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대종교 교육자료 제12강 대종교와 국전-개천절
〡제12강〡 대종교와 국전(國典-開天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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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관련 의례가 국가의례 속에 정착한 사례 중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에 국경일 개천절이 있다. 개천절 역시 단군 건국사화에서 유래한다. 단군사화에 의하면 천제 환인이 갖고 있던 홍익인간 이념에 따라 그 아들 환웅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신시를 건설하고, 환웅의 아들 단군이 조선을 건국함으로써 민족사(동국사)가 시작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開天(하늘이 열림)이라 함은 최초의 인간공동체인 신시를 열고 첫 국가 고조선을 건설한 사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를테면 민족의 탄생이나 민족사의 시작을 의미하는 말이라 하겠다.
단군(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신시를 연 날과 조선을 건국한 날짜가 10월 3일이라는 기록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조선왕조 이래의 (또는 그 이전부터의) 단군관련 제례나 민간신앙 속에 그 같은 전승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선, 조선 초기 이래로 평양의 단군묘와 단군사, 구월산의 삼성사, 그리고 강화도의 마니산(참성단) 등에서 행해진 국가차원의 제례나 풍습에 대해 언급하는 문헌기록들이 그 제사시기를 봄ㆍ가을이라 언급하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제사시기로 언급한 봄ㆍ가을은 뒷날 단군신앙 관련 제례일로 지켜진 3월15일(어천절, 단군이 승천한 날)과 10월3일(개천절, 단군이 강림한 날)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찰할 수 있다. 기록들은 또 그 같은 제례가 고려시대의 옛 관례에 입각한 것임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점은 10월 3일에 대한 전승이 조선조 이전부터 있었을 것임을 추정하게 한다.
국가가 시행하던 단군관련 제례의 내용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한 기록을 찾을 수 없지만, 민간의 신앙에 대해 전하는 문헌에서는 10월 3일이라는 구체적인 날짜가 적시되기도 하였다. 동학운동(1894) 무렵에 평안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염백의 단군신교 교단도 10월3일과 3월15일을 단군의 탄생일과 선거일(仙去日)로 정하여 제례를 개최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점 역시 단군관련 민간신앙 속에 10월 3일에 대한 전승이 있었음을 확인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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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 백두산지역에서 활동하던 백봉신사 중심의 단군교단에서 발표한 『단군교포명서』에서도 10월 3일을 ‘檀君開極立道之慶節’한 날, 곧 단군이 나라를 열고 가르침을 세운 경축일로 거론하고 있다.
대종교의 창립 이후 10월 3일이 단군의 탄강-강세일이자 건국일이라는 인식은 더욱 확산되었고, 그 기념행사도 더 활기를 띠었다. 10월 3일을 기념하는 행사는 국권을 상실한 뒤에도 국내외에서 계속되었으며, 종교와 관계없이 민족의 제전으로 인식되어 왔다. 상해 임시정부(1919)도 발족한 첫해부터 국무원 주최로 음력 10월 3일에 「大皇祖聖誕 及 建國紀元節 祝賀式」을 거행하였다. 개천절이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독립운동의 대표기관을 자처한 임시정부가 10월 3일을 대황조성탄절이자 건국기원절로 정하여 공식적인 정부차원의 축하식을 거행한 것은 주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다.
1920년대로 넘어오면 개천절이라는 이름이 더욱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된다. 개천절이 건국절 또는 건국기원절보다 더욱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된 데는, 개천이라는 말이 더욱 의미심장하고 함축한 바가 크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단군에 의한 건국이라는 사건만이 아니라 민족과 고유문화전통의 시작이라는 사건을 모두 포괄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해줄 수 있는 말로 개천이라는 말이 더 적절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일제하의 언론도 개천절이라는 이름하에 그 기념행사들을 보도하고 있으며, 대종교를 넘어 민족적 기념일로 자리매김해 갔다. 개천절 무렵이 되면 각종 언론들이 개천절의 유래와 의의에 대해 계몽하는 기명ㆍ무기명의 논설을 게재하여 일반의 인식 제고를 선도하였다.
