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I] | |||||||||||||||||||||||||||||||||||||||||||
계 기 화(桂 基 華)*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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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의부(參義府)의 개황(槪況) | |||||||||||||||||||||||||||||||||||||||||||
참의부는 삼일(三一)독립 만세 전(前)부터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재만(在滿)참의부라는 독립단체(獨立團體)로서 최고통수자(最高統帥者)는 전덕원(全德元)(평북용천출신(平北龍川出身))이었으며 조국광복후(祖國光復後)에는 민주공화제(民主共和制)를 부인(否認)하고 제국(帝國)으로 재건(再建)한다는 주장(主張)으로 공문서(公文書)에 연호(年號)도 융희연호(隆熙年號)를 사용(使用)한 복벽파(復![]() ![]() ![]() | |||||||||||||||||||||||||||||||||||||||||||
삼일(三一)운동 직후 간도(間島) 연길현(延吉縣) 방면(方面)에 집결(集結)하여 있는 독립군(獨立軍)을 토벌하기 위(爲)하여 두만강(豆滿江)을 건너 북상(北上)하는 일군(日軍)이나 남사단(南師團)을 청산리(靑山里) 봉오동(鳳梧洞)과 기외(其外) 여러 곳에서 김좌진(金佐鎭) 이범석(李範奭) 홍범도(洪範圖)등 각부대(各部隊)가 적의 대열(隊列)을 토막쳐서 각개(各個) 섬멸을 하여 전후(前後) 서로 지원(支援)·협조(協助)를 못하게 하여 대승(大勝)을 거두었으며, 우리 민족(民族)의 독립(獨立)전쟁에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대전투(大戰鬪)인 동시에 대승전(大勝戰)이였으나 적이 무한(無限)한 증원군을 투입(投入)함으로서 아군(我軍)은 하는 수 없이 밀산(密山) 방면(方面)으로 후퇴(後退)하였다가. 아령(俄領) 연해주(沿海洲) 이만자유시(自由市)로 넘어가서 레닌의 양해하(諒解下)에 군관(軍官)학교를 설립하고 수천명의 인원(人員)을 훈련(訓練)시키던 중(中) 제정(帝政)러시아 백군(白軍)도 완전(完全)히 소탕 못한 상황하(狀況下)의 레닌정부에 대(對)하여 일본(日本)의 끈질긴 항의(抗議)와 국제법상 외교(外交) 규범에 난처해진 레닌정부는 우리 독립군을 무장 해제시키고 해산(解散)하라는 명령(命令)이 내려서, 이에 불복(不服)한 우리 독립군을 적군(赤軍)으로 포위하고 무장(武裝)을 해제하려 함으로 결사(決死)로 대항(對抗)하여 많은 인원(人員)이 전사(戰死) 체포되어 오랜동안 옥고(獄苦)를 치럿고, 겨우 몇백명(百名)만이 만(滿)소국경을 다시 넘어 혼춘(渾春)에 도착(到着)하였으나 여기에는 중국(中國) 국경수비군(國境守備軍)이 주둔(駐屯)하고 있다가 탈출에 지칠대로 지치고 탄환(彈丸)도 없는 이 유랑부대(流浪部隊)를 몽땅 포위 체포하여 무장을 해제하고 전원(全員) 투옥(投獄)하였다. 이로서 우리 민족(民族)의 청사(靑史)에 길이 빛날 이 청산리(靑山里)의 호국(護國)의 영웅(英雄)부대도 레닌의 배신(背信)으로 일명(一名)도 남지 못하고 무산(霧散)한 셈이다. 그 후(後) 동포들의 진지한 교섭과 탄원이 계속되었고 중국(中國) 당국(當局)도 소용(所用)없는 투옥(投獄)임을 자각(自覺)한 끝에 석방되여 정세(情勢)를 관망하던 이범석 장군 외(外) 일부(一部) 인사(人士)들은 장성(長城)을 넘어가고 기외인사(其外人士)들은 산지사방(散之四方)하여 기회(機會)를 기다리던 중(中) 안으로는 레닌의 반란(反亂)과 제일차대전(第一次大戰)을 힘겨웁게 수행하던 제정(帝政)러시아는 일본(日本)에게 서백리아(西伯利亞) 삼림(森林)벌채권을 주고 이억원(二億元)의 국채(國債)를 얻어 갔음으로 일본(日本)은 권(權)익보호를 위(爲)하여 출병(出兵)하였던 이개(二個) 사단병력(師團兵力)이 레닌의 적군(赤軍)에게 밀녀 만주로 나오면서 여러 갈래로 헤어져 아무 영문도 몰으고 있는 우리 동포들을 닥치는대로 도륙(屠 | |||||||||||||||||||||||||||||||||||||||||||
통의부(統義府)는 남만주(南滿洲)에서 한족회(韓族會)와 참의부(參義府)를 주축(主軸)으로 각지방(各地方)에 산재(散在)한 군소민족단체(群小民族團體)들을 통합(統合)하여 조직(組織)한 독립단체(獨立團體)로서 기조직기반(其組織基盤)이 남(南)으로 관전(寬甸) 집안(輯安). 북(北)으로 길림(吉林) 화전(樺甸) 액목(額穆)까지, 동(東)은 통화(通化) 휘남(輝南), 서(西)는 회덕(懷德) 장춘(長春) 합이빈(哈爾濱)까지 광범(廣範)한 지역(地域)을 세력권(勢力圈)으로 하여 강력(强力)한 민족단체(民族團體)로 통의부(統義府)를 창설(創設)하고 군(軍)은 칠개중대(七個中隊)로 편성(編成)하였는데, 사∼오개월(四∼五個月) 후(後)에 복벽파(復 | |||||||||||||||||||||||||||||||||||||||||||
정(正)의부는 통(統)의부의 후신(後身)으로서 지역군사(地域軍事) 재정(財政) 행정(行政) 교육(敎育) 사법(司法) 등(等) 모든 부문(部門)을 기성(旣成) 국가체제(國家體制)에 준(準)하여 조직(組織)하였으며, 입법부(立法部)는 국회격(國會格)인 중앙대의원회(中央代議員會)가 있고 지방(地方)에는 도의회격(道議會格)인 지방의회(地方議會)가 조직되여 있엇으며, 행정(行政)으로는 지방(地方)에 도지사격(道知事格)인 총관(總管)이 있고 구역(區域)에는 면장격(面長格)인 구장(區長) 지서장격(支署長格)인 검독(檢督)을 두어 우리 동포간(同胞間)에 해결해야 할 일은 무슨 일이던지 처리하였으며, 중앙(中央)에 검찰총장격(檢察總長格)인 검무감(檢務監)과 검사격(檢事格)인 검무원(檢務員)이 있엇고 재판부는 사건(事件)이 있을 때마다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으로 구성(構成)하여 심판하였으며, 중앙위원(中央委員)은 각지역(各地域)에서 일명(一名)식 선출하였으며, 중앙의회(中央議會)는 각부(各部)의 예산(豫算)을 심의하여 세입세출(歲入歲出)을 확정하여 전관내(全管內)에 배정(配定) 징수하였고, 지방의원(地方議員)은 각부락(各部落)에서 호(戶)수에 의(依)하여 선출하였으며, 혹불의지변(或不意之變)이 발생하여 무기탄약(武器彈藥)의 손모(損耗)가 많아 부득기(不得己)한 경우에는 일부지역(一部地域)을 획정(劃定)하여 추경격(追更格)인 잠대(暫代)라는 명목(名目)으로 일정(一定)예산을 징수하여 사용(使用)하고 다음 의무금(義務金) 징수시(時)에 공제하여 주었으며, 각지방(各地方)에 분산(分散) 잠복(潛伏)하여 있는 군(軍)의 식대(食代)는 예(例)를 들면 소미반(小米飯) 오전(五錢), 백반(白飯) 십전식(十錢式)으로 식상기(食床記)를 써주면 이를 보관하였다가 다음 의무금(義務金) 징수시(時)에 공제하여 주었고, 교육(敎育)은 소학교(小學校)는 각구역(各區域)에서 교육비(敎育費)를 징수하고 다른 비용과 책가(冊價)는 자(自)담하는 반(半)의무교육이였고, 중학(中學)은 중앙소재지(中央所在地)에 화흥중학(化興中學) 일교(一校)뿐으로 전관내(全管內)에서 교육비(敎育費)를 징수하는 민립(民立)이였으며, 기외(其外)에 사립중학(私立中學)은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동명중학(東明中學) 흥경현(興京縣)에 삼성중학(三聖中學)이 있엇으며, 길림(吉林) 화전현시내(樺甸縣市內)에 화성의점(樺成義 | |||||||||||||||||||||||||||||||||||||||||||
전기(前記)한 바이거니와 무순대(撫順大)공격전의 실패(失敗)는 남만주(南滿洲)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의 붕양(崩壤)의 전주곡(前奏曲)이였으며, 이 전투(戰鬪)가 성공하였으면 전만주(全滿洲)에서 민중(民衆)이 봉기할 것으로 기대(期待)되여 십(十)여만에 달하는 창(槍)과 칼만으로 무장된 고대병(古代兵)과 현대(現代)과학병기(兵器)로 저항(抵抗)해오는 강적(强敵)과의 전투는 인구(人口)가 많은 중국(中國)이나 생각(生覺)하여 볼일이지 타민족(他民族)은 도저히 생념(生念)도 못할 참상이였으며, 이 패전(敗戰)으로 일만(日滿)적군은 무제한(無制限)으로 증원군(增援軍)을 투입(投入)하여 음력 팔월(八月)초에는 서북(西北)으로 흥경(興京) 청원(淸原) 유하(柳河) 해룡(海龍) 반석(盤石) 제현(諸縣)이 차례로 점령(占領)되고, 남(南)으로 본계호(本溪湖) 봉황역(鳳凰域) 관전(寬甸) 제현(諸縣)이, 동(東)으로 집안(輯安) 임강(臨江) 제현(諸縣)이 적의 점령하(占領下)에 들게되여 완전(完全)히 동변도일원(東邊道一圓)이 적의 대포위강(大包圍綱) 속에 들었으며, 적의 족적(足跡)이 미답(未踏)한 지역(地域)은 중앙지대(中央地帶)인 환인(桓仁) 통화(通化) 이현(二縣)뿐으로 적의 포위망 압축으로 사방(四方)에서 전선방어선이 붕괴되였다는 급보가 시시각각(時時却刻)으로 들어오지만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전전긍긍하면서도 창칼을 든 민병대만을 어떤 수단으로던지 동원(動員)하여 보낼 뿐 자신(自身)들이 인솔(引率)하고 있는 무장군은 일명(一名)도 파견하지 않었으니 오늘날 대만(臺灣)의 고배(苦盃)가 그를 여실(如實)히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다급(多急)해진 총사령(司令) 당취오(唐聚吾)는 최후일전(最後一戰)을 한다고 통화성(通化城) 서편(西便) 십오리허(十五里許)에 있는 제대령(提臺嶺)에 참호를 파라고 명령(命令)을 하였으나 사실(事實)은 투입(投入)할 병력(兵力)은 이제 자신(自身)들의 인솔(引率)한 무장군(武裝軍)뿐인데 이것이 적의 예봉(銳鋒)에 몰살(沒殺)하면 상산(上山)비적도 못한다는 생각(生覺)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中)에 통화시내(通化市內)에 있는 중국인 (中國人) 상인유지(商人有志)들이 탄약병참(彈藥兵站)이 없이 싸우면 인명(人命)과 재산(財産)피해만 나지 무슨 소용(所用)이 있겠는가 후퇴(後退)하였다가 재기(再起)하는 것이 득책(得策)이라고 간곡히 설득하여 당취오자신(唐聚吾自身)이 봉천(奉天)서 인솔(引率)하고 온 부하(部下)들도 몰으게 극비리(極秘裡)에 정예오십명(精銳五十名)을 기병(騎兵)으로 편성하여 가족(家族)과 함께 음력 팔월(八月) 이일(二日) 야반(夜半)에 무송현방면(撫松縣方面)으로 도주함으로서 요녕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 총사령부(司令部)는 완전(完全)히 붕괴됨에 따라, 창(槍)과 칼을 들었던 홍창회(紅槍會) 대도회원(大刀會員)등은 창칼버리고 귀가(歸家)하고 집총자(執銃者)들은 자기집단(自己集團)끼리 상산(上山)비적화하였으며. 우리 조혁군(朝革軍)도 통화성내(通化城內)에서 최후(最後)로 음력 팔월(八月) 이팔일(二八日)에 철수하였는데 철수당시 양세봉사령관(梁世奉司令官), 김학규(金學奎) 참모장, 장명도(張明道) 전속부관 (專屬副官), 이춘삼(李春三) 제일소대장외(第一小隊長外) 이십(二十)여명(名)의 무장대(武裝隊)와 각지방(各地方)에서 와있던 지방군요원(地方軍要員)들과 식모(食母) 세탁부(洗濯婦) 잡역부(雜役夫)등 합(合)하여 총인원(人員) 백여명(百餘名)이 우마차(牛馬車) 구대(九臺)에 약간(若干)의 식량(食糧) 탄약(彈藥) 취사(炊事)도구 의복(衣服)등을 싣고 오전팔시(午前八時)에 통화성(通化城)을 출발(出發)하여 서편(西便)으로 사십(四十)여리 되는 쾌대무자(快大茂子)에 도착(到着)하여 교포(僑胞)집들에 분산(分散)하여 점심(點心)을 하였다. 