 7․7사변 후, 점차 증가하여 1938년 2개월 간 이미 16-18억 엔을 넘어섰다. 6월 말에 20,820,000,000엔을 증가시켰으며(기타 총수는 2,251,000,000엔임), 12월 말에는 2,805,980,000엔을 또 증가시켰다(총수는 3,024,000,000엔). 이로써 일본은행의 보증준비발행액은 10억 엔에서 22억 엔으로 증가하였으며, 조선 대만 은행의 보증 준비액은 5천만 원에서 8천만 원으로 증가하였다. 1939년 6월까지 일본 은행의 은행권 발행 총액은 2,522,000,000엔으로, 만일 화폐 총액에 대하여 말하자면, 2,920,000,000엔이었다. 1939년 2월에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일본 은행 지폐 발행액을 5억 엔에서 27억 엔으로 증가시키는 동시에 일본 은행은 장상(藏相)의 동의 하에서 발행 액수를 법정 한계를 넘기는 것에 대하여는 그 증발의 수량에 따라 정부에 3%의 특별세를 납부해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통화는 계속적으로 팽창하였고, 작년에는 일본 전국의 화폐 유실액이 이미 3,817,752,000,000엔에 달하였다. 통화의 급격한 팽창은 실로 이본 재정 붕괴의 전주곡이다. 더욱이 일본 은행의 은행권의 신축성을 살펴보면,
평균수축액수축율팽창액팽창율
1938년 1-6월335,000,000엔16%281,000,000엔16%
1939년 1-6월227,000,000엔9.9%463,000,000엔22.5%
이로써 수축율이 점점 축소되고 팽창육은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다시 물가지수를 살펴보면,
(1936년을 100으로 함)도매 물가 지수소매 물가 지수
1937년123110
1938년135120
1939년(5월)145316(4월)
물가 지수의 이러한 급증은 역시 통화의 팽창을 나타내고 있다.
3년 간의 중국 침략 전쟁으로 일본 정부는 200여 억 엔의 경비를 지출하였으며 매월 발행한 공채는 5억 만 엔에 달한다. 이는 일본 은행이 지폐의 발행을 계속적으로 증가시켰으며, 그리고 점점 악성 통화 팽창이라는 비극적인 길을 걷게 하였다. 악성 통화 팽창이라는 난국은 처음에는 금융의 완만, 이후에는 금융 경색, 저축액 급락이 이어지며, 최후에는 지폐의 무한한 남발과 가치 하락, 결국에는 국민 경제의 전체적인 파산을 맞게 된다. ′최근 일본의 악성 통화 팽창은 이미 금융 완만에서 금융 경색의 단계에 들어섰다. 현재 일본 금융계의 형세는 이본 은행의 대출 급증, 일반 은행의 예금 감소, 공채 소화의 성적의 의외의 불량, 발행 공채 채권의 곤란 등의 문제를 겪고 있다. 이에 따라 근위 내각은 얼마 전부터 본년도 특별사예산 외의 기타 지출의 6%인 약 3억 8천만 엔을 삭감함으로써 금융을 완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방대한 지출 예산의 연원을 이후로도 여전히 공채의 발행과 지폐의 증가에 의존할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악성 통화의 팽창이 금융 경색에서 국민 경제의 총 파산으로 걸어갈 가능성이 많음을 보여준다.