개천절 관련 논설을 자주 발표한 사람은 최남선과 안재홍ㆍ정인보 대형 같은 대종교도들이었다. 이들은 단군건국의 역사를 연구하여 개천절의 역사적 기반을 확충하려 하는 한편, 개천절이 가지는 민족적 의의를 강조하여 계몽하였다. 이들은 개천의 의미를 천문천도(天門天道)가 인간을 향하여 개장ㄹ(開張)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보본반시(報本反始)ㆍ제천사조(祭天祀祖)하던 고대 이래의 ‘全東方的 大民俗’에서 개천절이 유래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이들은 개천절이 고대의 제천행사 풍습이나 민간의 추수감사축제풍습 등과 연결된 것으로 본다. 또 민간에서 수확의 계절인 10월을 상달(上月)이라 하여 중시해왔고, 3이라는 숫자를 길한 수(吉數)로 여겨 신성시해온 전통 등도 개천절의 유래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에 의해 개천절은 조선국의 탄생일이자 조선 인문의 정초일로, 또는 조선국과 조선민족의 생활과 문화의 탄생일이요 그 민족 이상의 발단일이라는 의미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단순히 조선인의 근본을 잊지 않게 하기위해 정한 기념일에 그치지 않고, “광명이세의 민족적 대사명(조선심)을 매년 한 번씩 가다듬으라고 마련하여놓은 날”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개천절행사는 한민족의 민족적 정체성과 자주독립 의지를 고취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일제 식민당국의 탄압대상이 되었다. 일제의 동원수탈정책과 민족말살책동이 심화되던 만주침략 후에는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 중반이후에는 국내에서는 행사개최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갔고 관련 보도도 언론에서 사라지게 된다.
해방 후 개천절은 대한민국 국회가 국경일에 관한 법률(법률제53호)을 제정할 때 ‘국가에 경사로운 날’ 4일 중 하나로 지정됨으로써 정식 국경일이 되었다. 10월 3일을 개천절이라는 이름하에 국경일로 지정하는 과정에서는 반대여론이 거의 없었다. 이는 단군을 국가적 통합기제로 수용하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룬데다, 1920년대 이후 개천절이라는 이름이 익숙해졌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다만 날짜에 대해서는 음력으로 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어 약간의 토론이 있었다. 그러나 그 상징적인 의의만을 존중하고 날짜는 보편화된 양력으로 정하자는 주장이 채택되어, 양력 10월 3일로 최종 결정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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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白逸史』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세상을 다스리도록 내려 보낸 것을 開天이라 한다. 그러므로 개천은 능히 庶物을 창조하는데, 이것이 바로 虛之同體이다.”(『太白逸史』「神市本紀」)
즉 개천은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늘이 열린 것'을 말하는 것이다. 개천이란 본디 환웅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홍익인간․이화세계의 뜻을 펼치기 시작한 사건을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개천(하늘이 열림)이라 함은, 천명(天命)에 의해 최초의 인간공동체인 신시를 열고 첫 국가 고조선을 건설한 사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 민족이 천자신손으로서의 자격을 갖고 제천숭조의 당위성을 확보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개천절은 ‘하늘이 열려 세상을 다스리는 질서’를 기념하는 날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개천절은 상고 때부터 내려오는 영고․동맹․무천․10월 상달제 등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나, 그 명칭의 역사적 흐름은 정확하지 않다. 구한말 대종교 중광의 근거가 되는 「단군교포명서」의 서두에 보면
“오늘은 우리 大皇祖檀君聖神의 4237回 開極立道之慶節也라. 愚兄 等 13人이 백두산 대숭전에서…(중략)…우리 동포형제자매에게 삼가 고하노니”
라는 기록과 맨 마지막에 포명일자가 ‘단군개극입도(檀君開極立道) 4237(1904;필자 주)년 10월 3일’로 적혀있음을 볼 수 있다. 후일 홍암대종사가 이것을 계승하여 1910년 9월 27일 교명(敎命)으로 의식규례를 제정발포하면서 제3항에 ‘개천절은 강세일(降世日)과 개국일(開國日)이 동시 10월 3일이라 경일(慶日)을 합칭(合稱)함’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그 명칭이 분명해 지는 것이다.