이로서 통화성(通化城)은 저항(抵抗)없는 공성(空城)으로 음력 구월(九月) 일일경(一日頃)에 일만군(日滿軍)은 무혈입성(無血入城)하여 있으면서 몇날동안 후속증원군(後續增援軍)을 집결(集結)식혔으며, 우리 조혁군(朝革軍)은 군관학교(軍官學校)가 있던 환인현(桓仁縣) 강전자(江甸子)로 총집결하라고 명령(命令)을 나리였고, 우리 일행(一行)도 목적지(目的地)가 강전자(江甸子)였음으로 쾌대무자(快大茂子)에서 점심(點心)을 끝내고 이어 출발(出發)하여 사십(四十)여리되는 통화(通化) 제오구(第五區) 대천원(大泉源)에 도착(到着)하니 패잔중국군(敗殘中國軍)이 전민가(全民家)에 산둔(散屯)하여 있었으며, 여기서 십오리(十五里)쯤 가면 강전자(江甸子)여서 일모(日暮)에 강전자(江甸子)에 도착(到着)하니 수백명(名)이 집결되여 있었으며, 아직도 전선에 배치되였던 전우들이 도착못한 곳도 더러 있엇으며, 그날밤은 먼길을 걸어온 관계로 피곤하여 일즉 자고 익일(翌日) 조반후(朝飯後)에는 양사령이하(梁司令以下) 고위(高位)분들이 비밀회의에 들어갓는데 회의내용(會議內容)은 당시(當時) 필자(筆者)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였지만 강전자(江甸子)에 오륙일(五六日)동안 주둔(駐屯)하는 중(中) 인원(人員)은 총집결되였으며, 회의(會議)는 매일(每日) 거듭하였으며, 이 회의(會議)에서 지방군요원(地方軍要員)의 현역(現役)편입이 완전(完全)히 결의됨으로서 필자(筆者)도 별수없이 강등(降等)되여 현역소위(現役小尉)로 편입되였으며, 기후(其後) 회의내용(會議內容)을 누구에게 들은 바는 없지만 오륙일(五六日) 동안 주둔하는 사이에 일만군토벌군(日滿軍討伐軍)의 선봉대(先鋒隊)가 쾌대무자(快大茂子)에 왔다는 통지(通知)가 왔음으로 우리는 별수없어 산(山)으로 올으는 외(外)에 타도(他道)가 무(無)함으로 노일령(老逸嶺) 험산( ![]() ![]() ![]() 1932년 음력 구월(九月) 육일(六日)이라고 생각(生覺)되는데 환인시내(桓仁市內)에서 오전삼시(午前三時)에 조반(朝飯)을 끝내고 통화방면(通化方面)에서 흘러오는 파저강(波 ![]() ![]() ![]() ![]() 다음날 밤에 환인(桓仁)의사가 와서 부서진 우각(右脚)무릅뼈 조각들을 제거한 것이 치료의 전부였다. 다른 의사가 온다는 것은 필자(筆者) 위안시키는 말에 불과(不過)하였으며, 전지역(全地域)이 완전(完全)히 적의 세력에 장악(掌握)됨에 따라 산곡(山谷)에 남아있는 전주민(全住民)을 음력 십일월말(十一月末)까지 하산(下山)하지 않으면 전부사살(全部射殺)한다는 전단(傳單)과 포고문(布告文)을 비행기(飛行機)와 근처(近處)에 민간인(民間人)을 통(通)하여 전(傳)함으로 할 수 없이 엄동설한(嚴冬雪寒)에 하산(下山)하였으며, 이제는 중국군(中國軍)이나 아군(我軍)은 완전(完全)히 민간인(民間人)과 격리되였으며 하산인(下山人)들의 땅 움막에서는 노약(老弱)들은 매일(每日) 수십구(十具)식 죽어나아가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비(悲)극이였다. 통화(通化)총사령부가 붕괴된 초기여서 깊은 산곡(山谷)에 하처(何處)를 막론(莫論)하고 패잔군(敗殘軍)이 있는 관계(關係)로 동서남북(東西南北)을 불문(不問)하고 매일(每日) 총성이 들리며, 우리 조혁군(朝革軍)은 적의 중화기(重火器)의 목표(目標)가 되지 않기 위(爲)하여 차곡(此谷)에서 피곡(彼谷)으로 매일(每日) 이동(移動)하였으며 유곡(幽谷)에는 아직 적이 입곡(入谷)하지 못하는 관계로 빈집이 있으므로 전투중(戰鬪中) 최악(最惡)의 경우를 제외(除外)하고는 우설(雨雪)을 피할수 있어 매일(每日)의 탄우(彈雨)속에서도 경상(輕傷)의 전우(戰友)들과 필자(筆者)도 겨우 1932년의 겨울을 살어서 1933년의 신춘(新春)에 척설(尺雪)의 고봉(高峰).에서 원야(遠野)의 전답(田畓)에서 중한농부(中韓農夫)들의 춘경(春耕)을 바라보며 회한(懷恨)의 누(淚)를 흘렸다. 이제부터는 수십(十)명분(分)도 아니고 수백명분(百名分) 먹을 식량보급(食糧補給)이 큰 근심거리로 근(近)거리에 있는 부락(部落)에 통지(通知)만 하면 동포(同胞)들이 지극(至極)한 성의(誠意)로 어떠한 수단으로던지 식량(食糧)이 오지만 이제는 우리가 조직하였던 행정기관은 자연히 없어졌음으로 누구에게 명령(命令)하여도 거리가 먼 지방부락(地方部落)에서는 차츰 명령불복(命令不服)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始作)함으로 부득기(不得己) 양사령(梁司令)의 명(命)으로 무장대(武裝隊) 오명(五名)을 쾌대기자(快大幾子)에 급파(急派)하여 오백명(五百名)의 일개월식량대(一個月食糧代)를 십일내(十日內)에 수봉(收捧)하여 강전자(江甸子) 모처(某處)로 가져오라고 명령(命令)을 하달(下達)하고 왔는데 십일내(十日內) 육백(六百)원을 보내왔으며 1933년 음력 2월(月)경이였다. 어떠한 최악(最惡)의 경우라도 동포(同胞)들의 지성(至誠)으로 최후(最後)까지 식량은 공급(供給)하였음. 기당시(其當時) 금전(金錢)만 있으면 그런대로 식량은 구할 수 있었으나 천험(天 ![]() ![]() ![]() ![]() 1932년 겨울을 길이 넘는 고산준령(高山峻嶺) 삭풍(朔風)이 살을 어이는 설산(雪山)에서 산수(山獸)와 같은 생(生)을 살면서 1933년 음력 삼월(三月)의 봄날을 맞아 초병(哨兵)을 제외(除外)하고는 양지(陽地)바른 땅바닥이나 벼랑아래 전원(全員)이 아모러케나 누워 춘곤(春困)에 빠진 이 가련(可憐)한 군중(群衆)들을 보고 필자(筆者)도 전우(戰友)들의 극진 보호로 이제 겨우 총상(銃傷)이 봉피(封皮)가 되여 부액보행(扶腋步行)을 하는 형편(形便)으로 심장이 터질 듯한 격한 흥분과 감정이 복바쳐 쏟아지는 눈물로 땅이 보이지 않었다. 혹시 전투없는 날이라도 경상전우(輕傷戰友)들이라 치료(治療) 한번 못받고 한둔(寒屯)이 예사(例事)요 매일(每日) 이동(移動)임으로 상처(傷處)가 악화(惡化)되여 결국 사망(死亡)하였고 혹은 빈집도 없는 경우 동사자(凍死者)까지 나니 참으로 인간(人間)의 양심(良心)으로 형용(形容)할 수 없는 참상(慘狀)이였다. 일례(一例)를 들면 만주사변전(滿洲事變前)에 중국군(中國軍)이 우리 독립군(獨立軍)과 전투시(戰鬪時)에 [고려하총(高麗下銃)(모젤권총의 중국어(中國語))불요근왕상타왕상타(不要筋往上打往上打); 이 말은 독립군(獨立軍)의 권총은 무섭지 않으니 올라가 쏴라 하는 말임], 이렇게 우리를 무시하던 자(者)들이 지금(至今)은 적과 대전(對戰)만 하면 무덕이로 인원손실(人員損失)이 나는 것은 포복행동(匍伏行動)을 않고 직립(直立)으로 느린 행동(行動)을 하니 삼사차전투(三四次戰鬪)에서 칠백(七百)여명 중(中) 사백명미만(四百名未滿)의 인원외(人員外) 남지 못하였으니 왕봉각(王鳳閣)도 한심(寒心)한 처지(處地)에 놓였고 완전(完全)한 비적으로 변(變)한 그들은 그런 참혹한 사회현실에도 아랑곳없이 지방(地方)에서 유력자(有力者)들을 잡어다 돈가져오라고 악형(惡刑)을 일삼고 있으니 중국(中國)의 장래(將來)가 명약관화(明若觀火)이였다. 현존(現存)하는 각역사책(各歷史冊)에 통화시내(通化市內)에서 시가전(市街戰)이라도 몇날 한 것으로 기록되였으나 사실무근(事實無根)이며, 쾌대무자(快大茂子)에서도 전투(戰鬪)가 있은 것으로 기록되였으나 오기(誤記)이며, 더욱 이 지방(地方)은 필자(筆者)가 수십(十)년동안 거주한 지방이며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시점(始點)으로 필자(筆者)가 직접(直接) 현역(現役)으로 참가하여 최후(最後)까지 고락(苦樂)을 같이 하였기 때문에 통화(通化)철수 후(後)에 사실(事實)은 필자이상(筆者以上) 더 자세(仔細)하고 정확한 기록은 나올 수 없다고 자부(自負)하면서 불학둔재(不學屯才)로서 문장(文章)의 수식(修飾)이나 미사여구(美辭麗句)는 나열(羅列)하지 못할망정 어듸까지나 사실(事實)에 충실(充實)을 기(期)하였으나 육십년전(六十年前)의 흘너간 사건(事件)들이라 연대(年代)는 겨우 기억(記憶)에서 찾을 수 있으나 월(月) 일(日)은 그 당시(當時) 망막에 잡혔던 밭을 갈때니 어느달쯤이다 이런 식(式)으로 기록할 수밖에 없는 필자(筆者)의 두뇌(頭腦)가 원망스럽다. 1933년 사월말(四月末)경이라고 생각(生覺)되는데 녹음(綠陰)이 욱어지기 시작한 때여서 지척(咫尺)에서 행동(行動)하여도 잘 보이지 않는 시기(時期)를 이용(利用)하여 양사령(梁司令)께서 기민한 오세민하사(吳世民下士) 김정옥상병(金貞玉上兵)을 중앙대의원(中央代議員)인 강전자(江甸子) 정원하씨택(鄭元河氏宅)에 밀파(密派)하여 미안(未安)하지만 상하막론(上下莫論)하고 전전우(全戰友)가 한둔과동(寒屯過冬)에 잘 먹지도 못하여 지금(至今) 전원(全員)이 춘곤증(春困症)에 빠졋으니 큰 황소 일두(一頭)와 백미(白米) 일석(一石)(현지석(現地石)) 가량을 마련하여 아군(我軍)이 노일령(老逸嶺)에 있으니 우리가 먹고 상산(上山)하기 편리(便利)한 산곡(山谷)을 생각(生覺)하여 준비하여 주면 대금(代金)은 있으니 어느날 어느 곳으로 나려오라는 통지(通知)를 하라는 통신(通信)을 전(傳)하고 왔는데, 사일(四日)만에 내일(來日) 아침에 어느 산곡(山谷)으로 갈터이니 그리로 내려오라는 회신(回信)이 왔음으로 전원(全員)이 아이들처럼 기뻐 날뛰였으며 하산(下山)하는데도 문제가 있었다. 전상동지(戰傷同志)들은 극도의 영양실조(失調)에 빠졌는데 이들에게 고기 한 점이라도 더 먹여야 되겠으나 사불여의(事不如意)하여 전투(戰鬪)가 일어나면 않되기 때문에 부상자(負傷者)들은 현장(現場)에 나아가지 못하고 산곡(山谷) 중간(中間)에 머물고 고기와 국, 밥, 채소 등을 물통에 메여다 먹였으며, 필자(筆者)도 의장(依杖)보행은 하였으나 취사현장(炊事現場)에 나아가지 못하였으며 서산(西山)에 해가 정좌(定坐)하게 되자 조화선(趙化善) 중(中)대장이 몇 사병들과 같이 앞서 올라오고 뒤를 이어 문활석(文活石) 부사령(副司令)부부와 질서 없이 혼성되여 상산(上山)하는데 최후미(最後尾)에 양사령(梁司令)과 장명도(張明道) 전속부관(專屬副官)이 오면서 이산(山)을 올으려면 먹은살이 내리겠다며 누구 이 계소위(桂小尉) 좀 같이 올라가도록 해 하며 다른 동지(同志)들 부(扶)축하여 상정(上頂)하였는데 취사현장(炊事現場)에는 약간(若干)의 백주(白酒)가 있어 쇠약한 체력(體力)에 칠팔개월(七八個月)만에 몇잔의 사십도이상(四十度以上)의 독주(毒酒)에 흥분(興奮)되여 고성방가(高聲放歌)하는 것을 보고, 양사령(梁司令)도 고소(苦笑)하시면서 술도 좋은 때도 있구먼 하시며 장(張)부관에게 다른 실수가 없도록 하라고 지시하시고 필자(筆者)에게 지팽이라도 짚고 움직이니 너의 아버지 볼 면목이 있을 것 같다며 오늘 소추렴도 지방민(地方民)의 손을 거처 마련한 것도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오늘 모든 준비를 해온 정위원(鄭委員)도 명년(明年)에는 아무리 부탁하여도 않해준다기보다 못해준다, 왜냐하면 정위원(鄭委員)은 성의(誠意)가 있지만 다른 일반인(一般人)이 불응(不應)하기 때문에 강제(强制)할 수 없기에 별수없이 소원( ![]() 이 말씀을 들으면서 필자(筆者)는 그렇치 못한 자책지감(自責之感)에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이러한 군신(軍神)의 철언(哲言)을 전원(全員) 명심(銘心)한 관계(關係)로 생포(生捕)되여 