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사

광복 제1권 목요(目要)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 엮음

몽유도원 2012. 12. 29. 19:29

광복 제1권 

목요(目要)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 엮음 

단평
광복 논단
중국의 항전 5주년기념, 국내외 동지 및 동포들에 대한 고별서, 김구(金九)
대한민국 독립당 강령에 관한 해석, 사평(西平)
한일 2000년 전쟁사 중요사건요약, 안훈(安勳)
중국 동북에서의 30년 동안의 한국 혁명운동, 김학규(金學奎)
우호국 동태
국제정치
적군상황 연구
일본의 남진(南進)전략에 대한 추측
군사학
적군의 트릴형(錐形) 전법에 대한 연구 및 이후 대책, 고급 교관 왕제통(王際通) 설명, 전술반(陳述班) 마유룡(馬有龍) 기록
유방(遺芳) 기록
박백암(朴白巗) 선생과의 필담(筆談) 추억록(追憶錄), 노매(老梅)
이순신(李舜臣) 전기, 박백암(朴白巗) 편저
광복문예
편집후기

한국독립당 강령

1)국토와 주권을 되찾고 대한민국을 설립한다.
2)한민족의 생존과 발전에 관련되는 국토와 국가 권리 및 국가 이익을 보호하고 한민족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발양시킨다.
3)보통선거를 실시하고 국민의 정치참여 사항을 균등화 한다. 즉 성별, 교파, 계급과 상관없이 국민의 기본 권리를 균등화 한다.
4)토지와 대규모 생산기관을 국유화하고여 국민생활을 균등화 한다
5)생활에 필요한 국민의 기초지식과 필수기능을 보급 시키고 국비로 의무 교육을 충분히 실시하여 국민의 교육권리를 균등화 한다.
6)국방 군대를 모집하기 위하여 국민의 의무 병역제도를 실시한다
7)평등과 상조의 우호원칙으로 대한민국의 우호국과 기타 민족을 대하며 다 같이 인류사회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한다.

광복 제1권 목록

단평(短評)
강서성(贛,江西省) 북부에서의 대승
중•영, 중•미 기금(基金) 표준관련 조약
일본과 소련의 중립조약(中立條約)
유럽 정세
광복 논단
중국의 항전 5주년기념, 국내외 동지 및 동포들에 대한 고별서, 김구(金九)
대한민국 독립당 강령에 관한 해석(상), 사평(西平)
- 균등화 의의-
한일 2000년 전쟁사 중요사건요약(1), 안훈(安勳)저술
중국 동북에서의 30년 동안의 한국 혁명운동(후속), 김학규(金學奎)
우호국 동태
삼민주의의 문화건설 문제, 이경제(李儆濟)
국제 정치
붕괴를 앞둔 이탈리아, 서기달(徐紀達)
적군상황 연구
일본의 남진(南進) 전략에 대한 추측, 마충량(馬忠良)
군사학
적군의 트릴형(錐形) 전법에 대한 연구 및 이후 대책
고급 교관 왕제통(王際通) 설명 전술반(陳述班) 마유룡(馬有龍) 기록
유방(遺芳) 기록
박백암(朴白巗) 선생과의 필담(筆談) 추억록(追憶錄), 노매(老梅)
이순신(李舜臣) 전기, 박백암(朴白巗)
-해군 중 첫 번째 위인, 세계 철갑군함발명의 시조 -
광복 문예 작품집
광복군 동지들을 적후(敵後)에 전송, 광생(光生)
편집 후기, 편자

단 평(短評)

강서성 북부에서의 대승

금년 3월 중순, 적군은 강서성(贛,江西省)북부에서 또 다른 공세를 취했다. 2주간의 접전을 통해 적군의 사상자는 2만 4000여명에 달하였고 결국 적은 패배하였다.
우리는 적군이 이번 공세를 취한 것에는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다고 판단한다.
1.적국 내부의 반전(反戰) 분위기를 완화시킨다.
2.중국침략 군사(軍事)의 교착상태를 타파한다.
3.국제상 고립(孤立)된 관계(영국 및 미국과의 악화된 관계, 일본의주요 우방국가와의 관계심화)를 전환시킨다.
4.일부 병력을 이동시켜 남진(南进)을 위한 전투(戰鬥) 준비를 한다.
중국은 적들의 이 4가지 목적을 전부 분쇄할 것이다.
3월 15일부터 적군은 2사단(師團)과 1여단(旅團)규모의 병력으로 안의(安義), 금하(錦河), 북안(北岸), 금하(錦河), 남안(南岸)등 세갈래로 나누어 강서(江西)의 봉신(奉新)을 향해 연합 공격하여 중국의 주력군을 소멸할 계획이었다.
중국 군대는 ●●군을 중심으로 적군에 대항하였다. 3월말에 이르기까지 2주간의 치열한 전투를 치루는 동안 적군은 절반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완전히 패배하였다.
이번 전투의 규모는…(원본판독불가)…,하남성(豫,河南省)남부, 호북성(鄂,河北省) 북부 등 지역의 전투보다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다.
1. 이번 전투중, 적군과 아군의 참전 인원수는 각각 60,000명 가량이다. 그러나 적군이 호북성(湖北省)북부지역에서의 패배는 중국군대의 전투력이 적군의 실력에 필적함을 보여 주었다.
2. [수필고, 공필극(守必固,攻必克)]이라는 적군의 잘못된 심리를 완전히 타파하였다.
이번 전투중 중국군대는 적군의 공격에 대항하여 진지를 지켰다. 중국 군대는 잇따라 고안(高安), 당포(棠浦)등 적군이 점거했던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번 전투는 중국 군대의 전투력이 더더욱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 주었다.

일본과 소련의 중립(中立)조약

금년4월 13일 오후, 일본의 마쯔오까(松岡)외교부장과 소련의 몰로토프(莫洛託夫)는 모스크바에서 중립조약을 체결하고 별도로 성명서를 체결하여 ′외몽고′와 ′만주국 - 9. 18 만주사변에 의해 중국 동북 지구에 세워졌던 일본의 괴뢰국정부′의 존재를 승인하였다. 이번 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은 하나라도 얻을 것이 없을 것이고 소련 또한 이번 조약에 대해 유감을 갖게 될 것이라고 중국측은 평론하였다.
1.이번 조약은 일본과 독일의 감정 문제를 벗어나, 외교적으로 일본을 고립시킨다. 왜냐하면 발칸전쟁으로 소련과 독일의 관계가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런한 시점에서 일본이 소련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이후 독일과 소련 사이에 충돌이 발생할 때 일본이 독일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시한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 3국의 동맹 조약중 "모든 조항은 3대 체약국 중 임의의 한 국가와 소련 사이에 존재하는 현 정치에 그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과 소련 사이에 상호 침해하지 않거나 중됩하지 않는 다는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독일과 소련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면 독일은 일본에 무력상의 도움을 청할 수 있다. 본 약정이 체결된 후, 일본은 더 이상 중립을 유지할 핑계를 댈 수 없다. 사람들은 소련이 이번 조약을 통해 서부지역에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이런 결과는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로써는 결코 원하는 바가 아니다.
2.이번 조약은 일본이 남진(南進)전쟁을 준비하거나 중국을 침략하는데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번 조약을 체결한 후 일본은 중국 동북에 있는 육군을 이동시켜 남진(南進)전쟁 혹은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중국 동북으로 이동시킬 일본병력이 있는 지에 관해서는 잠시 접어두고 병력을 전부 이동시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총병력이 6개 사단(師團)을 초과하지 않는다. 이 6개 사단(師團)의 힘으로는 ′중국 사건(中國事件)′을 처리하거나 혹은 남진(南進)전쟁준비를 하기에는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그 어떤 결정적 작용도 일으킬 수 없다.
3.조약을 체결하더라도 조약을 통해 소련과 일본 사이의 충돌을 방지할 수는 없다.조약 내용 중 ′체약국 중 임의의 한 측이 제3국과 적대(敵對)행위가 발생할 경우, 기타 체약국은 충돌 발생기간 중립(中立)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라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체약국간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는 규정은 아니기 때문에 체약국 사이에 직접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
4.이번 조약을 통해 일본은 영국과 미국을 위협하지 못했을 뿐만아니라 오히려 일본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반감을 초래하였다.
5.일본은 이번 조약을 통해 중국에 대한 소련의 지원을 반대할 수 없다. 본 조약은 중국에 대한 소련의 지원 활동에 그 어떤 영향도 줄 수 없음을 조약 체결 시 이미 명확히 밝혔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 일본은 이번 조약을 통해 그 어떤 이익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소련은 왜 유감을 갖게 된다고 하는 것인가?
1924년 5월 31일, 중국과 소련이 중국 북경에서 체결한 중국과 소련의 조약 중 "각 체약국 정부는 이후 상대방의 주권과 이익을 침해하는 조약을 체결하지 않음을 성명한다"라는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 중국은 줄곧 이 규약을 준수하여 왔다. 일본이 몇번이나 중국을 반공조약에 참가하도록 유혹하였지만 중국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본 조약 중 [만주국 (괴뢰국)정부]의 존재를 승인함으로써 중국의 권리와 이익을 침범하였다. 1937년 8월 20일, 중국과 소련이 상호 침해하지 않기로 체결한 조약 중 ′체약국 중 임의의 한 측이 상대방 혹은 기타 제3국의 침략을 받게 될 경우, 충돌 발생기간동안은 제3국에 대한 직접 혹은 간접적인 지원을 불허하고 그 어떤 행위 혹은 조약으로도 해당 침략국이 체약국에 불리한 행위를 진행하지 못하게 한다′는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 소련과 일본이 이번 조약을 체결함은 분명히 중국을 침략하려는 제3국을 지지하여 중국에 불리한 행위를 진행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번 조약에 대해 유감이 있을 것이다.

중•영, 중•미 기금 표준관련 조약

지난해 11월말 중영, 중미 기금 표준 내용을 의논 및 선포한 후 몇 개월 지연시킨 나머지 바로 4월 25일 미국수도 워싱턴에서 갑자기 본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총 금액 9,000만불과 중국정부 은행에 지급한 2,000만불을 합한 총 기금은 11,000만 불이다. 이번 조약은 중국의 외환율을 상승시키고 중국의 물가를 고정시키는 것과 같은 여러가지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다. 이번 조약은 경제적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지만 이는 국제정치 및 영미의 극동외교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를 들면,주축을 이루는 3개 동맹국이 그들의 설립을 선고하고 일본과 조약을 체결할 시, 영국과 미국은 중국에 재무상의 도움을 제공할 것이다. 이번 일본. 소련. 중국간의 조약을 제정하고 급히 본 조약을 체결했던 것을 통해서 우리는 영국과 미국이 중국에 대한 지원을 다그치고 민주주의를 지지하며 자유 세계를 구현하려는 의지를 엿 볼 수 있다.

유럽의 정세

4월 27일, 독일이 아테네를 공격한 후, 유럽의 육지에서의 전쟁은 잠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독일군은 공격방향을 근동(近東)지역과 지브롤터 쪽으로 바꾸어 지중해상의 영국의 패권을 철저히 분쇄하려고 했다. 전쟁의 결과는 소련, 터키, 스페인, 프랑스 등 나라들의 태도에 달려 있다.
소련은 독일을 의심하지만 잠시 도피하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다. 터키는 소련의 일거일동을 살펴야 하는 진퇴 양난의 입장이 되었다. 스페인은 매일 회의를 개최하는 상태이며 이는 독일이 전쟁에 참여할 확률을 높여 준다. 프랑스는 독일의 억압으로 본국의 해군을 독일에게 넘겨 주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지중해상 영국의 입장이 제일 곤란하다. 그러나 영국은 이미 전쟁 승부를 주로 대서양에 두고 있고 미국이 영국을 계속 지지하기 때문에 영국을 항복시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고금수군(해군) 제일위인
세계 강철군함의 발명시조
조국 중흥의 공훈자
이순신(李舜臣)장군
이순신(李舜臣)장군이 발명한
동서양 최초의 철갑 군함의 시조
거북선

광복논단(光復論壇)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 김구선생이 국내외 동지들과 동포들에게 보내는 글

친애하는 동지들과 동포 여러분! 32년간 우리는 조국을 잃은 고통 속에서 생활하여 오다 지금은 적들에 대항하여 부단히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승리에 비해 너무 많은 병사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런 결과를 초래하게 된 요인은 바로 단결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무엇이든 뭉치면 힘이 되고 분리하면 약해진다는 도리는 그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3.1운동이 일어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통일운동을 위해 우리는 많은 노동력과 시간을 소모했습니다. 하지만 독립운동의 중심이론을 수립하지 못하였고 봉건적 사상을 버리지 못하여 결국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중심이론을 수립하지 못했기에 독립운동단체는 중심을 잃은 채 좌우로 흔들리고 방황하였으며 게다가 편견을 가진 좌경주의자들은 한국의 역사, 정치, 경제 등을 버리고 외국의 사상을 주입시켰습니다. 또한 보수주의자들은 국제대세, 당시 국내 형세와 실제상황을 감안하지 않았기에 그 당시 혼란상태를 초래하였습니다. 기타 지방 당파들 역시 잇따라 지위와 명예를 위한 분쟁을 하였습니다. 일제는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정치, 경제, 군사 등 각 방면에서 일정한 이익을 얻었습니다. 세계 열강들은 유럽 전쟁의 처리문제로 적군의 공세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아시아에서의 자신의 이익을 보장하려 하였습니다.그리고 당시 일제는 중국과 소련이 혁명에 몰두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침략 공세를 취했습니다.
비록 위와 같은 모순과 억압 등으로 여러가지 방해를 받았지만 독립운동은 혁명가들의 노력으로 부단히 발전하고 성장하였습니다. 최근에 이르러 국제 형세의 전환과 착취 받는 세계 인민들이 들고 일어난 치열한 저항운동 그리고 중국의 항일전쟁 등은 광복운동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였습니다.
첫째, 지난날 우리가 얘기하는 통일은 단지 사상적인 통일이었지만 대한민국…(원본판독불가)…대표대회, 대한민국78년 각처의 대독립당촉성회의(大獨立黨促成會), 동북 3성내 각 단체의 협의회의, 재작년에 개최한 7당 및 5당 회의 등은 지난날 사상상의 통일이 아니라 진정한 통일을 명시하는 것입니다. 입장이 상이하고 국제계통의 개인 혹은 단체가 존재하기 때문에…(원본판독불가)…통일은 공상일 뿐입니다.민족 이익을 멸시하고 서로 다른 주의(主義)를 제창하는 자들과 함께 진정한 통일을 이룰 수 없음을 인식하고 지난해 초부터 같은 주의(主義)를 제창하는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인애국단체, 한인단합회, 한국국민당을 소집하고 이전의 단체를 해산하여 조국의 광복을 위한 합리적인 이론과 인력 및 재력을 갖춘 새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습니다. 한국독립당은 용감하고 씩씩한 당원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하는 핵심 인물로 될 것입니다. 현재 한국독립당의 의의, 강령, 정책의 핵심은 아래와 같습니다.

당의 의의

본 당은 혁명을 통해 일제란 잔혹하고 폭력적인 세력을 몰아내어 우리 나라의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고 정치, 경제, 교육균등의 기초 위에서 새로운 민주국가를 건설한다. 안으로는 국민 각 개인의 균등한 생활을 확보하고 밖으로는 각 민족과 민족 그리고 각 국가와 국가의 평등을 실현하고 세계의 평화를 위해 나아간다.

당강령

1.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여 대한민국을 건립한다.
2. 보통선거를 실시하여 국민의 정치참여를 평등화하여 성별, 교파, 계급등에 상관없이 국민의 기본 권리를 균등화한다.
3. 토지와 대규모 생산기관을 국유하여 국민 생활을 균등화한다.
4. 생활에 필요한 국민의 기초지식과 필수기능을 보급시키고 국비로 의무교육을 충분히 실시하여 국민의 교육권리를 균등화 한다.

당의 정책

1. 국내외 한민족의 혁명역량을 집중시키고 광복운동을 전개한다.
2. (원문판독 불가)를 훈련시키고 광복군을 적극 모집한다.
3.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옹호하고 지지한다.
4. 확실한 상황을 파악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민족과 기타 국가와 연합하여 광복운동의 역량을 보강한다.
5. 일제에 용감히 대항하는 지금의 중화민국과 연합하고 항일동맹군을 받아들여 구체적으로 행동한다.
한국독립당은 조국을 되찾고 진정한 민주주의국가를 설립하여 국민에게 정치에 참여하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경제적 착취제도를 제거하며 국민의 생활수준을 제고할 것을 주장합니다.
한국 독립당의 이론은 바로 한민족을 부흥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혁명해야 하기 때문에 본 당 정책의 제2항 중, 광복군 창설에 관한 내용을 규정하였습니다. 지난해 9월, 중국 정부는 본 당의 정책을 허락하였고 임시정부를 협조하여 광복군사령부 창단식을 개최하였습니다. 현재 광복군은 여러 개의 지대(支隊)를 포함하고 이들은 각 전선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광복군의 임무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분산되었던 혁명역량을 전부 광복군에 집중시켜 광복운동을 전면적으로 전개한다.
2. 중국의 항일전쟁에 참여하고 중국의 항일군과 연합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물리친다.
3. 국내 민중을 적극 통솔 및 동원하고 전부 무장하여 반일 운동을 전개합니다
4. 정치, 경제, 교육 등 각 방면에서 평등한 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기관이 된다.
5. 전세계 민족의 평화를 깨뜨리고 인류의 정의에 어긋나는 장애물은 전부 제거한다.
정치와 군사방면에서 우리 당은 일정한 진보를 이룩하였으며 행동을 점차 실천으로 옮기고 있는 중입니다.
둘째, 한국의 절대 우호국인 중국은 9.18사변과 7.7사변 이후, 적들의 잔혹한 침략을 겪었기 때문에 한국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갑오전쟁 이래, 중국이 일제에 대한 원한은 나날이 커져만 갔습니다. 중국인민은 일본이 중국혁명에 끼친 영향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역사상 중국이 일본에 대한 원한, 그리고 1931년 9월 18일, 일본이 동북 4성에 대한 침략, 더 나아가 1937년 7월 7일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 행위는 중국 인민들의 분노를 자아냈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중국인민은 다 같이 일어나 전면적으로 항일 전쟁을 펼쳤으며 4년이란 기나긴 세월 속에서 중국민중은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 일제에 저항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은 중국과 한국의 공동의 적이고 중국의 혁명 역량 중, 한국이 비교적 중요한 지위를 차지 하기 때문에 중국은 한국 혁명을 협조하였습니다. 중국은 한국이 중국 경내에서 조직한 한국 광복군을 인정하고 전력을 다해 한국의 혁명공작에 협조하였습니다. 사실상 한 나라의 힘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한국과 중국은 힘을 모아 일제를 소탕해야 합니다. 때문에 한국 독립운동도 우리 한민족만의 힘으로 진행할 것이 아니라 중국과 연합하여 다 같이 일제를 소멸해야 합니다.
셋째, 일본으로 인해 국내외 모순은 나날이 심각해 지고 반 군벌 및 반 재벌의 혁명 사상은 나날이 성숙되어 갔으며 더 나아가 외교상의 고립으로 인해 극단적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제1차 세계대전 후 급속히 발전하고, 유럽 자본주의 국가의 해외 시장을 침탈하였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후, 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점차 원상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시장을 되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이 침탈한 시장을 반환한 후, 1929년 세계 경제 공황에 이어 5.15, 2.26 등 정변이 잇따라 발생하여 당시 대규모 생산은 국내 문제로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공장들은 문을 닫게 되었고 이어 실업자들로 나날이 늘어만 갔습니다. 이런 사회적 공황이 인민의 생활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민중은 혁명의 열망으로 들끓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반양(潘阳) 근처 철도가 고장 났음을 핑계로, 9월 18일 동북4성을 침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9.18사변은 일본의 내부 모순으로 인해 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9.18사변 후, 일제는 그 무엇도 획득하지 못하고 인민에게 굶주림과 추위만 안겨 주었을 뿐, 그 어떤(직접, 간접적)이익도 주지 못하였습니다. 당시 조사내용에 따르면 일본의 공채는 기존 60억 원(9.18사변 전)으로부터 150억 원으로 증가되어 일본이 동북4성을 침략함과 동시에 본국 내부 모순은 점차 악화되어 결국 노구교사변(蘆構橋事變)을 초래하였으며 이에 따라 일제는 전쟁의 구덩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자기들의 행동을 정지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일제는 3개월이란 짧은 시간 내에 침략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지만 중국 인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예기한 목적은 고사하고 점점 더욱 깊은 구덩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적군이 중국을 침략해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미 4년이 지났습니다. 이 기간 일제는 5번이나 내각을 변경하였습니다. 통치계급 내부의 투쟁은 중국의 항전과 국제정세 등의 영향을 받아 일제의 상황은 나날이 악화되었습니다. 3년 9개월의 전쟁기간 일제의 군사비는 174억 5500만원을 초과하였고 공채 발행 량은 177억에 달하여 (적국의 총 공채 발행 량은 282억 5220만) 그 해의 전비(战费)는 48억8000만원으로 예산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금액은 반드시 공채를 발행하여 보충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외교상 고립되어 외채(外债)를 발행할 수 없기 때문에 내국채(内债)를 발행하여 군사비를 보충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일본의 공채 발행량은 …(원본판독불가)…200억에 해당한 것입니다. 일본이 이렇게 공채를 난발(滥发)한 결과 통화 팽창 현상이 나타나고 물가가 급등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일본 인민의 생활을 위협하고 군벌과 통치계급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본의 고혈을 짜려고 하였습니다. 어려운 생활에 시달리고 전쟁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일본 인민들은 인간 세상의 간난신고를 겪은 나머지 혁명의 길을 선택하여 되었습니다. 군사 방면을 놓고 볼 때, 전쟁 초기, 일본이 화북과 연해 지역의 몇 개 지역을 점령한 후, 곳곳에 불을 지르고 부녀를 강간하며 인민의 물건을 약탈하는 등등 인륜을 벗어난 잔인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일제는 중국의 주요 군사력을 소멸하려 하였지만 중국의 완강한 세력에 그들의 음모는 파탄되었습니다. 일본은 이미 점령한 지역에 배분할 군사가 부족하여 중요한 도로에만 병사를 파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중국 유격대(游击队)는 일본이 점령한 중요한 지역을 제외한 기타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중국 정규군은 해당 지역을 통제하였습니다. 최근에 이르러 일본군의 세력이 점차 쇠약해지기 시작하고 호남성(湘)북부지역과 광동성(粤)북부지역의 전쟁에서 일본은 모두 패배하였습니다. 일본은 전 세계 인민들과 본국의 인민을 기만하고 왕정위(汪精卫) 등 매국노와 함께 조직을 설립하여 "남진(南进)정책"을 외쳐댔습니다. 일본의 외교문제를 놓고 보면 중국을 침략한지 얼마 안되어 일본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추축으로한 동맹을 체결하고 전 세계 민주주의 국가를 압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해외 무역에 의지하여 경제를 유지하던 일본은 이 추축동맹을 체결한 후, 군용장비 제공 지역과 해외무역시장을 잃은 채, 군수품을 보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외교상 각 민주주의 국가는 경제적으로 일본을 제재하고 중국에서 자신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미국의 항공기용 휘발유…(원본판독불가)…등 무기운송,인도와 이집트의 면화운송, 멕시코의 석유운송 등을 금지하고 시장의 일제 제품을 배척함으로써 중국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은 민주주의 국가로부터 큰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유럽 전쟁 이후, 일본의 대외 무역이 정체되어 일본의 경제 명맥이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소련의 동부 국방 세력이 강화되고 미국의 태평양전쟁에 대한 방비가 강화됨에 따라 일본은 군사상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습니다.
친애하는 동지 그리고 동포 여러분! 우리 광복운동이 곧 승리를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중심이론을 수립하고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당을 설립하였습니다.머지 않아 우리 광복군은 무장준비를 하고 적들에 대항하여 광복운동을 진행할 것입니다. 게다가 국제형세도 우리들에게 유리하여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동지들! 우리는 지난 날의 부족한 점을 총결하고 중심이론을 내건 깃발을 손에 들고 우리의 의지를 일치하게 할 뿐만이니라 다 같이 단결하고 우리에게 유리한 객관 적인 조건을 정확히 이용해야 합니다.
국내외 동포 여러분! 힘을 모아 적들에 대항합시다! 심보가 나쁜 매국노를 제외한 우리 한민족은 그 누구도 일제의 착취를 원하지 않습니다. 5000여 년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바탕으로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전 민족이 단결하여 투쟁합시다. 최후의 승리는 반드시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의 구호는
1.중심이론을 중심으로 혁명역량을 집중시킨다.
2.무장역량을 모두 광복군에 집중시킨다.
3.반드시 독립당을 옹호한다.
4.대한민국독립당 만세!
대한민국 23년 월 일
대한민국 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
김구

대한민국 독립당 강령에 관한 해석

균등의 의의

1.서론

근대사를 통해 정당과 국운(國運)은 밀접히 관련됨을 알 수 있다. 즉 국가의 흥망(興亡)은 정당의 정확 여부와 관련된다. 각 나라의 정당관련 상황을 조사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게 되었다.
1)한 나라의 비상시기에 혁명의 발걸음을 일치하게 하고 혁명역량을 집중시켜 혁명능력을 강화하려면 단지 한 개 당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
2)일반 상황에서 하나의 나라는 다당(多黨) 정책을 실시할 수 있지만 의견이 불일치하여 나라의 발전에 영향을 끼침을 피하기 위해 정당의 수량을 적당히 하여 나라의 현상과 업적을 유지해야 한다.
유럽 전쟁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 양국의 내부에 많은 당이 존재하여 나라의 정권을 공고히 할 수 없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墨索里尼) 선후로 파쇼당과 국사당(囯社黨)을 조직하였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뒤, 이탈리아와 독일은 강성(強盛)해 지기 시작하였다. 히틀러와 무솔리니(墨索里尼) 이 두명의 이론과 행동이 인민의 복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막론하고 그들의 이론과 행동이 이탈리아와 독일에 대한 성과는 부인할 수 없다. 대혁명(大革命) 이후, 소련의 볼세비키당은 자기들과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을 배제하고 정권을 독차지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 논의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소련은 오늘날 국제상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국과 미국은 국제 정세상 위험한 사태에 빠졌다. 영국과 미국의 정당을 통합함을 공식적으로 성명하지 않았지만 사실상 이미 통합한 상태이다. 프랑스의 패배를 초래한 것은 작은 정당들이 숲을 이루어 빚여진 정치적 견해착오의 결과이다. 중국은 중화민국을 창립한 이후 3명이 한 개 당을 구성하고 5명이 한 개 당파를 구성한 결과 결국 혼란 상태에 빠졌다. 근년에 이르러 중국의 형세는 나날이 좋아 지고 있는데 4년간 일본과의 전쟁 중 중국은 기필코 승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은 국민당이 독재 정치를 하기 때문에 국민의 의사가 일치하고 국민이 단결하여 항전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이 영토를 잃은 후, 30여 년간 많은 지사(志士)와 의인(義人)들은 조국을 되찾고 조국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했다. 초기의 개인적인 활동으로부터 점차 십여 개의 단체로 발전되고 또 확장되었다. 위의 각 단체중 서로 다른 의견이 존재하고 충돌이 발생하는 것은 기타 국가들에서 광복운동을 진행할 때 겪었던 현상들이다. 최근에 이르러, 일제에 대한 중국의 저항은 한국인민들로 하여금 각 단체를 통합할 목표를 세우게 하였습니다. 지난해 여름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은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설립하고 당의 강령을 선포하였다. 이는 광복운동의 진보적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위와 같이 내가 한국독립당의 강령에 개인적 해석을 추가한 것은 대한민국 동포들의 신뢰를 얻고 광복운동의 진용(陣容)을 확장하며 나아가 우호국의 공감을 얻어 혁명 역량을 확장하기 위해서 이다.