안재홍 대형은 “해마다 이 개천절을 국경일로 기념하게 된 것이고, 동시에 국조이신 단군의 성적을 옹호하고 유지하는 사업은 문득 민족정기를 똑바로 세워 독립과 자유와 통일 단합을 재촉하는 기본조건의 하나로 되는 것이다.”라고 개천절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고, 조소앙 또한 우리 민족이 단군의 개천건국이래 동방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졌다고 자부하면서, 고구려의 무위(武威)와 신라․백제․고려․조선의 문화를 자립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으니 세계 어느 민족에 비하여도 손색이 없었고 이렇듯 찬란하고 유구한 문화 위에 독립 자주하여 온 것은 물론이고 문화적으로도 영도적 지위에 있었음을 자타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한편 정인보 대형도 1935년 발표한 글에서 시월(十月) 개천절의 철학적 의미를, 개천(開天)의 의미가 단군이 하늘의 부탁을 받아 홍익인간의 뜻을 이 땅에 새긴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천자신손(天子神孫)으로서의 자부심과 문화민족으로서의 유구함을 강조하여 민족적 단결을 일깨우는 것이다.
태양의 祭典
具常
아득한 그 옛날부터 우리 겨레의 조상들은
백두산 神檀樹 아랫마을 神市에다
東夷의 여러 부족들을 한데 모아놓고
해마다 霜月이면 開天의
축제를 지내었다네
저들은 먼저 하늘에 고사를 드리고
몸과 마음을 옳고 바르게 쓰기를 맹세한 뒤
뜀박질로 날쌔기 내기를 하고
바위를 쳐들어 힘을 겨루고
씨름을 하고, 활을 쏘고, 말달리기를 하고
편을 갈라 진뺏기와 밧줄당기기를 하며
그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낮과 밤을 이어서 잔치를 베풀었다네
저들은 그 놀이와 잔치를 통하여
사람으로 태어난 기쁨을 서로가 나누며
사람이 지닌 능력의 무한함에 눈뜨고
사람의 재주가 저마다 다름을 알아내고
사람의 만남과 그 인정의 존귀함을 맛보고
사람끼리의 협동의 위력과 그 보람을 깨달아서
마침내 홍익인간이라는 드높은 이상을 앞세워
비로소 이 땅에 첫 나라인 단군조선을 이룩하였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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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하늘이 열린 날을 기념하는 나라가 있을까. 개국절이 아닌 개천절을 만든 우리 민족이 그 주인공이다. 나라 세움을 기리는 날을 '개천절'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분명 범상스럽지 않다. 건국이나 개국이란 말 대신에 '개천', 즉 하늘을 열었다는 뜻의 말을 쓴 것은 우리 조상의 삶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웅변해 주고도 남는다. 즉 일신강충(一神降衷)․천신강림(天神降臨)․천손의식(天孫意識)을 그대로 상징화시켜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의 하늘집을 옮겨, 땅위의 하늘집을 만들고, 사람속의 하늘집을 만듦도 개천사상과 무관치 않다. 하늘의 질서로 선택된 삼위태백에서, 하늘의 이치를 옹글게 심고 깨달아가야 하는 집단이 바로 배달민족이다. 지상천궁에서 하느님을 머릿골 속에 모시고 사는 인간들, 그것이 바로 천손의식의 출발이다.
또한 하늘을 연다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그것은 하늘(天)의 뜻을 펼치는 것(開)이 시(始)와 종(終)을 이룬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그 시천례(始天禮)가 개천절이요, 귀천례(歸天禮)가 어천절이다. 그러므로 개천절과 어천절을 통하여 하늘이 인간과 끊임없이 교감하는 뫼비우스의 띠가 형성된다. 또한 개천은 개지(開地)하고 개인(開人)하는 그런 열림인 것이다. 즉 하늘의 질서를 땅에 펼치고 하늘의 규범을 인간에 심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개천의 뜻이다.