일본도(日本刀)에 목이 잘리운 자(者)는 최후(最後)까지 일명(一名)도 없었으며, 전사(戰死) 하여 참수당(斬首當)한 이는 양사령(梁司令)을 비롯하여 몇위(位) 있었음. 1933년 음력 6월초(月初)라 생각되는데 대금(代金)은 지불(支拂)하지만 오랜 시일(時日)을 가까운 부락(部落)에만 부담(負擔)과 운반(運搬)의 고(苦)를 강요(强要)하기가 미안(未安) 하여 녹음기(綠陰期)인 관계로 이십명(二十名)씩 여러제단(梯團)으로 관전현(寬甸縣) 대우구방면(大牛溝方面)으로 극비리(極秘裡)에 이동(移動)하여 기지방(其地方) 국민부(國民府) 중앙위원(中央委員)인 이모(李某)(이름을 기억할 수 없음)에게 양사령(梁司令)의 명의(名儀)로 사백명(四百名)의 일개월식량(一個月食糧)을 반(半)은 식량으로 반(半)은 대금(代金)으로 이일내(二日內)에 수봉(收捧)하여 주면 감사하겠다는 통신(通信)을 초행(初行)이여서 부하오명(部下五名)을 시켜서 전달(傳達)하고 입산(入山)하였는데, 이 지방(地方)은 교통(交通)이 불편(不便)하여 이년(二年)동안 일차(一次)도 의무금과 식량대(食糧代)를 수봉(收捧)하지 못한 곳이여서 시일(時日)을 급(急)하게 하였는데 이모(李某)위원이 밤으로 그 지방 유지(有志)들과 상의(相議)하니 일변(一邊) 다른 사람들을 시켜 식량·금전을 수봉하고 밤으로 도야지 두마리를 잡아서 여러집에서 소금에 삶고 저린 채소와 술 오십근(五十斤)과 밥을 우마차(牛馬車) 이대(二臺)에 싣고와서 우선 밝기전에 식사(食事)를 하라며 우리는 집에서 더운잠을 자는데 얼마나 산(山)에서 고생(苦生)이냐며 술, 고기, 밥을 퍼다주면서 우리가 울기전에 먼저 그분들이 울면서 목이 메여하는 것을 보고 전원(全員)이 눈물이 흘러 한참동안 밥과 고기를 못 먹고 있는데, 양사령(梁司令)께서 지방(地方)에 계시는 분들이 다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고 앗겨주시니 우리는 어떠한 고생과 위협이 있어도 끝까지 참고 민족에게 욕됨이 없이 죽어야 되며 이제 우리의 앞길엔 울어서 될일은 없어, 그러니 언제나 마음굳게 먹고 술 고기, 밥 든든히 먹고 또 싸워야지 ! 자 빨리 먹자. 술가져다 부어라. 이렇게 우는 전우(戰友)들을 얼리시며 격려하시든 모습이 오십칠년(五十七年)이 지난 이시간에도 팔십(八十)이 다된 필자(筆者)의 망막에 아직도 선하다. 일명전(日明前)에 식사(食事)가 끝나자 지방민(地方民)들은 공식기(空食器)를 수습(收拾)하여 귀거(歸去)하고 이위원(李委員)만은 남아서 양사령(梁司令) 외(外) 여러분들과 이야기를 하며 해를 지우고 일모(日暮)하여 먼 물체(物體)가 보이지 않게되자 우차(牛車) 사대(四臺)에 백미이십(白米二十)마대와 밥을 싣고 왔음으로 감사의 눈물을 흘리면서 먹고 광목(廣木)으로 가늘고 길게 만든 포대(布袋)에 일인당(一人當) 삼승(三升) 내지(乃至) 사승식(四升式) 분배(分配)하여 메고 여러지방인사(地方人士)들에게 머리숙여 눈물의 인사를 들이고 또다시 노일령(老逸嶺)을 향(向)하여 회정(回程)의 길에 올라 밤을 새워 파저강서안(波 ![]() 1933년 음력 칠월(七月) 십일일(十一日) 귀대(歸隊) 즉시 인원(人員)을 점검한 결과 통화(通化)철수후(後) 일년미만(一年未滿)에 백(百)여명(名)의 인명손실(人命損失)을 입었으니 단장의 누(淚)를 금할 수 없으며 겨우 기동(動)은 하나 전투 불능자(不能者)는 원(願)하는 자(者)는 전부 귀가시켰으며, (계소위(桂小尉)(필자(筆者))를 손짓하여 앞에 불너세우고 이번 귀로(歸路)에 너의 집에서 자고 왔는데 기(其)동안에 너의 처(妻)도 죽고 너의 아버지는 우리 현역(現役)이 못할 일은 꼭 너의 아버지를 시켰으니 우리 독립운동의 원로로다. 우리가 지금 휴대하고 있는 권총도 너의 아버지의 손을 거친 것이 백(百)여정이나 되며 아무 전투 경험이 없는 너를 무순대(撫順大)공격전과 현역에 편입시켜 불구자(不具者)를 만든 것은 죄스러우며 너의 아버지 볼 낯이 없었다. 더욱이 사대(四代)독자란 말을 듯고 가슴이 아팠았다, 이미 다 엎어진 물인데 소용없는 말이로다, 모레(십오일(十五日)) 아침 집으로 가라면서 너의 부자(父子) 다 집에서 마음놓코 살 신세가 못되고 적에게 잡히면 죽는 것은 우리와 다를 바 없지만 아직 나이 젊으니 피신에 최선을 다하여 광복을 기다리라고 하면서 낙루(落淚)를 보이지 않으려고 돌아섰음. 1933년 음력 칠월(七月) 십오일(十五日) 아침 안개덥힌 강전자(江甸子) 뒷산(山)에서 전원(全員)이 한덩어리 주먹밥으로 조반(朝飯)을 끝낸후(後) 사령이하(司令以下) 장(張)부관 한일추(韓 ![]() 필자(筆者)가 귀가(歸家)하여 타(他)부락 친구의 집으로 전전하는지도 벌서 일개월(一個月)이 다 되여 내일(來日)이면 추석(秋夕)이 되여 필자(筆者)의 집에서 오리(五里)쯤 되는 강(江)건너 합마당(蛤 ![]() 김사령(金司令)의 명령(命令)을 받은 필자(筆者)는 즉시(즉時) 귀가(歸家)하여 떠나려고 하는데 아버지께서 다리도 완전(完全)치 못한 병신(病身)이 이삼십리(二三十里)도 아니고 백오십리(百五十里)나 되는 먼길을 어떠케 가겠다느냐? 아모 말 말고 조심하여 집에 있으라고 함으로, 이땅이 왜놈의 천하(天下)가 된지 벌서 만이(二)년이 되여 학교는 보통학교로 변하여 왜놈 앞잡이 선생놈이 와있고 여기서 흥경(興京)가는 노변(路邊)에 아버지 안면 몰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떠케 가신다고 하십니까, 이일(二日)에 못가면 삼일(三日)에 가지요, 빨리간다고 죽은이가 살어오시나요 하고 떠나려는데, 어머님께서 비올때 쓰시던 밀초먹인 광목(廣木)보자기를 내여주시면서 여기 싸서 모셔오시야지 피가 내여 비치면 안되니 가지고 가라고 하여 참으로 어른들의 사리에 탄복하면서 밤을 새워 육십(六十)여리 되는 통화(通化) 제육구(第六區) 삼과유수촌(三楡樹村)에 당도(當到)하니, 집집마다 조반(朝飯)연기와 함께 일명(日明)하여 중학동(中學同)창인 친구의 집에 들어가니 조조(早朝)에 웬일이냐 함으로 대강 귀뜸하니 이제는 수십(十)년 공들인 탑이다 무너졌다면서 명일(明日)이라 푸짐한 주(酒)찬을 들면서 비분강개의 말을 교(交)하면서 조반을 끝내고 친구의 조심하라는 전송을 받으며 대로(大路)를 버리고 산로(山路)료 우회(于回)하여 날이 저물어서 흥경(興京) 백기보(白旗堡) 역시(亦是) 동창(同窓)인 김관호군(金官浩君)의 집에 도착(到着)하니, 친구 모(母)친께서 명일(明日)에 웬일이냐 함으로 집떠난지 오래되였는데 집에 가는길이 늦어졌읍니다. 인사(人事)가 끝난 후 다른방에서 친구와 같이 저녁겸 주회를 하면서 모든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이야기한즉, 전(前)같으면 형(兄)님이 직접(直接) 입성(入城)하여도 무방(無妨)하겠지만 지금(至今)은 일군입성후(日軍入城後)에 주구(走狗)놈들 외(外)에 무순(撫順) 봉천방면(奉天方面)에서 막난이패가 모여와서 주구(走狗) 이상(以上) 날치며 촌시민(村市民)을 막론(莫論)하고 폭행과 금전을 강탈하니 한심한 세월(歲月)이라면서 나도 대한(大韓)사람인데 조금이라도 형(兄)님의 수고를 덜어들여야지요, 내일아침 제가 쌀을 두어말 지고 놈들에게 술값으로 빼앗길 작정(作定)으로 지고가서 남북(南北)거리를 잘 살피고 올터이니 집에 계시라고 하면서 일배일배(一盃一盃) 복일배(復一盃)로 소용(所用)없는 비분강개의 말로 야심(夜深)토록 주회(酒會)를 하다 잤다. 1933년 음 팔월(八月) 십육일(十六日) 아침해가 동창에 빛이여서야 노독(路毒)과 백주(白酒)에 녹초가된 몸을 거두어 일어나니 친구는 벌서 아침쇠물과 입성(入城)준비를 하여 놓코 들어오면서 형(兄)님 곤하시겠읍니다, 세수물 가져다 놓았으니 세수하시요 함으로 세수를 하고 같이 조반을 하고, 제가 입성(入城)하였다가 점심때면 올터이니 형(兄)님은 곤하실터이니 낮잠이나 주무시요 하고 입성(入城)하였다. 정오(正午)가 좀 지나서야 친구가 귀가(歸家)하면서 형(兄)님 주무시요 하면서 입방(入房)함으로 심신(心身)에 고생(苦生)을 시켜서 미안(未安)하구먼 하니, 형(兄)님 우리들끼리야 미안(未安)이 뭐있겠오 형(兄)님이 못하실 형편(形便)이면 제가 해도 해야 될 일이 아니요 함으로 민심(民心)은 아직도 구정(舊情)인데 이 민족(民族)이 불우시운(不遇時運)한 탓이로다 생각(生覺)하면서 감읍(憾泣)의 누(淚)를 삼키면서 입성(入城)결과를 물은즉 쌀은 지고 남북시가(南北市街)를 이회(二回)나 내왕(來往)하면서 아무리 살펴도 보이지 않더라고 하면서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효수(梟首)하는 법(法)인데 보이지 않더라고 하면서 오늘은 막난이놈들을 맛나지 않어서 잃어버리려던 쌀값이 남어서 도야지고기와 술을 사가지고 왔다면서 부인(夫人)에게 빨리 안주를 끓이게 하여 주지육림(酒池肉林)에 곤드레가 되여 그날밤을 자고, 십칠일(十七日) 아침 조반을 끝내고 친구의 말이 백(百)번 틀림은 없겠지만 명령(命令)받은 책임과 고인(故人)에 대(對)한 의리(義理)를 생각(生覺)하여 직접 현장(現場)을 답사(踏査)키로 심정(心定)하고 친구에게 중국의(中國衣) 일착(一着)을 부탁(付託)하여 중국인(中國人)으로 변장(變裝)하고 지팽이를 짚고 병신(病身)으로 행(行)세하면서 남북노변(南北路邊)을 멀리까지 살펴도 보이지않어 오후(午後) 이시(二時)경에 친구집에 와서 모든 후사(後事)를 간곡히 부탁하면서 역시(亦是) 술로 밤을 밝히다싶이 취침(醉寢)하였다. 음력 팔월(八月) 십팔일(十八日) 아침 친구의 집을 떠나서 산(山)길로 육십(六十)여리 되는 반라배(半羅背)라는 촌(村)에 이르러 이용상(李用祥)(중앙위원(中央委員)) 형(兄)님택(宅)을 찾어들어가니, 기화(基華) 자네 어떠게 된일인가 방(房)에 들어가 이야기하세, 입방(入房)하니 저녁상이 나왔는데 술배웠나 함으로 이제 남은 것은 그 망종짓밖에 없읍니다 하니, 별 말 다하네 남자사회에 나가면 별수없어 술마신다고 다 망종인가 그럼 한잔들게 하면서 술을 줌으로 몇순배(盃)하면서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이야기하니 아무말씀없이 한참 천정(井)을 응시하시더니 방바닥을 치면서 용마루가 부러졌구나 하시며 낙루(落淚)하심으로, 필자(筆者)역시 낙루(落淚)하다가 형(兄)님 진정하십시요 우리 민족이 시운(時運)을 못맛난 탓이니 할 수 없지 않읍니까? 지당(至當)한 말이로다 수급(首級)까지 회수(回收)못하였으니 통탄(痛嘆)할 일이로다, 자 술이나 마시자면서 자네도 집에 오기는 하였지만 마음놓고 집에 못있을 형편(形便)인데 자식(子息)도 많치 않은 집으로 걱정이로다, 그리고 자네에게 뭇는 말인데 양사령(梁司令) 계제(季弟) 윤창(允昌)인가 자네같이 중학동창(中學同窓)인 그사람은 지금 무엇하고 있는지 소식(消息)을 아느냐 물음으로, 통화사령(通化司令)부때 헤여진 후(後)에는 모릅니다 하니 용상(用祥)형님 말씀이 옛말에 한배자식도 요렁조렁하다는 격으로 그 사람 아무 쓸모없이 하는 일 없이 자기형(自己兄)의 후광(後光)으로 남북만주(南北滿洲)를 헤메다니어 무전(無錢)여행에 통리(通理)한 사람이지 우리는 산촌(山村)에 있어 몰으지만 왜놈이 양사령(梁司令) 죽은 즉시로 신문방송을 통(通)하여 양세봉(梁世奉)잡아죽였다고 떠들어 대였을터인데 어째서 그말을 들엇음즉 한데 자기형(自己兄)의 수급(首級)을 회수(回收)하기 위(爲)하여 엉뚱한 사람들이 수백리 사선(死線)을 내왕(來往)하는 줄도 부지(不知)하고 있으니 새심(塞心)한 존재(存在)로다 하심으로, 필자(筆者)의 말이 어째서 농사라도 마음놓코 할 형편도 못되고 일본(日本)말 몰으니 도시공장(都市工場)에도 못가는 것 않이겠읍니까, 다 시운(時運)이 만들어 놓은 방랑객(放浪客) 않이겠읍니까. 