2.당의 강령체계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3개 당을 통합하여 조직한 한국독립당 선언 내용에 따르면 당의 강령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1)국토와 주권을 되찾고 대한민국을 설립한다.
2)한민족의 생존과 발전에 관련되는 국토와 국가 권리 및 국가 이익을 보호하고 한민족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발양시킨다.
3)보통선거를 실시하고 국민의 정치참여 사항을 균등화 한다. 즉 성별, 교파, 계급과 상관없이 국민의 기본 권리를 균등화 한다.
4)토지와 대규모 생산기관을 국유화하고여 국민생활을 균등화 한다
5)생활에 필요한 국민의 기초지식과 필수기능을 보급 시키고 국비로 의무 교육을 충분히 실시하여 국민의 교육권리를 균등화 한다.
6)국방 군대를 모집하기 위하여 국민의 의무 병역제도를 실시한다
7)평등과 상조의 우호원칙으로 대한민국의 우호국과 기타 민족을 대하며 다같이 인류사회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한다.
1. 균등
1)공민(公民)과 공민의 균등화,
가.정치적 균등화
민주공화국, 총선거 제도 실시, 국민의 기본권리 균등화
나.경제적 균등화
토지 국유와(國有) 대생산(大生産)업체 국유화
다.교육적 균등화
국비(公費) 의무교육
2)민족과 민족의 균등화
국토와 주권(主權)을 되찾는다.
국토와 주권(主權)을 보위한다.
고유(固有)역사와 문화를 발전시킨다.
평등호조(互助)의 민족을 단결한다.
민족 자결(自決)을 승낙한다.
3)국가와 국가의 균등화
평등호조(互助)의 우호국을 단결한다.
국제적 침략정책을 뒤엎는다.
국제 도덕을 존중한다.
연관성
인류사회의 평등화를 촉진시켜 화목한 세계를 구현한다.
위의 도표에 따라 각 항목에 대해 아래에서 설명을 하지만 이는 한국의 특별한 방면에 대한 해석이기 때문에 이후, 이에 대해 상세한 해석을 진행함을 허용할 것입니다.

3. 강령의 중심사상-균등화

"온갖 사물은 평등을 얻지 못하면 불평을 밖으로 나타내게 된다." 이 말은 중국의 철학자-한창려(韓昌黎)의 명언입니다. 구미(歐美) 정치학자들은 혁명에 대한 연구를 통해 아래와 같은 하나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즉 "불평(不平)"은 전쟁을 초래하는 근본 요인이다]. 그렇다면 불평이 발생하게 되는 근원(根源)은 무엇인가? 불평 현상은 바로 사회의 불균(不均)과 불등(不等)으로 인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공자(孔子, 중국 춘추 시대의 철학자)는 "적은 양의 배분은 두렵지 않지만 불평등은 두렵다"고 말했습니다. 불등(不等)은 분노를 자아내게 하고 분노는 점차 불평(不平)으로 전환됩니다. 즉 공민(公民) 과 공민,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간의 불균(不均)은 기필코 불평(不平)을 초래하게 됩니다.
(公民)과 (公民) 사이의 평등화를 구현하지 못할 경우, 공민은 사회에 대한 원한을 갖게 되고 심지어 법률적 문제를 초래하게 됩니다. 한 나라가 오랜 시간 국민의 균등한 생활을 보장할 수 없으면 기필코 인민의 폭동(暴動)과 혁명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영국의 명예혁명, 프랑스대혁명, 소련의 사회혁명(社會革命) 등 혁명을 초래하게 된 근본 원인도 바로 공민의 불균등(不均等)한 생활입니다.
또한 민족과 민족간의 불균등한 생활로 인해 혁명을 초래하게 된 예는 하도 많아서 일일이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아일랜드와 영국간의 전쟁, 국가를 회복하기 전의 폴란드, 체코,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그리스 등 민족과 독일,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帝國), 러시아 제국, 터키 제국간의 전쟁. 지난 번 유럽 전쟁 이후 폴란드, 체코,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터키, 루마니아, 헝가리 등은 새로운 민족들을 형성하였고 이어 새로운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쟁이 계속되면서 인류의 생활은 점차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불균등한 생활은 인류 사회의 잔혹한 분쟁(紛爭)을 초래하며 이 방면의 사실을 기재한 역사 서적도 많고 많습니다. 지난번 유럽 전쟁과 이번 유럽 전쟁은 이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제일 좋은 예입니다. 지난 번 유럽 전쟁 발발 후, 국민은 균등한 생활 보장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역사 및 국제정치 연구자들은 베르사유 평화조약은 체결 당시 이미 제2차 유럽 전쟁을 야기시킬 수 있는 씨앗을 심었다고 평론했습니다. 왜냐하면 베르사유 평화조약의 체결은 평등을 조약의 원칙으로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베르사유 평화조약을 체결되고 20년이 지난 오늘 불행하게도 제2차 유럽 전쟁은 평론가들이 추측한 것처럼 다시 발발하였습니다.
중국이 4년이란 긴 시간을 이용하여 일제에 대항한 것도 바로 일본이 중국과 균등한 생활을 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승리를 취득할 그 날까지 항일전쟁을 계속할 것입니다.
상술한 내용으로 알 수 있듯이 인류사회의 분쟁을 일으키는 근본원인은 바로 생활을 불균등 현상입니다. 인류사회의 영원한 행복과 평화를 구현하기 위해 당의 강령 중 "균등화"를 당의 기본사상 및 중심사상으로 규정하였습니다.
나아가 한국이 일제를 우리 민족의 적으로 간주하고 그들과 무정한 전쟁을 치르는 것은 일본이 우리 한국과 균등한 생활을 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국을 완전히 소멸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일제의 통치하에 일본 인민들과 평등한 생활을 할 수 없었고 일본인은 한국인민을 자기들의 노예로 억압하려 하였습니다. 한국인민은 개인적으로 일본인의 침략을 받고 그들과 평등한 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 인민들은 일어나 일제에 대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현재 한국인민들이 일제에 대항하고 있지만 일제의 통치를 뒤엎고 조국을 되찾은 후 한국은 균등화의 원칙에 따라 일본과 한국 양국간의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인민과 인민 사이의 분쟁을 해결할 것이며 또 다른 불균등 현상과 양국 혹은 두 민족 사이의 새로운 분쟁을 피하고 양국간의 또 다른 재난이 발생함을 방지하기 위해 한국은 일본을 절대 압박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 국내에서 인민들이 또다시 불균등에 대한 불만으로 혁명을 진행함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균등화 원칙으로 인민들의 생활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상술한 내용은 대한민국 독립당이 주장하는 균등화에 관한 요지입니다.

4. 사람과 사람의 균등

1) 정치적 균등화
(1) 한국 사회의 배경
가. 한국의 지난 역사 및 전통
한국의 과거를 돌이켜 볼 때, 한마디로 인민의 기본권리가 불균형한 것이 사실이었고 계급제도와 노예제도가 성행하였습니다. 이씨(李氏)조선시대 이전의 한국사회에 대해서는 잠시 논하지 않고 이씨조선시대의 상황에 관해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A. 계급(階級)제도
조선의 계급제도는 대체적으로는 5가지로 구분되지만 정확히는 15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조시대에는 문벌을 중히 여기고 권문세가의 씨족(氏族)들을 채용하는 기준으로 관직의 권리는 문벌들이 독점하였습니다. 일반 국민은 자기의 권리를 문벌들에게 박탈당한 채, 국민의 의무만 집행하고 권리는 누리지 못했습니다. 조선의 역대 정치는 모두 권문세가에 편중하였으며 가옥, 의상, 예의 등 여러 분야에서 그 차이가 점차 커져 갔습니다. 예를 들면, 위에서 언급한 상황이 서로 일치하지 않을 경우 결혼뿐만이 아니라 서로간의 교류도 불가능하였습니다. 이렇게 국민의 불균등한 현상이 심각해짐에 따라 국민들은 불평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19세기 말, 한국 인민들의 혁명운동의 요인은 바로 상술된 국민의 불균등 생활입니다.
B. 노예제도
한국의 노예제도는 삼국시대로부터 전해왔습니다. 고구려4세기 소수림왕(小獸林王,고구려 제17대 왕) 때 부터 율령을 실시했습니다. 한서(漢書)중, "고구려, 죄진 자는 죽이고 타인의 아내는 노비(奴婢)로 한다." 당서(唐書) 중, "살인자와 강탈(刺劫)자는 무조건 목을 자르고 소와 말을 살해한 자는 노비(奴婢)로 하여 백성(百姓)들은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는다. 백제(百濟)는 법률을 위반한 자는 무조건 죽이고 그의 가족 중, 3명을 노비(奴婢)로 간주하여 위법자 대신 속죄하게 하며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절도죄를 범할 경우, 해당 금액의 3배를 변상하고 평생 감금시킨다. 또한 신라는 미곡을 바쳐야 하되 수량이 표준 수량에 해당하지 않을 경우, 노비로 일 시킨다"라는 법률이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한국의 노예제도는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온 것입니다. 신종원년(神宗元年) 5월에 이르러 노예 수량이 점차 많아져 노예변란(變亂)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씨(李氏)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노예제도는 그 어떤 변함이 없었습니다. 대전회통(大典會通, 고종 2년(1865)에 편찬된 조선왕조 최후의 종합법전) 내용 중, 노예 조례(條例)가 포함되었고, 관직(差使) 노예와 동행(跟隨) 노예의 총 인원수는 51794명이었습니다. 개인이 소유한 노예는 한 가정에 적으면 4,5명, 많으면 300여명을 초과하였습니다.
이렇게 잔인무도한 노예제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미 불평을 나타냈었습니다. 고구려 시대가 끝날 무렵, 시종(舍人)은 천자에게 "노비(奴婢)의 신분이 비천한 건 사실이지만 노비도 천민(天民)이다. 소와 말 한 마리로 노비 2, 3명을 물건과 같이 취급하여 팔고 사는 것은 노비가 짐승보다 못하다는 것이다."라고 상소하였습니다. 이씨(李氏 )의 조선 세기 말, 류향원(柳馨遠)은 "′노비′란 단어는 예전 죄인을 일컫는 것인데 지금은 무죄한 자도 노비로 간주하고 일을 시킬 수 있다. 예전에는 이러한 법규가 없었지만 본국의 노예제도는 상대방의 유죄(有罪), 무죄(無罪)에 근거하여 죄인을 징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족보에 따라 사형에 처하는 것이다. 즉 선조가 노예인 가족은 대대손손 노예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중, 현명하고 유능한 인재는 특별히 대할 수 있지만 그들의 노예 신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옛날에 한 나라의 부유여부는 그 나라가 소유한 말의 수량으로 결정하지만 오늘날 한 나라의 부유여부는 노예와 논밭의 수량으로 결정한다. 노비든 관리자든 모두 똑 같은 인간이지만 왜 노비를 재물로 간주하는 것인가? 이건 법규에 어긋나고 우리 민속이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인민의 기본권리를 감안하지 않고 인민의 불평등 현상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나. 이민족 통치 아래에서의 정치적 침해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후, 한국 국민은 일본 국민들과 함께 평등한 국민의 권리를 누릴 수 없었으며 일본의 법령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불평등한 국민의 권리 이외에 한국 국민은 일본이 제정한 법률 이외의 정치적 압박을 받아야 했습니다.
A. 제멋대로 체포.
한국내 일본병사의 주둔지를 제외한 일본경찰서는 총 2700여 곳에 달했습니다. 이토록 많은 경찰서에서는 한인(韓人)의 형법(刑法), 보안법(保安法), 치안 유지법(治安維持法), 출판법(出版法), 사상보존 관찰법(思想保觀察法) 등을 제어한다는 핑계로 제멋대로 한인을 체포하였습니다. 이년 일년(二年一年) 공판(公判)을 실시하기 전까지, 일제는 한인을 체포한 후, 그들의 유죄 무죄를 막론하고 96여 종류의 엄형(嚴刑)으로 고문(拷問)하였습니다. 고문 및 예심(預審)기간 그 어떤 정보도 누설하지 말아야 하고 정보를 누설한 자는 엄격히 처벌하였습니다. 1929년 그 해, 1년간 일제는 15만 8천 여명의 한인을 체포하였습니다. 일본 경찰서에서 발표한 연말 발표서 내용에 따르면, 반일사상 혐의로 이미 체포되었거나 미체포(未逮捕)된 한인과 일제의 지문서(指紋書)에 기록된 한인은 13만 여명이라고 합니다.
B. 사상적 제어
한국의 무장혁명이 일제에 의해 압제된 후, 한국은 또 다른 특별 무기를 얻어 계속하여 일제를 향해 공격하였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또 다른 특별 무기란 바로 자각적인 민족의식(意識) 입니다. 일제의 각종 억압하에, 한인은 물질적으로 무장할 수 없었지만, 자각적인 민족 의식으로 물질적 무기를 대체하였습니다. 일제는 동화정책(同化政策), 존황주의(尊皇主義), 문화정책, 자치계획(自治計劃) 등 수단을 이용하였지만 적군의 계략은 바로 한인에게 간파되었습니다. 따라서 일제는 한국 국내의 각 법원에 사상 검사원(檢察院)을 설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밀리에 만주리(滿洲里), 빈구니랑(賓久尼耶), 하얼빈(哈爾濱), 심양(瀋陽), 여대(旅大,여순과 대련), 북평(北平,북경과 천진), 상해(上海) 등 지역에 사무관(事物官)을 파견하여 한인의 사상 동태를 조사하게 하고 한인에게 무고한 죄를 씌우거나 일의 대소를 상관없이 조그만 단서라도 잡으면 한인을 사형에 처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1928년 일제는 100만원의 거액을 투자하여 한국 국내에 1000여 개의 감방을 증설하여 그들이 말하는 "사상문제자"들을 감금시키려 하였습니다. 이토록 사리에 어두운 일제는 이렇게 한인을 감방에 가둠으로 인해 한인의 민족 정신이 나날이 강성해 짐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C. 언론 집회(集會), 결사(結社), 출판에 대한 억압.
언론방면: 한국내 한문(韓文)출판물 발행은 일제의 억압으로 전부 중단되었습니다.집회 및 결사 방면: 한국 국내의 노동자, 농민, 청년 등 3개 동맹과 신한회(新韓會)등은 일본 법령의 결사로 되었지만 창립 후, 5, 6년간 회의를 개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소년동맹, 초등학생을 위해 조직한 전국(全國)의 전문단체(轉團)들도 일본의 억압하에 회의를 개최할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친목집회및 송별활동도 금지되었습니다. 출판방면: 한문 출판물 발행이 전부 중단되었을 뿐만 아니라,한국이 일본과 중국에서 출판한 서적을 수입하는 것도 금지하였습니다.
한국국민이 일본의 정치적 압박에 못 이겨 일제와 타협(妥協)할 것이라 생각합십니까? 아닙니다. 물리학 중, ′압력이 크면 클수록 저항력도 그에 따라 커진다′라는 말이 있듯이 일제가 폭력으로 한인을 압박하면 할수록 한인의 반항은 점점 커질 것입니다. 한인의 민족정신은 적들의 그 어떤 무기, 법령으로도 타파할 수 없습니다.
다. 정치적 균등에 대한 요구
한국이 일본에 의해 억압으로 합병(合併)하기 이전이나 합병(合併) 이후, 한국의 정치상 모두 불균등 현상이 존재합니다. 정치상 불균등 현상이 나타남에 따라 국민들은 정치적 불균등 현상에 대해 요구를 제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광복 이후,불균등 현상이 지속될 경우, 또 다른 혁명운동이 벌어질 것입니다. 때문에 한국의 정치적 균등화 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따라서 정치적 균등화를 구현하려면 다음 3가지를 만족시켜야 합니다.
가.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을 설립하고 당의 강령 중, ′대한민국을 설립한다.′는 내용을 포함해야 합니다. 한국이 일본과 합병(合併)하기 이전, 한국은 군주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존의 군주제도를 회복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설립하는 것입니까? 아래 4개 이유로 이 문제에 해답하겠습니다. 첫째, 민주공화(民主民主共和) 는 현재 국제상 성행하는 정치제도입니다. 우리는 세계의 조류(潮流)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부득불 민주공화(民主民主共和)제도를 실시해야 합니다. 둘째, 민주공화 제도는 균등화 원칙을 구현할 수 있는 제일 적합한 정치 제도입니다.민주공화(民主民主共和) 제도도 자체의 부족함이 있지만 균등화를 구현할 수 있는 이 한가지 조건은 모든 정치학자(모든 당파)들이 공인한 정치 제도입니다. 셋째. 민주공화(民主民主共和)는 모든 정치제도의 귀추(歸趨)입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민주공화 제도의 단점을 얘기하고 또한 국제상 독재제도가 성행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민주정치만이 영구성을 구비하고 기타 제도는 과도기적 성질을 띤 제도일 뿐입니다. 넷째, 한국 국민은 과거에 그랬듯이 현재에도 평등한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균등화를 구현할 수 있는 민주공화제도를 절실히 희망하고 있습니다.
나.보통선거의 실시
일부 정치 학자들은 선거는 권리가 아니라 일종의 직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회 환경에 따라 특별한 이해(利害)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 사회현상입니다.이러한 이해관계가 점차 개인의 특별한 정치 견해(見解)로 발전하게 되기 때문에 정치적 권리를 일부 사람에게 부여할 경우, 이 일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정확하다고 판단하는 견해에 따라 모든 사항을 해결할 것입니다. 이들이 정확하다고 판단하는 견해는 단지 그들에게만 유익한 견해일 뿐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민주(民主)정책을 실시하고 인민은 민주정책하에 의원(議員)과 관리(官吏)를 뽑아야 합니다. 인민이 의원과 관리를 선거함은 이들로 하여금 인민의 의견을 대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것입니다. 때문에 보통선거는 인민의 권리일 뿐만 아니라 원칙상, 전국 인민으로 하여금 보통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평등한 권리를 향수하게 하는 제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나라에 대해 말하자면, 훌륭한 의원을 선거해야만 나라에 유익하지만 인민이 의원을 선거할 경우,나라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추측하였습니다. 첫째, 보통선거에 참여할 인민은 적당한 교육을 받아야만 국가에 유익한 의원을 선거할 수 있습니다. 둘째, 뇌물을 주고 받는 현상을 방지하려면 보통선거에 참여할 인민은 반드시 경제적으로 독립된 공민이어야 합니다. 셋째, 보통선거를 실시할 때, 참여자들이 보통선거를 무성의하게 대하거나 책임을 다하지 않는 현상을 피하려면 보통선거에 참여하는 인민과 국가 정무(政務) 사이는 이해(利害)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상술된 3가지 전제조건은 자산계급만이 구비하였기 때문에 자산계급 자들은 보통선거권은 반드시 납세 혹은 소유한 재산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제의하였습니다. 이 견해는 간단히 보기에는 도리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이건 인민이 교육을 받지 못해 무식하다는 표현입니다. 국가에서 의무교육을 실시할 경우, 국민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교육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은 금전의 유혹으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의원을 위해 투표할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거짓 투표는 참여자의 인원수와 관련되기 때문에 참여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민심을 사기 어려운 것입니다. 국제적으로 타국의 사례로 증명할 수 있듯이 보통선거 제도를 실시할 경우 민심을 사들이는 우환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민이 최선을 다해 보통선거 제도를 실시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국민이 받은 교육 정도에 따라 판단해야 합니다. 국민에 대한 교육이 나날이 진보함에 따라 민중의 정치적 지식도 동시에 제고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단지 보통선거 제도를 실시하는 국가의 기권 비율이 증가되지 않음을 확인하면 될 것입니다. 재산을 기준으로 선거 권리를 결정함은 부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민주 정치의 이상과 균등화원칙을 구현하려면 무조건 보통선거 제도를 실시해야 합니다. 소련은 선거 권리를 노동계급 자들에만 한하여 균등화 원칙을 위반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선거권리를 임의의 한 계급에만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국민의 기타 기본 권리
상술된 국민의 정치참여권리(선거권(選舉權), 피선거권(被選舉權)과 복관권(服官權)이외, 균등한 생활 원칙에 따라 국민은 다음과 같은 기본 권리를 획득해야 합니다:
A. 평등권(平等權)
평등권이란 국민이 국가의 평등한 법적 대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 누구도 법적 권한을 독차지 하거나 법적 의무를 피할 수 없습니다. 즉 모든 국민은 법적 권한을 독차지 하고 법적 의무를 피할 수 있는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국민의 평등권은 (1)종족 평등 (2)계급 평등 (3)남녀 평등 등으로 세부적으로 나누어 집니다.
B. 자유권(自由權)
자유권이란 국민이 소극적인 지위를 차지하지만 국가의 통치를 받지 않음을 말합니다. 국민의 자유권은 (1)인신(人身)의 자유 (2)사상활동의 자유 (3)경제활동의 자유 (4)단체(團體)생활의 자유 등으로 세부적으로 나누어 집니다.
아래 위 4가지 자유를 또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인신(人身)의 자유 - 신체적 자유, 거주 자유 및 천도(遷徒) 자유
사상활동의 자유 - 신앙 자유, 사상(思想) 자유
경제활동의 자유 - 모든 권한 보호, 영업(營業) 자유, 계약 자유
단체생활의 자유- 기밀 통신 자유, 집회(集會) 자유, 결사(結社)자유
상술된 자유 항목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그에 대한 특별한 제한도 없습니다. 어떤 자유이든지 막론하고 해당 자유가 민속(民俗) 발전에 해롭고 나쁜 효과를 얻거나 치안(治安)을 방해하고 공공 이익에 영향을 주는 등등 균등 원칙을 위반할 경우, 국가에서는 간섭하여 처리할 수 있습니다.
C. 수익권(受益權)
수익권은 국민이 적극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국가로 하여금 통치권을 행사하게 하여 일정한 이익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수익권을 다음과 같이 세별할 수 있습니다.즉 1)소원권(訴願權), 2)소송권(訴訟權), 3)청원권(請願權), 4)교육권, 5) 경제권
2) 경제적 균등화
(1) 한국의 사회 배경
A. 토지(土地) 국유화의 역사 및 전통
신라(新羅)로부터 고려(高麗)의 전성시기까지 토지는 전부 국가의 소유이고 당시에는 토지분배도를 실시하였습니다. 경종(景宗)이래 공음전시과 [功蔭田柴科-국가에 대하여 특별한 공을 세운 공로자에게 전시(田柴)를 준 제도], 주현관역(州縣館驛)의 공해전(公解田), 국자감(國子監)의 학전(學田), 제위군(諸衛軍)의 공전(公田), 양반공음전시법(兩班功蔭田柴法), 상.중.하 토품전제(土品田制) , 둔전제(屯田制), 등과자(登科者)의 급전제(給田制),관둔전(官屯田)등 제도를 실시하였고. 이러한 제도는 토지의 손익관계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의명(毅明)시기 권간집병(權姦執柄)제도가 폐기되기 시작하였고 고려말기에 이르러, 이성계(李成桂), 조준趙浚)등은 전시(田柴)제도를 회복하였습니다.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등은 상소(上疏) 중 토지개혁방안을 제출하였으며 당시 토지제도를 모순과 폐단을 지적하며 토지제도의 개혁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던 1391년 조정(朝廷)에서는 다음과 같은 급전법(給田法)을 규정하였습니다:
′문종(文宗) 시기에 규정한 경기주군(京畿州郡)을 좌.우 도(道)로 하고 1품(品)으로부터 9품까지의 산직(散職)을 18 과(科)로 구분한다. 경기6도(京畿六道)의 전지(田地)는 전부 현지답사하여 계산한다. 경기도의 실전(實田) 13만 1750결(結)(1결은 중국의 8묘에 해당함), 황원전(荒遠田) 8387결, 경기 6도의 실전 (實田) 49만 1342결, 황원전(荒遠田)16만 6643결로 통계 및 작정(作丁)하였습니다. 작정한 번호를 서적에 기재하고 공사(公私) 전적(田籍)을 몰수한 후 점검하여 진위(真僞)를 검사한다. 시산(時散)은 막론하고 경성(京城)에 거주하며 왕실을 시위하는 관인은 전부 18 과(科)의 기준으로 각각 전지(田地)를 배분하였습니다.
제1과(科): 내부의 대군(大君)혹은 그들의 시중은 115결, 17과(科) 구품(品)은 15결, 18과 권무(權務) 산직(散職)은 10결 배분한다. 따라서 외방(外方)에는 군전(軍田)을 배분하여 군사력을 유지하게 한다. 동서양계(東西兩界)에는 군수를 충당하기 위해 경기6도의 백성과 관리는 자품(資品)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본래의 소유지의 다수에 따라 10결 혹은 5결의 군전(軍田)을 받는다. 공사천구(公私賤口), 공(工), 상(商), 매복(賣卜), 맹인, 무격(巫覡),매춘부, 승려와 여승에게는 전지(田地)를 배분하지 않는다. 전지(田地)를 받은 자가 죽으면 그의 아내와 자식 혹은 수신자(守信者)가 물려받고 수신자가 없을 경우, 절반의 전지(田地)를 이어 받을 수 있으며 수신자가 아닌 상황은 본 내용 중에 포함되지 않는다. 공사전조(公私田租)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전 1결에 현미 30두; 한전 1결에 잡곡 30두. 이외 횡렴(橫斂)을 도둑 행위로 간주한다. 그리고 왕릉, 창고, 관사공해전(官私公廨提田)과 공신전(功臣田)외, 기타 전지(田地) 소유자는 수전 1결에 백미 2두, 한전 1결에 콩 2두를 세금으로 납부해야 한다.′(동사강목(東史綱目)참고.
나라를 세운 후, 이성계(李成桂)는 이 규정을 실시하였지만 점차 이를 소홀히 하게 되었으며 세기 말에 이르러 겸병(兼併), 강탈, 복세(複稅), 사유제(私有制) 등이 성행하였습니다.
상술된 내용으로 보아, 토지 국유제(國有制)는 역사상 한국의 전통적 정책이고 이씨 조선시대 이후, 국유제도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유제(私有制)는 근대에 시작된 것으로서 튼튼한 기초가 없습니다.
B. 이민족 통치하의 경제적 착취
일본이 한국을 병탄한 후, 토지를 합병하려고 애썼습니다. 일본 여당과 야당은 충분한 경제력과 잔혹한 정치력을 바탕으로 한국 국내에 동산농장(東山農場), 불이농장(不二農場), 조선흥업(興業)회사, 조선실업(實業)주식회사, 총정농장(村井農場), 세천농장(細川農場), 웅본농장(熊本農場), 대교농장(大橋農場), 다목농장(多木農場), 우근상사주식회사(右近商事會社), 겸전상산주식회사(鐮田商產會社), 덕전농장(德田農場), 타가세주식회사(高瀨會社), 이시카와현농업주식회사(石川縣農業會社),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會社)등 대규모의 농장을 설립하였습니다. 현재 70%의 한인은 자기들의 토지를 일본인에게 빼앗기고 각 대도시(大都市)의 토지 소유권을 일제에게 빼앗긴 한인은 이미 70%를 초과하였습니다. 일제에게 빼앗긴 토지는 대부분 옥토임으로 가격으로 계산해 보면 일제가 차지한 토지의 가격은 한국 총 토지 가격의 90%이상을 차지합니다.
1932년의 통계 내용에 따르면, 한국의 각 생산업체의 총 자본은 3억 7천만 좌우이고, 이중 한인의 자본금이 6, 7%를 차지합니다. 한일합작업체의 자본금 중, 한인이 6, 7%, 외국인이 1%를 차지하고 나머지 85% 좌우의 자본금은 모두 일제가 차지하였습니다.
상술된 내용은 10여 년 전에 통계한 것이지만 일본이 합병시킨 토지와 생산업체를 포함할 경우, 위 수치를 훨씬 초과합니다.
(2) 경제 균등화에 대한 절실한 요구
A.토지 국유화(國有化)
현재, 그 어느 나라에서도 토지 국유화(國有化) 정책을 실시하려 하지 않습니다. 소련이 이전에 국유화 정책을 표방하려 하였지만 그건 단지 표방일 뿐 철저히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일반 농민은 오직 작은 개인 논을 소유하였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아래 설명할 한국의 특별한 상황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국유화 정책을 실시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첫째, 한국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토지 사유화는 근대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고 토지 국유화는 매우 정상적인 현상입니다. 위에서도 이미 얘기했듯이 한국국민은 심리적으로나 습관적으로 토지 국유제(國有制)를 쉽게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둘째, 일본이 한국을 병탄한 후, 한국 토지의 70% 를 합병시켰습니다. 광복후 이 부분의 토지를 되찾은 후, 이를 사유 재산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균등화 원칙에 따라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고 합리적으로 배분함으로써 불균등 현상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문제를 피해야 합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바, 타국에서 토지국유제를 실시하지 않는 것은 원칙상의 문제가 아니라 각 나라의 사회환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토지 문제를 놓고 보면 한국은 위에 설명한 여러 가지 조건을 구비하였기 때문에 토지 국유제를 정확히 실시할 수 있습니다.
B.대 생산업체 국유화
대 생산 업체를 국가가 소유하지 않으면 기타 선진 공업국가와 경쟁할 수 없기 때문에 대 생산업체 국유화를 실시하는 것은 국가가 낙후한 업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 새로운 생산방법을 적용할 때, 이미 국영(國營)의 발전추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한국이 토지 국유제도를 실시함은 이 외에 다음과 같은 특별 사유가 있습니다. 첫째, 대생산 업체를 개인이 소유할 경우, 빈부 차이가 점차 커지게 됨으로 사회적 혁명을 초래하고 국가에 큰 우환을 가져오게 됨으로 토지 국유제(國有制)를 실시해야 만이 경제적 균등화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둘째, 위에서 이미 얘기했듯이, 한국의 85%이상의 자금은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광복이후 우리는 반드시 이 부분의 자금과 토지를 되찾고, 국가에서 이를 직접 관리해야 합니다. 개인이 이 부분을 소유할 경우, 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대생산 업체를 되찾은 후, 반드시 국가에서 이를 관리해야 합니다. 이는 균등화 원칙에 부합될 뿐만 아니라, 이는 또한 한국의 특별한 경제 발전의 수요이기도 합니다.
3) 교육적 균등화
(1) 한국의 사회배경
가. 역사상 한국의 불평등한 교육권리
취학 연령의 어린이에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현대 문화 국가의 통칙(通則)입니다. 그러나 역사상, 교육방면에서 한국국민의 권리는 매우 불평등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고려 인종원년(仁宗元年)(서기 1123년)에 학교 교육 제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었습니다:
-국자감(國子監) 학생: 입학 자격자- 문무관 (文武官) 3품 이상의 자손.
모집 인원수: 300명
- 사문(四門) 학생: 입학 자격자- 문무관 (文武官) 7품 이상의 자손.
모집 인원수: 300명
-대학생: 입학 자격자- 문무관 (文武官) 5품 이상의 자손.
모집 인원수: 300명
이씨(李氏) 조선 이후, 교육 제도가 변경되었지만 일반 국민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당시 교육 과목은 중국의 경서(經書)와 문자학(文字學)이였습니다. 이런 교육 제도로는 과학이 부단히 발전하고 있는 세계 강대국 중의 한자리를 차지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조국을 지키기 조차 힘든 것입니다.
나. 이민족 통치하의 교육 착취
일본이 한국을 병탄한 후, 교육상 한국의 교제는 전부 일본이 통제하였습니다. 이 외에, 한국은 아래와 같은 일본은 교육적 착취를 받아 왔습니다.
A.교육 행정권(行政權) 착취
한국의 사립 및 공립 학교의 교장, 중요한 직무 혹은 교사 직은 반드시 일본인이 책임져야 하고 중등 이상의 학교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했습니다. 1928년의 통계 내용에 따르면, 1419개의 초등학교 교사 중, 일본인 총 2330명, 한국인 595명; 24개의 고등학교 교사 중, 일본인 317명, 한국인 178명; 10개 전문 학교의 교사 중,일본인 129명, 한국인이 65명뿐이었습니다.
B.입학 시, 한인의 어려움.
한인은 나라를 잃은 고통뿐만 아니라 일본인이 한인에 대한 교육제한으로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일제는 한인이 일반 교육을 받는 권리를 제한하였습니다. 첫째, 학생의 모집정원이 너무 적어 기존의 한국학교에서는 취학 연령의 어린이를 전부 받아 드릴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경남 1도에는 총 26만(1929년 통계) 여명의 취학 연령의 어린이들이 있지만 경남 1도 기존 학교의 최대 수용 수는 74760명입니다.즉 이 지역의 18만 5000 명의 학생이 입학하여 교육을 받을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그렇다면 전국 12도 중, 학업을 중단해야 할 학생수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둘째, 재산제한. 한국 경성(京城)의 제1, 제2 고등학교(즉 중학교)와 여고의 교장(일본인)는 입학자는 반드시 200원 이상의 연 세금을 지급해야 하며 지급하지 못할 경우, 그 학생의 시험 자격을 취소함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학생이 학교의 잡다한 부과금을 체납함을 핑계로 학생을 쫓아내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의 어린이는 교육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셋째, 사상제한. 이전에 한국혁명운동에 참여하거나 혹은 민족주의 정신을 제창한 적 있는 한인의 자식은 입학이 불가능합니다. 넷째, 시험제한. 전문학교에서는 일본인이 이해하기 쉽지만 한인으로서는 도무지 해답하기 어려운 내용만 시험 문제로 하여 한인의 민족정신을 소멸시키고 한인의 입학인원수를 감소시켰습니다. 다섯째, 관비(官費) 제한.전문학교에서 졸업후, 관비유학을 갈 기회가 있지만 관비유학을 할 수 있는 학생 중, 95%는 일본인입니다. 한인은 자비로 유학할 수 있지만 일제는 여권을 발급하지 않는 등등 행위로 한인의 유학을 제한하였습니다.
C.졸업 후, 한인 학생의 어려움.
1927년도 53201명의 공립 학교 한인 졸업자 중, 20% 은 진학하고, 8%정도의 학생은 취직하였으며 나머지 70%이상의 졸업자는 기로에서 방황하였습니다. 각종 좋은 취직 자리는 일본인들이 차지하고 있어 전문학교 이외의 기타 학교 졸업자들도 졸업후 적당한 일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일제의 통치하에 한인은 목숨만 살아 있을 뿐 교육은 받을 수 없었습니다. 운이 좋아 교육을 받게 되어도 졸업 후 취직할 수 없었습니다. 이로 보아 한국의 교육은 불평등 문제가 심각하였습니다.
(2) 교육 균등화에 대한 절실한 요구
국민의 교육수준은 국가와 국민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한 나라의 불건전(不健全)한 교육은 그 나라의 정치를 부패하게 하고 그 국가의 민족을 멸망시킵니다. 또한 국민이 정확한 교육을 받지 못할 경우, 국민들 스스로 자립할 수 없기 때문에 끝내는 국가와 전 민족에게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많은 문명 국가들은 이미 이를 깊이 인식하고 초급 교육을 국민의 의무교육으로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외, 중급 이상의 교육에 대해, 국가에서는 재능이 있는 학생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제공해 줍니다.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기 전, 한국은 국민의 교육을 대중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일본이 한국을 병탄시킨 후, 한국은 일본의 통치하에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조국을 되찾을 후,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결함을 시정하며 균등화 원칙에 따라 국비로 의무교육을 실시해야 합니다.
4)정치, 경제, 교육 균등화의 연관성
정치 균등화, 경제 균등화, 교육 균등화 등 3가지 균등화는 서로 독립된 내용인 것 같지만 사실상 이들은 서로 연관되어 이 중에 한가지만 없어도 기타 두 가지 균등화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첫째, 정치 균등화는 경제 균등화와 교육 균등화를 바탕으로 구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경제적으로 균등하지 않으면 정치도 허위적으로 평등한 것입니다. 경제 조건이 우월한 자들은 자기의 경제적 우세를 이용하여 정치적 우세를 차지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자들은 경제방면에서 다른 사람에 비해 뒤떨어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다른 사람의 압박을 받게 됩니다. 미국을 예로 들어 얘기해 보겠습니다. 물론 미국 공민은 정치상 평등하지만 그러나 미국의 정치는 자본가들이 통치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 공민은 정치적으로 자본가와 맞설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교육 균등화를 구현할 수 없으면 정치 균등화 구현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교육 수준이 낮은 국민은 안목이 짧고 견문이 좁을 뿐만 아니라 능력이 없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평등한 지위를 차지하더라도 견문이 넓고 지식이 있는 자들과 정치적 경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치 균등화는 반드시 경제 및 교육 균등화를 바탕으로 구현해야 한다고 합니다.
둘째, 경제 균등화는 정치 균등화와 교육 균등화를 바탕으로 구현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 평등하지 못할 경우, 정치적 우세를 차지한 자들은 자기의 직권을 남용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기 때문에 경제적 불평등 현상을 초래하게 됩니다. 교육 수준이 낮은 국민이 견문이 넓은 지식인들과 경제적으로 경쟁할 수 없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수준이 낮은 국민이 운이 좋아 많은 재산을 얻게 되더라고 자기가 얻은 이 재산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지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경제 균등화는 반드시 정치 균등화와 교육 균등화를 바탕으로 구현해야합니다.
셋째, 교육 균등화는 정치 균등화와 경제 균등화를 바탕으로 구현해야 합니다. 교육방면의 균등화를 구현하였지만 국가의 정치가 불균등할 경우, 정치적 우세를 차지한 자들은 자기의 정치적 직권을 남용하여 교육방면의 불균등 현상을 초래하게 됩니다. 따라서 경제적으로 불평등할 경우, 재산이 많은 자들은 고급 교육을 받을 수 있지만 가난한 자들은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힘드니 국가에서 평등한 교육 제도를 실시하여도 교육을 받을 시간이 없습니다. 때문에 교육의 균등화는 반드시 정치의 균등화와 경제의 균등화를 바탕으로 구현해야합니다.