7. 기아선상의 일본 국민 생활 

3년 동안의 중국 침략 전쟁은 이미 모든 일본 경제를 나날이 곤궁하게 만들었으며 정치 형세 역시 나날이 악화되게 만들었다. 본래 일본 인민의 생활은 평소에도 ′큰 어려움′을 느꼈으며, 노동계급의 생활은 더욱 힘들었다. 수년 동안, 또 다시 전쟁이 늘어지고 상업이 곤란해지고 일용품 가격이 급등함으로 인하여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특히 양식 공황은 시종 해결할 수가 없었다. 일본, 조선, 대만 등 곳곳에서 쌀 흉년이 들었다. 쌀 흉년이 원인은 결코 흉작 때문이 아니다. 주요한 원인은 침략 전쟁의 발발 이후 농민이 군대에 끌려 가서 농촌 생산력이 감소하였으며,동시에 주양식이 중국에 주둔하고 있는 수 십만 대군에게 공급되어 국내의 이와 같은 곤란이 닥쳤다. 설사 정부가 갖은 노력을 다하여 농산물품을 증가시켜도 여전히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중국 침략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서 ′중국 사건′의 곤란함을 마무리짓고 남진 준비를 맹렬히 하기 위하여, 일본은 국내 인민의 생활 수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잔혹한 공격을 하였다.
중국 침략 전쟁 전, 일본의 경공업, 특히 방직 공업은 일본의 각종 공업 중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1938년 금속 공업과 기계 공업이 전면으로 대두되었고, 현재는 오로지 중공업 중의 이 두 부문만이 공업 총생산의 43%를 조성하고 있으며,방직 공업은 겨우 20%만을 차지할 뿐이다.
이러한 산업 구성의 변화는 일본 계급 구성의 변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중공업은 많은 노동력, 특히 숙련공을 필요로 한다. 경공업과 파산한 중소기업 공장에서 새로 나온 실업자는 나날이 실업자의 수를 늘려만 갔고, 이 실업자는 일본 관방 통계에 따르면, 1936년에 323,000명이었다.
1939년 1월, 일본의 실업자 인구는 이미 80만에서 100만에 달했으며, 동시에 중공업 분야에서는 또한 광범위하게 여공과 아이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이 실업자의 증가와 노동자 생활의 저열함은 바로 알 수 있겠다.
1939년 10월, 정부는 임금의 증가를 금지하는 법령을 반포하였다. 현재, 70%의 노동자가 매일 열 한 시간에서 열 두 시간을 일하며, 27%는 열 두 시간에서 열 네 시간 혹은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한다. 18세 이하의 청년 노동자는 평균 11시간을 일하고, 게다가 일의 주기는 대개 10-15일이라서 65%의 노동자는 매월 이틀의 휴가를 가지고, 겨우 11%의 노동자가 3일을 쉰다. 또 상황에 따라 겨우 하루 밖에 못 쉬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노동자는 쉬는 날이 전혀 없기도 하다.
물가의 폭등은 일본 국민의 생활 비용을 상승시켰다. 즉, 시정부 통계국이 낮게 산정한 숫자로 보건대, 1940년 5월을 1937년 7월과 비교해보면, 주로 필수품의 소매 가격의 지수가 83%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 노동자의 임금은 7% 하락하였다. 실제적으로 반 정도 삭감되었는데, 이는 결코 과장한 말이 아니다. 이와는 달리 자본가의 이윤은 46% 증가하였다.
임금의 감소와 노동자 생활의 하락이 조성한 영양 부족은 심각한 노동자의 질병, 사망, 그리고 부상의 증가라는 결과를 낳았다.
가혹한 착취와 실제적임 임금 하락은 일본 인민의 통치 계급에 대한 불만을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을 소멸시키고, 인민 생활을 개선시키는 쪽으로…(원본누락)…3년 동안 약 200개의 노동자 조합이 해체되었다.
전시의 압제가 얼마나 엄혹하였든지 간에, 파업의 수는 여전히 증가하였으며 만연하고 있었다. 일본 관방 자료에 의하면, 1938년 파업의 횟수는 10550회이며, 노동자 5600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1939년의 10개월간 파업은 955회, 노동자 8만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의 노동자는 자신의 생활을 위해서 투쟁하였으며, 그들의 혁명 운동은 동아시아 혁명 승리의 조건 중 하나였다. 이 조건은 갈수록 발전되고 역량을 갖춰가고 있다.