그렇기도하다. 벌써 자정(子正)이 되여 주상(酒床)을 치우고 참으로 취침(醉寢)하였다. 음력 팔월(八月) 십구일(十九日) 조반을 먹고 이용상형(李用祥兄)님 말씀이 삼과유수(三 楡樹)경찰서 왜놈 지도관이 있어 불편(不便)하니 주의(注意)하여 가라는 전송(餞送)을 받으며 십오리가량(十五里可量) 와서 삼과유수(三 楡樹)거리를 피하여 산(山)길로 강산령산맥(崗山嶺山脈)을 넘어 석양(夕陽)이 되여 집에 도착(到着)하여 아버지께 전후사정(前後事情)을 말씀들이고, 곧 사령(司令)부에 보고문(報告文)을 상세(詳細)하게 기록(記錄)하여 직통(直通)으로 보내여야 되겠는데 전(前)과 같이 직통(直通)으로 산(山)에 찾어갈 수 없어 필자(筆者)와 지기지우(知己之友)인 김정서군(金貞瑞君)을 시켜 앞태산(泰山)을 넘어 환인현(桓仁縣) 강전자(江甸子)까지만 전하고 오라고 밤으로 출(出)발시켰거니와 불세출(不世出)의 백전백승(百戰百勝)의 군신(軍神)으로서 오호(嗚呼) ! 천참(天慘) 지수(地愁) 일개비적(一個匪賊)의 흉탄(凶彈)에 천추(千秋)의 한(恨)을 품고 황야(荒野)에 쓸어진 것도 통한(痛恨)인데 수급(首級)까지 적(敵)의 오도(汚刀)에 피참(被斬) 도무(盜霧)되였으니 전민족(全民族)의 회한(懷恨)이 이에 더할수 있으랴. 그 침착하고 굳센 결단성과 인자(仁慈)하고 자상(仔詳)하신 부모(父母)같으신 성품(性品), 아무리 성날일 저즐렀서도 부하(部下)에게 욕하는 일이 없으시고 큰일을 저즈른 자(者)는 꼭 자기(自己)곁에 있게 하여 타상급자(他上級者)가 구타(拘打)하지 못하게 하엿으며, 시시(時時) 부하(部下)에게는 권연(卷煙)을 사주면서도 자신(自身)은 엽초(葉草)를 주머니에 넣고다니면서 중국인촌부(中國人村夫)처럼 곰방대로 잠 않올때 심심파적으로 피우는 것이지 맛이 무슨 맛이냐며 중국인(中國人)으로 변장(變裝)하고 다닐 때에 변장(變裝)술에 일종(一種)이였으며 주초(酒草)는 즐기시지 않는 편(便)이였음. 1933년 음 팔월(八月) 십이일(十二日) 양사령(梁司令) 순국(殉國)을 전후(前後)하여 이개분단(二個分團)으로 편성(編成)하였던 부대(部隊)를 김활석사령(金活石司令)이 문사출신(文士出身)이여서 전투지휘미숙(戰鬪指揮未熟)으로 사실상(事實上)의 지휘권(指揮權)은 부사령(副司令) 한쇠추(韓釗秋)(최종윤(崔宗崙) 황포군관졸(黃 ![]() 1934년 음력 1월말(月末)경 필자(筆者)가 귀가후(歸家後) 처음있는 통신(通信)으로서 김활석사령(金活石司令)의 명의로, 계소위(桂小尉)도 짐작하겠지만 이제는 의복(衣服) 신발 식량(食糧) 모든것이 다 한계점(限界點)에 달(達)하였으니 통화지방(通化地方)에서 좀 해결(解決)하여 주면 하는 생각(生覺)으로 책임소재(責任所在)도 없는 계소위외(桂小尉外)에 어데 보낼 곳이 없어 부득이(不得己) 보내니 안미(安未)하지만 최선(最善)을 다하여주면 고맙겠오, 백방(百方)으로 생각(生覺)하여도 통화지방외(通化地方外)에는 우리의 능력(能力)이 닫는 곳이 없으니 내하(奈何)오,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 한 전우(戰友)이니 최선(最善)을 다하여 줄 것을 믿겠오, 식량(食糧)이건 신발이건 의복(衣服) 아무 것도 좋으니 수단(手段)대로 하여 주시요. 이 통신(通信)을 받은 필자(筆者)는 재산전우(在山戰友)들의 참상(慘狀)을 망막에 그리면서 어찌하여야 되겠는지 생각(生覺)이 나지않어 아버지께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읍니까고 문의(問議)한즉, 다소(多小)라도 보내여야지 하시며 몇몇 유지(有志)들을 옆집아이를 시켜서 소집(召集)하여 상의(相議)한 결과 우리의 주장이 성립될 지반도 점점 줄어들어 근방일원(近方一圓)애 백(百)여호가 거주(居住)하는 쾌대무자(快大茂子)경찰서에 일본(日本)놈 지도관(官)과 한인(韓人)경찰 삼명(三名)이 상주(常住)함으로 필자(筆者) 부자(父子)의 능력(能力)이 량지 못하게 되였고 우리 주장이 통(通)할 곳은 백오륙십호(百五六十戶)가량으로 매호당(每戶當) 삼원식(三圓式) 삼등분(三等分)하여 일등(一等) 오(五)원, 이등(二等) 삼(三)원, 삼등(三等) 일(一)원씩 부담시켜 삼일내(三日內)로 오백원(五百元)을 수봉(收捧)하여 거리(距離)와 운반관계로 식량(食糧)은 생각(生覺)도 못하고 다소(多小)라도 의복(衣服)을 공급(供給)키로 결의(決議)하고 일일(一日)에 삼사인식(三四人式) 통화성(通化城)에 보내여 광목(廣木) 입필(卄匹)을 구입(購入)하여 전부락(全部落) 부녀자(婦女子)를 총동원하여 이주야(二晝夜)에 한복단의(韓服單衣) 백육십착(百六十着)을 급조(急造)하여 부락민(部落民) 십명(十名)을 동원하여 일인당(一人當) 십육착(十六着)씩 지우고 밤으로 대도령(大都嶺) 태산(泰山)을 넘어 일출(日出)경에 환인현(桓仁縣) 만룡배부락(灣龍背部落)에 도착(到着)하여 민가(民家)에서 조반을 먹은후(後) 청년(靑年)들을 귀가(歸家)시키고, 필자(筆者)는 오숙(午宿)으로 날을 보내고 기지방청년(其地方靑年)을 동원(動員)하여 밤으로 팔십(八十)여리(里)를 가서 날이 새여옴으로 사첨자(沙尖子)의단 동포(同胞)집에서 조반(朝飯)을 먹고 인솔(引率)하여 온 청년(靑年)들은 앞을 살펴 일명이명식(一名二名式) 수단(手段)것 귀가(歸家)케 하고, 일모(日暮)에 사령부(司令部)에 연락하여 하처(何處)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사첨자(沙尖子) 청년(靑年)들에게 지우고 지정장소(指定場所)에 도착(到着)한즉 한쇠추(韓釗秋)사령이 부하(部下) 입명(卄名)을 인솔(引率)하고 왔음으로 반가웁게 악수(握手)는 하면서도 목이 메여 서로 말을 못하고, 필자(筆者)는 다리가 너무 아파서 눈 위에 앉으니 한사령(韓司令)도 앉아서 이야기를 하며 이제 중국패잔집단(中國敗殘集團)은 대소(大小)를 막론(莫論)하고 거의 없어지고 적(敵)이 마음놓고 아모 산곡(山谷)이라도 막 들어오니 종종 피하여 가면 앞에도 적군이 있어 전후(前後)에 적(敵)을 맛나 계소위(桂小尉) 귀가후(歸家後)에도 사십(四十)여명의 전우(戰友)가 죽었다면서 경상자(輕傷者)들도 이제는 다 죽었고 빈집도 없어 몇날 따라다니다 결국 다 죽었다면서 이렇게 많은 의복(衣服)을 가져와서 감사하다고 하였고, 필자(筆者)는 양사령(梁司令) 수급(首級) 회수(回收)하려 갓던 일과 경량급(輕量級)인 의복(衣服)을 택한 일이며 이번에 오백(五百)원을 거두어 백육십(百六十)원을 들여 광목입필(廣木卄匹)을 구입하여 백육십착(百六十着)의 단의(單衣)를 만들고 삼백사십(三百四十)원을 가지고 왔다고 하니, 고생(苦生)을 말하면 무었하나 한번에 여러가지를 다할 수 없는 일이니 앞으로 기회(機會)있는대로 또 연락하겠오, 전(前)같이 빈집이라도 있으면 입산(入山)하여 이야기라도 하겠는데 성(成)한 몸도 안닌데 헤여지자 함으로, 이 불초(不肖)가 기지방(其地方)에 있는 한(限)무었이던지 만족(滿足)은 못할망정 최대한(最大限) 노력을 할터이니 또 통신을 보내십시오 하니, 고맙다면서 그저 피신 잘하라면서 헤여졌다. 필자(筆者)는 짐지고 갓던 청년(靑年)들 집에서 자고 아침에 사첨자(沙尖子)를 떠나서 오후(午後) 사시(四時)경에 다리가 아파서 겨우 강전자(江甸子) 정원하위원택(鄭元河委員宅)에 도착(到着)하니 큰 수고하였구면 함으로 무슨 수고이겠읍니까? 다 듣고 있어 참말 앞으로 큰일이야, 예로부터 군인(軍人)이 싸우다 죽는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이지만 국민(國民)이 멀정한 눈으로 보면서 아사(餓死)케한다는 것은 후세(後世)에 국민정신(國民精神) 밑바닥까지 지워버리는 처사인데 자네에게 말인데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나 하시면서 필자(筆者)가 하려던 말을 먼저 하심으로, 아저씨께서도 정의부(正義府) 시절(時節)부터 중앙(中央)위원이시고 제 부친(父親)도 같은 중앙(中央)위원이신 신분(身分)으로 책임(責任)도 책임(責任)이지만 죽어도 체면(體面)을 지켜야 하는 처지(處地)이니 끝까지 최선(最善)을 다하는 도리(道理)밖에 없지않습니까 하니, 그 사람들 있는 노일령근방(老逸嶺近方) 부락에는 극심(極甚)한 식량난으로 현금(現金)을 주고도 식량을 구할 수 없고 백리이상(百里以上) 먼곳에서 운반하여야 되니 토벌군(討伐軍)이 일야(日夜)로 내왕(來往)하는 상황(狀況)에서 우마차(牛馬車)로는 생념(生念)도 못할 일이며 식량준비를 하는 것도 문제(問題)로다 함으로, 필자(筆者)가 본 형편(形便)으로도 의복(衣服)을 가지고 간 사람에게 당장에 식량의 말을 못하고 다음 또 통지(通知)하겠다고 하는 말이 식량이 없는 모양이였으며 금명(今明)간 별수없이 환인지방(桓仁地方)으로 식량청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저씨께서 이월분(二月分)만 얻던 방법(方法)으로던지 공급(供給)하십시요, 그리고 저는 이 길로 쾌대무자(快大茂子)에 가서 정미소(精米所)가 삼(三), 잡화상(雜貨商)이 이(二), 병원(病院)이 이(二), 기외유지(其外有志)들을 설득(說得)하여 백오십석(百五十石)을 수집(收集)하여 시외(市外) 노도근(盧道根)정소미에 집적임치(集積任置)하여 놓고 아저씨에게 연락하겠으며 산(山)에도 연락하겠으니 운반책임은 절대로 환인지방(桓仁地方)에서 저야되며 이것으로 1934년 신곡날때까지 공급(供給)계획을 세울터이니 아저씨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이사람 자네 계획대로 되기만 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가져다주지 못하겠나, 적극 추진하여 주게나. 이 계획은 필자(筆者)의 아버지께서 벌서 환인(桓仁) 통화지방(通化地方) 외(外)는 교통 통신(通信)의 불능(不能)으로 앞으로 무엇보다도 식량요청(食糧要請)이 빛발치듯 할것이 불을 보는 듯함으로 1933년 음력 십이월(十二月)경에 쾌대무자(快大茂子) 각(各)기업체에 비밀히 연락하여 준비하여 두었던 사실(事實)을 정(鄭)위원에게 알리운 것임. 이런 말을 하면서 밤이 깊도록 대작(對酌)하다가 자고 아침을 먹고 정위원(鄭委員)의 전송을 받으며 쌀쌀한 아침바람을 안고 오십오리(五十五里)되는 쾌대무자(快大茂子)에 당도(當到)하여 삼산(三山)의원(원장(院長) 장상규(張相奎))에 들어서니 오후(午後) 이시(二時) 경이였으며, 장원장(張院長)이 중국(中國)짚에서 점심(點心)을 하자고 하여 중국(中國)짚에서 점심(點心)을 하면서 입산(入山)하였던 모든 사정(事情)을 말씀들이니, 나도 전(前)에 음양(陰陽)으로 참가하였던 사람으로 자네 아버님의 간곡한 부탁을 듣고 이지방 몇몇 기업체 주인(主人)들과 유지(有志) 몇분을 모아서 상의(相議)한 결과 백륙십삼석(百六十三石)의 백미(白米)를 모았는데 하면서 의연자들의 명단(名單)을 줌으로 본즉, 이재원(李在元) 정미소 삼십석(三十石), 김상희(金相熙) 정미소 입오석(卄五石), 노도근(盧道根) 정미소 입석(卄石), 평안상회(平安商會) 십석(十石), 박도일상회(朴道壹商會) 십석(十石), 장원장(張院長) 입석(卄石), 평원의원(平原醫院) 십오석(十五石), 이외(以外) 지방유지(地方有志)들의 협력(協力)으로 백육십삼석(百六十三石)이 되였는데 각(各) 정미소분(分)은 각자(各自) 보관(保管)하고 기외분(其外分)은 노도근(盧道根)정미소에 집적(集積)키로 장원장(張院長)에게 부탁(付託)하고, 필자(筆者)는 노(盧) 정미소 주인(主人)을 맛나 필자(筆者)가 출급전표(出給傳票)를 꼭꼭 보낼터이니 전표대로 출급(出給)할 것이며 출급시(出給時)에 수령자(收領者)에게 정위원(鄭委員)의 수령(收領)증 꼭 받고 출급(出給)하도록 당부하고, 익일(翌日) 필자(筆者)는 강전자(江甸子) 정원하위원택(鄭元河委員宅)으로 가서 모든 사정(事情)을 말하니, 참으로 살어났다 그곳 사람들이 고맙구먼, 자네 얼마나 수고하였나? 