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최재천, “의회주의와 국민주권주의에 대한 행정부의 억압, 외면, 철저한 왜소화에 분노를 표합니다.”

몽유도원 2013. 11. 5. 22:37



여의도일기 524일째_20131105(화) “의회주의와 국민주권주의에 대한 행정부의 억압, 외면, 철저한 왜소화에 분노를 표합니다.”


어제오늘 결산 심사 하면서 몇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어제 마지막 질의할 때 제가 극도로 분노를 표출했습니다만, 첫째는 의회주의, 국민주권주의에 대한 행정부의 억압 혹은 외면 혹은 철저한 왜소화입니다. 모든 질문에 대해서 수사중이다, 잘 알지 못한다, 실무자에게 확인하겠다, 검토하겠다, 이런 식으로 의회의 견제와 균형의 원칙을 무력화시켜버립니다. 괴로운 일이지요. 다시 헌법책과 국회법, 그리고 헌법규정들을 한번 들춰보기로 했습니다. 선례집 좀 관련 부분 좀 찾아서 복사해달라고 오늘 부탁했습니다.

 

국정감사나 조사의 경우, 사생활을 침해하거나 재판에 관여하거나 소추에 관여할 목적이 있지 않는 이상, 즉 목적범이 아닌 이상, 즉 목적이라는 주관적 정당화요소가 있지 않은 이상 모든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국감의 경우입니다. 국감법에 이렇게 제한적으로 규정합니다. 나머지 질문할 권리는 헌법의 권리고, 국민의 권리고, 국민주권의 일반적 질문권, 추궁권, 확인권, 요청권, 알권리권, 이런 것들 아닐까요? 또 액세스권일 거고요. 주권자로서 의문을 제기하고, 확인하고, 자료를 요구하고, 문제점을 평가하고,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고, 추궁하고, 따지고, 때로는 말로 통제하고, 비평하고, 이럴 권리가 헌법상 국회의원의 권리고 주권자의 권리일 겁니다. 그런데 이런 권리들이 철저히 형해화되고 있습니다. 참 무기력감이 듭니다.

 

좀 더 헌법논쟁, 민주주의 일반 논쟁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불행하게도 이런 권리들이 수사권이나 사법절차권에 철저히 억압당하고 제한당합니다. 행정부에서 이를 악의적으로 회피수단으로 이용하면서 결과적으로 검찰 공화국, 재판 공화국을 만듭니다. 비선출직의 수사행위라는 행정행위와 비선출직인 법관들의 재판행위라는 사법적 판단이 국민주권을 제약하고, 극단적으로 정치의 사법화, 국민주권의 사법화를 재촉합니다. 민주주의의 위기입니다.

 

둘째, 사이버사령부와 관련된 어제 논쟁입니다. 늘 느낍니다만, 보수와 진보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하나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한국의 위장보수주의자들은 국가는 믿되, 시민은 불신합니다. 다른 나라 보수주의자와는 정반대입니다. 진보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사회와 연대의 힘을 믿습니다. 공동체의 힘, 공동체의 노력, 그래서 사회적 안전망과 공동부조를 당연한 정책적 아젠다로 내걸 수밖에 없는 거지요. 본래적 의미의 보수는, 인간은 지극히 자유로운 존재고, 간섭하고 국가가 개입하지만 않는다면 아무 문제없이 가장 자유롭고 가장 건강한 권리행사를 통해 이땅의 행복과 모든 이의 평화와 경제적 부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유정보수주의자들은 시민을 불신합니다. 시민을 의심합니다. 그래서 시민을 감시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시민을 통제하려 듭니다. 그래서 시민을 감시의 대상, 경계의 대상, 의심의 대상, 미행과 감시의 대상, 불심검문의 대상, 사이버작전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 얼마나 근본철학이 전도된 사태입니까? 사실 다 필요 없습니다. 이건 근본적 논쟁입니다. 진보주의자들은 되려 권력기구를 불신하고 있고, 보수주의자들이 사실은 권력기관, 국가주의를 경계해야 함에도, 사실 진보주의자들은 권력의 힘, 긍정적 힘, 적극적 힘, 인간의 한계를 보완하고, 때로는 함께가는 선한 권력의 힘을 믿는 쪽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한국사회는, 보수주의자들은 권력주의, 국가주의에 완벽하게 빠져있습니다. 하여튼 한국은 외국의 기준으로 보수와 진보를 가를 수가 없습니다. 남북문제가 모든 이념과 가치의 중심에서 때로는 악의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본말이 전도돼버리고, 선악이 혼재되고, 가치가 혼재되는, 그런 불편함이 한국사회를 지배해버립니다.

 

결국은 한국 민주주의 근본철학의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변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의 문제, 민주주의의 역사와 가치와 철학의 문제, 나아가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시민과 인본주의에 대한 가치철학의 문제, 인간의 존엄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의 문제 등이 결국은 이 땅의 민주주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것도 확신이 없습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이 옳은지도 모르겠고, 또 다른분 생각이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고, 제가 했던 공부가 얼마나 엉망인지 나이들어 갈수록 잘 알게되고, 그래서 확신도 번뇌도 공히 저를 지배하는, 제 스스로 철학과 인생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건 아닌지 늘 두렵습니다. 그래서 경계합니다. 그래서 근신하려 들고 그래서 조용히 살려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