한일 2000년 전쟁역사 요약

서 문

안훈(安勳) 저술 

인류사회가 발전하려면 전쟁은 필연적인 것이고 이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에 국경선이 서로 이어지고 화물이 서로 오가면 모순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모순을 해결하려면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은 무기로 마주하게 됨으로 결국은 전쟁을 초래하게 되고 전쟁에서의 승자와 패자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전쟁이 전쟁 자체의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인가? 해답은 그 전쟁 자체에 맡겨야 할 것 같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난다." 란 말이 있듯이, 전쟁의 나쁜 씨앗을 뿌리면 꼭 나쁜 결과를 보게 됨을 우리는 역사로 증명할 수 있다. 적들이 무력을 남용하여 전쟁을 하더라도 한 시기는 요행수로 자기들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지만 이런 행운이 계속 따르는 것은 아니다.
왜구는 맨 처음 아주 작은 섬에서 살던 야만스러운 민족으로서 역사도 매우 짧다. 그들이 외쳐대는 "대조(大照), 신무(神武)" 등 고대역사는 황당무계하고 전부 날조한 것이다. 역사적 문제는 우리가 더 이상 논의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유사 이래, 일본은 정치, 문화, 경제 등 여러 방면에서 줄곧 한국의 도움을 받아 왔었지만 결국은 서로 반목하게 되었고 이런 관계를 1년간 유지하였다. 이 기간동안 일제는 소란을 피우고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이와 같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배은망덕하다" 란 속담속 일들이 인간 세상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깨뜨리고 서로 도우며 발전하는 행복한 인류사회를 타파하려고 애썼다. 일제의 이런 죄악은 극단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 상당한 실패를 감수해야 했다. 당시 일본 국내의 모순은 나날이 커져 갔고, 경제의 명맥(命脈)은 완전히 끊어졌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죄를 지으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일제는 결국 자기가 판 무덤에 빠지게 되었다.
나는 한국과 일본간의 전쟁사를 편집하여 내 일상중에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참고로 삼기도 하고 적군을 물리치고 조국을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동지들에게도 내가 편집한 책을 제공하여 앞 사람들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본인이 여기 저기 자주 떠돌아 다니다 보니 참고 가치가 있는 서적이 한두권 있긴 하지만 방랑 생활로 인해 서적을 보관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복잡한 상황으로 나로 집필에 전념할 수 없었다. 여유를 가질 시간도 없었고 또 지난날 역사책을 통해 얻은 지식들도 지금은 절반쯤 다 잊었다. 이런 정신으로 어찌 숙원을 이룰 수 있는가?
필요 서류도 부족하고 기억에 남은 내용도 별로 없으며 시간도 오래 지연된 현재, 게다가 혁명운동이 점차 많아지고 있어 나의 숙원을 이루기는 힘들다고 여겨지지만 우선은 현재 가지고 있는 문헌과 기억중의 내용을 모아 책을 편집하려고 한다. 책 중에 언급되지 못한 내용은, 이후 기회를 보면서 보충하고 정리하도록 하겠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 부분에 대해 많이 이해해 주시고 또 많이 가르쳐 주시길 바란다.

제1장 부여 및 열국(列國)시대의 일제

제1절 최초의 왜구침입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의 동남지역에 많았다)
건국기원 2212년 (서기 전122년, 즉 부여 시대), 진한의 14개 집단 중의 황산(荒山)-현 동래(東萊), 골벌(骨伐)-현 영천(永川), 우시산(于屍山)- 현 녕해(寧海)등 3국과 변한의 14개 집단 중의 가라(加羅)-현 김해(金海), 아라(阿羅)-현 함안(鹹安), 골포(骨浦)-현 마산(馬山), 칠포(柒浦)-현 칠원(柒原), 사물(史勿)-현 사천(泗川), 초팔(草八)-현 초계(草溪),굴자(屈自) 와 비지(比只)-현 창원(昌原), 임나(任那)-현 고령(高靈), 보라(保羅)- 현 곤양(昆陽) 부근, 고사포(古史浦)- 현 진주(晉州) 부근, 등 11개 국가에는 일년 내내 왜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최초 일본인은 구주(九州) 및 대마도(對馬島) 지역에서 흩어 살 던 웅습족(熊襲族)이다. 부락(部落) 생활 시대, 당시 부락의 경제가 어려움으로 일본인들은 바다에 나가 강탈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점차 왜구의 역사적인 침략습성이 되었다. 그리하여 기타 작은 부락에서는 연합하여 해안선을 따라 전화(烽火)를 설치하고 항행하는 돛단배들은 전부 붉은 깃발을 달게 하여 적군이 오면 붉은 깃발로 신호를 알려 다같이 적군을 소멸하게 하였다.

제2절 왜구가 패할 것을 두려워해 싸우지 않고 스스로 물러나다.

건국기원 2284년(서기 전 50년 즉 열국 시대 신라 태조(新羅太祖-8년), 신라가 건국된지 얼마되지 않아서 박혁거세(朴赫居世)는 곱량(及梁), 마량(沙梁), 본피(本彼), 모량(漸梁,牟梁), 한기(漢歧), 습비(習彼)등 6부의 추대로 신라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내정을 정돈하고 외부 방어를 강화함으로 왕조의 기존 면모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당시 사람들은 혁거세와 왕후 알영(閼英)을 두 성인이라 불렀다. 인근 지역의 기타 작은 부락의 백성들도 소문을 듣고 신라에 귀속하였다. 당시 적군은 황산과 골포(骨浦) 등 지역을 돌아 변경으로부터 침략하려 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방위 시설은 기타 작은 부락들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엄밀하였고 게다가 두 성인에 관한 많은 소문을 들고 두려워해 침략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스스로 물러났다.

제3절 왜구의 계속되는 신라침입, 참패

건국기원 2346년[서기 13년, 즉 신라 남해왕(南解王) 11년], 왜구는 100여 척의 배를 파견하여 연해 지역에 거주한 백성들의 물건을 강탈하였다. 이를 알게 된 남해왕은 6부의 정예부대를 파견하여 왜구를 소탕하였다.…(원본판독불가)…

제4절 아찬(阿餐) 길문(吉門)의 목출도(木出島) 전쟁

건국기원 238년(서기 49년, 즉 신라 탈해왕(脫解王) 7년), 천여명의 왜구는 목출도(木出島) 에 침입하여 불을 지르고 약탈하였다. 그리하여 탈해왕은 각간(당시 관명의 일종) 우도(羽島)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우도는 전쟁중에 희생되었다. 탈해왕은 계속하여 아찬(阿餐, 아찬은 제6관등으로 6등품(六等品)이 승진할 수 있는 최고의 품계임) 길문(吉門)을 파견하여 한기(漢歧) 와 습비(習比)의 두 부(部)의 5000명 군대를 거느리고 적들에 대항하게 하였다.

제5절 직선(直宣)의 왜 토벌 승리 및 아달라왕(阿達羅王)의 적군 방비

건국기원 2439년(서기 105년, 즉 신라 지마왕(祇摩王) 10년) 하사월(夏4月)(구력,舊曆)에, 왜구의 50여 척의 배는 동해[東海-현 영일만(迎日灣]에 침입하였다. 당시 아달라왕(阿達羅王)은 봉산(烽山) 성주(城主)인 직선(直宣)을 파견하여 3000여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적군을 격퇴시켰다. 그 후로, 연해 지역의 방어 시설은 나날이 엄밀해 졌다. 아달라왕(阿達羅王) 시기에 이르러, 왕은 병사 준비에 전념하고 봄, 가을에는 친히 각 지역을 돌아 다니면서 방어 시설을 설치하고 병사들을 위문하였다.

제6절 이벌찬(伊伐餐) 이음(利音)이 승세를 타고 왜구의 소굴을 향해 진군하여 토벌

건국기원 2520년(서기 186년, 즉 신라 내해왕(奈解王) 13년) 4월(구력-舊曆), 내해왕은 이벌찬(伊伐餐,신라시대 관직명) 이음(利音)을 파견하여 병사 6000명을 거느리고 왜구를 토벌하게 한 결과,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이음은 승세를 타고 대마도(對馬島)와 모지(門司)를 향해 진공하였다. 적의 우두머리 나가히데(長秀)는 약탈한 물건을 되돌리고 구슬 등 토산품을 바친 후, 투항을 받아주고 군대를 퇴각할 것을 구걸하였다. 그 후 왜구는 잠잠해 졌다.

제7절 각간(角干,신라시대 관직명) 우로(于老)의 해상(海上) 적군 전멸

건국기원 2545년(서기 211년, 즉 신라 조분왕(助賁王)3년)~ 2546년 2년간, 왜구의 방해로 거의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전에 왜구는 금성[金城-현 경산(慶山]에서 또 소란을 피웠다. 당시, 조분왕(助賁王)은 6부의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친히 토벌한 결과, 적군은 진영이 완전히 무너져 뿔뿔이 도망갔다. 이어 조분왕(助賁王)은 경기병(輕騎) 2000명을 거느리고 샛길을 따라 질주하여 적들의 귀로를 차단시키고 적들을 소멸하였다. 같은 해 5월, 왜구는 또 다시 대대적으로 침입하였다. 위급 통지를 받은 조분왕(助賁王)은 각간(角干,신라시대 관직명) 우로(于老,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장군임)를 파견하여 적들에 맞서 싸우게 하였다. 6월, 우로는 사도(沙道) 에서 왜구와 밤새도록 이어진 치열한 전투끝에 적군을 소멸하였다.이틀 후, 나머지 적군들을 작은 섬으로 몰아 넣은 후, 불을 질러 적군의 배를 전부 태워 버렸다. 당시 적들의 비명소리가 바다에 울러 퍼졌고 절반 이상은 왜구는 잇달아 바다에 뛰어든 채 숨지고 나머지 적군은 불에 타 죽었다. 이 전투는 신라 해상 전사(戰史)중 최고의 전적이었다.

제8절 분노한 왜군의 침입과 우로(于老). 우로(于老), 뜻을 중히 여기고 몸을 아끼지 않다.

건국기원 2551년(서기 217년, 즉 신라 조분왕(助賁王) 9년), 왜구의 사신 갈나고(葛那古)가 조정에 온 후, 조분왕은 일본인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우로를 파견하여 손님을 관대(館待)하게 하였다. 우로는 그 자리에서 농담으로 "조만간 너희 왕을 소금 굽는 노비로 삼고 너희 왕비는 부엌데기로 쓰겠다" 등 희롱의 말을 건넸다. 예전의 전투 시, 우로에게 당한 일본인들은 더는 참을 수 없어 당월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어 신라를 치게 하였다. 조분왕은 적들에 대항하였고 전국이 소란스러웠다. 자신의 농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자 말 실수를 깨닫게 된 우로는 "이 환난은 내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 데서 생긴 것이니, 내가 나가서 대하겠다" ,"적군이 증오하는 건 나 하나 뿐이니 나를 죽이면 싸움을 멈출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혼자 적군의 진영을 찾아 갔다. 왜구는 끝내 우로를 불태워 죽이고 병사를 철퇴하였다.

제9절 유례왕(儒禮王)이 돗을 올려 동쪽을 정벌하다.

신라 역대 왕 중, 왜구의 그 어떤 소동도 유례왕 때를 당할 수 없었다. 유례왕(儒禮王)은 대군을 거느리고 왜구를 토벌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왜구는 더 이상 신라를 공격하지 못했다. 그러던 건국기원 2597년[서기 297년, 즉 유례왕(儒禮王) 4년], 왜구는 일례군(一禮郡)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후, 1000여 명의 군민(軍民)을 빼앗아 갔었다. 5년이 지난 후, 왜구는 또 사도성(沙道城)을 점령하려고 계획하였으나 막중한 손해를 보았다. 대길찬대속(大吉餐大谷)은 기묘한 방법으로 왜구를 소탕하고 사도성(沙道城)을 탈환하였다. 이듬해, 유례왕은 성첩(城堞)을 개축하고 병사와 무기를 개선하였으면 도시 내부의 호민 80 여가를 옮겼다. 1년 후, 왜병이 장봉성(長峯城) 을 공격해 왔지만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유례왕 4년~ 11년 이 8년간,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져 백성들은 하루라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유례왕은 최선을 다하여 내수외양(內修外攘, 내치를 닦아 외적을 물리친다)을 실시하였다. 다년간 심한 타격을 받았지만 유례왕은 나날이 분발하였고 국력(國力) 또한 점점 강해졌다. 아울러 유례왕은 군함 및 병사와 무기를 확장시켜 적에 대항하려 했다. 기원 2605년 (서기 271년, 즉 신라 유례왕 12년, 왜왕 응신(應神) 26년) 춘정월 (春正月)(구력-舊曆)에 유례왕은 대신들을 불러놓고 왜구를 소멸할 대책을 토론하였다. 유례왕은 "왜구가 우리 도시를 공격하고 있어 백성들이 편안히 살수 없다. 그리하여 백제(百濟)군과 연합하여 왜구를 섬멸하여 후환을 방지할 생각이니 여러 대신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나?"고 말하였다. 왕의 측근 서불한(舒佛邯) 홍권(弘權)은 유례왕의 이런 제의에 대해 "첫째, 우리 군은 아직 수상(水上)싸움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깊은 바다에서 싸울 경우, 아마도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백제군은 잔꾀를 잘 부리고 또한 줄곧 우리 나라를 병탄하려고 하기 때문에 백제군과 연합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홍권이 얘기한 바와 같이, 백제군의 속심을 헤아릴 수 없지만 왜구와 우리 두 국가는 공존할 수 없다. 현재 병력이 충족한 기회를 잘 이용하여 왜구를 소멸할 수 없을 경우, 후환이 끝이 없을 것이다." 유례왕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춘(春)2월, 유례왕은 수군 2만6천 명과 군함 5천 척을 파견하여 대곡(大穀) 선봉부대로 하고 나머지 병사는 유례왕의 통솔하여 적을 향해 출격하였다. 전군은 구주(九州)로부터 시작하여 연해 지역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후 왜국의 가장 큰 섬을(현재의 本州)를 공격하였다.큰 전투는 명석포[明石浦- 아카마세키(赤間關) 동쪽 즉 오사카와의 거리는 100리] 에서 시작되었고 작은 승리는 너무도 많아 헤아릴 수 없다. 각 지역이 함락되기 시작하자 왜왕 응신(應神)은 비사(卑辭)와 후폐(厚幣)를 주장하고 사자를 보내어 화해할 것을 애걸하였다. 왜구는 백마(白馬)를 죽여 제사를 지내고 유례왕과 화친할 것을 알리는 북을 울렸다. 이곳에는 지금도 백마 무덤이 존재하고 있다. 토착인(土人)들은…(원본판독불가)…

제10절 노장 강세(康世)의 완화 전법으로 취득한 승리

건국기원 2655년[서기 321년, 즉 신라 흘해왕(訖解王) 37년], 변방 지역에 왜병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왜왕은 사자를 파견하여 자기 아들의 혼사를 흘해왕(訖解王)에게 제의한 적이 있다. 흘해왕(訖解王)이 청혼을 거절하였고 이후 두 나라간 원한이 쌓이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기1년전, 왜왕은 국서(國書)를 보내 흘해왕(訖解王)과 관계를 끊는다고 통보해왔다. 그리고 대적으로 흘해왕(訖解王)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라가 장기간 태평상태에 있어서 변방의 방위가 허술했던 탓에 흘해왕(訖解王) 막중한 손해를 보게 되었고 이로 인해 분노하였다. 흘해왕(訖解王)은 친히 병사를 거느리고 왜구를 소멸하려고 하였다. 당시 노장 강세(康世)는 흘해왕에게 "현재 왜병들이 사기가 올라 있기 때문에 잠시 전면적인 충돌을 피하시고 왜병의 세력이 느슨해 진 후, 기병을 파견하여 왜병을 공격해야 합니다." 라고 간언하였고 흘해왕은 그의 의견을 받아 들였다. 2개월도 채 안되어 왜병들은 군영내의 어떤 규율도 지키지 않게 되었고 또 재물을 마구 약탈하였다. 강세는 장성(長城) 외부의 동서 산곡에 매복하여 있다가 2000여명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갑자기 왜병 진영에 침입하여 불을 질렀다. 이 때, 적들은 혼비백산하여 장성(長城) 외부의 양곡(兩谷)에서 물러났다. 당시 무더운 여름인지라 왜병들이 옷을 벗고 잠시 나무 밑에서 휴식하는 틈을 타서 그들을 한번에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왜병은 생존할 기회마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제 11절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 과 신라왕 내물(奈勿)왕이 협력하여 거둔 3차 대승

건국기원 2663년[서기 329년, 즉 신라 내물(奈勿)왕 원년] 4월, 왜병은 대대적으로 공세를 취했다. 이 때, 내물(奈勿)왕은 잠시 수비 전법을 실시하는 한편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도움을 청했다. 광개토왕은 소식을 듣고 기마병 3000여 명을 파견하였다. 내물(奈勿)왕은 출영하여 그들을 위로하였다. 3일 후, 신라와 고구려의 연합군은 4갈래로 나누어 왜적을 격파하였고 1개월도 안되어 왜적을 거의 다 소탕했다. 기원 2671년 (서기 337년, 즉 내물왕 9년) 4월, 왜적은 또다시 사도(沙道)로부터 상륙하였다. 내물왕은 친히 병사를 지휘하고 왜적에 맞섰다.. 천여 개의 허수아비를 만들어…(원본판독불가)…에 배열하였다. 몇 개 부대는 이를 에워 싸고 징을 울리고 북을 치며 흙먼지를 날리는 등등 방법으로 가짜 병사들의 기세를 사납게 하였다. 또한…(원본판독불가)…동원(東原)에 대군을 배치하고 숲의 지세를 빌어 때를 기다리다 왜병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동원의 지세는 구불구불하고 초목이 우거진데다 지척에는 인가가 드물기 때문에 왜병은 방심하고 통과하였고 했다. 그때 갑자기 우리 병사들이 나타나 그들을 공격하자 왜병은 동쪽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곧 왜병들은 나무와 돌들로 앞길이 가로 막혀 숲속에 갇히게 되었다. 게다가 우리 병사들이 설치한 창과 칼들이 사방에서 날아들어 왜병은 두 부분으로 흩어져 앞, 뒤 병사들이 호응할 수 없게 되었다. 적들은 숲속에서 방황하다가 마침내 우리 병사들에 의해 완전히 소멸되었다.
기원 2700년 (서기 366년, 즉 내물(奈勿)왕 38년) 5월, 왜병이 관문(關門) 장성을 습격하였다. 내물왕은 관문을 닫고 진지를 고수하였다. 왜병은 성 밖에서 고함을 지르고 소란을 피웠다. 우리 병사들은 이에 격분하여 출전할 것을 내물왕에게 요청하였지만 내물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왜병들이 성밖에서 5일간 공격한 후,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한 채,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곧 깊은 밤을 틈타 도주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를 이용하여 내물왕은 친히 병사를 거느리고 독산(獨山)까지 왜병을 쫓아갔다. 독산은 기병 한 사람만이 말을 타고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길이 좁고 산길이 가파른 곳이었다. 그리고 독산에 미리 배치해둔 병사를과 앞뒤로 공격하여 왜병을 모조리 소탕할 수 있었다.

제 12절 왜병이 북쪽으로 공격 방향을 바꾼 뒤, 또 다시 패배

건국기원 2711년[서기 377년, 즉 신라 실성왕(實聖王) 4년] 4월, 왜병은 또 다시 신라를 공격하였다. 지난번 장성 관문에서의 전쟁 중, 실패한 탓으로 왜병은 남쪽 관문은 포기하고 이번에는 직접 독산(獨山)을 향해 습격하였지만 또다시 패배하였다.

제 13절 왜구와의 항전 중, 절개를 위한 박제상(朴堤上)의 죽음.