그리고 제가 십일분식(十日分式) 출급요구서(出給要求書)를 하여 둘터이니 아저씨께서 수령(收領)증을 꼭 정미소에 보내십시요, 수령(收領)증이 없으면 출(出)급치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도 다리가 아파서 산(山)에 가지 못하겠으니 아저씨께서 좀 수고하여 주십시요 하니, 보는 정경에 그 일까지 거역할 수 없구먼 그렇게 하세 하시는 말을 듣고, 필자(筆者)는 익일(翌日) 아침 쾌대무자(快大茂子)에 돌아와서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人事)를 들이고 귀가(歸家)하여 아버지께 모든 사정(事情)을 말씀들이였다. 1934년 음력 4월말(月末)인지 오월(五月) 초(初)인지 기억하지 못하겠으나 필자(筆者)에게 좀 상의(相議)할 일이 있으니 괴롭겠지만 입산(入山)하여 달라는 통신(通信)이 왔음으로 필자(筆者)의 내심(內心)에 식량(食糧)은 당분간(當分間) 공급함에도 불구(不拘)하고 상의(相議)할 사(事)란 것은 신발의 공급(供給)을 요구(要求)할 것이 틀림없다고 사료(思料)하면서 어차피(於此彼) 가는 길이니 쾌대무자(快大茂子)에 가서 중국인(中國人) 마차(馬車) 이대(二臺)에 삼십(三十)포대를 싣고 강전자(江甸子) 정위원택(鄭委員宅)에 가서 하차(下車)하면서 식량을 공급하는데도 오라니 저는 이길로 사첨자(沙尖子)로 가니 이 쌀을 일량일(一兩日)간에 전하십시요 하고 곧 떠나 삼십(三十)여리를 가니 일모(日暮)하여 동포(同胞)집에서 자고, 익일(翌日) 오후(午後) 사시(四時)경에 사첨자(沙尖子)에 도착(到着)하여 사령(司令)부에 연락하니 야음(夜陰)이라 군인(軍人) 삼명(三名)이 앞천변(川邊)에 와서 기다린다고 하여 나아가 그들과 같이 입산(入山)하니 큰 바위 사이에 빈집 이호(二戶)가 있어 한 채는 활석부인(活石夫人) 전학숙(田學淑)이 다른 채는 검추부인(劍秋夫人)이 있어서 웃방에만 군인들이 번갈아 들락거리고 있는데 김사령(金司令), 한부사령(韓副司令), 조화선(趙化善) 중대장(中隊長), 정응선(鄭應善) 전속부관(專屬副官), 이영술(李英述) 중대장등(中隊長等) 여러 막(幕)료들과 악수(握手)는 하였으나 눈물이 서로 흘러 한순간 말을 못하다가 먼저 부사령(副司令)이 말문을 열어 자기(自己) 부인(夫人)에게 기(其)토끼 소금에라도 복그도록 하고 산(山)에서 사니 토끼는 종종 잡힌다면서 통화지방(通化地方)에서 이제 우리에게 올 사람은 계소위(桂小尉) 부자(父子) 외(外)엔 없고 환인지방(桓仁地方)에서는 정위원(鄭委員) 외(外)엔 없으며 일반인(一般人)이 마음이 변해서가 아니라 찾는 요령도 모르고 위험이 두려워서 감(敢)히 접근(接近)을 못하는 것 일뿐이지 말을 하자, 김사령(金司令)이 참으로 감사하오 순국(殉國)하신 양사령(梁司令)의 예언(豫言)이 맞어 들었구먼 계소위(桂小尉) 부상(負傷)한 날 저녁에 야단하는 계소위(桂小尉)에게 앞으로 네가 없으면 해결(解決)못할 일이 있어 그러는 것이니만큼 신경질 쓰지말고 있으란 말이 어떻케 들어맛는지 이상하다, 쾌대무자(快大茂子)에 일경(日警)이 와있다 하여도 이번 계소위(桂小尉)가 한일을 생각(生覺)하면 민심(民心)은 아직 옛날 그대로인데 우리가 불우시운(不遇時運)한 소이(所以)로다, 부사령(副司令)의 말이 우리 뒷치닥거리를 할곳은 환인(桓仁) 통화(通化) 이개지방(二個地方) 뿐이니 일반인(一般人)들도 사실은 지겨웁지 않을 수 없지만 내하(奈何)오 함으로, 필자(筆者)가 통신을 받고 예측(豫測)한 것은 신발일 것이라고 생각(生覺)하였는데 혹다른 주문(注文)이라로 있으신지요 하니, 물론(勿論) 신발이다, 우리의 일년분식량(一年分食糧)을 해결한 사람에게 숨돌릴사이도 없이 또 신발을 주문(注文)할 염체가 없어 지방(地方)에 모든 사정(事情)도 좀 알어볼겸 상의(相議)하기 위(爲)하여 이 험로에 오라고 하였오. 이런 말들이 오가는 동안 토끼고기를 두 부인이 가지고 들어오며 김사령부인(金司令夫人), 전학숙(田學淑)이 계소위(桂小尉)님 산중(山中)이여서 아무것도 없어요 함으로 고기와 술병으로, 사모(師母)님께서 소위(小尉)에게 무슨 예사(禮辭)를 쓰십니까 하니, 눈을 흘기면서 사회(社會)에 나아가시더니 말솜씨 느럿네요 하면서 학교시절 여학생들에게 치근거리면서 놀리는 바람에 마음 약한 아이들을 울녀놓고야 마는 짓구진 성질이라고 하니, 김사령(金司令)이 연애 좀 햇겟구면 하여 좌중히 웃음이 터졌는데 전부인(田夫人)이 늙은이가 망령인가 봐 함으로, 필자(筆者)가 사령관(司令官)좌하 면구스러운 말씀을 하십니까 한즉, 면구스러울 것이 무엇이요 다 젊어서 한 시절이지 하여 또한번 우슴의 꽃이 피였다. 제가 신발을 최대한(最大限) 노력하여 보겠지만 수량(數量)의 다소(多小)는 알수없는 일이니 큰 기대(期待)는 말고 약일개월(約一個月)간 기다려 보아 주십시요 하면서, 환인(桓仁) 통화(通化)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하고 흥경(興京)에 가야 다소간(多小間) 가능(可能)함으로 아버지께서 가서야 되겠다는 생각(生覺)을 뇌리(腦裡)에 그리면서 일명전(日明前)에 하산(下山)을 하려고 사령관(司令官) 이하(以下) 여러 전우(戰友)들과 악수(握手) 작별(作別)을 하려는데 부사령이 탄환(彈丸)은 이(二), 삼십(三十)발씩 밖에 없는데 이제는 탄환(彈丸)은 구(求)할 수 없는 형편(形便)이고 한숨짓는 말을 하면서야 이 계소위(桂小尉) 산어구(山於口)까지 모서다 들이고 오라며 사병이명(士兵二名)을 산어구(山於口)까지 동행(同行)하고 귀대(歸隊)시키고, 그날 다리가 몹시 아파서 저물어서야 강전자(江甸子) 정위원택(鄭委員宅)에 도착(到着)하니 조금 기다리라면서 닭을 잡아서 술을 가져와 저녁겸 주회(酒會)를 하면서 정위원(鄭委員)말씀이, 참으로 감사하네 자네가 없으면 잘하건 못하건 간에 내가 하여야 될일이니 모든일이 환인지방(桓仁地方)에서 되는 일이라 피할 수 없지 않은가 말이네. 아저씨께 말씀들이는 것은 이번에도 또 주문(注文)을 받고오는 길입니다. 지하족(地下足)을 최대한(最大限) 구입하여 달라는 주문(注文)인데 구입하는것도 문제(問題)지만 금전(金錢)이 문제않입니까? 환인지방(桓仁地方)에서 좀 보조(輔助)하여 주십시요 하니, 정위원(鄭委員)말씀이 통화(通化)철수후(後) 지금까지 쥐여짠 곳이 환인지방외(桓仁地方外) 없지 않은가 통화지방(通化地方)은 자네 귀가(歸家)한 후(後)부터 몇차례 있었을 뿐이니 이번만은 또 자네가 수고하여 주게나 함으로, 필자(筆者)도 본래(本來) 기대(期待)를 가지고 한 말은 않이였기에 그러면 다음 요청(要請)이 있을 시(時)에는 환인(桓仁)서 하십시요 하고 일배일배복일배(一盃一盃復一盃)로 밤을 지새우다 싶히 오래간만에 취침(醉寢)하고 대도령(大都嶺)을 넘어서 집으로 직행(直行)하여 아버지께 말씀들이니, 다소간(多小間)에 구(求)할 수야 있겠지만 금전(金錢)이 문제않이냐 하심으로 아버지 우리부자(父子)의 심부름도 이번이 십중팔구(十中八九)는 마지막이요 주민(住民)의 부담도 마지막인데 종일(終日)가다 문턱 못넘는 격(格)으로 금전(金錢)이 문제될게 무엇입니까하고 그날 밤에 지방유지(地方有志) 몇분을 소집하여 상의(相議)한 결과 즉석(卽席)에서 삼백원(三百元)을 염출하여 그익일(翌日)(음 오월(五月) 팔구일(八九日))경에 아버지께서 삼백원(三百元)을 가지고 이일(二日)만에 전기(前記) 흥경(興京) 백기보(白旗堡) 필자(筆者)와 동창(同窓)인 김관활택(金官活宅)에 가서 유숙(留宿)하시면서 김군(金君)을 흥경시내(興京市內) 영신(永信) 평안(平安) 신협(信協) 삼상회주인(三商會主人)에게 보내여 백기보(白旗堡)로 청(請)하여 의논(議論)한 결과 지하족(地下足) 이백(二百)커레만 구(求)하여 달라고 부탁(付託)하니, 상주(商主)들 말이 우리는 상인(商人)이기 때문에 우리상회(商會)에 없으면 중국인상회(中國人商會)에서도 구(求)하여 들이겠다고 함으로 삼백(三百)원을 겨우 마련하여 왔으니 불족조(不足條)는 책임지고 후일(後日) 꼭 지불(支拂)하겠으니 이백족(二百足)만 포장하여 달라고 한즉, 상주(商主)들 말이 우리는 삼백원(三百元)도 얻은 돈이외다 참으로 감사하외다 만약 계형(桂兄)이 오시지않고 그분들이 직접 한 분이라도 와서 청구(請求)하면 삼백원(三百元)이 어대있오 우리가 곧 돌아가서 한마대(麻袋)에 오십족식(五十足式) 사마대(四麻袋)에 포장하여 통화(通化) 어느 상회(商會)로 송증(送證)을 떼고 마차(馬車)도 우리가 얻어싣고 우리 삼인중(三人中) 누구가 여기까지 몰고 올터이니 아무조록 잘 전하십시요 하였다고 말씀하섯으며, 사일(四日)만에 아버지께서 짐을 실은 마차에 타시고 왔음으로 기(其)밤으로 동리(洞里)친구 십(十)명을 동원(動員)하여 일인당(一人當) 이족(二足)씩 지우고 대도령태산(大都嶺泰山)을 넘어 강전자(江甸子)뒷산(山)에 나려놓고 필자(筆者)는 정위원택(鄭委員宅)에 내려가서 사정을 하니 마침 잘되였다면서 노일령(老逸嶺)은 거리가 너무 멀어서 식량(食糧)운반이 너무 힘들어 상의(相議)한 결과(結果), 부사령(副司令)이 건강하고 전투에도 경험이 많은 자(者)들만 백명(百名)을 선발하여 인솔(引率)하고 여기서 십리(十里)가량 되는 저 산(山)에 있는지 일개월(一個月) 가량(可量)되는데 우리도 그곳까지만 운반하여 주면 된다면서 강전자(江甸子) 청년들을 동원하여 뒷산(山)에 가서 지하족(地下足)을 인수(引收)하여 오고, 필자동리(筆者洞里)에서 온 사람들은 귀가(歸家)시키고 낮을 강전자(江甸子)에서 쉬고 일모(日暮)에 지정장소(指定場所)에 도착(到着)하니 부사령(副司令)이 20명(名)을 인솔(引率)하고 와있음으로 이백족(二百足)이라고 하니, 놀라면서 단시일내(短時日內)에 이렇케 많은 수량을 마련할 줄은 생각(生覺)지 못하였다면서 식량(食糧)도 금년분(今年分)을 의복(衣服)도 신발도 이제는 계소위(桂小尉)보고 주문(注文)할 엄두도 못내겠구먼이요 함으로, 사령관(司令官)좌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두 다 국민(國民)의 돈으로 되는 것인데 심부름도 못해서야 쓰겠읍니까 통화지방(通化地方)에 저의 부자(父子)있는한(限) 무엇이던지 만족(滿足)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最大限) 노력은 할 각오이오니 통신(通信)을 보내십시요 저도 금일(今日)까지 밝은 일월(日月)을 보는것도 양사령(梁司令)의 지극한 사랑과 한사령(韓司令)좌하를 비롯하여 여러전우(戰友)들의 보우(保佑)로 생(生)을 얻은이상(以上) 감(敢)히 결초보은 못할망정 배은(背恩)이야 하겠읍니까? 거리가 멀지 않어서 통신(通信)만 주시면 곳 오겠읍니다, 그럼 몸조심하십시요 하고 작별후(作別後) 정위원택(鄭委員宅)에 와서 자고 아침에 떠나 대도령(大都嶺)을 넘어 귀가(歸家)하여 아버지께 모든 일을 말씀들이였음. 포연탄우( ![]() 이런 상황에서 몇몇 청년(靑年)들이 풀 속으로 초토(焦土)가 된 동리(洞里)에 잠입(潛入)하여 살펴본즉 동포(同胞) 노인(老人)이 사위(四位), 중국인(中國人)이 삼십팔명(三十八名)이 타살(打殺) 혹(或)은 척살(刺殺)되였으며, 한인(韓人)의 소행(所行)이니 자기(自己)들은 무관(無關)할 줄 알고 방심(放心)한 탓으로 중국인(中國人)이 많이 희생되였으며, 참 피의 대가(代價)는커녕 되로 받고 섬으로 준 대가(代價)였다. 