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사

인력수탈-국외-학생운동-정덕수

몽유도원 2012. 12. 31. 09:57


인력수탈-국외-학생운동-정덕수.d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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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자의 상태


"1. 구술자의 생활환경, 건강상태, 기억력 정도 :

구술자 정덕수 선생님은 현재 부인이 사망하시고 아드님 두 분은 분가해서 부산의 거주지에서 혼자 지내시고 계시다. 선생님의 건강상태나 기억력은 매우 양호한 편이시다.

2. 구술내용의 신뢰 정도 :

정덕수 선생님의 구술내용은 활동 당시 접촉하지 못했던 동료들에 대한 기억이나 자료를 얻을 수 없었지만 활동을 같이 했던 동료들에 대해서는 기억이 분명한 편이라고 보인다. 또한 구술 내용의 사실성에 대해서도 매우 진솔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신뢰도가 매우 높다고 평가할 만하다.

3. 면담시 애로사항 및 건의사항 :

큰 애로사향은 없었고 단지 지방에 거주하시는 관계로 1박 2일의 일정으로 이틀에 걸쳐 면담을 했는데, 둘째날 선생님의 일정이 있으셔서 시간이 약간 모자랐다.

4. 구술내용 중 기존의 학설(정설)과 다른 내용 :

개진대와 조선독립청년당이 운동방침으로 폭력투쟁을 노선으로 지녔었다는 점(폭탄제조와 폭탄투척을 계획했던 점)과 향후 상해나 중국(만주 포함)지역으로 건너가서 해외의 운동자와 연대를 하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 새롭게 밝혀져서 주목된다.
폭탄투척계획과 관련해서 본다면 (사제)폭탄제조까지 갔었던 점, 그리고 다만 폭탄성능 실험을 충분히 하지 못한 상태에서 검거됨으로써 이후 이 노선이 구체화되지는 않았다.

5. 기타 특이사항 :

정덕수 선생은 1940년대 신생 학생운동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적 성향이 농후한 운동가로서 일제말기의 학생운동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었다. 즉 민족주의적 성향, 해외 운동가에 대한 기대와 비록 검거됨으로써 구체적 실행단계로 나아가지 않았지만 해외운동그룹(상해나 만주)과의 연계를 계획했던 점에서 일제 말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학생운동들의 공통적 특성이 반영되었다.
정덕수 선생그룹은 운동경력과 관련해서도 여타 사회운동이나 기존 학생운동의 영향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자생적으로 출발하여 정덕수 선생 스스로가 조직을 이끌면서 당적조직을 모색할 정도로 상당히 주도면밀하고 고급운동이라면 고급운동까지 발전한 경우이다.
정덕수 선생의 경우 어린 나이부터 일본에 거주함으로써 일본어에 능통하고 도리어 한국어를 잘 못할 정도여서 해방 후 국내에서 교육계에 종사할 초기에도 일본어로 교육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이채롭다."


구술내용 요약

 