건국기원 2742년 [서기 408년, 즉 신라 눌지왕(訥祇王) 21년], 왜구의 군함은 황산 해구(荒山海口)를 공격하였고 왜병은 제멋대로 날뛰었다. 눌지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은 왜병들과의 싸움에서 패전하고 왜병에게 잡혀 볼모로 외국에 가게 되었다. 눌지왕(訥祇王)은 아우를 생각하던 나머지 화병이 나게 되었다. 눌지왕의 척신 박제상(朴堤上)이 이를 보고 너무도 안타까워 자기가 직접 일본에서 가서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하겠다고 자청하였다. 그는 미사흔(未斯欣)이 기회를 틈타 귀국할 수 있도록 대책을 세웠다. 마침내 미사흔(未斯欣)은 탈출에 성공하여 귀국하였지만 박제상(朴堤上)은 왜왕(倭主)에게 잡히게 되었다. 하지만 박제상(朴堤上)은 왜국에 굽히지 않았고 이는 왜왕을 놀라게 하였다. 왜왕은 작위와 봉록(爵祿)으로 박제상(朴堤上)을 유혹하고 투항하게 하였으나 그는 "계림(雞林-신라의 옛 이름)의 개가 될지언정, 일본의 대신은 되지 않는다. 계림의…(원본판독불가)…을 받을지언정, 일본의 작위와 봉록은 받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왜왕은 이를 듣고 대노(大怒)하여 심한 고문을 가하게 했다. 왜병은 그를 낫 위를 걷게 하고 맨 몸으로 그을린 철판 위에 눕게 하였다. 결국 백제상이 고통을 참아내며 항복하지 않자 왜왕은 그를 태워죽였다. 백제상의 아내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치술령(鵄述嶺-백제성의 고향)에 올라가 통곡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나라안에 슬퍼하지 않는 백생들이 없었다.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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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이래 중국 동북에서의 한국 혁명운동(후속), 김학규(金學奎)

1919년 기미운동(己未運動,즉 3.1운동)부터 중국 9.18사변까지

1918년 제1차 유럽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 대통령 윌슨(威爾遜)은 민족 자결론(民族自決論)을 주창했다. 베르사유(凡爾賽) 조약이 체결된 후 유럽정세에 새로운 변화가 생기자 약소민족들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이윽고 폴란드, 핀란드 및 기타 압박에 시달리던 민족들은 우후죽순(雨后春筍) 독립국가의 성립을 위해 일어났다. 한국혁명운동은 이런 유럽 국가들로부터 강한 자극을 받았고 이 때를 천재일우의 기회라 여기고 왜구의 압박과 노예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일어났다. 1919년 3월 1일, 손병희(孫秉熙) 등 33명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의로운 기치를 내걸고 일본에 대한 투쟁을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역사상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 3.1운동이다.
3.1운동의 열기는 국내에서 6개월 이상 지속되었다. 당시 무기는 없었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의 혁명정신만은 숭고하였다. 맨 손으로 적들과 맞서 싸우다 보니 국민의 희생은 피할 수 없었다. 그들 한사람 한사람의 육체적 희생은 조국을 되찾겠다는 한민족의 의지로서 온 산하에 울려퍼졌다... 잔혹한 왜병들은 국민을 살해하고 부녀를 강간하였으면 곳곳에 불을 질렀다. 수없이 많은 학교, 교회당, 가옥들이 순식간에 재 더미로 변해버렸고 왜놈들은 한국인에게 200여 종의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싸움터에서 희생된 것이 아니라 왜구의 이런 잔혹한 형벌에 숨을 거두었다. 3개월 동안 놈들에게 살해된 한국인과 당시 상황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1.피살된 한국인: 10,598명.
2.부상자: 45,163명
3.타버린 학교와 교회당: 총 49개
상술된 내용은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의 통계 내용이다. 그 후 희생된 한국인 수와 기타 파괴된 장소의 수량은 이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당시 한국인의 혁명운동 정신이 얼마나 숭고하였었는지 알 수 있고 당시 왜구가 한국인에 대한 행위가 얼마다 잔혹하였는지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이 헛되이 피를 흘린 것이 아니다. 한국혁명운동의 열사들의 피로써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다.
한국 국내의 위대한 혁명운동으로 인해 국외의 한국인들은 각기 자기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조국의 혁명운동에 호응하였다. 예를 들면, 도쿄의 한국인 유학생들은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상해의 한국인 대표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이외에 미주(美洲)의 국민회(國民會), 동지회(同志會), 아령(俄領) 국민회의(國民會議)등도 잇달아 한국의 혁명운동에 호응하였다. 이 밖에 아래에서 언급할 동북무장운동(東北武裝運動) 규모도 한국 혁명운동과 함께 확장되었다. 3.1운동은 역사상 이토록 중대한 의의를 갖고 있다.
위에서 얘기한 한족회(韓族會)는 3.1운동 이전, 한국인이 조직한 동북의 유일한 혁명단체였다. 3.1운동 발발 시, 한족회의 지위와 임무는 보다 중요해 졌다. 3.1 운동 발발 후, 한족회는 정치적 역량을 발휘해야 할 뿐만 아니라 군사 활동도 집행해야 했다. 그리하여 한족회는 혁명운동의 요구로 군사기구를 설립하고 그 기구를 대한서로군정서(大韓西路軍政署)라 명명하였다. 산하에 2개의 좌우익(聯隊)를 설치하고 좌우익 아래 또 6개 큰 부대(大部隊)를 설치하였다. 군정서의 간부는 모두 구 한 국정부군대의 고급군관 및 외국군관학교 출신이었으며 초급간부는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 단원 혹은 기타 군사학교 출신이었다. 그리고 군정서의 병사들는 전부 18~40세의 한국교민으로서 3개월 이상 실외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신흥학교(新興學校), 본교와 분교의 2000여 명 학생은 군정서의 간부후보였다. 한국교민(韓僑)이 거주하는 마을에서는 밤낮 없이 군사 교육이 실시되어서 마치 전쟁 전야와 같은 분위기와 긴장이 감돌았다.
당시 한족회와 군정서를 제외한 다른 유력단체으로 대한 독립단(大韓獨立團)이 있었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의병계(義兵系)와 유학계(儒學系)의 인사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조직의 총재 박장호(朴章浩), 부총재 백삼규(白三奎), 총단장 조맹산(趙孟散), 부단장 최영호(崔永浩), 그리고 전덕원(全德元), 오석영(吳錫英)등이 군사 관련 직무를 책임졌다. 위에서 언급한 책임자들은 전부 경험이 풍부하고 의지와 품행이 고결한 지사(志士)들 이었다. 이들은 수년간 무력운동을 중시하여 이미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왜구의 정치, 경제, 교통 등의 시설을 파괴하였다. 또한 뜻에 반대하는 자들과 적군의 매국노 등을 응징하는 등의 일련의 활동 가운데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당시 동북삼성의 동쪽 지역의 한국동포(韓僑)들은 거의 한족회에 가입하였고 전부 의무금(義務金)을 한족회에 납부하였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대한독립단은 헤어;동포들의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대한 독립단의 재정은 거의 국내의 기부금으로 해결했기 때문에 대한독립단의 재정상태는 한족회에 비해 훨씬 어려웠다. 그래서 대한독립단은 1000여 명의 청년들을 러시아인이 관리하는 만주리(滿洲里) 철로부(鐵道部)의 호로군(護路軍)으로 보내어 혁명역량을 유지하게 하고 동시에 그곳에서 군사훈련을 받게 함으로써 혁명 능력을 제고시켰다. 그 후, 그들은 전부 러시아에 가서 고려군(高麗軍)을 조직하게 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동북삼성의 동쪽 [현재의 왕청(汪), 훈춘(琿), 연길(延吉)등] 지역에서도 많은 혁명단체들이 조직되고 등 혁명운동의 점차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국민회(國民會), 광복단(光復團), 의민단(義民團), 독군부(督軍府), 정일군(征日軍) 등의 단체들이 조직되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동북삼성의 동쪽은 러시아의 변경과 가깝기 때문에 무기를 쉽게 수입할 수 있었고 러시아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생활이 비교적 부유하여 혁명운동을 비교적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 각 단체는 모두 무장한 군대를 갖고 있었다. 당시 홍범도(洪範圖) 등은 부대를 거느리고 도문강(圖們江-현 두만강) 연안의 적군의 경계선을 위협하였고 기회를 보아 적군을 습격할 준비를 하였다. 김좌진(金佐鎮) 등은 왕청현(汪清縣) 서대포(西大浦)에서 숲의 나무를 베어 100여 채의 집을 짓고 청년들을 모집하여 신흥군사학교에 보냈다. 그리고 혈기 왕성한 농촌 남성을 모집하여 군대를 조직하고 적군에 대항할 준비를 하였다. 왜군은 이에 분노하여 한국 함경도 나남(羅南)에 주둔해 있던 왜군사령부에 명령하여 국제법을 위반하며 중국의 주권을 짓밟기 시작했다. 1920년 7월, 왜군은 일개 부대를 파견하여 강을 건너 우리 독립군의 주둔지인 봉오동(鳳梧桐)을 침범하였다. 이 때, 우리 독립군의 총사령 홍범도는 이미 군대 전체를 거느리고 도문강 연안, 즉 한국 종성(鍾城)의 맞은편 기슭에서 적들을 물리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예상대로 적군은 봉오동(鳳梧桐)을 향해 진군하였고 후방의 일본군 병사들은 독립군이 사전에 준비한 구덩이에 빠졌다. 바로 이때 주위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기관총과 소총으로 적에게 일제히 사격을 가했고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적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 전투의 결과 적군은 전군이 거의 전멸되다시피 하였고 생존자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독립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거만하고 자만하는 왜군은 자기들의 실패를 기꺼이 받아 들일 수 없었다. 같은 해 10월, 적군은 또 대대적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우리 군의 김좌진(金佐鎮) 장군은 화룡(和龍), 청산(青山)에서 적에 맞서 싸웠다. 전투중 적군은 일개 사단의 군대를 동원하였지만 절반 이상이 우리 군에 소멸되었다. 전투에서 퇴패한 적군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현지 동포들에게 풀었다. 적군은 용정촌(龍井村) 및 기타 부락에서 생활하고 있는 동포들에게 잔혹한 대학살을 저질렀다. 당시 적군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한국인만 보이면 살해하였다. 따라서 한국인이 살고 있는 부락에 불을 지르고 한국인의 물건을 빼앗는 등의 행위를 일삼았고 부유하던 부락들은 결국 전부 초토화 되었다. 당시 적군이 불 지른 가옥은 2000여채, 적군이 살해한 한국인은 7000여 명에 달한다. 이것이 바로 동만(東滿) 대학살 사건이다.
적군은 또한 남쪽 만주리의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경계를 품고 있었다. 같은 해 10월, 적군은 시베리아(西比利亞)로부터 군대를 퇴각시키고 내한군(耐寒軍)을 조직하였다.
적군은 병사를 두 갈래 나누어 봉천 ′동변도(東邊道)′일대를 습격하였다. 먼저 적군은 무순(撫順) 천금채(千金寨)로부터 흥경(興京) 왕청문(旺清門), 금두화(金斗伙), 쾌대무자(快大茂子), 통화성(通化城), 환인(桓仁), 집안(輯安), 임강(臨江) 등 지역을 잇따라 습격하였고 다른 한 갈래의 적국은 공주령(公主嶺) 으로부터 해룡(海龍), 류하(柳河), 삼원포(三源浦), 청원(清原) 등 지역을 습격하였다.이 두 갈래의 적군은 통화성에서 서로 합류하였다. 그 때 당시, 남쪽 만주리(滿洲里)에서 조직된 한족회(韓族會),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신흥학교(新興學校),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등 각 단체는 적군의 이번 습격을 사전에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각 단체의 사람들은 손해를 피하기 위해 잠시 현지에서의 활동을 접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다. 신흥학교의 1000여 명 학생들은 합니하(哈泥河)에서 ′교성대(教成隊)′를 조직하고 이청천(李青天)의 지도하에 북쪽으로 옮겼갔다. 1921년 이들은 밀산(密山)에서 홍범도(洪範圖)와 김좌진(金佐鎮)의 군대과 연합하여 ′대한독립군′을 조직한 후, 중국과 소련의 변경 지역에서 적군과 몇 개월 간 전투를 치루었고 많은 적군들을 소멸시켰다. 그러나 무기부족으로 소련에 들어서게 되었고 한족회, 대한독립단 등 단체의 단원들은 적군을 한동안 계속 피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적군들은 이번에는 남쪽 만주리 지역의 무고한 농민들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진정한 혁명운동가들은 적군에게 잡히지 않았다. 적군은 곳곳의 가옥,학교, 교회당 등 지역에 불을 질렀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만나는 즉시 잔혹하게 동포들을 학살하였다. 적군이 살해한 한국인 수는 몇 천명에 달한다.이것이 바로 20세기란 문명시대에 보기 어려운 또 한차례의 남만(南滿) 대학살이다.
적군은 남쪽 만주리에서 잔학무도한 행위를 일삼은 후 매국노들을 앞세워 조선인 거류민회(朝鮮人居留民會), 조선인보민회(朝鮮人保民會)등 매국노들에게 유리한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런 단체들을 통해 한국인으로 직접 한국인을 견제하게 만들어 한국인들이 스스로 독립운동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자 했다. 일본은 또한 한국인을 만주와 몽고(滿蒙)를 침략하는 희생의 선봉대로 이용하였다. 적군은 유하(柳河), 해룡(海龍), 휘남(輝南), 통화(通化), 청원(清原), 흥경(興京), 환인(桓仁), 본계(本溪) 등 지역의 곳곳에 조직을 배치하였다. 이들의 임무는 평소 호적을 조사하고 ′반역적인 생각을 하는 조선인′을 단속하였다.(적군은 한국인혁명 인사 명의로) 중국내정을 비밀리에 조사하고 마약을 공공연히 매매하였다. 유하(柳河) 조선인거류민회의 회장 윤학동(尹學東), 해룡 조선인보민회의 회장은 이응두(李膺斗), 통화보민회(通化保民會)회장 이동성(李東晟), 흥경보민회(興京保民會)회장 이응도(李膺道)가 각각 책임을 지고 산하에 분회(分會)를 설립했다. 그리고 조직의 본부에는 서기 여러 명과 다수의 조사원을 배치시켰다.적군이 이용하는 조사원들은 전부 불량배들이었고 이들은 적군의 위풍을 빌어 자기 동포들을 못살게 굴었다. 위에 언급한 단체들은 이런 불량배들로 구성되고 조선 총독부의 지휘하에 만몽정책(滿蒙政策)을 실시하는 매국노들을 이루어진 기구들이었던 것이다. 타마이 시게오(玉井成雄), 후쿠시마 요시이지(福島義一)의 지휘 하에 적군의 이런 활동은 2, 3년간 지속되었다.
1923년 산골짜기에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한국독립단, 대한서로군정서, 한족회 등 단체들은 지역을 구분하여 각각 일제를 물리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국독립단은 군사부 부장 전덕원(全德元)과 참모장 오석영(吳錫英)등의 지휘하에 통화(通化), 흥경(興京)남쪽에 위치한 환인(桓仁), 집안(輯安), 임강(臨江), 봉성(鳳城),본계(本溪), 무순(撫順)등 지역에서의 활동을 책임졌고 군정서는 이상룡(李相龍),이탁(李沰), 김동삼(金東三)등의 지도 하에 통화(通化), 흥경(興京)남쪽에 위치한 류하(柳河), 해룡(海龍), 청원(清原), 동풍(東豐), 서풍(西豐), 휘남(輝南)및 길림(吉林)일대의 활동을 책임졌다. 1922년 4월, 각 지역에서는 동시에 군대를 동원하여 적군을 소멸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독립단의 전덕원(全德元)등은 한치연(韓致然), 김중국(金重國), 김효선(金孝善),김진화(金振華)등 용감한 동지들을 통화성에 파견하여 적군을 소멸하게 하였다. 이들은 명령을 받은 뒤 수류탄과 권총을 들고 적군이 회의를 진행하는 시간을 이용하여 적군의 영사관과 보민회사무소를 습격하였다. 적군은 살기 위해 버둥거리며 저항을 하였지만 우리군은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사살하였다. 각 지역의 왜적들은 이 소문을 듣고 겁을 먹는 반면, 대한민중은 잇따라 귀향(歸鄉)하였다. 그 후, 반년도 안 되는 사이에 통화(通化), 흥경(興京)남쪽에 있는 적군의 소굴은 전부 제거되었다. 그리하여 한국독립단은 활동범위를 확장하고 50여 개의 지부를 설치함으로써 한국독립단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나아가 군정서의 이상룡(李相龍) 등은 제1중대 대장 채찬(蔡燦)과 소대장 김유권(金有權)등을 파견하여 부대를 거느리고 류하(柳河) 삼원포(三源浦)지역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당시, 삼원포(三源浦)는 적군들이 가장 중요시한 지역이었다. 이런 까닭으로 채찬 등 우리군은 우선 통화의 이밀(二密) 산골짜기에 매복했다. 그리고나서 소대장 김유권(金有權)은 결사대(敢死隊)를 이끌고 밤중에 삼원포(三源浦)거리에 설치된 거류민회사무소를 습격하여 적들의 사기를 완전히 꺽어 버렸다. 그 후, 왜군의 지도자 타마이 시게오(玉井成雄)도 우리 군에게 살해되었고 삼원포(三源浦)동포들은 우리군에 이러한 활동에 매우 기뻐하였다. 몇 개월 지난 뒤 류하(柳河) 및 해룡(海龍) 지역도 잇따라 함락되었다. 우리군은 계속하여 기타 나머지 지역을 공격하였으며 우리 군이 가는 곳마다 승리의 함성을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1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우리군의 각각의 단체들은 자신들이 책임진 지역내의 적군들을 모두 소멸하였다. 따라서 우리군의 혁명 세력은 남쪽으로는 압록강, 북쪽으로 길림성과 흑룡강성(吉黑) 까지 계속 확대되어 갔다. 남만 철로지역의 동포 이외 기타 지역의 한국동포들도 전부 우리의 혁명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중국 동북에서의 한국혁명운동의 기초는 또 다시 안정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대한독립단과 대한서로군정서가 거둔 혁명의 최대 성과일 뿐만 아니라 동북삼성 내에서의 한국혁명운동 중, 매몰시킬 수 없는 중요한 역사 사적이다.
일제의 "한국인으로 한국인을 통치"하고 "한국인을 이용하여 중국을 침략"한다는 이런 망상은 위와 같은 한국독립단과 한족회의의 군정서 등의 활동에 의해 산산 조각이 났다. 그러나 비겁하고 또 잔꽤가 많은 일제는 "중국을 이용하여 한국인을 통치"한다는 책략으로써 기존의 "한국인으로 한국인을 통치"한다는 정책을 대체하였다. "중국을 이용하여 한국인을 통치"하는 책략은 바로 동북 성시의 당국(當局)을 압박하여 해당 지역의 한국혁명운동을 단속하는 것이었다. 1925년 조선총독부는 경무국장 미쓰야미야마쓰(三矢宮松)을 판양(潘陽)에 파견하여 봉천성(奉天省) 경무국장과 한국혁명운동을 단속할 수 있는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을 체결하였으며 협정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중국과 일본의 경찰은 협력하여 봉천 동부 지역의 조선인독립당 사회를 저지하고 중국 당국은 독립당 당원을 체포 및 인도해야 하며 조선독립당의 지도자 및 지도자의 명단은 일본 당국에서 책임지고 선포한다.′
당시, 동북 지역의 민중들은 어려운 처지에 빠진 한국인을 동정하고 감싸 주었으면 혁명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을 체결한 후, 한국혁명운동은 불법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봉천 당국은 이 협정의 내용대로 한국인의 혁명운동을 엄금하였다. 이렇게 서로 충돌이 발생하면서 혁명운동가들의 희생도 점차 많아지고 한국혁명도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대한서로군성서(大韓西路軍政署), 한족회(韓族會),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등 단체들은 일년의 시간을 이용하여 일제를 토벌하고 매국노들을 소멸하였다. 그 후,각 단체의 지도자들은 한자리에 모여 이를 경축하는 행사를 가지며3개 단체(군정서,한족회, 독립단)을 통합하여 ′대한통군부′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몇 개월이 지난 뒤, 대한통군부(大韓國統軍府)란 단체 이름이 부당함을 인식하고 단체명을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로 변경하였다. 양기탁(梁起鐸), 이상룡(李相龍), 이택(李沰),오동진(吳東振), 현정경(玄正卿), 전덕원(全德元), 오석영(吳錫英), 김창하(金昌河)등은 대한의군부의 중앙간부로 임명되었다. 대한의군부는 관전현(寬甸縣) 내에 설립되었고 충분한 무장을 통해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대한의군부는 압록강을 건너 공방전을 전개하여 적군의 조직을 파괴하고 매국노들을 처벌하였다. 한국 각 지역에서는 우리 군은 매일 적군과 상대해야 했고 북한(北韓) 일대는 거의 우리 군이 주관하고 있었다. 적군은 우리 군의 세력을 당하지 못한 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시련이 많다는 속담처럼 당시 대한의군부 내부의 양기탁(梁起鐸)과 전덕원(全德元)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탓으로 내분이 일어났고 이 내분은 순조롭게 진행 중인 혁명운동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 후, 각 지역에서 전보를 보내 이들을 화해시켜 주었고 분쟁은 해결되었다.
1924년, 의군부(義軍府), 광복단(光復團), 광한단(光韓團), 흥업단(興業團)등 8개 단체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통합하였다. 각 단체의 무장부대는 모두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으로 명명하고 통의부(統義府)가 직접 지도하였다.
사령관 김창환(金昌煥), 신팔균(申八俊), 오동진(吳東振)등의 지도하에 진영을 정돈하고 사기를 진작시키며 한국 국경내의 일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국내의 유명한 투사이자 통의부(統義府)중대장으로 임명된 양세봉(梁世奉), 문학빈(文學斌), 심룡준(沈龍俊), 박응백(朴應白)등은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전술로 한국 오지(腹地)에 들어가 오랜 시간 적군과 격전을 치루었다. 이 기간 동안 크고 작은 전투는 총 2000여 번을 이상으로 적들에게 막중한 손실을 입혔다.
그 후, 통의부의 제1, 제2, 제3 중대의 일부 동지들은 상해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주만육군참의부(駐滿陸軍參議府)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통화(通化), 환인(桓仁)남부와 압록강 연안(沿岸) 지역을 활동지역으로 지정하고 참의부 대표 김승학(金承學), 양기하(梁基瑕), 심룡준(沈龍俊), 박응백(朴應白), 이종혁(李鐘赫), 김소하(金筱廈), 차천리(車千里), 채찬(蔡燦)등의 지휘하에 압록강 연안을 중심으로 적군과 7, 8년 간의 격전을 벌임으로써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참의부(參議府)는 통의부가 분열되면서 새로 조직된 것이기 때문에 설립된 후, 늘 내부에 모순이 발생하여 화목하게 지낼 수 없었다. 심지어 무력충돌까지 발생하여 이로 인해 무고한 희생자도 많았다. 참의부(參議府)의 내부모순은 동북 지역에서의 한국 혁명역사 가운데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1925년, 양기탁(梁基鐸), 이택(李沰)등은 통의부(統義府), 의성단(義成團), 광정단(匡正團)등 8개의 단체를 대한정의부(大韓正義府)로 통합하자고 제의하였다. 대한정의부(大韓正義府)본부는 길림(吉林)의 화전(樺甸)에 두기로 했는데 이곳에 본부를 두면 거의 동북삼성의 각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의무금(義務金)납부자는 10만(戶)에 달하고 정의부(正義府)의 모든 제도는 마치 공식 정부와 같았다. 흥경(興京)왕청문(旺清門)에 화흥중학교(化興中學)를 설립하고 류하(柳河) 삼원포(三源浦)에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설립하였다. 이 밖에 기타 학교들을 설립하고 교포 및 자손들의 교육하였다. 또한 화전성(樺甸城)에 화성의숙(華成義塾)을 설립하고 혁명간부들을 전문적으로 훈련시켰다. 왕청문(旺清門)에는 남만학원을 설립하고 혁명에 필요한 각종 학문을 연구하였고 무장한 부대는 계속하여 대한의용군으로 명명하였다. 대한의용군은 오동진(吳東振)과 이청천(李清天)등 사령관의 지휘하에 혁명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1920년 홍범도(洪範圖), 김좌진(金佐振), 이청천(李青天)등은 길림(吉林), 밀산(密山)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하였다.그러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유지하지 못한 채 러시아로 가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혁명의 대성공을 이룬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인지라 제국주의국가들의 감시하에 한국인에게 식량과 기타 물질적 원조를 해주기가 쉽지 않았지만 약소민족의 해방운동을 동정해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은 러시아 변경에 온 후, 즉시 러시아 정부의 비준을 받아 단체명을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으로 변경하고 고려군관학교를 설립하여 한국인 군사간부를 훈련시켰다. 1920년 겨울, 러시아와 일본은 천진(天津)에서 시베리아 철군 협정(西伯利亞撤兵協定)을 체결하였다. 협정의 제1조 중 ′소련 경내에 일본을 위해(違害)하는 단체가 존재함을 불허한다.(대의는 이렇다)′는 내용이 규정되었다.
시베리아철군협정(西伯利亞撤兵協定)을 체결된 후, 러시아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던 고려혁명군은 러시아 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되었다.
러시아 군대가 고려혁명군을 무장해제시킨 후, 고려혁명군의 지도자 김혁((金爀), 김좌진(金佐鎮), 조성환(曹成煥)등은 북만주(北滿)의 동로(東路)일대로 돌아가 새로운 단체 신민부(新民府)를 설립하였다. 김혁(金爀), 김좌진(金佐鎮), 황학수(黃學秀), 최송오(崔松塢),정신(鄭信)등을 중앙간부로 임명하고 신민부는 군정과 민정 두 가지 위원회로 나누어 혁명활동을 진행했다. 그리고 한국 농민을 모집하여 집단농촌제도(集團農村制度)를 실시하며 경제의 기초를 닦았다. 또한 여러 곳에 한국인학교를 설립하여 교민의 자손들을 교육하였다. 나아가 군구제도(軍區制度)를 실시하였다. 즉 18~40세까지의 한국인들이 전부 군대에 참가하게 되는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비밀리에 길림 녕안(寧安)에 군사훈련기구를 설립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광복을 위한 역량을 강화시킴과 동시에 야무진 젊은이들을 뽑아 별동대(別動隊)를 조직하여 적군을 소멸하였는데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1928년, 정의부(政義府), 신민부(新民府), 참의부(參議府)등 단체들은 각각 대표를 파견하여 길림에서 혁명조직에 대한 통합문제를 토론하고 국민부(國民府)를 설립하였다. 이것이 바로 ′3부통합(三府統一)′이다.
′3부통합(三府統一)′은 전후(前後), 즉 1926년~1928년 봄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의 동지들은 모두 ′유력하고 유일한 민족당을 조직하여 한국의 민족 혁명을 진행하자′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각 계층, 각 계급을 망라(網羅)하고 한국민족의 유일한 당을 조직함을 구호로 내걸고 국민에게 호소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과 구호에 따라 각 지역의 동지들은 길림 신안둔회의(新安屯會議),반석호난집창자(磐石呼蘭集廠子)회의를 개최하는 등 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당시 각 당파의 주장과 입장이 서로 다랐기 때문에 의견이 나누어지기 시작하여 결국 유일당을 조직하지 못하였다.
유일당조직운동이 실패한 후, 동북의 한국혁명운동은 혼란 상태에 빠졌다. 주의 투쟁(主義鬥爭)은 점차 행동상의 충돌로 발전되었으며 심지어 무기로 상호간의 충돌을 해결하려 것과 같은 비참한 결과를 빚어냈다. 이는 당시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관계와 비슷했다. 이런 주의의 충돌은 1931년 동북 9.18사변이 발발 후,점차 완화되기 시작했다.
1929년 유일당조직운동이 실패한 후, 각 지역의 동지들은 단독으로 당을 결성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안창호(安昌浩), 이동녕(李東寧), 김구(金九), 조소앙(趙素昻) 등은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이청천(李青天), 홍진(洪震)등도 중동로(中東路)일대에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따라서 현익철(玄益哲), 양세봉(梁世奉)등은 남만주(南滿)를 중심으로 흥경(興京)에서 조선혁명당을 조직하였다.
동북에서의 한국 민족혁명운동 중, 조선혁명당은 정통적인 기관이다. 조선혁명당은 수십만의 민중으로 조직된 ′국민부(國民府)′를 한국동포(韓僑)자치기구로 한다.조선혁명당 중앙부에는 비서, 조직, 교양, 경제, 국제, 조사, 민중 등 7개의 관련부서를 설치하고 또한 군사위원회, 자치위원회, 선전위원회 등 3개 위원회를 설치함으로써 당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국민부(國民府)는 당의 자치위원회로서 동북 동포의 행정 및 교양 문제를 책임졌고 모든 경비는 국민부의 민중이 책임지고 지급했다. 당의 군사위원회 산하에 조선혁명군을 설치하여 무장투쟁을 했다. 당의 중앙부서는 요녕(遼寧) 신빈(新賓)에 설치하고 길름성과 흑룡강성(吉黑:길림성·흑룡강성)에 길흑(吉黑)특별위원회를 설치하였다. 9.18사변 전후(前後), 한국독립당은 활동범위는 점차 확장되었고 동북의 곳곳에 당의 조직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당원 수는 수만 명에 달했다.
유일당 조직운동이 실패할 무렵, 한국독립당은 동북만주(東北滿)일대에서 새로운 조직,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를 조직하였다. 본 회의는 김좌진(金佐鎮),정신(鄭信), 정무(鄭武)등이 관리 및 지도했고 동북만주(東北滿)일대에 거주한 동포들은 거의 이 조직에 참가하였다. 1929년 겨울, 홍진, 이청천, 정부, 최악 등의 제의에 따라 한국독립당이 설립되었다. 이 당은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를 민중을 관리하는 외부기구로 하고 당 내부에 총무, 조직, 선전, 군사, 경리,감찰 등 6가지 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또한 중앙(中央), 지(支), 구(區)등 3급으로 조직을 구분하였으며 현지 기존의 의병, 유림(儒林), 대종교(大倧教- 순 민족 사상단체) 등 단체를 망라하여 진영을 정돈하고 군사 및 민중 운동을 적극 전개했다.그래서 설립 후 짧은 시간 내에 보다 큰 성과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1931년에 이르기까지 본 당의 당원은 만여 명에 달하고 군사 지역은 36개로 확장되었다.
1924년~ 1930년, 동북 각 지역에서 농민운동, 청년운동, 부녀운동 등 동포들의 민중운동은 생기가 넘쳤다.
조직과 훈련 그리고 선전등의 영역에서 동만청총(東滿青縂, 동만주의 청년총회), 북만청총(北滿青縂, 북만주의 청년총회), 주중청총(住中青縂, 재 중국 청년총회),재만농민(在滿農民, 재 만주리 농민)등의 민중조직은 대대적으로 협조하였다. ′삼부통합(三府統一)′시, 참의부(參議府)의 김선풍(金仙風), 이영재(李永哉), 송운봉(宋雲峯) 등 일부 부패한 인사들은 통화(通化)일본영사관 및 조선 총독부 외사과(總督府外事科)의 특무 후쿠시마 요시이지(福島義一)에게 이용당하여 ′삼부통합(三府統一)′을 반대하고 ′선민부(鮮民府)′를 설립하였다. ′선민부(鮮民府)′는 위에서 얘기한 조선인보민회(朝鮮人保民會), 조선인거류민회(朝鮮人居留民會)등과 비슷한 일본의 매국노 기구이다. 그러나 ′선민부(鮮民府)′의 매국노들은 이전에 우리들과 함께 혁명 운동을 진행했었기에 우리들의 혁명진영을 보다 알 잘고 있었다. 그래서 ′매국노 왕정위(汪精衛)′와 같음. 이들이 저지른 죄악은 위에 서술된 어떤 기구들보다 더 컸다. 전 참의부(參議府) 책임자 김승학(金承學)이 바로 이 매국노들에게 체포된 것이다.
′선민부(鮮民府)′의 판사처(辦事處)는 통화 시내 일본영사관 근처에 설립되었다.′선민부(鮮民府)′의 업무는 바로 한국혁명운동을 박멸하는 것이고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과 국민부(國民府) 등 혁명단체는 선민부(鮮民府)의 소멸대상이었다. 일제는 매국노들을 부추기고 현지 중국의 부패 관료와 공안대(公安隊) 대원을 이용하여 늘 조선혁명당의 근거지를 습격했다.
1929년 봄, 국민부(國民府)는 이런 매국노들의 조직 ′선민부(鮮民府)′를 소멸하기 위해 ′선민부토벌지휘부(鮮民府討閥指揮府)′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은 이웅(李雄)을 총 지휘자, 양세봉(梁世奉)을 부 총 지휘자로 임명하고 통화, 환인, 집안 등 지역에서 토벌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반년도 안 되는 사이에 토벌 활동을 완성하였다. 그후 ′선민부(鮮民府)′ 매국노들은 통화성 내에서 감히 얼씬도 하지 못하게 됐다. 우리 군은 강옥성(姜玉成), 장도백(張道白) 등 두 대장을 파견하여 적들을 완전히 소멸하게 하였다. 두 대장은 대오를 거느리고 적군이 연회를 펼치는 기회를 타서 적들을 포위 후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았다. 결국 적군은 완전히 소멸되었고 매국노들의 기구 ′선민부(鮮民府)′도 그 이름도 사라지게 되었다.
중국과 한국 민족이 연합하여
공동의 적-왜구를 물리치자!