이 전투가 남만주(南滿洲)에서 아무 죄없는 민간인(民間人) 사십명(四十名)과 이백오십호(二百五十戶)의 가옥(家屋) 자산(資産) 가축(家畜)이 완전(完全)히 소진(燒盡)된 곳은 일제만주(日帝滿洲)강점후 초유(初有)의 참상이라고 사료(思料)되며, 이 전투가 만주(滿洲) 우리 독립군(獨立軍)의 최후(最後)의 날을 예고(豫告)하는 전투(戰鬪)이기도 하였으며 1934년 음력 칠월(七月) 십구일(十九日) 유명(有名)한 통화현(通化縣) 입봉전투(砬石逢戰鬪)였다. 이와같은 참극을 당하였을망정 타동동포(他洞同胞)들이 식량(食糧)과 목수도구(木手道具)를 가지고 와서 날이 치워가는데 빨리 집을 짓도록 하자고 격려하여 뒷산(山)에 무진장(無盡藏)으로 잇는 나무를 잘라 오고 타동목수(他洞木手)들까지 와서 협력(協力)하여 추석(秋夕)까지 새집에 영을 이였으며 주야(晝夜)겸행(行)하여 동토(凍土)가 되기전에 집이 완성(完成)되어 농사는 지었으니 큰 걱정은 면하였다. 일본군(日本軍)의 예로부터 전(傳)해오는 전통은 적(敵)을 치려 갔다가 오히려 적(敵)에게 인원손실(人員損失)과 중요(重要)무기를 탈취당(奪取當)하면 부대장(部隊長)의 할복(割腹)은 물론(勿論)이고 분취(奮取)된 무기(武器)를 재탈환(再奪還)하기까지는 기부대(其部隊)가 책임(責任)을 면(免)치 못함으로 입봉전투후(砬石逢戰鬪後) 방화(放火)를 끝내는 즉시(卽時) 통화(通化)로 가서 모든 장비와 부대(部隊)를 재(再)편성하여 부대를 자동차(自動車)로 급파(急派)하여 우리 조혁군(朝革軍)의 전도(前途)를 막아 노일령(老逸嶺) 입산(入山)을 불가능(不可能)케하고 통화(通化) 환인(桓仁) 관전(寬甸) 집안(輯安) 사개현(四個縣)의 만군경찰대(滿軍警察隊)를 총동원하여 대병력(大兵力)으로 포위망을 압축하니 고기가 어강(魚綱)에 몰리는 식(式)으로 녹음기(綠陰期)여서 일개월(一個月)여를 이리저리 피하다 못해 결국(結局)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道理)없어 관전현(寬甸縣) 하루하(下淚河) 낮은 산(山)에 내몰리여 적의 증원군은 나종에 안동현(安東縣)에서까지 증원되여 적세(敵勢) 삼(三)·사천(四千)에 아군(我軍) 삼백(三百)여명(名)으로 오분지사(五分之四)가 권총으로 장거리(長距里)사격이 불능(不能)한 반면(反面) 적(敵)은 신식(新式) 장총(長銃)에 풍부(豊富)한 탄약(彈藥)으로 장거리집중(長距里集中)사격으로 전멸(全滅)위기에 사면(四面)포위여서 탈출구(口)를 찾을 수 없어 악전고투(惡戰苦鬪) 삼주야(三晝夜)로, 최후수단(最後手段)으로 아군(我軍) 중(中)에 일어(日語)를 잘 하는 사람이 몇명(名) 있어 만군(滿軍)포위망을 탈출구(口)로 정(定)하고 밤이되여 피아간(彼我間) 혼성(混成)되다시피 근(近)거리에서 일어(日語)로 구(口)호를 크게 외치며 접근하니 여기는 일본군(日本軍)이 와 있으니 우리는 저편으로 가자면서 만군(滿軍)이 다른 곳으로 밀려감으로 요행히 기만술(欺瞞術)이 맞아들어 죽다 남은 인원(人員)이 겨우 탈출하여 본즉, 쇠추(釗秋)부대가 백이삼십명(百二三十名), 활석(活石)부대가 겨우 오십명미만(五十名未滿)이였으며, 조화선중대장이하(趙化善中隊長以下) 백전고참용사(百戰古參勇士)들은 어떠케던지 탈출구(口)를 개척하여 보려고 때로는 적과 육박전을 벌리면서 다 전사(戰死)하였기 때문에 생존(生存)지휘관들은 정부사령(正副司令), 정응선상사(鄭應善上士), 이영술중대장외(李英述中隊長外)에 생각(生覺)이 나지 않으며 이 전투에서 아군전사(我軍戰死) 이백(二百)여명(名)으로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다음으로 남북만주독립운동(南北滿洲獨立運動) 최대최후(最大最後)의 전투(戰鬪)로서, 일제(日帝)만주강점하(下)에서 십배(十倍)가 넘는 적(敵)과 불면불휴(不眠不休) 기아(飢餓)에 삼(三)주야의 악전고투(惡戰苦鬪)에서도 일명(一名)의 포로도 나지않고 전사(戰死)면 전사(戰死) 생존(生存)이면 생존(生存)으로 깨끗이 끝난것은 세계전사상(世界戰史上)에 유례(類例)가 없으리라 사료(思料)되며, 이 전투가 전만주(全滿洲)를 통(通)하여 우리 독립운동(獨立運動)의 최후(最後)의 막(幕)을 나리운 혈전사(血戰史)이며, 이 전투 후에는 만주에서 독립군(獨立軍)으로서 큰 전투는 없엇다. 전만주(全滿洲)에 우리 독립군(獨立軍)의 족적(足跡)과 백골(白骨)이 안널린 곳이 있으랴만은 1934년 음력 팔월(八月) 입칠(卄七), 팔(八), 구일(九日)의 관전현(寬甸縣) 하루하혈전(下淚河血戰)은 우리 독립(獨立)운동의 가장 큰 비극사(史)이다. 이 전투로 인(因)하여 겨우 탈출한 남은 생존자(生存者)들도 탄환(彈丸)은 없다시피 되였고 이제 적이 공격하여 오면 피하는 것이 상책(上策)이였고 때로는 피하다보면 우리의 앞에는 또 다른 적군이 기다리고 있어 이 불상하고 가련(可憐)한 순간 생명(生命)을 노리고 참으로 전후(前後)로 적을 맞을때는 기아(飢餓)와 심리적(心理的) 충격으로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에도 고(古)참노병(老兵)들이 전도(前途)를 개척(開拓)하여 호구(虎口)를 면한 적이 종종 있엇으며, 지금 육십년(六十年)이 다 된 일이였지만 당시전우(當時戰友)들의 기(其)참경을 망막에 그리며 눈물이 흘너 글을 못쓰고 옛추억에 잠긴다. 이 전투가 끝난 후에 적군(敵軍)은 사일(四日)간을 전적지(戰跡地)를 수색(收索)하여 일군(日軍)의 사상자(死傷者)는 실어가고 만군(滿軍)은 사자(死者)는 그자리에 묻고 부상자(負傷者)는 실어갔으며 아군(我軍)도 만군(滿軍)처럼 지방민(地方民)에 의(依)하여 그자리에 매(埋)장하였거니와, 일만군사상자(日滿軍死傷者)도 아군이상(我軍以上)으로 희생되였다고 중국인(中國人)들이 말하였으며, 이 전투에서 적(敵)의 포위망을 공격으로 탈출하지 않고 기만으로 탈출하였기 때문에 일(一), 이십명(二十名)정도 탈출한 것으로 추측(推測)하리라 사료(思料)되며, 아군(我軍)은 사력(死力)을 다하여 이리저리 피하여 여러날만에 노일령(老逸嶺)에 재입산(再入山)하여 아직 일기(日氣)가 과히 차지않은 시절(時節)이여서 몇날동안 전고(戰苦)를 풀었으며, 1934년 음력 구월(九月) 입일(卄日)경이였다. 동년(同年) 음력 십월말(十月末)이나 십일월초(十一月初)로 생각(生覺)되는데 부사령(副司令)이 별주문(別注文)도 없이 한번 만나자는 통지(通知)가 왔음으로, 대전역후(大戰役後)이라 빈손들고 갈수도 없어 무엇을 좀 준비하여 보려고 하여도 필자(筆者)의 거주(居住)부락은 그들 자수(自手)로 초토(焦土)로 만들었으니 일전(一錢)도 염출할 수 없어 타동(他洞)에 가서 기동리유지(其洞里有志) 몇분과 의논(議論)한 결과, 이것은 민(民)부담 그만두고 자기(自己)들 사오인(四五人)이 자(自)부담하여 옥당(玉唐)(옥(玉)수수) 십석(十石)(삼십(三十)원)을 구입하여 여러집에 분배(分配)하여 엿을 만들게 하여 오일(五日)만에 다 만들어 일근(一斤)정도식 떼여 얼게하여 백칠십(百七十)여개(個)를 사인(四人)이 지도록 마대(麻袋)에 분입(分入)하여 지고 앞산을 넘어 강전자(江甸子)에 가서 돌려보내고 필자(筆者)는 일모(日暮)에 강전자(江甸子) 청년(靑年)들에게 짐을 지우고 아침 사시(四時)경에 사첨자근방(沙尖子近方) 민가(民家)에 도착(到着)하니, 산(山)에서 칠명(七名)이 와서 기다림으로 그 사람들께 짐을 바꾸어 지우고 입산(入山)하니 사령관이하(司令官以下) 남은 전우(戰友)들이 반겨 맞아주었지만 그 초췌한 얼골과 전몰(戰沒)한 전우(戰友)들의 환상이 그려지며 울음이 터지는 바람에 한순간 울음의 파도(波濤)가 지난다음 간단한 인사(人事)가 오고간 후, 부사령 말씀이 별 특별한 일은 없지만 세상 일도 좀 알고 싶고 전입봉전투(前砬石逢村戰鬪)는 나의 오산(誤算)으로 많은 인명(人命)피해와 자산손실(資産損失)을 자초(自招)하였고 언젠가는 필연적(必然的)으로 있을 일이였지만 하루하대전투(下漏河大戰鬪)도 조기자초(早期自招)한 결과(結果)이니 국민(國民)에게 미안(未安)한 마음 금(禁)할 길 없으며 더욱이 우리 수족(手足)과 같은 계소위거주부락(桂小尉居住部落)을 초토(焦土)로 만들었으니 지령(至令) 만났으니 말이지 그저 미안(未安)할따름이지 위로(慰勞)의 말을 찾지 못하겠오 함으로, 사령관(司令官)좌하(下) 이 불초(不肖)는 그런 말씀 들으려 온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수십년(十年)을 생명(生命)과 자산(資産)을 바쳐 이시간까지 싸운 것은 대사업(大事業)을 위(爲)하여 소(小)를 희생한것 뿐이며 전투(戰鬪)는 적을 치려다 우리가 반(反)격을 당(當)하는 것은 상대성(相對性) 원리(原理)가 않이겠읍니까 하면서, 말머리를 돌녀서 입봉(砬石逢)서 철수하여 이곳(노일령(老逸嶺))으로 못오고 하루하(下漏河)로 내밀렸읍니까 하니, 한사령(韓司令)말씀이 우리가 입봉(砬石逢)에서 철수하여 대도령(大都嶺)을 넘어 만룡배(灣龍背)까지 저물제 와서 저녁을 먹고 밤으로 파저강(波 ![]() 1934년 음력 십일월(十一月) 입일(卄日)경에 강전자(江甸子) 정원하위원(鄭元河委員)이 오셨음으로 오래간만에 양지기지분(兩知己之分)들이 맛나서 밤이 깊도록 비분한 말씀들에 술잔을 섞으시며, 정위원(鄭委員)이 삼백(三百)원을 내놓으며 형(兄)님 또 수고하서야 되겠읍니다 아우는 흥경(興京)에는 면식(面識)이 그리 넓지 못합니다 하니, 아버지 말씀이 정위원(鄭委員)이나 내게 고생(苦生)이고 무엇이고가 무슨 소용(所用)있는 말이겠오. 죽는 시간까지 할뿐 않이겠오, 산(山)에 있는 사람들이나 우리는 죽기는 꼭같으니 피할수 없는 우리도 순간 생명(生命)아니요? 익일(翌日) 조반후(朝飯後) 정위원(鄭委員)은 집으로, 아버지께서는 흥경(興京)으로 각각(各各) 행차(行次)하시였는데, 사오일(四五日)이면 회정(回程)하시리라 생각(生覺)하였는데, 구일(九日)이 되여도 회정(回程)하시지 않어 심히 초조한 마음으로 날을 보내며 기다리던 중(中) 이주일여(二週日餘)나 걸려서 음력 십이월(十二月) 삼일(三日)에야 마차(馬車)에 짐을 싣고 오심으로 마음풀고 짐을 나리고 물건은 계획수량을 구입하였으며, 아버지 말씀이 연말(年末)이 박두하여 각상회주인(各商會主人)들이 물품대(物品代)를 백미(白米)로 수봉(收捧)하여 싣고 무순(撫順) 봉천(奉天)에 가서 수매(收賣)하여 거래상회(去來商會)에 외상(外上)을 갚고 연말물품(年末物品)을 구입하여 가지고 오는 관계로 자연(自然)히 시일(時日)이 늦어졌다고 말하시며, 이런 물건은 잠시도 집에 유치(留置)할 수 없는 물품(物品)임으로 즉시(卽時) 전하는것이 최상지책(最上之策)이여서 동리(洞里)친구 육명(六名)을 동원하여 지고 대도령(大都嶺)을 넘어 정위원택(鄭委員宅)에 넘겨주고 필자(筆者)도 조반후(朝飯後) 친구들과 같이 귀가(歸家)하였으며 1934년 음력 십이월(十二月) 사일(四日)이였다. 죽다 남은 백오십(百五十)여명(名)의 가련(可憐)한 순간생명(瞬間生命)들이 영일(寧日)없는 포연탄우중(砲煙彈雨中)에서 헐벗고 굶줄임에 지친 악귀(惡鬼)와 같은 군중(群衆)이 빈집도 없는 삭풍이 살을 점이는 설상(雪上)의 고산준령(高山峻嶺)에서 산(山)짐승들과 꼭같이 1934년의 저주스러운 겨울을 보내며, 1935년 음력 1월(月) 1일(日) 아침에 산곡(山谷)에는 눈안개가 피여올으고 먼 들녁 민가(民家)에서 떠올으는 아침연기를 내려다보면서 심장(心臟)이 터질듯한 회한(懷恨)의 분노와 쏟아지는 혈루(血淚)를 억제치 못하여 지방(地方)에서 성의(誠意)를 다하여 보내준 주육(酒肉)을 목이 메여 먹지 못하였다. 