8. 결론 

3년 여의 중국 침략 전쟁이 이미 일본 제국주의의 경제를 나날이 고갈시키고 있으며, 게다가 무역에서는 수입이 초과되고 있고, 현금이 밖으로 유출되며 신용은 하락하고, 외환은 떨어지는 등 일본 재정이 붕괴되고 있다.
최근 남진에 대한 일본의 적극적인 준비와 대 영미 직접적인 충돌의 위기가 나날이 첨예해지고 있어, 그들은 더 많은 군비와 전시 자금을 필요로 하고 있다. 때문에 그 국제 관계의 곤란과 내부 정치 형세의 복잡과 인민 혁명 투쟁의 고조로 인하여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신이 파 놓은 음험한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 역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단신 

한국 청년 전쟁 공작대가 한국 광복군 제5지부로 편입하다.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이후, 국내외 동포들이 소식을 듣고 호응하여 적극적으로 한국 혁명 진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로써 나날이 통일되고, 혁명 역량이 갈수록 집중되어 각지의 한국 무장 부대가 광복군 총사령부 지휘 아래 집중하고 있다. 이에 전 한국 청년 전쟁공작대가 역시 한국 광복군 제5지부로 편입하였다.이에 금년 설날 서안(西安) 이부로(二府街)에서 이 부대의 본부 강당에서 성립식을 거행하였는데, 매우 열렬하게 진행되었다. 성립식에 참여한 사람은 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 전 직원과 이 부대 전체 대원 및 내빈 등 모두 200여 명이었고, 먼저 대회 주석인 황학수(黃學秀) 선생께서 광복군 제5지부 성립의 의미 및 광복군의 임무 등에 대하여 주례 말씀을 하셨고, 이어 이 부대장 라월환(羅月煥)이 선서를 하였으며, 임시 정부 군무부장 조성환(曹成煥) 선생이 훈사를 하셨으며, 내빈 송◎창(宋◎昌) 선생과 이웅 선생이 축하를 하였으며 마지막으로 라 부장이 답사를 하였다. 이로써 예식이 끝났다. 이 부대의 과거 성과가 매우 훌륭하고 이번 개편을 거치면서 앞으로 광복군에 전념하여 반드시 공헌을 할 것이다.
투고에 대한 몇 가지 원칙
1. 저희 잡지는 아래와 같은 문건의 투고를 환영합니다
(1) 한중(韓中) 양국 민족의 합작
(2) 한국 광복군운동의 분석과 논술
(3) 일본의 군사, 외교, 정치, 경제 등 각 방면에 대한 연구와 토론
(4) 국제정치, 경제, 외교에 대한 분석과 논술
(5) 항전 상황에 대한 소식과 분석
(6) 국제, 국내외의 시사(時事)문제 등
백화문(白話文)과 문언(文言)에 관계없이 모두 환영합니다.
2. 번역문을 보낼 때에는 그 원문도 함께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원문을 동봉하기가 곤란하시면 그 원문의 제목과 저자성명, 출판일시, 출한장소등을 적어 주시기 바랍니다.
3. 원고는 반드시 선명하고 정확하게 써 주시고 작성하실 때 신식 문장부호를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4. 보내실 원고의 분량은 최대 5천자를 넘지 않게 써주시기 바랍니다. 단 특별계약을 하신 분들은 예외입니다.
5. 보내주신 원고에 대해서는 본 잡지사에 수정권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정 후 별다른 부가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6. 원고의 마지막에는 연락의 편의를 성명과 주소를 써주시기 바랍니다. 원고를 게재할 때 서명은 투고인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7. 보내주신 원고는 등재여부에 관계없이 반송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요구하는 경우에는 게재되지 않은 원고는 반송해 드립니다.
8. 원고료는 등재한 이후에 계산해드리며 등재된 원고에 대한 작은 답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갑. 천자(1,000)마다 중화민국화폐 3원에서 4원가량
을. 원고가 등재된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9. 투고하실 때는 서안(西安) 2부가(二部街) 4로(四路) 본부총무처(本部總務處)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광복 제 1권 제 3기
대한민국 23년 5월 20일
중화민국 30년 5월 20일 출판
편집자: 한국광복군총사령부정훈처
발행자: 한국광복군총사령부정훈처
통신처 서안(西安) 2부가(二部街)4로(四路)본부총무처(本部總務處)
인쇄자 서안익문(西安益文)인쇄소 정가(定價) 5각(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