우방의 동태

삼민주의(三民主義)의 문화건설 문제

이경제(李儆濟) 

예로부터 소질에 따라 인류를 여러 등급으로 구분하는 것은 중국과 외국의 사상가들의 공통점인 것 같다. 서양의 철학자 플라톤(柏拉圖)은 인류를 금(金), 은(銀),철(鉄)등 세 등급으로 구분하여 각 등급 범위 내의 사람들이 집행해야 할 직무를 명시하였다. 그러나 이 3가지 등급 중 노예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중국의 공자는 인류를 다음과 같이 3가지로 구분하였다.1) 태어나서부터 평화를 인식하고 그것을 주장하는 자, 2) 학식이 있고 그 지식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자. 3) 고난이 있고 그 고난의 어려움을 알면서 그걸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자. 이 외에 고난이 있지만 그걸 인식하지 못한 자도 있지만 공자는 이런 사람을 자기가 구분한 3가지 종류에 포함하지 않았다. 중국의 손중산(孫中山)의 생각도 선현(先哲)들과 같았다. 손중산은 주의(主義)를 기준으로하여 인류를 다음과 같이 3가지로 구분하였다. 1) 선지 선각자(先知先覺), 즉 발명가. 2) 후지후각자(後知後覺), 즉 선전가 3) 부지 불각자(不知不覺), 즉 실행가(實行家). 이 외에, 무지무각자(無知無覺)도 있겠지만 이들은 주의(主義)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에 손중산(孫中産)은 이런 사람에 대해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위에 서술된 3가지 중, 선지(先知) 선각자는 플라톤이 얘기한 "금" 등급 및 공자가 얘기한 "태어나서부터 모든 걸 인식할 수 있는" 성현(聖賢)에 해당하다. 이들은 선천적인 재능이 있기 때문에 주의(主義)를 주장함에 아무런 문제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중에서도 자기의 재능을 충분히 나타낼 수 있다. 부지불각(不知不覺), 즉 실행가(實行家)에 대해 손중산(孫中山)은 "부지불각일지언정 받아 드릴 수 있다"고 얘기하고, 공자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고난을 알고 고난을 헤쳐나가다 보면 많은 것을 알게 된다"고 명시하였다. 때문에 이들은 주의(主義)를 이해할 수 있으면 이해 정도가 철저하지 못하더라도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후지후각자(後知後覺), 즉 선전가들에는 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 이 유형의 사람들은 배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기 마련이고 지식의 힘을 모르기 때문에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떠한 주의(主義)를 믿으면 그 주의를 부단히 주장하고 전파할 것이다. 그러나 주의(主義)를 믿지 않을 경우, 주의를 전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의 전파를 방해할 것이다. 때문에 한나라의 창업과 또 그 나라의 융성과 쇠퇴는 반드시 ′학식이 있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려 하는 자′ 즉 지식이 있는 청년들에 의해 결정된다. 지식을 갖춘 청년들이 주의(主義)를 이해하고 주의(主義)를 믿고 선전할 경우, 큰 힘을 발휘하게 되고 따라서 나라의 건설과 발전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며 그 어떤 나쁜 영향도 받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의 상황을 볼 경우, 현재 전국 각지에 이러한 주의(主義) 실행가(實行家)들이 있지만 새로운 지식청년들이 계속 뒤를 잇지 않을 경우, 현재의 상황을 오래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이다.
(주1) 지식청년들의 품행과 사상의 정확 여부는 다음 두 가지 방면에 의해 결정이다. 첫째, 학교 내의 교육. 둘째, 학교 외의 교육. 학교 내부의 교육은 지식 교육과 기능 훈련을 중심으로 한다. 때문에 지식청년들의 사상교육은 학교 외부의 교육과 문화를 통해 구현되어야 한다. 성적이 좋은 우등생이라고 해서 그 학생의 사상이 다른 학생에 비해 새롭고 활발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학생의 학습 성적은 교과서를 배운 결과이지만 사상활동은 이런 교과서들의 구속을 받기 때문이다.사상이 뚜렷한 재학중인 학생들은 학교 외의 출판물을 통해 지식을 배우려는 바람이 매우 절실했다. 출판사에서 여러 가지 출판물을 발행했지만 그 서적들이 청년들에게 해로운지는 상관하지 않았다. 언론은 자유롭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출판물을 제지할 수 없다. 때문에 당시 청년들의 사상은 출판사의 출판물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등 이상의 학교 학생들이 국가, 사회 및 주의(主義)등 사상에 대한 개념은 학교의 당의(黨義)수업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범위가 매우 좁았다. 토론할 때 학생들은 새로운 것만 제창하고 낡은 것을 가까이 하지 않으며 숭고한 것을 좋아하고 멀리 떨어진 사상은 받아들이려하지 않았다. 주관적으로 말하자면 청년들의 사상과 행위는 당시 문화인에 의해 결정되었다. 우리는 현재 그리고 앞으로 사회에서 활동하게 될 지식청년들의 사상을 미루어 알아야 한다.교과과정을 통해 그 무엇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현재 문화계(文化界)를 통해 이후 주의(主義)선전가(宣傳傢)에 관한 사항을 파악해야 한다. 따라서 문화계 현황을 파악하려면 우선 지난 10여 년간의 역사를 돌이켜 봐야 한다.
′5.4운동′이 중국에서 문화적으로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하는 이유는 ′5.4운동′이 지금까지 계속되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5.4운동′ 이전의 느린 문화발전에서 ′5.4운동′ 이후 문화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당시 외국 문물들이 중국으로 밀려 들어왔고 잠잠했던 중국의 문화계 인사들도 외국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문화적으로 가장 처음 들어온 외래어는 ′민주주의, Democracy′와 ′과학,Science′이다. ′민주주의 Democracy′는 만사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국가 및 사회 중,반드시 발생할 정확하고 공정한 자유자족, 무주견(無主見)한 사상문화를 말한다. 이런 문화는 당시 중국 경제상 제국주의의 압박을 받는 반식민지 및 정치상 사분오열한 군벌 할거의 국면을 초래하였으며 사실상 정확히 응용되지 못했다. 이런 민주주의를 제창하기 때문에 (Laissez faire)식민지를 해방하는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세력다툼 국면은 해결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개인주의(個人主義)소가족(小家族)제도는 중국 기존의 논리 도덕에 큰 영향을 주었다. 개인주의(個人主義)로 인해 천여 년간 중국의 민족을 이어가던 유대(紐帶)는 한꺼번에 끊어졌다.
이런 상황, 그리고 서구문화의 전문가만을 소개하는 지금의 풍조에 대해 미래의 역사학자들는 "춘추(春秋), 역사의 잘잘못을 논하는 것"를 논할 때 그 책임을 반드시 물을 것이다. 다행히 민족적 자각은 오래지 않아 일어났다. 민주주의는 결과적으로 단지 사상변화의 ′촉매(觸媒), Oatalyzer′ 역할을 수행했다. 공산주의는 그 자체가 가자고 있던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총리(總理)는 삼민주의(三民主義)에서 공산주의를 특별히 비판하였다. 공산주의는 국제노동계급의 입장에 서서 세계의 제국주의 및 국내의 봉건세력 그리고 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방식의 민주주의도 반대한다. 하지만 삼민주의(三民主義)는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계승했고 민족단결이 그 사상의 주체가 되며 외래의 침략에 저항하고 국내의 할거상황까지 해결하는 사상이다. 또한 삼민주의(三民主義)는 민권주의로서 근본적으로 민주주의를 포용한다. 삼민주의는(三民主義)는 북벌에 성공하고 전국을 통일한 이후로부터 이미 국내의 정치, 경제 문화를 지배하는 핵심 축이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민족과 국제의 두진영 사이에서 계속 방황하며 아직 그 위치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민족의 한 분파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민족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아직 찾지 못했는데도 삼민주의(三民主義)와 경쟁하려 한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 십수년 동안의 사상학술을 놀라울 정도로 깊이 있게 반영한다.
일찍이 총리(總理)는 명석하게 맑스주의는 사회의 병리가(病理家)일 뿐이라고 판단했지만 소위′무산계급문화′라는 사상은 여전히 청년민중 가운데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원인은 물론 몸과 마음을 바쳐 구국과 건국의 실질적인 행동을 해야 하는 삼민주의자(三民主義者)가 그 소임을 다하지 않은 데에 있다. 하지만 학술계의 극단적 자유와 개방의 분위기는 공산주의자들이 아무런 장애 없이 선전운동을 하도록 방임했다. 문제는 공산주의자의 ′무산계급문화′에 있지 않고 바로 문화계에 그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시간이 흘러 지금의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문화계는 매우 광범위하게 그 범위를 형성해왔다. 공산주의로부터 삼민주의(三民主義)로 향하는 ′과도기형(過渡型). 주2′ 문화,불행히도 이 과도기적 형태의 문화는 실제로 전국의 우수한 지식청년의 대부분을 지배하며 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만일 우리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일관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결국 이러한 사실을 승인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실로 강철처럼 견고하고 날카로우며 또 피처럼 선명하다!
이러한 소위 ′과도기형′ 문화라는 것은 삼민주의(三民主義) 전통적인 철학과 대계도(戴載季陶) 선생의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철학기초′나 진립부(陳立夫)선생의 ′유생론(唯生論)′ 등도 계승하지 않는다. 또한 순수하게 맑스(馬克思), 엥겔스(昻格斯), 레닌(列寧)이 남긴 문화도 아니다.「자본론」과 유물사관의 관점에서 해석하며 삼민주의(三民主義) 문화를 마음대로 재단한다. 이러한 종류의 문화인은 ′과학′이란 연구의 명목으로 변증법적유물론(辨證法的唯物論)의 운용을 피하지 않으며 역사관에 있어서도 생산결정론을 받아들이고 국가론에 있어서는 심지어 엄격한 사회계급관을 거절하지 않는다. 국민혁명이나 국제적 변화를 분석하는 것에 관계 없이 심지어 사회사연구에서도 그러하다. 그들은 근거도 없이 맑스(馬克思)의 관점을 중요시 여기고 아무데서나 맑스주의를 인용하므로 그런 용어들은 항상 주의를 필요로 한다. 출판계의 독자 스스로도 그러한 사실들을 하나하나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단지 하나의 이야기만 소개하겠다. 제작년 어떤 곳에서 간행한 삼민주의(三民主義) 과학은 하나의 체계라고 상세히 전개한 것을 나는 기억한다. 삼민주의(三民主義)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윤리학, 법률학… 등과 같이 백여종에 이른다. 이는 삼민주의(三民主義)가 없는 물리학이나 화학 이외에 일반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사회과학 각 분야에 관련되는 것이다. 삼민주의(三民主義)는 없는 것 없이 다 갖춰진 최고의 사상이다. 정말로 아름답고도 찬란하며 넓고 크다고 말할 수 있다. 모두들 총리가 저술한 ′민족주의′란 책을 출판할 때 쓰셨던 서문을 알고 있다. 옛날 원고가 큰 밝음으로 의해 변하고 또 버린 것이 있다고 설명하셨다. 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이 바란다. "본래 이 기초는 여러 가지(사상들을)접하여 확장한 것이다. 잃은 것을 보충하고 잘못을 고치고 바로잡아 체계를 다시 바르게 함으로써 완전한 책을 만들었으니 선전의 교과서로 삼길 바란다.(本此基礎,觸類引申, 匡補闕遺, 更正條理使成一完善之書, 以作宣傳之課本)" 여기에 언급된 것처럼 학자들은 몸과 마음을 다해 그 뜻을 확장하고 바르게 하고 또 잘못됨을 바로잡아 유실되는 것이 없게 해야 할 것이다. 학자들은 또한 총리(總理)의 뜻을 삼민주의(三民主義) 범위 내에서 그 정신과 의의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고 조리(條理)를 가지런히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학과의 기준으로 아직 확고히 자리 잡지는 못했다. 학자가 만일 이런 항목을 예를 들면 불행히도 그것은 엥겔스(昻格斯)가 저술한「자연변증법(自然辨證法)」로 부터인 것이다. 참으로 삼민주의(三民主義) 창조자의 뜻과는 그 거리가 무서울 정도로 멀다.
결론적으로 삼민주의(三民主義)의 발양(發揚)은 그 스스로 고유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결코 남의 것을 빌려 공(功)을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학자들이 총리(總理)의 "잃은 것을 보충하고 잘못을 고치어 바로잡아 체계를 다시 바르게 한다.(匡補遺闕, 更正條理)"의 본의(本意)를 체험하며 자세히 살필 수 없다면 여러 가지 주의(主義)들은 바로 무성하고 어지럽게 자라는 길로 접어들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정말로 문화상 가장 엄중한 위기를 형성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문화의 생장(生長)과 발달은 묘목의 이식으로 비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종자를 선택해야 하며 또한 좋은 땅도 고려해야만 한다. 또한 문화장인(匠人)의 묘목이식 기술과 또 제공하는 비료는 이 종자의 미래와 쇠락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문화에 대해 말하자면 종자는 바로 삼민주의(三民主義)이고 토양은 지금 전국에서 성장중인 지식청년들이다. 이 문화종자에 대해 총재(總裁)의 매우 적절한 평가의 말이 있었다.
"우리 총리의 주의(主義)는 중국고유의 정치와 윤리철학 정통사상으로부터 연원(淵源)한 것이다. 동시에 중국 현대의 나라상황을 참작하고 유럽사회과학과 정치제도의 정신도 취한 것이다. 총리 그 스스로 보고 깨달은 진리들을 융합하여 만든 사상 체계이다. 그리고 그 넗고 깊음은 실로 세계에 추천할 만큼 훌륭하다. 백세(百世) 이후 성인(聖人)이 나타나도 흠잡을 때 없는 세계와 백성들을 위한 위대한 사상이다. 또한 세계로 향하는 철학이며 만세태평을 여는 사상이다." 주2)
이러한 위대하고 훌륭한 주의(主義)는 세상에 둘도 없는 것으로 바로 번식력이 가장 강한 문화종자이다. 문화토양에 대해서 말할 것 같으면 또한 매우 비옥하여 다시 갈 필요가 없을 정도다.
우리나라의 청년들은 ′9.18′ 일본이 동쪽 4개 성을 침략하여 점령한 이후 국가와 민족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감과 중대성을 깊이 자각하기 시작했다. ′7.7′ 노구교(蘆溝橋) 이후에는 더욱 의연하고 결연하게 국가부흥을 위해 국가와 민족에 충과 효를 다하는 길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삼민주의(三民主義)는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유일한 주의(主義)가 되었고 전국청년들을 위한 보편적 지식이 되었다. 그러나 삼민주의(三民主義)의 그 뜻과 정신은 매우 깊다. 비록 30여년 동안 넓게 퍼졌지만 일반 청년들은 삼민주의(三民主義)애 대한 철저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다. 바로 그 점이 여러 가지 사상과 주의(主義)를 신봉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론방면의 이해는 적었고 실제적인 민족국가생활로부터의 재촉하는 일은 많았다. 그런 까닭으로 다반수가 이성적으로 그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고 또한 삼민주의(三民主義) 전체 체계를 받아들여 소화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발생했다. 이러한 어려움은 앎을 구하는 청년들 사이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저술계의 문화인에게도 역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바로 이 어려움은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과 ′고유문화운동(固有文化運動)′을 일어나게 했다. 수많은 저작가와 사상가들은 사상의 연구와 저술들을 쏟아냈고 정신적 양식에 굶주려 하는 수많은 청년들은 그러한 사상을 수집하는 광풍과 같은 현상을 낳았다. 이 모두가 문화적 공백을 매우고 정신적 고뇌를 해소하기를 바란 것이다. 항전 이래로 제지업과 인쇄업은 모두 어려웠다.후방과 전방, 그리고 서북과 서남 및 천중(川中) 모두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신과 잡지가 옛날의 것이 정간했다고 아직 듣지 못했고 새로운 것들은 비 온 후의 봄꽃 같이 많았서 서로 경쟁했다. 크고 작은 수백종의 잡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웅대하고 깊은 뜻을 설명하지 않는 잡지는 하나도 없었다.하지만 당의(黨義)를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출간하는 종합잡지가 없었다. 문화계의 활발한 양상은 전선의 포화와 서로 호응하며 발전해 갔다. 이렇게 순(純)문화문제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적은 역사상 처음 이었고 곧 위대한 문화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 같았다. 이 시기에 청년들은 모두 문화적으로 가장 비옥한 토양의 입자로 변했다. 우량한 종자는 이 커다란 옥토 위에 뿌려졌고 항전과 건국이란 기온아래에서 문화장인의 관개(灌漑, 물대기)와 경작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보아온 바와 같이 오늘날 "여력이 있으면 행하(行有餘力)"는 진정한 삼민주의자(三民主義者) 이외에, 청년들이 일상에서 접촉하는 문화인과 저술가의 소양은 결코 이상과 서로 호응하지 않는다. 그들이 주는 비료는 맑스주의 경제학과 역사관이다. 그들의 재배방법은 맑스주의자들의 옛 방법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국가와 민족 그리고 문화와 주의(主義)에 이것은 매우 엄중한 위기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맑스주의의 추리방법과 용어들을 청년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청년들을 인도하여 맑스가 설계한 이상한 법칙 안으로 몰아 넣는 것과 같다. 만일 우리들이 전쟁 전의 노신(魯迅)선생의 일을 참고 한다면 이 위기가 결코 과장되지 않은 매우 엄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신(魯迅)선생은 일생 동안 힘든 투쟁을 하신 분으로 문화와 학술방면에 대한 공헌은 우리나라에서 어느 누구도 대적할 수 없다.또한 선생님의 이러한 업적에 경의를 표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선생님의 지적 능력과 학식은 일반인들이 미칠 수 없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전향하신 이후에는 가장 열정적으로 자본주의의 사유재산제도를 증오하시는 분이 되셨고 민족국가에 대해 커다란 회의를 갖게 되셨다. 선생님께 임종하실 때의 신문보도를 기억한다. 선생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셨다. "문화인이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라며 후회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세 분에게는 목수가 되라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한다. 우리들은 선생님을 위한 동정의 눈물을 참는 것 이외에 또한 (공산주의에) 대한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20세기는 ′경제 그리고 경제와 관련된 것들이, 즉 소위 말하는 물질의 중요성이 이미 실제적으로 다른 모든 기타 가치들에 대해 패권의 지위를 차지한 시대′이다. 유물사관(唯物史觀)으로 청년들을 교육하고 맑스의 용어들을 청년들에게 숙지 시키는 일은 정말로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다. 지적 능력이나 학식이 노신(魯迅)선생에게 미치지 못하는 일반 청년들이 어찌 노신(魯迅)선생님 보다 맑스주의에 대한 면역력을 갖고 있을 수 있겠는가?삼민주의(三民主義)는 충실하게 정리될 필요가 있다. 총리(總理) 자신께서 정리하신 확고한 형태를 갖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변혁의 시대에 활용해야한다. 주의(主義)에 대한 전체적인 체계 또한 학자들의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주의(主義)에 대해 부적절한 비료를 주거나 적절하지 않은 물대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결국 시들어 가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학자들은 사족을 붙이는데 공을 들여서는 안 된다.
학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삼민주의(三民主義) 외연(外延)의 확대와 내포(內包)의 충실하게 하여 정통해 지는 데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폭넓고 깊은 지식을 추구하는 데에 있지 않고 철저한 깨달음이 우선이다. 문화인들은 이미 그것을 잘 알고 있지만 아직 힘써 노력하지 않았다.
오늘날은 주의(主義)가 발생하기 쉬운 시대이다. 삼민주의(三民主義)학자는 이 시기를 방심하면 안 된다. 지금 눈앞에 예측불허의 위기가 습격해 오고 있다. 전국문화계 전사들은 깊은 경계심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주의(主義)의 앞날은 바로 국가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민족문화의 최후 방위선은 국가사회의 독립과 번영을 영원히 보장할 것이다.
주1) 청년들의 주의(主義)에 대한 중요성은 주의는 ′정치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여론(輿論) 2권 신년호, ′주의(主義)와 청년′의 내용을 작자가 요약하여 서술함.
주2) ′과도기(過渡期)′, 이 단어의 사용은 표면적으로는 합당하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과도(過渡)′라 칭하는 것은 하나의 ′유형(型)′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도형(過渡型)′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그 과도성의 본질과 의고성(擬固性)의 현황을 표현하기가 부족하다.
주3) 총재님의 ′삼민주의(三民主義) 의 체계 및 그 실행순서′를 자세히 읽어볼 것.주4) ′전변(轉變) 이후의 노신(魯迅)′, 이 서적의 본래의 도서명, 작가. 출판일시 및 출판사에 대한 사항은 모두 잃어버렸다.
주5) 위납송파(韋納松巴)의 말을 인용함.