이 기록은 1935년 음력 일월(一月) 십일(十日)경 강전자(江甸子) 정위원(鄭委員)이 식(食)량을 가지고 입산(入山)하였을 시(時)에 부사령(副司令)의 말을 듣고 와서 전(傳)하는 말을 기록하는 것임. 1934년 음력 연말(年末)이 되여 필자(筆者)는 조심스러울망정 피신하여 다니면서도 방(房)에서 잠자고 더운 밥먹는데 재산전우(在山戰友)들의 일월(一月)일일(一日)을 생각(生覺)하니 먹은 밥이 나리지 않을 지경이여서 참으로 말하기 거북한 것을 쾌대무자(快大茂子) 삼산의원장(三山醫院長)이자 필자(筆者)의 중학(中學)스승인 장상규선생(張相奎先生)을 또 찾어가서 재산자(在山者)들의 일월(一月)일일(一日)을 말한즉 많은 것이 않이니 평원의원(平原醫院)과 상의(相議)하여 양인(兩人)이 삼십원(三十元)을 즉석에 마련하여 줌으로 참으로 뛰다시피 강전자(江甸子) 정위원택(鄭委員宅)으로 가서 도야지 백이삼십근(百二三十斤) 자리 이두(二頭)와 술 삼십근(三十斤)을 정위원(鄭委員)에게 준비케 하고 김치는 그 동(洞)에서 준비하고 십이월(十二月) 입팔일(卄八日) 저녁에 도야지를 잡아서 여러집에서 소금에 살마서 입구일(卄九日) 저녁에 입산공급(入山供給)토록 정위원(鄭委員)에게 부탁하고 필자(筆者)는 익조(翌朝) 귀가(歸家)하여 아버지께 모든일을 말씀들이였음. 준비하여 놓은 식량(食糧)은 통화(通化) 입봉사변(砬石逢事變) 시(時)부터 근사개월(近四個月)을 출동현지(出動現地)에서 염출하였고, 이백(二百)여명이 전사(戰死)하였기 때문에 준비된 식(食)량으로 1935년 음력 이월(二月)까지 공급(供給)하였으며, 이후(以後)가 문제(問題)여서 정위원(鄭委員)께서 상의(相議)할 사(事) 유(有)하니 필자(筆者)를 자택(自宅)으로 오라는 통지(通知)가 왔음으로 아버지께 식(食)량문제로 오라는 것이 뻔하니 이제는 이곳에서 쥐여짤 곳이 없으니 어찌하여야 되겠읍니까 물으니 아버지께서 한참 앙천심사(仰天深思) 후(後)에 다니다가 불행(不幸)하여 잡히면 죽을 각오로 내가 내일(來日) 떠나서 타지방(他地方)으로 몇날 다녀오겠으니 그동안 방심말고 집에 있어라. 다 같은 대한민족(大韓民族)이요 대한(大韓)을 위(爲)하여 목숨바치고 고생(苦生)할 의무(義務)는 꼭 같은데 하필(何必) 우리만 밤낮으로 이꼴이냐, 삼과유수(三 ![]() ![]() 밤이 깊도록 주배(酒盃)를 석어 설왕설래(說往說來)하면서 취침(醉寢)하고 조반후(朝飯後) 오후(午後) 삼사시(三四時)가 되여 귀가(歸家)하여 아버지께 전후사(前後事)를 세세히 말씀들이였다. 죽어지지 않어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고산준령(高山峻嶺)에서 산(山)짐승과 더부러 1935년의 봄을 맞은 이 기아(飢餓)와 영양실조(失調)에 걸린 움즉이는 해골(骸骨)들은 전원(全員) 수족(手足)에 일(一), 이도(二度)의 동상(凍傷)에 걸렸다. 해동(解冬)이 되니 수족(手足)에시 탈피(脫皮)가 되며 심(甚)한 자(者)는 진물이 질질 나오는 인간(人間)의 정(情)으로는 눈으로 볼 수도 입으로 형용(形容)할 수도 없는 초불달토록 하는 생령(生靈)들은 바로 발 아래는 대압록(大鴨綠)의 성수(聖水)가 흘으고 눈앞에는 손에 잡힐듯이 초산(楚山) 위원(渭原) 벽동사(碧潼寺) 조국(祖國)의 연봉(連峰)들이 손짓하는듯이 보이건만 다 원수의 마제(馬蹄)에 짓눌녀 죽은 듯하다. 아―누구를 위(爲)한 속죄양(贖罪羊)이냐, 동포(同胞)는 아는지?! 이 기록은 1935년 음력 사월(四月) 입일(卄日)경에 식(食)량대(代)를 가지고 입산(入山)하였을 시(時)에 필자(筆者)의 망막에 잡혓던 당시(當時)의 잔영(殘影)을 회상(回想)하면서 오십(五十) 오륙년(五六年)전의 사실(事實)이지만 지금(至今)도 낙루(落淚)로 앞이 보이지 않는다. 1935년 음력 6월말(末)경 전국민부(前國民府) 오중대장(五中隊長)이였던 이종락(李鍾洛)(국민부반대파(國民府反對派), ML당(黨) 이진탁일파(李振鐸一派)로서 중동선방면(中東線方面) 김좌진장군(金佐鎭將軍) 순국후(殉國後) ML당(黨)의 마수(魔手)에서 신민부(新民府) 지반(地盤)을 확보하려고 국민부(國民府)에서 제오중대(第五中隊)를 파견(派遣)하였던바 그지방(地方)에 잠입(潛入)하여 암약(暗躍)하던 장소봉일파(張小峰一派)에게 설득(說得)되여 공산군(共産軍)으로 돌변(突變)하는 바람에 국민부(國民府)에서는 일개중대(一個中隊)를 공산당(共産黨)에게 넘겨준 결과(結果)가 되고 몇개월후(個月後)에 일경(日警)에게 체포(逮浦)되여 육년형(六年刑)을 치르고 출옥(出獄)한 자(者)임) 이 일경(日警)에게 체포되여 육년(六年)의 옥고(獄苦)를 치르고 출옥(出獄)하여 필자(筆者)의 인근부락(隣近部落)인 통화현(通化縣) 영액포촌(英額布村) 자기부모(自己父母)의 집에 와서 이주가량(二週可量) 옥고(獄苦)를 풀면서 필자(筆者)가 집에 와있다는 말을 듣고 찾어왔음으로 소학시절(小學時節) 동창(同窓)이기도 하여 그동안 얼마나 옥고(獄苦)에 시달렸냐며 오래만이니 주회(酒會)를 하면서 이런저런 설왕설래(說往說來) 하던중(中), 종락(鍾洛)이 말이 지금(至今)은 동양(東洋)에서 일본(日本)을 누를 자(者)는 없으니 죽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협력(協力)하여 조금이라도 편(便)히 사는 것이 당연(當然)하지 않겠느냐면서 자기(自己)가 길장방면(吉長方面)에 있을 시(時)에 친구인 장소봉(張小峰)(ML당(黨)으로서 일경(日警)에 귀순(歸順)한 주구(走狗))외(外) 몇몇 친구와 흥경(興京) 서세명가(徐世明家)에서 국민부당군합동(國民府黨軍合同)회의중(中) 체포되였다가 출옥(出獄)한 전국민부(前國民府) 부사령(副司令)이였던 장세용등(張世勇等)이 종락자신(鍾洛自身)이 출옥(出獄)하는 날 형무소문(門) 앞에 와서 기다리다 자신(自身)이 출옥하는 즉시(卽時) 봉천(奉天)으로 동행(同行)하여 조혁군(朝革軍) 귀순(歸順)문제를 이야기함으로 이자신(李自身)도 찬동(讚同)하고 장세용(張世勇) 장소봉등(張小峰等)과 같이 조혁군하산문제(朝革軍下山問題)를 주도(主導)하는 일본인(日本人) 낭인(浪人) 화전경(和田莖)(만주국협화회(滿洲國協和會)를 조직(組織)한 자(者))이란 자(者)를 대면(對面)하여 공작(工作)에 대(對)한 이야기를 하던 중(中), 화전(和田)의 말이 당신들이 상대방(相對方)에게 제시(提示)할 하산조건(下山條件)은 무었이냐며 반문(反問)함으로 장소봉(張小峰)등의 대답(對答)이 어느 농장(農場)에나 보내여 농사(農事)를 짓게 하는 외(外)에 무슨 조건(條件)이 있겠느냐고 대답(對答)한즉 몇사람을 상대(相對)하는 일이라면 가능(可能)하지만 적어도 수백명(百名)의 무장집단(武裝集團)을 하산(下山)시키려면 조건(條件)이 틀렸다면서 그 집단(集團)은 만주 비적집단(集團)처럼 금전(金錢)이나 탐내여 고생(苦生)하는 집단(集團)의 아니고 사상(思想)과 정치적(政治的)으로 행동(行動)하는 집단(集團)이니만치 정치적(政治的)으로 조건(條件)이 충족(充足)되지 않으면 하산공작(下山工作)에 나섯던 당신들에게도 큰불행이 닥칠것도 각오(覺悟)하고 입산(入山)해야 된다면서, 화전자신(和田自身)에게 복안(腹案)이 있는데 지금(至今) 일본(日本)이 만주(滿洲)를 점령하여서 모든 국가권력(國家權力)을 일인(日人)이 쥐고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것이 사실(事實)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일본(日本)의 국방(國防)이 안전(安全)하여진 것은 아니며 일본(日本)의 국방(國防)의 초점은 쏘련이다 하로라도 빨리 만주치안(滿洲治安)만 안정(安定)되면 쏘련연해주(沿海洲)를 점령하여야 되는데 연해주(沿海洲)를 점령하여서는 순 조선민족국가(朝鮮民族國家)를 건설(建設)하여 주어서 나라없는 설음을 씻어주고 모든 국가권력(國家權力)을 일인(日人)이 관여(關與)치 않고 조선인자체(朝鮮人自體)에 맡겨서 자기(自己)의 생존권(生存權)을 확보키 위하여서도 쏘련과 항거(抗拒)할 것이 자연지사(自然之事)가 않이겠느냐면서, 조혁군(朝革軍)을 하산(下山)식히는 즉시(卽時) 만주국(滿洲國)경찰유격대로 개편(改編)식혀 공산당토벌을 하고 그들의 가족전원(家族全員)은 만주개척사(滿洲開拓社) 농장(農場)에 보내여 영농(營農)케한다 이 사업(事業)을 실천(實踐)하는데 있어서 일호(一毫)의 차이(差異)도 없다는 것을 일본낭인(日本浪人)의 신의(信義)로 보장한다(이상(以上)은 조혁군하산(朝革軍下山)에 대(對)한 화전(和田)의 복안조건(腹案條件)임)는 조건(條件)과, 토벌군(討伐軍)을 맛나도 무사통과(無事通過)할 수 있는 증명서(證明書)를 필자(者)에게 보이며 동행입산(同行入山)할 것을 요구(要求)함으로, 필자(筆者)의 말이 너는 이미 전과(前過)를 다 치럿고 안전(安全)한 증명도 소지(所持)하였으니 범이 나래가 돛인 격이지만 네가 아는바 우리부자(父子)는 왜놈의 기록(記錄)에 기명(記名)되여 있는 몸으로 붓잡히면 그 자리에서 결단이 나는 형편(形便)이며 재산자(在山者)들의 의사(意思)도 불지(不知)하고 입산(入山)하엿다가 가슴에 총혈(銃穴)이나 뚤리울 일은 생각(生覺)도 못할 일이며 지금(至今) 산곡(山谷)에는 집도 사람도 없으며 그저 산(山)에서 산(山)으로 목적(目的)과 방향(方向)이 없는 이동(移動)을 매일(每日) 하는 형편(形便)이니 행로(行路)를 알 수가 없고 산근처(山近處)부락에 가서 탐문(探問)하여 가는 도리외(道理外) 없다고 하니, 시간(時間)이 길어저서 주회(酒會)를 폐(閉)하고 이(李)는 귀가(歸家)하였으며, 이(李)도 본래(本來)는 독실한 기독교도(基督敎徒)였고 그의 가족(家族)은 기당시(其當時)에도 독실한 기독교인(基督敎人)들이였는데 이(李)만이 사회(社會)에 뛰여나가 붉은 물이 들고 감옥에서 나오는 즉시(卽時) 왜(倭)의 백색주구(白色走狗)들과 더불어 남은 청춘(靑春)을 끝내 망첫다. 이것이 이(李)가 출옥(出獄)하여와서 필자(筆者)와 처음 주고받은 말이였다. 몇날 후 이(李)의 동생(同生)을 맛나서 입산(入山)하려 갓다는 말을 들었으며 십(十)여일 후(後)에 이(李)가 입산(入山)하였다가 귀가(歸家)하는 길에 필자(筆者)의 집에 들려서 활석(活石) 쇠추(釗秋) 두 사령(司令)이 안부(安否)전하면서 신발을 많이 보내주어서 감사하다면서 그저 피신 잘하라고 부탁하더라기에, 필자(筆者)가 입산(入山)하였던 일은 어떠게 되였는가 물으니 단도직입적(短刀直入的)으로 그 말을 할수가 없어 더운 여름이라 나무아래 앉아서 과거현실(過去現實)을 이야기하며 암시적(暗示的)으로 이야기하니 긍정도 부인(否認)도 하지 않엇다면서 이일간(二日間) 이슬나리는 나무아래서 동숙(同宿)하다 떠나오려고 하면서 다음에 오겠다고 하니 꼭오라고 말하였다고 하였음. 이것이 필자(筆者)와 이종락(李鍾洛)이 이 세상(世上)에서 마지막 대화(對話)였다. 1935년 음력 칠(七)·팔월(八月)에 늦은 장마가 저서 환인지방(桓仁地方)에서 식(食)량을 공급(供給)하기에 골치아플 것을 생각(生覺)하면서 도화지방(道化地方) 필자(筆者)에게 산(山)에서 아무 주문(注文)도 없어 조심스러운 이개월(二個月)을 무사(無事)히 보내며 앞으로 구시월분(九十月分) 식(食)량대(代)를 가지고 입산(入山)할 마음을 졸이면서 날을 보내였다. 일제만주강점후(日帝滿洲强點後) 우리 지반(地盤)이 일일(日日) 축소됨에 따라 지방민(地方民)의 부담(負擔)도 큰 골치거리였다. 동(同)년 음력 팔월(八月) 입일(卄日)경 필자(筆者)가 남겨두었던 식(食)량대(代) 사백원(四百元)을 가지고 만룡배(灣龍背)를 거처 사첨자(沙尖子)에 도착(到着)하여 산(山)에 연락하니 일몰(日沒)에 이명(二名) 전우(戰友)가 와 동행입산(同行入山)하니 여러 전우(戰友)들이 반가히 맞어 주어서 눈시울이 뜨거웠다. 밤을 새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中) 쇠추(釗秋)말이 종락(鍾洛)이 말이 신빙성(信憑性)이 있더냐 함으로 필자(筆者)의 대답(對答)이 그것은 종락(鍾洛)이 보다도 화전(和田)이란 왜놈의 마음에 좌우(左右)되는 것이지 종락일파(鍾洛一派)가 무슨 맥을 하는 것이겠읍니까, 하산(下山)하여 놓코 왜놈이 배신(背信)하면 그만이겠지만 알 수 있읍니까? 