"정덕수 선생님은 1923년 경남 고성 출신으로 11살이던 1933년 11월에 어머님과 함께 도일하여, 당시 구주(九州)에 거주하던 두 형(노동자)과 함께 일본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도일후 구주에 있던 등내목심상고등소학교 고등과를 마치고, 1941년 대판(大阪) 유도(酉島) 제2공업고등학교 응용화학과를 졸업했다.
1941년 대판에 갈 무렵 호텔종업원으로 입사하여 동 호텔에서 종업원으로 종사하던 조성인, 강연중을 동지로 획득하여 1941년 2월에 조성인 등과 함께 ‘조선인의 성품을 개조하여 장차 독립을 준비하자’는 의미에서 개진대(改進隊)를 조직했다.
개진대는 횡적 연대를 피하면서 대판에 존재했던 각 학교(유도제2공업학교, 관서공업학교, 대판공업학교 등)에 조직확대사업을 진행하여 1941년 여름경에는 20-30명에 달하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조직확대에 따라 1941년 8월 개진대를 조선독립청년당(朝鮮獨立靑年黨)으로 개칭하여 강령 등을 마련했다. 특히 조선독립청년당의 활동노선은 이왕에 일본자료에서 나타나는 것 이외에도 장차 폭탄테러를 감행한 이후 중국(상해, 만주) 등지로 진출하여 임시정부나 만주지역 독립군과 연계를 취한다는 노선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조직이 1941년 10월경에 검거됨으로써 이러한 노선의 실현을 보지는 못했으나 폭탄을 직접 제조, 실험하는 등 모의과정을 실행했던 점에서 본다면 이 부분의 진술은 신빙성이 높다.
정덕수 선생은 1941년 10월에 검거되어 치안유지법으로 3년형을 언도받고, 일제 패망이후인 1945년 9월경에 만기출소 이후에야 석방되었다(예심기간이 1년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1945년 9월경이 만기출소였다 하며 일제의 패망으로 인해 만기를 다 채우고 며칠 지나서 나온 셈이라 한다).
정 선생은 1945년 10월 구주지역의 조선인들의 귀환을 도왔던 조선인구호연맹에서 활동하다 귀환조선인들과 함께 1945년 10월에 국내로 들어왔다. 귀환 당시 현해탄에는 지뢰가 많아서 귀환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귀환 후에는 해방 직후의 혼란상과 정치적 혼란(정 선생은 해방정국을 무정부상태 내지 무질서가 극에 달한 상황으로 설명했다) 과정에서 사회활동이나 정치활동에 대한 생각을 접고, 1946년 2월 무렵 단기교사양성소를 수료하고 1946년 여름부터 1958년 무렵까지 11년간 교사로 재직했다. 특히 정 선생의 술회에 의하면 해방 직후 국내나 중국방면에서 활동했던 민족운동가들은 사회활동이나 정치활동에 종사했으나 일본방면에서 활동했던 (학생운동출신자를 포함하여) 다수 인사들의 경우에는 국내 정국에서 소외되었다는 분위기의 진술을 남겨서 흥미롭다.
정 선생 본인의 경우에는 해방후의 행보에 대해 정치활동 내지 권력에 대한 생리적 거부감이 크게 작용했고, 특히 해방 이후 국내 동포들의 행동양식(생존을 위한 본능적 행위-어머님의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70억원에 달하는 현금 도난, 부산지역에서 벌어졌던 적산 탈취, 사기 횡횡)에 대한 회의감 속에서 정치방면이 아닌 학문이나 교직 쪽에서 방향을 찾고자 하셨다고 구술하고 있다.
한국전쟁기에는 학생들이 지원하는 것을 보고 교사로서 군복무를 해야겠다고 결심하여, 의무병으로 지원하려고 했는데 우연한 기회로 제자의 권유로 유엔사 소속 군인으로 종사했다(당시 영어서류를 해석하고 공문을 발송할 수 있는 인물이 적었기 때문에 자기가 그 업무를 수행하기로 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유엔사소속의 군인으로 1950년 8월경부터 1951년 봄까지 군에 복무했는데, 1951년 무렵 유엔사 소속에서 하동지역부대로 전역하여 당시 지리산지역에 잔류하던 인민군대를 토벌하는 부대로 편제되었다. 특히 이 무렵 하동의 제자 20여명이 하동경찰서에 부역혐의로 검거된 것을 정 선생이 방문하여 제자들을 인솔하여 석방시켰다는 일화도 남기고 있다.
한국전쟁 와중에 어머님이 사망하심으로써 군생활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오셔서 계속 교사로 재직하여 1958년까지 교직에 종사했다. 그런데 교직생활과정에서 폐병이 생기셔서 휴직하고 1958년 무렵 공병기지창에 입사하여 1968년까지 군무원으로서 공무원생활을 하셨다.
1968년 공병기지창을 그만두고 부산지역에서 포목상을 운영하고 뒤에는 경남지역에서 과수원을 경영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정 선생의 경우에는 해방 이후 사회활동이나 정치활동 등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 이력을 남기셨고, 자신들의 민족운동이 해방이후 굴절되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고 분단된 조국의 통일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자신들이 추구했던 민족운동의 본래 뜻이 다 실현되는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하시기도 했다."


이력서
성명 정 덕 수 (丁 德 壽) 구술일시 2005. 5. 13./2005. 5. 14.
주민등록번호 ******-*******
본적 경남 고성군 개천면 1195 번지
출생지 경남 고성군 개천면 1195 번지
주소
연락처 051) 507-****
가족관계 "출가한 자제분 아들 2명(분가). 사모님은 사망하심."
활동사항 "1941.2. 개진대 결성 1941.8. 조선독립청년당 결성 1941.10. 동 결사조직 발각, 피체 1942.8.31.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3년형 언도 받음 1945.9. 일본 항복 후 만기출소로 석방됨"
경력사항 "1945.10 부산으로 귀환 1946.봄. 교사양성소 수료(3개월 과정) 1946-1958 학교 교사로 재직함 *1946.여름 (부산지역)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 *1947-1948년 하동중학교 교사로 재직(1년간) 1950.8-1951.봄. 유엔사 소속으로 군복무 1958-1966 폐병으로 교직 그만두고 공병기지창 근무 1968년 이후 (부산) 포목상 운영, 과수원 경영"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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