국제정치

붕괴중인 이탈리아

1.실패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서기달(徐紀達) 

무솔리니(墨索里尼)는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함에 고무되어 요행으로 승리하리라는 환상과 그리고 제국주의 정책의 유혹에 끝내 아탈리아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일년간의 투쟁에서 이탈리아는 실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실패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 숙명적인 것이다.
무솔리니(墨索里尼)가 그리스를 침공한 것은 실패의 첫 시작이었다. 1939년 12월, 외상 치아노(齊亞諾)는 "이탈리아는 적어도 3년 내에는 또 다른 전쟁에 참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비시니아(阿比西尼亞-이디오피아)와 스페인의 두 차례 전쟁이 끝난 후, 이탈리아는 기존의 원기를 되찾지 못한 채, 또다시 전쟁에 참가하였다. 비록 이 두 차례 전쟁의 상대가 군사적으로 비교적 약한 나라이지만, 이탈리아가 이 두 차례의 전쟁을 위해 치른 대가는 놀라울 정도이다. 이 두 차례의 전쟁에서 이탈리아는 많은 군사들을 희생시켰고 군수품을 소모하였으며 국가의 경제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치아노가 얘기한 바와 같이, 이탈리아는 적어도 3년이란 시간을 이용하여 국가를 정돈하고 원기를 회복해야 했다. 이탈리아의 이런 상황은 ′정확하게 자신을 평가하고, 정확하게 상대방을 이해해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병법 원리에 부합한다. 무솔리니(墨索里尼)는 시간을 절약한다는 이유로 계속 격렬한 투쟁을 벌인 결과 ′실력 부족(實力不足)′으로 패배하였다. 이번 독일군이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자 무솔리니(墨索里尼)는 함성을 지르며 기세를 도왔다.이는 이탈리아를 더욱 깊은 함정으로 몰아 넣었다. 현재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군대는 최선을 다해 독일군에 대항하고 나아가 협공(夾擊) 전술로 알바니아의 흑삼군(黑衫軍)을 포위하였다.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 군대는 우선 이탈리아를 해결하고,그 다음 협력하여 독일을 상대할 준비를 하였다. 유고슬라비아는 아비시니아 북부의 사마리(斯摩裏)와 아드리아해(亞得利亞海)에서 20마일 떨어진 사고대리(斯庫台裏)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흑삼군(黑衫軍)은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육군의 협공 진공을 받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 해군의 포격을 받아야 했다. 이로부터 우리는 흑삼군(黑衫軍)의 운명을 예측할 수 있다.
′무솔리니(墨索里尼)는 칼과 창′으로 교전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 무솔리니는 전리품의 찌꺼기라도 얻으려고 쇠약한 군마까지 동원하여 히틀러(希特拉)를 뒤쫓았다. 그러나 군마 등에 입힌 호랑이 가죽은 이미 영국과 그리스의 연합군에 찢겨 졌고 드러난 군마의 야윈 몸은 채찍의 고통을 이겨낼 수 없었다. 이미 절벽에 이른 무솔리니(墨索里尼)는 고삐를 조이고 군마를 멈추게 할 길이 없어 절벽에 떨어져 몸이 깨어지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2. 이탈리아의 가난

치아노(齊亞諾)의 말대로 이탈리아는 원래 재화가 부족하여 100만 여명 병사의 군비(軍備)를 제공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는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 원료, 즉 기름, 석탄, 철, 연, 동, 강철, 안티몬을 공급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에게 제공할 식량도 부족하였다. 위와 같이 이탈리아는 군수품 원료만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전쟁 기구에 특별히 필요한) 중공업 기구의 역량도 쇠약하여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현대화된 군대에 제공할 수 없어 공업 및 경제적으로 비교적 강한 독일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독일도 자기 자체의 군대에게 군수품을 제공해야 하고 또 이탈리아에서 필요한 원료는 독일에서도 부족하기 때문에 이탈리아를 도울 마음은 있었지만 여력이 없었다.
이탈리아의 공업에 대해 조사한 결과, 하락된 생산량은 놀라울 정도였다. 이탈리아의 공업 생산량은 평소 수요량보다도 적었다. 1938년의 통계 내용에 따르면, 평소 주요 원료의 수요량이 100일 경우, 이탈리아의 생산량은 다음과 같았다:
강철 37.1 안티몬 69.7
동 3.2 철 14.2
크롬 0 니켈 0.1
기름 0.7 고무 0
석탄 3.2 인산염(磷酸鹽) 0
이탈리아는 군수품 원료 중, 질산칼륨(硝酸鉀)과 아연, 그리고 알루미늄만을 공급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연철(熟鐵) 생산량은 독일의 20분의 1, 철 생산량의 독일의 10분의 1에 해당하였다. 200여 만명의 군대와 이탈리아의 해군을 유지하려면 이탈리아는 350만 톤의 강철과 200만 통의 연철을 생산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이탈리아는 필요한 수량의 절반에 해당한 원료도 생산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 이탈리아의 생산능력으로는 100만 명의 병사도 유지하기 어렵다. ′무솔리니(墨索里尼)′가 프랑스가 독일의 심한 공격을 받아 거의 붕괴되는 시기를 기다렸다가 참전했던 이유는 바로 위 내용으로부터 알 수 있다.
기름은 현재 전쟁 중, 제일 중요한 요소이지만 이탈리아는 자국(自囯)이 필요한 기름의 0.7%에 해당한 기름만 생산할 수 있다. 게다가 해외 수입은 미국에 의해 이미 봉쇄되어 필요한 기름을 해외로부터 수입할 수 없어 독일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독일도 이탈리아를 보살필 상황이 아니었다. 비록 무솔리니(墨索里尼) 가 많은 해군과 공군을 소유하고 있지만 기름이 없기 때문에 이들을 동원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알바니아 상공에서 위엄 있게 날아야 할 이탈리아의 철새(鉄鳥, 이탈리아 공군을 말한다)와 해군은 자기의 진지에서 폭탄이 날아 들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3. 파쇼적 군사력

′공군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라는 이론은 이탈리아 두흑(杜黑,Duhei)이 주장한 것이다. 이탈리아의 공군은 1937년 겨우 타국과 대등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공업이 낙후되어 있고 원료가 부족한 탓으로 결국 다른 국가들과 경쟁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 공업제품의 품질과 수량은 열세에 몰려있었다. 현재 이탈리아 항공공업은 매월 350대 정도의 비행기를 생산할 수 있다. 이 수량은 미국 금년도 3월의 생산량 1110과 비교하면 그 생산력이 너무 뒤떨어진 것이다.
무솔리니(墨索里尼)가 늘 800만 병사로 세상 사람들을 위협한다고는 하지만 비록 800만~1000만 병사를 동원할 수 있다하더라도 현재 이탈리아는 이 중 40%의 병사조차도 무장시킬 능력도 없다. 아무리 병사를 많이 동원하더라도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 어찌 전쟁할 수 있겠는가? 현재 이탈리아 공업 기구의 생산력으로 보아, 최대 80만 ~ 120만 병사 정도 밖에 무장시킬 수 없다. 현재의 전쟁 상황에서 100만의 병사를 동원할지언정,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프랑스가 붕괴되면서 작전 능력을 상실한 후, 이탈리아의 해군이 우세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중순, 타란토(大蘭多)에서 영국해군의 일격으로 이탈리아 총 해군의 절반 이상은 소멸되었고 6척의 주요 군함 중, 3척만 남게 되었다.그리고 3월 28일, 지중해에서 나머지 해군은 영국 해군에게 전부 소멸되었다. 긍양한(肯琅漢)장군은 "이번 해상 전역 중, 이탈리아는 3분의 2의 주력 군함을 잃고, 40%의 구경 8인치 대포 구축함(驅逐艦)이 손실되었으며 25%의 구경 6인치 대포 순양함(巡洋艦)이 손실되었고 20%~31%의 잠수함(潛水艇)이 손실되었다. 이번 두 차례의 패전을 겪은 후, 이탈리아의 해군은 끝장나게 되었다. 게다가 연료가 부족하여 마음대로 활동할 수 없기 때문에 지중해에서 활동하는 영국의 군함을 침공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국의 해안을 지키기에도 힘들다."고 말했다.

4. 치명적인 봉쇄

이탈리아는 자국(自囯)의 자원과 군비가 부족한 이유로 해외로부터 많은 것들을 수입해야만 했다. 영국이 이탈리아의 수입을 봉쇄한 후, 이탈리아는 보다 어려운 지경에 빠졌는데 이는 주요 수출 경로과 중요한 교통로가 모두 지중해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38년, 이탈리아의 화물 총 수입 량은 24,000,000톤에 달하고 그 중, 20,000,000톤은 지중해를 통해 수입된 것이며 이는 총 수입 경로의 80%를 차지한다. 20,000,000톤 화물 중, 200만 톤의 화물은 지중해 인근 국가로부터 수입하고 나머지는 전부 수에즈운하(蘇伊士運河) 혹은 지브롤터해협(直布羅陀)을 경유해 수입한 것이다. 지중해를 경유해(현재 통하지 않음) 수입한 2천만 톤의 화물 중, 4분의 3은 전부 군수품에 반드시 사용해야 할 석유, 철, 석탄, 고무, 목화(棉花) 등이다. 선전포고 후, 이탈리아의 상업은 유럽대륙을 목표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쟁 중 이탈리아는 유럽 대륙에 무엇을 수출하고 또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무솔리니(墨索里尼)가 이 특별한 시기를 선택한 것은, 프랑스가 패전한 후 많은 전리품을 얻어 이후 전쟁준비를 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틀러(希特拉)는 전쟁이 끝날 무렵에 참전한 이탈리아에 대해 인색하기 그지없었다. 히틀러(希特拉)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탈리아가 과서가(科西嘉), 튀니지(突尼西亞), 적일녹제(狄日鹿蒂), 니사(尼斯), 여쇄불(如灑佛)등을 점령함을 불허하였다. 그리하여 무솔리니(墨索里尼)의 희망은 환멸로 변했다.

5. 들끓는 반전(反戰) 분위기

국내의 소자산계급(小資產階級)들은 이탈리아의 참전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군인 사회의 인사들도 이건 너무 무모한 모험이라고 두려워하는 태도였다. 따라서 통치계급의 일부 인사들도 자기들의 이익과 다년간 영국과의 친근한 정책 관계를 감안하여 이번 참전을 반대했다. 1939년 9월부터 1940년 6월까지, 파쇼 당 내부에서도 무솔리니(墨索里尼)가 ′유럽 전쟁에 참가′함을 반대하는 추세였다. 하지만 전쟁을 통해 돈을 벌고, 경제적 이익이 영국 및 프랑스와는 상관없이 독일공업과 긴밀이 연계된 일부 실업가(實業傢)들은 무솔리니(墨索里尼)가 전쟁에 참가함을 지지했다.
다나개니-몽특가지니(多奈蓋尼-蒙特嘉地尼)화학품신탁공사총재(總裁), 치아노-터니(齊亞諾-特尼) 군사무기제조공장 주주, 애길내리-부아특(艾吉奈利-夫阿特) 공장 총 관리자 및 기타 독점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솔리니(墨索里尼)가 전쟁에 참가함을 지지했다. 아비시니아전쟁(阿比西尼亞戰爭) 이후, 몽특가지니(蒙特嘉地尼) 화학품신탁공사의 상금은 6억 리라[이탈리아의 화폐 단위,(1.93불에 해당)]에서 13억까지 상승하였다. 특니(特尼) 군사무기제조공장과 부아특(夫阿特) 공장도 큰 이익을 얻었다. 때문에 상술된 독점주의자들은 전쟁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솔리니(墨索里尼)가 전쟁에 참가함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 총 사령부가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군대가 식민지에 계속 존재할 경우, 완전히 패배하였다고 객관적인 결론을 내릴 수 없다. 프랑스가 전쟁에서 패배하였지만, 영국은 지금까지도 존재하고 있으며 영국을 정복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미국이 영국을 부단히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영국의 저항력은 점점 강화되고 있다. 무솔리니(墨索里尼)는 참전할 생각만 하고 이런 내용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무솔리니(墨索里尼)는 아비시니아를 점령했듯이, 몇 개의 독가스 폭탄으로 그리스를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간섭′시대는 이미 지났고 현재 무솔리니(墨索里尼)는 강력한 적을 상대해야 한다. 최초 그리스의 강력한 반격은 파쇼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파쇼의 약점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군수품 연료가 부족하고 게다가 상품 시장도 잃은 상황에서 이탈리아 경공업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시장을 잃어 농산물을 수출할 수 없기 때문에 농업도 큰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실업계(實業界)의 인사들과 농업가들은 이번 전쟁, 특히 독일과의 전쟁을 결연히 반대했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번 전쟁을 반대하고 파쇼주의를 반대함과 동시에 연합하여 자신들의 적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3월 30일 베오그라드(貝爾格萊德) 로이터사(路特)의 전보 내용 중 "요즘 미국 전장에서 무솔리니(墨索里尼)가 살해 당했다는 풍설이 돌고 있다." 라고 밝혔다. 이건 단지 헛소문에 불과하지만 이로부터 우리는 현재 미국의 불안정 상태와 이런 국면이 곧 전쟁을 초래하게 됨을 알 수 있다. 4월 1일, 콜롬비아방송공사, 로마 특파원 발우부인(勃郵夫人)은 "2개월 전, 이탈리아 내부에는 혁명운동의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하고 파다격리오(巴多格利奧) 장군과 내각(内閣) 부장들은 전부 이러한 혁명운동을 지원하였다."고 전했다. 하지만 기밀을 잘 지키지 못한 탓으로 무솔리니(墨索里尼)가 이 일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들을 전부 없애 버리려고 대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내부에서의 혁명은 불가피한 상황으로 되어버렸다.
국민들은 여러 가지 제한을 받게 되었다. 매월 500리라의 급여 중, 120리라는 세금으로 무조건 지급해야 했다. 이 외, 1%의 ′가족 복지세(福利費)′, 1.5%의 ′겨울 자선세(慈善稅)′를 지급해야 했으며 겨울 자선세는 1.5%에서 3%까지 증가되었다. 국민은1%의 ′식민지 복지세(福利費)′를 지불할 뿐만 아니라, ′동업공회기부금(工會捐)′, 구제기부금(互助捐), 부녀출산기금기부금(婦女生産基金捐), 남성독신기부금(獨身捐), 장애기부금(殘廢捐), 양로기부금(養老捐), 실업기부금(失業捐) 등을 납부해야 하고 상술된 세금과 기부금은 총 급여의 20% 비중을 차지한다. 아울러 20%의 병사가족기부복지세(士兵家屬捐福利稅)를 추가하여 국민의 부담은 점점 커져만 갔다.게다가 생활 용품과 식량 가격이 나날이 상승하는 추세였다. (예: 빵 1그램: 3리라,3등급 고기 1그램: 14리라).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 생활이 안정될 수 가 없었다. 이미 6만 여명의 농민 가정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인데 이들이 장기간 이런 착취를 받으면서 생활할 수 있겠는가?
파쇼주의에 대한 소자산계급(小資產階級)의 불만은 나날이 커져만 가고 부유한 계급 중에도 분열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불만을 통해 각 계층의 인민들이 이탈리아가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월 이전, 파쇼 당서기(黨書記) 새서나(塞瑞那)는 경찰서 관련 인원들과 회의를 개최하고 회의 중, ′내부전선′이 나날이 악화되고 있음을 표시하였다. 따라서 파쇼 신문은 자극적인 어투로 "자각자(自覺者)","비관주의자", "실패주의자" 및 "평화주의자" 등을 비난하였다. 이는 머지않아, 이탈리아에서 사면초가의 상황에 처하게 됨을 설명해 주고 있다.

6. 착취 받던 인민들의 반항

그리스 군대가 알바니아에서 승리를 거둔 후, 알바니아 인민들의 광복에 대한 정열은 불타 오르기 시작했다. 알바니아 인민들은 적군이 고난에 처한 기회를 타서 후방을 습격하는 등 광복운동을 진행하여 자유를 얻고 나라를 독립시키려고 했다. 1920년, 알바니아 인민들은 이탈리아의 군대를 철퇴하게 하고 많은 어려움을 이겨냄과 동시에 자유화된 독립 국가를 성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독립과 자유를 위한 인민의 혁명, 그리고 이집트에서 격서첨니(格瑞詹尼)의 패배는 이탈리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때 착취 받던 리비아의 아자백(阿刺伯)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격서첨니(格瑞詹尼)에게 원수를 갚으려 했다.
아비시니아 인민들은 흑삼군(黑衫軍)과 끊임없이 유격전을 벌였고, 아비시니아 활동 지역에서 줄곧 이탈리아 공산당의 지원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무솔리니(墨索里尼)를 고민에 빠뜨리게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6일, 카이로 UPI(合眾社) 전보에 따르면 ′영국은 아두와(阿杜華), 아디스바바(亞的斯貝巴)를 이어 아비시니아까지 공격했다′고 전했다. 앞으로 셀라시에(塞拉西)는 또 다시 제위에 오를 것이다. 1935년 이탈리아는 많은 국력과 병사를 희생시켜가며 아비시니아를 점령하였지만 결국 다시 상실했다.

7. 앞으로의 운명

무솔리니(墨索里尼)는 결의형제인 히틀러(希特勒)의 관리하에 자유를 잃었다. 따라서 지중해의 활동 지역은 이미 나치(納粹)부대에 점령 당하고 히틀러가 비밀리에 파견한 경찰이 이탈리아의 각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3월 30일 런던 국제사(國際社)는 ′이탈리아에서 중립 인사를 영국에 파견하여 영국과 직접 화해하려 하였지만 히틀러의 반대로 지체되었다′고 밝혔다. 따라서 ′10개월간의 전쟁을 겪은 이탈리아는 현재 완전히 실패하였다. 독일은 이탈리아가 암암리에 영국과 화해함을 막기 위해 이탈리아를 잘 감시하고 있다. 독일은 8주간의 시간을 이용하여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이탈리아를 쉽게 점령하였다. 실제적으로 이탈리아는 이미 독일의 한 개 성(省)으로 된 것이다.′
오늘날의 이탈리아는 10개월 전, 일거수 일투족(舉足輕重)이 전체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유럽 형세를 전환시킬 수 있는 그런 이탈리아가 아니라 곳곳에 상처를 입은 공격을 하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무너지는 그런 폐국일 뿐이다. 군사적으로 볼 때, 작전을 수행할 능력을 잃었고, 외교적으로는 독일의 종속된 처지에 불과했다. 국내에서는 혁명의 불길이 일고 있고 국외의 식민지에서는 인민들이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얻기 위해 해방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히틀러(希特拉)가 통제하고 있어 국가 정책 문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전쟁을 하고 싶지만 그럴만한 능력이 없는′상황이었다.
이번 독일이 그리스 남쪽 지역을 침략할 때, 이탈리아는 의외로 10만 병사를 파견하여 독일을 협조했다. 유고슬라비아도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설마 독일이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이탈리아는 헝가리, 오스트리아, 로마니아, 불가리아 등 국가와 같이 독일의 예속국가가 될 것이다. 히틀러(希特拉)가 새로 제정한 ′유럽 계획′은 바로 북쪽의 노르웨이와 스웨덴, 남쪽의 지중해 등 지역 중, 무솔리니(墨索里尼)의 일체 활동을 금지하는 것이다. 영국이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현재 상황으로 보아, 이는 추측일 뿐이다), 이탈리아의 자기의 국기를 내 걸 수도 있겠지만, 지중해는 더 이상 이탈리아의 내해(内海)가 아니고, 아드리아해(亞得利亞海)는 더 이상 이탈리아의 내호(内湖)가 아니다. 영국과 독일이 대립상태를 유지할 경우, 이탈리아는 영원히 독일의 통제를 받아야 하고 더 이상 독립 및 자유의 국가를 꿈꾸지 못하게 된다.
무솔리니(墨索里尼)가 어떤 방법을 적용하든, 혹은 어떤 행동을 취하든, 이탈리아는 결국 붕괴된다. 독일이 승리하는 날이 바로 이탈리아의 마지막 날이다. 그리고 영국이 승리하는 날은 바로 이탈리아의 심판의 날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탈리아의 실패는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4월 12일 78사(師)군

적군의 상황(적정,敌情)에 대한 연구

일본의 남진(南進) 전략에 대한 추측

1. 설자(偰子,상조(商朝)의 시조(始祖)

마충량(馬忠良)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시, 조정의 관리중, ′북진(北進)′과 ′남진(南進)′ 두 개의 파(派)가 존재했다. 북진론(北進論)의 수령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鄉隆盛)로 그는 무력으로 한국을 점령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파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鄉隆盛)를 반대하고 남진론(南進論)은 제창했다. 천황은 ′천하의 정치의 정확 여부는 공론(公論)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제로 회의를 개최하고 정한론(征韓)을 반대했다. 따라서 사이고 다카모리(西鄉隆盛)는 퇴직하고 남진론이 우세를 차지했으며 1874년 4월 대만을 공격했다. 그 후,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가쓰라 고무라(桂太郞小村) 등은 북진론을 계승하고 "영국과 친하게 지내고 러시아에 대항"함을 주장했다. 1902년 영·일 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을 공격했다. 1931년 북진론은 그 우세를 완전히 보여주었지만 ′9.18사변′의 발생은 막을 수 없었다. 따라서 ′7.7사변′이 발발 후, 북진론은 점점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남진론′은 ′러시아와 친하게 지내고 영국에 대항′함을 주지로 했다.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이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井上)등이 남진론을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북진론 군벌의 기세가 당당하고 또 일본 해군 실력이 약한 탓으로 해상 패왕과 승패를 다툴 수 없음으로 자기들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1936년, 일본 국내의 일부 지식인들은 중국을 침략하고 동아시아를 독차지하고 세계를 병탄하려면 우선 남진론을 실시해야 함을 인식했다. 해군의 대표자 이시마루 후지타(石丸籐太)대좌(大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의 생명선은 3개로 나눈다. 첫 번째는 대륙을 향한 생명선, 즉 ′만주국′.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해양을 향한 생명선이다. 두 번째 생명선은 주로 우리(일본)가 통치하고 있는 많은 섬들을 가리킨다. 세 번째 생명선은 바로 외남양(外南洋)에 두고 있다. 즉 네덜란드령 동인도(東印度), 필리핀 군도와 영국령 북보르네주(北婆羅洲)등 섬을 포함한다. 이 3개 생면선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생명선은 이미 일본의 통치하에 있지만 세 번째 생명선은 아직 획득하지 못 했다. 그러나 일본이 태평양에서 정치와 경제적 위치를 확보하려면 반드시 이 세 번째 생명선을 이용해야 한다." 해군 대표자의 이런 주장에 따라 일본은 실제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여름, 일본은 병사를 파견하여 베트남에 침입하고 최근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착취하였으며 무력으로 태국과 베트남 사이의 분규를 분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해남(海南)으로 군사를 집중시켰다. 그리고 독일 및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은 후, 영국을 반대하고 미국을 배척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일본은 전통적 전술, 즉 남진정책을 실시하고 외남양(外南洋) 지역으로 움직이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럼 일본이 왜 남진 정책을 실시하는지? 언제 실시하는지? 실시 후의 결과는 어떠할 것인지? 아래 이 3개 문제에 대해 논의해 보도자 한다.

2. 일본은 왜 남진 정책을 실시하는가?

현재 중국과의 전쟁에 파묻힌 일본이 왜 급히 남진 정책을 실시하려 하는가? 아마 일본 입장에서 이 문제에 해답하려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첫째, 경제적 원인. 경제는 한 나라의 명맥이며 국가의 성쇠와 전쟁의 승패 여부는 그 국가의 경제와 긴밀이 연계되어 있다. 일본은 국토가 척박하고 국민이 빈곤하여 경제가 비교적 어려운 국가이다. 때문에 기타 자본주의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일본의 경제는 주로 국제 무역에 의존한다. 다음 내용을 통해 일본의 어려움에 대해 설명하도록 한다. (주석: 아래는 유명한 미국물자전략(物資戰略) 연구원 발락극사(勃洛克斯) 씨와 애명(愛明)씨가 각 나라의 전쟁 필수 물자 자급 비중을 나열한 것이다.).
전쟁 물자 자급율(%)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독일 이탈리아 일본
식량 101.76 51.01 94.63 101.15 78.30 95.52 100.00
강철 100.00 96.62 111.80 99.10 104.18 37.05 58.52
기계 110.66 129.01 92.54 63.85 128.01 67.36 66.22
화학품 100.18 100.18 108.18 95.42 129.07 93.55 90.97
석탄 104.02 136.17 70.64 103.10 122.75 3.17 108.05
철사 97.62 69.69 139.80 106.76 29.87 76.40 65.17
석유 및
제품 106.41 2.43 2.55 133.56 5.37 0.70 17.17
동 117.79 0.08 0.25 62.04 11.11 1.58 92.41
연 95.82 6.18 6.97 27.58 28.94 69.65 6.12
질산염 67.42 250.39 61.17 37.12 129.96 81.76 67.81
유황 및
황철광 133.12 25.31 13.55 88.88 19.37 150.53 101.84
면화 215.42 85.56 0.06 4.33
알루미늄54.38 3.33 31.46 24.20 1.48 87.63
아연 110.59 0.39 5.20 54.26 60.02 265.04 24.59
고무
망간 7.90 0.30 269.64 0.07 14.52 43.20
니켈 2.31 0.12
크롬 0.12 0.89 131.61 99.70
텅스텐 23.90 2.36 0.60 0.85 20.00
양모 54.57 22.17 7.42 81.54 9.78 26.06
카레 28.87 253.30 99.34 148.71 25.54 4.88
인산염 136.90 30.57 52.38 86.57 14.99 13.99
안티몬 0.27 52.85 50.80 0.74
주석 0.03 7.58 13.10
수은 39.98 86.46 505.57 0.14
운모 90.73 102.21 100.00
위에 언급한 26종의 물자 자급 비중으로 일본의 상황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국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열강의 전쟁 경제력 28페이지 내용 참조). 영국 로이얼(皇家) 국제연구소의 조사 내용에 따르면 열강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중요한 군수물자는 34가지로 나누어 진다. 일본의 자급정도는 아래의 표와 같다. (주 : 아래의 표는 위의 표와 마찬가지로 통계숫자이며 자료의 출처에 따라 조금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국민출판사의 열강전쟁경제력 34쪽을 참고하기 바람)
과잉물자 : 유황, 황철광, 실
자급자족 : 동, 석탄
부분부족 : 망간, 텅스텐, 금강석, 석면, 모시풀, 목재
전무(全無) 혹은 대부분 부족 : 은, 납, 니켈, 안티몬, 마그네슘, 수은, 석유, 린(鏻,번역불가능), 카레, 백금, 고무, 면화, 양모, 아마(亞麻), 황마(黃麻), 대마(大麻), 마닐라삼(馬尼拉麻), 식물기름
위의 표로부터 일본의 경공업과 중공업 그리고 기타 필수 자원은 대부분 자급자족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국내 지역은 매우 좁고 국민들도 가난하며 인구도 많지 않아서 사회구매력이 매우 낮다. 일본은 식민지 또한 넓지 않아서 만든 물건들은 반드시 국제시장에 팔아야만 한다. 이러한 경제적인 이유에서 일본은 원자재의 공급지를 확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상품의 소비지를 획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일본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조건인 것이다.
중국대륙은 본래 발전에 가장 적합한 지역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모든 힘을 다 동원하여 대규모의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지난 3년 9개월 동안 중국측의 용맹스러운 투쟁은 중국을 삼킨다는 일본대륙정책의 헛된 꿈을 분쇄시켜버렸다. 결국 중국침략은 일본의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 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본이 축적한 많은 물적자원을 소모시켰다. 이 시기 일본의 국제무역은 미국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남진(南進)을 시행한 후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공전의 악화를 가져왔다. 결국 미국은 일본을 제어하기 위해 조약을 파기하고 금운(禁運)조치로 일본을 견제했다. 일본의 경제는 급격히 고갈의 길로 들어갔다. 그래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출로를 모색해야 했고 정책을 바꾸어 외남양(外南洋) 그 생명선을 얻으려 했다.
일본이 소위 말하는 외남양은 네덜란드령 인도(荷印), 필리핀(比律賓), 말레이시아반도(馬來半島), 북파라주(北婆羅洲) 및 포루투칼령 마이(摩爾) 등지를 가리킨다. 면적은 일본의 세개 섬보다 약 6배 정도 크며 자원이 풍부한 지역으로 특히 군이 필요로 하는 원료가 많은 지역이다. 예를 들면 고무(세계 총생산량의 80%를 차지), 모시풀(세계총생산량의 94%를 차지), 석유, 양모, 동, 철, 은 등과 같은 풍부한 자원이 있다. 인구는 약 1억 정도 이며 공업은 낙후되어 있다. 하지만 하나의 거대한 소비시장이기도 하다. 일본은 처리해야할 완성 제품과 반완성 제품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이 실질적인 지역을 취득하면 일본이 수십년 동안 근심하며 해결하지 못한 3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즉, 원료시장, 상품시장, 투자시장이다. 일본으로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해 파탄지경에 와 있는 경제에 기사회생의 실제 힘을 가져다 줄 것이기에 점령을 서둘렀고 그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던 것이다!
두번째는 군사적 원인이다. 일본은 ′중국사건(中國事件)′을 조속히 마치기 위해 국제간의 중국에 대한 원조를 반드시 끊어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남양(南洋)을 점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국에 대한 봉쇄를 완성할 수 있다면 중국을 쉽게 굴복시킬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세번째는 정치적인 원인이다. 일본군벌의 중국침략은 3년 9개월 동안 효과가 없었다. 국내에 여론은 들끊었고 특히 온건파의 불만으로 가득 찼고 혁명운동은 무르익어갔다.
육군의 중국침략에 대한 책임을 만회하기 위해 국민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현재 국가가 가지고 있는 약간의 돈을 끌어들여 새로운 모험을 감행하기로 한 것이다. 해군은 남양(南洋)으로 가는 도박을 했고 또한 중국이 위기에 빠질 때를 노려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했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남양침략은 경제적 원인이 비교적 중요하다. 군사적, 정치적 원인은 오히려 그 다음이다. 왜냐하면 일본은 군벌제국주의이기 때문에 경제력이 매우 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제가 막다른 길에 다달았을 때 그들의 군대 또한 겉은 강해 보이지만 속은 텅 비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붕괴의 길로 들어간다.