저도 종락(鍾洛)을 입산(入山)하였다 귀가(歸家)길에 저의 집에 들린 후(後)로는 만난 적이 없읍니다 하니, 쇠추(釗秋)말이 죽으나 사나 이일을 어찌하면 좋겠오, 계소위(桂小尉)생각에 사령관(司令官)좌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이 중대지사(重大之事)를 어떻케 압니까? 군(軍)의 통수(統帥)로서 결단을 나리는 것이 원리(原理)아니겠읍니까 하니, 결단이고 무엇이고가 어대있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판에 본래(本來)는 국가민족(國家民族)을 위(爲)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코저 악전고투(惡戰苦鬪)하였지만 이제는 동포(同胞)에게 불귀지존재(不貴之存在)로 남어서 시말전도(始末顚倒)된 꼴이고, 그렇게도 불편(不便)한 처지에서도 끌고 다니든 총사령(司令)의 말에 남만주독립(南滿洲獨立)운동의 중요기록(重要記錄)과 상해(上海)임시정부와의 왕복문서(往復文書)들을 싣고 다니였는데 작년(昨年) 하루하(下漏河)격전 시(時)에 만불득기(萬不得己) 태워버리고 말도 다 잃코 이제는 죽으면서도 후세(後世)에 남길 기록(記錄) 한장 없으니 비적집단(集團)과 다를게 무엇이요? 그리고 우리도 인간(人間)인 이상(以上) 계소위(桂小尉)도 불상한 인생(人生)이라고 생각하오, 우리눈외(外) 나면 왜놈이상(以上)으로 신변(身邊)이 위험하다는 것을 자각(自覺)하고 최선(最善)을 다하는 줄도 우리도 다 판단하고 있오 하면서 눈물을 뚝뚝 떠러트리며 목이 메여 말을 중(中)단하며 건너다 보이는 조국(祖國)의 산하(山河)를 응시하시는 부사령(副司令)의 참상(慘狀)을 보며, 필자(筆者)도 눈물과 심장의 고동으로 한 마듸의 대답(對答)도 못하고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하였다. 식량대(食糧代) 사백원(四百元)을 전하니 감사하다면서 피신 잘하라는 부탁외(付託外)에 더 할말이 없다기에 다른 주문(注文)이 있으면 통신(通信)을 보내라며 일명(日明)하여 옴으로 하산(下山)하니, 길이 험하니 인도하여 드리라고 하여 전우(戰友) 이명(二名)이 산어구(山於口)까지 동행(同行)하여 주었으며, 사첨자(沙尖子)에서 조반(朝飯)을 먹고 만룡배(灣龍背)에서 자고 귀가(歸家)하여 아버지께 모든 사정(事情)을 말씀들이였다. 이것으로 조혁군(朝革軍)과 필자(筆者)와의 직접관계(直接關係)와 대화(對話)는 영원(永遠)히 끝낫으며 1935년 음력 팔월(八月) 이십일(二十日)경이였다. | |||||||||||||||||||||||||||||||||||||||||||
1935년 음력 팔월초(八月初)에 이종락(李鍾洛)이 봉천(奉天)으로 가서 장세용(張世勇) 장소봉(張小峰)등과 입산(入山)하였던 결과를 이야기하고 조혁군(朝革軍) 하산(下山) 가능성(可能性)을 화전(和田)에게 보고하고 다시 입산(入山)준비에 들어가면서 이전(以前)에 문사령(文司令)의 전속부관(專屬副官)으로 복무하다 합이빈방면(哈爾濱方面)에서 농사하는 신영신(申永信)이란 자(者)를 대동(帶同)하고 동년(同年) 음력 십일월(十一月)초에 설상(雪上)의 집안현(輯安縣) 노일령(老逸嶺) 남천문(南天門)이란 산곡(山谷)에 종락(鍾洛) 세용(世勇) 영신(永信) 삼명(三名)이 입산(入山)하여 구체적으로 토론(討論)을 하였으나 총사령(司令) 문활석(文活石)이 아무 응답이 없어 회담(會談)은 결렬상태로, 귀로(歸路)에 들어선 일행(一行)은 부사령(副司令) 한쇠추(韓釗秋)도 자기(自己)부대가 있는 산(山)으로 가면서 자기(自己)부대로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여 쇠추(釗秋)부대로 가서 설득(說得)하는 말로 하산(下山)하면 우리는 일본(日本)헌병의 통제받지 않고 하산(下山)즉시 만주국 경찰유격대(遊擊隊)로 개편되여 공산당토벌에 나서고 전(全)가족들은 만주개척사(滿洲開拓社) 농장(農場)에 가서 농사짓게 한다고 조건(條件)을 이야기한즉, 하산(下山)하여 왜헌병놈의 칼에 목이 잘리우는 한(恨)이 있더라도 인간(人間)이라면 하로라도 먹을 것을 먹고 잘데서 자는 것이 인간(人間)이지 누구를 위한 이 비극이며 죽음이냐며 나종에 어이 되든간에 하산(下山)하자고 전원(全員) 찬성하여 쇠추(釗秋)부대는 해결을 보앗으나 총사령이 응답이 없어 쇠추(釗秋)로서는 의리와 직제관계로 어느날 하산(下山)하겠다고 단언할 수 없으니 자신(自身)이 최선(最善)을 다하여 설득(說得)하여 볼터이니 미안(未安)하지만 일차(一次)만 더 수고하여 달라고 하며 1936년 일월말(一月末)이나 이월(二月)초에 삼차입산(三次入山)을 약속(約束)하고, 귀로(歸路)에 종락일행(鍾洛一行)은 사첨자(沙尖子)에서 대기하면서 봉천(奉天)에 연락하여 사후(事後)처리와 산(山)에서 요구(要求)하는 생필품(生必品)을 약간식 공급하며 공작중(工作中)이니 토벌군(討伐軍)의 접근(接近)을 저지하고 있던 중(中) 동년(同年) 음력 십이월말(十二月末)경 총사령(司令)이 인솔(引率)하고 있던 삼십여명(三十餘名)은 전속부관 정응선(鄭應善), 이영술중(李英述中)대장이 인솔(引率)하고 초산(楚山) 연담주재소(蓮潭駐在所)에 투항(投降)함으로서 활석(活石)부부만 남어 다녓으며, 고이허(高而虛) 당수(黨首)는 일상적(日常的)으로 부대근방으로 독행(獨行)하면서 부대와 합류하지 않었으며, 전기(前記) 종락일행(鐘洛一行)은 1936년 이월(二月)초에 삼차(三次) 입산(入山)하여 음력 삼월(三月) 이십일(二十日) 하산(下山)키로 정(定)하고, 사첨자(沙尖子)로 귀래(歸來)하여 음력 삼월(三月) 이십일(二十日) 완전하산(完全下山)하기로 정(定)하였으니 모든 사후(事後)처리와 가족이주(家族移住) 문제등을 완료(完了)한 것을 봉천(奉天)에 연락하며 이제는 산(山)에서 요구(要求)하는 생필품(生必品)을 완전(完全)히 보급(輔給)하며 하산일(下山日)을 기다려 사첨자(沙尖子)로 하산(下山)하는 부대를 기다려 환인(桓仁)헌병대로 인솔(引率)하고 가서 하산(下山) 인사겸 무장을 해제하고 추럭 삼대(三臺)를 요구(要求)하여 분승(分乘)하고 당일(當日)로 통화(通化)로 가서 람루한 의복(衣服)을 갈아 입고 목욕(沐浴) 이발(理髮)을 하고 흑포(黑布)로 단체복(服)과 모자를 만들어 입노라고 오륙일(五六日)동안 있다가 역시(亦是) 추럭 삼대(三臺)에 분(分)승하고 봉길련(奉吉練) 산성진(山城鎭)으로 가서 기차편(汽車便)으로 봉천(奉天)으로 갓다는 말을 전언(傳言)으로 들었으며, 쇠추(釗秋) 하산(下山)하여간지 수일 후(後)에 고이허(高而虛)도 체포되여 환인(桓仁)헌병대에서 처형(處刑)되였으며, 활석부부(活石夫婦)도 체포되여 통화(通化)로 압송(押送)되여 수일간(日間) 심문후(後) 구금되지 않고 이어 동변도개발회사(東邊道開發會社)에 사무원(事務員)으로 해방당시(解放當時)까지 있은 것은 아무리 생각(生覺)하여도 쇠추(釗秋)의 배려(配慮)인 것으로 사료(思料)되며, 하산(下山)부대는 신경 만주경찰학교에 수용(收容)되여 있으면서 쇠추(釗秋) 책임하(下)에 중한인(中韓人) 오륙백(五六百) 가량(可量)을 증모하여 소위(所謂) 최종륜(崔宗崙)부대를 편성하여 길림방면(吉林方面)으로 가서 공산당토벌에 출동(出動)한 것은 사실(事實)인데 이 모든 조혁군(朝革軍) 하산공작이면사(下山工作裡面史)와 하산후(下山後)의 사정(事情)은 조혁군(朝革軍) 하산(下山) 후(後)에는 필자(筆者)도 아버지께서 이제는 할 일 없으니 부자(父子)가 재가(在家)하였다 잡혀죽으면 무엇하느냐며 37년 봄에 집을 떠나라고 강요하시여 부득이 피신하여 다니는 중봉천(中奉天)에서 조혁군(朝革軍)을 하산(下山)시킨 전부사령(前副司令) 장세용(張世勇)을 만나서 주회(酒會)를 하면서 자세(仔細)히 말한 것을 먼 기억을 더듬어 기록하는 바이며 1939년 가을이였다. . | |||||||||||||||||||||||||||||||||||||||||||
필자(筆者)가 강원도(江原道) 산촌(山村)에 살면서 같은 부락에 사는 친구의 자식(子息) 결혼식 차량을 타고 팔십오년(八十五年) 봄 서울 어느 예식장(場)에 왔다가 친척택(親戚宅)에서 이(二)·삼일(三日) 유숙(留宿)하면서 서가(書架)에 있는 이선근(李瑄根)박사가 편찬한『대한국사(大韓國史)』십이책중(十二冊中) 제십책(第十冊)인 <암흑(暗黑)에서 광명(光明)으로>란 책(冊)을 보던중(中), 만주독립운동사(滿洲獨立運動史)는 어느 단체(團體)를 막론하고 시(始)만 기록(記錄)되였을뿐 말(末)은 전연(全然) 기록(記錄)되지 않었으며 그나마도 만주사변(滿洲事變) 당시(當時)까지만 겨우 몇행(行)씩 기록되였으며, 더욱 일제만주강점하(日帝滿洲强點下)의 오(五)·육년간(六年間) 혈사중(血史中)의 혈사(血史)는 완전(完全)히 유락(流落)되여 일행(一行)의 기록(記錄)도 없는 것을 발견하고, 친척집 대학일년생(大學一年生)을 어느 도서관(圖書館)에 동행(同行)하여 국사(國史),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를 기부분(其部分)만을 복사하여 가지고와서 본 결과 만주사변 후에 기록은 젼연 없음으로, 광복사십(光復四十)여년에 아직도 그 사료(史料)가 들어오지 않었으니 필자(筆者)와 투항(投降)하여간 한(韓)부사령간에 대화(對話) 중(中)에 말한 것을 본(本)기록에 이미 기록하였거니와 필자(筆者)의 기록 이상(以上) 더 자세(仔細)한 기록이 발견될 길은 없다고 자부(自負)하면서, 배우지 못한 불학도(不學徒)여서 문장(文章)의 구성(構成)과 미사려구(美辭麗句)는 나열(羅列)치 못하였을망정 어듸까지나 국민(國民)된 사명(使命)감과 신명(身命)을 걸고 기록하는 것이며, 앞으로 이 기록보다 더 자세(仔細)한 기록은 투항(投降)하여 간 몇몇 간부들이 생존(生存)하여 제공한다면 몰으지만 기당시(其當時) 필자연령(筆者年令)이 이십이(二十二)세로 제일수하 (第一手下)였으며 몇몇 간부급들은 필자(筆者)보다 십여년수상(十餘年手上)으로 생존(生存)이 불가능(不可能)하다고 사료(思料)되며 이기록을 묵살하면 남만주독립운동사(南滿洲獨立運動史)는 무미(無尾)운동사가 된다는 것을 엄숙하게 말하여두며, 현행(現行) 국사(國史)나 독립운동사에 보면 만주사변(事變) 당시(當時) 봉황성에 있던 이춘윤(李春潤)이란 중국(中國)의용군대장이 일군(日軍)의 예봉(銳鋒)을 피하여 이만(二萬)의 병력(兵力)을 인솔(引率)하고 심양(瀋陽)철도타고 왔다고 기록(記錄)하였는데 일본(日本)의 예봉을 피하여 도망오는 상황(狀況)에서 심양(瀋陽)은 봉천(奉天)인데 일본(日本)의 만주강점본거지인 봉천(奉天)으로 철도(鐵道)를 타고 왔다는 것과 조혁군사령(朝革軍司令)부를 신빈현(新賓縣) 흥경(興京)에 두엇다는 등(等)이 역사에 뻐졌이 기록(記錄)되여 있는 것을 보고 당시(當時) 사료(史料)를 제공(提供)한 자(者)나 심사한 심사위원님들의 한심(寒心)의 도(度)를 넘은 처사(處事)를 국민(國民)의 일원(一員)으로 공분(公憤)을 금(禁)할 수 없으며, 최후(最後)에 부하(部下)들은 적의 중(重)포위하에 팽개치고 장교들만 장성(長城)을 넘어 광복군(光復軍)에 합류(合流)하였다는 있지도 않은 날조사료(捏造史料)를 제공(提供)한 비양심적(非良心的) 도배(徒輩)들의 오염(汚染)시킨 역사는 교정(校正)되여야 할것으로 사료(思料)하며 졸필(拙筆)을 놓는다.(1987년 1월(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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