그러므로 최남선은 이렇게 유추했다.
“「팔관회」 古音으로 「애」는 대개 「」(곧 天)을 「연」 날이거나 혹 「」(곧 天)을 「안」 날이라는 뜻을 머금은 말이 音韻 混化로 이렇게 된 것일 듯하니, 요새 단군 계통의 신흥 교문에서 10월의 하루를 가려서 개천절이라고 부름은 진실로 근거가 있다 할 것입니다. 팔관회를 그대로 개천절 뜻으로 볼 이유가 분명히 있다 함은 맞지는 아니하여도 과히 멀지는 아니할 추측일까 합니다. 그런데 개천이니 「」이니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환웅천왕이 하늘열고 인간으로 내려와서 교화를 펴기 시작하였다는 고전과 단군왕검이 인간에서 天國化 운동을 開端하였다는 古意를 일컬음임은 조선건국고전(곧 개천설화라고 할 것)에서 얼른 알아볼 것입니다. 이러한 깊은 내력이 있어서 그 필연적 관계로 「」을 이 달로써 享祀하게 되고, 이 거룩하신 「」을 報謝하는 시기이매 신성을 의미하는 「상」이란 말로써 이 달을 부르게까지 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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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그 집단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이 천제(天祭)다. 즉 하늘과 직접 교감하는 인간(혹은 집단)이 바로 천하의 주인이라는 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환인․한웅․환검(단군)의 문화 역시 제천의 시대였다. 더욱이 우리는 제천(祭天)을 통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제지(祭地)를 통하여 땅을 위무하며, 제인(祭人)을 통하여 조상을 숭배해 온 것이 우리의 고속(古俗)이다.
그러므로 제천권(祭天權)을 상실하였다는 것은 주권을 잃어버림과 상통하는 의미였다. 중국이 조선을 제후국가로 한정시키면서 제천의례의 정당성 문제가 부각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그래도 조선초기에는 제천의례가 정기적은 아니었지만, 재난에 대한 기원으로써 부정기적으로 거행됐다. 세조때 정기의례로 회복이 됐긴 했어도, 대체로 조선시대를 통해서 중단된 상태였다. 그 기간 동안에 제천의례의 역할을 했던 것은 도교적인 의례들이었다. 고종 때인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고종의 황제등극의례로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단인 원구단이 건축되고, 그 원구단에서 등극의례가 거행되었다. 고종황제가 중국으로부터 독립된 황제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원구단을 짓고 제천의례를 올린 것은, 세조 3년 이후 440년만의 일이었다. 중국의 천자만이 하늘의 제사를 올릴 수 있다는 사대주의를 물리치고 우리가 바로 하늘의 자손이며, 진정한 독립국의 백성임을 내외에 알린 것이다.
홍암대종사가 1909년 신교를 중흥시키면서, 제천을 통하여 정당성을 찾고자했음도 이러한 배경과 연관된다. 즉 제천을 통해 단절된 신교의 도맥을 복원하고자 했고, 제천을 통해 과거 중화주의적 종속성을 벗어나고자 했으며, 제천을 통해 기울어진 국권을 다시 세우려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에는 대종교로 국한되는 종교적 기념일을 넘어서 범민족적 기념일로 인식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망명동포들이 거주하는 곳이면 때마다 기념행사를 거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조국독립의 의지를 다지는 계기로 삼았다.