4. 남진(南進) 이후의 결과와 앞으로의 전망

만일 일본이 지금의 기회를 잘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떠한 조건에 상관없이 바로 무력으로 남진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 우리가 살펴본 바에 근거하여 말하자면 남진의 직접적인 결과는 미일(美日)전쟁이다.왜냐하면 미국이 비록 자원이 풍부하다고 하지만 고무, 은, 마(蔴)와 같은 몇 가지 필수자원은 여전히 그들의 식민지인 필리핀과 남양(南洋)의 기타 각 섬으로부터의 공급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미국 상무부(商務部) 보고에 의하면 매년 남양(南洋)각지로부터 미국에 들어오는 원료는 상당한 양에 달한다. 1937년 미국이 수입한 각 원료의 항목을 백분율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 아래 도표의 백분율은 미국의 동종(同種) 화물 총 수입량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임
네덜란드령 인도는 현재의 인도네시아임
원료명칭 원산지 백분율
크롬(鉻) 필리핀 16%
망간(錳) 영국령 인도 7%
마(蔴) 필리핀 100%
운모(雲母) 영국령 인도 87%
퀴닌(奎寧) 네덜란드령 인도 86%
고무(像皮) 영국령 말레이시아, 네덜란드령 인도 91%
은(銀) 영국령 말레이시아 76%
등유(燈油) 중국, 영국령 말레이시아 86%
모(毛) 중국, 호주, 뉴질랜드, 영국령 인도 46%
가죽(革) 중국, 뉴질랜드, 호주, 영국령인도, 네덜란드령 인도 30%
식물기름(植物油) 네덜란드령 인도 95%
정제된 철(鍇) 영국령 인도 100%
이상 열거한 물품들 가운데 앞의 9개 항목은 모두 군이 필요로 하는 원료들이다. 이 물품들은 대체물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타 지역으로부터 사들일 수도 없다. 현재 일본의 국제무역은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일본이 남양(南洋)지역을 차지하게 되면 지금과는 반대로 미국이 일본이 공급하는 필수원료에 의존하게 되는 다시 말해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똑똑한 엉클샘(由姆叔,미국을 지칭함, Uncle sam)이 자기 생명에 필요한 남양(南洋)을 순순히 일본군이 남진하도록 내버려 두겠는가!
미국의 정론가(政論家) 리프만(李普曼)이 한 말은 매우 일리가 있다."파나마로부터 하와이 그리고 중도의 섬을 경유하여 마닐라와 홍콩에 이르는 이 선(線)은 여전히 미국의 생명선이다." 최근 미국은 중국을 지원하고 영국과 연합하는 정책 그리고 마카오와 연합하여 방어하는 것과 같은 정책을 추가했다. 그리고 싱가폴 군항(軍港)을 이용을 준비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은 미국이 원동(遠東)의 이익과 유지를 위해 일본남진에 대한 방어의 범위를 명확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결론적으로 말해서 일본이 만일 경솔하게 남진을 실시한다면 미국은 반드시 그에 맞서 싸울 것이다.

5. 결론

일본은 중일전쟁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미국에 의존했던 과거의 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제적 활로를 찾으려고 한다. 아울러 기회에 편승해 동아시아에서 홀로 패권을 차지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완성하려하고 있다. 영국이 동쪽에 관여할 여력이 없을 때 그리고 미국이 광범위하게 해군력을 확충하는 계획이 완성되기 전, 즉 올해 안에 일본은 무력으로 남양군도의 각지로 진격할 것이다. 그에 대한 결과로서 미일(美日)전쟁은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미국해군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원동(遠東)해군과 연합할 수도 있고 원동(遠東)의 각 군사근거지를 이용하여 일본에 대해 공격할 수 도 있다. 결국 일본은 함정에 빠져 붕괴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남양(南洋) 이 보고는 지리상으로 우리나라(중국)의 울타리와 같은 경계이다. 경제적으로는 화교가 생명을 기탁하는 곳이다. 일본이 일단 진공(進攻)하면 우리나라(중국)를 더욱 철저히 침략하겠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수수방관할 수 없으며 마땅히 적극적으로 총반격에 돌입해야한다. 아울러 하노이(河內)로 출정하여 일본붕괴의 촉진과 우리나라 항전건국의 대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정면에서 침략자들에게 공격을 가해야만 한다.

군사학 논저

원뿔형(錐形)전법에 대적하는 방법연구와 향후대책

1. 원뿔형(錐形)전법과 우회(迂廻)전법의 차이점과 공동점

(A) 차이점
원뿔형전법은 정략(政略)상 목적을 신속히 달성하기 위한 전략, 전술, 전투의 총체적인 행동에 속한다. 핵심은 정략(政略)적 목적에 있고 전법의 실시 또한 정략(政略)상의 목적이 전략, 전술, 전투상의 행동이 되는 것이다. 적으로 하여금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고 또 싸우지 않고 괴멸시키′게 만드는 전략, 전술, 전투에 그 목적이 있다. 주전력(主力) 방면과는 특별한 관계가 없다.
우회전법은 전술, 전투의 총체적 행동에 속한다. 전략(戰略)상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에 핵심은 당연히 전략(戰略)상의 목적에 있다. 그 실시도 당연히 전략(戰略)적인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이는 전술, 전투상의 행동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전술, 전투상의 행동은 절대로 주력 전략행동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군이 단독으로 행동한다. 그러므로 ′우회(迂廻)′라 하는 것은 작전군이 그 전략상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 병력을 파견한다. 이 일부 병력의 일체의 행동은 모두 그 주력방면과 연락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주력 작전을 협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두 전법의 서로 다른 점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B) 공통점
원뿔형전법은 우회의 행동으로 그 돌입(突入)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작전을 실시할 때 ′신속′과 ′비밀′이 가장 중요시 요구된다. 우회전법은 우회 행동의 계열이므로 그 우회목적을 달성하는데 목적이 있다. 작전을 실시할 때 역시 ′신속′ 과′비밀′이 가장 중요시 요구된다.

2. 원뿔형(錐形)전법과 중앙돌파(中央突破)의 차이점과 공통점

(A) 차이점
원뿔형전법은 전략, 전술, 전투상의 총체적 행동과 관계가 있다. 그 정략(政略)상의 목적을 달성함에 중심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앞에서 서술했다. 중앙돌파는 전술, 전략, 정략(政略)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순전히 전투상의 행동이다. 왜냐하면 중앙돌파는 곧 ′결정적인 힘을 수반한 행동(決力的行動)′이며 전투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작전의 성공 후에는 적군을 물리칠 수도 있고 또한 적국을 멸망 시킬 수도 있다. 그 목적은 전술, 전략, 정략(政略)의 범위에 있다. 전법의 실행에 대해 원뿔형전법은 이미 위에서 서술하였기에 생략한다. 중앙돌파의 실시는 주력(主力)을 이탈하지 않도록 지휘하고 장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중앙돌파는 정략(政略), 전략, 전술상에 목적이 있는 전장(戰場)내에서의 결정적인 힘을 수반한 행동(決力的行動)이다.
(B) 공통점
중앙돌파를 실시할 때의 비결은 적 진지의 약점을 찾는 것이다. 우세한 병력을 집결시켜 신속, 비밀, 용감, 결단의 원칙 아래 적진지에 돌입한다. 원뿔형전법은 이와 완전히 동일하다. 이상의 설명 이외에도 ′병력방면′과 전과(戰果)를 확장하는 방면′에 대해 아직 특수한 곳이 있어 더 자세히 서술하기로 한다.
1) 병력방면
중앙돌파시 사용되는 병력은 최소 한도(限度)로 일개 분대(一班)이며 최대 한도는 100만을 집중시킬 수도 있다(현대독일군의 돌파전과 같이) . 심지어 전국의 병력을 모두 동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원뿔형전법은 그렇지 않다. 수년간의 항전경험에 근거해 보면 적들이 사용하는 병력의 최소 한도는 전술단위의 일개 대대(大隊)(소수의 기계화 부대가 함께 편성된)이고 최대 한도는 아직 하나의 전략단위(일개사단)을 넘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일개 사단보다 더 많아지면 이동과 보급이 모두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즉 병력상의 차이점 이라고 할 수 있다.
2) 전과(戰果)를 확장
중앙돌파는 적진지의 어떤 부분을 돌파하여 양익(兩翼)으로 확장한다. 적진지의 양익을 석권함으로써 후진할 필요가 없으며 또한 적 후방의 깊이 들어갈 가능성도 없다. 그러나 원뿔형전법은 그렇지 않다. 적진지를 돌파한 후 …(원본판독불가)… 또한 추격할 때에도 일체 다른 것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즉 환경이나 적의 상황에 현혹되거나 방해 받지 않는다. 틈을 찾아 깊이 들어가 중요한 곳을 빼앗거나 교통의 요지를 점령하고 또 정치기구를 괴멸시켜 전투의지를 꺽어버린다. 그래서 전쟁을 하지 않고도 적을 굴복시키고 싸우지 않고 괴멸하게 만든다.

3. 원뿔형전법 원칙의 운용

원뿔형전법의 실시는 아래 4개 원칙에 예외가 없다.
(1) 주동(主動, 즉 主導)의 원칙 :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반드시 전투를 주도한다.임의로 돌격할 지점과 돌격할 시간을 선택 병력을 사용하고 적의 상황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2) 신속의 원칙 : 신속하지 못하면 적의 의표를 찌를 수 없다. 신속함이 없다는 것은 즉 기동력이 없다는 것이다. 기동력이 없다면 기회를 이용할 수도 또 기회를 잡을 수도 없는 것이다.
(3) 비밀기도(企圖)의 원칙 : 돌격 전(前)이건 돌파 중이건 혹은 돌파 후에 상관없이 일체의 기도(企圖)와 행동을 적으로 하여금 알기 어렵게 하여 적의 의표를 찌른다. 느닷없는 갑작스러움으로 적을 당황하게 만들어 대적하지 못하게 한다.
(4) 확고부동함과 결단의 원칙 : 원뿔형전법을 실시할 때 종종 예상 밖의 습격을 받거나 열악한 환경에 포위되기도 한다. 이때 지휘관이 강한 의지와 확고부동한 결심을 잃게 되면 실제로 곤궁한 환경을 타파하는 것이 어려워 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신상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4. 원뿔형전법의 전술상의 지위

원뿔형전법은 시대의 소산이며 기회를 이용하는 전법이지만 결코 기이(奇異)한 것은 아니다. 일체의 행동은 일반 전술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아서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고 말할 것은 없다.그러나 적군의 입장에서 보자면 장비가 열악한 우리 군을 상대하는데 적합한 작전술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좋은 대책이 있다면 무엇이 그 두렵겠는가.

5. 원뿔형전법의 대책

A 돌파전의 대책
(1) 긴밀한 연락 : 항전이래로 부대(部隊)와 부대간 또 종대(縱隊)와 종대간 통신기자재의 부족으로 인해 통신망을 면밀하게 구성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적의 첩보조직은 매우 조직적이어서 매번 쉽게 적에게 틈을 허락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적에게 우리 군 진영으로 쳐들어올 기회를 내주곤 하였다. 앞으로는 더욱 노력해서 첩보조직을 강화해야만 한다. 민중들을 골라 첩보조직을 견고하고 세밀하게 만들고 간이(簡易) 통신법을 이용하여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야 한다.
(2) 협동작전 : 수년간 항전해 오며 각 부대는 상호협력방면에 있어 아직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매번 각자 전투를 해서 보다 큰 국면을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이해관계만을 중요시하다가 적들에게 깊이 들어올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 앞으로는 철저히 전시연좌법(戰時連坐法)을 실시하여 이전의 ′스스로 돌본다(自顧自)′는 태도와 주의를 고쳐야 한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교훈을 유념하고 아울러 ′각개격파(各個擊破)′와 같은 전투는 서로 경계해야 한다.
(3) 강력한 예비대를 배치한다 : 각 작전구역(戰區)의 지구대(地區隊)의 책임자는 전략적인 방면에 주의를 기울여 적이 반드시 쳐들어 올 예상 지구(地區)에 강력한 예비대를 배치하여 긴급상황에 활용한다.′전시에 부족한 부분을 보충戰傷彌縫)′ 하거나 ′기동력을 사용(機動使用)′할 수 있게 한다.
B 돌입후의 대책
(1) 중요한 곳을 지킨다 : 수년 동안의 항전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적은 공격해 들어온 후 매번 동쪽을 점령해서 서로 침략해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비록 어느 정도의 저항에 부딪치면서도 적이 계속 그렇게 추진할 수 있었던 까닭은 우리가 중요한 곳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요하지 않은 곳은 ′지키고자 하는(欲守)′ 것도 없었다. 적은 우리의 힘(元氣)이 약해지면 대담하게 깊이 쳐들어온다. 앞으로도 적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쳐들어온(突入) 후에 중요한 교량, 지형지물, 군대가 이동하는 길 그리고 주요한 성곽 및 교통의 요지를 노릴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중요장소에 마땅히 병력을 보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이런 요지를 사수하면 사수동안 그 만큼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부대는 병력을 보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사수하는 부대는 증원부대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사수할 수 없으면 적으로 하여금 상당한 시간과 병력을 소모시킨다.
(2) 저항을 지속함(逐步抵抗, 적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저항함) : 저항을 지속함으로써 시간을 벌어 적의 전투력을 소모시킨다. 각 요소 요소에 진영(陣營)을 두어 적으로 하여금 행동을 지체시킨다. ′죽음에 이르게 되는 작고 촘촘한 그물(死纑)′에 걸리게 만들어 적의 시간과 공간을 빼앗는다. 우리가 이렇게 진을 펼치면 적은 분명 공간을 넓히려 할 것이다. 적이 앞으로 오면 우리는 바로 뒤로 이동한다.
(3) 기동전(機動戰)을 시행함과 병력의 운용 : 우리는 열세한 장비로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적을 상대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동전을 시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아군의 우수한 병력으로 적군의 약한 곳을 집중 공략한다. 이 방법은 나폴레옹이 소위′철권전법(鐵拳戰法)′이라고 부르던 것이다. 적이 우리의 중요 부분을 공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기타부대는 기동전을 시행한다.′외선작전(外線作戰)′으로 적을 포위하여 섬멸한다.
(4) 측면공격과 허리공격 : 우리측 최고 영수(領袖)는 일찍이 측면공격은 적의 원뿔형전법을 방어하는 좋은 방법이라고 밝힌 바 있다. 혹은 계획성 있는 허리공격을 시도해도 좋다. 머리와 꼬리를 치는 격으로 시행하면 적은 수미(首尾, 머리와 꼬리)를 서로 돌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시행할 때에는 반드시 주도면밀한 계획과 상세한 배치가 요구된다.
(5) 유인과 매복의 운용(誘伏과待伏) : 이러한 종류의 작전은 반드시 지형과 서로 맞물려야 하며 조용히 숨을 수 있는 어느 정도 이상의 환경을 필요로 한다. 먼저 매복한 후 치밀한 작전아래에서 침착하게 응전한다. 그런 후에 아군이 매복한 장소로 적을 유인하여 적의 의표를 찔러 강력한 화력으로 일거에 적을 섬멸한다.

6. 결론

적의 원뿔형전법은 결코 기이한 전법이 아니며 현묘(玄妙)하여 예측할 수 없는 그런 전술도 아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 또 장소에 따라서는 장비가 열세한 우리 군대를 상대하기에 적합한 일반적인 군대작전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대책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해 오면서 현재 우리는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할 지를 알고 있다. 예전의 실수를 개선하고 현재의 개선된 정책을 실시한다면 왜놈들이 망하고 우리가 승리할 날은 바로 눈 앞에 다가올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대략적인 내용을 서술하였다. 앞으로 독자 여자분들의 많은 지적과 지도를 기다린다.

유방소지(遗芳琐志)

박백암(朴白巖)선생과의 필담추억록

노매(老梅) 

옛날(양력 1919년 가을)제가 상해에 우거할 때, 삼한 유민 박백암(朴白巖)선생과 대면하였습니다. 그는 한국통(韩國痛史)를 저술한 분입니다. 선생은 중국어가 통하지 않았기에 매번 제가 사는 곳으로 와서 만날 때마다 미소를 지으시며 필을 들고 술회하셨습니다. 그는 삼한민족의 독립운동상황을 소개하면서, 한국인은 오래지 않아 조국을 광복하는 대혁명을 발기한다고 하셨으며, 중국의 동지들과 함께 손을 잡고 나가길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뒤에 필을 들어 찬성한다고 표하고는 책상 머리에서 왕자산(王子山) 선생의 규서(葵书)을 꺼내고 기의(寄意)편의 맺는 말을 보여 드렸습니다. 기의(寄意)편에서 말하기를,“모르는 자는 그를 완고한 노인이라고 부르고, 아는자는 그를 전대의 유민이라 부릅니다. 일목이 열려있으면 혼란해지지 않고, 일맥이 잔존하면 멸망이 아니며, 노인 한 분만 남아 있어도 나라에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이 구절을 인용하여 선생은 연장자이고 지금은 백발창창한 노인이지만, 정신상에서는 청년들에게 지지 않는다고 비유하였습니다. 선생은 이를 보신 후 대단히 기뻐하시며 규서(葵书)를 몇편 펼쳐 보신 후 이렇게 쓰셨습니다.“우리의 소망입니다.”그리고는 기의편을 가리키면서“모든 우려가 없어지고 눈물만이 남았습니다. 우리 민족은 그들의 천민이 되는걸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구절을 가리키면서 쓰시기를,“이는 전체 삼한인민들의 소망입니다. 일본은 비록 강력으로 한국을 합병하였으나, 우리 한민족 중에 마음을 품고, 그들에게 귀순하는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여 최근에 비장한 삼일빈손유혈대의거가 폭발하였습니다. 비록 많은 희생을 내였지만 이는 혁명의 씨앗을 반도에 뿌린것입니다.”이에 대하여 저는 명이 멸망한 후 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지 않아 광복할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선생은 수긍하시고는 규서를 빌리고 떠나가셨습니다. 며칠이 지난후 다시 저의 곳으로 와서 규서를 돌려주시고는 이렇게 칭찬하셨습니다.“규서는 읽으니 마음이 후련해집니다. 출병(出兵) 편은 삼한광복군의 참고로 될 수 있습니다.”그리고는 저에게 선생이 저서한 한국통사를 보여주셨습니다. 선생의 문필은 실로 소탈하였고 한민족의 고통을 충분히 표현하여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고무, 격려하였습니다. 저는 필을 들어“선생의 저서는 규서와 공명할 수 있습니다.”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선생은 “저는 필적할 수 없습니다.”라고 필답하셨습니다. 이게 우리 두사람이 필담한 제일 마지막 구절이였기에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재작년에 선생의 아드님이 산서[秦]로 와서 저와 만났는데 그때에야 선생이 고통을 품은 채 세상을 하직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생이 삼한민족혁명에 남겨준 정신은 영원히 불멸할 것입니다. 선생의 성근함과 용모, 우리 두사람이 상해에서 만나 필담하던 옛일들이 아직도 눈앞에 살아있어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습니다. 선생의 아드님이 삼한독립광복군의 여러 동지들과 함께 선생의 유지를 이어받고 왜구가 중국을 침략한 오늘에 우리 중화의 혁명동지들과 함께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적개심을 불태우고 함께 항일전쟁에 노력할 것을 바랍니다. 왜구가 참패하는 날이 오면, 강력에 의하여 합병된 삼한이나 폭력에 의하여 함락된 중화나 동시에 광복될 수 있으며 우리 중한의 완전무결한 강산을 되찾고, 전 세계의 인도를 논하는 민족들과 함께 다시 대동성세를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암(白巖) 선생이 이를 알면 필히 황천에서 미소를 품을 것입니다.

이순신전 박백암(朴白巖)유서 -고금수군의 제일위인 세계철함의 발명시조-

이충무(忠武) 순신(舜臣)이 세상을 뜬 후 300여 년이 지나 한국이 멸망하고, 한국이 멸망한 뒤 중국도 역시 국난을 당하고 굴욕적인 날을 맞이하였습니다. 중원에 표박하여 처량한 생활을 하면서 생각하는 것이,“우리가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순신(李舜臣)을 잊은 것 때문이다.”이순신은 임진때 큰 공을 세운 자이고 부인과 아이들 사이에서도 많이 알려지는 사람이며 제사를 지낼 때나 늘 마주보는 사람인데 어찌하여 잊었다고 하는 것입니까? 정신이 이어지지 않았기에 잊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순신(李舜臣)은 고금 수군의 제일 위인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현명하고 영명함으로 하여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영국 해군의 기재에 의하면, 그는 세계에서 제일 일찍 전함을 만든 사람입니다. 그 당시 세계각국에는 철함과 신식대포등 예리한 무기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만들었습니다. 용의 머리에 거북의 꼬리를 갖고 해면에서 질주하였습니다. 적들의 나무배는 호랑이를 만난 양처럼 부딭치면 산산 조각을 내고 꽁무니를 빼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은 이를 빌어 천하횡행하고 만리길을 개척하고 해양의 패권을 장악하였으며, 근접한 왜구들을 배격할 수 있었습니다. 후인들이 소홀히 하는 바람에 사장에서 썩어가는 것도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아아, 거북선이 썩으니 우리나라도 썩어갑니다. 이는 천고의 회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순신(李舜臣)은 병사를 쓰는데 뛰여나고 백전백승하였습니다. 그처럼 슬기롭고 용감하며 종효의 절개와 최공무사한 성심을 지닌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처럼 교제할 때 언사가 순결하고 빈틈없는 완벽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민족 만이 임진 후 300여년간에 공부하고, 농사짓고, 장사하며, 의식이 풍족하고, 노래와 춤으로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세월을 보냈는데, 이게 누가 하사한 것입니까? 후인들이 그 정신을 이어받아 인재를 교육하고 민심을 분발하여야 300여 년의 복과 낙을 영원히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이와 반대입니다. 사대부들의 잘못입니다. 사대부들이 어떤것을 추구하면 인민들도 그것을 추구합니다. 우리나라 사대부들이 필생 분투하여 당쟁에서의 승리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송의 유학을 평생 숭배하며 이의 충실한 노복이 되려고 합니다. 전수 받은 것은 학문을 기록하고 세세로 연설하는 것입니다. 당쟁에서 승리하면 우리나라 인민들에게 유리합니까? 송의 유학에 충복하면 우리나라를 강성하게 할 수 있습니까? 학문을 기록하는 것을 이어받아 우리나라의 정화를 확보할 수 있습니까? 어찌하여 우리나라 인민들이 이순신(李舜臣)을 학습하지 않고 있습니까? 어찌하여 그를 호걸로 추대하고, 종효를 확보하며, 군사책략가,제조가로 되지 않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그들은 부당한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아! 우리나라 인민들이 이순신(李舜臣)을 학습하지 않고 있는데, 일본인이 오히려 이순신(李舜臣)을 학습하고 있습니다. 낡은 편본의 이순신(李舜臣)전이 일본에서 군인의 본이 되여온지 수백 년이 됩니다. 오늘 그들의 해군이 날로 강대해지고 그들의 해군성에서 새로 이순신(李舜臣)전을 저술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보아 일본군계에서 이순신(李舜臣)의 교육을 받은자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순신(李舜臣)을 잊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부활을 추구하려면 오로지 국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학습하고 우리의 이순신(李舜臣)을 배우고 우리의 이순신(李舜臣)을 모방하며 그의 정신의 기초를 이어받아 사업을 활기있게 벌려 나가야 합니다. 당전 중국의 상황으로부터 보면 오로지 교육 만이 중국을 위기로부터 구하고 나라를 강대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군사교육이 특히 중요합니다. 이러한 중요성을 중국의 군사계에 전해주려합니다.

을묘년(歲乙卯) 겨울 중국신강 여점(旅舍) 기초

제1장 이순신(李舜臣)의 유년 휴양
이순신(李舜臣), 자는 여해(汝諧). 본관은 덕수(德水). 증조부 거(琚)는 간관으로 이름이 있었고, 할아버지 백록(百祿)은 진사였으며, 아버지 정(贞)은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순신(舜臣)은 단군 개국 3879년 을미(乙己)년 3월 8일 자시에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어머니 변씨(卞氏)는 꿈에서 조보를 보고 순신(舜臣)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유년 시절에 장난놀이를 할 때, 작전의 진법을 벌리고, 대장군 직을 맡아 지휘를 하였으며, 나무를 깎아 궁노를 만들고 정직하지 않은 자를 발견하면, 그 자한테 활을 쏘려하여, 그 곳의 사람들은 그가 무서워 피하였습니다. 그 당시는 우문이 국가를 지배하는 시기였고, 유학을 많이 숭배하였습니다. 산림지사들 중에서 성정을 논하는 자는 백의재상이 되였고 스승과 술자리를 만드는 것을 통하여 편안하고 한가로운 직무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공리를 추구하는 자는 시를 읊는데 능하였고, 학문 출신인 자는 아주 손쉽게 높은 벼슬직을 맡을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나라에서 머리가 좋은 자제들은 문을 중시하여 벼슬자리에 오르려 하였고, 무술을 하는 자들과 함께 있길 꺼려 하였습니다. 순신(舜臣)도 두 형님이 문학을 배우라 권고하는 바람에 유학을 배워 출세의 뜻을 품은지 10여 년이 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순신을 태여나게 한데는 다른 큰 뜻을 부여한 것이지, 한가하게 그 당시의 풍속에 따라 영예를 흠모하고 경에 박식한 자가 되라고 한것이 아니었습니다. 22살 때 필을 던지고 무술을 익혔는데 마상궁술이 남들보다 많이 뛰여났습니다. 28세 되던 해에 훈련원(訓鍊院)에서 말에서 떨어져 왼발이 골절되고 오래동안 기절하였습니다. 보던자들이 깜작 놀라 세상을 뜨셨다고 생각하였는데, 순신(舜臣)이 갑자기 한발로 일어나면서 버드나무 껍질로 상처를 싸고난 뒤 다시 말등에 뛰여올랐는데 참으로 장관이였습니다. 32세 되던 해에는 병과로 급제하여 성묘하러 가던 길에 장군석이 길에 넘어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수행원 10여 명이 그것을 일으키려 하였다가 힘이 모자라 헐떡거리면서 물러났습니다. 순신(舜臣)은 옷도 벗지 않은 채 장군석을 짊어들어 올렸습니다. 유년 시절에는 씩씩하고 늠름하였고, 자란 후에는 엄숙하고 말이 적었으며, 불결한 말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소년 시절에는 무반들이 늘 서로 장난치곤 하였으나 감히 순신과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비록 수도에서 자라고 관직도 있었지만 출세를 위하여 고관들을 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문을 닫고 병법, 병기와 해륙의 요충지를 연구하여 장래를 위하여 기초를 닦았으며 이름이 날리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늪에 숨어있는 용과 같았고 깊은 산속에 숨어있는 호랑이와 같았습니다. 오로지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龙)만이 그를 간성으로 기대하였습니다. 고금 위인들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천재이고 남보다 뛰여난 자들은 반드시 깊은 학문과 휴양을 갖추어야 합니다. 자질로 임명되면 침체되여 통하지 않고, 학문으로 임명되면 통하고 침체되지 않습니다. 이순신(李舜臣)이 평생 위신을 확립한 것은 그의 타고난 재능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의 깊은 학문과 휴양에 달렸습니다.
제2장 이순신(李舜臣)의 어려운 시기
김●영(金●荣) 판서가 병조 출신인 순신(舜臣)에게 자기의 서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게끔 사람을 찾아 말을 내였는데 순신(舜臣)이 말하기를, "저는 금방 관직에 취임하였는데 어찌하여 집권자들과 가까이 할수 있습니까?" 이조판서(吏曹判書)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이 소리를 듣고 "역시 우리 일문이구나"라고 하셨습니다. 하여 유성룡(柳成龙)에게 부탁하여 순신(舜臣)과 만나려 하였는데 순신(舜臣)이 말하기를, "동성의 사람으로는 만날수 있으나 전상(銓相)의 신분으로는 만날 수 없습니다." 발포만호(鉢浦萬戶) 직에 있을 때, 수사(水使) 성복(成镈)이 관서의 오동나무로 거문고를 만들려 하였는데 순신(舜臣)은 이를 막으면서 말하기를, "이 관서는 관아지물이니 자용으로 쓰면 안됩니다". 성복(成镈)은 크게 화를 냈으나 결국에는 거문고를 만들지 못하였고, 후에 이 일로 순신(舜臣)을 중상하였습니다. 재상 유전(柳铨)은 그한테 좋은 활통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사람을 보내여 얻어내려 하였는데, 순신(舜臣)은 "당신이 어찌하여 공의 신분으로 저의 물건을 수용할수 있습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정직함과 자율성은 이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벼슬한지 10여 년동안 여기저기로 이사하며 초라한 생활을 하고, 작은 일로 많은 고초를 겪었는데 이를 애통해 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비록 부귀에 현혹되지 않고, 빈곤 때문에 의지를 굽히지 않으며, 위압과 무력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 자를 대장부라고 하지만, 이게 어찌하여 순신에게는 단점이 되였습니까? 만일 이의 재주가 승인받고 합당한 직위를 얻어 지모를 펼치며 우리의 6사를 확장하고 위엄을 분발시킨다면, 우리 고구려 광문토왕의 기공비가 구도(九都)에서 다시 일어설수 있고, 신라태종의 백마총이 명석(明石)에서 세워질 수 있으며, 나라의 위엄을 선앙하고 민족의 절개도 높일 수 있었을 것습니다. 이렇다면 어찌하여 임진의 참화가 생길 수 있었겠습니까? 조정에서 육식하는 자들이 날마다 한가하게 문으로 허송세월하고 태평성세를 꾸미고 있으며 원모를 논하지 않고 인재를 중시하지 않아, 이렇게 좋은 인재를 등용하지 않고 긴 시간동안 어려운 생활을 하게 하였습니다. 순신(舜臣)이 32세 되던 해에 함경도(咸镜道)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으로 보직되였고, 3년후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로 승급되였으며, 그해 겨울에 충경도병사군관(忠清道兵使军官)으로 취임되었습니다. 그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钵浦水军万户)로 취임되었는데, 후에 파직되고 가을에 다시 훈련원봉사직(训练院奉事)을 맡았습니다. 3년이 지난 후 다시 함경도병사군관(咸镜道兵使军官) 직을 맡고 가을에는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 직을 맡았습니다. 호인의 변란 때 순신은 계략으로 적을 생포하였으나 병사(兵使) 김우서(金禹瑞)는 자기의 공이 아니였기에 오히려 독단적인 행위라고 하면서 죄를 청하여 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42세 되던 해에 사복시주부(司仆寺主簿)가 되었습니다. 한로(丙戌) 때에 조정에서 북방이 불안하다고 느끼는 바람에 조산만호(造山万户)로 취임되였고, 그 이듬해에 녹도둔전사(鹿島屯田事)가 되었습니다. 순신은 왜구가 수시로 침입하고 길이 멀고 병사가 적으니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병사 이일(李鎰)이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들이 과연 대거로 침입하였는데, 순신(舜臣)이 분전하여 적들의 원수 수명을 격살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운룡(李云龙)과 함께 적을 추격하여 포로된 자를 60여 명이나 구해냈습니다. 싸움 도중에 적의 화살이 그의 왼쪽다리에 박혔는데,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할까 걱정되여 스스로 뽑아냈으며, 남들에게 알려주질 않았습니다. 전쟁이었으니 공을 논할수가 있었으나, 이일(李鎰)은 자기가 병사를 증가해주질 않은 죄가 연루될까 두려워 순신(舜臣)에게 죄를 덮어쓰이고 참수하려 하였습니다. 순신은 포로되여 수감되려던 차에 군관이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취하면 슬픔을 잊을 수 있다고 술을 권하였습니다. 순신(舜臣)은 정색하면서 "생사는 명이니 하필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다시 물을 드리면서 "물을 드시면 갈증을 풀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순신(舜臣)은 "저는 목이 마르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항변하기를 "제가 병사를 증원할것을 요구한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는데 저의 죄가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분전하였는데 악인이 되어버리고 포로된 사람들도 구해냈는데, 어찌하여 패전이라고 할수 있습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어서 목소리와 얼굴색이 엄하게 변하면서 목이 막혀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군관과 병졸들은 모두가 문 밖에서 순신(舜臣)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니, 이일(李鎰)도 감히 사형을 내리지 못하고 대신 조정의 의견을 듣고 죄를 청한다고 하였습니다. 조정에서 특사를 내려 백의종군이 되게 하였습니다. 아! 이때 순신을 죽이려는 것은 나라를 잃는 것이었습니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은 “당신의 재능으로 어찌하여 이렇게 되였습니까?”라고 하면서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으로 추천하였습니다. 기축(己丑) 년에 정읍(井邑) 현감 겸 태인(泰仁) 현무(县务)를 맡았습니다. 당시 태인(泰仁)현은 오래동안 관리가 없었기에 관서들이 퇴적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순신(舜臣)은 순식간에 서적을 전부 읽어 현의 사람들을 놀라고 기쁘게 하였습니다. 어사에게 문서를 제출하여 끝내 실무를 맡아 그의 우수한 솜씨를 소소한 일에 먼저 펼쳐 보였습니다. 전라도 도사(都事) 조대중이(曹大中)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는데, 금오랑(金吾郞)이 문서를 수색할 때, 순신(舜臣)과의 왕복서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순신(舜臣)이 연루될까 두려워 암암리에 서신을 소각하라고 분부하였는데,순신(舜臣)은“저의 서신에는 인사말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수색된 바이니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과연 연루되지 않았습니다. 대중(大中)이 세상을 뜬 후, 그의 영구가 정읍(井邑)을 지날 때, 순신(舜臣)은 제전을 드리고 울면서 말하기를, "당신이 불복하면서 세상을 뜨셨으니 그 죄가 대체 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본도의 도사이니 그 의리는 경시할 수 없습니다”.상신(相臣) 정언신(鄭彦信)은 옛날의 선생이었는데, 그도 연루를 받아 수감되었습니다. 순신(舜臣)은 마침 공무를 처리하러 수도에 들어갔다가 이를 알고 아침, 저녁으로 옥문 밖에서 문안을 드리곤 하였습니다. 이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가 의리를 지킨다고 하였습니다. 경인(庚寅) 때 고사리첨사(高沙里僉使)를 맡았는데, 간신들은 그가 갑자기 영진하였고 승급하련다고 논하고 만포첨사(滿浦僉使)로 된 후에도 그렇게 논하였습니다.
제3장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길을 빌리는 문제
나라와 나라가 대항하고 민족과 민족이 투쟁하여 비상한 극을 상연하면 반드시 대표적인 영웅인물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이 나타났고, 일본에서는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의 성격과 업적은 완전히 다르지만, 둘 다 고금에서 탁월하고 천지를 뒤흔들 수 있는 영웅 인물이며, 두 민족 역사의 대표 인물입니다.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논한다면,키가 작고 낯이 검지만, 눈빛이 예리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감히 그를 우러러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는 지혜와 용기가 절륜하였습니다. 비록 노복 출신이였으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유도하여 병권을 장악, 60여개국을 통제하여 통일대업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간파쿠 다이죠다이진(關白太正大臣)이라고 자칭하면서 삼도에서 위엄을 떨치고 아주 유명하였습니다. 그는 역외로의 진출을 더욱 바라고 있어 대륙에 야심만만하였습니다. 그가 카마쿠라(鎌倉)에 갔을 때, 원뢰조(源賴朝) 조각을 보고 그의 어깨를 만지면서,“빈손으로 나라를 얻은자는 당신과 저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저의 친구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명족의 가문에서 태어났고 저는 노복의 신분으로 발기하였기에 당신과 다릅니다. 저는 땅을 점령하고 명으로 쳐들어가 사백주의 강산을 점하려고 하는데 당신과 비기면 어떻습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삼도 개벽 이후의 첫번째 영웅 인물입니다. 우리 선조(宣祖)22년, 히데요시(秀吉)는 소오 요시토시(宗義智)를 파견하여 명에 들어갈 길을 빌러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그는 국서에서.“우리나라의 지역들은 오래동안 떨어져 있었기에 사회의 질서와 국가의 법기가 혼란하고 황명을 조격하고 있었습니다.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이를 분개하여 출진할 준비를 하였고 동서로 토벌하여 수년간에 60여국을 통제하였습니다. 저 히데요시(秀吉)가 어머니 배속에 있을때,어머니가 꿈에서 해가 배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셨습니다. 복자가 말하기를, "해빛이 임하는 곳은 밝아지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이 애가 장년이 되면 팔방에 무력을 과시하게 되며 전쟁터에서는 필히 승리하고 진공하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오늘날 나라는 이미 다스려졌고, 인민들이 부유한 생활을 누리고 있으며, 재부도 충족하고 제경이 성세를 이루어 과거와는 비할 바가 없습니다. 사람은 일생 동안 백년을 넘기가 어려우니, 어찌 지금의 형편에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귀국의 길을 빌어 산과 바다를 넘어 명으로 쳐들어가 그들의 사백주 강산을 저의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것이 저의 소망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25년에 과연 수군과 육군 50만이 대거 침입하였는데, 우리의 이순신(李舜臣)을 만나 수군이 첨멸되였고, 그의 계획도 파탄되였습니다. 이는 나폴레옹(拿破仑)이 넬슨(纳尔逊)을 만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해군의 잡지에서는,“히데요시(秀吉)의 지혜와 가토오(加藤)의 용기로 손쉽게 대륙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이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한 자가 바로 이순신(李舜臣)입니다. 바로 이 위대한 인물을 만났기 때문이였습니다.”라고 논하였습니다. 과거에 우리나라 인민들은 오래동안 외환이 없었기에 경비가 느슨해졌고 상하가 노래와 춤으로 태평성세를 보냈습니다. 섬나라의 효웅이 기회를 찾으려고 호식탐탐할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오로지 율곡(栗谷) 이이(李珥)만이 이일이 우려되여 병사 10만명을 양성하여 완급(수도에 2만, 각 도에 1만씩)할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국토가 붕괴해질 화가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유성룡(柳成龙)은 급무가 아니라고 하면서 들어주질 않았습니다. 이이(李珥)가 세상을 뜬 후, 9년이 지나 왜구가 침입하였습니다.성룡(成龙)은 이문정(李文靖)은 진짜 성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만일 그당시 조정에서 시급히 이이(李珥)의 조언을 들어 10만 정병을 준비하였다면. 적들은 감히 침입하려는 마음을 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설사 침입하는 마음을 품었다고 하여도 우리한테 정복되었을 것입니다. 유권자들이 선인의 말을 듣지 않고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갑작스럽게 서두르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동서당이 분리되여 파당지쟁을 벌리다보니 어찌 일본을 배격할 수 있었겠습니까? 총리 이산해(李山海)는 궁녀들과 내외로 결탁하고 정의지사들은 의기소침해지고 민심도 와해되였습니다. 중봉(重峯) 조헌(趙憲)은 도끼를 들고 대궐로 가서 위급한 상황을 상소하였는데 피를 흘리면서 조도하고 며칠이나 눈물을 흘렸지만, 나중에도 그의 건의는 채납되지 않았습니다. 아! 내부가 먼저 부패해지면 외부에서 기회를 보게 됩니다. 히데요시(秀吉)가 길을 빌릴 문제를 내놓자 조정에서는 즉시 명나라에 이를 고하고 황윤길(黃允吉)을 사신으로 명하고 김성일(金誠一)을 부사로 명하여 적정을 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사신들이 돌아온 후 윤길(允吉)이 말하기를,“히데요시(秀吉)는 비상한 사람입니다.”허나 성일(誠一)은“용인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윤길(允吉)은 “반드시 병사를 동원하여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성일(誠一)은 “큰소리만 칠 뿐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윤길(允吉)은 서인이고, 성일(誠一)은 동인이였기에 각자가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면서 서로 비호하기도 하였습니다. 윤길(允吉)이나 성일(誠一)이나 의견이 분분하여 어느 쪽이 맞는지 일치된 결론을 내릴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국방을 도외시하였기에 왜구들이 기회를 보아 돌격할 수 있었던 것습니다.
제4장 이순신(李舜臣)의 대적전술
신묘(辛卯) 년에 왜구의 위협이 날로 늘어감에 따라, 조정에서는 장군이 될 수 있는 인재를 모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성룡(柳成龙)은 특별히 이순신(李舜臣)을 추천하여 진도군수(珍岛郡守)로 임명 하였는데, 부임하지 않은 채 이포첨사(里浦僉使)로 승급되였고, 이어서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军节度使)로 임명되였습니다. 순신이 부임하러 길을 떠나던 차에 이웃사람이 꿈에서 큰나무를 보았는데, 그 나무의 잎은 구름처럼 크고 만여 사람이 나무잎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무가 갑자지 무너지면서 만여명 사람들이 떨어지려던 차에 한 사내대장부가 나타나 나무를 다시 부추겨놓는 것이였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크게 환호하였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이웃 사람이 순신(舜臣)을 만나보았는데, 꿈속의 대장부가 바로 그였습니다. 하느님이 순신을 보내여 우리나라와 우리민족을 위기에서 구해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때 대장군 신립(申砬)은, 육군만 중시하고 수군을 폐기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의 의견에 따르려고 하였습니다. 순신(舜臣)은 그게 않된다고 하면서 체찰사(體察使)에게 상서하여, "우리 나라는 방비가 느슨하여 왜구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수군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수병은 인수가 모자라고 군인들의 봉록으로 나오는 은냥도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만일 수군의 세력이 튼튼하지 못하다면 나라가 어찌 견딜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왜구가 침입한후에는 또 다시 상서하여,“부산 동래 연해의 여러 장병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훈련하고 해구에서 정렬하여 위엄을 떨치며 적들의 세력을 예측하고 진퇴를 적절히 하게 한다면, 적들이 어찌하여 한발짝이라고 대륙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조정에서 이 책략에 좇아 부산 동래에서 만단의 준비를 갗추었다면, 적들이 바다를 넘어 명나라까지 직접 침범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해변의 나라들은 바다를 울바자로 하고 문호로 하며, 배를 간성으로 간직하고 수군을 도구로 삼으며, 바다의 방위를 요새로 삼아야 하는데, 그 신립(申砬)은 어찌하여 수군을 폐지하려고 하는것입니까?
제5장 이순신(李舜臣)의 철갑거북선을 발명
순신(舜臣)은 해안 방어을 맡은후부터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계상에서 이와 비길만한 강적이 없었습니다. 순신(舜臣)이 전무후무한 대분투를 거쳐 과연 어떤 신묘한 발명창조를 하였을까요? 하여 철갑거북선이 나타났는데, 이는 오늘의 잠수함과 같습니다. 거북선은 그 당시 전세계에서 처음으로 발명해낸 것이였습니다. 그 구조를 보면, 아래판(속칭 목판)은 10쪽을 이어 붙였는데, 길이는 64자 8치이고, 머리 쪽은 14자 5치좌우였으며, 꼬리 쪽은 10자 6치좌우였습니다. 배판(속칭 삼판)은 7폭을 이어 묶어 올린 것으로서, 높이는 7자 5치이고, 맨 아래 첫번째 판의 길이는 68자이고, 차차 길어져서 맨 위 일곱번째 판의 길이는 113자가 되였으며 두께는 4치였습니다. 노판(속칭 하판)은 4쪽이고, 높이는 4자였으며, 두번째 판 좌우에는 현자 대표 구멍을 각각 1개씩 뚫었습니다. 주판(속칭 역시 하판)은 7장이였고, 높이는 7자 5치였습니다. 위쪽 너비는 14자 5치이고, 아래쪽 너비는 10자 6치였습니다. 여섯번째 판 한가운데에 직경 1자 2치가 되는 구멍을 뚫어 키(속칭 치)를 꽂았습니다. 좌우 뱃전에는 난간을 걸었습니다(속칭 신방). 신방 머리쪽에 멍에(속칭 가룡)를 가로로 걸쳤는데, 바로 이물 앞에 닿게 되어 마치 소나 말의 가슴에 멍에를 메인 것 같았습니다. 신방을 따라가면서 널판을 깔고 방패를 둘러 세웠습니다. 방패 위에 또한 난간을 걸었습니다(속칭 언방). 현란에서 패란까지의 높이는 4 자 3치였습니다. 패란의 좌우 쪽으로 각각 11장의 판(속칭 개판 혹은 거북 잔등판)을 겹쳐서 올려 덮었습니다. 그 잔등에는 1자 5치의 틈을 내어서 돛대를 세웠다 뉘었다 하기 편하게 하였습니다. 이물에 거북 대가리를 달았는데 길이는 4자 3치이고, 너비는 3자가 되였습니다. 안에서 유황과 염초를 태워 입을 벌려서 마치 안개처럼 연기를 토함으로써 적을 혼미케 하였습니다. 좌우에 노가 각각 10척씩 있었고, 배의 좌우방패에 각각 22개의 대표 구멍을 뚫었으며 또 각각 12개의 문을 냈습니다. 거북 대가리 위쪽에 2개의 대포 구멍이 있고, 거북 대가리 아래에 2개의 문을 냈고, 문 옆에 각각 1개씩의 대포 구멍이 있었습니다. 판 좌우에도 각각 12개의 대포 구멍을 뚫어 ′귀(龟)′자의 기를 꽂았습니다. 배의 좌우 포판아래에 방이 각각 12칸이 있는데 철물을 쌓아두었습니다. 3칸은 대포화 활, 화살, 창, 검 등을 숨겨놓았고 19칸은 병사들이 휴식하는 곳이였습니다. 배 위 왼쪽 포판 위에 있는 방 1 칸에는 장교들이 살았습니다. 병사들이 쉴 때는 포판 아래에 있었고,싸울 때 는 포판 위로 올라가 모든 대포 구멍에 대포를 걸어 놓고 끊임없이 쏘아댔습니다. 이는 세계상의 철갑군함의 비조였습니다. 기계는 천하진화의 선구이고 인류경쟁의 도구입니다. 때문에 세계상의 문명사업과 분투의 효용은 여러가지 발명창조에 더욱 공을 들임에 따라 날마다 새로워지는것입니다. 순신(舜臣)이 백전백승하는데는 그의 지혜와 용기가 절륜한것도 있지만, 만일 이러한 철함을 발명하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적은 군사로서 많은 적들을 격퇴할수 있으며 그렇게 용맹할수 있었겠습니까? 이와 동시에 박진(朴晋)이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만들고 정평구(鄭平九)가 비행차를 만들어 적정을 탐정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에는 이러한 독창적인 재능을 가진 자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풍습에 따르면, 모두가 쓸모가 없는 허문만 숭상하고 오히려 물질적 실용가치가있는 물건들은 비천한것으로 몰리였습니다. 이런 예리한 무기가 우담화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바로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게 승리를 이룰수 있겠습니까?
제6장 히데요시(秀吉)의 대거 침입
선조(宣祖) 25년 임진[명의 만력(萬歷) 20년] 4년에 히데요시(秀吉)의 대거침입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히데요시(秀吉)는 작은 아들을 잃어 몇 달동안 비애 속에 있었습니다. 어느 하루 기요미즈데라(清水寺)에서 높은 곳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다가 수종들에게, “대장부는 만리 밖에서 뜻을 이루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이렇게 슬퍼만 하고 있습니까?”라고 말하면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회의를 열어 대장들을 모여놓고,“나는 당신들의 힘을 빌어 여러 나라들을 평정하였는데 이제는 쉴 때가 되였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노복 신분이였는데 이제 와서 뭐가 만족되지 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올해 나이가 60이 되는데 장중보옥을 잃어 아주 서럽습니다. 이제는 남은 날이 얼마 없는데 대장부가 어찌하여 이렇게 편벽한 곳에서 눈을 감을 수 있습니까? 이제 와서 히데쓰쿠(秀次)에게 나라의 정사를 맡기고 교토(京都)를 보위하게 하면 나라에는 더 이상 우려할 것이 없습니다. 나는 조선에 들어가 길을 빌어 명으로 들이칠 것입니다. 만일 조선이 거절하면 먼저 조선을 멸망시키고, 다시 요동(辽东)으로 들어가 북경(北京)을 점령하고 그들의 광대한 토지를 점령하여 여러분들게 나누어 줄 것입니다. 이는 쾌한 일이 아닙니까? 나는 이미 시기가 성숙되였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들은 나를 위하여 힘을 내줄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끼다 히데이에(浮田秀家)가 먼저 그의 책략에 찬성하자 다른 장령들도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이어서 히데요시(秀吉)는 칸파쿠(関白)의 직무를 히데쓰쿠(秀次)에게 양도하고 태합(太閤)이라고 자칭하였습니다. 그는 군사책무를 맡고 숙영지를 설립하였으며, 수군과 육군 50만을 파견하였습니다. 이어서 우끼다 히데이에(浮田秀家)를 군감으로 임명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을 선봉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최초에는 우리 나라의 부산진(釜山镇)을 점령하였는데, 첨사 정발(鄭潑)이 전시하였습니다. 이어서 동래(东莱)가 함락되고, 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세상을 떳습니다. 영호(嶺湖)의 여러 군들이 따라서 함락되고, 적들이 승승장구로 들이쳐 몇달이 지나지 않아 전국을 휘감는 태세를 보였습니다. 조정에서는 먼저 신립(申砬)과 이일(李鎰) 두사람을 파견하여 연해의 방위를 순시하라고 하였습니다. 두사람이 돌아온 후, 유성룡(柳成龙)이 그들한테 적들을 격파하는 난이정도를 물었는데, 립(砬)은,“우려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성룡(成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적들은 원래 단병기를 잘 썼는데 오늘에 와서는 새총도 같이 쓰고 있으니 경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태평세월을 보낸지가 오래되여 병사들이 나약하니 주의하지 않을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립(砬)는 용맹에 등을 대고 교오해 하였는데 그를 아는 자들은 모두 그가 패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신립(申砬)과 이일(李鎰)등은 육군을 통솔하고 있었고 원균(元均)과 배설(裴楔)이 수군을 통솔하였으며 순신(舜臣)은 다만 수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의 명령은 전라좌도(全羅左道)를 벗어날 수 없었으며, 병사가 적고 세력도 약하여 그도록 강대한 왜구들과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수천 정병들을 영솔하여 수조의 백만 병사들을 물리쳤으며, 양만춘(楊萬春)은 안시성(安市城)의 성 하나를 가지고 당조의 10만 군사들과 대항하였습니다. 순신(舜臣)은 바로 이후로 나타난 영명한 인재입니다.

광복문예

광복군동지들을 적후(敵後)에 전송하며

광생(光生) 

동지들이여
망국의 비참함이
유랑의 고통이
삼십년이 되었습니다.
그 색색이 이어진 아름다운 산하
사람과 재화가 모두 풍성했던
조국이 있습니다.
삼천만의 우수한
건아들이 있습니다.
오천년의 영광스럽고 찬란한
문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국주의의 총칼은
조국의 토지를 짓밟았습니다.
무수한 동포들이
강도의 칼날에
찔리어 죽어갔습니다.
유구한 문명이
악마의 마수에
찢기고 부서졌습니다.
동지 여러분
당신들이 마음속에서
절대로 조국을 잊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조상님들의 유골이
그 곳에 묻혀있기 때문입니다.
동지들이여
당신의
뜨거운 피!
힘입니다!
나는 원합니다.
조국을 위한 술방울!
조국을 위한 복수를!
동지들이여
지금
의연하고 비장한
군의 부름이
소리를 내며
당신의 걸음을 재촉합니다!
장렬한 분투의
노래 소리는
당신이
또다시 비겁하게 남겨지는 것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30년의
피를 쌓아왔습니다!
피바다와 같은
깊은 복수!
이번의 분투에
모두 의지하고 있습니다.
동지들이여
지금
때가 왔습니다.
하지만
이 몇 마디 충언을
마음속에 모두 기억해 두십시오!
동지들이여
힘겨운 혁명의 공작
어려운 국토 회복의 임무는
우리의 두 어깨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께 부탁하건대
서둘러 당신의 칼을 갈아 몸에 차고
당신의 총을 닦아 등에 맵시다.
강철과도 같은 마음으로
당신을 일으켜 세우십시오.
영웅처럼 용감하게
왜구의 후방 깊이 들어가
잔인하고 흉폭한
야수들을
없애십시오.
동지들이여
안녕히 계십시오.
마지막으로
이별을 고합니다.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한잔의 뜨거운 술로
당신을 축원합니다.
기개 있게 앞으로 나아가면
영광스런 승리의 함성은 반드시 되돌아 옵니다!

편집후기

이번 호의 내용은 지난번보다 조금 더 나아졌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아직 저희가 목표로 하고 있는 수준보다는 한참이나 모자랍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독자 여러분들의 기대에 부합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울러 많은 지도와 비평을 부탁드리며 또 좋은 글들도 많이 기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계신 김구(金九)선생님은 이번에 중국의 항전 제 5주년을 기념하며 "동포들에게 고하는 글"을 써주셨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한중(韓中) 두 민족간 연합투쟁의 필요성에 대하여 언급하셨는데 그 의의가 매우 깊다고 생각됩니다.
"대한민국 독립당 강령에 관한 해석"을 써주신 사평(四平)선생님은 예전부터 좋은 글들을 많이 쓰신 분입니다. 특히 이번 글속에서 ′균등(均等)′이 한국독립당 당강령의 중심 사상됨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정말 혜안(慧眼)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한일(韓日) 2000년 전쟁사 중요사건 요약" 쓰신 안훈(安勳)선생님은 사학(史學)에 정통하신 분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단지 선생님이 갖고 계신 지식의 일부만을 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저희 잡지를 통해 더 많은 글을 쓰실 예정입니다.
김학규(金學奎)선생님은 다년간 혁명공작에 종사하셨습니다. 이번 호에 게재된 훌륭한 문장은 전적으로 선생님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선생님 개인의 인생사라고 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삼민주의(三民主義)의 문화건설 문제"란 글에서는 중국고유사상문화의 운용을 천명하신 중산(中山)선생이 남기신 교훈의 필요성이 특별히 언급되었습니다. 이는 매우 식견이 뛰어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붕괴를 앞둔 이탈리아"에서는 비록 약간 시기가 지나간 내용이 있었지만 이 글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는 국가들은 반드시 더불어 서야한다(國於天地, 必有與興立)′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단지 기회만을 노리는 도박과 같은 방식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또한 이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남진(南進)전략에 대한 추측"을 쓰신 마충량(馬忠良)선생님은 중앙정교대학(中央政敎大學)을 졸업하시고 지금 중경(重慶)에서 일하고 계신 분입니다. 글 속에서 일본의 남진에 대한 원인과 그 시기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저희가 매우 절실했던 내용이었습니다.
"적군의 원뿔형(錐形) 전법에 대한 연구 및 이후 대책"을 강의한 왕제통(王際通)선생님은 중국의 저명한 전술학자 이십니다. 강의한 원고를 마유룡(馬有龍)선생께서 기록해 주셨습니다. 편집후기를 통해 다시 한번 두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마유룡(馬有龍) 선생님께서 계속 원고를 기고해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노매(老梅)선생님은 독자 여러분들도 매우 익숙한 이름일거라고 생각되어 더 이상 소개가 필요 없을것 같습니다. 박백암(朴白巗)선생님은 안타깝게도 이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박백암(朴白巗) 선생님께서 쓰신 이순신(李舜臣)장군의 전기는 문장과 정서 두 가지 모두 빼어나서 특별히 전문을 다 실었습니다.
"광복군 동지들을 적후(敵後)에 전송하며"를 쓴 광생(光生)군은 열정적인 혁명청년입니다. 시의 기교면에서 아직 더 수양이 필요하지만 내용면에서 광복군동지들의 격양된 정서를 잘 표현했습니다.

투고에 대한 몇 가지 원칙

1. 저희 잡지는 아래와 같은 문건의 투고를 환영합니다
(1) 한중(韓中) 양국 민족의 합작
(2) 한국 광복군운동의 분석과 논술
(3) 일본의 군사, 외교, 정치, 경제 등 각 방면에 대한 연구와 토론
(4) 국제정치, 경제, 외교에 대한 분석과 논술
(5) 항전 상황에 대한 소식과 분석
(6) 국제, 국내외의 시사(時事)문제 등
백화문(白話文)과 문언(文言)에 관계없이 모두 환영합니다.
2. 번역문을 보낼 때에는 그 원문도 함께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원문을 동봉하기가 곤란하시면 그 원문의 제목과 저자성명, 출판일시, 출한장소등을 적어 주시기 바랍니다.
3. 원고는 반드시 선명하고 정확하게 써 주시고 작성하실 때 신식 문장부호를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4. 보내실 원고의 분량은 최대 5천자를 넘지 않게 써주시기 바랍니다. 단 특별계약을 하신 분들은 예외입니다.
5. 보내주신 원고에 대해서는 본 잡지사에 수정권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정 후 별다른 부가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6. 원고의 마지막에는 연락의 편의를 성명과 주소를 써주시기 바랍니다. 원고를 게재할 때 서명은 투고인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7. 보내주신 원고는 등재여부에 관계없이 반송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요구하는 경우에는 게재되지 않은 원고는 반송해 드립니다.
8. 원고료는 등재한 이후에 계산해드리며 등재된 원고에 대한 작은 답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갑. 천자(1,000)마다 중화민국화폐 3원에서 4원가량
을. 원고가 등재된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9. 투고하실 때는 서안(西安) 2부가(二部街) 4로(四路) 본부총무처(本部總務處)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광복 제 1권 제 3기

대한민국 23년 5월 20일
중화민국 30년 5월 20일 출판
편집자: 한국광복군총사령부정훈처
발행자: 한국광복군총사령부정훈처
통신처 서안(西安) 2부가(二部街)4로(四路)본부총무처(本部總務處)
인쇄자 서안익문(西安益文)인쇄소
정가(定價) 5각(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