대종교의 중광 이후 10월3일이 단군의 탄강․강세일이자 건국일이라는 인식은 더욱 확산되었고, 그 기념행사도 더 활기를 띠었다. 10월 3일을 기념하는 행사는 국권을 상실한 뒤에도 국내외에서 계속되었으며, 종교를 넘어 민족의 제전으로 인식되어 왔다. 상해임시정부(1919)도 발족한 첫해부터 국무원 주최로 음력 10월 3일에 〈大皇祖聖誕 及 建國紀元節 祝賀式〉을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일제강점기를 통하여, 개천절 행사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중경(重慶) 등지의 임시정부에서도 대종교와 합동으로 경축행사를 거행하였다. 독립운동의 대표기관을 자처한 임시정부가 10월3일을 대황조성탄절이자 건국기원절로 정하여 공식적인 정부차원의 축하식을 거행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1920년대로 넘어오면 개천절이라는 이름이 더욱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된다. 개천절이 건국절 또는 건국기원절보다 더욱 일반적으로 사용되게 된 데는, 개천이라는 말이 더욱 의미심장하고 함축한 바가 크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단군에 의한 건국이라는 사건만이 아니라 민족과 고유문화전통의 시작이라는 사건을 모두 포괄하여 상징적으로 표현해 줄 수 있는 말로 개천이라는 말이 더 적절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일제하의 언론도 개천절이라는 이름하에 그 기념행사들을 보도하고 있으며, 대종교라는 특정 종교를 넘어 민족적 기념일로 자리매김해갔다.
한편 신교의 개천절 복원은 당시 일제의 문화정책을 근본적으로 후퇴시키는 저항이기도 했다. 즉 일본 황국주의자들에 의해 날조된 일본 역사의 기원에 대한 근본적 부정임과 아울러, 일제가 말살하려던 신교의 제전(祭典)을 공식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일본의 건국신화를 절대적인 역사적 사실로 둔갑시킨 장본인들은 19세기 명치유신(明治維新)을 추진한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이다. 기원전 660년 신무천황(神武天皇)이 야마도국을 정복하고 일본국을 세웠다는 『일본서기』의 건국신화를 근거로, 그 날짜를 2월 11일로 삼아 기원절(紀元節)을 제정한 것이다. 그들은 기원전 660년 음력 정월 초하루를 약력으로 환산하여 2월 11일을 기원절(紀元節)이라는 이름의 개국기념일로 공식화시켰다.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개국한 다른 나라들, 즉 신라의 기원전 57년, 고구려의 기원전 37년, 백제의 기원전 18년보다 그 개국연도가 500여년 앞선 선진국이기 때문에, 20세기에 들어와 한국과 만주를 지배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성립도 여기서 명분을 얻었다.
아무튼 일제의 기원절을 넘어서는 우리의 개천절 행사는 일제 감시 대상의 주요한 하나였다. 당시 항일운동의 근거였던 대종교가 주도하는 행사이며, 민족적 정체성 확인과 자주독립 의지를 고취시키는 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동원수탈정책과 민족말살책동이 심화되던 만주침략 이후에는 국내에서는 행사개최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갔고 관련 보도도 언론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음이 그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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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할아버지의 생신날에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開天의 날은 하늘이 열린 날인데 그이의 뜻은 곧 하느님의 뜻이었다. 하늘을 열어놓고 살림을 하자는 그 일을 우리는 하여야지 다른 일이 또 무엇이 있는가. 하느님의 말씀에 順命해야 할 것이 아닌가.”
다석 유영모가 한 말이다. 개천절은 곧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 터진 날이라는 뜻이다. 그 뜻을 짊어지고 온 이가 단군이다. 따라서 ‘하늘을 열어놓고(開天)’ 살림을 하자는 것은 무엇인가. 천지화합과 천인합일의 사업을 펼치자는 말과 같다. 그것이 또한 ‘우리의 일(天業)’이요 사명인 것이다.
우리 민족이 수천 년 동안 아프고 쓰라린 시련을 겪어야 했던 것은, 어쩌면 이러한 단군 할아버지의 개천 기도의 정신을 잊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기도는 인간의 영성(靈性)을 정성스레 하여 하느님과 소통하는 둘도 없는 세레머니다. 그 기도 속에는 하늘의 씨알을 중심으로, 인간의 정체성(가장 인간다움)이 있고, 배달겨레의 주인정신(천손의식)이 있으며, 인간들의 궁극적 삶의 지향(홍익인간)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단군의 개천 기도를 오늘 우리가 다시 하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야 하는(신인합일)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개천의 정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우는가. ‘육신의 나(三妄)’를 버리고 ‘얼나(三眞)’를 찾아가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다. 하늘을 열어, 그 질서를 우리에게 심어주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